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돌
마치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나무가 일직선으로 쓰러져 있었다. 덕분에 베네딕트와 카렌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나무들이 벌목되어 있는 길을 따라 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베네딕트와 카렌.
한 달하고 10여 일 만이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이들은 놀랍도록 많이 변해 있었다.
베네딕트는 무척 야위어 있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얼굴이 홀쭉했다. 살이 빠졌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왜소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쪼그라든 겉모습과 달리 내뿜는 기세는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베네딕트의 변화는 카렌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카렌은 일순 베이도르가 아닐까 착각했을 만큼 살이 찐 상태였다. 가녀리면서도 육감적이었던 몸매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인간이 한 달여 만에 저 정도로 뚱뚱해질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신기한 것은 망가진 몸매뿐만이 아니었다. 하얀 붕대가 그녀의 얼굴을 돌돌 감고 있었다. 머리칼은 새로 나기 시작한 것과 타다 만 것이 뒤섞여 들쭉날쭉했다. 붕대 사이로 보이는 눈에서 사나운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기 힘든 듯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얼굴에 칭칭 붕대를 감은 채 뒤뚱뒤뚱 걷고 있는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를 연상시켰다.
“대체 뭘 먹으면 저렇게 되는 거지?”
여자로서의 매력을 전부 잃어버린 카렌. 하지만 불쌍하다는 생각보다는 신기하다는 놀람뿐이었다. 처음부터 카렌을 여자가 아닌 피에 물든 마녀로 보았기 때문이다.
쿵!
쿵!
그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아름드리나무가 계속 쓰러졌다.
“섬의 나무를 전부 베어 낼 생각인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미친놈과 미친년의 머릿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중요한 것은 나무가 사라짐으로써 투사들이 은신할 장소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죽어랏!”
쓰러지고 있는 나무 뒤에서 투사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목숨을 도외시한 상당히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휘리릭!
붉은 채찍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촘촘히 검날에 감겼다.
채찍은 순식간에 검집이 되었다.
채찍에 감긴 검을 빼기 위해 투사가 안간힘을 썼다.
“깔깔깔! 그래! 그렇게 발버둥 치거라!”
카렌이 미친 듯이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미처 검을 놓지 못한 투사가 채찍에 이끌려 하늘로 솟구쳤다.
“으헉!”
공중에 뜬 투사가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다.
카렌의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휘리릭!
철썩!
땅으로 떨어지던 투사가 다시 하늘로 떠올랐다. 카렌은 마치 공깃돌을 가지고 놀듯 투사를 채찍질했다.
“크헉! 사, 살려, 컥!”
공중에 뜬 채로 채찍질당하던 투사가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매서운 채찍이 투사를 때렸다.
카렌은 투사의 고통을 즐기며 온몸으로 환희하고 있었다.
“더! 더 울부짖어라! 깔깔깔!”
휘리릭!
철썩!
분쇄기에 갈린 것처럼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커헉!”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투사는 입을 다물었다. 급소를 노린 치명적인 채찍질에도 결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니, 지를 수가 없었다. 이미 죽었으니까.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자 흥미를 잃었는지 카렌이 채찍질을 멈췄다.
철퍼덕!
공중에 떠 있던 투사가 땅에 처박혔다. 그 모습이 마치 배 터져 죽은 개구리 같았다.
“시시하네. 다음 놈은 좀 더 튼튼한 놈이어야 할 텐데.”
카렌이 아쉬운 목소리로 입맛을 다셨다. 그 광기에 소름이 돋았다.
변한 것은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단언할 수 있다. 카렌은 미쳐도 상급으로 미친 게 분명했다.
휘익!
서걱!
베네딕트가 나무를 베어 냈다. 카렌이 밑동만 남은 나무를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온다!”
“도망쳐!”
투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베네딕트와 카렌은 느긋하게 투사들의 뒤를 쫓았다. 그 모습이 마치 마실 나가는 부부처럼 일견 정겹게 보이기까지 했다.
밤이 오고, 다시 아침이 찾아왔다.
밤사이 휴식을 취한 사냥꾼들이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 베네딕트는 여전히 나무를 베어 냈고, 카렌은 투사를 한 명씩 때려죽였다. 한 번에 한 명씩만 죽이기로 결정한 듯 두 명을 붙잡았을 경우 일부러 한 명을 놓아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젠장.”
나는 기척을 숨긴 채 두 사람 뒤를 미행하고 있었다.
가능한 많은 투사를 구하고 싶었지만 싸움이 시작된 이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다간 동굴이 발각될 염려가 있었다.
“어떡하지?”
동굴로 돌아가 작전을 세울까, 아니면 미행을 계속할까 고민이 되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밤사이 사냥을 준비한 것은 베네딕트와 카렌뿐만이 아니었다.
채찍에 의한 희생양이 일곱을 넘기는 순간 마침내 삼룡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리고 삼룡은 내가 우려했던 대로 투사들을 희생시키는 작전을 사용했다.
“쳐랏!”
“돌격!”
와아아!
함성과 함께 수십 명의 투사들이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숫자 차이에도 베네딕트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스릉!
섬뜩한 예기를 뿌리며 검이 뽑혀 나왔다. 검 끝이 하늘을 향했다. 그러곤 하얀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오, 오러 블레이드다! 피햇!”
달려들던 투사들이 좌우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하늘을 향해 있던 검 끝이 호선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마치 벼락이라도 꽂힌 듯.
콰아앙!
폭음이 터졌다.
파파팟!
솟아오른 흙먼지와 돌멩이가 암기처럼 뻗어 나갔다.
“크윽!”
미처 피하지 못한 투사들이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주변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였다.
서로 다른 세 개의 기운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베네딕트를 향해 돌진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뒈져라!”
파나티와 롤랑 그리고 베이도르였다.
베네딕트가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방어 자세를 취했을 때는 이미 삼룡의 검이 목, 심장, 척추에 근접한 상태였다.
완벽한 타이밍에 들어간 완벽한 기습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베네딕트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고, 그 믿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휘리릭!
챙!
챙! 챙!
채찍이 살아 있는 뱀처럼 허공을 기어가 삼룡의 공격을 전부 무력화시켰다.
“이,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파나티가 경악했다. 롤랑과 베이도르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최고의 공격이었던 만큼 실패의 충격이 더 큰 듯했다.
반면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삼룡의 패착은 단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는 나머지 전부를 합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 하나.
카렌의 실력을 알지 못한 것.
삼룡은 자신들의 적으로 베네딕트만 상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렌이 누구인지 몰랐을 테니.
다시 말해 삼룡의 싸움은 시작함과 동시에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의 실력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대가는 매우 처참했다.
베네딕트가 자세를 낮춘 후 검을 뒤로 잡아당겼다.
화아악!
검이 빛을 뿌리고 잠시 후.
쐐에엑!
공간을 찢었다.
목표는 베네딕트의 심장을 노렸던 롤랑이었다.
“고작 이 정도 공격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더냐!”
롤랑이 자신의 쌍검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푸르스름한 장막이 롤랑을 감쌌다. 모두 일곱 겹이었다.
베네딕트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이 멍청아! 막지 말고 피해!”
콰앙!
폭음이 파나티의 목소리를 지웠다.
베네딕트의 검에서 뿜어진 빛이 롤랑의 방어벽을 부순 후 그의 상체를 물어뜯었다.
휘이잉!
폭발의 진원지에서 태어난 바람이 태풍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나무가 반으로 부러지며 요란하게 쓰러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바람이 사라지고, 먼지구름이 가라앉았다.
“롤랑!”
파나티가 서둘러 동료를 찾았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롤랑의 허리 위가 깨끗하게 증발해 버렸다. 오직 하체만이 땅을 디딘 채 서 있었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오러 블레이드를 응용한 일격은 헉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위력적이었다.
나는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힘의 근원을 깨달았다. 그 후로 한 달 내내 헬 오브 인피니티 안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수련을 계속했다.
그래서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것이었는지 지금 깨달았다.
베네딕트의 일격이 부순 것은 롤랑의 상체만이 아니었다. 나의 오만함 역시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차라리 리치를 이용할까?”
금단의 유혹이 고개를 들었다. 효과적이었지만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방법이었다.
베네딕트조차 패퇴시켰던 리치라면 분명 커다란 도움이 될 터였다. 아니, 나와 마렉까지 합세한다면 굉장히 손쉽게 베네딕트와 카렌을 끝장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안 되겠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리치를 싸움에 끌어들이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적무도에서 리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굳이 꼽자면 유일하게 마렉만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리치가 ‘요새의 보급품을 배달하러 왔다가 재수 없게 붙잡힌 마법사’를 연기하고 있는 이상 마렉은 결코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리치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일이다.
리치는 높은 경지에 이른 흑마법사가 마족에게 영혼을 바친 대가로 변이된 언데드 몬스터였다. 그렇게 마족의 힘으로 변이된 탓에 리치의 마법은 평범한 마법사의 마법과 서로 상이했다.
다른 것은 마나의 운용이나 위력의 정도가 아니었다. 마나에서 풍기는 냄새, 즉 마나의 느낌이 달랐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리치의 마법은 같은 불꽃 마법이라도 뭔가 어둡고, 뭔가 끈적거리는 느낌을 풍겼다. 때문에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은 리치의 마법을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리치가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리치의 정체가 발각 당하게 되는 것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리치는 대륙의 공적이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마족에게 귀의한 리치는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야 하는 몬스터였다. 리치가 등장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전쟁 중인 왕국이 휴전할 만큼 리치에 대한 인간들의 증오는 지독했다.
문득 카렌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말뚝의 형벌로 생긴 상처를 치료하며 몬스터 도감이란 책을 읽고 있었다.
몬스터 도감의 리치 부분을 읽던 중 갑자기 궁금증이 떠올랐다.
어째서 리치는 이토록 미움을 받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비록 최상위 언데드 몬스터이지만 리치는 무적이라고 불릴 만큼 강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마법사라는 특성상 접근전에 매우 취약했으며, 특히 신관의 신성 마법만 있으면 의외로 손쉽게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치는 대륙의 공적이나 다름없었다. 웬만한 왕국 하나는 찜 쪄 먹는다는 미친 드래곤 마룡魔龍과 동급으로 취급받았다.
“리치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카렌이 조소하며 말했다.
“무슨 뜻이지?”
“리치를 뜻하는 또 다른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
“…….”
“네크로맨서잖아, 네크로맨서! 죽은 자를 되살려 인형처럼 부릴 수 있는 최악의 마법사. 왜 리치가 대륙의 공적이 됐는지 이제 알았지?”
카렌은 ‘더 설명이 필요해?’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래 주면 고맙고.’라는 표정으로 카렌을 노려봤다.
“아아, 정말 귀찮다니까. 생각해 봐. 간단하잖아. 예를 들어 다섯 살짜리 아이와 네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 오히려 함정이 있나 생각하다 핀잔을 들었다.
“너 바보냐? 당연한 걸 뭘 그리 오래 생각해?”
“……내가 이기겠지.”
“만약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열 명이라면?”
“그래도 내가 이기겠지.”
“다섯 살짜리 아이가 천 명이라면?”
카렌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만약 그 아이들이 몸에 자폭 마법을 건 채 육탄 공격을 해 온다면 그때도 네가 이길 수 있을까?”
“이기고 지는 걸 떠나 그쯤 되면 다 죽는 거…….”
순간 나는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시체는 이미 죽은 존재였고, 산 사람은 나뿐이니 만약 둘 다 죽는다면 나의 패배라 해도 무방했다.
곧바로 이어진 카렌의 마지막 말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그리고 만약…… 그 아이들 중에 네 자식이 섞여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네 선조나 부모, 형제, 혹은 연인이 섞여 있다면?”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나왔다.
“이제 알겠지? 왜 리치가 대륙의 공적이 되었는지. 물론 죽은 자의 안식을 방해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여신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지만 말이야.”
나는 충분히 납득했고, 리치의 위험성을 이해했다. 그 덕분에 지금 베네딕트, 카렌과의 싸움에 리치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리치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대륙의 모든 검과 마법이 리치의 소멸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들의 공격이 리치의 주인인 나를 피해 갈 확률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따라서 리치를 싸움에 끌어들인 순간, 리치와 투사 둘 중 하나를 제거해야만 했다.
양쪽 모두 버리기에는 너무 좋은 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그래서 결국 삼룡, 아니 이제 이룡이 되어 버린 파나티와 베이도르를 도와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변수가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이 작전을 세우는 데 훨씬 유리했으니까.
이룡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베네딕트와 카렌의 행동을 상당히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챙!
챙! 챙!
베네딕트와 이룡이 부딪쳤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검무를 추고 있었다. 그사이 카렌은 도망치는 투사 한 명을 붙잡아 고문을 즐기는 중이었다.
“젠장! 이러다 죽겠어!”
“정신 차려! 아직 포기하긴 일러!”
파나티와 베이도르는 도망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공격보다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이룡이 퇴각할 만한 공간을 절묘한 검술로 미리 차단했다.
“하앗!”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검을 부드럽게 흘리며 파나티가 단검을 던졌다. 베네딕트는 왼쪽 눈을 향해 날아오는 단검을 검의 손잡이로 쳐 낸 후 파나티의 배를 걷어찼다.
“어딜!”
파나티는 들고 있던 검을 역수로 고쳐 잡고 아래로 내리꽂았다. 동시에 베이도르의 검이 베네딕트의 옆구리를 노리며 날아왔다. 날카로운 연합 공격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베네딕트는 순간적으로 몸을 가속하여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두 사람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휘오오오!
베네딕트의 주먹에 공기가 응축되었다. 주먹에서 아지랑이처럼 열기가 피어올랐다.
공기의 흐름이 단절되는 순간.
베네딕트가 주먹으로 공간을 때렸다.
쩌엉!
두꺼운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응축된 공기가 폭발했다. 수백 개의 기파氣波가 그물이 되어 이룡을 덮쳤다.
“젠장!”
베이도르가 파나티의 앞을 가로막은 후 마나의 장벽을 쳤다.
기파가 소나기처럼 장벽을 두드렸다.
“크윽!”
베이도르의 장벽에 금이 갔다. 금이 간 틈으로 기파가 조금씩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또 하나의 장벽이 베이도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파나티였다.
그렇게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베네딕트의 공격이 이어졌다.
“자아, 인사 대신이다. 맞고 뒈져 주면 고맙고!”
베네딕트가 이룡을 덮치는 순간을 노려 단검을 집어 던졌다.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마력을 듬뿍 담아 놓은 단검이었다.
쐐에엑!
목표는 베네딕트가 아니라…… 카렌이었다.
“주인에게 뛰어가야지, 강아지야.”
내 중얼거림에 반응하듯 베네딕트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러곤 카렌을 향해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다.
덥석!
푸욱!
얼마나 급했는지 날아오는 단검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단검이 손바닥을 뚫고 나왔다.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침묵.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죽어 버린 투사에게 채찍질을 계속하던 카렌조차 광기를 눌렀다.
“칼리온!”
절규와 같은 카렌의 외침.
나는 대답 대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등골이 서늘할 만큼 예리한 살기 두 개가 내 뒤를 쫓아왔다.
이 정도 해 줬으니 아마도 이룡은 무사히 도망쳤을 것이다.
“빚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팟!
땅을 박차고 화살처럼 날아올랐다.
이틀 밤낮을 달리고 나서야 간신히 놈들을 따돌렸다.
“헉……. 헉…….”
다리가 후들거렸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후줄근했다. 온몸의 수분이 전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연못에 머리를 집어넣어 숨이 막힐 때까지 물을 마셨다.
카렌은 뚱뚱한 몸으로 잘도 따라왔다. 노이로제에 걸릴 만큼 쉴 새 없이 내 이름을 외쳐 가며. 내 이름이 칼리온이란 사실이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콰앙!
멀리서 폭음과 함께 나무들이 쓰러졌다. 나를 놓친 것이 분한 듯 나무를 상대로 화풀이하고 있는 듯했다.
역시나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한숨 돌린 후 다시 몸을 움직였다. 잠시 후 내 기척을 눈치챘는지 살기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칼리온!”
고음의 목소리가 숲 속에 메아리쳤다. 마나를 담은 탓에 바로 옆에서 고함치는 것처럼 고막이 아팠다. 귀마개만 얻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칼리온!”
“큭!”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누른 후 신경질적으로 발을 놀렸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카렌의 목소리 공격에 자그마치 이틀이나 시달려야 했다.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완전히 따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카렌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만약을 위해 하루를 더 달렸다.
베네딕트와 카렌을 완벽하게 따돌렸다고 확신하고 나서야 동굴로 돌아왔다.
“…….”
나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동굴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 * *
동굴 외벽에 붙어 주변을 살폈다.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피 냄새가 너무 짙었다. 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손가락을 만져 감촉을 확인했다.
대략 반나절 전에 뿌려진 피였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미약한 마나가 느껴졌다. 습격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주위를 경계했다.
그때였다.
스르륵.
등을 기대고 있는 동굴 외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큭! 마법인가!”
다크섀도우로 얼굴을 가리며 옆으로 몸을 굴렸다. 잽싸게 몸을 일으켜 동굴 외벽을 쳐다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간덩이가 그렇게 작아서야 어찌 사내라고 할까. 쯧쯧쯧.”
쿠차차가 한심한 얼굴로 혀를 찼다.
“동굴 입구에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응? 몰랐어? 이 몸께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최상급 에고 아티팩트라구.”
마치 시범을 보이듯 쿠차차가 외벽에 스르륵 동화되었다.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듯 돌벽이 꿈틀거렸다. 그렇게 위치를 이동한 후 다시 쿠차차의 얼굴이 스르륵 돌벽을 뚫고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군.”
쿠차차는 마족 소환 의식에 사용되었어야 할 혈석으로 만든 아티팩트였다. 소환 의식을 다시는 하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은 리치는 남은 혈석을 모두 아티팩트 만드는 데 소모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쿠차차였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스스로 움직이기까지 하는 아티팩트라.
혈석 한두 개로는 어림도 없었다. 쿠차차의 제작에 사용된 혈석은 최소한 수십 개는 될 터였다.
“대체 어떤 마족을 소환하려고 한 거지?”
혈석은 마족 소환에만 사용할 수 있는, 쓰임새가 제한된 마나석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쓰임새가 제한된 만큼 마나석보다 내재된 힘은 더욱 컸다.
하급 마나석조차 상상을 초월하는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물며 그럴진대 리치의 혈석은 모두 중급 마나석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그런 혈석이 무려 수십 개였으니 쿠차차가 얼마나 엄청난 가치를 지닌 아티팩트인지 새삼 놀라웠다.
순간 석연치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분명 혈석은 마족 소환에만 사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아티팩트 제작에 사용한 거지?”
갑자기 리치에 대한 의심이 커지면서 덩달아 쿠차차에 대한 의심도 증폭되었다. 동굴의 습격자가 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뭘 봐? 이 몸의 능력에 감동한 것이냐? 크크크!”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쿠차차를 보자 문득 심각하게 고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확인해 보는 게 빠르겠군.”
리치와 나는 슬레이브 스템프로 묶여 있었다. 덕분에 나는 리치의 마음속을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리치의 위치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동굴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인지 리치의 마음이 무척이나 흐릿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리치가 현재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리치의 마음은 현재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동굴이 파괴된 상황에서 흥분과 기대라니.
상당히 왜곡되고 삐뚤어진 감정이었지만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었다.
동굴이 파괴됨으로써 내가 겪어야 할 고난과 시련이 리치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이리라.
죽지 않는 범위 내에서 리치는 내가 힘들어하면 힘들어할수록 더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사지 중 하나가 잘린다면 아예 박장대소를 할 테지.
“어쨌든 배신을 한 것 같지는 않으니 혈석에 대해선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리치에 대한 의심이 일단락되자 다시 동굴의 습격자가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잠시 후 나는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목격자의 진술을 듣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게…….”
쿠차차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홀쭉이 남자와 뚱뚱이 여자가 찾아왔다. 남자와 여자는 오자마자 ‘칼리온’을 부르짖으며 난동을 부렸다. 웬만하면 막아 보려 했는데 뉘 집 개 이름 부르듯 오러 블레이드를 뿌려 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문지기의 역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렉과 리치는 진즉에 도망쳤고, 책임감 투철한 메이어만이 감옥의 투사들을 구해 간신히 몸을 피했다. 그 와중에 몇 명이 죽었지만 대부분 동굴 밖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칼리온’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너는 그들이 동굴을 떠날 때까지 숨어 있었다는 말이군.”
“수, 숨어 있다니! 나중을 기약하기 위해 염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차차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자기가 말해 놓고도 무안한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럼 현재 동굴 안에는 아무도 없는 거지?”
“아마도 그럴걸.”
자신 없는 말투였다. 역시 습격자를 지켜보기는커녕 아예 멀리 도망갔던 것이 분명했다. 진짜로 자격 미달의 문지기였다.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스르륵.
꿈틀꿈틀.
돌벽에 동화된 쿠차차가 나를 따라왔다.
짙은 피 냄새에 비해 시체는 별로 없었다. 동굴 입구 쪽에 하나, 내가 수련을 하던 곳에 둘, 감옥이 있던 곳에 둘이 전부였다.
베네딕트와 카렌은 투사들을 학살하는 대신 동굴을 학대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돌기둥이 죄다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바닥은 뒤집어져 울퉁불퉁했고, 벽은 자상으로 난도질되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주겠다는 경고 같군.”
스르륵.
엉망이 된 벽에서 쿠차차가 튀어나왔다. 벽에 난 칼자국이 쿠차차의 얼굴에 그대로 새겨졌다.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잠잘 곳을 찾아야겠지. 이런 곳에서 잘 수는 없잖아.”
그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까꿍!”
목소리의 주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땅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정수리를 꿰뚫었다.
“찾〜았〜다〜. 칼〜리〜온〜. 깔깔깔!”
고개를 돌리자 동굴의 유일한 출구를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획 쿠차차를 노려봤다.
“그래서 내가 아마도……라고 했잖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얼버무리며 쿠차차가 벽 너머로 스르륵 사라졌다.
퍽!
쿠차차가 사라진 벽을 걷어찼다. 아쉽게도 좀 늦고 말았다.
“……젠장.”
“인사는 잘 받았다.”
베네딕트의 손끝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쐐애액!
하얀 빛줄기가 이마를 향해 날아왔다. 다크섀도우에 마력을 모아 빛줄기를 후려쳤다.
깡!
쇳소리와 함께 빛줄기가 하늘로 꺾였다.
푸욱!
이룡을 구하기 위해 카렌을 향해 던졌던 단검이 동굴 천장에 깊숙이 박혔다.
다크섀도우에 부딪힌 자국이 생겼다. 마력을 주입하자 자국이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손목은 여전히 시큰거렸다.
“대체 뭘 먹었기에 그렇게 된 거지?”
시간도 벌 겸 궁금증도 해소할 겸 카렌에게 물었다. 그녀는 멋진 왕자님을 발견한 소녀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희열과 광기로 범벅이 된 눈이었다.
“뭘 먹었냐고? 깔깔깔!”
카렌이 얼굴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피 묻은 붕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노…… 절망…… 복수심…… 증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더군. 더 알려 줘?”
“아니, 됐어. 네가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충분히 알았으니까.”
카렌의 출렁이는 뱃살을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도발해 볼 생각이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툭.
카렌의 얼굴에서 붕대가 떨어졌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흉측했다. 이마와 뺨 곳곳에서 핏물과 진물이 배어나고 있었다. 멀쩡한 곳은 오직 광기에 물든 눈동자뿐이었다.
“예쁜데. 크크크!”
두 번째 도발은 조금 먹혔다.
휘리릭!
철썩!
카렌의 채찍이 땅바닥을 때렸다.
“네놈도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 주겠다. 사지의 근육을 자르고, 혀와 눈알을 뽑고, 고막을 터뜨려 평생 보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게 해 주마.”
카렌이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투사로 살아가면서 배운 싸움의 지혜 중 그 첫 번째.
싸움이 시작되면 무조건 선빵을 날릴 것.
“똑같긴, 개뿔!”
뽑아낼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주먹에 모아 동굴의 벽을 후려쳤다.
콰앙!
사방이 막힌 동굴 안이라 폭음이 계속해서 메아리치며 증폭되었다. 종국에는 뇌가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되었다.
“먼저 사지의 근육부터 잘라 주마!”
휘리릭!
붉은 채찍이 S 자를 그리며 날아왔다. 채찍의 끝이 뱀의 혓바닥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다 갑자기 송곳처럼 뾰족하게 변하면서 왼쪽 어깨를 노렸다.
옆으로 몸을 틀었지만 채찍 끝이 살짝 스쳤다. 채찍에 담겨 있던 마나가 작은 상처를 통해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몸이 찌릿했다.
“큭!”
신음을 삼키며 다시 한 번 동굴 벽을 때렸다.
콰앙!
쩌적!
폭음과 함께 동굴 벽에 지그재그 모양의 금이 새겨졌다.
“뭔 짓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한번 발버둥 쳐 보아라. 깔깔깔!”
휘리릭!
채찍이 발목을 노렸다. 뒤로 피하려던 순간 채찍이 바닥을 때리며 그 반동으로 위로 튀었다. 날카로운 검에 베인 것처럼 오른쪽 뺨이 찢어졌다.
화끈거리는 고통을 무시하고 동굴 벽을 때렸다.
콰앙!
한 번 더!
콰앙!
손목까지 박힐 만큼 강한 일격이었다. 주먹을 뽑아서 다시 가격하려는 찰나 드디어 원하던 소리가 들렸다.
드드드드!
동굴이 진동했다. 천장에서 우수수 돌가루가 떨어졌다.
“이런 망할!”
주인의 복수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베네딕트가 검을 뽑은 후 달려들었다.
“미친놈들을 상대하려면 미치는 게 최고지. 자아, 축제를 시작해 보자.”
주먹을 힘껏 잡아당긴 후 벽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콰앙!
쩌적! 쩌저적!
수백 개의 실선이 동굴 전체로 뻗어 나갔다. 거대한 거미가 방사형 모양으로 거미집을 만드는 것 같았다. 빠르게 퍼져 나가던 실선이 동굴 천장에서 한 몸이 되는 순간.
콰르르릉!
동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칼리온!”
팟팟팟!
베네딕트가 떨어지는 바위를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내 쪽으로 뛰어왔다.
“이거나 먹어라!”
나는 머리맡으로 떨어지는 바위를 붙잡은 후 베네딕트에게 집어 던졌다.
서걱!
섬광이 번쩍하더니 바위가 산산조각으로 터졌다. 먼지로 변한 바위를 뚫고 베네딕트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카렌 님의 복수를 해 주마!”
검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수십 개로 분열된 검이 나를 사방에서 압박했다.
강해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힘의 근원을 깨달은 덕분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오러 블레이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강해졌다.
……그러나 실감할 수는 없었다.
실질적으로 비교해 볼 만한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강해졌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베네딕트와 카렌을 피해 도망을 쳤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내가 정말로 강해졌다는 것을.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날아오는 칼날에 손을 집어넣는 무모한 행동처럼 보였다. 역시나 수십 개의 검이 팔을 관통했다.
나는 손을 쫘악 폈다 꽈악 주먹을 쥐었다.
덥석!
허상 속에 숨어 있는 진실한 검이 주먹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내 팔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전에는 보이지도 않았던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의 속도를 쫓아갈 수 있었다.
희열이었고, 환희였다. 짜릿한 전율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반대쪽 주먹으로 베네딕트의 얼굴을 때렸다.
“큭!”
당황한 베네딕트가 검을 버린 채 옆으로 몸을 굴렸다.
주먹이 허공을 갈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검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쨍강!
반으로 부러진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용솟음치는 자신감과 사그라지는 두려움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위에서 떨어지는 바위를 피해 옆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바위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동굴이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도망치기 위해서 무너뜨렸던 동굴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괜한 짓을 했군. 이럴 줄 알았으면 동굴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었는데.”
오만하게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
그 이름은 ‘방심’이었다.
* * *
휘잉!
바람 소리가 들렸다고 느낀 순간 바위와 바위 사이를 곡예하듯 비행한 채찍이 배를 꿰뚫었다.
“어?”
배에 꽂힌 채찍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배에서 나온 피가 채찍을 타고 또르르 굴러가다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교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채찍을 붙잡았다. 몸에 박혀 있는 이물질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빼낼 수가 없었다. 채찍은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 먹었다.
휘청!
대량의 피가 채찍을 타고 흘러나온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파? 고통스러워?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인상 쓰지 마. 즐거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깔깔깔!”
카렌의 손이 움직였다. 채찍이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 반동으로 내 몸이 하늘로 부웅 떠올랐다.
“커헉!”
부유감과 함께 자신감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제야 고통이 밀려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채찍을 끄집어내기 위해 손에 힘을 준 순간.
퍼억!
떨어지던 바위에 직격으로 몸이 부딪쳤다.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몸이 바위에 박힐 정도였다.
“쿨럭!”
기침과 함께 핏물이 흘러나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채찍을 잡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시 채찍이 움직였다. 몸이 다시 허공을 날랐다.
퍼억!
퍼억!
떨어지는 바위에 난타당하며 낙엽처럼 방황하다 종국에는 땅에 처박혔다.
온몸의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깨진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눈으로 들어간 탓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세상이 온통 붉게 보였다.
붉게 변한 시야에 거대한 바위가 들어왔다. 나는 내 위로 수직 하강하고 있는 바위를 멍하니 쳐다봤다. 바위는 마치 슬로우 마법이 걸린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지는 바위.
바위의 크기가 시야의 한계를 벗어나는 순간 모든 힘을 그러모아 옆으로 몸을 굴렸다.
“이 정도로 내가 죽을 것 같으냐!”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쾅!
바위가 내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고막이 먹먹했다.
바위를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을 계속 굴렸다. 그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 동굴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카렌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는 참인데 어딜 가려고? 나하고 좀 더 놀자.”
채찍이 팔자 모양을 그리며 날아왔다. 두세 방쯤 맞아 줄 각오로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동굴에서 탈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몸 상태를 고려해 봤을 때 카렌의 채찍을 두세 방씩이나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카렌의 채찍을 덥석 붙잡았다.
“이제야 같이 놀아 볼 마음이 생겼어?”
카렌이 흉측한 얼굴로 낄낄거리며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가슴에서 울컥 솟아오른 핏덩이를 채찍 위에 쏟아 냈다. 막혔던 가슴이 조금 시원해졌다.
“내 귀여운 채찍에 왜 피를 뱉고 지랄이야!”
“왜 피를 뱉었냐고?”
나는 씨익 웃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지! 슬라이드!”
반지가 희미하게 빛났다.
순간 내가 쏟아 낸 핏물이 채찍을 타고 카렌 쪽으로 쭈욱 미끄러졌다.
카렌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나의 외침과 함께 의아함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기억날 테지, 이 뜨거움이! 파이어 볼!”
반지에 저장되어 있던 마지막 마법이 구현되었다. 핏물에 달라붙은 마법의 불꽃이 슬라이드 마법을 타고 카렌에게 돌진했다.
화르륵!
“꺄아아악!”
깜짝 놀란 카렌이 채찍에서 손을 떼며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있는 힘껏 도약했다. 이별 선물로 그녀의 얼굴을 향해 화염 채찍을 던져 주었다.
“꺄아악!”
카렌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카렌 님!”
베네딕트가 카렌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와 동시에 콰르릉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멀리 희미하게 빛무리가 보였다.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날린 순간 마침내 동굴이 입을 다물었다.
쿠르르릉!
폭음과 함께 동굴이 붕괴되었다. 엄청난 먼지구름이 적란운처럼 피어올랐다.
“헉……. 헉…….”
하마터면 압사할 뻔했다고 생각하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크윽!”
무리하게 뛰어서인지 배의 상처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처의 깊이가 아니라 살아남았다는 결과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먼지구름이 흩어지면서 굳게 닫힌 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긴장해 있던 몸이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자연 재해에 가까운 산사태 속에서 놈들이 살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찰나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섬뜩!
불길한 느낌이 본능을 자극했고, 그 본능에 몸이 반응했다. 지쳐서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던 다리가 놀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동굴에서 막 멀어지려고 할 때.
꽉 막힌 동굴 입구에서 한 줄기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콰과광!
섬광이 막혔던 입구를 뻥 뚫었다. 섬광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새로 뚫린 시커먼 동굴 속에서 한 쌍의 남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젠장.”
거의 구르다시피 뛰어 바위산을 내려왔다. 부상을 입을 탓에 제대로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슬쩍 뒤를 돌아봤다. 놈들은 내 꼬락서니를 비웃으며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나를 잡으려고 했다면 진즉에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토끼몰이군.”
놈들의 속셈을 알면서도 그 속셈대로 따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렇게 놈들의 손바닥 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