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기사 칼리온 4
● 차 례
대답
함정
동행
상인 VS. 도박꾼
제국으로
아레나
마수의 알
블러드 배틀Blood Battle
폭주
대답
쏴아아!
맑게 갠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오후 무렵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불안한 표정으로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비를 피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나는 로브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채 비 오는 거리를 걸었다. 당연히 방수 마법이 걸려 있지 않는 로브였기에 로브 아래 옷이 금방 축축해졌다.
다다다!
“아이쿠!”
비를 피해 뛰어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내 쪽으로 쓰러졌다. 너무나도 전형적인 그리고 수십 번이나 경험했던 수법이라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이빙하듯 내 품으로 뛰어드는 아이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어, 어…….”
아이는 당황한 얼굴로 사색이 되었다.
쭈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전해. 더 이상 귀찮게 굴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전 그냥 넘어질 뻔…….”
나는 단검을 꺼냈다. 아이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비명이라도 지를 듯 입을 벌렸다.
“해치려는 게 아니니까 조용히 해라.”
서걱!
나는 주먹만 한 돌멩이를 주워 단숨에 반으로 잘랐다. 잘린 단면이 유리처럼 매끈매끈했다.
두 개가 된 돌멩이를 아이의 양쪽 손에 하나씩 쥐여 주었다. 아이는 마법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으로 잘린 돌멩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너를 관리하고 있는 놈에게 그 돌멩이를 보여 줘라.”
아이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도시로 빨리 들어오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후줄근한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천만했다. 지킬 수 없는 자에게 보물은 재앙이나 다름없으니까.
소매치기 아이에게 돌멩이를 준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일종의 과시였다.
내가 평범한 거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막무가내식의 소매치기는 줄어들 것이 확실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위험이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이 도시의 밤을 지배하고 있는 놈들이 나의 경고를 무시한다면, 그때는 소매치기가 아니라 강도나 살인마를 보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졌다. 거리는 조용했지만, 내 머리는 온갖 상념으로 복잡했다.
알빈이 용병 길드에 남겨 놓았던 유산.
마굴의 지도.
그 지도에는 바르디엘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르디엘은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였다. 재능으로만 따지면 바르디엘은 나의 원수라 할 수 있는 휴멜보다도 훨씬 상위에 존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휴멜은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인간’이었지만, 바르디엘은 인간의 탈을 쓴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9레벨의 마법을 익힌 최초이자 최후의 마법사였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 진실로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업적을 쌓은 인물답게 바르디엘을 수식하는 단어는 셀 수조차 없이 많았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 제국의 수호자, 드래곤의 친구, 마나의 축복을 받은 광휘의 마법사 등 대표적인 것만 해도 수십 개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리고 가장 많이 불린 별명은 이것이었다.
인간이되 인간을 초월한 그에게 바치는 인류의 경의.
그 누구보다 어질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던 그에게 어울리는 단 하나의 수식어.
알빈이 알려 준 마굴의 주인이자 최악의 암살 집단 나이트워커로 하여금 용병 길드와의 전쟁도 불사하게 만든 마법사 중의 마법사.
현자 바르디엘.
“바르디엘의 마굴이라……. 터무니없는 것을 남겨 놨군.”
육체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몸 전체에 마나를 흩뿌려 놓는 기사와 달리 마법사는 심장에 마나를 축적시킨다. 그렇게 응축시킨 마나를 주문을 통해 한꺼번에 폭발시킴으로써 기적과 같은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다.
이때 마나의 그릇인 심장에는 사리와 같은 작은 구슬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나석이었다. 마나석은 심장에 축적한 마나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크기가 크고, 하얀빛을 발했다.
마나석은 마법사로 하여금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와 동시에 최후의 순간 마법사의 숨통을 죄는 족쇄였다. 마나석은 그 자체로 아티팩트나 다름없는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마나석의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가지고만 있어도 마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마나 수련에 도움을 주었고, 또한 아티팩트 제작이나 상위 마법의 마법진을 그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로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가공 원료였다.
특히 질 좋은 상급의 마나석은 만금의 돈으로도 구하기 힘들 만큼 귀했다. 저급의 마나석은 동물이나 몬스터의 심장에 강제로 마나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얻을 수 있지만, 상급의 마나석을 얻는 방법은 오직 하나, 오랜 기간 마나를 수련한 마법사의 심장을 꺼내 반으로 가르는 것뿐이었다.
마나석에 대한 사람들의 집요한 탐욕으로 인해 죽을 날이 가까워진 말년의 마법사들은 자신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 숨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신의 시체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마법사가 숨어 버린 은신처가 바로 마굴, 마법사의 동굴이었다.
평범한 마법사의 마굴만으로도 분란이 일기 일쑤였다. 하물며 그럴진대 만약 전설이 되어 버린 마법사 바르디엘의 마굴이 발견됐다는 정보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과 단체를 넘어 왕국과 심지어 제국까지 나이트워커처럼 달려들 것이 확실했다. 심지어 계약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용병 길드조차 미리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알빈의 유산을 건네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바르디엘의 마굴인지, 아닌지,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을 뛰어들게 하는 데는 소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정도로 바르디엘이란 이름의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지독하게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지독하게 운이 나쁜 건지 모르겠군.”
최고의 보물을 얻었으나, 그 대가로 연인과 동료를 잃고 자기 자신조차 처참하게 죽어 간 알빈이 떠올랐다.
“어떡하지.”
생각 같아서는 당장 마굴을 찾으러 가고 싶었다. 호기심도 있었고, 그럴듯한 변명거리도 충분했다.
지도에 적혀 있는 것처럼 마굴의 주인이 진짜 바르디엘이라면 마나석은 물론이거니와 그곳에 떨어져 있는 먼지 한 알갱이조차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리라.
하지만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었다.
달콤하지만 독일지도 모르는 사과를 손에 든 채 나는 비 오는 거리를 묵묵히 걸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여관을 찾아 헤매다 문득 병기점을 발견했다. 상업이 발달된 트와일에서도 찾기 힘들 만큼 커다란 병기점이었다.
스윽 지나쳤다 뒤로 돌아 다시 병기점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검이 필요하긴 한데.”
오러 블레이드를 쓸 때마다 검이 부러졌다. 좀 더 단단하고 제대로 된 검이 필요했다.
사실 쏟아붓는 마력의 양을 줄이면 평범한 검으로도 그럭저럭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마력은 거칠고 난폭했다. 그러한 성질 때문에 마력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특히 싸움처럼 흥분한 상태에선 검이 깨질지 알면서도 마력을 들이붓기 일쑤였다.
이럴 바엔 아예 마력의 힘을 견딜 수 있는 좋은 검을 구입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어차피 돈도 넉넉하니 괜찮은 것 하나 정도는 살 수 있겠지.”
나는 병기점으로 들어갔다.
비가 와서 그런지 병기점 안은 한산했다. 병기점 주인은 병기에 녹이 슬지 않게 하기 위해 열심히 기름칠을 하고 있었다.
딸랑!
문을 열자 방울이 울렸다.
“어서 오십…….”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려던 병기점 주인이 나의 행색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검을 보고 싶은데.”
주인이 나를 문전박대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주인은 인상을 팍 구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쪽으로 가 보시오.”
주인은 턱 끝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주인이 알려 준 곳의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했던 대로 비싸 보이는 무기가 진열장에 널려 있었다. 주인이 가리켰던 곳에는 아마 삼류 용병들이 폼으로 가지고 다니는 싸구려 무기만 놓여 있었을 것이다.
“헉! 당장 손을 떼시오! 그게 얼마짜리인 줄 아시오!”
진열장에 놓인 검 중 하나를 잡자 주인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간신히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달려오는 주인을 무시한 채 검을 휘둘렀다. 돈이 있으니 꿀릴 게 없었고, 실력이 있으니 검을 망가뜨릴 리도 없었다.
휘익!
“안 돼!”
주인의 비명을 뒤로하고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을 몇 동작 따라 했다. 검을 들고 제대로 수련해 본 적이 없기에 겉모습만 그럴듯한 눈요기용 검술이 되었지만 워낙에 고급 검술이라 그 정도만으로도 검에 예기가 흘렀다.
휘익!
휘익!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주인이 우뚝 멈춰 선 채 검의 행적을 찬찬히 쳐다봤다. 노려본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매서운 눈초리였다.
“괜찮군. 하지만 역시 약해.”
나는 검을 제자리에 놓았다. 그러곤 병기점의 주인을 쳐다봤다. 내가 평범한 거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주인의 표정이 한결 풀려 있었다.
“검술이 아깝군. 아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검을 휘두른 그 동작! 대체 그 어설픈 동작은 뭐였소? 검의 흐름이 뚝뚝 끊기는 것은 그렇다 쳐도 검 끝이 그렇게 흔들려서야…….”
수련이 부족한 탓이라고 질책하는 병기점의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술의 수준을 알아보는 것을 넘어 시전자의 실력까지 평가를 내리다니.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비난에 가까운 주인의 평가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묵묵히 나에 대한 평가를 들었다.
화는 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모두 옳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나의 실력은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을 펼치기엔 너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난 검사가 아니니까.
내 대답을 들은 병기점 주인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비록 일선에서 은퇴해 쇠붙이나 팔아먹고 있지만 나도 한때는 제법 이름 있는 용병이었소. 당신의 검술은 뜨내기들의 칼부림과 다르오. 진짜 검술이지. 아마도 웬만한 검술은 이름도 못 꺼낼 만큼 대단한 검술일 테지. 가짜 검사가 익히기엔 너무 좋은 검술이란 말이오.”
주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함부로 부정하기가 힘들 만큼 너무나도 자신 있는 말투였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나는 검사가 아니다.”
한 번 더 부정했다.
“그럼 대체 뭐요?”
주인이 발끈하며 물었다.
“격투가.”
“하하하!”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주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 숨기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시오. 어쨌든 그 정도로 훌륭한 검술을 가진 검사가 어째서 거지꼴로 다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검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찾아 주리다.”
주인은 끝까지 나를 검사로 착각했다. 그를 설득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검을 골라 주겠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파괴되지 않는 검. 내 힘을 견뎌 낼 수 있는 검. 그런 검이 필요하다.”
“파괴되지 않는 검?”
주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보여 주는 게 빠르겠다 싶어 싸구려 검을 하나 골라 마력을 주입했다.
“헉!”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맹한 기운에 주인이 숨을 삼켰다.
파삭!
싸구려 검이라 그런지 오러 블레이드가 발현되기도 전에 균열이 갔다.
나는 금이 간 검을 주인에게 보여 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내 힘을 견뎌 낼 수 있는 검이 필요하다.”
“이럴 수가…….”
주인은 경악한 얼굴로 검을 쳐다봤다.
“실력을 숨겼던 것……인가?”
한참 만에 제정신을 차린 그가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존댓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나를 신분을 숨긴 기사쯤으로 착각하는 듯했다.
“그럼 그렇지. 그런 훌륭한 검술을 사사한 검사의 실력이 그 정도였을 리가 없지.”
혼자 질문하고, 혼자 납득한 주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곤 잠시 고민하더니 검 세 개를 들고 왔다.
“이곳에서 가장 좋은 검이네. 한번 봐 보게.”
주인이 가져온 검은 하나같이 굉장히 물건이었다. 칼날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 끝이 송곳처럼 뾰족하고, 시퍼런 날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셋 중 하나를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부웅!
“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무게중심이 완벽했다. 검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팔이 길어진 것처럼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마력을 불어 넣었다.
지이잉!
검명과 함께 검신이 몸을 떨었다. 여태까지의 검이 억지로 꾸역꾸역 마력을 받아들였다면, 이번 검은 흡사 마른 대지가 물을 흡수하듯 능동적으로 마력을 빨아들였다.
마음 놓고 마력을 방출했다.
화아악!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러 블레이드를 이렇게 막힘없이 시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히 쾌감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검은 탐욕스러울 만큼 마력을 먹어 치웠다. 하지만 결국엔 한계에 도달했는지 검이 부르르 떨렸다.
더 쏟아부으면 검이 깨질 것 같아 마력 주입을 멈추었다. 검이 서서히 제 빛깔을 찾았다.
“괜찮군. 이 정도면 그런대로 오래 쓸 수 있겠어.”
병기점에서 가장 좋은 검치고는 상당히 박한 평가였지만 주인은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했다. 그냥 입만 쩍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러…… 오러…….”
중후한 인상의 사내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내가 세 개의 검을 모두 시험해 본 후였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존댓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진지하게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에…… 드시……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하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드…….”
벌컥!
딸랑!
대답을 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문 위에 달려 있던 방울이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도이슨! 오늘이야말로 찍소리 못하게 만들어 주마!”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지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풍기는 분위기는 성인이 분명한데 작은 키와 동안인 얼굴 때문에 소녀처럼 보였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금발 덕분에 더욱 어려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병기점의 주인, 도이슨을 노려보았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도이슨은 난처한 눈으로 그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루미, 손님이 안 보여? 좀 있다 다시 오면 안 될까?”
“또 그런 식으로 나를 피하려고 그러지? 내가 모를 줄 알아?”
루미는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매서운 눈으로 도이슨을 쳐다봤다.
도이슨이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보았다. 나는 한차례 어깨를 으쓱한 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만들어 준 전장 안으로 도이슨과 루미가 입장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도이슨이 한숨 쉬듯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그 큰 코를 납작하게 해 주지!”
“그래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도이슨의 애 취급에 루미는 마치 암고양이처럼 캬악, 독을 뿜었다.
“두고 보자!”
루미는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 포대 자루를 낑낑거리며 끌고 왔다. 그러곤 그 안에서 작달막한 단검을 하나 꺼냈다. 크기에 비해 무척 무거운 듯 그녀는 힘들게 단검을 집어 올렸다.
“도이슨! 보고 감탄한 다음 패배를 인정하고 무릎을 꿇어라!”
루미가 도도한 말투로,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내밀었다.
“대체 또 뭘 만들었기에, 윽!”
한 손으로 단검을 받으려던 도이슨의 팔이 단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는 반대쪽 손을 뻗어 간신히 단검을 땅으로 떨어뜨리지 않았다.
“롱 소드다!”
“어디가!”
루미와 도이슨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루미란 이름의 자그마한 여자를 쳐다봤다.
단검치고는 좀 길긴 했다. 하지만 롱 소드라 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았다. 길이가 롱 소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검을 롱 소드라고 소개하다니. 롱 소드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아니면 머리가 좀 아픈 아이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스릉.
제작자가 롱 소드라 우기고 있는 단검을 도이슨이 힘들게 뽑았다.
“음…….”
도이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단검을 살폈다.
“또 괴상한 걸 만들어 왔구나.”
“괴상하다니! 필생의 역작이라고는 못해도 적어도 이곳에 있는 허접스러운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나아!”
도이슨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하긴 자기 가게의 무기가 변변찮다고 하는데 기분 좋을 주인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은 나도 못 참겠다. 백 배? 천 배? 지금 트와일에서 가장 큰 병기점인 내 가게를 무시하는 거냐? 네가 만든 이 단검은…….”
“롱 소드야!”
도이슨의 말을 자르며 루미가 소리를 질렀다.
“……이 롱 소드는 검이 아니야. 동전 한 닢에 파는 싸구려 검도 이것보다는 날카롭겠다. 쇳덩이 같은 무게는 둘째 치고 이 날 좀 봐. 손으로 문질러도 베이지도 않잖아. 검이 아니라 몽둥이를 만들었구먼.”
“뭐? 몽둥이? 말 다 했어? 검 보는 눈도 형편없는 사이비 주제에!”
“뭐? 사이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루미가 획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빠르겠어. 눈이 썩은 사이비답게 좋은 검을 보여 줘도 알아보질 못하네.”
“뭐라고!”
루미는 발작을 일으키는 도이슨을 무시한 채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봐, 손님. 그런 시시한 검은 집어 던지고 내가 만든 롱 소드를 한번 평가해 봐.”
그녀는 자신만만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눈동자가 무척이나 맑았으며, 그 안에 자부심과 고집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롱 소드가 무엇인지 모르는 여자도, 머리가 아픈 여자도 아니었다.
이와 똑같은 눈빛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투기장 근처에 있었던 대장간, ‘드래곤의 숨결’의 일류 대장장이 할렌드. 루미는 그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도이슨으로부터 단검을 건네받았다.
“웃!”
보기보다 훨씬 더 무거운 단검이었다.
“크기도 작은 게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도이슨이 툴툴거렸다.
나는 본격적으로 단검을 살폈다.
겉모양만 봐서는 도이슨의 말이 옳았다. 이 단검은 롱 소드는커녕 검도 아니었다. 베기는 물론 찌르기조차 불가능한 검이었다. 날은 제대로 벼리지 않아 둥그스름했고, 검 끝은 뭉툭했다.
휘익!
좌우로 크게 휘둘러 보았다. 그다음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종잇장보다 가벼웠던 병기점의 검을 휘두르다 쇳덩이 같은 단검을 휘두르려니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나는 루미가 들고 있는 검집을 받아 단검을 넣었다.
“어때? 굉장하지?”
루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도이슨은 이미 나의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굉장하군.”
루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도이슨의 얼굴에 썩은 미소가 생겨났다.
“하하하! 역시 보는 눈이 있네! 거봐라, 이 썩은 눈의 사이비야!”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도이슨이 입을 쩍 벌렸다. 생각 같아선 내 멱살이라도 붙잡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 때문인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했다.
“이유를 설명해 주시오. 아니면 단검을 만든…….”
“롱 소드!”
“……롱 소드를 만든 이 발육 부진의 여자가 마음에 든 것이오?”
“뭐야!”
루미가 빽 소리를 질렀다.
“검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설명해 달라고 해도 하기가 힘들군. 역시 보여 주는 편이 빠르겠어. 이 검은 단검이면서 단검이 아니야. 그녀의 말대로 롱 소드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군.”
“훗! 그 짧은 검이 어떻게 롱 소드란 말이오!”
도이슨이 까칠한 목소리로 비꼬았다.
“일반적인 롱 소드와는 조금 다르지만. 자아, 봐라!”
단검은 손잡이를 잡은 순간부터 마치 살아 있는 거머리처럼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력 역시 특별히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석에 이끌린 듯 단검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단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마력을 일으켰다. 단검이 물 만난 고기처럼 거침없이 마력을 먹어 치웠다.
뭉툭한 검 끝에 마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쑤우욱!
마치 광선처럼 검붉은 마력이 길게 뻗어 나왔다. 단검의 길이에 광선의 길이가 더해지자 정확히 롱 소드만 해졌다.
“오, 오러 블레이드의 색깔이!”
도이슨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정확히 말하면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었지만 나는 대답 대신 단검을 주의 깊게 살폈다.
“역시 그렇군. 주인의 힘을 빨아들여 오러 블레이드처럼 뿜어내고 있어. 이런 검이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아티팩트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어.”
도이슨은 롱 소드가 되어 버린 단검을 넋을 잃고 쳐다봤다. 의외로 단검의 제작자인 루미 역시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단검이 만들어 낸 빛의 칼날이 검붉은 색을 하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마나가 없는 자에게는 그저 무거운 단검에 불과하겠지만 마나 소드를 사용할 수 있는 자에게는 명검으로 그리고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는 자에겐…… 가히 보검이라 불릴 만하군. 이 롱 소드의 이름이 뭐지?”
나는 경직된 얼굴로 단검을 쳐다보고 있는 루미에게 물었다. 무언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그녀가 답했다.
“……아이언 블레이드Iron Blade.”
철검이라…….
단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만들다 만 듯한 투박한 모양. 웬만한 사람은 들기도 힘들 만큼 무거운 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사고 싶게 만드는 놀라운 완성도.
생각해 보니 비슷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름까지 비슷했다. 마렉이 부수어 버린 나의 첫 번째 무기, 아이언 피스트와.
“이 검, 내가 사지.”
루미는 가타부타 대답 없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마나의 색깔이 검붉은…….”
그때였다.
파샥!
작은 균열음이 들렸다.
“음? 무슨 소리지?”
도이슨이 눈을 찡그린 채 귀를 기울였다.
파샥! 파샥!
균열음이 점점 커지면서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쨍!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아이언 블레이드가 깨어졌다.
나이트워커의 지부장이었던 헬튼을 죽이고 빼앗은 돈주머니에는 거액의 돈과 그보다 훨씬 거액의 보석이 들어 있었다.
도이슨의 병기점은 상업 도시로 유명한 트와일에서도 가장 큰 가게로 유명했다. 루미가 제시한 아이언 블레이드의 보상금은 그러한 병기점에 진열되어 있는 무기의 절반 이상을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었고, 그것으로 헬튼의 돈주머니는 먼지만 남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손님이야! 그냥 불러 본 건데 떡하니 지불하다니! 안목도 있고, 돈 씀씀이도 헤퍼! 하하하!”
굳은 얼굴을 풀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루미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해 대며 박장대소를 했다.
어차피 주운 돈이었고, 또한 아직 마나석이 다섯 개나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직 깨어진 아이언 블레이드가 아까울 따름이었다.
똥 씹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도이슨뿐이었다.
“쌍으로 미쳤군, 쌍으로. 여신의 숨결이 담긴 로열 암스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돈이면 그에 버금가는 무기 정도는 구할 수 있을 텐데. 아무리 보상금이라지만 엉터리 대장장이가 만든 검에 전부 쏟아붓다니.”
무엇이 그리 아까운지 도이슨이 계속 툴툴거렸다.
“흥! 엉터리 대장장이라니! 물건의 가치조차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바보 주제에!”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말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얼른 끼어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검이 깨어진 거지? 검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아이언 블레이드는 주인의 힘을 못 이기고 깨어질 만큼 약한 검이 아닐 텐데.”
“음……. 그건 말이지 아마 당신 때문일 거야.”
루미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아이언 블레이드가 당신의 힘을 뽑아서 만든 검붉은 칼날. 칼날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어. 보통의 마나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칠고, 사나워. 대체 그것은 뭐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의무도 없거니와 대답을 해서도 아니 되었다.
마력은 마족의 힘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인간이 마력을 쓰고 있다고 믿기보다 마력을 쓰는 마족이 인간으로 둔갑한 것이라 오해받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게다가 설령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믿는다 할지라도 결과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마족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앞으로는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게 불길한 힘을 계속 사용하다간 신관에게 잡혀가 고문을 받을지도 몰라. 아니면 마법사에게 잡혀 인체 해부를 당하거나.”
내가 잠자코 있자 루미가 재미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그녀는 내 손을 가리켰다.
“그거 혹시 아티팩트?”
그녀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였다. 그것은 호엔레른 백작가의 무기고에서 우연히 찾은 반지로 1레벨 마법을 세 개밖에 담을 수 없는 저급 아티팩트였다.
“그런데?”
“잠깐 볼 수 있을까? 모처럼 크게 바가지도 씌웠고 하니 서비스 하나 해 주고 싶은데.”
나는 반지를 빼 루미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반지에 박혀 있는 마나석과 그 주변에 작게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좋아! 가능하겠어. 따라와!”
벌컥!
딸랑!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루미가 문을 박차고 병기점 밖으로 나갔다.
“다시는 오지 마! 이 엉터리 대장장이야!”
“이제 오라고 해도 안 와! 썩은 동태눈아!”
두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설전을 벌였다.
루미는 비 오는 거리를 씩씩거리며 걸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가만히 쫓았다.
루미의 대장간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집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만큼 작고 초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깨어졌다.
웬만해선 구경하기 힘들다는 아티팩트가 흔한 돌멩이처럼 땅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망치와 모루는 물론, 화로와 집게, 심지어 물을 담아 놓는 넓은 대야까지 대장간에서 쓰이는 거의 모든 물품이 아티팩트였다.
그제야 루미가 대장장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계속 가져온 의문이 풀렸다.
루미는 작고 가녀린 체구를 지닌 여자였고, 대장장이는 예로부터 남자들의 직업이었다.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체력적인 부담은 재능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극복했다. 바로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잠깐 기다려. 금방 만들어 줄 테니.”
그녀는 작은 조각칼을 꺼내 화로의 불에 달구었다. 그러곤 붉게 달아오른 조각칼로 반지에 마법진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너무나도 섬세하고, 정교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표정 역시 한없이 진지하여, 이 여자가 과연 도이슨과 티격태격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작업은 순식간에 끝났다. 진정 경이로운 솜씨였다.
“자아, 완성! 그럼 잘 쓰도록.”
루미는 나에게 반지를 휙 던져 주었다.
“설명은?”
“별거 없어. 그냥 지금 담아 놓은 세 개의 마법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줬을 뿐이야.”
“…….”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루미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미 만들어진 아티팩트를 다른 아티팩트로 개조하는 것은 새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웬만한 마법사도 하기 힘든 일을 순식간에 해치운 후 고작 한다는 말이 별것 아니라니.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문득 ‘드래곤의 숨결’에 있었던 대장장이 할렌드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경외감을 담아 말했었다.
아이언 피스트를 만든 자는 천재 대장장이였노라고.
만약 내 예감이 옳다면 루미는 할렌드가 말했던 그 천재 대장장이가 분명했다.
내가 황당해하는 사이 루미는 구석에 굴러다니고 있던 철구鐵球를 붙잡고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깡!
깡!
경쾌한 쇳소리가 작은 대장간에 울려 퍼졌다. 천재 대장장이가 머물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장소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더없이 어울리는 장소였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루미의 등을 말없이 쳐다봤다.
훌륭한 군대에 필요한 것은 훌륭한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그 병사를 무장시켜 줄 훌륭한 무기 역시 필요했다.
루미는 그것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천재 대장장이가 지니고 있는 가치.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궁무진했다.
이 여자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이용하려면 무슨 조건을 걸어야 할까.
과연 그 조건을 순순히 들어줄까.
납치를 해서 강제로 일하게 한다면, 그 억압된 자유 속에서 얼마나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루미를 회유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그중에는 정당한 계약도 있었고, 지키지 못할 거짓 약속도 있었고, 악독한 협박도 있었다.
치이익!
붉게 달아올랐던 쇳덩이가 차가운 물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물속에서 기포가 부글부글 올라왔다.
그녀는 식어 버린 쇳덩이를 화로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쇳덩이를 핥았다. 부끄러움을 못 이긴 듯 쇳덩이의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조금씩 새로운 형태를 드러내는 철구를 구경하다 대장간 밖으로 나왔다.
나도, 그녀도, 인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그녀에게 난 이미 잊힌 존재였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오늘을 떠올리며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찬 수라의 길이었다. 적무도의 투사들은 이미 그 길을 걷고 있었기에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루미는 아니었다.
루미는 피와 살이 튀는 전장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재능이 뛰어난 대장장이일 뿐이었다. 천재 대장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를 그 혈로血路 속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든지 말이다.
나의 욕심이 그녀를 파괴하기 전에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깡!
깡!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 * *
트와일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에서 이틀을 쉬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비가 쏟아졌다.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렸고, 판자때기로 대충 기워 놓은 천장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틀 내내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트와일까지 달려오면서 쌓인 피로가 침대에 눕는 순간 한꺼번에 덮쳐 왔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기지개를 크게 폈다.
공기는 봄의 새싹처럼 싱그러웠고, 비가 그친 하늘은 눈이 부실 만큼 푸르렀다.
피로가 풀린 탓에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반면 몸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불쾌했다. 온몸이 끈적거리고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관에서 일하는 아이를 불러 목욕물을 받게 한 뒤 임시로 입을 옷 한 벌을 부탁했다.
“이 옷은 어떻게 할까요?”
아이는 썩어 가는 내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빨아 달라고 했다가는 울어 버릴 기세라 그냥 버리라고 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목욕을 하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찬찬히 계획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여관 아이가 가져온 옷을 입었다. 뚱뚱한 여관 주인의 옷인지 어린 아들이 아빠 옷을 훔쳐 입은 것처럼 옷이 흐느적거렸다.
방을 나와 식당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내 꼴을 보더니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여관 주인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우선 고기 스튜와…….”
밥을 먹기 위해 주문을 하려다 문득 돈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언 블레이드를 파괴한 보상금으로 대부분의 돈을 지출했기 때문이다.
“손님?”
“음…….”
우물쭈물하며 주문을 못 하자 여관 주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배가 안 고프군. 이따가 먹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을 나왔다.
“……젠장. 역시 선불로 받았어야 했는데.”
등 뒤로 작게 여관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관을 나오자 따가운 햇볕이 눈을 찔렀다. 비가 내리는 동안 한산했던 거리가 모처럼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풋! 저 사람 좀 봐.”
“어머! 무슨 옷이 저렇게 늘어났어?”
“덜떨어진 바보 아냐?”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나는 그들의 비웃음을 애써 무시하며 마법사 길드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마법사 길드는 트와일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누가 마법사들 아니랄까 봐.”
길드의 건물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마법사 길드의 건물은 커다란 5층 탑 모양을 하고 있었다. 탑 중간에는 휘황찬란한 간판이 달려 있었고, 뾰족한 꼭대기에서는 오색 빛깔의 공기 방울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가 무지개 빛깔로 반짝거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마법사 길드의 서기가 정중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길거리의 행인들과 다르게 그의 시선에는 비웃음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건물 안에는 소위 마법사라 불리는 족속들이 서너 명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눈뜨고 못 봐 줄 만큼 가관이었다.
한 마법사는 여자 속옷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였고, 다른 마법사는 위아래 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다. 아예 벌거벗은 후 나무 그릇으로 은밀한 부위만 가린 마법사도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내 옷차림은 귀족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못 볼꼴을 많이 봐 이제는 무엇이 비정상인지 무감각해진 서기가 나에게 물었다.
“마나석을 팔고 싶은데.”
서기가 나를 흘끔 쳐다봤다. 뿐만 아니라 제각각 행동하고 있던 마법사들 역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법사 길드에 마나석을 팔러 오다니. 배짱이 제법이구나.”
여자 속옷을 뒤집어쓰고 있던 마법사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이곳에선 마나석을 취급 안 하나? 마나석은 마법사 길드에서 사고 팔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물론 취급하고 있지. 하지만 정문으로 들어와 당당히 마나석을 팔겠다고 한 놈은 네가 처음이다. 다른 놈들은 전부 건물 뒤쪽에 있는 개구멍으로 들어왔거든.”
“그래서?”
“하이에나처럼 시체나 뒤지고 다니는 네놈도 좋게 말할 때 개구멍으로 들어오란 말이다.”
마법사들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나를 향한 그들의 반감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마나석은 마법사의 심장에서 열리는 열매였다. 즉 마나석을 팔러 왔다는 것은 어느 이름 모를 마법사가 비명횡사했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동료가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찝찝한데, 그것이 자신들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니 화가 날 만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사정이었다. 남의 사정에 신경 써 줄 만큼 나는 착하지 못하다. 내겐 그럴 만한 여유가 애초부터 없었다.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 연구만 해 온 마법사들에게 진짜 살기가 무엇인지 알려 주기로 했다.
화아악!
건물 안이 순식간에 핏빛 살기로 가득 찼다. 살기는 늪보다 음습했고, 광전사의 검보다 흉포했다.
“큭!”
“헉!”
마법사들이 숨을 삼켰다.
나는 살기를 뿌리며 마법사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봤다. 모두 찍소리도 못한 채 내 눈을 피하기 급급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나는 다시 서기와 거래를 시작했다.
“마나석을 팔 수 있을까?”
딸꾹!
서기가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나는 가죽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에 내용물을 쏟았다.
최하급 세 개, 하급 하나, 중급 하나. 마나석 다섯 개가 주머니에서 떼구르르 굴러 나왔다.
“다, 다섯 개씩이나?”
서기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나를 쳐다보는 눈이 마치 최악의 연쇄살인마를 보는 듯했다.
“아니. 이것은 팔지 않을 거다.”
나는 중급 마나석을 주머니 안에 도로 넣었다.
“자, 잠깐 기다리십시오.”
서기는 조심스럽게 네 개의 마나석을 챙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나석의 가치를 제대로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서기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여자 속옷을 머리에 뒤집어쓴 마법사가 발소리를 죽인 채 다가왔다.
혹시 공격인가 싶어 긴장하려던 찰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을 내게 팔지 않겠나?”
“그것?”
“방금 꺼냈다 다시 집어넣은 마나석. 그것을 내게 팔게. 값은 얼마든지 쳐주겠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던 자의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말투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중급 마나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나석을 바라보는 마법사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했던 모습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얼마나 줄 수 있지?”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대로 주겠네. 얼마를 원하지?”
“5만 루덴.”
“…….”
마법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참 만에 다시 폐를 쥐어짜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 5만 루덴을 주겠네.”
“헉! 플랙, 미쳤어? 5만 루덴이라니!”
“5만 루덴이면 상급 마나석도 살 수 있는 금액이잖아! 고작 중급 마나석을 사는 데 5만 루덴이라니!”
“저놈은 팔 생각이 없어! 자넬 우롱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뒤쪽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그 정돈 나도 알아!”
플랙이란 이름의 마법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하지만…… 돈이 있어 봤자 사질 못하면 의미가 없어. 나 같은 평범한 마법사가 중급 마나석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잘 알잖아?”
플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사람을 입 다물게 하는 힘이 내포되어 있었다.
“마법이 4레벨에서 멈춘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어. 중급 마나석 하나만 있으면 5레벨이 될 수 있는데도 10년이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기분을 자네들이 알 턱이 없지. 5만, 아니 10만이어도 좋아. 중급 마나석을 살 수만 있다면. 돈이야 언제든지 다시 벌 수 있지만 중급 마나석을 윗대가리에게 빼앗기지 않고 가질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어. 절대로 놓칠 수 없지.”
플랙의 눈동자는 열망과 갈망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나를 죽여서라도 마나석을 빼앗을 기세로군.”
“…….”
대답이 없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나는 잠시 중급 마나석의 가치와 5만 루덴을 비교해 본 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급 마나석의 가치가 아무리 높다 한들 5만 루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법사의 말처럼 5만 루덴은 상급 마나석을 구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물론 중급 이상의 마나석은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하나의 명검보다 천 개의 평범한 롱 소드가 더 절실했다.
마법사 길드로 들어갈 때는 거지나 다름없던 주머니가 나올 때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돈주머니가 짤랑거렸다. 돈주머니가 가득 차자 마음까지 든든해진 기분이었다.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 옷을 사 입었다. 내가 도망치지 않았나 노심초사하고 있던 여관 주인에게 여관비를 두 배로 챙겨 주자, 입이 함박만 해진 주인이 서비스라며 빵과 고기 스튜를 접시에 듬뿍 담아 주었다.
하루를 더 쉰 후 여관을 나왔다. 트와일에서 가장 좋은 마구간을 찾아 튼튼한 말 한 마리를 구입했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타고 성문으로 가자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상을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는 경비병을 뒤로한 채 모르는 척 트와일을 빠져나왔다.
“이럇!”
해가 떨어질 때까지 말을 몰아 어두컴컴해질 무렵 자타르 왕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산 아래에 도착했다.
바로 그곳에, 놈들의 선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목숨은 카이트 님에게 달려 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유쾌한 목소리로 내게 자신의 목숨을 맡겼던 라티오 상단의 코달.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꼭입니다.
용병대장임에도 불구하고 내 부하가 되고 싶다며 나를 귀찮게 했던 회색늑대 용병단의 고든.
-방금 꺼냈다 다시 집어넣은 마나석. 그것을 내게 팔게. 값은 얼마든지 쳐주겠네.
불과 얼마 전 마법사 길드에서 만났던,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준 플랙이란 이름의 평범한 마법사.
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서서 나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오랜 시간, 짧은 시간 할 것 없이 나와 어울렸던 자들의 머리가 일렬로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몸통을 잃은 수십 개의 머리가 눈을 부릅뜬 채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죽은 날이 제각각인 듯 어떤 것은 썩어가고 있었고, 어떤 것은 여전히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몸속의 어둠이 광포한 웃음을 터뜨렸다. 미쳐 버린 마력이 몸속을 질주한다.
일렬로 늘어서 있는 수십 개의 머리통.
나이트워커.
밤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최악의 암살자.
그것은 나의 선전포고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