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륙으로 (24/45)

대륙으로

바람이 따뜻한 햇살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지난밤에 내린 소낙비 때문인지 공기가 제법 시원했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다시 불어온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어 놓았다.

현재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요새였다. 요새 안에서도 가장 높은, 대대로 요새의 대장들이 주거지로 사용한 건물이었다. 훨씬 더 과거에는 왕궁으로도 사용되었던 건물.

나는 그곳에서 요새를 굽어보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베네딕트가 응접실로 이용하던 방이었다. 벽면 하나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 밖이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그 유리가 지금은 깨어져 겉으로 보면 한쪽 벽이 뻥 뚫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람이 그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멀리 성벽에 붙어 부서진 곳을 복구하고 있는 투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이! 빨리빨리 움직여!”

“보채지 마! 나도 서두르고 있는 거라고!”

투사들이 투덜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어떻게 된 게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지?”

“하는 수 없잖아.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래.”

“젠장!”

언뜻 짜증을 내는 것 같지만 투사들의 표정은 상당히 밝은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100일 간격으로 치러야 하는 몬스터와의 전쟁도, 요새를 무너뜨린 사악한 마법사의 음모도, 대장이라고 믿었던 베네딕트 그리고 붉은 채찍의 마녀 카렌과의 싸움도, 이제는 모두 끝났다.

적무도는 처음으로 투사들에게 평화를 제공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가만히 투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자 왠지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위화감과 불쾌한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결국 후자가 전자를 밀어냈다. 나는 푸른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네놈은 어느 쪽이었지?”

조용히 중얼거린 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땅 꺼지겠다. 뭐가 또 불만인데?”

긴 의자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던 마렉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뭔 소리야? 누가 불만 있대?”

스스로도 별것 아닌 일에 발끈한 것 같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딱 봐도 알겠구만.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잖아.”

마렉이 이죽거렸다.

“그런 것 없다니까!”

나도 모르게 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없음 없는 거지 왜 소리를 질러?”

능글맞게 웃는 마렉을 보자 짜증이 더 커졌다. 부아를 지르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이 확실했다.

진짜로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아 방을 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마렉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연놈들하고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네가 이겼잖아? 그럼 된 거 아냐? 우연이든 행운이든 이기면 그만이잖아. 강한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놈이 강하다. 그게 투사잖아.”

멍청한 주제에 가끔씩 신기할 정도로 날카로울 때가 있다. 마렉은 내가 짜증을 내는 근본적인 이유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얄미워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왔다.

“칼리온, 내가 지원사격으로 도와준 것 잊지 않았겠지? 나한테 목숨 빚진 거다!”

마렉의 헛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장!”

주변에 있던 투사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베네딕트, 카렌과의 싸움이 끝난 지도 벌써 한 달이었다. 불과 한 달 만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부상에서 회복하자마자 나는 적무도에 숨어 있는 투사들과 숨바꼭질을 벌였다. 리치와 마렉 그리고 세 명의 부하가 도와준 덕분에 이룡을 포함한 투사 전부를 불과 일주일 만에 사로잡을 수 있었다.

별다른 충돌도 없었다.

붙잡은 투사에게 어째서 반항하지 않는지 묻자 그 대답이 가관이었다.

“배신자 베네딕트와 마녀에게 죽을 뻔했던 부상자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장이 자신들을 위해 놈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 갔다고. 목숨 빚은 목숨으로 갚는 것이 투사의 도리지요.”

어처구니없게도 상당수의 투사들이 나의 행동을 미화시켜 멋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착각은 자유라고 했으니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겠지.

이런 생각으로 입을 다물었더니 투사들이 겸손하다며 다시 한 번 감격했다.

사로잡은 투사들의 숫자는 정확히 92명이었다. 베네딕트, 카렌과 정면으로 붙은 것치고는 살아남은 자가 꽤 많았다.

물론 그중에는 부상자도 있었다. 몇몇은 치료가 가능한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몇몇은 이 바닥에서 은퇴해야 할 만큼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나는 사로잡은 투사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메이어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제안을 했다.

“기한은 1년. 1년 후에는 나를 배신하건, 멀리 도망가건, 상관하지 않겠다. 내 부하가 될 자는 오른쪽으로 움직여라.”

나에게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투사들 상당수가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왼쪽에서 망설이고 있던 투사들 중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만약 부하가 되지 않겠다면 어쩌실 겁니까?”

“적무도 밖으로 내보낼 것이다.”

“이,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까?”

투사들이 웅성거렸다.

오른쪽으로 이동했던 투사들마저 동요했다. 몇 명은 은근슬쩍 왼쪽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아직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갈 수 있지 않겠어? 나도 이런 곳에서 평생 썩을 생각은 없고. 게다가 최소한 투기장 놈들은 찾아오겠지. 그냥 버리기엔 우리가 너무 아깝잖아.”

“그럼 그 시간 동안은…….”

“가둬 둘 것이다.”

투사들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평생 수련만 하고 산 사람들이라 손익을 계산하는 속도가 무척이나 느렸다. 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시간이 흘렀고, 투사들이 결단을 내렸다.

결국 오른쪽 67명, 왼쪽 25명으로 나뉘었다.

“일주일의 시간을 더 주겠다. 생각을 바꾸고 싶거든 언제든지 말해. 특히 너희들이라면 대환영이다.”

나는 25명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이룡, 베이도르와 파나티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놈 밑으로 숙이고 들어갈 바에는 혀를 콱 깨물고 죽는 게 나아.”

베이도르가 독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상처 입은 자존심이 아직 아물지 않은 듯했다. 파나티 역시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획 돌렸다.

25명의 투사들이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67명의 투사들에게 둘러싸여 연행되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현재 내 부하가 된 투사는 77명으로 늘어났다. 부하가 되기를 거부했거나, 아니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더 이상 검을 들 수 없게 된 투사 15명만이 임시 감옥에 갇혀 언제 올지 모르는 투기장의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메이어가 서 있었다.

“알아서 뭐하…….”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려는 순간 갑자기 마렉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 연놈들하고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엄한 곳에 화풀이하면 안 되지. 하하하!

“……젠장.”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놈이었다.

마렉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지만 결국 나는 툴툴거리는 것을 멈추고 질문에 걸맞은 대답을 해 주었다.

“잠깐 연구해 볼 게 있어서.”

메이어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대충 말했는데 벌써 눈치챈 듯했다. 다리만큼이나 머리 회전도 빠른 놈이었다.

“혹시 번개처럼 요동치던 새카만 오러 블레이드…… 말입니까?”

“그래.”

“대장! 저, 저도 구경 좀 하면 안 될까요?”

메이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열망이 가득 담긴 눈빛 공격이었지만 나의 철면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비장의 한 수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보여 달라고? 배짱이 좋은데?”

슬쩍 살기를 흘리자 메이어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무인武人에게 수련 장면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한번 싸워 보자는 말과 다름없었다.

“노, 농담입니다. 하, 하하하!”

메이어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엔 여전히 호기심이 짙게 남아 있었다.

나는 메이어가 보이고 있는 호기심의 원천을 알고 있었다.

보다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

보다 강해지고 싶다는 욕심.

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욕망.

“…….”

나는 입을 꽉 다문 채 메이어를 쳐다봤다.

“대장?”

지금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망설임. 그리고 갈등.

하지만 이내 망설임과 갈등을 압도하는 감정이 마음을 메웠다. 그것은 바로 조소와 조롱이었다.

“크크크! 내 것도 아닌데 아까워하다니. 나도 말세로군.”

“대장?”

나는 주머니에서 손톱만 한 크기의 붉은 돌 두 개를 꺼냈다. 붉은 돌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기운을 느꼈는지 메이어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 돌은 대체 뭡니까?”

“혈석이다. 정확히 말하면 혈석의 부스러기지만 어쨌든 혈석은 혈석이지.”

“혈석? 서, 설마!”

메이어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렉을 제외한 모든 투사들은 요새를 무너뜨린 원흉을 흑마법사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흑마법사는 나와 마렉의 합공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와 마렉 그리고 리치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유도하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리치는, 요새에 필수품을 배달하기 위해 투기장에서 건너왔다 흑마법사에게 사로잡힌 재수 없는 마법사로 위장되었다. 비록 마렉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으나 증거가 없으니 함부로 나서진 못할 것이다.

“왜 대장이 혈석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건 흑마법사가 마족 소환에 사용하려 했던 저주받은 돌이라고요!”

메이어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나가던 투사들이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어 흘끔흘끔 우리 쪽을 쳐다봤다.

“따라와.”

나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으로 메이어를 데려가 혈석을 건네주었다. 그는 혈석을 절대로 받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자극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강해지고 싶지 않나 보군.”

“……무슨 뜻입니까?”

“강해지고 싶으면 혈석을 받아. 그리고 혈석에 마나를 주입해 봐.”

메이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저했다. 그러다 결국 나를 믿는다는 얼굴로 각오를 굳히더니 내 손바닥 위에 있는 혈석을 조심스럽게 가져가 마나를 불어 넣었다.

번쩍!

혈석이 피처럼 붉은빛을 뿜었다.

붉은빛이 허공에 모여 인간의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생기고, 그다음에 몸통이 그리고 팔과 다리가, 마지막으로 롱 소드 하나가 생겼다.

적인赤人의 크기는 대략 손바닥만 했다. 형체는 롱 소드를 들더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적인의 검술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메이어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일정 경지에 오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적인의 검술이 최고 수준의 고급 검술임을.

“자타르 왕국의 대귀족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이다. 그리고 이건…….”

나는 주머니에서 혈석 하나를 더 꺼냈다.

“호엔레른 백작가 비전의 마나 수련법이다. 역시 마나를 주입…….”

휙!

바람보다 빠르게 희뿌연 뭔가가 손바닥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손바닥 위에 있던 혈석이 어느새 메이어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두 번째 혈석에 마나를 주입했다.

번쩍!

역시 붉은빛과 함께 적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째 적인은 마치 주점에서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처럼 일정한 운율로 무언가를 읊었다.

적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메이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마나의 주입이 중단되었고, 필연적으로 적인이 혈석 안으로 사라졌다.

“지, 진짜다……. 진짜 마나 수련법이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메이어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대장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멍청한 놈.”

나는 감동에 빠진 메이어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내가 주는 것은 독약이다. 그것도 언제 발작할지 모르는 독약. 혈석 안의 검술과 마나 수련법이 누구네 것인지 들었을 텐데. 호엔레른 백작이다. 그 말은 곧 혈석 안의 검술과 마나 수련법을 익히는 순간, 호엔레른 백작가 전체와 척을 지게 된다는 뜻이다. 아니, 호엔레른 백작가뿐만이 아니라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과 마나 수련법을 탐내는 모든 귀족 가문의 추격을 받게 되겠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점점 심각하게 변하는 메이어를 향해 마지막 말을 던졌다.

“그리고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과 마나 수련법은 대륙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위명이 쟁쟁하다. 익힐지 말지는 네 마음이다.”

메이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혈석을 하나씩 들고 있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남겨 둔 채 걸음을 돌렸다.

* * *

적인이 튀어나오는 혈석을 만들어 준 것은 당연하게도 리치였다.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과 마나 수련법을 메이어에게 어떻게 전해 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웬일인지 리치가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나에게 복수를 맹세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혈석은 본래 마족 소환에만 사용할 수 있는 특화된 마나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쿠차차라는 아티팩트의 등장으로 ‘거짓’이 되었다.

그 차이를 지적한 내게 리치가 특유의 조소를 퍼부으며 설명을 해 줬다.

“저는 혈석을 이용해 아티팩트를 제작한 것이 아닙니다. 혈석을 통해 소환한 마족을 물건에 빙의시켜 아티팩트처럼 만든 것이지요. 즉 엄밀히 말하면 쿠차차는 아티팩트가 아니라 마족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티팩트죠.”

알 듯, 말 듯, 아리송했다.

나로 인해 망가진 신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로 옮겨 탄 리치가 혀를 차며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말보다 보는 게 더 빠를 것 같군요.”

슥슥!

리치는 땅바닥에 작은 마법진을 그렸다. 그러곤 손톱만 한 크기의 혈석 부스러기를 꺼내 마법진 중심에 내려놨다.

마법이 시전되자 마법진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잠시 후 마법진 안에서 손바닥 크기의 인형이 튀어나왔다. 마치 만들다 만 봉제 인형처럼 어설픈 형태였다.

“이놈은 도플갱어의 일종으로 모크Mock라는 이름의 마족입니다. 지능은 거의 없는 편이고, 무력은 전무하다 할 수 있죠. 마계에 있는 벌레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한번 몸을 움직여 보십시오.”

“어떻게?”

“아무 동작이나 상관없습니다.”

나는 팔을 좌우로 휘둘렀다.

모크는 그런 내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이내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마계의 마족은 모두 난폭하고 파괴적인 줄로만 알았는데 모크란 놈은 생각보다 귀엽고 재미있는 놈이었다. 모크는 내가 동작을 멈춘 후에도 계속 같은 동작을 무한 반복했다.

“흐음. 얼마나 정교하게 따라 할 수 있는 거지?”

“동작의 어려움과 보여 준 횟수에 따라 다릅니다만 둘 다 충분하다고 가정했을 경우……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동작을 모두 기억시킨 후에 저를 불러 주십시오.”

며칠 후 나는 리치를 다시 불렀다.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을 완벽하게 복제시키기 위해 몇백 번, 몇천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리치는 모크를 혈석 안에 봉인시켰다. 그 과정을 통해 봉제 인형이었던 모크가 붉은 빛깔을 띤 인간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자세히 보니 나를 닮은 것도 같다.

적인으로 변한 모크는 마족 특유의 기운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적인에게선 마치 물건처럼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마족이되 아티팩트’라는 리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령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적인의 모태가 모크라는 마족임을 절대로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메이어, 강해지고자 하는 너의 욕망이 얼마나 큰지 내게 보여 봐라.”

나는 고심하고 있을 메이어를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한 달 만에 와 보는 바위산이었다. 동굴을 무너뜨린 이후로 처음이었다. 우선 와 볼 이유가 없었고, 설사 오고 싶었다 할지라도 너무 바빠 오지 못했을 것이다.

동굴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가뜩이나 황량했던 바위산이 더 황량해진 것 같았다. 폭삭 주저앉은 동굴 앞에 서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베네딕트가 뚫어 놓은 작은 구멍에서 찬 바람이 솔솔 새어 나왔다.

동굴 때문에 바위산의 지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연못이 있던 자리가 바싹 말라 있었다.

“이곳까지 온 보람이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휴식을 끝내고 서둘러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흔들바위가 없었다. 하긴 산 전체가 풀썩 내려앉은 꼴이니 절벽 끝에 걸려 있던 흔들바위가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흔들바위가 있던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적무도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자 문득 베네딕트와 카렌이 떠올랐다.

마렉의 말이 옳았다.

나의 짜증은 모두 놈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마렉, 네 말대로 투사는 이기는 게 장땡이긴 한데…… 나는 그것만으론 모자라단 말이다. 저택에 있을 때 느꼈던 휴멜의 위압감은 베네딕트와 카렌과는 차원이 달랐어. 이 정도 싸움에서 간신히 승리한 것으론 의미가 없어.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 만큼 강해졌어야 했는데.”

생각은 자연스럽게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 쪽으로 옮겨 갔다.

우연히 깨달은 새로운 스타일의 오러 블레이드.

침상에 누워 상처를 치료하면서 조금씩 시도해 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도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처음 느꼈던 감상 그대로 새로운 오러 블레이드에 이름을 붙였다.

어둠보다 짙은 어둠의 검.

“다크 블레이드!”

손바닥에 암흑의 기운이 서리는가 싶더니 곧 지그재그 모양의 작은 번개 검이 쑥 튀어나왔다. 검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손바닥 위에서 요동쳤다.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

나는 다크 블레이드의 한쪽 끝을 잡았다. 손바닥이 찌릿찌릿했다.

침상에 누워 생각했던 무수한 실험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가능하면 밤이 되기 전에 끝내고 싶었다.

나는 다크 블레이드의 속성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시작하였다.

“헉……. 헉…….”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만 쉬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태양 대신 보름달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작은 별빛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우드득!

몸을 일으키자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후 손을 내려다봤다.

“터무니없는 힘이었군.”

실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답답했던 응어리가 단숨에 날아갈 만큼 대성공이었다.

정리를 해 보면.

오러 블레이드와 다크 블레이드는 힘의 근원이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달랐다. 발현되는 방식부터 공격 방법까지 모두 달랐다.

오러 블레이드는 매개체가 있어야 했고, 다크 블레이드는 매개체가 필요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상위급 기사의 상징이라면, 다크 블레이드는 그 무엇도 벨 수 없는 허상의 검이었다. 비록 겉보기로는 무시무시한 번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공격 방법이었다.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파지직!

다크 블레이드가 손바닥 위로 솟아올랐다.

휘익!

나는 옆에 있는 화초를 향해 다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다크 블레이드에 베였음에도 화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크 블레이드가 마치 유령처럼 화초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화초의 줄기가 부풀어 올랐다. 그러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터졌다. 꽃의 씨앗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역시.”

마나와 마력의 차이점은 오직 하나, 농도였다. 다시 말해 마력은 고농축된 마나나 진배없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기본적으로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다.

마나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그릇에 적정량이 담겼을 땐 그릇의 주인에게 놀라운 힘을 선물해 주지만, 마나의 양이 그릇의 용량을 초과하게 되면 마나는 광폭한 짐승이 되어 그릇을 깨부순다.

다크 블레이드는 이러한 마나의 특성을 이용해 공격하는 일종의 마법 검이었다.

검에 닿은 사물에 고농축된 마나, 즉 마력을 강제적으로 주입해 그 그릇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릇이 크면 오히려 마력을 흡수해 더욱 강해질 수도 있었다. 고농축된 마나인 만큼 조금만 흡수해도 오랫동안 마나 수련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몸 안에는 마왕으로부터 흡수한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있었다. 마력 싸움으로 나를 이길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벨 수 없지만 그 어떤 검보다 파괴적인 검.

그것이 바로 다크 블레이드였다.

허상의 검이니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스치기만 해도 몸이 폭발해 죽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데.”

흥분으로 몸이 떨려 왔다.

다크 블레이드를 수련하다 한 번 더 녹초가 되었다. 세 번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아 그만 바위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산을 올라올 때와는 몸과 마음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유쾌했던 기분이 사라진 것은 동굴이 있었던 곳을 지날 때였다.

“이봐!”

갑자기 들려온 소리 때문에 깜짝 놀랐다. 목소리의 위치로 봐선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기척을 속이고 나에게 접근할 만한 실력자는 적무도에서 있을 수 없었다.

새로운 적인가 싶어 잔뜩 긴장하고 있는 찰나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여기! 나 좀 꺼내 줘! 제발!”

낯익은 목소리였다. 허무한 기분과 함께 긴장이 탁 풀어졌다.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래! 여기야! 이쪽이라고!”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한 달이나 방치해 둔 셈이군.’

미안한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없을 수밖에. 이놈이 한 짓을 생각하면 한 달이 아니라 10년쯤 방치해 놔야 했다.

집채만 한 바위를 돌아 베네딕트가 뚫어 놓은 구멍 쪽으로 고개를 내미니 못생긴 오크 머리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오! 주인! 드디어 나를 찾으러 왔구나!”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쿠차차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환성을 질렀다.

“나 좀 데려가. 심심하고 외로워서 죽는 줄 알았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반문하자 쿠차차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왜, 왜라니?”

“내게 한 짓을 잊지는 않았겠지?”

쿠차차가 찔끔한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그건 미안하게 됐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알잖아?”

“적들의 위치를 잘못 파악한 것은 그렇다 치지.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너는 날 버리고 도망갔어.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배신이지.”

“배, 배신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나는 단지…… 단지…….”

“단지, 뭐?”

“그래! 단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떠난 것이었어! 도움만 요청하고 금방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그 증거가 이거야!”

쿠차차가 입을 쩌억 벌렸다. 그는 주먹만 한 크기의 돌멩이 세 개를 토해 냈다.

돌멩이는 각각 붉은색, 파란색, 하얀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가 동굴 안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마수의 알만 챙겨 온 거야!”

쿠차차가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의심이 갔지만 마수의 알을 구해 온 이상 추궁할 말이 부족했다.

“마수의 알이 왜 세 개뿐이지?”

“하나는 바위 밑에 깔려 완전히 부서졌어. 그래서 세 개밖에 못 가지고 나왔지만, 어쨌든 이제 알았지? 내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군.”

내가 인정하자 쿠차차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럼 나를…….”

쿠차차가 말끝을 흐리며 나를 쳐다봤다. 간절한 눈빛을 보아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다크섀도우를 꺼내 쿠차차 주위의 바위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넌 이동하는 아티팩트잖아. 어째서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거지?”

쿠차차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내가 이동하는 데는 조건이 필요해. 바로 마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이 동굴은 리치 주인님께서 마족 소환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곳이었어. 동굴 전체가 축복을 받은 것처럼 마나가 충만했지. 그래서 동굴 주변은 마음대로 왔다 갔다 움직일 수 있었는데 어느 무식한 놈이 동굴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동굴을 감싸고 있던 마나 역시 다 공중분해 되었지. 덕분에 난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야 했고.”

말하는 본새가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버리고 갈까 하다 여태까지 일한 것이 아까워 그냥 구해 주기로 했다.

서걱!

바위에서 쿠차차가 있는 부분을 도려냈다.

나는 마수의 알을 품속에 넣은 후 쿠차차를 들고 요새로 향했다.

“지긋지긋한 곳이여! 안녕! 내 다시는 돌아오나 봐라!”

쿠차차는 맺힌 게 많은지 바위산에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곤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눈을 감았다.

스르륵.

마치 눈이 녹듯 쿠차차의 얼굴이 바위 안으로 스며들었다.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 쿠차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쿵!

나는 들고 온 바위를 요새 구석에 집어 던졌다. 제법 거칠게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쿠차차는 나오지 않았다. 아주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퍽!

바위를 세게 걷어찬 후 침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쾅! 쾅! 쾅!

시끄러운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두 번이나 녹초가 될 만큼 고된 수련을 한 데다, 쿠차차가 담긴 바위를 요새까지 들고 오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몸이 피로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문 앞에 마렉이 서 있었다.

“별일 아니면 초상날 줄 알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신음하듯 협박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협박을 무시하며 마렉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다. 배가 다가오고 있어.”

두통이 사라졌다. 몽롱했던 머리가 맑아졌다.

나는 바닷가가 보이는 남쪽 성벽을 향해 뛰었다. 카렌이 몰고 왔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배가 적무도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황색 깃발이 배 꼭대기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투기장에서 온 배군.”

“어떻게 할 거야?”

뒤쫓아 온 마렉이 물었다.

“내 부하가 되지 않겠다고 한 15명을 돌려보내야지.”

“그러곤? 투기장이 그 15명만 받아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 이미 방법을 찾아 놨으니.”

나이를 짐작하지 못할 만큼 오래 산 몬스터답게 리치는 적무도, 아니 멸망해 버린 과거의 왕국 세이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이 과거에 왕국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누굴 바보로 아나? 해적왕의 나라 세이렌이잖아.”

“그럼 왜 해적이 왕국을 세울 동안 다른 왕국들이 가만히 있었는지도 알고 있겠군.”

“…….”

모르는 것이 나오자 마렉은 그 즉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듣지 못했다는 듯.

“재미있는 것을 구경시켜 줄 테니 기대해도 좋을 거야.”

그때였다.

끼이익!

남쪽 성벽의 문이 열렸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15명의 투사들이 요새를 나와 바닷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홉은 멀쩡했고, 여섯은 부상자였다.

성벽 위에 있던 투사들이 그들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특히 자신들을 다스렸던 이룡에게 야유가 집중되었다.

투사들은 적무도에 흑마법사를 데려다 놓은 것이 투기장 놈들이라 여기고 있었다. 게임의 박진감을 높이기 위해 보다 많은 투사들을 죽이려는 투기장의 술수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 주는 편이 나에게 유리했기에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바닷가로 걸어가고 있는 15명은 배알도 없는 놈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적에게 투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음? 뭔가 이상한데.”

마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투기장의 배는 적무도 바로 앞에 배를 정박시켰다. 그러곤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조각배 서너 개를 바다에 띄웠다. 조각배는 파도에 실려 적무도 해안까지 밀려왔다.

15명의 투사들은 잠시 망설이다 빈 조각배에 몸을 실었다. 조각배들이 모선을 향해 출발했다.

선두의 조각배가 모선에 다다랐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모선 위로 올라간 베이도르와 파나티가 조각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젠장! 오지 마! 도망가! 함정이다!”

순간 베이도르와 파나티의 몸이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챈 듯 쑥 모선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처형이 시작되었다.

슈슈슛!

슈슛!

수백 개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조각배 위로 떨어졌다.

“크악!”

“컥!”

바닷속으로 몸을 던진 몇몇을 제외하고 순식간에 모두가 고슴도치가 되었다.

바다로 몸을 피해 구사일생한 투사들의 명도 그리 길지 못했다.

번쩍!

파지직!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크아아아!”

전기에 감전되어 기절한 투사들이 바닷물 위로 동동 떠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각종 마법이 투사들을 난타했다.

태우고, 얼리고, 지지고, 터지고.

산 자, 죽은 자 할 것 없이 골고루 마법이 쏟아졌다.

마법이 멈췄을 때 적무도 앞바다는 쓰레기장처럼 변해 있었다. 조각배의 파편과 흉측한 시체가 넘실거리는 파도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때였다.

“적무도의 투사들이여, 들리는가?”

투기장 배 쪽에서 마법으로 증폭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였다.

이어서 분노한 베이도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 어째서 우리를 공격한 것이냐!”

“그 이유를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자네들이 더 잘 알 텐데. 먼저 공격한 쪽은 자네들이지 않나. 적무도에 파견된 투기장의 요원을 자네들이 살해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개소리 집어치워!”

“입이 시궁창이구만.”

잠시 후 베이도르의 것으로 보이는 처절한 비명이 적무도 앞바다에 울려 퍼졌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고문의 소리에 요새의 투사들이 몸을 떨었다.

“대충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 투기장 연합은 자네들을 적으로 규정했네.”

베이도르의 비명이 멈추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유야 아까 들어서 알 테고, 투기장 연합이 적으로 규정한 자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네. 그럼 건투를 빌지.”

“우, 우리가 아니야! 우리는 투기장의 요원을 죽인 적이 없어!”

파나티의 목소리였다.

“확실히 무방비로 이곳까지 온 것을 봐선, 어쩌면 이 모든 게 투기장 연합 쪽의 착각이나 실수일 수도 있을 것 같네.”

“그, 그래! 확인해 봐! 조사해 보면 알 것 아냐!”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자네들 중 배신자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 투기장 연합이 원하는 것은 공명정대하게 그 배신자만 처단하는 것이 아니야. 확실하게 배신자를 처단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냥 다 쓸어버리는 게 훨씬 편하고 쉽지 않겠는가?”

“이…… 이……. 으아아!”

분노한 파나티가 날뛰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제압당했다. 그녀와 베이도르가 요새에서도 훤히 볼 수 있는 갑판 위로 질질 끌려 나왔다.

“오늘은 그냥 인사차 들렀네만 뜻밖의 수확이 있어서 기분이 좋군. 잘 보게나. 이것이 자네들의 미래 모습이니.”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이 움직였다. 한 칼에 베이도르와 파나티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다.

“제법 그럴듯한 제물이 아닌가! 하하하!”

남자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자신들을 다스렸던 자가 비참하게 참수당하는 모습은 제법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성벽 위에 있는 투사들이 침음을 삼켰다.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투기장 연합에서 우리를 죽이려는 거지?”

마렉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요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투기장 연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리치의 만행을 알고 있는 나뿐이었다. 물론 투기장 연합이 이렇게 빨리 전쟁을 선포할 줄은 몰랐지만. 그것도 전원 처형이라는 굉장히 과격한 방법으로.

투사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진실을 숨길 것이고, 투사들은 그런 나와 함께 지옥의 구렁텅이에 같이 떨어지리라.

“……이래선 휴멜과 별 차이가 없잖아.”

“뭐?”

나의 씁쓸한 중얼거림에 마렉이 반응했다.

“내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 준다고 했지?”

나는 가라앉는 마음을 억지로 끌어 올리며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자아,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되갚아 주는 게 투사들의 도리겠지.”

“아까부터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성벽 끝으로 걸어가 위태롭게 몸을 기댄 채 크게 소리쳤다.

“네놈이 준비한 선물은 잘 받았다! 우리도 선물을 준비했으니 부디 사양하지 마라! 시작해!”

마법을 사용해 증폭한 것은 아니지만 마력을 담아 소리쳤으니 아마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투기장 연합의 남자에게 그리고 아는 것 똥 싸게 많은 언데드 몬스터에게도.

고오오오!

내 목소리의 잔영이 사라지기도 전 과거의 왕국 세이렌의 유물이 눈을 떴다.

엄청난 기운이 적무도를 에워쌌다. 몸이 덜덜덜 떨릴 만큼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휘이잉!

거친 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무가 흔들리다 못해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투사들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기 위해 성벽에 꽉 매달렸다.

“뭐, 뭐야? 이 엄청난 기운은?”

“자아, 봐라. 이것이 바로 해적왕이 세이렌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 해적들의 나라가 토벌당하지 않고 수십 년씩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쿠르르릉!

콰과광!

바다가 요동쳤다. 거대한 파도가 사납게 날뛰었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바다의 횡포가 점점 더 심해졌다.

“바다가 움직여?”

마렉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리치에게 처음 들었을 때 저런 표정이었다. 물론 지금도 태연한 척만 할 뿐, 마음속은 마렉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수백 개의 소용돌이가 적무도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기세등등하던 투기장의 배가 대자연의 힘에 압도당했다. 소용돌이 사이에 낀 배가 마치 비틀어 짠 빨래처럼 뒤틀렸다.

그때였다.

투기장의 배에서 환한 빛줄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텔레포트 마법으로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나머지는 버림받았군.”

마렉의 말처럼 배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절규하고 있었다. 아비규환이었다.

콰직!

소용돌이의 이빨이 배를 반 토막 냈다. 소용돌이가 배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쿠르르릉!

배를 통째로 삼킨 소용돌이가 트림을 하듯 굉음을 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경악한 얼굴로 소용돌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만에 마렉이 입을 열었다.

“저거 멈출 수는 있는 거겠지? 평생 여기에 갇혀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적어도 당분간 투기장 놈들한테 죽을 일은 없어졌잖아.”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인지 고민하고 있는 마렉을 내버려 두고 성벽을 내려왔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었다.

나는 리치가 있는 곳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틀 후.

나는 마렉과 메이어를 불러 나의 계획을 설명했다. 메이어는 놀라는 눈치였고, 마렉은 나에게 엉겨 붙었다.

마렉을 뿌리치고 리치를 만나기 위해 요새를 빠져나왔다. 리치는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요새 밖에서 따로 생활하고 있었다.

“덩치 큰 투사가 따라올 줄 알았는데 용케 혼자 오셨군요.”

“텔레포트 마법진이 일인용이라고 우겼거든. 게다가 미완성이라 이동 중에 폭사할 위험이 크다고 말해 줬지. 그놈 성격이라면 아마 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줄행랑을 칠 게 뻔해. 짜증 나지만 아직 그놈의 힘이 필요해.”

리치는 어깨를 으쓱한 후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내가 마법진 위에 서자 리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동 중에 폭사할 위험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마법진은 수백 년 전에 쓰였던 것입니다. 제대로 작동할지는 확실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담담하게 리치를 쳐다봤다.

“같이 죽는 거지, 뭐.”

리치의 안면 근육이 씰룩거렸다. 화가 났는지, 웃는 것인지 모호한 표정이었다.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군요.”

마법이 시전되었다.

몸이 공중에 부웅 떠올랐다. 풍경이 일그러졌다고 느끼는 순간 강렬한 빛이 눈을 찔렀다.

눈을 감았다 다시 뜨자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숲 속인 것은 같았지만 냄새가, 나무의 종류가, 싱그러운 공기가 달랐다. 무엇보다 평화로웠다. 적무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따뜻한 기운이 숲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적무도에서 탈출했다.

그것이 너무 어이없어 그만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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