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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블레이드Dark Blade (23/45)

다크 블레이드Dark Blade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다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왜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궁지에 몰려 도망치는 놈에게 주변이 제대로 보일 리 없으니.

경사가 심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달이 떠 있었다. 배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적당히 아문 상태였지만 여전히 핏물이 배어나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벌써 죽었어야 할 상처였다. 인간을 초월한 육체 덕분에 아직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지금 상태론 단지 고통만 연장될 뿐이었으니까.

넝쿨이 휘감겨 있는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나무 냄새가 습하고 텁텁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혔다. 마력을 일으켜 상처에 쏟아부었다. 마력은 치료 마법과 비슷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배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갔다.

찌르르르!

낯선 소리가 청각을 자극한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이내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풀벌레 소리였다.

곤충 소리에도 겁을 먹을 만큼 나는 심적으로 몰려 있었다.

다시 바닥에 주저앉으려다 옆으로 몸을 굴렸다. 날카로운 살기에 몸이 반응한 것이다.

휘익!

푸욱!

내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 단검이 꽂혔다.

점점 가까워지는 살기를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따돌려도, 따돌려도 놈들은 기어이 쫓아왔다. 기척을 숨겨도 소용없었다. 고통을 참으려 있는 힘껏 달려도 소용없었다.

마치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식인 물고기처럼 베네딕트와 카렌은 나의 행적을 놓치지 않았다.

벌써 나흘째.

나는 대책 없이 도망만 다니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힘겹게 눈을 떴다.

검은 로브를 입은 투박한 인상의 남자가 나를 한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걸 때까지 왔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술래잡기가 거의 끝나 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지독한 피로감으로 온몸이 무거웠다.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눈이 감겨 왔다.

이대로 잠을 자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나약해진 마음이 포기를 부추겼다.

“한동안 오지 않을 테니 좀 쉬십시오.”

리치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인 내가 죽어 가고 있음에도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내가 어떤 고통을 당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마른 입술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대체 무엇을 먹었기에 그리 살이 찔 수 있는지 실험 재료로 쓰고 싶을 만큼 뚱뚱한 여자가 있더군요. 그래서 살을 빼라는 의미로 운동 좀 시켜 주고 왔습니다.”

“운동?”

잠시 후 나는 리치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현혹 마법으로 투사들을 조종해 베네딕트와 카렌을 습격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왜 안 보이나 했더니 투사들을 잡으러 다녔던 모양이다.

“피라미지만 그래도 숫자가 거의 100여 명에 육박하니 뚱뚱한 여자도, 전에 한번 싸워 봤던 요새의 대장이란 놈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100여 명이면 적무도의 투사 전부라 해도 무방했다. 내 시선을 눈치챈 리치가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마렉과 당신의 부하 셋은 제외시켰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리치는 나의 눈빛을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좌절하고 있었다.

그동안 준비해 왔던 모든 것이 망가졌다. 헬 오브 인피니티를 이용한 수련도, 투사들을 납치하여 부하로 만드는 작업도 그리고 새로운 부하들을 이용하여 베네딕트와 카렌을 지옥으로 보내 버리는 계획도,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다.

현재 내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겁에 질린 양 떼처럼 살기 위해 도망치는 것.

복수를 위해 참아 왔던 시간이, 복수를 위해 해 왔던 수련이, 복수를 위해 키워 왔던 각오가…….

쨍그랑!

……바닥에 떨어뜨린 유리처럼 깨어졌다.

“제에엔자아앙!”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카렌의 비웃음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크크크!”

웃음이 나왔다.

“고작 계획이 무너졌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는 것이냐, 멍청한 칼리온이여. 크크크!”

언제부터 내게 계획이 있었다는 거지.

“크하하하!”

우습구나. 우스워.

내 꼴이 우스워 웃었다. 조금 강해졌다고 우쭐해진 마음이 우스워 웃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착각하는 마음이 우스워 웃었다.

“애초에 잃을 것도 없었던 놈이 이제 와 뭘 두려워하는 것이냐. 나야말로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왔지 않은가. 크크크!”

역시 생각하는 것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부딪쳐 박살 내 버리거나 혹은 내가 박살 나든가, 둘 중 하나다.

그래. 처음부터 나에겐 이런 쪽이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다시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투기장에서 원숭이처럼 생긴 투사와 경기를 할 때였을 것이다.

-다시는 망설이지 않겠다.

다시는 주저하지 않겠다.

다시는 도망치지 않겠다.

그렇게 맹세했건만 그날의 맹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만큼 마음이 무뎌진 것이리라.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각오가 되살아났다.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신기하군.”

이놈의 몸뚱이는 역시 이상했다. 도망 다닐 때는 그렇게 무기력하더니 싸우려는 의지를 먹자마자 힘이 용솟음쳤다.

역시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뼈마디에서 뚜둑, 뚜둑 소리가 났다. 뭉쳐 있던 근육이 조금 풀렸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리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거부하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 네 처지를 잊은 건 아니겠지?”

“당신이야말로 처지를 잊은 것은 아닙니까?”

“무슨 처지?”

내가 되묻자 리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로 잊었습니까?”

리치가 협박하듯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눈동자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죽으려고 가는 게 아니다. 죽이려고 가는 거지. 그러니까 비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리치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거부하겠습니다. 지금 싸우러 가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그냥 이 틈을 이용해 숨는 것이 나을 겁니다.”

“사방이 바다인 섬에서 숨어 봤자지. 게다가 이제 도망치는 것에는 넌더리가 났어.”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습니다, 대륙으로 통하는.”

잠깐 망설인 끝에 리치가 말했다.

“텔레포트 마법진?”

뜻밖의 정보였고, 또한 굉장히 중요한 정보였다. 문제는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적무도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나를 바로 옆에서 보아 왔던 리치였다. 이제 와서 텔레포트 마법진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은 악랄한 장난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물어보지 않았잖습니까?”

리치가 뻔뻔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화는 났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리치의 관계는 우정이니, 신뢰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아직 미완성입니다만, 10여 일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텔레포트 마법진이 완성됩니다. 그 기간 동안만 숨어 있으면 됩니다. 게다가 만일 발견되었다 할지라도 제가 도와 드리면…….”

“필요 없어.”

나는 리치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무슨 뜻입니까?”

스르릉!

나는 대답 대신 리치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롱 소드를 잽싸게 뽑아 들었다.

리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굳이 싸워야 하겠습니까? 부질없는 싸움입니다. 제대로 상처를 치료한 후 싸워도 늦지 않습니다.”

“이미 결정했다. 아니면 막아 보든가.”

생각만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적에게 당당하게 싸움을 걸 만큼 리치는 용감하지 못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당신을 도와 드리지요.”

“내 싸움이다. 끼어들면 죽여 버릴 거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치가 나를 노려보았다. 리치의 얼굴에 언뜻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진심으로 나의 싸움을 방해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정신을 집중한 후 마음속으로 외쳤다.

‘죽어라!’

웅웅거리는 공명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나의 속셈을 알아챈 리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머, 멈춰! 무슨 짓을, 컥!”

말을 끝마치기 전에 슬레이브 스템프의 저주가 발동되었다.

“컥! 크윽!”

리치가 가슴을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몹시 괴로운 얼굴로 숨을 꺽꺽거렸다. 눈, 코, 입, 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온몸의 피부가 가뭄에 혹사당한 논처럼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리치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이쯤이면 됐다 싶어 살의를 멈췄다.

잠깐 사이 리치는 망가질 때로 망가져 있었다. 리치의 표현대로라면, 아마 새로운 몸뚱이가 필요할 것이다.

“헉……. 헉……. 네, 네놈…….”

리치가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노려봤다. 리치의 손끝에 마나가 집중되고 있었다.

파직!

파지직!

손끝에 모인 마나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요동쳤다. 그 강력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슬레이브 스템프 때문에 잊고 있었다.

리치는 마족의 힘을 얻은 최악의 마법사임을.

과연 리치를 제압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다행스럽게도 휘몰아치던 마나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리치는 끝내 나를 공격하지 못했다.

“……언젠가 반드시 네놈을 죽여 내 몸으로 써 주겠다. 마나에 이름을 걸고 맹세해도 좋아.”

숲의 마나가 리치의 말에 응답하듯 한차례 출렁거렸다.

마나의 맹세.

“죽이려면 지금 죽이는 게 좋을 것이다.”

리치가 사나운 말투로 내뱉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시간을 벌기 위해 나에게 복종하고 있는 거잖아. 슬레이브 스템프를 파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시간을. 그 방법을 찾는 즉시 나를 죽일 생각이었을 텐데.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야.”

으드득!

리치가 이빨을 갈았다.

“그날을 위해, 오늘만큼은 내 승리를 빌어 줘.”

마지막으로 리치의 염장을 지른 후 나는 멀리 투기가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메가 힐Mega Heal!”

화악!

따뜻하고 포근한 빛이 내 몸을 감쌌다.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기분이었다. 새로운 활력이 몸 전체에 스며들었다.

빛이 사라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조금 전과 비교해 봤을 때 놀라울 정도로 몸이 회복되어 있었다.

“이건……?”

나는 의심 섞인 눈으로 리치를 쳐다봤다.

“네놈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한 것이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로 고레벨의 회복 마법을 시전한 탓에 리치의 안색이 더욱더 창백해졌다.

“만약 죽는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 버릴 테다.”

“말했잖아.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고. 죽이러 가는 것이다.”

“헛소리.”

리치가 조소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배의 상처를 살폈다. 흉터가 남았지만 그것을 빼곤 완벽하게 아물어 있었다.

“자아, 가 볼까.”

땅을 박차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놈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질주했다.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달렸다. 전장에 가까워질수록 달리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의도하지 않아도 마력이 샘솟듯 솟아올랐다.

챙!

챙!

“크학!”

“죽어랏!”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다 죽여 버리겠다! 깔깔깔!”

무기 부딪는 소리와 비명과 고함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전장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파팟!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위로 단숨에 뛰어 올라가 나뭇가지를 밟고 하늘로 점프했다.

휘익!

기분 좋은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나는 마치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 전장 한가운데 뚝 떨어졌다.

우뚝!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일순 정지했다.

“칼리온?”

카렌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올 줄은 결코 몰랐을 것이다.

쓰으읍!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하아아아압!”

마력을 담아 포효했다.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적무도를 뒤흔들었다. 나무가 사시나무 떨리듯 부르르 흔들렸다. 새들이 푸드득 하늘로 날아올랐다.

리치의 현혹 마법에 걸려 광전사가 되었던 투사들이 하나, 둘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베네딕트와 카렌을 발견하곤 기겁을 했다.

“젠장!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지!”

“헉! 마녀다!”

“도, 도망쳐!”

투사들이 허겁지겁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으으…….”

“사, 살려 줘…….”

투사들이 모두 도망치자 삽시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을 깨는 소리는 부상자들의 신음뿐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귀한 걸음을 한 거지? 설마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거야? 그러면 재미없는데. 발버둥 치는 모습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카렌이 아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장소를 옮길까?”

“어째서?”

“거치적거리는 게 많으니까.”

베네딕트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전처럼 다 죽여 버리면 되잖아. 이렇게!”

부웅!

베네딕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날카로운 충격파가 땅에 쓰러져 있던 투사를 덮쳤다.

서걱!

투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잘린 머리가 불신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음하던 부상자들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베네딕트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휘익!

서걱!

이번에는 허리가 양단되었다.

“끄아아악!”

허리가 잘린 투사가 귀곡성 같은 절규를 지르다 이내 잠잠해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불덩이보다 뜨거운 그것이 살기로 변환되는 순간 베네딕트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역시 좋은 눈이군. 정말로 갖고 싶어졌다.”

“장소를 옮기지.”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날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놈들이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질기고 질긴 악연을 끊기 위한 마지막 싸움이 막 시작되었다.

* * *

숲은 고요했다. 사방이 온통 녹색이었다.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에 은근슬쩍 먹구름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찬바람이 불었다. 마치 밤이 오는 것처럼 어둠이 첩첩이 쌓여 갔다.

나는 최후의 격전지로 어울릴 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고, 나를 따라오는 적들은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휘리릭!

파공성이 들렸다.

옆으로 슬쩍 몸을 비틀었다. 채찍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 앞에 있던 나뭇가지를 잘랐다.

“어디까지 끌고 갈 셈이야? 함정이라도 파 놓았어?”

나는 묵묵히 계속 달렸다.

휘리릭!

채찍이 목덜미를 노리며 날아왔다. 고개를 숙여 공격을 피하자 ‘칫!’ 하는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채찍에 담긴 기운을 봐선 두세 번 안에 진짜 공격이 날아올 가능성이 컸다.

네 번째 채찍 공격이 머리칼을 잘랐다. 목숨이 간당간당 할 때 마침내 적당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은 바로 나와 베네딕트가 처음 만났던 곳. 그리고 카렌이 나를 죽이기 위해 보내려 했던 곳.

바로 요새였다.

불과 수십여 일 만에 요새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자국이 성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죽음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요새에 불을 질렀기 때문인지 다행히 시체 썩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나는 요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이야? 칼리온이 죽고 싶은 장소가? 의외인데. 함정도 없는 것 같고.”

카렌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 베네딕트와 카렌을 마주 보았다.

지금부터는 문답무용.

말이 필요 없었다.

베네딕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덕분에 기분 나쁘게도 선빵을 빼앗기고 말았다.

베네딕트의 몸이 활처럼 휘는가 싶더니 곧 희끄무레하게 흐려졌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파파파팟!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최선을 다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에 결국 오른쪽 옆구리를 차이고 말았다.

“큭!”

극심한 고통과 함께 숨이 턱 막혔다. 몸을 똑바로 펼 수가 없었다.

“감히 카렌 님을 괴롭게 하다니.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무엇인지 알려 주마.”

마음 놓고 아파할 새도 없이 베네딕트의 공격이 이어졌다.

베네딕트의 신형이 다시 뿌옇게 흐려졌다. 그의 다리가 순간 네 개로 늘어났다. 다리는 내 양팔과 양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사지를 부러뜨릴 심산이었다.

“얻어맞으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니란 말이다!”

그 순간 마력이 꿈틀거렸다.

거대한 기운이 심장을 휘돌아 다시 다리로 내려갔다.

불룩!

대퇴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하앗!”

팟!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뛰어오른 자리가 움푹 파였다.

베네딕트의 다리가 그리고 있는 궤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그 궤적에 맞춰 발을 휘둘렀다.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베네딕트의 공격을 방어할 만큼 충분히 빠르고 강했다.

휘익!

휘익!

타타타탓!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리가 공중에서 부딪쳤다.

“큭!”

“크윽!”

다리가 부딪치는 순간 나와 베네딕트가 동시에 신음을 토했다. 우리는 공중에서 부딪친 후 교차하여 서로의 출발 지점에 착지했다.

정강이뼈가 시큰거렸다. 정강이뼈에서 시작된 아픔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베네딕트를 노려봤다.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나를 때려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네놈 실력으론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래 봬도 격투가라고.”

스릉.

베네딕트는 검을 뽑음으로써 내 말에 무언의 동의를 했다.

“동굴에서도 그렇고 내 공격이 보이는 모양이군. 대체 뭔 수작을 부린 것이냐?”

“수련 좀 했지.”

“짧은 시간에 극복될 만큼의 차이가 아니었다.”

“재능의 차이겠지.”

내 말이 베네딕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문 채 나를 노려보았다.

고오오오!

베네딕트의 몸 주위로 마나가 휘몰아쳤다. 마나는 그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범위를 넓혀 나갔다. 가공할 마나의 파장에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쉬이잉!

땅바닥의 흙먼지가 돌개바람처럼 솟구쳤다.

나는 기세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전의를 불태웠다. 욱신거리던 정강이뼈의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와랏!”

내 외침에 이끌린 듯 베네딕트가 달려들었다. 나도 그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리치에게 빼앗아 온 검을 휘둘렀다.

부웅!

챙!

이번에는 검과 검이 부딪쳤다. 역시 검술로는 베네딕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손목이 부러진 것처럼 저릿했다.

“하압!”

나는 빙글 몸을 돌리며 그대로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다리가 바람을 갈랐다.

베네딕트는 나의 공격을 자연스럽게 흘린 후 목젖을 향해 검을 찔렀다.

들고 있던 검으로 베네딕트의 검을 쳐 냈다. 그러곤 반대쪽 주먹으로 놈의 얼굴을 노렸다.

어느 누구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지근거리에서 빠르게 치고받았다.

“타앗!”

“하앗!”

나와 베네딕트는 격돌의 반동을 이용해 다음 공격을 더욱 빠르게 시도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격돌의 간격이 짧아졌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한 번 공격하고, 한 번 방어할 때마다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머릿속이 점점 새하얗게 변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서도 아니 되었다. 공방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초월했다. 오직 감각이 시키는 대로, 본능이 경고하는 대로, 몸을 피하고 주먹을 뻗었다.

베네딕트의 턱을 부수기 위해 다리를 차올렸다. 놈은 간신히 고개를 튼 후 어느새 역수로 잡은 검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보다 빠르게! 보다 강하게!

타타탓!

파파파팟!

팽팽한 격돌이 계속 이어졌다.

베네딕트의 몸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휙!

휘익!

파파파팟!

나와 베네딕트 사이에서 밀고 당기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기운들이 마침내 서로를 감싼 채 하늘로 분출됐다. 바닥의 흙이 기운에 휩쓸려 회오리바람처럼 같이 솟구쳤다.

그때였다.

“아직 멀었어? 지루한데.”

휘리릭!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채찍이 날아왔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채찍이 격렬하게 치고받고 있는 난투 한가운데로 진입했다. 그러곤 공격을 위한 검과 방어를 위한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그 사이에 정확히 맞물렸다.

나와 베네딕트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우리가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추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운이 폭발하듯 흩어졌다.

콰앙!

폭음과 함께 거대한 용권풍이 하늘로 솟았다.

“크윽!”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멀리 날아갔다. 바닥을 굴러 충격을 완화시킨 뒤 간신히 몸을 바로 했다.

얼른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사정이 안 좋은 것은 베네딕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르게 서기 위해 용을 쓰다 몇 번이나 고꾸라졌다. 그러다 결국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한 사발이나 토했다.

겉으로 봤을 때 이득을 본 것은 나였다. 하지만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 쪽은 베네딕트였다.

“칼리온의 멋진 모습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온 게 아니야. 칼리온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감상하기 위해 따라온 거지.”

“죄, 죄송합니다.”

베네딕트가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떨구며 카렌에게 사죄했다.

“됐어. 나도 칼리온이 이 정도까지 강해졌을 줄은 몰랐으니까. 역시 휴멜 님은 대단하셔. 재능의 재 자도 찾아볼 수 없었던 너를 왜 데려오셨나 궁금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어.”

카렌이 채찍을 돌돌 말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몸은 여전히 말을 안 들었다.

휘리릭!

철썩!

옆으로 피했지만 채찍은 기어이 목표로 했던 곳에 도착했다.

왼쪽 팔꿈치가 통째로 뜯겨져 나간 느낌이었다. 고통이 살을 파고들어 뼈까지 진동시켰다. 묘하게 익숙한 고통이었다.

휘리릭!

철썩!

채찍이 하늘에서 춤을 추다 아래로 내리꽂혔다.

이번엔 오른쪽 팔꿈치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될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낯익은 고통이었다.

……설마?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근육과 근육 사이, 뼈와 뼈 사이를 교묘하게 노리는 채찍질.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휘리릭!

나는 오른발을 뒤쪽으로 슬쩍 뺐다. 채찍이 무릎이 있던 곳을 통과했다.

직감이 맞았다. 채찍이 날아오는 방향에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갑자기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다음은 아마 왼쪽 무릎일 것이다.

휘리릭!

예상대로였다.

왼쪽 다리만 살짝 움직여 채찍을 피하자 카렌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더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눈치챘네? 깔깔깔!”

어떻게 모를 수 있으랴.

뙤약볕 아래 발가벗긴 채 묶여 채찍질을 당했던 그날의 고통을.

살기 위해 바동거리며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했던 그날의 치욕을.

가슴 깊은 곳에서 죽음보다 어두운 힘이 폭발했다. 힘이 몸 안을 내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나는 그 힘을 갈무리하여 검에 쏟아부었다.

화아악!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이 멀 만큼 압도적인 빛이었다. 검이 사라지고 새하얀 섬광만이 남았다.

빛의 검. 오러 블레이드.

휘리릭!

날아오는 채찍을 향해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서걱!

채찍의 끝 부분이 종이처럼 잘렸다.

“마나가 담긴 채찍을 쉽게 자르다니, 과연 오러 블레이드. 그렇다면 나도 힘 좀 써 볼까.”

카렌의 기세가 바뀌었다.

흐느적거리던 채찍이 창처럼 꼿꼿이 일어섰다. 채찍이 푸르스름한 빛이 서렸다 이내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영광으로 알아. 대륙 전체에서도 엄청 드문 거니까. 신의 창, 오러 스피어다.”

“신의 창 좋아하시네. 결국은 오러 블레이드의 변형인 주제에.”

“무식하긴. 변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다니.”

카렌이 쇠꼬챙이처럼 발딱 선 채찍을 휙, 휙, 휘둘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녀의 말이 옳았다. 변형을 하기 위해선 기본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변형이 가능하다.

기본이 뒷받침되지 않은 변형은 기형일 뿐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카렌은 기형을 무기로 사용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때였다.

몸을 추스르고 있던 베네딕트가 마침내 싸움에 합류했다. 그의 손에도 오러 블레이드가 들려 있었다.

기사는 무武의 정점에 선 자였다. 그런 기사들 중에서도 상위급밖에 시전할 수 없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오러 블레이드였다.

그 화려한 기술이 이 작은 섬에 무려 셋이나, 그중 하나는 응용까지 되어 시전되고 있었다.

쿠르르릉!

천둥소리가 아련히 들렸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한겨울의 밤처럼 세상이 캄캄했다. 빛을 잃은 태양이 먹구름 너머에서 슬퍼하고 있었다. 그 슬픔이 눈물이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치이익!

빗방울이 오러 블레이드에 닿자마자 수증기가 되어 증발했다. 빛을 잃은 세상에 오직 세 개의 막대기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슬비가 가랑비가 되고, 또 가랑비가 폭우로 변할 때까지 나와 베네딕트 그리고 카렌은 서로 대치만 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만큼 오러 블레이드는 강력한 무기였다. 어지간한 실력 차이는 단숨에 메워 버릴 만큼.

단 한 방에 생사가 결정된다는 죽음의 공포가 어느새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셋 모두 알고 있었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결정 난다는 것을.

싸움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했음을.

“하앗!”

먼저 움직인 쪽은 베네딕트였다. 그는 카렌의 부하였고, 그녀를 위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충성스러웠다.

파팟!

오러 블레이드끼리 부딪치자 하얀 불꽃이 격렬하게 튀었다.

검을 맞대고 베네딕트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카렌이 오러 스피어를 찔러 왔다.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베네딕트와 카렌이 연합 공격을 시작했다.

“큭!”

나는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광선 검의 공격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반격의 활로를 찾았다. 하지만 반격의 기회는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자 조금씩 초조해졌다.

베네딕트와 카렌은 절대로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차륜전을 이용해 서서히 내 목을 죄어들었다.

뭔가 상황을 급반전시킬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가 찾아왔다.

나의 재기 넘치는 일격도, 베네딕트와 카렌의 치명적인 실수도 아니었다. 기회는 외부에서 시작되었다.

휘이익!

장대비를 뚫고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왔다.

갑작스러운 화살의 등장에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공격이 정지했다. 그 천우신조의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를 좌우로 크게 휘둘러 적들을 물러나게 한 후 나 역시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헉……. 헉…….”

비인지, 땀인지 모를 물방울이 이마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화살은, 어이없게도,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땅으로 떨어졌다. 다시 말해 도착하지도 않을 화살에 지레짐작 겁먹은 꼴이었다.

나에겐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고, 베네딕트와 카렌에겐 분통 터지는 착각이었다.

“누구냐! 모습을 보여라!”

베네딕트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소리를 질렀다. 대답 대신 다른 화살이 날아왔다.

휘이익!

이번 화살은 전장을 훌쩍 지나쳐 멀리 있는 나무 기둥에 박혔다. 조준 솜씨가 형편없는 궁사였다.

화살은 요새의 성벽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자 조잡하게 생긴 활의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덩치 큰 남자가 보였다.

휘이익!

세 번째 화살은 내 머리칼을 스치며 지나갔다.

“빌어먹을! 마렉! 나를 죽일 셈이냐!”

나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질렀다.

“미안! 실수였어! 하하하!”

미안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호탕한 사과였다.

“뭐야? 저 시답잖은 것들은?”

다 잡은 승기를 놓친 탓인지 카렌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칼리온! 걱정 말고 싸우라고! 여기서 최대한 지원사격을 해 줄게!”

“와아! 대장! 힘내세요!”

마렉 옆에 서 있던 메이어가 응원이랍시고 함성을 질렀다. 마렉이 강제로 시켰다는 데 내 전부를 걸 수도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직접 싸우는 게 무서워 멀리서 도와주는 척하는 주제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모르게 씨익 웃음이 나왔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아니 오히려 방해에 가까울 만큼 엉망인 지원사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엄청난 도움을 받은 기분이었다.

“뭐, 기분 탓이겠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초조해진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시 지루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부하도 보고 있는데 쪽팔리게 싸울 수는 없잖아!”

카렌에게 달려드는 척하다 방향을 틀어 베네딕트를 덮쳤다. 그것을 신호로 한 방에 목숨을 건 격전이 시작되었다.

파팟!

파팟팟!

하얀 불꽃이 마치 순백의 눈처럼 흩어졌다.

역시 두 명을 상대로 혼자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호기롭게 싸움을 걸었지만 금세 공격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전과 다른 것은 노림수가 있다는 것.

나는 집요할 정도로 카렌을 노렸다. 그러자 베네딕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나의 오러 블레이드가 카렌의 귓바퀴를 스치자 드디어 베네딕트의 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하는 것이냐! 정신 차려!”

시기적절한 카렌의 호통에 흐트러졌던 공세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렇다면!”

나는 베네딕트의 공격을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며 더욱더 카렌을 압박했다.

사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육체의 회복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일반적인 상처와 오러 블레이드로 인한 상처는, 상처의 깊이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검에 맞으면 피를 흘리지만, 오러 블레이드에 맞으면 내장을 쏟는 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양이 깊은 베네딕트조차 나의 공격 하나하나에 동요하는 것이다.

그 충성심이 결국 너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나는 수백 차례의 공방을 거치면서 둘의 연합 공격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칼리온! 떨어져서 싸워! 지원사격을 해 줄 수가 없잖아!”

“제발 좀 닥쳐!”

마렉의 입을 다물게 한 뒤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노리는 것은 단 하나의 패턴.

베네딕트가 공격하고, 카렌이 숨을 돌리는 찰나의 순간.

베네딕트의 오러 블레이드가 나의 목을 노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카렌에게 달려들었다.

카렌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동귀어진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이대로라면 내 머리는 땅바닥을 구르고, 대신 카렌의 심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릴 것이 확실했다.

나는 불확실한 확률에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푸욱!

나의 오러 블레이드가 베네딕트의 배에 박혔다. 그는 공격을 포기하는 대신 카렌의 목숨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충신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베네딕트!”

카렌의 오러 스피어가 빛을 뿜었다.

주르륵!

그 힘에 밀려 뒤로 미끄러졌다. 천천히 쓰러지는 베네딕트의 몸뚱이를 넘어 카렌이 야생 짐승보다 사납게 달려들었다.

쾅!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스피어가 부딪쳤다.

파샥!

“젠장!”

오러 블레이드의 매개체인 검에 금이 가고 말았다.

마나 소드는 물론이거니와 오러 블레이드 역시 무언가를 매개체로 해야 발현되는 기술이었다. 즉 매개체가 없으면 설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시전할 수 없었다.

파샥!

그 매개체가 지금 부서지려 하고 있었다.

카렌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동시에 검이 파괴되는 속도도 증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쨍!

쇳소리와 함께 검이 부러졌다.

파지직!

매개체를 잃은 오러 블레이드가 번개와 같은 모습으로 날뛰며 손아귀에서 춤을 추었다.

크기가 줄어들긴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매개체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러 블레이드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회광반조일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카렌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자살행위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단검 크기로 줄어든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카렌의 목을 노렸다.

휘익!

오러 블레이드가, 마치 허공에 대고 휘두른 것처럼 카렌의 목을 통과했다. 베었다는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매개체가 없기 때문일까.

절망감이 엄습했다.

그때였다.

“칼리온! 네놈, 네놈이…….”

무슨 일인지 잔뜩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카렌이 숨을 헐떡였다.

“네놈, 네놈이 감히…….”

펑!

오러 스피어의 매개체인 채찍이 폭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렌의 몸이 마치 바람을 불어 넣은 고무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가장 먼저 머리가 빵빵해졌고, 그다음 목, 가슴, 배, 팔과 다리 순으로 부풀어 올랐다.

“크아아악!”

생살을 잡아 늘리는 고통에 카렌은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고통과 상관없이 몸은 계속 부풀어 올랐다.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부풀어 오르던 카렌의 몸이 마침내.

펑!

고무공 터지는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피와 뼈가 하늘에서 흩뿌려졌다.

나는 피의 비를 맞으며 내가 저지른 참상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게 오러 블레이드?”

파지직!

마치 아니라고 대답하듯 손바닥에서 찌릿 전기가 올랐다.

점점 사그라지는 번개 모양의 검을 가만히 쳐다봤다. 새하얀 빛을 뿌리던 빛의 검이 매개체를 잃음과 동시에 새카만 빛을 뿌리는 어둠의 검으로 돌변하였다.

악마의 검이라 해도 믿을 만큼 불길한 색깔의 검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고 싶을 정도로 아주 매혹적이었다.

“이래선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라…… 다크 블레이드Dark Blade잖아.”

파직!

마지막 불꽃을 태운 후 번개 검이 소멸하였다.

다음 순간 세상이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뺨이 딱딱한 바닥에 닿자 의식이 비와 함께 씻겨 나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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