흑기사 칼리온 5 완결
● 차 례
아레나의 주인
출전
발각
현자의 마굴
로열 암스
복수
마왕 강림
흑기사
에필로그
아레나의 주인
처음으로 한 생각은 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좌우로, 위아래로, 조금씩…… 조금씩…….
마치 엄마가 품에 안은 아기를 흔들듯, 나뭇잎이 바람에 몸을 맡긴 듯, 포근하고 부드럽게 몸이 흔들렸다.
잠시 후 서서히 감각이 깨어났다.
강렬한 빛이 눈꺼풀을 찔렀다.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리려 하는데 물방울이 후두둑 얼굴 위로 떨어졌다. 입술 안으로 스며든 물방울에서 짭조름한 맛이 났다.
미각과 함께 모든 감각이 일시에 부활했다.
“크윽…….”
참기 힘든 격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힘겹게 눈을 뜨니 푸른 하늘이 보였다. 갈매기 모양의 구름과 진짜 갈매기가 서로 부둥켜안은 채 하늘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몸에 힘이 없었다. 죽을 것처럼 목이 말랐다. 나의 몸은 바람이 일으킨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었다.
“……이곳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독한 피로감에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다시 눈을 감고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순간 번쩍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로열 암스의 주인.
섀도우 헌터 페이든.
“큭!”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은 채 몸을 움직이다 하마터면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을 뻔했다. 양팔을 좌우로 버둥거려 간신히 균형을 되찾았다. 잠깐 움직였을 뿐인데도 격렬한 근육통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어느 정도 기억이 되돌아왔다.
선명하지 않은 흐릿한 영상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나’이자 ‘나’가 아닌 그, 것, 은, 말 그대로 미쳐 날뛰었다. 전신에서 수십 개의 다크 블레이드가 마치 문어 다리처럼 솟아 나와 제멋대로 사방을 후려쳤다.
다크 블레이드는 마력을 강제적으로 주입해 사물의 그릇을 깨뜨려 버리는 악마의 검이었다. 아무것도 벨 수 없지만, 그 어떤 것도 파괴해 버릴 수 있는 파멸의 검이었다.
쾅!
쾅! 쾅!
투사의 시체, 나무, 바위, 땅, 할 것 없이 다크 블레이드가 닿은 모든 것이 폭발했다.
걷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나는 페이든의 뒤를 쫓았다.
간간이 반격을 시도하며 도망치던 페이든이 마침내 구석에 몰렸다. 수십 개의 다크 블레이드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페이든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그림자 속으로 페이든이 사라졌다.
복수의 대상을 잃은 그, 것, 은,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목적지를 잃은 분노가 첩첩이 쌓이다 끝내 폭발했다.
시커먼 빛이 모든 것을 삼켰다. 세상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뇌리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을 마지막으로 흐릿한 기억이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섬을…… 터뜨려 버린 건가…….”
말해 놓고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가 없었다.
몸 안의 마력이 무한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했다.
섬이라고 하는 자연의 그릇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물론 폭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겠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웬만한 왕국의 수도를 혼자서 파괴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소름이 돋았다.
폭주의 후유증인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욱신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따뜻한 바닷물에 몸을 맡겼다. 몸이 파도를 타고 어디론가 둥둥 흘러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왼팔을 들어 올렸다.
“쿠차차.”
분하지만 이놈에겐 빚을 졌다. 카스트로와의 싸움뿐 아니라, 페이든과의 싸움에서도 무수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로열 암스를 이용한 댄싱 블레이드 공격에 온몸이 꿰뚫렸을 때 그대로 절명하지 않은 것은 모두 쿠차차 덕분이었다.
내키진 않지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겠지.
“쿠차차.”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묵묵부답.
왼팔을 흔들어도 보고, 손등을 두드려도 보고, 마력을 흘려 넣어도 봤다. 그렇게 몇 번을 불러 봤지만 건방진 에고 아티팩트는 대답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자고 있는 건가.”
그때였다.
잔잔했던 바닷물이 크게 출렁거렸다.
나는 파도에 튕겨진 후 그대로 머리부터 물속에 처박혔다. 보글거리는 하얀 거품이 얼굴을 덮었다.
팔을 휘저어 물 위로 올라오고 싶었지만 몸 안에는 한 줌의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글부글!
점점 숨이 막혀 왔다. 새하얀 물거품이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순간 뭔가가 허리춤을 잡아챘다. 그것은 강한 힘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기역 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채 물 위로 쑥 올라갔다.
첨벙!
“푸핫!”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사래 들린 듯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허리춤의 그것은 계속해서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위로 끌려 올라갔다.
잠시 후 네 개의 손이 나의 몸을 붙잡았다. 그중 하나가 허리춤의 갈고리를 제거했다. 그러곤 배의 갑판 위로 던져졌다.
철퍼덕!
“크윽!”
나는 갑판 위에 몸을 뉜 채 신음을 삼켰다.
“정말로 살아 있었군.”
낯익은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간신히 실눈을 떴다.
아레나의 지배인 아르테타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섬은 어떻게 된 거지?”
“봤으니 알 텐데.”
원거리 통신 마법이 담긴 눈알을 의식한 말이었다.
아르테타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자네가 부수지 않았나?”
“내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눈알은 아마 폭주의 여파로 부서졌을 것이다. 촉수처럼 흐느적거리던 수십 개의 다크 블레이드 중 하나가 눈알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리라.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나의 힘이 알려져 봐야 이득이 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모르는 일이다. 기억이 나지 않아.”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르테타가 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뭐, 그렇다고 해 두지, 지금은.”
아레나의 지배인이 가볍게 손짓하자 옆에 있던 투사들이 나의 양팔을 붙잡고 거칠게 들어 올렸다. 블러드 배틀의 우승자를 향한 경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행동이었다.
철컹!
철컹!
투사들이 나의 양팔과 양다리에 수갑을 채웠다. 섬뜩한 한기가 손목과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건 무슨 뜻이지?”
나는 수갑을 쳐다보며 물었다.
“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아르테타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가볍게 대답했다.
“웬놈이 블러드 배틀의 최종 승자로 자네를 골랐네. 게다가 그놈은 최강의 투사 자리도 자네에게 배팅했지. 배팅한 금액은 말 그대로 천문학적. 자네의 생존 확률과 최강자가 될 확률이 각각 1할을 넘지 못했으니, 내가 그놈에게 지불해야 할 돈은 그놈이 내기에 건 돈의 최소 100배가 되네. 아레나가 제아무리 대륙 최고의 투기장이라 해도 그런 돈을 지불했다간 파산하고 말 걸세.”
“……투기장의 절대 원칙을 깨겠단 말이냐?”
용병 길드의 절대 원칙은 계약의 배신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용병뿐 아니라 고용주에게도 적용되는 절대적 원칙이었다.
그 원칙이 깨졌을 경우 용병 길드는 그 대상이 누구든 배신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설령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10여 년에 걸친 전쟁 끝에 왕국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 버림으로써 용병 길드는 자신들의 원칙이 절대적임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용병 길드의 절대 원칙에 버금가는 원칙이 투기장에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투기장다운 원칙으로, 내기에서 무엇을 걸건, 얼마를 걸건, 반드시 지불된다는 것이었다. 과거 자신의 목을 판돈으로 걸었던 왕자의 목을 정말로 자름으로써 투기장 역시 자신들의 원칙이 절대적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아르테타는 그 절대 원칙을 깨려 하고 있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네. 이해해 주면 고맙겠군.”
“개소리.”
“솔직히 말해 나도 슬프다네. 평생 지켜 온 원칙을 이제 와 내 손으로 깨뜨려야 하다니. 무척이나 분하고, 그래서 무척이나 궁금해. 자네의 목적이, 아레나를 무너뜨리려는 그 목적이 말이야.”
아르테타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설사 내가 무언가를 계획했다손 치더라도 블러드 배틀의 우승이 노린다고 노려지는 것이었나? 그 정도로 허접한 것이었나? 차라리 나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을 원망하는 게 어때?”
“이 새끼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변에 있던 투사들이 발작했다. 아르테타가 가만히 손을 들어 투사들을 진정시켰다.
“자네 말이 옳아. 모두가 내 불찰이지. 조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을 대비해 카스트로까지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실패였어.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생각했건만 이제 나도 한물간 모양이야. 그래서 책임을 질 생각이네. 아레나를 위기에 빠뜨린 책임을. 자네의 죽음과 함께 말이야.”
“같이 죽겠다는 거냐?”
아르테타는 씨익 웃었다.
“그것도 좋겠지.”
* * *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방이 어두웠고, 빛이라곤 손바닥만 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고작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감옥이었다. 양손과 양다리는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힘을 줘 봤지만 역시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에 힘을 풀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을 먼저 거쳐 간 선배들의 자취가 감옥 곳곳에 남아 있었다. 대부분 핏자국이었고, 간혹 뼈다귀도 보였다.
배의 감옥에서 3일 내내 시달리다 야밤에 몰래 옮겨진 곳이 바로 여기, 아레나에 있는 지하 감옥이었다.
싸늘한 한기가 얇은 옷을 뚫고 들어왔다. 고통과 추위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으…….”
온몸이 아팠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신기하게도 아르테타는 나를 고문하지 않았다. 간혹 투사들의 폭행이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주인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의 발로였을 뿐, 고문은 아니었다.
꼬르륵.
위가 비명을 질렀다.
아르테타는 고문을 하지 않는 대신, 음식도 주지 않았다. 완전한 무관심 속에 서서히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듯했다.
이럴 때 쿠차차라도 있었으면.
“쿠차차.”
나는 조용히 에고 아티팩트의 이름을 불렀다.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쿠차차로부터 치료 마법을 받아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탈출도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폭주 이후로 쿠차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힐! 힐!”
쿠차차가 왼손에 스며든 이후로 쓸 일이 없었던 아티팩트 반지를 오랜만에 사용했다.
조금이나마 기력이 회복되었다.
철그렁!
양손에 힘을 준 후 힘껏 잡아당겼다. 지쳐서 죽어 가고 있긴 했지만 나에게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가 있었다.
철그렁!
몸을 비틀며 이렇게, 저렇게 팔다리를 잡아당겼다.
“헉…… 헉…….”
쇠사슬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긴 S 등급 투사를 죽인 나를 평범한 쇠사슬로 묶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헛된 시도를 포기하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움직임을 멈췄다.
그때였다.
끼이익!
철컹!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아르테타가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리게 했군. 자네와 조금이라도 빨리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아 그럴 수가 없었네. 블러드 배틀에서 우승자와 최강의 투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역사상 처음이니까 말일세. 성난 사람들이 워낙 많아야지. 허허허!”
블러드 배틀 역사상 최초로, 우승과 최강의 투사를 동시에 석권한 본인을 앞에 두고 아르테타는 뻔뻔하게 웃었다.
“내 존재를 지우겠다는 것인가?”
“정체 모를 마법사의 공격으로 죽었다고 했네.”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사람들이 믿을 것 같으냐?”
나는 아레나의 지배인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증거가 있으니까. 블러드 배틀의 무대인 섬이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지 않은가. 설령 내가 드래곤이 나타나 브레스를 쐈다고 변명했어도 결국 그들은 믿었을 걸세. 허허허!”
너털웃음이 차가운 감옥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아르테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 눈빛이 맹수의 그것처럼 사나웠다.
“그만큼 네놈이 한 짓은 터무니없었어.”
예리한 살기가 목젖을 찔렀다.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가공할 기운이 감옥의 공기를 짓눌렀다. S 등급 투사 카스트로에 버금갈 만한 기운이었다.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나.
아르테타의 기운에 대항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기력이 부족해 마력의 움직임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크윽!”
몸속의 마력이 크게 요동치면서 내상을 입고 말았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런! 좀 흥분했군.”
숨 막히게 하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노인을 노려봤다.
“이제 대화를 시작해 보세.”
아르테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지독한 굶주림과 지독한 갈증 속에서 나는 몸부림쳤다. 깨어났다 기절하기를 반복하여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추정할 수 없었다.
아르테타는 다크 블레이드의 정체와 블러드 배틀에 갑자기 난입한 섀도우 헌터와의 관계와 섬을 증발시켜 버린 힘의 근원 등,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의 궁금증을 하나도 해소해 주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르테타는 나를 고문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서서히 죽어 가도록 음식을 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나를 죽여야 한다는 본래의 목적과 인간의 근원적 욕망인 호기심이 적절히 타협을 한 탓이었다.
어쨌든 아르테타의 지적 호기심 덕분에 나는 제법 오랫동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몸 상태는 여전히 안 좋아지고 있었지만, 굳이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몸서리쳐지게 감사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그들이 움직일 것이다.
믿음과 신뢰.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뜨고 난 후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낯선 감정.
그 황홀한 감정.
나는 기다렸다.
믿음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쾅!
폭음과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감옥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정신은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챙!
챙! 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아련히 들려왔다. 패도적인 기운과 엄청난 폭음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감옥이 흔들렸다.
흙먼지가 눈으로 들어가 눈을 깜박거리던 순간.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감옥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새하얀 달빛이 감옥 안을 환히 밝혔다. 서늘한 바람이 감옥의 썩은 냄새를 말끔히 씻어 냈다.
그때였다.
시커먼 그림자가 쑥 튀어나와 감옥 안으로 들어오던 달빛을 가렸다.
“요오! 대장! 살아 있습니까?”
메이어가 달빛을 등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늦었……잖아…….”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부하의 실책을 꾸짖었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추슬렀다. 마렉이 보았다면 필시, 꼴값하네, 하며 비웃었을 테지만, 어쨌든 대장씩이나 됐으면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달이…… 지기 전에…… 이곳을…… 아레나를…… 접수한다.”
“문제없습니다, 대장!”
메이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메이어에게 구출되어 지하 감옥을 빠져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리치가 다가왔다.
“…….”
리치는 말없이 나를 노려봤다. 나를 수백 조각으로 난도질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당신은 목숨을 가지고 장난하길 좋아하는군요. 블러드 배틀이라니…….”
나는 일부러 블러드 배틀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리치에게 말하지 않았다. 무슨 방법을 쓰든 나를 방해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계획은 성공했지만, 리치로선 조금도 달갑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면 회복 마법이나 걸어 줘.”
나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리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한참 만에 리치가 입을 열었다.
“스스로 하십시오.”
“그러고 싶은데 쿠차차가 나오질 않아.”
나는 왼손을 흔들며 말했다.
리치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그는 마치 적선하듯 나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언데드 몬스터이긴 하지만 리치는 최고 수준의 마법사나 다름없었다. 회복 마법의 효과는 쿠차차의 그것을 훨씬 능가했다.
지독한 굶주림과 갈증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통이 봄날에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몸을 움직였다. 페이든의 공격에 온몸이 꿰뚫린 것치고는 몸이 상당히 가벼웠다. 끊어졌던 근육과 부러진 뼈 역시 거의 아문 상태였다.
“음…….”
리치의 마법이 제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여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았다는 성녀쯤 돼야 간신히 기대해 볼 만한, 말 그대로 기적과 같은 회복력이었다.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다시 배가 요동쳤다.
꼬르륵!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뭘 좀 먹어야겠군.”
나는 메이어를 닦달해 그의 비상식량인 육포와 물을 강탈했다.
육포를 조그맣게 잘라 입속에서 한참 우물거린 후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렇게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나자 꼬르륵 소리가 사라졌다.
서서히 마력을 일으켰다. 마력이 몸 곳곳을 거침없이 흘렀다.
“굳이 대장이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메이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만류했다.
“부하들이 싸우고 있는데 대장이란 작자가 뒤에 숨어 있을 순 없지.”
“부하들 발목을 잡는 대장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나의 호기로운 제안을 메이어가 완곡하게 거절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지.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는 말도 있고.”
내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항변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코웃음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진리는 하나.
말보다는 행동.
나는 쇳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대, 대장!”
메이어가 다급하게 뒤쫓아왔다.
챙!
“죽어랏! 이 배신자들아!”
“너나 죽어! 내가 어떻게 수련했는지 알아! 억울해서 못 죽어!”
수십 명의 투사들이 서로 뒤엉킨 채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그 격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카스트로와의 싸움에서 박살 났던 오른팔이 멀쩡하게 부활해 있었다. 쿠차차인지, 아니면 폭주한 마력의 힘인지, 누구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왕 고쳐진 거 고맙게 써먹기로 했다.
나는 오른 주먹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투기를 잠재우는 것은 더 커다란 투기.
광기를 잠재우는 것은 더 커다란 광기.
그리고 투사를 침묵케 하는 것은…… 압도적인 강함.
“오러 피스트.”
칠흑 같은 어둠이 주먹에 서렸다. 나는 주먹을 들었고, 그대로 바닥을 내리쳤다.
콰앙!
드드드드!
힘을 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휘이잉!
“으헉!”
충격의 파편이 거친 바람과 함께 투사들을 덮쳤다. 재수 없게 내 근처에 있었던 투사들이 뽑힌 잡초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모든 투사들이 싸움을 멈춘 채 나를 돌아봤다. 절반은 경악했고, 절반은 경탄했다.
“웬, 웬 놈이냐!”
“대장!”
절반은 나의 정체를 물었고, 절반은 나의 등장을 반갑게 반겼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나를 모르는 절반을 향해 대답을 하기 직전.
쩌적!
쩌저적!
내 주먹이 닿았던 곳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균열이 확장되었다.
“어……어?”
모든 투사들이 동작을 멈춘 채 눈알만 데구르르 굴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콰과광!
“헉! 바닥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잽싸게 뒤쪽으로 점프하여 지하 감옥으로 다시 떨어지는 불상사를 막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투사들은 나처럼 날래지 못했다.
“제에엔자앙!”
“대애애자아앙!”
절반은 욕설을 내질렀고, 절반은 나를 애처롭게 불렀다. 양쪽 모두 사이좋게 어두운 무저갱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메이어의 시선이 자못 따갑다.
“이 정도론 아무도 안 죽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메이어를 향해 변명하듯 말했다.
“부하의 발목을 붙잡는 대장.”
나의 변명에 기가 막힌 듯 메이어가 중얼거렸다.
메이어의 따가운 눈빛을 피해 쇳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얼른 몸을 날렸다.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자 귀족들이 관람하는 특별석이 나왔다. 특별석은 넓은 방으로 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투사들이 살벌한 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전의 일격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바닥이 아닌 옆 벽면을 오러 피스트로 후려쳤다.
꽝!
싸움이 일시에 멈췄다. 놀란 투사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항복해라.”
나는 낮은 목소리로 아레나의 투사들을 위협했다.
“대, 대장!”
“역시 살아 있었어!”
“내가 뭐라고 그랬어! 하하하!”
사실 적무도의 투사들과 나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나 의리 같은 감정이 별로 없었다. 그런 감정이 싹틀 만큼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 번 적으로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나쁜 감정이 더 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보며 환호하는 부하들의 얼굴에 거짓은 없었다. 단지 내가 대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생환을 기뻐하는 부하들을 보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네놈은 누구냐!”
아레나의 투사 중 하나가 외쳤다.
나는 동요하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물음에 답했다.
“나는 칼리온. 블러드 배틀의 승자이자 최강의 투사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레나의 투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거, 거짓말! 블러드 배틀에 참가한 투사들은 모두 죽었다고 들었는데!”
“네가 들은 말이 거짓말이다. 보시다시피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그때였다.
그르르!
굉음과 함께 천장이 내려앉았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투사들이 떨어지는 돌덩이를 피하느라 난리 법석을 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천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특별석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아!”
적아 할 것 없이 모든 투사들이 길게 비명을 지르며 지하 감옥으로 떨어졌다.
나는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메이어를 보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원흉을 노려봤다.
“큭! 망할 늙은이! 뭘 먹고 살았기에 이렇게 힘이 센 거지!”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던 원흉이 이윽고 나를 발견했다.
“응? 칼리온? 네가 여기 웬일이냐?”
농담이 아니었다. 마렉의 표정에는 정말로 궁금함이 묻어 있었다.
이놈은 나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단순히 때려 부수기 위해 온 것이다. 이놈은 내가 블러드 배틀에 참가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은 좀 바쁘니까 대화는 좀 나중에 하자. 으차!”
마렉이 공중제비를 돌더니 천장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잠시 후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폭음이 울렸다.
“올라가 보자.”
나는 메이어와 함께 마렉이 들어갔던 천장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천장 위에는 넓은 방이 있었다. 아레나의 지배인인 아르테타의 방이 분명했다.
휘익!
콰광!
“죽어랏!”
마렉과 아르테타가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마렉의 성격상 자신의 싸움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리 없지만, 이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부하들이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빨리 적의 수장을 꺾어 싸움을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메이어.”
나는 싸움을 감상하고 있는 메이어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부대장이 싫어할 텐데요.”
메이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토를 달았다.
“저놈이 싫어하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지? 문제는 그게 아닐 텐데. 안 그래?”
“대장 말이 맞습니다.”
메이어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러곤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동시에 마렉이 버럭 외쳤다.
“방해하지 마, 메이어! 죽는다!”
“대장 명령입니다! 저도 어쩔 수 없다고요!”
메이어가 비겁하게 내 핑계를 댔다.
“칼리온! 이놈을 당장 치워! 싸움에 방해된다고!”
마렉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합공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마렉과 호각을 이루던 아르테타였기에 메이어가 합공을 시작하자마자 금세 손발이 뒤엉켰다.
서걱!
결국 메이어의 검이 아르테타의 가슴을 갈랐다. 치명적인 부상이었고,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신 나게 싸우기는커녕 방해꾼이 난입했고, 최후의 일격조차 양보하게 된 마렉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칼리온!”
마렉이 사나운 얼굴로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나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싸우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나는 씩씩거리고 있는 마렉을 도발했다. 메이어가 긴장한 채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쳇! 제길!”
한참을 씩씩거리던 마렉이 토라진 소녀처럼 획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괜찮을까요?”
조심스럽게 메이어가 물었다.
“멍청한 놈이니 곧 잊어버리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질문의 목적은 마렉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아니, 저 말입니다. 괜찮을까요?”
메이어가 다시 물었다.
“저놈이 멍청한 놈이길 열심히 기도해.”
메이어가 배신당한 아녀자 같은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쓰러져 있는 아르테타에게 다가갔다.
아르테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메이어의 검이 베고 지나간 자리에서 피가 흥건히 흘러나왔다.
“진즉에 자네를 죽였어야 했는데.”
죽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테타는 의외로 담담했다. 역시 아레나의 수장다웠다.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걸.”
예전에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죽었어도 나의 부하들은 이곳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아레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최소한 아레나의 명예는 지켰을 테지.”
아르테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박이나 하는 투기장이 네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뜻이냐?”
“누군가에겐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장소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겐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지. 크크크, 쿨럭!”
아레나의 늙은 지배인이 시커멓게 죽은피를 토했다.
나는 리치를 제외한 모든 투사들을 방에서 쫓아냈다.
“네게 기회를 주지.”
아르테타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지금 상처로 보아 성녀가 아닌 이상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차피 죽을 거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것이나 지키는 게 어때?”
“무슨 말이지?”
나는 리치에게 신호를 보냈다.
리치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동시에 숨기고 있던 기운을 해방했다. 검은 불꽃이 눈동자에서 일렁거렸다. 자연의 순리를 거역한 사악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서, 설마, 마족?”
자신의 죽음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아르테타의 평정심이 일거에 무너졌다.
“평범한 마족이 아니야. 리치다.”
“리치! 네놈 설마…….”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답게 아르테타는 눈치가 빨랐다.
“나를 인형으로 만들 셈이냐!”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죽어 가는 사람답지 않게 온몸에서 사나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제아무리 아르테타가 뱀처럼 독한 마음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역시 인간이었다. 인간인 이상 안식의 권리가 파괴되는 것에 무조건적인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죽은 자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은 여신조차 금지한 금기 중의 금기였다.
하지만 나는 아르테타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만약 아르테타가 자신의 말처럼 이곳, 아레나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인형이 되어 달라는 나의 제안을.
나는 아르테타의 귀에 앞으로 내가 벌일 계획을 속삭였다.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때문인지 아니면 귓가에 속삭이는 내 말 때문인지, 아르테타의 얼굴빛이 시시각각 변했다.
“보지 못하고 죽는 게 한이군. 대륙 제일을 넘어 역사상 전무후무한 투기장이라…….”
나의 계획을 들은 아르테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답은?”
“물론 예스다. 자네에게 진심으로 그만한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군. 그 정도 대가라면 내 몸뚱이 따위야 얼마든지 내줄 수 있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블러드 배틀이란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온 최강의 투사다.”
나의 당당한 선언에 아르테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그렇군. 행운을 빌어 주지. 지옥에서.”
그 말을 끝으로 아르테타가 눈을 감았다. 미약하게 오르내리던 가슴이 움직임을 멈췄다.
“왜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는 겁니까? 그냥 만들어 버려도 되는데.”
아르테타를 인형으로 만들기 위한 마법진을 준비하며 리치가 물었다.
리치의 의문은 당연했다. 인형을 만드는 데 허락이 필요했다면 리치가 최악의 마족으로 불릴 이유가 없었다.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지. 자신이 인형이 되는 것을 허락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리치니까 잘 알 텐데, 두 인형의 차이점을.”
“겨우 그것 때문에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는 겁니까? 차이점은 고작해야 인형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것뿐일 텐데요?”
“그래. 고작해야 살아 있을 때의 사소한 버릇을 흉내 내 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지.”
말한 것처럼 작은 차이였다.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차이였다.
나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부하들의 얼굴을 보고 새삼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를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실패 가능성을 최소로 줄여야 했다. 인간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노력해야 했다. 그것이 나에게 목숨을 맡긴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시작해.”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리치에게 말했다.
아르테타는 죽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가장 가까이서 그를 보필하는 비서조차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결과, 아르테타는 제작자인 리치조차 감탄할 만큼, 완벽한 인형이 되었다.
인형 아르테타가 한 최초의 일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경기장 한가운데 서서 수많은 관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관객 여러분, 저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빨리 경기나 시작하라고 소리를 지르던 관객들이 하나 둘 입을 다물었다.
인형 아르테타는 생전의 아르테타와 마찬가지로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나열하지 않았다.
단지 해야 할 말만 했을 뿐이다.
“저는 투기장의 절대 원칙을 어기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블러드 배틀의 승자는 죽지 않았습니다. 블러드 배틀의 승자는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사실을 은폐한 이유 그리고 은폐를 번복한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보다 궁금해했던 것은 바로, 블러드 배틀의 승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아르테타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않은 채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폭동에 준하는 소동이 일어났지만 끝내 사람들은 블러드 배틀의 승자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극대화시켜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는 것.
그것이 웰런의 계획이었고, 그 계획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들어맞았다.
아르테타의 발언으로부터 10여 일.
아레나는 물론 제국의 수도 전체가 블러드 배틀의 승자를 놓고 떠들썩했다. 원거리 통신 마법인 눈알을 통해 블러드 배틀을 관람한 상인과 귀족 역시 승자를 알지 못했다.
아레나는 모든 것을 도박화하는 곳이었고, 블러드 배틀의 승자를 맞히는 것은 그 조건에 한없이 부합했다.
아르테타의 기억을 읽은 결과, 내가 눈알을 없앤 것은 폭주를 하고 난 후였지만, 사실 눈알의 고유 기능이 멈춘 것은 훨씬 전이었다.
생존해 있는 투사의 수가 20명이 되었을 때, 눈알의 전송 마법이 끊겼다. 나와 카스트로의 연합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남은 투사들이 끼리끼리 힘을 합치기 시작했을 즈음일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전송 마법이 저장 마법으로 전환되었다. 차후에 이어질 도박의 근거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아르테타는 블러드 배틀의 승자가 죽었다고 하는 희대의 사기극을 계획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사후의 안식조차 제대로 누릴 수 없는 리치의 인형이 됐지만 말이다.
해가 지자 기다렸다는 듯 눈송이가 떨어졌다.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제국은 사시사철이 겨울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따뜻한 날이라 해도 남쪽 왕국의 겨울보다 기온이 낮았다.
땅거미가 눈과 함께 거리에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아레나 옆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민들레 꽃씨처럼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송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지독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마음 편히 쉬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그런 날이 있었나 싶을 만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내 인생도 참 괴롭구나, 하며 자괴감에 젖으려 할 때.
다그닥!
다그닥!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오셨군.”
수십 개의 마차가 수백 명에 달하는 용병에 둘러싸인 채 천천히 아레나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평소에는 구경할 수 없는 장대한 행렬에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눈을 빛냈다.
“웬 마차들이 이렇게 많아? 오늘 큰 경기라도 있나?”
“큰 경기는 무슨. 오늘은 아예 한 경기도 안 열린다고.”
“아레나에서 경기를 안 한다고? 살다 보니 세상에 그런 날도 오는군. 그럼 대체 저 마차들은 뭐야?”
“낸들 알아?”
잠시 후 흥미를 잃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태양이 사라진 하늘에 홀로 떠 있는 하현달이 고즈넉했다. 부드러운 달빛이 점점 차가워지는 밤공기를 어루만졌다. 작은 눈송이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있었다.
한기가 옷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왼손을 쓰다듬으며 마력을 흘려 넣었다.
역시나 묵묵부답.
작게 한숨을 쉰 후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시 한 번 한숨을 쉰 후 나는 아레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쿠차차의 보온 마법이 제법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 * *
나는 커다란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남자들의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회의를 빙자한 고함과 욕설이 수시로 날아다녔다.
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일지 눈에 선했다. 상처 입은 호랑이를 물어뜯기 위해 승냥이들이 떼로 달려들고 있을 것이다.
승냥이 중 한 마리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블러드 배틀의 결과를 속이다니! 투기장 연합의 수장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비단 아레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투기장이 도박의 결과를 속였다는 것으로 인해 투기장 전체의 위신이 어마어마하게 손상되었습니다. 투기장 연합의 수장을 맡고 있는 아르테타 님이라면 잘 아실 테지요?”
“책임을 지겠네.”
“어떻게 말입니까? 이미 떨어진 투기장의 위신을 어떻게 다시 세운단 말입니까? 쌓기는 어렵고 무너지기는 쉬운 게 바로 신용이란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승냥이들이 노쇠한 호랑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는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투기장 연합의 수장 자리를 내놓겠네.”
원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냥이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랑이를 더욱 핍박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책임을…….”
아르테타의 목소리가 남자의 목소리를 잘랐다.
“그리고 아레나를 포기하겠네.”
“…….”
문 너머가 잠잠해졌다. 한참 만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테타 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자네는 내가 왜 투기장의 절대 원칙을 어기고 거짓말을 했는지 아는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투기장을 사랑하신 아르테타 님이 아니십니까. 솔직히 말해 아르테타 님이 투기장의 절대 원칙을 어겼다는 것을 지금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맞네. 나는 투기장을 그리고 아레나를 사랑했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투기장의 절대 원칙까지 저버리고 말았네. 나는 아레나를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거든.”
“아레나를 주다니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블러드 배틀에 무려 100만 루덴을 배팅한 사람이 있네. 게다가 그 사람은 블러드 배틀의 승자와 최강의 투사가 같은 사람이 될 거란 것에 100만 루덴을 전부 걸었지.”
“바보 같은 놈이 아닙니까! 여태까지 한 번도 승자와 최강의 투사가 동일 인물인 적이 없었거늘! 하하하!”
비웃음 소리가 자못 신경질적이었다.
문 너머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투기장 연합의 간부들이었다. 절대로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르테타의 짧은 서두에서 뒷말을 유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적 능력과 사회적 경험을 갖춘 상류 인사들이었다.
다만 그 결과를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아르테타가 그들의 불안에 쐐기를 박았다.
“블러드 배틀의 결과는…… 자네들도 짐작하고 있다시피 정말 최악의 결과가 나왔네.”
“저, 정말로 사상 최초로 승자와 최강의 투사가 동일 인물이 되었단 말입니까?”
웅성거림이 커졌다. 놀람의 경악성과 이것도 거짓말이 아니냐는 의심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소란을 잠재운 것은 역시 아르테타였다.
“덕분에 아레나가 그 사람에게 지급해야 할 보상금은 무려 100배인 1억 루덴이 되었네.”
“헉!”
“1억 루덴!”
이번에는 모두 한목소리로 경악했다.
“아레나가 제아무리 대륙 최고의 투기장이라 하지만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둘뿐이었네. 파산을 인정하고 아레나를 넘기든가, 아니면 결과를 인정하지 않든가. 부끄럽게도 난 후자를 선택하고 말았네. 이제라도 바로 잡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한참 만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음모가 아닐까요? 승부 조작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 역시 경기의 일부임을 잊었는가. 밝혀내지 못한 사기는 사기가 아닐세. 그리고 이 영상을 보면 사기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을 걸세.”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나의 진동이 느껴졌다. 곧이어 폭발음과 검이 부딪치는 쇳소리와 비명 등 요란한 싸움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블러드 배틀의 마지막이 담긴 눈알이 자신이 본 것을 토해 내고 있는 것이었다.
소리만 듣고 있어도 그때의, 카스트로와의 전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몸 근육이 꿈틀거릴 만큼 힘든 싸움이었다.
소리는 다크 블레이드를 맞은 카스트로의 몸이 폭발하는 곳에서 멈췄다. 페이든의 습격과 나의 폭주를 숨기기 위해 그쯤에서 편집한 것이었다.
“카, 카스트로가 지다니!”
“저 무지막지한 S 등급 투사 카스트로가 새파란 애송이에게 지다니! 말도 안 돼!”
문 너머의 소란이 극에 달했다. 소란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만큼 S 등급의 투사는 이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소란이 진정되지 않자 결국 아르테타가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카스트로는 네 명의 S 등급 투사 중에서도 최강자라 불렸던 투사네. 자네들은 한낱 사기꾼이 카스트로를 죽일 수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카스트로가 사기에 가담하기 위해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침묵 끝에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아르테타 님이 아레나를 넘기실 필요까지야…….”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자네가 대신 갚아 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1억 루덴을?”
“…….”
다시 침묵이 시작됐다.
갈 곳 잃은 혼란과 분노가 마침내 사냥감을 찾아냈다.
“대체 100만 루덴을 배팅한 미친놈이 누굽니까!”
드디어 내가 등장할 시간이 찾아왔다.
“아레나의 새로운 주인을 소개하지. 들어오게.”
나는 문을 열었다.
거의 100여 개에 달하는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화아악!
마력을 일으켰다.
지금의 나는 평범한 투사가 아니다. 블러드 배틀의 승자와 최강의 투사를 사상 최초로 동시에 석권한 투사 중의 투사였다. 그리고 대륙 최고의 투기장 아레나의 새로운 주인이었다.
내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자라는 것을 이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들개처럼 나를 물어뜯으려 할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압도적인 기세를 뿌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흡!”
원탁에 빙 둘러앉아 있던 투기장 연합의 간부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소개하지. 블러드 배틀의 유일한 생존자 흑풍이네.”
투기장 연합의 간부들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굴러 온 돌이었고, 비록 카스트로를 쓰러뜨렸다고는 하지만 사기꾼일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테타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나는 무사히 간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아르테타 님이 수장의 자리에서 물러나셨지만 저는 여전히 아르테타 님이 투기장 연합의 수장에 가장 어울리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의 위치가 정해지자마자 한 간부가 아르테타의 얼굴에 금칠을 하며 그의 복귀를 선동했다.
속셈이야 뻔했다. 아르테타를 이용해 나를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큰 잘못을 저지른 아르테타라면 손안에 두고 조종하기도 쉬울 터이니 일석이조였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아르테타는 수장의 자리에서 내려온 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배신자의 처단뿐이군요.”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간부들의 얼굴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저를 투기장 연합에 받아 준 보답으로 적무도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에 저와 아레나가 적극적으로 앞장서겠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간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투기장의 재산은 투사였다. 때문에 그들을 이끌고 적무도로 향하는 것은 승패를 떠나 그 자체로 막대한 손실이나 다름없었다.
그 손실을 나와 아레나가 떠맡겠다고 했으니 기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새로 온 친구가 뭘 좀 아는군.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블러드 배틀의 승자답게 아주 배포가 큽니다. 하하하!”
그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투기장 연합의 긴급회의가 막을 내렸다.
웃으며 돌아가는 간부들을 배웅하며 나 역시 웃었다.
지금 실컷 웃어 둬라. 다음에 만날 때는 결코 웃을 수 없을 테니.
나는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아레나 앞에 서 있었다.
계속 내리는 함박눈으로 인해 세상이 온통 하얗다. 차가운 달빛이 백설 위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눈으로 덮인 아레나의 건물이 달빛 아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스레 가슴이 떨려 왔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됐군.”
여태껏 투기장 연합의 간부들과 가짜 회의를 가졌으니 이제 진짜 회의를 할 시간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달빛이 스며든 아레나의 복도가 제법 환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