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레나 (33/45)

아레나

“하아! 하아!”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구름이 입에서 뭉게뭉게 피어났다.

아무래도 사기를 당했나 보다.

그 어떤 더위도, 그 어떤 추위도 막아 준다던 마법의 로브가 제 기능을 상실했다. 살을 벨 듯한 차가운 바람이 로브를 뚫고 들어와 몸통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형님, 제가 생각할 땐 그 로브는 아마 기한이 정해져 있는 아티팩트 같습니다.”

웰런이 느긋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쿠차차의 가호를 받고 있는 그는 마치 예전의 나와 같았다.

“형님은 큰일을 해야 할 몸입니다. 이 정도 추위로 부산을 떨다니요. 형님답지 않습니다.”

“다쳐!”

젠장!

입이 얼어서 발음이 샜다.

웰런이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 모습을 보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몸이 좀 따뜻해졌다.

“근데 기한이 정해진 아티팩트? 아티팩트는 모두 영구적인 게 아니었나?”

“영구적인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선 뛰어난 마법사와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티팩트는 횟수, 기간에 제한이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쿠차차 님이야말로 정말 대단합니다. 에고 아티팩트니까요.”

“역시 이 몸을 알아주는 건 너뿐이로군. 하하하!”

쿠차차는 웃음을 터뜨리며 웰런의 몸에 보온 마법을 한 번 더 걸어 주었다. 웰런은 쿠차차에게 감사를 표하며 또 아부를 날렸고, 쿠차차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보다 성능이 좋은 보온 마법을 걸어 주었다.

그렇게 주고받는 꼴이 아니꼬워 순간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혹시 알아? 쿠차차도 어느 순간 먹통이 되어 버릴지.”

“감히 이 몸을 그런 허접한 아티팩트와 비교하다니!”

속으로 아차 싶었다.

쿠차차를 구슬려 보온 마법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그를 화내게 하다니.

“휴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다가 쿠차차의 눈치나 보는 신세가 됐는지 마음이 암담했다.

휘이잉!

칼바람이 불었다.

“에취!”

몸이 으스스 떨리며 재채기가 나왔다.

“형님, 바람이 참 시원하군요.”

웰런이 너스레를 떨며 로브를 벗어 팔에 걸쳤다.

“좀 더워서 그러는데 제 로브 드릴까요?”

나는 웰런을 노려보다…… 획, 로브를 낚아챘다. 자존심은 추위 앞에 꽁꽁 얼어 버렸다.

아르센 제국.

위대한 황제 아칼레스가 클레모니아 대륙을 통일한 후 세운 최초의 제국.

수백 년이 흐르면서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아르센은 클레모니아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여전히 강력한 나라였다. 클레모니아 대륙의 모든 나라 중 유일하게 제국의 호칭을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 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어마어마하군.”

“그렇군요, 형님. 저도 딱히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하군요.”

인간보다 수십 배가 큰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압도적인 크기에 할 말을 잃었다.

“닫을 수나 있는지 모르겠군.”

“닫지 못할 문을 뭐하러 만드오? 이 문이 바로 ‘전쟁의 문’이오. 지금처럼 평화로울 때는 활짝 열려 있지만, 아르센의 기사와 병사 들이 전쟁터로 출전하면 꽉 닫힌다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열리지 않지.”

옆에서 같이 성문을 통과하던 노인이 알은체를 하며 말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전쟁의 문이었군요. 그런데 이 문이 닫히면 제국을 드나드는 데 불편하지 않습니까? 특히 이곳은 상단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 아닙니까? 상단이 들어가지 못하면 제국 사람들도 물건을 구하는 데 힘이 많이 들 텐데요.”

웰런의 말에 노인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 정도야 당연히 감수해야지! 제국의 병사가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 정도도 참지 못할까. 참지 못하는 놈이 있으면 그놈은 자랑스러운 제국인이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그건 그렇고, 보아하니 제국에 처음 온 듯한데 그렇게 두리번거리면 촌놈 소리 들으니 조심하시오.”

노인과 헤어진 후 우리는 여관을 찾았다.

여관의 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의 진원지는 난로였다. 난로는 여관 구석에서 불꽃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방을 하나 얻으면서 여관 아이를 시켜 목욕물을 받게 했다.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몸을 누인 채 얼었던 몸과 마음을 녹였다.

웰런과 교대로 목욕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우선 저택을 하나 구입한다. 크면 클수록 좋고, 또한 구석진 곳에 있을수록 좋다. 위치는 대략…….”

나는 제국의 지도를 살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제국의 변방 마을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봤을 때 저택은, 제국의 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안쪽에 마련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나는 지도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쯤이 좋겠군. 물론 정확히 이곳일 필요는 없어. 대략 이 정도 거리면 된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웰런이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했다.

“저택을 구입하거나, 혹은 위험이 닥치거든 이 구슬을 깨뜨려라. 그럼 쿠차차가 너의 위치를 알아낼 것이다.”

나는 투명한 구슬을 웰런에게 주었다.

구슬은 쿠차차가 만든 것으로, 위치 추적과 함께 텔레포트해야 할 좌표를 알려 주는 일종의 일회용 아티팩트였다.

웰런은 구슬을 품 안으로 깊숙이 넣었다.

“그럼 형님과 저는 여기서 헤어지는 겁니까?”

“그래. 네가 저택을 구할 동안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입니까?”

“낚시를 하기 위해선 떡밥이 필요한 법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웰런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럼 형님, 조심하십시오.”

웰런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제법 뜨거워 나 역시 가슴이 진탕 흔들렸다.

“시작한다.”

쿠차차가 하품을 하며 분위기를 깨뜨렸다.

나는 쓰게 웃으며 웰런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텔레포트!”

웰런의 발밑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빠른 속도로 그려졌다.

화악!

문양이 뿜어낸 빛이 웰런을 감쌌다. 웰런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나이트워커의 암살자로부터 웰런을 보호하며, 동시에 따로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텔레포트 이동이었다.

놈들이 짐작할 수 없는 먼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한다면, 제아무리 대륙 최악의 암살 집단이라 해도 쉽게 쫓아올 수 없을 터였다.

“그럼 나도 가 볼까.”

“텔레포트!”

쿠차차가 마법을 시전했다.

새하얀 빛이 몸을 덮었다.

혹시나 나를 감시하고 있을 적들을 향해 가볍게 손짓을 해 주었다.

“굿 바이!”

화악!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풍경이 바뀌었다.

* * *

며칠 째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은 쌓이고 쌓여 꽁꽁 얼어붙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폭설이 모든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 버렸다.

뽀드득.

뽀드득.

나는 하얀 화선지에 발자국이라는 그림을 그리며 눈으로 뒤덮인 산을 홀로 걷고 있었다.

“하아…….”

입김과 함께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그래, 주인? 지쳤으면 이 몸께서 회복 마법을…….”

“됐다. 그냥 내 신세가 처량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마라.”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쿠차차의 말을 잘랐다. 평소와 달리 쿠차차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 이 몸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탁만 해.”

“부탁?”

“아, 아니다. 그냥 말만 해. 주인이 원하는 게 곧 이 몸이 원하는 것이니까. 하하하……하하…….”

쿠차차가 어색하게 웃었다.

텔레포트.

나는 리치의 경고를 떠올렸어야 했다. 적무도에서 대륙으로 넘어오기 전 텔레포트의 위험성에 대해 리치가 말했었다.

-텔레포트는 생각보다 위험한 마법입니다. 이동하려는 곳의 좌표가 정확하지 않다면 바위 안에 처박힐 수도 있으니까요.

쿠차차는 적무도에서 만들어진 아티팩트였다. 당연하게도 대륙의 지리에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알고 있는 좌표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그에게 텔레포트를 맡겼으니 결과야 뻔했다.

나는 폭설이 쏟아지고 있는 산 한가운데 떨어졌다. 그 후로 3일 내내 잠 한숨 못 잔 채 산속을 떠돌아야 했다. 모든 것이 눈으로 덮여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유일한 위안거리가 있다면, 쿠차차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중, 삼중으로 보온 마법을 걸어 추위를 피할 수 있었지만, 속에서 열불이 터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웰런이 무사할지 걱정이 되었다.

휘이잉!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몰아쳤다. 나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의 바다를 헤치며 걷고, 또 걸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고, 나는 마침내 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여관으로 돌진하여 하루 종일 잠만 잤다. 그러곤 여관 주인에게 물어 마법사 길드를 찾았다.

텔레포트를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기 위해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번엔 잘할 수 있다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쿠차차에게 닥치라고 한 후 마법사 길드로 들어갔다.

“제국의 수도인 이카루스까지는 100루덴입니다.”

매우 비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돈이야 썩어서 남아돌 지경이었으니까.

“그럼 평안한 여행 되십시오.”

견습 마법사인 듯한 소년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동시에 텔레포트 마법진이 빛을 뿜었다.

뱃멀미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더니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밝은 빛이 사라지자 견습 마법사 소년이 예쁘장한 소녀로 바뀌어져 있었다.

소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좋은 여행 되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이카루스에.”

웰런과 떨어져서 해야 할 일.

그것은 떡밥을 깔아 놓는 것, 다시 말해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다.

어디에서?

바로 이곳에서.

눈앞에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제국의 명물 중 하나인 대륙 제일의 투기장, 아레나였다.

건물의 모양은 원형으로 내가 있었던 곳과 비슷했다. 하지만 크기가 자타르 왕국 투기장의 몇 배에 달했다. 그 압도적인 위용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와아아!

와아!

간간이 들려오는 함성 소리가 추위로 얼어붙은 공기를 깨뜨렸다.

“대륙 제일의 투기장 아레나…….”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아레나는 대륙에서 가장 큰 투기장이자, 대륙에 흩어져 있는 모든 투기장의 운영을 총괄하는 곳이었다. 즉, 투기장 연합의 총본산이었다.

투기장 연합은 적무도에 있는 투사들을 적으로 규정했다. 그들은 조만간 적무도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적무도의 투사들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전무했다. 적무도의 투사들이 제아무리 정예라 할지라도 병력의 규모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개미와 코끼리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적무도 안에서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남은 건 밖에서 찾는 것뿐이었다.

예로부터 내려온 가장 기본적인 병법 중 하나.

세가 불리할 때 주로 사용되는 일발역전의 병법.

그것은 바로 적의 머리를 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이곳, 투기장 연합의 총본산인 아레나를 먹어 치울 셈이었다.

와아아아!

사람들의 광기 어린 함성이 나를 반겼다.

“그럼 시작해 볼까. 일단 등록부터 해야겠지.”

나는 투기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레나의 투사로 등록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웠다. 자타르 왕국의 투기장에서처럼 암습으로 실력을 시험하지도 않았다. 그냥 질문 몇 개에 대답하고, 아레나의 투사를 상징하는 나무패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의심이 될 만큼 허술한 관리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혹시나 나의 정체가 발각된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잠시 후 알 수 있었다. 투사로 등록하는 것이 왜 이렇게 쉬운가를.

아레나는 대륙 제일의 투기장이란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경기 방식을 운용하고 있었다.

“죽여라!”

“싸워! 뭘 쳐다보고만 있어!”

아레나의 투사가 된 지 불과 서너 시간 만에 나는 경기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상대는 덩치가 커다란, 뒷골목에서 주먹깨나 썼을 법한 건달이었다.

“그렇군.”

자타르 왕국의 투기장은 암습을 통해 어느 정도 실력이 검증된 자만 투사로 받아들였다. 수준이 떨어지는 경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그것은 관객들의 눈높이가 제법 높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하지만 아레나는 달랐다.

대륙 최고의 투기장이란 명성답게 제국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관객이 아레나로 몰려들었다. 그만큼 관객의 눈높이 그리고 지갑 사정 역시 천차만별이었다.

그 말은 곧, 허접한 경기를 봐 줄 허접한 관객 역시 널리고 널렸다는 뜻이다.

내가 불과 몇 시간 만에 경기장에 서 있는 이유.

아레나는 투사가 될 수 있는 자격시험조차 상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배때기에 구멍을 뚫어 주마! 으아아아!”

건달이 단검을 들고 뛰어왔다. 동시에 관객들의 함성이 커졌다.

살기와 광기로 오염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역겨우면서도, 반대로 짜릿한 흥분이 밀려왔다.

원래 계획은 자격시험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여 단숨에 투기장 간부의 이목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역으로 나에 대한 의심은 낮아질 테니까.

빙글!

나는 몸을 회전시켜 단검을 피했다. 그러곤 회전력을 이용해 팔꿈치로 건달의 턱을 후려쳤다.

퍽!

건달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무거운 몸뚱이가 털썩 바닥 위로 쓰러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뭔 경기가 이렇게 시시해?”

“덩치만 커다랗지 별 볼일 없는 놈이었군!”

“젠장! 돈만 날렸잖아!”

일방적인 시합에 욕설과 고함이 난무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관객들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나는 화사한 미모의 안내원을 따라 경기장을 나갔다.

“경기를 더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무패를 반납하시겠습니까?”

안내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뜻이지?”

“아레나는 처음이신가 보군요.”

안내원이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칼리온 님이 치르신 경기는 언제 어느 때라도 투사로 참여할 수 있는 계약 투사들의 경기였습니다.”

“계약 투사?”

“그렇습니다. 아레나에선 나무패를 가진 투사를 말합니다. 계약 투사들은 보통 경기마다 계약을 갱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투사는 위험하지만 그만큼 거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주먹 좀 쓴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자주 찾아오죠. 물론 그중에는 칼리온 님 같은 진짜배기들도 있습니다만, 아레나의 규모가 워낙 커서 일일이 선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경기장에서 싸우게 하는 것이군. 덤으로 돈도 벌면서.”

투사의 실력을 검증하지 않은 채 무작위로 경기를 붙이니, 필연적으로 시시한 경기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관객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아레나에 입장하는 대신에 경기의 질을 포기한 것이다. 운이 좋으면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볼 것이고, 운이 나쁘면 지금처럼 시시한 경기를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타협이었다.

“그럼 아레나에는 계약 투사밖에 없는 건가?”

“아닙니다. 계약 투사들과의 경기에서 10승을 하시면 청동 패를 드립니다. 정식으로 아레나의 투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군. 그럼 다음 경기까지는 며칠을 기다려야 하지?”

“며칠이라니요? 칼리온 님, 이곳은 아레나입니다. 투사들의 천국이지요. 경기는 언제나 열린답니다.”

안내원의 환한 미소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다음 경기를 잡아 줘.”

“알겠습니다, 칼리온 님. 그럼 대기실에서 쉬고 계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안내원은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불과 몇 분 만에 나를 찾아왔다.

“따라오십시오, 칼리온 님. 경기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번 나의 상대는 쌍검을 다루는 검사였다.

검을 잡고 있는 자세가 굳건하고, 나를 노리고 있는 검 끝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용병스러운 복장과 피를 머금고 있는 살기로 미루어 보아 눈앞의 검사는 좋은 스승 밑에서 제대로 수련했다기보다, 수많은 싸움을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한 실전 검술의 소유자로 보였다.

안내원의 말을 비추어 봤을 때 지금의 검사 정도면 제법 ‘진짜배기’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나는 검사의 검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두 개의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말도 안 돼!”

다크섀도우의 존재를 모르는 검사가 경악했다.

사실은 좀 더 강할 테지만, 마음이 흐트러진 이상 나를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다.

“미안하군. 꼼수를 부려서.”

쨍강!

쨍강!

나는 두 개의 검을 부러뜨린 후 투지를 상실한 검사의 목을 가격했다.

두 번째 경기 역시 한 방에 끝났다.

나는 바로 다음 경기를 주문했고, 안내원은 미소를 지으며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다음 경기 역시 한 방에 끝났다.

그다음 경기도 그리고 그다음 경기도…….

관객들이 서서히 내 존재를 알아챘다.

여섯 번째 경기에서 처음으로 응원을 받았다.

“이번에도 한 방에 끝내라고!”

“흑풍! 너만 믿는다!”

나는 안내원을 향해 물었다.

“흑풍?”

“관객들이 붙여 준 칼리온 님의 별명입니다. 바람처럼 빠르게 상대를 쓰러뜨린다 하여 검은 바람, 흑풍黑風이라 하더군요. 검은색인 이유는 칼리온 님도 잘 아시겠지요?”

안내원이 온통 새카만 내 옷을 가리켰다.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가 부담스러웠다. 처음부터 정중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간이며, 쓸개까지 다 내줄 만큼 친절했다.

좋은 징조였다. 투기장의 높으신 분들이 나의 상품성을 알아챈 것이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잠깐.”

나는 대기실로 돌아가려는 안내원을 불렀다.

“미리 일곱 번째 경기를 준비해 줘. 그리 시간이 안 걸릴 테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칼리온 님.”

나는 질린 표정의 안내원을 뒤로하고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네놈이 흑풍이냐?”

여섯 번째 상대가 창을 빙빙 돌리며 물었다. 막상 흑풍이라고 불리니 민망함에 낯이 가려웠다. 그래서 놈이 더 지껄이기 전에 끝내 버리기로 했다.

팟!

진각을 밟으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놈에게 다다르기 직전 좌우로 몸을 빠르게 움직여 잔상을 만들었다.

“흐, 흑풍이 두 명이 됐어!”

깜짝 놀란 관객들이 외쳤다.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내가 분신술이라도 쓴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앗!”

파파팟!

나는 더욱더 빠르게 몸을 움직여 분신의 숫자를 늘려 나갔다. 관객들이 소리 지르는 것도 잊은 채 숨을 죽였다.

셋, 넷, 다섯…… 아홉, 열…….

분신의 숫자가 계속 늘어났다.

당황한 표정으로 나의 본신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놈이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어딜 잔재주를!”

휘익!

사나운 기세의 창이 내 허상을 꿰뚫었다. 동시에 나는 몸을 움직였다.

관객들이 그토록 원하는, 그 ‘한 방’을 위해.

휘이이잉!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이 멈췄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다.

놈은 쓰러졌고, 놈의 창은 반 토막이 났다.

잠시 후 거대한 함성이 울렸다.

와아아아!

검은 바람.

흑풍.

나는 나의 별명을 연호하는 관객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함성이 더욱 커졌다.

“자아, 떡밥을 던졌으니…….”

조만간 물고기가 달려들 터였다.

“따라오십시오. 일곱 번째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안내원을 따라 어두운 복도로 들어갔다.

* * *

대륙 제일의 투기장 아레나에 머문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꽤나 느긋하군.”

쿠차차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텔레포트 사건 이후로 그는 나에게 말을 잘 걸지 못했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었기에, 진즉에 화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화난 척을 하는 중이었다.

“뭐가?”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쿠차차가 움찔하는 것이 왼손에서 느껴졌다.

“투기장 연합이 언제 적무도로 쳐들어갈지 모르는 상황에, 이곳에서 한 달씩이나 투사들과 드잡이질이나 하고 있다니.”

“괜찮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걸 어떻게 알지?”

“아레나 곳곳에 공고문이 붙어 있더군. 적무도의 투사들을 배신자로 매도하고, 그 배신자들을 처단할 전쟁을 벌일 테니 돈 벌고 싶은 투사들은 빨리 참전하라는 공고문이었지. 날짜를 보아하니 아직도 서너 달 정도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여니 아레나의 안내원 미쉘이 서 있었다.

“칼리온 님, 경기에 나가실 시간입니다.”

“알았다.”

나는 왼손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 쿠차차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경기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쿠차차는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이다.

에고 아티팩트의 존재가 알려져 봤자 득보다 해가 많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나는 자기 이름을 만방에 떨치고 싶어 하는 쿠차차의 입을 강제로 다물게 만들었다. 텔레포트 사건이 없었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 칼리온 님이 상대하실 투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미쉘의 설명을 들으며 경기장으로 향했다.

아레나에서 작정을 했는지 이번에 상대해야 할 투사는 아레나 내에서도 알아주는 강자였다.

“현재까지 내 전적이 얼마나 되지?”

“칼리온 님의 현재 전적은 98전 98승 0패입니다. 더불어 모든 경기를 단 한 방에 끝내셨습니다.”

미쉘의 말에 조금 놀랐다.

98전 98승 0패.

투기장 간부의 눈에 들기 위해 미친 듯이 싸우긴 했다. 투사, 몬스터, 개인전, 단체전 등, 상대와 경기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불과 한 달 사이에 98전이라니.

평균적으로 하루에 세 경기씩을 치른 꼴이었다.

투사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경기를 치른다. 그렇기에 자타르 왕국의 투기장에선 투사들의 경기 간격을 최소 일주일로 제한함으로써, 투사들이 경기에 나서기 전 항상 최상의 실력을 갖추도록 보호했다.

지금의 나는 하루에 세 경기 이상을 소화하면서도 여전히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나의 정신이 죽음의 공포에 마모되지 않는다는 반증이었다. 아니, 어쩌면 죽음의 공포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생사를 걸고 싸울 때 가장 살아 있음을 느낀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모습과 뼈가 부러지는 소리에서 희열을 느낀다. 죽음을, 공포가 아니라 동반자로 느낀다.

그것이 바로 투사.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였다.

경기장으로 올라가자 함성이 쏟아졌다.

와아아!

“흑풍! 흑풍!”

“오늘도 멋진 한 방을 부탁해!”

나보다 먼저 경기장에 올라와 있던 거구의 사내가 실실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는 잘 발달된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체구가 컸지만 그리 둔해 보이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꿈틀거렸다.

“인기 좋은데? 네가 아레나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는 흑풍이로군.”

“역사?”

“모르는 모양이네? 한 달 만에 90 경기 이상을 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것도 전승, 게다가 전부 한 방에. 모두 아레나 역사상 처음이다. 뭐, 그것도 오늘로써 마감이겠지만. 안됐군.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좀 더 환호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사내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미쉘이 알려 준 사내의 투사 등급은 트리플 A. 단순 비교론 적무도의 지배자였던 베네딕트와 같은 등급이었다.

물론 사내가 베네딕트와 동급의 힘을 지녔다 할지라도 질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성장했고, 쿠차차라고 하는 비장의 한 수까지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말처럼 최소한 한 가지는 마감될 것이 분명했다.

현재 내 인기의 근원인 ‘한 방’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인기의 근원을 지킬 셈이었다.

나의 상품성을 최대로 높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미끼가 될 터였다.

“합!”

싸움의 시작은 사내가 먼저였다. 그는 사람 머리통만 한 철퇴를 장난감처럼 가볍게 휘두르며 달려왔다.

나는 검을 뽑아 철퇴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쾅!

굉음과 함께 경기장의 공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휙!

휙! 휙!

철퇴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철퇴에 달려 있는 가시에 하마터면 코를 찔릴 뻔했다.

나는 뒤로 크게 물러선 후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잘난 한 방은 어디 가고, 쥐새끼처럼 도망만 다니는 거지?”

사내가 이죽거리며 도발했다.

관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도망만 다니는 나를 향해 빨리 ‘한 방’을 보여 달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하는 수 없군.”

나는 나의 인기를 지키기 위해 하늘 높이 검을 치켜들었다.

“뭐냐, 그 허술한 자세는?”

사내가 어이없는 얼굴로 비웃었다. 하지만 내가 마력을 방출하는 순간, 사내의 비웃음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검이 빛을 뿜었다.

섬광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서걱!

쿵!

소름 끼치는 절삭음과 함께 철퇴와 팔 한 짝이 땅으로 떨어졌다.

사내는 자신의 팔이 잘렸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멍하니 나의 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러…… 블레이드……. 어, 어째서 너 같은 놈이 이곳에…….”

사내는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서서히 앞으로 쓰러졌다.

나는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 검을 버린 후 대기실을 향해 걸었다.

저벅저벅.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내가 대기실에 도착할 즈음 돼서야, 정신을 차린 관객들이 함성을 질렀다. 아레나가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었다.

그리고 그 함성이 마침내 투기장의 높으신 분들 귀에 닿았다.

“인상 깊은 경기였습니다. 이로써 99번째 경기도 한 방으로 끝났군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쉘이 방긋 웃었다.

“다음 경기는 누구랑 하지? 100번째이니 만큼 좀 더 그럴 듯한 놈이면 좋겠는데.”

나는 언제나처럼 경기에 나가기 전 미쉘에게 미리 다음 경기를 준비해 놓으라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칼리온 님. 오늘은 더 이상 경기가 없습니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미쉘이 실패했다.

“나와 싸울 투사를 구하지 못한 건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레나의 지배인께서 칼리온 님을 뵙자고 하십니다.”

올 것이 왔다.

물고기가 먹이를 물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낚싯대를 힘차게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미쉘을 따라 도착한 곳은 아레나 최상층에 위치한 넓은 방이었다. 들어오는 입구를 제외한 모든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유리 너머로 아레나의 경기장이 한눈에 비쳤다.

투사들이 죽을 때마다 함성이 울렸고, 그 소리가 유리창을 진동시켰다.

유리창 앞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 유리창 너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빙글.

의자가 180도 회전했다.

“자네가 흑풍이로군. 얘기는 많이 들었네.”

나를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이 의외로 부드러웠다.

“길게 말하지 않겠네. 자네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제안을 하나 하기 위해서라네. 아마 자네도 만족할 거야.”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 숨어 있는 음흉한 기운이 뱀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오싹!

섬뜩한 감각이 몸을 훑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