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을 잔 탓에 너무 일찍 잠에서 깨었다.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니 마을 거리가 어스름했다.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해가 뜨길 기다렸다가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으로 양고기와 스튜를 주문했다. 양념이 제대로 밴 고기를 먹으니 입에서 살살 녹았다.
양고기를 추가로 주문하자 식당으로 막 내려오던 코달이 혀를 내둘렀다.
“카이트 님은 아침부터 식성이 좋으시군요.”
가만히 있다 순간 카이트가 나의 가명이란 것을 알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짐꾼들이 수레에 짐을 묶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나를 알아본 짐꾼들이 일을 멈추고 인사를 했다. 문득 인원수가 준 것 같아 짐꾼을 불러 물었다.
“노예들은 어디 있지?”
“어제저녁 이곳을 떠난 다른 상단이 사 갔습니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잠자고 있던 여자 노예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풀었던 짐을 다시 싣고, 필요한 식량과 모포 등을 구입한 후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마을을 떠났다.
먼저 출발한 상단의 바퀴 자국이 도로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바퀴 자국을 따라 상단이 이동했다.
향긋한 꽃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구불구불한 도로가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도로 양옆으로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 사슴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때는 여름인지라 사방에서 매미가 울어 댔다.
어느새 서쪽으로 이동한 태양이 마지막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산기슭부터 시작된 땅거미가 서서히 산 정상을 향해 등반을 시작했다. 하늘이 붉은 노을로 아름답게 빛났다.
해가 지자마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산속의 밤은 추웠다. 모두 모토를 뒤집어쓴 채 모닥불 근처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 메뉴는 말린 육포와 옥수수를 끓여 만든 수프였다. 매일 같은 메뉴인지라 모두들 신물이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역시 신물이 났기에 음식 냄새를 피해 구석진 곳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선 알빈이 수레에 앉아 홀로 육포를 뜯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그렇군.”
“나를 완전히 잊고 있는 줄 알았소.”
“내가 할 일은 너를 파뉴트로 데려다주는 것이지, 같이 놀아 주는 게 아니니까.”
알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 안에서 나무토막을 깎아 만든 조각품을 꺼냈다.
“어떻소? 앞으로 내가 신세 지게 될 의족이오.”
바퀴가 달린 의자였다. 원래 이쪽에 소질이 있었는지 상당히 정교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앉은 상태로 바퀴를 밀어서 이동할 수 있는 의자인가? 괜찮은데. 바퀴 부분에 움직임을 고정시킬 수 있는 장치를 다는 것이 좋겠군. 기울어진 곳에서도 멈춰 있을 수 있게.”
내 제안에 알빈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억지로 밝은 척하는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알빈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음침한 올빼미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나뭇가지 그림자가 기괴한 모습으로 흔들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파도 소리를 내며 바스락거렸다.
알빈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파미르 산맥.
자타르 왕국의 동쪽과 클라리스 왕국의 서쪽에 위치한 산맥으로 두 왕국의 국경선 역할을 하고 있는 험산險山.
북남으로 길게 뻗은 산봉우리가 칼날처럼 날카롭고, 산맥 안에 서식하고 있는 흉포한 몬스터들은 사람의 접근을 가로막았다.
상단의 책임자인 코달은 바로 험산으로 우리를 몰고 있었다.
“상단이면 안전한 길을 선택해야 하지 않나?”
코달에게 물었더니 코달이 웃으며 말했다.
“상단이기 때문에 이 길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산맥을 돌아서 갔을 때보다 산맥을 가로질러 갔을 때의 이익이 무려 다섯 배 차이가 납니다. 그 이익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요.”
“그게 너의 목숨이 될지도 모르는데?”
“하하하! 그래서 카이트 님께 호위를 부탁한 것입니다. 제 목숨은 카이트 님에게 달려 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코달이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사라졌다.
가냘픈 체구에 선한 인상이라 유약하게 봤는데 완벽한 착각이었다. 역시 상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인종이었다.
코달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고 있는데 상단이 이동을 멈췄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앞쪽을 바라보니 길 한복판에 아름드리나무 수십 그루가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나무의 잘린 단면이 모두 매끄러웠다.
고든을 불러 나무의 단면을 보여 줬다.
“용병들에게 싸울 준비를 시켜라.”
짐꾼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수레 아래에 몸을 숨겼다. 알빈이 무사히 숨었는지 확인한 후 용병들과 함께 나무를 치웠다. 나무를 치우기 시작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몬스터들이 습격을 개시했다.
험산이라는 악명답게 다양한 몬스터가 섞여 있었다.
“젠장! 이런 것도 추억이라고 해야 하나.”
요새에서 벌였던 몬스터와의 전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두 허둥대지 마! 전력은 우리 쪽이 위다!”
나는 선두에 서 있는 오크를 반 토막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뒤따라오는 놈들을 차례차례 베어 넘겼다.
몬스터의 습격에 당황하던 용병들이 나의 활약에 자극받은 듯 투지를 불태웠다.
“가자!”
“회색늑대 용병단의 힘을 보여 주자!”
와아!
함성과 함께 용병들이 달려들었다.
“혼자 싸우지 말고 세 명씩 짝을 지어 싸워라! 단번에 죽일 생각은 하지 말고 팔꿈치와 무릎을 노려 힘줄을 끊어라!”
나는 요새에서 체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용병들을 지휘했다. 하지만 내 지휘를 제대로 이해하고 수행할 만큼 능력 있는 용병은 거의 없었다.
“크앗!”
“누, 눈이!”
“으아아!”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둥거리는 용병들을 보자 적무도의 투사들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들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나만 바빠졌다.
휘익!
서걱!
콰직!
베고, 때리고, 부수고.
“이러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닌데.”
나의 정체를 캐내려는 고든 때문에 가능하면 정체를 숨기려고 했었다.
“그래도 돈 받는 값은 해야겠지.”
서서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휘오오!
공기가 검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람이 불면서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렸다.
문득 격세지감을 느꼈다.
나를 두려움에 빠뜨렸던 기술이 지금 내 검에서 발현되고 있었다.
“하압!”
휘익!
초승달이 공기를 갈랐다.
쾅!
폭음과 함께 땅이 움푹 파였다. 근처에 있던 몬스터들이 피 떡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한 번 더!”
콰앙!
콰과광!
초승달이 몬스터가 뭉쳐 있는 곳에 떨어졌다.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뒤를 쫓고 짐꾼들은 말을 간수해라!”
기세가 등등해진 용병들이 내 뒤를 쫓아왔다. 우리는 도망치는 몬스터를 학살하며 피의 잔치를 벌였다.
나는 살기를 잔뜩 흘리며 주변 숲을 쏘아봤다.
‘보았느냐? 우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되는지?’
몬스터를 추격하여 학살한 이유는 우리의 무력을 산맥의 몬스터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우리를 사냥감 목록에서 제할 것이다.
“돌아간다!”
너무 멀리 쫓아가다가는 다른 몬스터들이 상단을 습격할 수 있기에 적당한 거리에서 회군했다.
나를 쳐다보는 용병들의 시선에 감탄을 넘어서 존경의 빛이 담겨 있었다. 고든은 아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상단으로 돌아오자마자 벌벌 떨고 있는 짐꾼을 다독여 몬스터의 시체를 치우게 했다.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야 했기에 일이 끝날 때까지 앞에서 감시를 했다.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몬스터들이 몰려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몬스터의 시체를 다 치운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밤이 될 때까지 이동했다.
얼마나 격렬하게 달렸는지 저녁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두 저녁 대신 육포를 씹으며 휴식을 취했다.
모닥불에 앉아서 육포를 뜯던 용병들이 나를 흘끔거리며 속삭이듯 대화를 나눴다.
그것이 신경 쓰여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고든이 다가왔다.
“솔직히 알빈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아직 오러 블레이드는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능숙한 마나 소드는 처음 보았습니다. 웬만한 기사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고든의 표정이 제법 공손했다.
나는 저 멀리 고든 뒤에 앉아 있는 알빈을 노려봤다.
저 입 가벼운 놈을 잊고 있었다. 그동안 실력을 감추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들이 모두 삽질이었다니.
기분이 씁쓸했다.
신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명까지 사용했건만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알빈을 욕하다가 문득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벌써 두세 차례나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했으니 신분을 감추기에는 이미 늦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지간한 곳에선 오러 블레이드를 쓰는 새로운 강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신분이 드러나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힘을 남용하고 다녔을 리 없었다.
게다가 다크섀도우가 아닌 검을 사용하여 싸운 것도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검사가 아니라 격투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먹이 아닌 검으로 싸웠다는 것은, 검이 아니라 검을 매개체로 한 ‘그 무엇’을 사용하기 위함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만약 내 찰나적 깨달음이 옳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휴멜이여! 내가 돌아왔다!
“크크크!”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깜짝 놀란 고든이 크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든이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누구냐고?”
“아닙니다. 불편하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가명을 써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 휴멜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숨어 다닌다는 계획 자체가 사실 썩 기분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칼리온. 어떤 미친놈의 노예로 칼질하다 얼마 전에 자유를 되찾은 투사다.”
“칼리온……. 투사…….”
고든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닥불에 모여 있던 모든 용병들 역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알다시피 최하급 용병이지. 크크크!”
고든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 뭔가 결심한 듯 눈을 빛내더니 내 옆에 바싹 붙어, 역시 대단하다는 둥, 처음부터 고수의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는 둥, 아부를 해 댔다.
코달도 그렇고 고든도 그렇고 보기와는 영 딴판이었다. 한 놈은 생각보다 배짱이 있었고, 다른 한 놈은 생각보다 자존심이 없었다.
역시 모르겠다. 인간이란 존재를.
아마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고든은 무척이나 끈질긴 남자였다. 그리고 자존심도 없는 남자였다. 용병단의 대장인 주제에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날릴 만큼.
“그런데 칼리온 님, 하나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상관을 대하는 말투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뭔데?”
“어째서 최하급 용병 패를 받으신 겁니까? 칼리온 님의 실력이라면 최상급, 아니 특급 용병까지도 가능할 텐데요.”
“나는 용병이 아니니까. 단지 용병 패가 필요해서 용병 등록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특급 용병이 폼 나잖아?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진중했던 처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원래 본성이 이쪽인지 아니면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러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힘이 자유를 준다고 생각하나? 권력의 정점인 제국의 황제가 진짜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랑은커녕 똥오줌도 마음대로 못 싸는 놈이 바로 제국의 황제다. 힘은 또 다른 형태의 구속일 뿐이다.”
고든의 기를 죽이기 위해 나름 독하게 쏘아붙인 거였지만 그의 아부 능력은 나의 상식을 초월했다.
파미르 산맥을 지나 첫 번째로 들른 마을의 용병 길드에서 고든은 자신의 용병 패를 최하급 용병 패로 교체했다. 그러곤 내 눈앞에서 자신의 새로운 용병 패를 흔들며, 말씀에 감명받고 용병 패를 교체했습니다, 라고 무언의 압박을 해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 수단은 무시하는 것뿐이었다.
클라리스 왕국에 도착하고 난 뒤로는 평온한 여정이 계속되었다.
날이 서 있던 용병들의 기강이 금세 나태해졌다.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상단이 지나가는 길은 왕국에서 관리하는 관도였고, 관도에서 습격을 감행할 만큼 어리석은 도적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파뉴트.
상당히 작은 마을이었다. 낮은 구릉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밀밭. 곳곳에 세워진 풍차의 날개가 한가롭게 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순박하고 꾸밈이 없었다.
세속에 찌든 용병이 마음속에서나 그려 보았을 그런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코달이 보수가 담긴 돈주머니를 건넸다.
“알빈 님도 건강하십시오.”
코달은 몇 번씩이나 인사를 한 후 아쉬운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나를 상단 소속의 용병으로 고용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라티오 상단과의 계약이 아직 끝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엑센으로 가야 합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꼭입니다.”
고든을 바라보는 코달의 눈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아 라티오 상단과 회색늑대 용병단의 관계는 고든이 원하는 대로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라티오 상단이 떠났다.
나는 오랜만에 알빈을 업은 채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야 하지?”
“모르오.”
땅바닥으로 집어 던질까 하다 간신히 참았다.
나는 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알빈에게 속은 것이라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나의 살기에 겁을 먹은 알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용병을 그만두면 그녀와 함께 살기로 했던 곳이오. 나도 이곳이 처음이란 말이오. 당신을 속이려고 한 것이 절대로 아니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살기를 가라앉힌 후 눈에 보이는 아무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은 텅 비어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안쪽에서 열 살쯤 된 여자아이가 나왔다.
“손님이세요?”
“그래.”
여자아이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환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창가 테이블로 안내했다.
나는 요기를 채울 만한 음식을, 알빈은 독한 술을 시켰다.
“아, 맞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잊었네. 헤헤!”
여자아이가 뒤늦게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술이 음식보다 먼저 나왔다.
알빈은 원한을 가진 사람처럼 술을 마셨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이미 고주망태가 되었다.
“실비아…… 실비아…… 크흑!”
다 큰 남자가 서럽게 우는 광경을 계속 쳐다보기도 뭐해서 2층 방으로 올라왔다.
나를 방으로 안내해 준 여자아이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실비아가 누구예요? 대체 누구기에 저 아저씨가 저렇게 슬피 울고 있는 건가요?”
“스물세 살의 노처녀.”
알빈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토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울고, 웃고, 그러다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여관의 아이가 참다못해 올라와 하소연을 했다.
코달한테서 받은 주머니를 꺼내 10루덴을 쥐여 주자 여자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는 올라오지 않았다.
뛰어난 청력이 있는 것이 이렇게 괴로울 줄이야.
노련했던 용병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밤새 울려 퍼졌다.
베갯잇을 뜯어 그 안의 솜을 꺼내 귀마개를 만들었다.
세상이 조금 잠잠해졌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눈을 감았다.
짹짹!
짹짹짹!
시끄러운 새소리에 눈을 떴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 촉촉하고 서늘한 바람이었다. 슬그머니 들어온 바람이 방 안을 돌아 나갔다.
머리가 무거웠다.
악몽을 꾼 것 같은데 그것이 정확히 무슨 꿈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악몽의 원흉은 당연히 알빈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식당 전체가 난장판이었다.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굉장하군.”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식당 안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여자아이가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우와…….”
식당에 널려 있는 자신의 일거리를 보며 여자아이가 울상을 지었다.
“여기서 술을 마시던 놈 어디로 갔지?”
그랬다.
숙취의 고통에 빠져 있어야 할 알빈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 바퀴 달린 의자 모양의 조각품이 떨어져 있었다.
“어젯밤에 친구분들이 오셔서 데리고 가셨어요.”
친구라.
방심의 대가였다.
상대가 집요하기로 유명한 나이트워커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뒤를 줄곧 쫓으며 오직 한순간만을 노렸을 것이다. 그 집념만큼은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이제 와서 추적하는 것은 무리였다. 추적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마굴의 지도를 날려야 하나 아쉬워하고 있는데 여자아이가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던졌다.
“아침에 손님이 일어나시면 마을 뒷산에 있는 오두막으로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기분 좋은 함정은 난생처음이었다. 이런 함정이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속아 줄 수 있었다.
“근데…… 친구분이 맞는 거죠?”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여자아이가 석연치 않은 말투로 물었다.
“친구 맞다. 좀 나쁜 친구들이지.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 아침을 준비해 줄 수 있지?”
“드실 건가요?”
“싸 가지고 갈 거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라. 종류는 상관없으니.”
“네, 알겠습니다.”
방으로 올라와 로브를 입고 고든이 준 롱 소드를 허리에 찼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여자아이가 건네주는 빵을 받은 후 여관을 나왔다.
나는 빵을 먹으며 여자아이가 알려 준 뒷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기에는 낮아 보였는데 막상 오르니 제법 높이가 있는 산이었다. 어차피 서둘러 봐야 늦었다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마음이 느긋해졌다.
알빈에겐 안된 일이지만 어차피 그와 나 사이는 계약으로 묶인 관계였다.
계약의 내용은 신변의 보호가 아니라 파뉴트까지의 이동이었다. 즉 알빈이 죽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나였다. 나는 계약의 내용을 충실히 수행한 반면 알빈은 아직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열 받는데.”
투사는 용병처럼 돈에 팔리는 자들이었다. 그런 투사로 3년 이상 살아와서인지 알게 모르게 나도 ‘대가’라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일종의 직업병처럼 말이다.
불쾌한 기운이 산에 감돌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풀벌레마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이트워커 놈들이 뭔가를 준비했나 보군.”
조금 진지해진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 멀리 오두막이 보였다. 통나무로 쌓아 만든 평범한 오두막이었다. 기대했던 복면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함정임을 뻔히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었다.
끼이익!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코가 얼얼할 만큼 지독한 악취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젠장.”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올라왔다. 이와 비슷한 광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참방!
걸음을 내딛자 피 웅덩이에서 핏물이 튀었다. 바닥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한쪽 벽에 알빈이 장식품처럼 걸려 있었다. 팔을 좌우로 벌린 십자가 형태로 매달려 있었는데, 손목과 배에 박혀 있는 대못이 알빈의 몸을 벽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발끝에서 뚝뚝 핏방울이 떨어졌다.
“살아 있는 것 같군.”
내 말에 알빈의 몸이 꿈틀거렸다.
“크크크!”
알빈이 미친놈처럼 웃기 시작했다. 웃을 때마다 상처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죽여 줄까?”
이번에는 알빈도 거절하지 않았다.
“……고……맙소.”
검으로 목을 자르기 직전 그가 말했다.
“클라리스…… 왕국 트와일…… 용병…… 길드…… 내 소지품을…….”
알빈의 목을 잘랐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것은 마굴의 지도 따위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신의였고, 그래서 빚이었다.
“목숨값을 너무 과하게 받았군.”
스릉.
나는 검을 뽑아 마나의 흐름이 엇갈리는 곳에 내리꽂았다.
파직!
불꽃이 튀면서 마나의 흐름이 뚝 끊겼다. 마굴의 지도가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해 오두막 안에 도청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듯했다.
그 말은 곧 놈들 진영에 마법사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였다.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젠장! 이런 것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잖아!”
나는 오두막의 벽을 부수며 밖으로 몸을 던졌다.
화르륵!
바위만 한 불덩이가 오두막 위로 떨어졌다.
쾅!
오두막이 박살 나면서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재빨리 몸을 날려 마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후끈거릴 만큼 불덩이는 뜨거웠다.
다행히 여기서부터는 전과 달랐다.
화살 대신 마법이 떨어졌으니까.
휘이잉!
콰광!
하늘에서 불덩이와 번개가 교대로 떨어졌다.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은 파이어 볼 같은 1레벨 마법뿐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마법들은 한 방, 한 방이 파이어 볼의 몇 배에 달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땅이 뒤집히고, 나무가 불탔다.
휘이잉!
콰과광!
이대로는 끝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법사의 마나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쾌한 감정이 시시각각 나를 좀먹고 있었다.
“언제까지 숨어서 마법이나 날려 댈 참이냐!”
하늘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떨어졌다.
나는 몸을 피하는 대신 검을 들어 중단 자세를 취했다. 어차피 당당하게 행동하기로 했으니 실력을 숨길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아압!”
마법을 멈추게 하려면 마법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 주면 되었다.
휘익!
서걱!
나는 마력이 담긴 검으로 불덩이를 베었다.
콰광!
양단된 불덩이가 좌우 한쪽씩 떨어져 폭발했다. 양쪽에서 발생한 열기에 머리카락 끝이 조금 타 버렸다.
칼춤을 추듯 검을 놀리며 마법을 베기 시작했다.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끊임없이 날아오던 마법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푸르렀던 곳이 불과 잠깐 사이 폐허로 변해 있었다.
불똥이 튄 나무가 활활 타올랐다. 바람을 타고 불이 옆으로, 옆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때 숲 속에서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금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얼굴이 곱상했다. 옷 밖으로 드러난 팔뚝이 무척이나 가늘었다.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검이 허리춤에 매여 있었다. 장식용 검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화려한 롱 소드였다.
“대단합니다. 검으로 마법을 잘라 내다니.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한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군요.”
“누구냐?”
“나이트워커에서 클라리스 왕국을 총괄 담당하고 있는 지부장 헬튼이라고 합니다.”
“마법사 다섯에 자객이 백이라. 전쟁이라도 하러 왔나?”
“제가 좀 겁이 많아서요. 하하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는 눈이 무척이나 탐욕스러웠다. 헬튼의 눈동자에 일렁거리고 있는 탐욕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눈치가 빠르시군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죠. 당신을 나이트워커의 손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손님?”
“그렇습니다. 나이트워커의 지배자이신 파르킨스 님께서는 당신처럼 강한 사람을 좋아하시거든요.”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뭐지?”
헬튼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런, 이런! 이거 제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군요. 대화가 이렇게 잘 통하는 분이신 줄도 모르고 괜히 요란하게 부산을 떨었습니다. 하하하!”
“대가나 말해라.”
헬튼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이트워커의 간부 자리를 드리겠습니다. 조직을 통틀어 13명밖에 없는 지위입니다. 돈, 여자, 권력 등 명예를 뺀 모든 것을 얻게 해 드리죠.”
“명예를 뺀 모든 것이라……. 좋군.”
헬튼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까와 다르게 진심이 담겨 있는 미소였다.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놈이 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군.”
“지금 부족하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원하는 것은 다 들어 드리지요.”
헬튼이 발끈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천천히 힘을 개방했다. 잠들어 있던 광포한 기운이 용솟음쳤다.
“무엇을 원하냐고? 목이다. 나이트워커의 목이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전쟁을 선포했다.
헬튼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건방진 놈! 쳐랏!”
나는 헬튼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검을 들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안타깝게도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숲 속에서 날아온 불덩이 때문이었다.
“칫!”
나는 혀를 차면서 불덩이를 반으로 갈랐다. 그러곤 목표를 수정했다. 헬튼을 죽이기 위해선 주변의 방해꾼부터 처치하는 게 훨씬 더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마법이 날아온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팟!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주위를 살피니 헬튼 뒤쪽에 마법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파팟팟!
나뭇가지를 밟으며 돌진하자 마법사들이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후방에서 마법 지원만 하는 평범한 마법사들이 아니었다. 최악의 암살 집단 나이트워커의 마법사들이었다.
금세 냉정을 되찾은 마법사들이 나를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
“윈드 미사일Wind Missile!”
불화살을 비롯한 온갖 마법이 나에게 날아왔다. 마법사들의 얼굴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내가 곧 가루가 될 것이라는.
하지만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힘을 개방했다.
화아악!
검이 빛을 뿜었다. 마력을 더 주입하자 검의 길이가 주욱 늘어났다.
두 배, 세 배, 네 배.
검의 길이가 계속 길어졌다.
파직!
마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검에 금이 갔다.
조금만 버텨라.
“헉! 오러 블레이드?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헬튼의 경악성이 들렸다.
검을 들어 그대로 내리그었다.
오러 블레이드와 마법이 부딪쳤다.
번쩍!
쾅!
태양과 같은 빛이 눈을 찔렀다. 굉음이 산을 흔들었다. 충격의 여파로 주변의 나무들이 부러졌다. 산불로 막 번지려던 불길이 매서운 바람에 사그라졌다.
빛의 장막을 뚫고 아래로 떨어졌다.
“이럴 수가! 오러 블레이드라니!”
“말도 안 돼!”
나는 우왕좌왕하는 마법사들 사이로 착지했다.
불꽃의 열기로 옷의 대부분이 타 버렸다. 달구어진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휘리릭!
서걱!
나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다섯 마법사들의 목이 일거에 떨어졌다.
푸슛!
목 없는 시체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마법사의 시체는 쓸모가 많으니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나머지 놈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마법사 무리가 죽자마자 사방에서 뛰쳐나오는 자객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싸워 봤기에 항복하라거나, 물러나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서걱!
푸슛!
잘린 곳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자객들은 마치 현혹 마법에 걸린 광전사 같았다. 동료의 죽음에도, 심지어 자신이 죽는 순간에도 무심한 눈을 하고 있었다.
“컥!”
“크아악!”
휘익!
서걱!
나는 자객들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 다니며 그들의 몸을 베었다.
자객의 특기는 암습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는 숙련된 투사와의 정면 대결은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쨍강!
결국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검이 부러졌다.
파지직!
검이 부러졌음에도 오러 블레이드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러 블레이드가 사라지고 다크 블레이드로 진화하였다.
다크 블레이드를 사용한 첫 번째 실전.
그 결과는 전율이었다.
휘익!
나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는 자객에게 다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놈은 깜짝 놀라 방어 자세를 취했다.
검과 검이 부딪쳤지만 충돌음은 들리지 않았다. 다크 블레이드가, 마치 유령처럼, 자객의 검과 자객의 몸을 통과했다.
“어?”
충돌에 대비해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자객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그는 얼른 자세를 바로잡은 채 나를 경계했다.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었나?”
정확히 말하면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었지만 어차피 죽을 놈에게 일일이 설명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자객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한 순간.
파팍!
그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객의 몸이 마치 바람을 불어 넣은 고무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가장 먼저 머리가 빵빵해졌고, 그다음 목, 가슴, 배, 팔과 다리 순으로 부풀어 올랐다.
“크아아악!”
그리고 마침내.
펑!
고무공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자객의 몸이 폭발했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자객들이 경악한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대답 대신 공포에 질린 자객들을 향해 다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휘익!
펑!
휘익!
펑!
내 뒤에 남겨진 시체들이 마치 배 터진 개구리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다크 블레이드를 사용하자 자객들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악마다. 킬킬킬! 악마가 나타났다! 쿠헬헬헬!”
정신이 나간 자객 하나가 피에 젖은 흙으로 진흙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을 지나가면서 다크 블레이드로 그의 목덜미를 훑었다.
펑!
펑!
펑!
순식간에 100명에 달하는 자객이 전멸하였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위력과 그 잔인함이 가히 압도적이었다.
나는 다크 블레이드를 해제했다.
너무 많은 마력을 사용했더니 현기증이 났다. 다크 블레이드를 유지하는 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마력이 소모되었다. 상대의 그릇에 마력을 쏟아부어 그 그릇을 깨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이 많을수록 그리고 적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시전자인 나의 마력이 급격히 고갈되었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없었다면 결코 시전할 수 없는, 때문에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헬튼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흡사 괴물을 보는 눈빛이었다.
헬튼에게 나이트워커에 대해 물었다.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에 적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나이트워커의 지배자이신 파르킨스 님의 조카다! 나를 건드리면 파르킨스 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나이트워커의 인물치고는 실력도, 정신력도 변변치 않더라니 역시 낙하산으로 간부가 되었나 보다.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 보답을 해 주지.”
나는 알빈의 상태를 떠올린 후 그가 받았던 고문을 헬튼에게 그대로 재현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저항하더니만 손가락 두 개를 자르자 그때부터 술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낙하산이라도 그렇지 명색이 13명뿐인 간부 중 하나란 놈이 이렇게 쉽게 조직의 정보를 팔 줄이야.
알빈과 같은 모양새를 만들어 줄 요량이었지만 눈물, 콧물 흘리며 질질 짜고 있는 모습을 보자 고문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나는 헬튼의 목을 반만 자른 후 바닥에 던져 놓았다. 놈은 벌레처럼 발버둥치다 한참 만에 죽었다.
“네가 받은 고통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그냥 이 정도로 만족해.”
흔적조차 거의 사라진 오두막을 향해 중얼거렸다.
헬튼의 몸을 뒤지자 예상대로 돈과 보석이 가득 담긴 주머니와 섬세한 문양이 그려진 단검이 나왔다.
단검을 들고 마법사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단검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마법사들의 가슴을 십자 모양으로 갈랐다. 그러곤 개봉한 가슴에 손을 넣어 심장을 꺼냈다.
다섯 마법사의 심장을 모두 꺼내 땅바닥에 나란히 늘어놓자 그 광경이 자못 그로테스크했다.
“이래서 마법사들이 마굴을 파고 숨는 것이군.”
내가 해 놨지만 참으로 못 할 짓이었다. 인간의 심장을 파먹는다고 알려진 몬스터 뱀파이어가 된 기분이었다.
가장 왼쪽에 있는 심장을 들어 단검으로 푹 찔렀다. 심장을 가르고 반대로 뒤집자 그 안에서 파란 빛깔의 돌멩이가 또르르 굴러 나왔다.
마나석이었다.
다섯 개의 심장에서 꺼낸 다섯 개의 마나석을 햇빛에 비춰 가며 색깔을 비교했다.
마나석은 하급일수록 파란 빛깔을 띠고, 상급으로 올라갈수록 하얀색이 되었다.
현자로 불리는 대마법사의 마나석은 하얀색을 넘어 반대편이 투영될 만큼 투명하다고 책에 적혀 있었다.
최하급이 세 개, 하급이 하나 그리고 무려 중급이 하나였다. 중급 마나석의 주인은 아마도 귀족 대접을 받을 만큼 실력 있는 마법사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땡잡은 것이다.
다섯 개의 마나석을 품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튼의 자백이 진짜라면 나이트워커의 전력은 일개 왕국을 상회할 만큼 강력한 조직이었다. 혼자서 그런 조직과 싸운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게다가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피곤하게 됐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자 앞날이 캄캄했다.
산을 내려왔더니 산 입구 쪽에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마법의 여파로 옷이 타 버려 거의 알몸에 가까웠다. 또한 자객들과의 싸움에서 피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 상태로 있을 순 없기에 나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아는 얼굴을 찾아 옷과 목욕물을 부탁했다.
여관의 여자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혹은 딸꾹질을 하며, 혹은 제발 잡아먹지 말아 달라고 빌며, 목욕물을 받아 주었다.
손에 10루덴을 쥐여 주었지만 이번에는 소용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10루덴을 더 주었다.
나는 정말로 느긋하게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 * *
파뉴트와 트와일은 크기에서 목적까지 완전히 상반된 곳이었다. 파뉴트가 클라리스 왕국 변방에 위치한 시골이었다면 트와일은 클라리스 왕국 중심에 위치한 상업 도시였다. 그것도 클라리스 왕국을 너머 남부 대륙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만큼 유명한 상업 도시였다.
트와일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상단들로 온갖 재원이 넘쳐 났으며, 그로 인해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의 도시가 되었다.
……라고 책에 쓰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쨌든 트와일은 책에 등장할 만큼 비중이 있는 도시였다.
나는 잠자는 시간을 줄여 가며 트와일을 향해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다.
알빈의 말을 들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이트워커의 자객들도 도청 마법을 통해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들보다 먼저 마굴의 지도를 손에 넣어야 했다.
말을 타고 달려도 20여 일이 넘는 거리를 맨몸으로 달려 절반이나 단축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산 아래 위치한 도시를 내려다봤다.
높은 성벽이 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었다. 파뉴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커다란 건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건물이 바로 이곳 트와일의 지배자, 리우넬 백작의 저택이었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군.”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목욕은커녕 쉬지도 않고 달려온 탓에 온몸이 땀과 먼지로 지저분했다.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가 볼까.”
나는 트와일로 향하는 비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남부 대륙 최대의 상업 도시답게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성문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성문 앞에 서 있는 경비병의 수와 통행 확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 보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미친 듯이 달려와 목적지가 눈앞인데 그 입구에서 이렇게 시간을 날려 먹고 있으니 초조한 마음이 하늘을 찔렀다.
“최소한 반나절은 걸리겠군.”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나이트워커 놈들이 용병 길드로부터 마굴의 지도를 건네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성문이라도 몰래 넘어갈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웬 거지 한 명이 건들거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사람 우라지게 많네.”
거지는 성문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쳐다보다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곤 갑자기 성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지!”
성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경비병이 서로의 창을 교차시키며 입구를 막았다. 대도시의 경비병답게 위풍당당했다. 가죽 갑옷으로 둘러싸인 경비병의 가슴에는 클라리스 왕국의 문장인 뿔 달린 유니콘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이 안 보이느냐?”
왼쪽에 서 있던 경비병이 거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거지를 바라보는 눈빛이 위압적이었다.
거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여기 시퍼렇게 뜨고 있는 눈이 안 보여? 멀쩡한 사람을 장님 취급하면 안 되지.”
왼쪽 경비병은 황당한 얼굴로 동료를 쳐다봤다. 하지만 오른쪽 경비병도 역시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지의 당당함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분주히 눈동자를 굴렸다.
얼마 안 있어 경비병들이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거의 정답에 가까운 결론일 것이다.
“썅! 떠돌이 거지 주제에 지금 시비 거는 거냐? 그것도 감히 리우넬 백작가의 병사에게?”
“썅! 당연히 시비 거는 게 아니지. 내가 그렇게 한가한 놈인 줄 아냐? 근데 리우넬 백작가에선 시비를 거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한가 보지?”
경비병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창대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거지와 경비병의 대립을 구경했다. 사내놈들이 뭔 말이 그리 많냐, 하며 싸움을 부추기는 사람도 있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넌 또 뭐냐!”
신경이 날카로워진 왼쪽 경비병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 미친놈 일행이다. 조언 하나 해 주지. 미친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니 붙잡고 실랑이하지 말고 그냥 들여보내 주는 게 어때?”
경비병들이 또 다른 미친놈을 발견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용병 패를 보여 주는 척하면서 슬쩍 돈주머니를 건넸다. 코달에게 받은 보수를 통째로 주었기 때문에 제법 묵직했다.
이미 나에게는 나이트워커 간부의 돈주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코달에게 받은 보수는 말 그대로 푼돈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게 확실했다.
예상대로 주머니의 무게를 확인한 경비병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를 보는 시선이 미친놈에서 돈 많은 미친놈으로 격상되었다. 조금도 기쁘지 않았지만 성문을 무사통과했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상업 도시답게 트와일은 가장 더운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길가 양옆에 좌판을 펼친 상인들이 하나라도 더 물건을 팔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손님! 물건 좀 보고 가세요!”
“쌉니다, 싸요!”
“그냥 가지 마시고 보고들 가세요!”
상인과 행인으로 도로가 북적여 이동하는 데 매우 불편했다. 게다가 내 정체가 돈 많은 미친놈이란 사실이 퍼지면서 열 발자국마다 한 번씩 소매치기가 달라붙었다.
나는 소매치기들의 집요한 공격을 방어하며 용병 길드로 직행했다.
“무슨 일로 오셨…… 큭!”
접수대에 앉아 있던 여자가 코를 감싸 쥐었다.
“이겡 무숭 냉새종?”
“사나이의 냄새다.”
경멸이 섞여 있는 여자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울컥 말하고 말았다.
여자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여자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모든 용병들도 나를 쳐다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뻔뻔해지는 것.
“무승 일롱 오셩나용?”
빨리 보내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여자의 말투가 상당히 빨랐다.
“맡겨 놓은 물건을 찾으러 왔다.”
“물겅을 맡깅 용병의 이릉이 뭔가용?”
“알빈.”
여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왁자지껄하던 길드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용병들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흘끔거렸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는 코에서 손을 뗀 채 제대로 된 언어로 외치며 건물 안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중후한 인상의 남자가 안쪽에서 나왔다.
“나는 트와일 용병 길드의 지부장 듀라스라 하오. 용병 패를 확인할 수 있겠소?”
나는 용병 패를 건네줬다.
듀라스가 용병 패의 위조 여부를 살폈다.
“최하급이군.”
내가 최하급임을 확인하자마자 듀라스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나에게 용병 패를 휙 던져 주며 인상을 썼다.
“젠장! 알빈 놈,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 봐라.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알빈은 죽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듀라스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그놈이 죽었다고? 용병 패를 가지고 있나?”
“회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손으로 목을 벴으니 죽은 것은 틀림없다.”
“하!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알빈은 중급 용병이었다. 최하급인 네놈이 어떻게 중급 용병의 목을 벤단 말이냐!”
듀라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코웃음을 치는 대신 사실을 알려 주었다.
“고문을 받고 죽어 가고 있었거든.”
듀라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나이트워커.”
순간 대화를 듣고 있던 길드 안의 용병들이 크게 술렁였다.
용병들이 천천히 다가와 내 뒤를 에워쌌다. 적의를 가진 자들에게 뒤를 내주는 것은 상당히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지금 네놈은 상당히 난처한 상황에 있어. 그리고 만약 나이트워커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더욱 난처해질 거야.”
나는 듀라스의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젠장! 나이트워커가 이곳에 찾아왔었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듀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일주일 전이었다.”
“거짓말! 일주일이라면 그놈들이 3일 만에 왔다는 소린데 그건 절대로 불가능해! 그놈들보다 빨리 오기 위해 얼마나 죽을 똥을 쌌는데.”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은 듀라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최하급 용병 주제에 말버릇이 싸가지가 없구나.”
듀라스는 자신의 용병 패를 꺼내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용병 패에 상급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젠장! 어떻게 3일 만에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거지? 말을 타도 불가능할 텐데.”
나이트워커 놈들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나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군! 메시지 마법을 사용한 게 분명해. 그놈들에게 마법사가 있었다는 걸 깜박 잊고 있었군. 진짜 젠장이군. 한마디로 쓸데없이 개고생을 했다는 거잖아.”
“이 새끼가 진짜!”
깔끔하게 무시했더니 듀라스가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뒤에서 나를 포위하고 있던 용병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신경이 거슬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휘익!
서걱!
품에서 헬튼의 단검을 꺼내 아직도 보란 듯 내밀고 있는 상급 용병 패를 반으로 잘랐다. 단검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봤으니 나의 실력이 결코 최하급 용병이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작달막한 오러 블레이드를 듀라스의 눈앞에 휙휙 흔들었다. 듀라스는 마치 동상처럼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빈손을 허공에 내민 채 단검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만 좌우로 움직였다.
“알빈이 맡긴 물건은 어디 있지?”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듀라스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잠깐 사이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알빈의 물건은 건네줄 수 없습니다.”
말투가 또 바뀌었다. 적응이 상당히 빠른 놈이었다.
“어째서지?”
“용병 길드의 규정상 물건을 맡긴 당사자가 아니면 함부로 물건을 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당사자 이외의 사람이 물건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허락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당사자의 용병 패나 아니면 당사자가 물건을 맡길 때 미리 지정해 놓은 암호입니다. 암호는 정해 놓을 수도 있고, 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알빈의 경우는 정해 놨습니다.”
“만약 용병 패도 없고, 암호도 모르는 사람이 억지로 물건을 받아 가려고 하면 어떻게 되지?”
“……용병 길드 전체와 싸워야 할 것입니다.”
듀라스의 눈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접수대의 여자가 알빈의 물건을 찾으러 왔다는 말에 과민반응을 보인 이유. 그리고 듀라스와 길드 안의 용병들이 나이트워커란 단어에 적의를 나타내는 이유.
“한번 붙었군, 그놈들이랑.”
“그렇습니다. 물건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검은 복면을 쓴 놈들이 이곳을 습격했습니다. 간신히 습격을 막은 다음 시체들을 확인해 보니 모두 이마에 나이트워커를 뜻하는 전갈 문신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마굴의 지도가 아무리 가치가 높다고 해도 용병 길드 전체와 전쟁을 벌일 만큼 대단한 물건은 결코 아니었다.
숨은 저력으로 따지면 일개 왕국을 능가한다는 나이트워커였지만 용병 길드의 저력은 어느 누구도 가늠할 수 없었다. 대륙 전체에 퍼진 전쟁의 프로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그들이 발휘하는 파괴력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이트워커의 지배자라는 파르킨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병 길드와의 전쟁을 선택했다는 것은 알빈이 남긴 지도가 그만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는 소리였다.
암호라.
나는 머릿속을 헤집어 알빈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능청스러운 알빈, 노련한 알빈,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알빈, 죽기 직전의 알빈.
모든 알빈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암호를 말했다.
“실비아.”
나는 조금의 갈등도 없이 알빈의 유산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나이트워커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마굴의 지도를 가지고 싶어 하는지를.
마굴의 지도에 적혀 있는 것은 단 한 단어.
바르디엘.
시간과 공간을 지배했던 위대한 대마법사의 이름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