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으로
지금 자타르 왕국의 수도 마이엘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폭풍 전야란 말이 딱 어울렸다.
장사치들이 왕의 정원에서 벌인 사상 초유의 유혈 사태만 해도, 오랜 시간 구설수에 오르내릴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하지만 ‘상인 전쟁’이라고 명명되어진 사건이 보다 유명해진 것은 전쟁의 발단과 전개 과정 때문이 아니라 바로 결말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왕의 중재로 이뤄진 대리전.
그리고 대리전을 위해 마이엘의 토종 상인들이 내놓은 비장의 카드.
자타르 왕국 왕실 기사단의 부장단 투드란 드 호엔레른.
그는 광전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지독히 강한, 거친 성정 때문에 되지 못하였을 뿐 실력만 놓고 보면 기사 단장보다 훨씬 강하다고 알려진 사내였다.
누구도 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곤.
나는 그 한 사람을 절대로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의 노력과 믿음이 보상받기 위해선 나 역시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이기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승리, 즉, 강렬한 임팩트였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 할지라도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을 상대로는 아무래도 조금 버거운 감이 있었다.
그래서 약간, 아니 상당히 치사한 방법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덕분에 아니꼬운 마음을 참으며 쿠차차와 협상을 벌여야 했다.
쿠차차는 마력의 공급과 함께 자신을 강제로 잠재우지 말 것을 요구했다. 나는 싸움이 벌어졌을 때 마법을 이용해 나를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
쿠차차와의 협상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다 대리전을 바로 앞에 두고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나와 쿠차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노력과 고생은 결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협상의 결과는 놀라웠다.
투드란은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을 정식으로 익힌 뛰어난 기사였지만, 5레벨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에고 아티팩트와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을 꿰뚫고 있는 투사의 합공을 막아 낼 정도는 아니었다.
투드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반으로 갈라졌다.
세기의 결투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물론, 왕의 칙령을 가지고 온 사자조차 한동안 꼼짝하질 못했다.
나는 얼이 빠진 사자에게서 왕의 칙서를 빼앗다시피 낚아챈 후, 웰런을 데리고 광장을 빠져나왔다.
지금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후였다.
3일 내내 웰런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투기장에 있을 무렵, 그가 나에게 건네줬던 쪽지에 적힌 말이었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더 좋은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물었고, 웰런은 웃으며 답했다.
“형님의 방법은 도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왕 도박을 할 거면 화끈하게 하자고 생각했죠.”
“화끈하게?”
“네. 바로 진짜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다시 투기장으로 향했지요. 이번에는 투사가 아니라 손님으로.”
“……용케 돈을 모았군. 100에 99는 빈털터리가 되는 게 투기장 도박인데.”
“도박에서 지든, 이기든 전 아무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모든 돈을 형님의 승리에 걸었거든요. 형님이 이기면 돈이 늘어나니 좋고, 형님이 지면…… 어차피 모든 약속이 물거품이 되니. 하하하!”
뭔가 굉장히 찝찝한 기분이 들어 인상을 썼더니, 그런 나의 표정을 보고 웰런이 웃음을 터뜨렸다.
“형님이 섬에서 엄청난 활약을 해 준 덕분에 진짜 성 하나를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모였습니다. 그러자 파리 떼가 꼬이기 시작하더군요. 돈을 지키기 위해선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고 상단을 시작한 건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형님의 이름을 따서 ‘리온’ 상단이라고 정했지요. 뭐, 운이 좋았는지 그 뒤로 승승장구. 진짜로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종업원이랑 상단의 식구가 다 뒷골목 출신이던데, 일부러 그런 건가?”
“네. 언제 토껴야 할지 모르기에 뒷골목 출신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네들이라면 리온 상단이 갑자기 망해도 알아서들 잘하겠지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건 그렇고, 그 말투는 진짜 적응 안 되는군.”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말투가 입에 배어 버려서.”
웰런이 쓴웃음을 지며 말했다.
창문 너머로 저택 밖을 살폈다. 왕궁에서 나온 병사들이 저택 주변을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나로 인해 모든 계획이 어긋나 버렸기에 웰런은 최후의 승자이면서도 패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왕이 칙명을 내려 대리전을 하라 했던 것은 토종 상인들의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낱 장사치 싸움에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인 대머리 기사를 내준 것도 토종 상인들의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란 변수로 인해 모든 것이 꼬이고 말았다.
뱉은 말을 주워 담기엔 왕의 이름이 너무 무거웠고, 죽은 목숨이라 무시하기엔 부단장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게다가 웰런이 독한 마음을 먹고 토종 상인들의 목숨을 취하려 한다면, 자타르 왕국의 상권이 한 명에게 몰리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웰런이 왕이나 귀족이 될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막강한 돈의 힘으로 왕이나 귀족을 자신의 입맛대로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돈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요물이었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들은 그러한 돈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종들이었고, 따라서 지금쯤 인상을 찌푸린 채 서재를 서성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말 그대로 폭풍 전야.
“아깝지 않아?”
저택 밖을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웰런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저들이 어떻게 할지는 뻔합니다. 폭풍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도망칠 수야 없겠지요.”
“그럼?”
“일단 저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특히 왕의 위엄이 걸려 있으니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는 없겠지요. 저들이 전전긍긍하는 시간 동안 최대한 수익을 창출해야지요.”
“수익 창출이라…….”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웰런이 작은 가방을 건네주며 싱긋 웃었다.
말투뿐만 아니라 사고방식, 행동까지 과거의 그와 너무나도 달랐다.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된다.
나는 한숨을 쉬며 가방을 건네받았다.
웰런이 나에게 부탁한 일은 쉽게 말해, 자릿세를 받는 뒷골목 건달 행세였다.
나는 초상집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토종 상단들의 저택을 방문하여 적당한 위로와 적당한 협박과 적당한 흥정을 통해 돈을 뜯어냈다.
“돈을 내란 말이냐!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자기소개는 나중에 하고. 내가 좀 바빠서.”
상단의 주인들의 첫 번째 반응은 대개 분노였다. 하지만 내가 왕의 칙서를 내미는 순간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할 말은 많은데 하지 못하는 탓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입가를 부르르 떤다.
생각 같아서는 ‘그런 쓰레기 같은 종잇조각’이라고 외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서명자의 이름이 금테를 두르고 있어 차마 하지 못할 뿐이다.
“칼린 님이 인자하신 분이라는 걸 감사히 여겨라. 네놈들의 목을 자르고 재산을 몰수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것이 불쌍해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하셨다.”
“이…… 이 건방진…….”
“아버지, 참으세요!”
이쯤 되면 굴욕과 치욕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신파극을 벌이기 시작한다. 자식과 부인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가장을 붙잡고 울며불며 난리를 친다. 이것이 두 번째 반응이다.
“그래서 그놈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
가족의 힘으로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가장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힘겹게 내뱉는다.
“아까도 말했지만, 목숨값을 내라. 상인답게 자신의 목숨에 값을 매겨 봐라. 다른 상인들에게도 똑같은 조건을 제시할 것이다.”
나는 세 번째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살기를 뿌리기 시작한다.
핏빛 살기가 방 안을 짓누르면 그제야 이들은 내가 단순한 건달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무려,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을 단칼에 양단한 남자인 것이다.
“모든 상인들에게 목숨값을 받은 후 가장 목숨값을 싸게 지불한 상인 한 놈만 죽일 것이다. 그놈이 네놈이 안 되길 빌어 주지.”
살기에 겁을 집어먹은 상인은 웰런이 준 마법 가방에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쏟아붓는다.
마법 가방이 적당히 차면 땅문서라도 가져다 바칠 기세인 상인을 떼어 내고 저택을 나온다.
리온 상단을 적대했던 토종 상단의 저택을 다 방문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촤르륵!
마법 가방 안에 있는 동전과 골동품, 보석 등을 방바닥 위에 쏟았다.
금화와 보석이 내뿜는 광채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굉장하군요.”
상단 하나하나가 준비한 목숨값은 정작 일을 계획한 웰런조차 깜짝 놀랄 만한 양이었다.
전부 죽인다고 협박했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왕의 위엄과 귀족의 체면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모든 상권이 한 명에게 집중되는 것을 두고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한 믿음이 토종 상인들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죽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왕과 귀족의 체면과 장사치 한 명의 목숨. 누가 봐도 어떻게 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비교였다.
고로 토종 상인들이 해야 할 것은 각자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다.
어차피 상인의 재산은 보석이 아니라 신용이었다. 살아만 있으면 보석 따위는 언제든지 복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가지고 있던 보석을 모두 내놓았다.
나와 웰런은 그 어마어마한 결과물을 앞에 두고 입을 쩍 벌렸다.
“이걸 다 들고 갈 수 있을까?”
“……골동품 같은 것은 팔기도 어렵고, 나중에 추적당하기 쉽습니다. 그냥 보석이나 가져가죠.”
우리는 비싼 보석을 추려 마법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나는 방바닥에 남아 있는 금은보화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법 가방에 한가득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양이 남아 있었다.
“가시죠, 형님. 밖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오늘 밤쯤에는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그 전에 미리 도망가야죠.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 몰래 준비해 놓은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그래, 가자.”
웰런의 뒤를 쫓아가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주머니에 한가득 보석을 담았다.
“주인…… 보기보다 세속적이었군.”
쿠차차가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비꼬았다.
“시끄러워.”
웰런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에, 나는 얼른 방을 나왔다.
비밀 통로는 저택의 지하에 있었다.
지하 창고로 들어가 잡동사니를 헤치자 작은 문이 나왔다. 문 뒤에는 토굴이 있었다.
토굴을 한참 동안 엉금엉금 기었다.
“근데 이 굴은 누가 판 거지?”
“뒷골목 출신들은 원래 비밀 통로 만드는 것이 취미지 않습니까?”
“믿을 만한 놈들인가?”
밖에 있는 병사들이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모르고 있을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뒷골목 출신이라고 모두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도 그곳 나름의 규칙이 있지요. 그리고 그 규칙은, 어떤 면에선 평범한 세계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가혹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토굴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쾅!
쾅!
웰런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판자때기를 두드렸다.
“비켜 봐.”
자리를 바꾸고 싶었지만 공간이 좁아 그리할 수 없었다.
나는 오른손만 앞으로 뻗어 판자때기에 손을 대었다.
“합!”
짧은 기합과 함께 응축시킨 힘을 폭발시켰다.
꽈직!
판자때기가 반으로 동강 났다.
토굴을 빠져나와 주변을 살폈다. 웰런도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창고 같은데?”
“그렇군요. 밖으로 나가 볼까요?”
“혹시 모르니 내가 먼저 나가 보지.”
나는 밖의 기척을 살피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끼이익!
경첩이 녹이 슬었는지 시끄럽게 비명을 질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휘익!
나는 문을 한 번에 열어젖혔다.
“꺄르르!”
“거기 멋쟁이 오빠! 나랑 좀 놀다 가.”
“이 새끼가 술 처먹었으면 돈을 내야지!”
창고 밖에 어두운 밤을 밝히는 불야성이 있었다. 뒤따라 나온 웰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누가 뒷골목 출신 아니랄까 봐, 개구멍을 뚫어도 꼭 이런 곳에 뚫는군요.”
어디로 뚫든 무슨 상관이랴.
중요한 것은 어느 곳에서도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웰런의 예상이 옳다면, 지금쯤 한창 병사들이 저택을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테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높으신 양반이 펄펄 날뛸 테고, 겁에 질린 병사들이 우리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움직이자.”
나와 웰런은 뒷골목을 빠져나와 성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성문에는 이미 수십 명의 기사와 수천 명의 병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는 상황은 다행스럽게도 발생하지 않았다. 주변 분위기를 보아 리온 상단의 저택은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긴 것이 분명했다.
좀 더 확실히 말하면, 나와 웰런은 저택을 빠져나오기 위해 좁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토굴을 기어 나올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형님.”
웰런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사죄했다.
“하하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예의 바르고, 계획적이고, 준비성이 철저한 웰런도 괜찮지만, 실수하고 난처해하는 지금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쿠차차의 말처럼 나란 놈은 제법 세속적인 인간이었나 보다. 성장한 웰런의 모습을 은연중에 질투하고 있었다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웰런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성문 앞에 있는 마구간에서 말 두 필을 샀다.
다그닥!
다그닥!
두 필의 말이 자타르 왕국의 수도 마이엘을 빠져나갔다.
“형님, 근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웰런이 성문 앞에 서서 행선지를 물었다.
“제국이다.”
“제국요?”
“그래! 제국이다! 하하하! 이럇!”
나는 웃으며 말의 배를 찼다.
“혀, 형님! 이럇!”
웰런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올 때는 혼자였지만, 갈 때는 둘이다.
이만하면 제법 남는 장사 아닌가.
“하하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 * *
제국까지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자타르 왕국의 기사는 물론이거니와 나이트워커의 암살자도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
유일한 적은 내부에 있었다.
“헉! 헉! 혀, 형님! 제, 제발 좀 쉬었다…… 갑시다. 헉! 헉!”
제국을 향해 말을 달린 지 열흘째.
날이 갈수록 웰런은 체력의 한계를 호소했다. 하는 수 없이 말을 멈추고 쉬어야 했다.
“후아!”
웰런이 마법 가방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그러곤 크게 한숨을 쉬며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런 체력으로 용케 투사를 했군.”
“투기장을 나온 후론 체력 단련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팔이 하나뿐이라 그런지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게 좀 힘이 드는군요. 생각 외로 체력 소모가 빠릅니다.”
적무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웰런은 내가 서두르고 있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가 형님의 발목을 잡고 있군요. 죄송합니다. 형님 먼저 제국으로…….”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나는 웰런의 말을 싹둑 잘랐다. 절대로 그를 남겨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산 초입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수십 개의 잘린 머리들.
트와일에서 받았던 나이트워커의 대답이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나이트워커의 기척은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결코 방심을 늦출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의 방심을 이용할 줄 아는 암살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로얄 암스의 주인인 섀도우 헌터 페이든. 그놈의 기척은 나도 아직 알아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근처 어딘가에서 나와 웰런을 관찰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함께 출발한다. 쿠차차.”
“이 몸은 의사가 아니다.”
쿠차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약속을 지켜야지?”
“약속은 전투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었다. 의사 노릇이 아니라.”
“그럼 부탁하지.”
내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순간 쿠차차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래도 웃음을 참기 힘든지 입가가 씰룩거렸다.
“흠흠! 좋다. 부탁을 들어주지.”
역시 쿠차차는 단순했다.
나 역시 웃음을 참으며 왼손을 웰런의 머리맡에 올렸다.
“메가 힐!”
화악!
부탁의 위력은 놀라웠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쿠차차가 웰런뿐 아니라 나에게까지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밝은 빛이 나와 웰런의 몸을 감쌌다. 스르륵 피로가 풀리는 감각이 황홀했다.
“아아…….”
웰런이 몽롱한 눈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빛이 사라지자 웰런의 표정이 한결 가뿐해 보였다.
쿠차차와 거래를 한 후, 나는 한 번도 그를 강제로 잠재운 적이 없었다. 그 말은 곧, 싫든 좋든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뜻이다.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이 말 많은 아티팩트가 생각보다 훨씬 더 유용하고, 또한 생각보다 훨씬 더 단순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불과 며칠 만에 쿠차차를 구슬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웰런 역시 쿠차차의 성격을 금방 파악했다.
“감사합니다, 쿠차차 님.”
“쿠차차 님?”
예상대로 쿠차차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러곤 나를 향해 흠흠, 하며 헛기침을 했다. 뭐 잊은 게 없냐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고맙군.”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이 정도 가지고 고맙기는! 곤란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라. 이 몸께서 전부 해결해 주지. 하하하!”
쿠차차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웰런은 서로를 쳐다보며 쿠차차 몰래 눈을 찡그렸다.
자타르 왕국의 수도 마이엘을 떠난 지도 벌써 열흘째.
아르센 제국이 위치해 있는 북쪽 땅의 또 다른 이름은 눈과 얼음의 대륙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날이 갈수록 기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제국에 가까워진 것이다.
“하아! 춥군요, 형님.”
웰런이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말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정말 춥습니다, 형님.”
“그래. 춥군.”
웰런이 노리고 있는 것은 외부의 온도에 상관없이 착용자의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시켜 주는 아티팩트 로브였다.
물론 나는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사시사철 따뜻한 적무도에서 3년을 산 탓인지 추운 것이 못 견디게 싫었다.
“잘린 팔이 욱신욱신하는 게 아무래도 한풍이 스며들었나 봅니다.”
“그것 참 안됐군.”
떡을 줘야 할 사람이 미적지근하게 반응하자 웰런이 타깃을 바꿨다.
단순한 쿠차차는 웰런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갔다.
쿠차차는 자기만족을 얻었고, 웰런은 체온을 유지시켜 주는 마법을 받았다. 서로 만족했으니, 꽤 정당한 거래라 할 수 있었다. 웰런이 상인이 되었단 사실을 새삼 통감했다.
우리는 숲 속에 있는 작은 동굴 앞에 말을 세웠다.
“이제 며칠 후면 제국이군요.”
웰런이 모닥불에 쓸 나뭇가지를 모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제가 할 일을 알려 줘도 될 듯한데요, 형님?”
나는 웰런에게 제국으로 향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를 내 일에 끌어들여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웰런은 나의 망설임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
“이제 와서 절 내치지는 않겠죠?”
“위험한 일이다.”
“패가망신하여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았을 때도, 투기장에서 사람을 죽이며 살아야 했을 때도, 심지어 팔이 잘려 병신이 되었을 때도, 카드를 놓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요 3년간…… 단 한 번도 카드를 만져 본 적이 없습니다. 왜인 것 같습니까?”
“…….”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전 알아 버렸습니다. 세상에는 도박보다 더 스릴 있고, 더 자극적인 게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도박하고 비슷하지만 도박보다 거창한, 좋은 말로 하면 ‘모험’이란 놈을 말이죠. 그 맛을 본 이상 저는 평범하게 살긴 글렀습니다.”
“지금도 평범하지 않은데.”
“형님에 비하면 평범 그 자체죠.”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하지 마라.”
웰런의 의지는 확고했다. 설령 내가 버린다 할지라도 어떻게 해서든 뒤따라올 태세였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하하하! 후회 말입니까? 만약 제 머릿속에 그런 기능이 있었다면 지금쯤 전 농사나 지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을 겁니다.”
나는 웰런에게 내가 죽여야 하는 적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적이 나에게 했던 일과 앞으로 내가 갚아 줄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웬일인지 쿠차차 역시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필시 나의 내력이 궁금했던 것이리라.
이야기를 모두 마치자 웰런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형님은 대단합니다. 저 같았으면 멀리 도망가 조용히 살았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래, 겁쟁이는 빠지는 게 나을지도. 스케일로 봤을 때 이 몸처럼 통이 큰…….”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이런 일에 빠지라니요? 말만 들어도 흥분돼서 이렇게 손이 떨리고 있는데. 못 빠집니다. 죽어도 못 빠져요.”
웰런이 쿠차차의 말을 자르며 얼른 말했다. 쿠차차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그나저나 휴멜 백작이라……. 아비를 죽이고 백작 위를 강탈할 때부터 걸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야심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황제라니! 허!”
“실력이 좀 있는 건 알겠지만 퍼스트 나이트라니! 허! 그놈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군.”
웰런과 쿠차차가 서로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각자의 감상을 말했다.
“쿠차차, 이 근처에 알람 마법을 부탁해.”
“응? 부탁? 그러지. 이 몸께서 날파리 하나 들어올 수 없는 완벽한 방어막을 구축해 주지. 하하……하.”
쿠차차가 웃다 말고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 그런데 정말 부탁한 거 맞지?”
“부탁 맞아.”
“이상하군. 말에서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데.”
에고 아티팩트의 의심이 더 깊어지기 전에 얼른 말했다.
“기분 탓이야. 신경 쓰지 마.”
“으음…….”
뭔가 석연치 않은 것처럼 침음성을 흘리며 쿠차차가 하나, 둘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단순무식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다. 말에서 감정이 느껴지도록 좀 더 조심해야겠다.
쿠차차를 상대로…….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많이 어려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