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하다
해가 저물어 가자 숲은 금세 어두워졌다. 달빛이 환했지만 숲을 모두 밝히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기괴한 그림자들이 바람에 춤을 추었다. 의미 없이 울리는 소리가 스산했다. 고요하던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산새의 울음소리가 숲에 미세한 파문을 퍼뜨렸다.
밤의 숲 속.
적무도에 있을 때 수없이 보아 왔던 풍경이었다. 적무도의 밤은 캄캄하고, 불길하고, 음습했다.
“같은 숲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몇 번을 보고, 몇 번을 느껴도 질리지가 않았다.
평화롭다는 것은 이다지도 좋은 것이었구나.
나는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마음 한쪽에 복수고 나발이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 이렇게 유유자적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복수를 그렇게 마무리 지을 가능성은 절대로 없었다.
적무도를 탈출한 지 벌써 3일째였다.
나는 도시나 마을로 들어가기보다 산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나의 행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럴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을 잃고 부활한 이래 단 한 번도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혼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농노들의 마을은 비어 있었고, 투기장이 있던 마을은 감시자와 함께였다. 이렇게 혼자 여행하는 것은 진짜로 처음이었다.
묘한 흥분과 묘한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 그곳이나 가 볼까.”
사실은 조금 돌아가야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
나는 오솔길에서 벗어나 길이 나 있지 않은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망설임 끝에 결국 산자락 아래 위치한 마을로 내려가 술 두 병을 훔쳤다. 그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산길이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운이 넘쳤다.
목적지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니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오른쪽으로 획 꺾인 오솔길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빽빽한 나무 숲 사이로 수려하고 장중한 산의 경치가 보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뱀이 꿈틀거리는 듯 굽이굽이 물결치는 산맥의 형상도 그대로였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바위들의 위엄도 그대로였다. 심지어 시끄러운 매미 소리마저 그대로였다.
산중턱에 이르자 작은 연못이 보였다. 느티나무로 둘러싸인 연못의 수면이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렸다.
물을 마신 후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내 얼굴은 예전과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약간 마른 듯하면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움푹 팬 볼 살 때문에 날카로워 보였다. 전체적으로 잘생겼다기보다 남자다운 인상이었다.
연못에 몸을 비췄다.
근육이 잘 발달된 몸이었다. 군살이 없어 무척 날렵해 보였다. 앳된 소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노련한 투사만이 연못 안에 있었다.
사슴 한 마리가 멀리서 서성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떠나길 기다리는 듯했다.
문득 시장기를 느꼈다.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자 문득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쐐에엑!
퍽!
머리가 부서진 사슴을 들고 다시 산을 올랐다.
“아…….”
그리운 동굴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사슴을 바닥에 내려놓고 동굴 쪽으로 걸어갔다.
시커먼 입구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동굴 안은 서늘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광장이 나타났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마력을 발에 실어 바닥을 쿵 굴렀다.
발소리가 동굴 전체에 메아리쳤다.
잠시 후.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빛이 동굴 전체에서 동시에 날아올랐다. 침입자의 횡포에 놀란 반딧불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아름다운 빛의 향연.
꿈에서조차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던 자연의 기적.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시장기가 사라졌다. 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떨어져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모닥불을 피웠다.
불꽃이 커지는 동안 사슴을 다듬었다.
치이이익!
적당한 크기로 자른 사슴 고기를 나무 꼬챙이에 꿰어 불가에 비스듬히 꽂았다. 고기는 금세 노릇노릇 익어 갔다.
향기로운 고기 냄새를 맡으며 어둠으로 물든 숲 속을 바라보다 문득 마을에서 훔쳐 온 술이 생각났다. 고기와 함께 먹으려고 가져온 술이지만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그만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계획은 어긋나야 맛이고, 술은 마셔야 맛이지.
그럴듯한 말로 나를 다독이며 술병을 꺼냈다.
단단히 밀봉해 놓은 뚜껑을 열자 향긋한 과일 향이 코끝을 찔렀다. 과실주였다.
출렁. 출렁.
병을 흔들며 향과 함께 술을 마셨다.
고기 냄새를 맡은 동물들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침거리를 미리 잡아 놓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늘 밤은 그냥 느긋하게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고기 냄새를 맡고 몰려온 것은 동물만이 아니었다.
부스럭.
나는 술병에서 입을 뗌과 동시에 언제라도 기습에 대비할 수 있도록 슬쩍 자세를 바꿨다.
부스럭.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남자 둘에 여자 하나였다. 그들은 주위를 서성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모닥불 위에 올려놓은 사슴 고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그냥 꼬챙이 하나를 뽑아 고기를 뜯었다.
첫 번째 꼬챙이를 뒤로 던진 후 두 번째 꼬챙이를 집는데 침입자 중 한 명이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나가던 여행자인데 배가 고파서 그러니 합석 좀 합시다.”
넉살이 좋은 놈이었다.
놈의 차림새를 슬쩍 훑어봤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레더 갑옷. 허리춤에 롱 소드를 매고 있었는데 손잡이 부분이 손때로 지저분했다. 검에서 피 냄새가 났다.
노련한 용병이 분명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나머지 두 명도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불만 빌려 주겠다.”
그는 나의 말뜻을 금방 알아챘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가 여자를 향해 눈짓을 하자 그녀가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꺼내 화살을 장전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슬쩍 손에 쥐었다.
슝!
슝슝!
여자는 캄캄한 숲 속을 향해 망설임 없이 화살 세 발을 날렸다. 빠르고 깔끔한 솜씨였다. 산짐승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여자 옆에 서 있던 키 작은 남자가 숲 속으로 들어가 토끼 두 마리와 여우 한 마리를 들고 왔다. 화살이 머리를 꿰뚫고 있었다.
대단한 기술이었고, 좋은 구경을 시켜 준 보답으로 그들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넓혀 주었다.
“우리는 ‘붉은 바람’ 용병단의 용병들이오. 내 이름은 알빈이고, 활 잘 쏘는 노처녀는 실비아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짜리몽땅한 꼬맹이는 슐트라고 하오.”
“누가 노처녀라는 거예욧!”
“누가 꼬맹이예요!”
“열일곱 살이면 애를 낳는 세상에 스물세 살이면 훌륭한 노처녀지. 그리고 드워프하고 눈높이가 같다는 시점에서 너 역시 훌륭한 꼬맹이고.”
“그러는 알빈이야말로 겁쟁이면서! 저번에 천둥번개 칠 때 이불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던 거 다 봤다구요!”
“거짓말하지 마! 남자 중의 남자인 내가 그딴 걸 무서워할 리 없잖아!”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헐뜯으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세 마리의 짐승이 순식간에 고기로 둔갑하였다.
고기가 익는 동안에도 그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조용하게 달을 감상하며 지낼 예정이었지만 이런 밤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렇게 떠들썩했던 저녁이 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쨌든 재미있는 일행이었다. 모처럼 좋은 저녁이었고, 그래서 과실주도 조금 나눠 주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누군지 듣지 못했군. 혹시 당신도 용병인가?”
알빈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굳이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냥 떠돌이다.”
“그렇군.”
알빈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나에게 사연이 있음을 눈치챈 것이리라. 이 노련한 용병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닥쳐온 위험을 알려 주기로 했다.
“남은 고기는 싸 가지고 가는 게 좋겠는데.”
나의 축객령에 노처녀와 꼬맹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노련한 용병은 내 말뜻을 단번에 알아챘다.
“가자. 빨리 일어서.”
알빈은 풀어 놓았던 검을 허리에 차며 빠르게 짐을 꾸렸다.
“하지만…….”
“이 밤중에 대체 어디를 간단 말이에요? 그냥 여기서 잠을…….”
실비아와 슐트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알빈이 노려보자 하는 수 없이 짐을 꾸렸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고맙다는 말은 해 두겠소.”
“고기는?”
“보답이라고 해 둡시다.”
짐을 다 꾸린 알빈 일행이 재빨리 움직였다. 모닥불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알빈이 물었다.
“정말 떠돌이요? 만약 용병이라면 의뢰를 부탁…….”
“떠돌이다.”
나는 말을 잘랐다. 내 앞길이 구만 리였다. 다른 사람 뒤치다꺼리까지 해 줄 수는 없었다.
알빈은 깨끗하게 미련을 버리고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남기고 간 고기는 내 것보다 맛이 좋았다. 조금이지만 소금 간까지 되어 있었다. 노련한 용병의 보답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아껴 먹기로 계획했던 과실주를 다 먹고 말았다. 나머지 한 병도 마저 뜯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던 밤이지만 나는 만족했다. 마음껏 포식하고 마음껏 만취한 채 모닥불 앞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가벼운 숙취를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기분 좋게 잠들었지만 깊이 잠들지는 못했다. 알빈 일행이 떠나고 나서 얼마 후 평화롭던 숲이 적의와 살기로 오염되었다.
숲 속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시끄러워서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비명 때문인지 적무도의 숲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악몽도 꾸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침의 단잠을 깨운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화살을 메긴 활로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름이 실비아라고 했던가.
죽여 버릴까, 하다가 이유나 물어보기로 했다.
“무슨 의미지?”
“도와주세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렇게 예의 바른 부탁은 처음이었다.
“도움?”
“알빈에게 들었어요. 당신이 상급, 아니 어쩌면 특급의 실력을 가진 용병이라고요. 의뢰를 하겠어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말했을 텐데. 난 떠돌이라고. 그리고 내가 왜 너희를 도와야 하지?”
“도와주지 않으면…… 화살을 쏘겠어요. 어제 내 실력을 봤죠? 이 정도 거리라면 절대 피하지 못할걸요.”
죄책감에 흔들리던 목소리가 말을 할수록 점점 강압적으로 변했다.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 막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휘익!
휘익!
하늘에서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쓴 복면인들이 떨어졌다. 그들은 모두 다섯 명으로 모두 롱 소드를 들고 있었다. 복장에서 무기까지 창의력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획일적인 놈들이었다.
“이 계집과 무슨 대화를 나눴지?”
입을 다물고 있자 갑자기 단검이 날아왔다.
아직 누워 있는 자세였기에 바닥을 굴러 단검을 피했다. 그 바람에 모닥불의 그을음이 옷에 묻었다. 그을음을 털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어느새 다가온 복면인이 어깨에 검을 댔다.
“움직이면 베겠다. 뭐, 움직이지 않아도 벨 거지만. 흐흐흐! 곱게 죽을 거면 묻는 말에 답해라. 저 계집과 무슨 말을 나눴지?”
“검을 뽑았다는 것은 검에 찔려도 된다는 뜻이지?”
“무슨 헛소리냐? 팔 하나가 잘려 봐야 정신을…….”
휘익!
탁!
나는 손날로 어깨에 걸쳐 있는 검을 때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복면인은 검을 놓쳤다.
검을 잃은 복면인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이놈! 한가락 하는 놈이었구나! 하지만…….”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은 놈이군.”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킨 뒤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퍽!
주먹으로 복면인의 가슴을 때렸다. 가슴이 움푹 파일 만큼 강한 일격이었다.
“쳐랏!”
복면인이 두 명씩 나뉘어 실비아와 나에게 달려들었다. 복면인들의 실력은 투사들의 등급으로 따지면 B 등급 정도였다.
나는 복면인이 떨군 검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실력 차이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휘익!
서걱!
순식간에 머리 두 개가 날아갔다.
내 몫을 정리하고 실비아를 살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몫을 정리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는 달리 그리 깨끗하게 정리하지는 못했다.
복면인들의 목과 심장에 화살을 박아 넣은 대가로 배에 검이 꽂힌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상처가 심했다. 그녀는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알빈…… 슐트를…… 도와…….”
그녀의 눈동자가 힘을 잃었다. 그녀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와……주…….”
그녀는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녀의 숨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바랐던 대답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녀가 죽자 나는 짐을 챙기기 위해 동굴로 돌아갔다.
짐이라고 해 봤자 롱 소드 하나에 로브 하나가 전부였다. 검을 허리에 차고, 로브를 몸에 걸쳤다.
빛의 향연을 마지막으로 감상한 후 동굴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여기는 나와 인연이 맞지 않는 듯하군. 올 때마다 사고가 생기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동굴 밖으로 나가자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든 짐승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다. 주변을 맴돌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식사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부리나케 자리를 떠났다. 산중턱까지 내려와서야 남겨 놓은 과실주 한 병이 떠올랐다.
아마 영원히 먹을 날이 없을 테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밤 다 먹어 버릴 걸 하고 후회했다.
과실주를 먹고 있을 때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원숭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놈들이 낄낄낄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원숭이들의 지능이 형편없기를, 그래서 밀봉을 뜯어낼 방법을 찾지 못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진짜 이 산하고는 상성이 안 맞나.”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복면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숫자가 자그마치 20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평온했다.
“와라!”
나는 복면인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죽이지만 마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복면인이 소리쳤다.
그 자신감이 얼마나 갈지 궁금했다.
다섯을 죽였을 때 우두머리는 침착했다.
다시 다섯을 죽였을 때 우두머리는 사로잡는다는 계획을 포기했다.
다시 다섯을 죽였을 때 우두머리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마침내 넷이 죽고 우두머리만 홀로 남았다.
“이, 이 괴물 같은 놈…….”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도망가지 않는 거지?”
실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처음 다섯이 죽었을 때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전부 죽으리란 것을.
하지만 이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공포에 떨면서도, 죽음에 절망하면서도, 계속 덤벼들어 결국 전멸하고 말았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네놈……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감히 우리와 싸운 것이냐? 크크크! 멍청한 놈! 크하하하!”
우두머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살겠다는 의미의 웃음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지옥에 갈 수 있어 기쁘다는 의미의 광소였다.
퓨우우우!
펑!
우두머리가 품 안에서 작은 원통을 꺼내 하늘로 쏘았다.
“네놈은 죽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하게. 크크크! 동료들이 우리의 복수를…… 컥!”
쓸데없는 짓을 한 벌로 목을 잘라 주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내 머리에서 직각으로 올라간 곳에 붉은 구슬이 떠 있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붉은 구슬이 따라다녔다. 끈적한 마나의 기운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추적을 위한 마법이 분명했다.
나는 붉은 구슬을 한차례 노려본 뒤 다시 산을 올라갔다. 도망치려 했지만 이제는 도망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본격적으로 어울려 주마.”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심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아 찝찝했다. 리치에게 마법이나 좀 배워 둘 걸 그랬다.
무지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다. 내 꼴이 딱 그랬다.
휘익!
서걱!
퍽!
“크악!”
“이 괴물! 죽어랏!”
“하아압!”
기합과 비명, 쇳소리와 고기 썰리는 소리가 서로 교차하며 넘실거렸다.
나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우거진 덤불 안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곧바로 잘못된 선택이란 것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수십 명에 가까운 복면인들이 각가지 무기로 무장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다!”
섬뜩한 기분이 들어 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직감이 옳았다.
슈슛!
슈슈슛!
나무 위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화살은 내가 있던 자리에 우수수 박혔다.
“죽여라!”
“동료들의 원수를 갚자!”
놈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지금쯤이면 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눈치챘을 법도 하건만 놈들은 여전히 미친개처럼 달려들기만 했다.
미친개에게는 매가 약이다.
이번 매는 좀 아플 것이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공기가 사납게 회전했다. 바람에 휘말린 나뭇잎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나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폈다. 검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검이, 서서히, 빛을 발했다. 검을 떨쳤다.
쾅!
땅에 거대한 분화구가 생겼다. 나를 향한 살기가 급속히 옅어졌다. 전염병처럼 공포가 확산되었다.
“……오러 블레이드다.”
“오러 블레이드!”
“말도 안 돼!”
나는 세로로 길게 금이 간 검을 씁쓸하게 쳐다봤다. 조금 흥분한 탓에 과도하게 힘을 쏟아부었다. 마력의 운용이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였다. 카렌처럼 응용하기 위해선 얼마나 더 수련해야 할지 갑갑한 심정이었다.
금이 간 검을 버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하나 주웠다.
휘익!
검의 무게를 가늠하기 위해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이번 매가 아프긴 아팠나 보다.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들던 놈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자는 베지 않겠다.”
나는 싸움 내내 반복했던 말을 다시 내뱉었다.
처음으로 복면인들의 눈동자가 갈등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적진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새 보금자리였던 동굴로 돌아와 있었다. 복면인들은 그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악마 같은 놈!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왜 우리 일을 방해하는 거지?”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손짓하듯 검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피곤했고, 목욕과 수면에 대한 욕구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죽어랏! 악마!”
“으아아아악!”
광기 어린 함성과 함께 복면인들이 달려들었다.
쨍강!
마지막 복면인이 쓰러지는 순간 다섯 번째 검이 부러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탐색했다. 더 이상 인기척은 없었다.
동굴 앞쪽에 쓰러져 있는 낯익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알빈은 양손과 양다리가 결박당한 채 모로 누워 있었다.
그 옆에는 슐트로 짐작되는 시체가 있었다. 얼굴이 온통 짓이겨져 있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드워프만큼 키가 작은 남자는 내가 알기론 한 명뿐이었다.
“살아 있는 것 같군.”
“끄응…… 그런 것…… 같소.”
알빈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를 결박하고 있던 끈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발목 부분에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아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듯했다. 다리병신이 된 용병이 어떻게 살아갈지 눈앞에 훤히 보였다.
“죽여 줄까?”
나의 친절 어린 제안에 알빈이 쓰게 웃었다. 같은 제안을 받았던 과거의 투사와는 다르게 알빈은 삶에 대한 욕구가 컸다.
“이왕이면…… 살려 주시오.”
“보기보다 미련이 많군.”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지 않소.”
알빈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옳은 것과 실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똑같은 소원이라 할지라도 죽이는 것은 빠르고 즉각적인 데 반해 살리는 것은 성가시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용병이라면 의뢰에 맞는 대가를 말해 봐. 너의 목숨값은 얼마냐?
노련한 용병답게 역시 알빈은 눈치가 빨랐다.
“클라리스 왕국의…… 파뉴트까지 데려다…… 주시오. 대가로…… 마굴魔窟의…… 마굴의 지도를 주겠소.”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만큼 아까웠던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나도 놀랐으니.
“누구의 마굴인데?”
“그것은 나도 모르오.”
나는 알빈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나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거짓의 기색이 없어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마굴이라. 구미가 당겼다.
어느 마법사의 마굴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지도의 가치를 떨어뜨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굴의 지도는 알빈의 목숨값을 치르고도 남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클라리스 왕국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향하는 곳은 자타르 왕국이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웃 왕국이긴 하지만 꽤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마굴이라면…….
“대가가 부족하오?”
내가 조용히 있자 불안한 모양이었다.
“충분하다. 좋아. 데려다 주지.”
나는 거래가 성립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그제야 그는 안심한 표정으로 기절했다.
“빨리도 부려 먹는군.”
나는 투덜거리며 그를 등에 업었다.
짐승이 물어 갔는지 실비아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과실주가 담긴 술병도 없었다.
어쨌든 이제는 정말로 작별이다.
나는 등을 돌렸고, 산을 내려왔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