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병 패 (26/45)

용병 패

산중턱에 위치한 연못가에 임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가죽 주머니에 물을 담은 후 열에 들떠 헛소리를 지껄이는 알빈에게 물을 먹였다.

옷을 입은 채 물속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순식간에 연못이 붉게 물들었다. 얼굴과 손에 묻은 피는 대충 씻어 냈지만 옷과 로브에 스며든 피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로브는 버렸다.

동굴을 떠날 때 들고 나온 짐이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부서졌고, 다른 하나는 피에 절어 버려야 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몸뚱이뿐이었다.

연못가에 자리를 잡자마자 피 냄새를 맡고 짐승들이 모여들었다. 움직이기도 귀찮고, 알빈의 안전도 염려되어 가까운 곳에서 사냥하기로 결정했다.

부스럭거리는 풀숲으로 돌멩이를 던지니 여우 한 마리가 펄쩍 뛰어올랐다.

깨갱!

한 번 더 돌멩이를 던져 여우의 머리를 맞혔다.

여우의 목을 잘라 알빈의 입안에 피를 흘려 넣었다.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역류한 피로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태양이 서쪽 하늘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길고 길었던 하루가 저물어 갔다. 하나, 둘 떠오르는 별의 개수를 세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알빈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정확히 3일 후였다.

이대로 죽겠구나 싶어 반쯤 포기하고 있을 때 그가 눈을 떴다. 그는 살아나서 기뻤고, 나는 마굴의 지도를 잃지 않아서 기뻤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가 한 첫마디.

“당신 머리맡에 떠 있는 저것이 대체 뭐요?”

“도망자를 추적하기 위한 마법……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 도망자였소? 무슨 죄를 지은 것이오?”

이 와중에 농담을 하다니.

배짱이 좋은 건지, 아니면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헛소리할 기운이 있는 것 봐서는 의외로 살 만한가 보군.”

연못가에서 하룻밤을 더 지낸 뒤 알빈을 업고 산을 내려왔다.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만 빼고 빠르게 이동한 지 5일 째, 마침내 산에서 벗어나 도로가 나왔다.

“정말 대단한 체력이오! 사람을 업고서 5일 만에 산을 내려오다니. 나와 체구도 비슷한데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이오? 게다가 잠깐 보아서 확신할 수 없지만 당신의 그 검술! 분명 오러 블레이드였소. 혹신 당신, 소문만 무성한 특급 용병 아니오?”

정신을 차린 후부터 알빈은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시시콜콜한 농담을 던지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미친 듯이 웃었다. 실비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더욱 심해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잊기 위한 반사적인 작용이었다.

그는 노련한 용병이었지 노쇠한 용병은 아니었다. 그는 용병이기 이전에 인생의 반환점도 채 돌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미 나의 친절을 거부했다. 그러니 앞으로의 인생은 모두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

알빈은 계속 떠들었고, 나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마굴의 지도를 얻은 것은 우연이었소. 길가에 죽어 있는 늙은 마법사의 품을 뒤지다 발견했지. 아! 오해 마시오.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진짜로 죽어 있었소.”

그때였다.

꺄악!

멀리서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가 싶어 귀를 기울여 봤지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헌데 그 광경을 본 놈이 있었던 것이오. 그것도 재수 없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나이트워커Night Walker 소속의 자객이었던 거였소. 그때부터 보기만 해도 살 떨리는 자객들이 우리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조용!”

“무슨 일이오?”

“조용히.”

나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알빈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황량한 도로에 적막이 흘렀다. 도로 양쪽에 펼쳐져 있는 들판의 풀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이 살갗을 찔렀다. 도로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꺄악!

좀 더 분명하게 소리가 들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여자의 비명 소리였다.

“…….”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아 알빈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용한 게 마음에 들어 잠자코 있었다.

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자 앞쪽에 멈춰 있는 상단이 보였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상쩍은 무리가 상단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들이 무기를 빼 든 채 복면인 무리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도적인가?”

정황을 살핀 알빈이 중얼거렸다.

상단의 짐마차에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아 이미 한차례 기습을 당한 듯 보였다.

짐꾼과 노예가 짐마차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섞여 있는 여자 노예가 간간이 비명을 질러 댔다.

“네놈들은 누구냐!”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있는 용병이 사납게 외쳤다.

“짐마차 안의 물건을 전부 넘겨주면 곱게 물러나지. 크크크!”

도적들이 큭큭거리며 비웃었다.

“도적놈들이 숫자만 믿고 까부는구나. 우리 용병들이 호구로 보이는 거냐?”

“말귀를 못 알아듣는 멍청이군. 어쩔 수 없지. 쳐라! 모조리 죽여 버려라!”

함성과 함께 도적과 용병이 충돌했다.

숫자는 도적이 많았지만 실력은 용병 쪽이 좋았다. 결과적으로 백중세였다. 이대로 가다간 양패구상이 분명한데 전력이 백중세라 어느 쪽도 병력을 먼저 물릴 수가 없었다.

모두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도와주지 않을 거요?”

“내가 왜?”

“상단의 수레를 빌리면 나를 업고 갈 필요가 없잖소.”

괜찮은 제안이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도 여기서부터 일주일은 걸렸다. 묘하게 조종을 당하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나빴지만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게다가 복면인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상단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짐마차 아래로 알빈을 굴려 넣었다.

“어이쿠! 뭐하는 짓이오? 좀 살살 할 수 없소?”

중년 용병의 앙탈을 깨끗이 무시하고 전투가 한창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적들의 대장을 잡아 한 방에 전투를 끝내 버릴 심산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근처에 가 보지도 못한 채 들키고 말았다.

은신에 일가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적 따위에게 들킬 만큼 허접스러운 실력도 아니었기에 의아해하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머리맡에 떠 있는 붉은 구슬의 존재를.

“망할 복면인들.”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신경질적으로 뛰쳐나가 복면을 쓴 놈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퍽!

퍽!

퍽퍽퍽!

“크헉!”

“웬 놈이, 컥!”

“정체를 밝, 큭!”

일단 복면을 쓴 놈들 위주로 주먹을 날렸고, 진로에 방해가 되거나 거치적거리는 용병도 일단 때리고 보았다.

“무, 물러서라! 모두 물러서!”

나의 전투 방식을 깨달은 용병대장이 용병들을 뒤로 물렸다.

순식간에 모든 도적들이 쓰러졌다.

용병들이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괴물이었어.”

짐마차 아래서 기어 나온 알빈이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단의 책임자가 인사를 하기 위해 나오려다 용병대장의 제지를 받았다.

용병대장이 상단 책임자의 귀에 뭐라고 중얼거렸다.

언뜻언뜻 들리는 말을 종합해 보니 내 머리맡에 떠 있는 붉은 구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책임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적들을 압도적으로 물리친 내가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니 놀랄 만도 했다.

책임자 대신 용병대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와줘서 고맙소. 나는 라티오 상단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회색늑대 용병단의 고든이라고 하오.”

“칼리, 아니 카이트다.”

나는 가명을 말했고, 고든은 한눈에 그것을 꿰뚫어 봤다.

용병대장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원했던 모양이다. 귀찮아서 알빈을 가리켰다.

“궁금한 게 있으면 저 용병에게 물어봐라.”

용병대장을 알빈에게 보낸 후 나는 짐이 별로 없는 수레에 몸을 눕혔다.

알빈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 주는 사람을 만나서 신이 난 모양이다. 노련했던 놈이었는데 점점 풋내기가 되는 것 같았다.

“안 돼! 컥!”

“으악!”

“사, 살려 주, 크헉!”

용병들이 도적들을 확인 사살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것만 빼면 모처럼 홀가분하고 따뜻한 여름 오후였다. 비명이 잠잠해지자 숨어 있던 짐꾼들이 밖으로 나와 흐트러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떨어진 짐을 수레에 싣기 위해 다가온 짐꾼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에 뭘 보냐는 식으로 노려봐 줬더니 기겁을 하며 도망갔다.

잠시 후 용병대장과 함께 상단의 책임자가 내가 있는 수레로 찾아왔다.

“저는 라티오 상단의 코달이라고 합니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얘기는 알빈 님에게 들었습니다. 최악의 암살 집단으로 유명한 나이트워커의 추격망에서 벗어나시다니 대단하군요.”

알빈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코달은 한참이나 공치사를 한 끝에 본론에 들어갔다.

“이번 습격으로 상단을 호위해야 하는 용병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부탁입니다만, 혹시 저희 상단의 호위를 맡아 주실 수 없겠습니까? 물론 보상은 충분히 해 드리겠습니다.”

도와준 대가로 말 한 필과 수레 하나를 받아 내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상단과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무엇보다 알빈의 수다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상단은 어디까지 가는 거지?”

“클라리스 왕국의 엑센까지 갑니다.”

나는 머릿속에 지도를 떠올렸다. 현재 위치에서 엑센까지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조금 돌아 파뉴트를 거칠 수 있다면 호위를 받아들이지.”

“그럼 호위도 파뉴트에서 끝나는 것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뉴트에서 엑센까지는 불과 하루 거리였다. 서두르면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안전에 대한 대가로 그 정도면 싼 편이리라.

“좋습니다. 파뉴트에 들렀다 가겠습니다.”

“상단의 호위를 맡겠다.”

충분히 준다는 말과 다르게 코달은 보수를 짜게 불렀다. 실랑이하기 귀찮아 고개를 끄덕여 주니 수지맞았다는 얼굴로 코달이 돌아갔다.

“당신 정도의 실력이라면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빨리 허락했소.”

고든이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오지랖 넓은 용병대장이 떠나자 마침내 나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말 많은 알빈과 함께 지내서 그런지 정신적인 피로를 느꼈다.

알빈의 일에 휘말린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안락함.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스르륵. 눈을 감았다.

상단의 여정은 지루할 만큼 평온했다.

도적의 습격을 마지막으로 상단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음식 냄새를 맡고 난입한 멧돼지가 유일한 위험이었다.

밤이 되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낮 동안 달구어진 세상이 서서히 식었다. 별똥별 하나가 북쪽 하늘을 향해 떨어졌다. 바람에 떠밀린 구름이 두둥실 흘러갔다.

모닥불 옆에 앉아 불침번을 서고 있는데 고든이 다가왔다.

“교대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잠이 안 와서 나온 거요.”

나는 옆으로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솔직히 놀랐소.”

“무엇이?”

“당신이 이렇게 성실하게 불침번까지 설 줄은 몰랐소. 좀 더 제멋대로인 괴팍한 사람으로 생각했거든.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그 믿음도 이제 버려야 할 것 같소.”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빈에게 아니라고 들었지만 정말 용병이 아니오?”

“떠돌이일 뿐이다.”

“그럼 신분 패는 있소?”

“없다.”

고든이 끄응 하고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역시 묻기를 잘했군. 알겠지만 우리는 교역 상단이오. 신분 패도 없이 어떻게 도시 안에 들어가려고 했소?”

“…….”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들어가는 방법을 알 리 없었다.

혼자라면 성벽을 넘으면 된다. 하지만 상단의 호위를 맡고 있는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신분 패 없이 도시로 들어가려다 들키면 도망친 영지민이나 노예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물론 도망쳐 버리면 그만이지만 나와 함께 있었던 라티오 상단은 큰 손해를 볼 것이 분명했다.

“사연이 있는 듯하니 자세히 묻지는 않겠지만 적당한 신분이 있는 게 앞으로도 편할 거요. 내일 마을에 도착하면 용병 길드를 찾아가 용병 패를 받으시오.”

고든은 품 안에서 자신의 용병 패와 돈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내 소개로 왔다고 하면 자세한 건 묻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이 돈은 등록비요. 당신이 받을 보수에서 미리 제한 것이니 나중에 딴말하지 마시오.”

나는 용병 패와 돈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시간이 된 것 같아 고든과 교대한 후 잠자리로 돌아왔다.

알빈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넉살을 이용해 불과 며칠 만에 용병은 물론 짐꾼과도 친해졌다. 우울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놈이었다.

쩔그렁!

새우잠을 자던 여자 노예가 몸을 뒤척이자 발목의 쇠사슬이 서로 부딪쳤다. 노예는 벌떡 일어나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아무도 자신을 때리러 오지 않자 다시 몸을 뉘었다.

그 노예의 얼굴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 한참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상단은 고든이 말했던 마을에 도착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출입문 앞에 창을 든 병사 두 명이 지루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조용히 상단을 빠져나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든이 잽싸게 따라와 속삭였다.

“용병 패를 받으면 마을에서 제일 큰 여관으로 오시오. 기다리고 있겠소.”

작은 마을이라 신분 패를 검사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지만 문제는 머리맡에 떠 있는 붉은 구슬이었다. 제법 높이 떠 있어 일부러 쳐다보지 않는 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을 위해 마을엔 따로 들어가기로 했다.

신분 패도 없는 데다 도망자용 추적 마법까지 걸려 있으니 핑계 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타리를 넘어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용병 길드를 찾아갔다.

“등록하러 왔다.”

접수대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나를 흘끔 쳐다봤다.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니 묻는 말에 대답해 주십시오.”

접수대에 앉아 있는 남자가 종이와 펜을 꺼냈다.

나는 고든의 용병 패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있으면 신청서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던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남자는 용병 패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온 그는 용병 패를 돌려주며 말했다.

“중급 용병 패로 확인되었습니다. 중급 용병의 추천이 있으면 바로 최하급 용병으로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좀 더 높은 등급을 원하신다면 안쪽에 있는 대련장에서 테스트를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하급 용병으로 등록하겠다.”

“두 시간 후에 다시 오십시오.”

밖으로 나갔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다시 길드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이곳에 마법사가 있나?”

“용병 패에 위조 방지 마법을 걸어 주는 마법사님이 계십니다만, 마법사님은 왜 찾으십니까?”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 그냥 보여 주기로 했다.

나는 접수대의 남자를 밖으로 불렀다. 그는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붉은 구슬을 보자마자 헉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지 못하게 뒷덜미를 잡아 다시 길드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트워커란 놈들이 멋대로 달아 놓은 장신구다. 마법을 해제하고 싶으니 마법사를 데려와라.”

“하, 하지만, 하지만…….”

역시 말만으론 의심을 없앨 수 없었다.

“나를 감시할 사람을 불러도 좋다. 현상금 수배지를 찾아보고 내가 없으면 그때 마법사를 데려와라. 이 정도면 데려올 수 있겠지?”

잠시 후 10여 명의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주위를 감쌌다. 그들은 한 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은 채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하품을 한 뒤 긴 의자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인기척 소리에 눈을 뜨니 50대 후반의 마법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마법사 뒤로 용병들이 호위를 서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어느새 30명에 육박해 있었다.

“어쩌다 도망자 신세가 되었느냐?”

“쫓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도망자는 아니지. 다 죽었거든.”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간간이 살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아 마법사의 지위가 제법 높은 듯했다.

“말투가 귀엽구나. 마음에 들어.”

“남자 취향이 없으니 마법이나 해제해라.”

“감히 저런 망발을 하다니!”

“미친놈이군!”

“무례한 놈! 어서 용서를 빌지 못하겠느냐!”

마법사는 손을 들어 용병들을 진정시켰다.

“오래 살 팔자는 아니구나.”

“점쟁이 해도 되겠군.”

나는 기지개를 켜며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잡소리는 그만하고 내게 걸려 있는 마법을 해제시킬 수 있나, 없나, 그것만 말해라.”

마법사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담담한 척했지만 내심 화가 났나 보다.

“물론 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얼만데?”

“3만 루덴.”

평범한 농민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5루덴 정도였으니 마법사의 견적은 명백한 거절이었다.

“마법사 길드로 가야겠군.”

내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마법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만약 내가 지정한 용병과 싸워서 이기면 마법을 공짜로 해제해 주겠다. 어떠냐? 해 보겠느냐?”

마법사 길드를 찾으러 돌아다니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눈앞의 마법사가 하는 짓이 귀여워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왕이면 용병 패도 공짜로 해 줘.”

“그러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내가 이겼을 경우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겠다고 마나에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나?”

“…….”

허를 찔렸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으로 보니 마법사의 흉계가 짐작이 갔다.

“싫으면 말고.”

내가 문 쪽으로 한 발 내딛자 마법사가 급히 말했다.

“하겠다. 마나의 약속을 하지. 제법이구나. 마나의 약속을 알고 있다니.”

마나의 약속까지 받아 냈으니 더 이상 중년 마법사와 담소를 나눌 이유가 없었다.

“나와 싸울 상대가 누구지?”

“성미가 급하구나. 길거리에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따라와라.”

용병 길드 안쪽에 위치한 대련장에는 어느새 구경 나온 용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는데, 그 대상은 나였다.

“상대는?”

“나다.”

마법사 뒤에서 거구의 용병이 걸어 나왔다. 누군가와 비교될 만큼 커다란 체구였다. 놀랍게도 체구뿐만 아니라 얼굴 형태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싫은 놈이 생각나는군.”

“내 이름은 마록이다.”

얼씨구. 이름마저 비슷하네.

“너 따위에게 알려 줄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건방진 새끼가!”

놈이 달려들었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도발에 걸려들어 내가 다 무안할 정도였다.

마록은 양손에 하나씩 든 바스타드 소드를 풍차처럼 돌리며 나를 압박해 왔다.

부웅!

부웅!

마법사가 자신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상대는 무기와 함께 몸이 두 동강이 나리라. 최하급 용병 패를 신청한 내가 이길 것이라곤 결코 상상할 수 없었겠지.

부웅!

부웅!

나는 살짝살짝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그러다 쿵, 진각을 밟으며 마록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헉!”

깜짝 놀란 마록이 숨을 들이켰다.

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 대가를 마록의 배에 갚아 주었다.

퍽!

“컥!”

올려치기 한 방에 마록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굽혔다.

두 방도 필요 없었다. 마록은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들끓던 욕설과 저주와 응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약속을 지켜야지?”

내 말에 정신을 차린 마법사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굴욕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약속은?”

한 번 더 채근하자 마법사가 어금니를 꽉 문 채 나를 노려봤다.

“지킨다.”

마법사가 눈을 감은 채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마나가 요동쳤다. 손으로 뻗어 나를 가리키는 순간 하마터면 옆으로 몸을 날려 피할 뻔했다.

“캔슬Cancel!”

붉은 구슬이 생긴 이래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불쾌한 마나의 기운이 봄날에 눈 녹듯 사라졌다.

“용병 패는 좀 있다 가지러 오지.”

용병 길드를 나가려는데 구경하고 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나를 감쌌다.

마법사가 미친 사람처럼 발작했다.

“물러서라! 빨리 물러나지 못해!”

한 명이라도 내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자신의 마나가 모두 사라질 터이니 미치기 일보 직전인 것도 이해가 갔다.

마나의 약속이란 그런 것이었다. 어기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마나가 그를 거부한다.

화르륵!

급하긴 급했나 보다. 마법사는 양손에 불꽃을 피워 수하들을 위협했다. 놀란 용병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절대로! 절대로! 이자에게 손을 대지 마라!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 주겠다!”

도망치는 용병들을 향해 마법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모두 마법사의 진심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는 번거로운 싸움을 피하게 돼서 좋았고, 마법사는 자신의 마나를 지키게 돼서 좋았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늘 생각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재미도 있고, 슬프기도 한 것이지만.

고스란히 절약한 돈으로 로브와 롱 소드를 구입했다. 로브는 전의 것보다 방한 효과가 떨어졌고, 롱 소드는 전의 것과 비교도 못 할 만큼 싸구려였지만 어쨌든 이로써 모든 것이 원상 복구 되었다.

줄곧 따라다녔던 붉은 구슬이 사라져서인지 무척이나 홀가분했다.

마을을 둘러보다 용병 길드로 돌아가 용병 패를 받고 나오는데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기절해 있느라 마법사의 경고를 듣지 못한 유일한 용병, 마록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마법사의 종말을 보았다.

불쌍한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나를 죽이려 한 인간을 불쌍하게 여길 만큼 나는 착하지 못하다. 그래서 일부러 마법사의 상태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따라와라.”

나는 마을을 둘러보다 발견한 한적한 공터로 마록을 데려갔다.

“어째서 네놈이 최하급 용병 패를 가지고 있는 것이냐?”

“어쩌다 보니. 그게 중요한가?”

마록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눈동자 너머로 투지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중요하지 않지. 크크크! 이름이 뭐냐?”

“너 따위에게 알려 줄 이름은 가지고 있지 않다.”

완전 바보는 아니었나 보다. 이번에는 달려들지 않았다. 그만큼 신중을 기하는 것이리라.

“최하급 용병에게 이것을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록이 두 검을 교차시켜 X 자를 만들었다.

챙!

무게도 익힐 겸 새로 산 검을 뽑았다.

“……격투가가 아니었냐?”

“그게 중요한가?”

“그렇군. 중요하지 않지. 크크크!”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쉬었다. 나는 온몸에 힘을 뺀 채 중단 자세를 취했다.

적막이 흘렀다. 따뜻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선이 부딪쳤다.

“하아아압!”

마록이 온몸으로 마나를 뿜어냈다. 낭비에 가까운 방출이었다.

그때였다.

마록의 몸에서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다음 순간 오른팔의 상완이두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바람에 상의가 부욱 찢어졌다. 오른쪽 팔만 말 다리처럼 굵어지니 상당히 괴상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다음엔 왼쪽 팔에 힘을 주었다. 왼쪽 팔의 상완이두근이 부풀어 올랐다.

마록은 차례차례 몸의 부위에 힘을 주었다.

불룩!

불룩!

등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대퇴근이 두꺼워졌다.

변신이 끝났을 때 마록의 체구는 두 배로 커져 있었다.

“네놈은 괴물이었냐?”

순식간에 두 배로 커진 마록을 보자 깜짝 놀랐다.

“그게 중요한가?”

마록은 씨익 웃으며 달려들었다. 그는 두 개의 검을 동시에 들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쳤다.

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력한 일격이었다.

나는 부딪치기 직전 검을 비틀어 두 개의 검을 동시에 흘렸다.

핏!

역시 미숙한 검술 탓인지 검날에 이가 빠졌다. 검은 구입하자마자 첫 번째 싸움에서 고철이 되었다.

부웅!

목표를 잃은 검이 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마록은 그 반동을 이용해 양팔을 십자 형태로 벌린 후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검풍에 머리칼이 휘날렸다.

나는 완전 무방비 상태인 마록의 하체로 검을 찔렀다.

순간 마록이 팔을 위아래로 휘저었다. 그러자 마록의 몸이 마치 검으로 된 폭풍 안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떠냐!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나의 폭풍이! 으하하하!”

챙!

마록의 검이 내 검을 튕겨 냈다. 마록이 서서히 다가왔다. 검과 검이 회전하는 틈을 노려 그 사이를 찔러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 작은 틈을 정교하게 찌를 만큼 나의 검술이 좋지 못했다.

“역시 검술은 나와 맞지 않는군.”

휘오오오!

나는 검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검 끝에 모인 마력이 검붉은 연기를 피워 냈다.

검 폭풍의 빈틈을 찾다 피식 웃었다. 어차피 힘으로 찍어 누를 셈이었다. 빈틈을 찌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힘으로 찍어 누른다는 것.

그것은 정면 승부를 의미했다.

순간.

휘익!

나는 검을 휘둘렀다.

휘리릭!

위험함을 느꼈는지 마록의 회전이 더 빨라졌다.

“멍청한 놈! 불나방처럼 달려드는구나!”

얼마나 더 빨라지건, 얼마나 더 강해지건, 나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가로막으면 부수어 버린다는 일념 하나.

그것만이 중요했다.

쾅!

팔이 저릿저릿했다.

나의 일격이 폭풍을 찢고 마록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이, 이럴 수가!”

마록이 황급히 검을 X 자로 교차시켜 내 일격을 방어했다.

“오러 블레이드?”

검에 하얀빛이 서려 있었다.

마록이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다크 블레이드를 수행하고 나서부터 마력의 움직임을 제어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마력은 틈만 나면 밖으로 분출되기 위해 솟아올랐다.

이번 싸움 역시 오러 블레이드를 쓸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또 마력을 끌어 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왕 쓴 것.

나는 단번에 끝낼 요량으로 아예 작정하고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런 후 검을 들었다 그대로 내리쳤다.

검이 환하게 타올랐다. 검이 움직인 자리에 바람의 물결이 생겼다. 물결은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싸구려 검이 독기를 품은 채 휘어져 치솟았다.

쾅!

마록이 다시 X 자로 검을 교차시켜 방어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샥!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바스타드 소드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나는 마력을 거둬들이며 동시에 검면으로 마록의 가슴을 때렸다.

퍽!

“크헉!”

마록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멀리 날아갔다. 건물 벽에 부딪힌 후 땅에 떨어진 마록의 몸이 마치 바람 빠지듯 정상으로 돌아왔다.

“휴우.”

모여든 구경꾼들이 승자인 나를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환호성이라도 울릴 분위기였다. 더 이상 주목받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아 구경꾼이 없는 곳으로 얼른 몸을 피했다.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산 지 얼마나 됐다고 검은 이빨이 빠지고, 로브는 흙먼지투성이에 구멍까지 숭숭 뚫려 있었다. 용병 패를 공짜로 받은 덕분에 절약할 수 있었던 돈이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여관에 들어가 목욕을 한 뒤 일하는 아이에게 로브를 사 오게 했다. 한 치수 작게 사 오는 바람에 다시 사 오게 했더니 이번에는 한 치수 크게 사 오는 것이었다. 잔돈은 가져도 좋다고 허락하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된 로브를 받을 수 있었다.

영악한 아이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 후 여관을 나오자 싸움이 벌어졌던 공터로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는 마을 경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긴 그냥 막싸움도 아니고 오러 블레이드까지 사용한 격전이었으니 경비병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단이 머물고 있는 여관을 찾아 들어서자 무슨 일인지 식당이 떠들썩했다.

“뭐였지, 방금 그 싸움은?”

“글쎄. 검에서 빛이 번쩍거리던데. 그게 설마 말로만 듣던 오러 블레이드란 것인가?”

“오러 블레이드가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

“그래도 공터가 아주 박살이 났잖아. 옆에 서 있던 나무도 다 부러졌고.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모르는 척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고든이 찾아왔다.

“용병 패는 받아 왔소?”

용병 패를 보여 주자 그는 안색을 찌푸렸다.

“당신도 꽤나 나쁜 취미를 가졌군. 하필 최하급 용병 패라니.”

고든이 나가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멀리 창문 너머로 울부짖는 남자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마법사의 목소리 같은데, 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