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점화 (21/45)

점화

“젠장! 어디야? 어디 숨은 거야?”

“몰라! 귀신같은 놈들!”

“찾았다! 저쪽이다!”

10여 명의 투사들이 오른쪽 덤불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견고했던 그들의 진형이 무너진 순간을 노려 가장 뒤에 있던 투사를 덮쳤다.

“흡!”

등 쪽으로 은밀하게 다가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투사는 나를 뿌리치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어쩔 수 없군. 목을 부러뜨려야 하나.”

투사의 귀에 대고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거짓말처럼 발버둥이 멈췄다.

“자아, 몸에 힘을 빼고. 조용히 뒷걸음질하는 거야.”

투사는 착한 아이처럼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원래 숨어 있었던 장소로 돌아오자마자 투사의 목을 강하게 졸라 기절시켰다.

그때였다.

오른쪽 덤불로 몰려갔던 투사들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젠장! 당했다! 콜루가 없어!”

“찾아!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투사들이 주변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내가 숨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어디 숨어 있는 것이냐! 정정당당하게 얼굴을 보여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내 손에 걸리면 사지를 부러뜨려 주겠다!”

숨어 있는 바위 바로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쓰러뜨려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다른 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도망친다! 쫓아!”

후다닥!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멀어졌다.

“누구지?”

나를 대신해 누군가가 미끼가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계획에 없던 행동이었다. 조금 불안했지만 일단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기절한 투사를 들고 약속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여우 굴 앞이었다.

미리 와 쉬고 있던 메이어가 앉은 자세에서 벌떡 일어섰다.

“드디어 삼룡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마터면 잡힐 뻔했습니다.”

“용케 도망쳤군.”

잡아 왔던 투사를 여우 굴 앞에 던진 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달리기는 자신 있으니까요. 오래달리기는 무리지만.”

“삼룡이 움직였단 말이지.”

“다른 두 명은 아마 오지 못할 겁니다.”

메이어가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마치 어떻게 할 것이냐, 부하를 버릴 것이냐, 묻는 것처럼.

“그렇군.”

조금 전 나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던 미끼는 역시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재까지 확보한 투사들의 숫자는 57명.

남아 있는 투사들의 숫자는 64명.

납치한 투사들의 숫자가 과반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때문에 슬슬 삼룡이 움직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빨랐다.

메이어의 말처럼 삼룡이 직접 움직였다면 나머지 두 명의 부하들은 아마 무사히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메이어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본 뒤 베르토와 페니가 오지 않으면 일단 동굴로 돌아간다.”

“베르토와 페니를…… 버릴 작정입니까?”

실망 섞인 목소리로 메이어가 물었다.

“누가 버린다고 했지?”

“그럼 어째서 동굴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당장 구하러 가지 않으면 베르토와 페니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흥분한 듯 메이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른 후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베르토와 페니는 죽지 않아. 고문은 좀 받겠지만. 게다가 난 함정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 그곳으로 걸어 들어갈 만큼 성격이 좋지 못해.”

만약 삼룡이 베르토와 페니를 잡았다면 그들을 이용해 함정을 파 놓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상황을 주도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 했다.

메이어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납득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실망하고 또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달과 별이 떠 있었다. 어스름한 땅거미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황금빛 노을이 마지막 빛을 발하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고 완전한 어둠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렇게 약속 시간이 지나갔다.

“가자.”

납치한 투사를 옆구리에 끼고 여우 굴을 떠나려는데 묵묵히 있던 메이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베르토와 페니가 무사할 것이라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현재까지 투사들은 한 명도 죽이지 않았어. 삼룡도 머리가 있다면 지금쯤 우리의 목적이 전투가 아니라 납치라는 것을 알 거야.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베르토와 페니를 죽일 것 같아? 그 순간 진짜 전투가 펼쳐진다는 것쯤은 그들도 눈치채고 있겠지.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내가 왜 투사들을 납치하고 있는지 베르토와 페니에게 물어보는 것 정도일 거야. 함정을 파 놓으면서 말이지.”

메이어가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에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메이어의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만약…… 만약 베르토와 페니가 죽으면…….”

“철저하게 돌려준다. 후회조차 하지 못할 만큼.”

메이어가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만족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입을 꽉 다문 채 내 뒤를 쫓아왔다.

동굴에 도착할 때까지 메이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시커먼 구름이 달을 가렸다. 애달픈 늑대의 울음소리가 적막한 밤하늘을 갈랐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공기가 축축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며 지나갔다.

덜그덕!

덜그덕!

바위산 꼭대기에 있는 흔들바위 위에 앉아 적무도를 굽어봤다. 밤의 여신이 내려앉은 섬은 황량할 만큼 조용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앞으로의 일을 떠올렸다. 작은 계획과 큰 계획이 연속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치밀한 계획도 있었고, 운이 필요한 계획도 있었고,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도 있었다.

모든 계획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얽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실현 불가능한 허점투성이 계획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천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애초부터 완벽한 계획이란 없었다. 따라서 변수가 생겨 계획이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나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대비책이자, 가장 확실한 계획이었다.

마력이 크게 요동쳤다. 보름달이 뜬 밤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격렬하게 반응했다.

서서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소리가 사라지고,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잊혔다. 모든 감각이 무無가 되는 순간 의식이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잠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공간에서 촛불보다 작고 연약한 푸른 불꽃이 외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꺼질 듯, 꺼질 듯, 그러나 결코 꺼지지 않는 불멸의 불꽃.

바로 복수의 불꽃이었다.

다시 눈을 떴다. 태양이 뜨기 직전인 새벽녘이었고, 공기는 축축함을 넘어 물비린내를 머금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가볍고 개운했다. 길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정신이 또렷해졌다.

“자아, 가 볼까.”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적무도를 향해 조용히 선전포고를 했다.

“같이 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메이어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따라가겠다는 의지가 눈동자에 가득했다.

“네가 아무리 빨라도 삼룡을 따돌릴 수는 없어. 그러니 오늘은 동굴에서 대기하도록.”

“같이 가겠습니다.”

마치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메이어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나 역시 메이어의 말을 무시했다.

“마렉,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 이번에야말로 계획대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놈들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아예 귀마개까지 준비했으니까.”

마렉은 원뿔 모양의 작은 귀마개를 귓속에 쏙 넣으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귀마개는 리치가 만들어 준 것으로 소리를 차단하는 사일런트Silent 마법이 걸려 있었다.

“같이 가겠습니다.”

“먼저 출발해.”

“그럼 이따 봐.”

마렉은 마치 소풍을 가는 듯 느긋한 모습으로 동굴을 떠났다. 나는 마렉이 향한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겠습니다.”

메이어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동굴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을 텐데.”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네 실력으론 무리다.”

메이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매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배신인가?”

“아닙니다. 단지 실력을 증명하고 싶을 뿐입니다.”

마나의 기운이 나를 압박했다. 제법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이라면 삼룡이 아니라 베네딕트라 할지라도 저를 잡을 수 없습니다.”

메이어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올곧으면서도 투쟁심이 넘치는 눈이었다. 강한 자신감이 그 안에 스며 있었다.

그 투쟁심과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무시하는 대신 납득이 갈 만한 대답을 해 주기로 했다. 다소 거칠지만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용의 재능을 지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결국 용이 되지 못했지. 너는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만, 된 자와 되지 못한 자의 차이, 그 한 끗 차이를 지금 깨닫게 해 주마.”

메이어는 나의 도발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뒤로 두어 발 물러서서 전투준비를 하는 그에게 마지막 도발을 했다.

“일격이다. 나의 일격을 피하면 너와 함께 가겠다.”

무표정을 유지하던 표정이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뿜어내는 기세에 살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기대하겠습니다.”

“기대해도 좋을 거야.”

마력을 끌어 올렸다.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선언했던 대로 단 일격에 끝낼 생각이었다.

휘이잉!

바람이 나와 메이어 주위를 맴돌았다.

긴장된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 싸움이 시작되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을 참지 못한 것은 나도, 메이어도 아니었다.

“사내자식들이 눈싸움만 하고 뭐하는 짓이냐? 얼른 후딱 붙어.”

쿠차차가 지루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여 메이어의 몸이 움찔하는 순간.

쿵!

끌어모았던 마력을 오른발에 집중시킨 후 있는 힘껏 땅을 굴렀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잔뜩 움츠린 채 나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던 메이어의 몸이 땅의 진동으로 살짝 떠올랐다.

팟!

그 찰나의 틈을 노려 몸을 움직였다.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큭! 비겁한!”

몸이 공중에 뜬 탓에 메이어의 움직임이 일순간 봉인당했다. 그로 인해 한 박자 움직임이 늦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지만 그뿐이었다. 타이밍만 빼앗을 수 있으면 조금 느리더라도 빠름을 제압할 수 있었다.

스팟!

메이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곤 관성의 힘을 이용해 팔꿈치로 배를 가격했다.

“컥!”

메이어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돌출되었다.

“왜 네가 용이 되지 못했는지 알겠지? 체력 때문이 아니야. 체력이라고 생각해 버린 네 나약한 마음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어. 인간은 모두 부족한 존재이지. 그리 대단한 칭호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것을 극복했기 때문에 용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메이어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그는 분한 듯 혹은 기습당한 게 억울한 듯, 알 수 없는 얼굴로 스르륵 바닥에 쓰러졌다.

기절한 메이어를 동굴 안쪽으로 던져 놓은 후 하늘을 바라봤다. 동쪽 하늘에서 벌써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조금 서둘러야겠군. 몸도 풀렸으니 달려 볼까.”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반으로 부러진 나무 뒤에 숨어 투사들의 진영을 살폈다.

사방이 조용했다.

경계를 서고 있는 투사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예상대로 밤새 경계를 섰는지 모두 피곤한 얼굴이었다.

삼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이 확실했다. 본능이 끊임없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진영 한가운데 기다란 나무 기둥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베르토와 페니가 그 기둥에 묶여 있었다. 고문을 받았는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아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부하들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나의 모습과 사고방식이 결코 낯설지 않음을.

기억 속의 누군가와 겹쳐질 만큼 유사함을.

베르토와 페니가 삼룡에게 붙잡히리란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작전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결국 예상대로 그들은 잡히고 말았다.

메이어에게는 죽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었다. 죽어 버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최소한 근육과 힘줄이 잘려 다시는 싸울 수 없는 몸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그 정도의 희생’을 베르토와 페니에게 강요한 셈이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부하를 베어 넘기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휴멜.”

나의 사고방식은 휴멜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놀랍게도, 그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담담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변한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최악의, 하지만 투사로서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휴멜처럼 되어야만 휴멜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휴멜처럼 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미 나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있었다. 내 모든 것을 바쳐 복수에 성공한 경험이.

전생의 나에 비하면 원수의 성정에 물들어 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수면을 뚫고 태양이 떠올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좀먹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짹짹짹!

우중충한 하늘만큼이나 새의 노랫소리가 처량했다. 그 울음소리와 함께 부하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쾅!

요란한 폭발이 평화로운 아침을 파괴했다. 깜짝 놀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이슬이 후두둑 비처럼 쏟아졌다.

“뭐, 뭐지?”

“습격이다!”

“모두 일어나! 습격이다!”

졸고 있던 투사들이 허겁지겁 무기를 뽑았다.

쾅!

쾅! 쾅!

계획했던 것처럼 투사들의 진영 뒤쪽에서 마렉이 난동을 부렸다. 당황한 투사들이 마렉이 있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때였다.

“모두 정신 차려!”

사자후 같은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마치 차가운 바람이 분 듯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하늘에서 한 여자가 떨어졌다. 그녀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우뚝 멈춰 있는 투사들을 빙 둘러본 후 다시 소리를 질렀다.

“성동격서다! 반은 나를 따라오고 반은 여기 남아 인질을 지켜라!”

삼룡 중 하나인 파나티였다.

파나티가 등장하자 당황하던 투사들이 삽시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진열을 정비한 투사들이 파나티의 뒤를 쫓았다.

챙! 챙!

마렉과 투사들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쇳소리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나티의 명령대로 인질 곁에 남은 투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윽고 마렉의 것으로 보이는 마나의 기운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놈이 도망간다! 쫓아라!”

계획대로 마렉은 싸우는 척만 하다 도망가기 시작했다. 파나티와 투사들은 성동격서인 줄 알면서도 마렉의 뒤를 쫓았다. 인질 옆에 남아 있는 다른 두 명의 용들을 믿는 것이리라.

그 믿음이 너희들의 목을 죌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진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였다.

“머, 멈춰라!”

맨 앞에 서 있는 투사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산책하듯 나무 기둥을 향해 걸었다. 수십 명이 넘는 투사들이 내 전진에 맞춰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손에 들린 무기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였고, 그만큼 계획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반증이었다.

“고, 공격하겠다!”

맨 앞의 투사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말과 다르게 공격할 의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던 투사들이 나무 기둥 바로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마력을 끌어 올렸다.

슈욱!

다크섀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힉! 검은 장갑이다!”

“다크섀도우다!”

요새에 있을 때부터 다크섀도우는 명물이었다. 맨손으로 몬스터를 때려잡는 투사는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투사들의 눈동자에 갈등이 엿보였다.

뜬구름 속에 있었던 다른 용들과 다르게 나는 투사들과 함께 전쟁을 치렀다. 내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투사들이기에 그만큼 두려움과 망설임이 클 것이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주변을 곁눈질하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 강맹한 마나의 파동 두 개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시작…….”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마력이 오른쪽 주먹으로 빠르게 집중되었다. 밤하늘보다 어두운 빛이 다크섀도우에 서렸다.

“……해 볼까!”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꽝!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날아오던 마나의 파동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휘오오오!

폭발의 충격으로 생긴 거친 바람이 눈을 뜨기 힘들 만큼 휘몰아쳤다.

“크윽!”

투사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음을 흘렸다.

바람이 사라지자 어느새 못 보던 얼굴 두 명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성동격서라. 칼리온, 너무 뻔한 작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면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소린가?”

“우리가 핫바지로 보이나 보지?”

삐쩍 마른 남자와 부담스러울 만큼 뚱뚱한 남자가 번갈아 가며 이죽거렸다.

롤랑과 베이도르.

마침내 모든 삼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르르릉!

하늘에 뇌운이 가득했다. 거대한 먹구름이 마법사의 탑처럼 우뚝 서 있었다.

비가 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싸우기 전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대체 왜 투사들을 납치해 가는 거지? 부하를 만들 생각이라면 그냥 우리와 손을 잡는 게 어때? 번거롭지 않고 좋잖아.”

롤랑이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잡자고? 나를 죽자 살자 쫓아다닌 게 누구였는데?”

“아아, 시모프 말이지? 걱정하지 마. 과거에 연연할 만큼 우리 쪼잔하지 않으니까.”

롤랑이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퉤!

나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롤랑을 노려봤다.

“사양하지. 그냥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 대우는 섭섭하지 않게 해 주지.”

나는 두 눈에 거만함을 가득 담은 후 롤랑에게 선물로 주었다. 내 선물을 받자마자 롤랑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부끄러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 마음껏 분노해서 이성을 잃어라.

“썅! 옛정을 생각해 기회를 주려 했더니 감히 나를 모욕해!”

“진정해. 일부러 저러는 거 알잖아.”

베이도르가 한숨을 쉬며 롤랑을 말렸다.

“역시 소문대로 광견이구나. 미친개에겐 매가 약이지.”

나는 팔짝 뛰고 있는 롤랑을 계속 놀렸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도발하자 마침내 롤랑이 이성을 잃었다.

“이, 이 새끼가 진짜!”

흥분한 롤랑이 만류하는 베이도르의 손길을 뿌리치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다혈질적인 놈이었다. 나에겐 고마운 일이었지만.

챙! 챙!

롤랑은 양손에 단검을 하나씩 뽑아 들었다. 하나는 바로 들고, 다른 하나는 역수로 든 채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죽엇!”

마나를 머금은 단검이 예리한 각도로 미간을 찔렀다. 푸른빛이 허공에 반달을 그렸다.

쐐액!

파공성이 공기를 찢었다. 한기가 꼬리뼈를 타고 올라올 만큼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나의 미간을 노리는 단검을 보며 깨달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는 것을.

지금이야말로 계획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갈림길의 순간임을.

나는 롤랑과 베이도르가 등장하기 전부터 은근슬쩍 갈무리해 두었던 마력을 일시에 폭발시켰다.

다수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집단의 우두머리를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치고받고 싸워 힘들게 굴복시켜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위험했다. 해 볼 만하다고 우습게 여겨져서는 필패였다.

내게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승리를 궁리하기는커녕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조차 말소시켜 버릴 만큼 어마어마한 무력 차이를 보여 줘야 했다.

나는 까딱 고개를 움직여 단검을 피했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마.”

재차 공격하려는 롤랑에게 작게 속삭인 뒤 의아해하는 그에게 씨익 미소를 던졌다.

“슬라이드Slide.”

오른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미약한 마나의 진동이 롤랑이 디디고 있던 땅의 마찰력을 영으로 만들었다.

미끌!

휘청!

순간적으로 롤랑의 다리가 미끄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그대로 롤랑의 사타구니를 향해 발을 날렸다.

퍽!

롤랑의 눈이 뒤집어졌다.

“이 비겁한 놈!”

베이도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반지의 마법은 리치가 담아 준 것이었다. 1레벨 마법은 대체적으로 마나의 기운이 옅었다. 그래서 들키지 않을 줄 알았건만 베이도르는 생긴 것답지 않게 눈치가 빨랐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쓰러지는 롤랑을 무시한 채 만약을 위해 들고 있던 돌멩이를 베이도르에게 던졌다.

“헉!”

롤랑을 구하기 위해 달려 나오려던 베이도르가 숨을 삼키며 팔을 X 자로 교차시켰다.

반투명한 막이 베이도르의 몸을 감쌌다.

쾅!

마력이 담긴 돌멩이는 공격 마법과도 같은 위력을 보여 줬다. 베이도르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크윽!”

신음을 삼킨 베이도르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거기서 잠깐 기다려. 미친개를 먼저 손봐 주고 곧 갈 테니.”

협박을 하며 마력을 최대한 끌어 올린 보람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베이도르가 망설이며 주춤거렸다.

나는 조금 어긋난 계획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쓰러진 롤랑을 일으켜 세웠다.

투사들은 뜻밖의 사태에 놀란 듯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투사들의 망설임을 없애 주기 위해선 좀 더 과격한 방법이 필요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마.”

나는 이미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롤랑을 바닥에 패대기친 후 무식하게 밟기 시작했다.

거의 시정잡배의 개싸움이나 다름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발길질이었다. 그 원초적인 폭력에 모두가 질린 얼굴이 되었다.

“헉……. 헉…….”

말 그대로 미친 듯 날뛰었다.

롤랑은 기절했는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주변을 쓰윽 둘러보자 모두 나의 눈길을 피했다.

나는 만족하며 씨익 웃었다.

“이제 너희들 차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질린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나무 기둥 쪽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투사들이 좌우로 갈라서기 시작했다.

롤랑이 피 떡이 된 지금 실질적으로 투사들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은 베이도르였다. 그 말은 곧 나에게 있어 최우선 제거 대상이라는 것과 같았다.

‘자아, 베이도르, 어떻게 할 것이냐? 싸울 것이냐? 아니면…….’

베이도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다시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나는 질문을 던졌고, 베이도르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나는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 기둥이 있는 곳까지 가는 동안 아무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투사들은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진 채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최대한 그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최대한 당당하게 몸을 움직이며 나무 기둥에 묶여 있는 베르토와 페니를 구출했다.

두 사람을 양쪽 옆구리에 끼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려는데 여태껏 잠자코 있던 베이도르가 앞을 가로막았다.

“한번 해보자는 거냐?”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면서도 혹시나 초조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막말로 베이도르가 진짜 덤벼든다면 베르토와 페니를 구출하는 것은 고사하고 내 한 몸 빼내기도 벅찰 것이기 때문이다. 등에서 식은땀이 날 만큼 긴장된 순간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가만히 있고 싶지만 나도 체면이란 게 있으니까, 이대로 고이 걸어 나가게 해서는 얼굴 팔려서 살 수가 없을 거야. 이 바닥이 원래 한번 우습게 보이면 끝장나는 곳이잖아. 소위 불가항력이라는 것이지. 젠장맞게도 말이야.”

정말로 젠장맞게도, 였다.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이 이렇게 틀어지다니. 그것도 고작 체면이라는 놈 때문에.

베이도르가 내 앞을 가로막은 시점부터 투사들의 기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제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사라졌던 의지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무언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섣부른 행동은 이들을 자극할 뿐이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균형이 계속되었다.

투사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때였다.

숲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삭!

사사삭!

한둘이 아니었다. 수십 명이 나무 위, 바위 뒤에 숨어 삼룡의 진영을 둘러싸고 있었다.

전투 의지를 불태우던 베이도르와 투사들이 당황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당황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주변 숲 속에 은신해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렉을 쫓아갔던 파나티가 돌아온 것이라면 숨을 이유가 없었다.

“누구냐! 모습을 보여라!”

모두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베이도르가 소리쳤다.

부스럭.

부스럭.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숲 속에서 걸어 나왔다.

“……네가 왜 여길.”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풍의 메이어…….”

베이도르가 침음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장, 작전 성공이군요.”

메이어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전? 작전이라고?”

화들짝 놀란 베이도르가 내 쪽으로 획 고개를 돌렸다.

나는 베이도르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는 의미였는데 내 제스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베이도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납치해 간 놈들을 부하로 만들었군.”

베이도르가 이빨을 갈며 내뱉었다.

“그런 것…… 같군.”

모호하게 대답한 후 메이어를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메이어의 잔꾀를 꿰뚫어 봤다. 빠른 발을 이용해 이곳저곳에 인기척을 냄으로써 마치 수십 명이 은신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리라.

어설프기 그지없는 잔꾀였다. 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했기에 어느 누구도 메이어의 잔꾀를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의심을 한다 해도 별수 없었다. 의심을 밝혀내기 위해선 싸워야 했다. 그것은 곧 메이어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메이어의 잔꾀는 지략의 싸움이 아니라 배짱 싸움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메이어보다 배짱 있는 놈은 한 명도 없었다.

베이도르가 길을 터 주었다. 꽉 움켜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오늘의 굴욕은 평생 잊지 않겠다.”

메이어의 안내를 받으며 숲으로 들어갔다.

“으아아아!”

등 뒤에서 울분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숲은 고요했다.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명령을 어겼군. 동굴에서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이곳엔 뭐하러 온 거지?”

“이럴 땐 그냥 솔직히 말하면 되는 겁니다. 고맙다고.”

썩을 놈이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가슴속까지 후련해질 만큼 시원한 미소였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베이도르 정도의 투사가 이 정도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게 기적일 만큼.”

“대장의 작전 역시 엉망이었잖습니까. 삼룡 중 하나를 묵사발로 만들면 투사들의 전투 의지가 완전히 꺾일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그 계획이란 게 무주공산에서 돌멩이 줍듯 당당히 걸어 들어가 베르토와 페니를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니. 지켜보다가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멀리서 수십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진짜 인기척이었다.

“파나티가 돌아오고 있나 보군.”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때마침 빗방울 하나가 이마 위로 톡 떨어졌다.

파나티가 돌아온 순간 베이도르의 추격이 시작될 것이다.

여전히 기절해 있는 베르토와 페니를 사이좋게 한 명씩 나눠 들고 뛰기 시작했다.

“잡혀도 구해 주지 않을 거다. 명령을 어긴 건 네놈이니까.”

“걱정 마십시오. 달리기는 자신 있습니다.”

휘익!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메이어가 나를 앞질렀다. 감히 대장을 앞지른 건방진 놈의 뒤통수를 때려 주기 위해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쿠르르릉!

쏴아아!

천둥번개와 함께 기어이 비가 쏟아졌다.

* * *

다음 날 아침.

비가 그친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청량한 공기가 싱그러웠다.

태양이 떠올랐다. 빛의 융단이 구불구불 뻗어 나가 세상의 어둠을 밀어냈다. 실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뭇잎 끝에 맺혀 있던 이슬이 반짝 빛났다.

간밤에 있었던 지옥 같은 추격전을 떠올렸다.

파나티와 베이도르는 약이 바싹 오른 고양이 같았다. 그만큼 집요했으며, 또 끈질겼다.

하루를 꼬박 도망 다닌 탓에 죽을 것처럼 몸이 피곤했다. 체력이 약한 메이어의 경우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메이어는 자신이 구해 온 베르토, 페니와 함께 리치의 치료를 받아야 했다.

베르토와 페니의 근골은 다행스럽게도 무사했다. 비록 한 달 이상 치료받아야 할 만큼 심하게 다치긴 했지만 어차피 더 이상 할 일도 없으니 이참에 푹 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동굴 벽에 몸을 기댄 채 잠깐 눈을 붙였다.

잠에서 깨어나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후 동굴을 나오자 웬일인지 멀쩡히 눈을 뜨고 있던 쿠차차가 툭 내뱉었다.

“좀 더 쉬는 게 좋을 텐데.”

“확인해 볼 게 좀 있거든. 그나저나 마렉은 어디 갔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쿠차차가 신경질을 냈다.

“배고프다고 했으니 아마 사냥이라도 하러 갔겠지.”

내키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는 쿠차차를 보자 피식 실소가 나왔다.

“그럼 졸지 말고 동굴 잘 보고 있어라.”

“감히 나를 집 지키는 개 취급하다니!”

버럭 소리를 지르는 문지기를 뒤로하고 바위산을 내려왔다. 목적지는 해안이었다.

투사들을 납치하느라 요 며칠 베네딕트의 동향을 신경 쓰지 못했다.

미친 듯이 피곤했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해안은 깜짝 놀랄 정도로 적막했다. 인기척은커녕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마족이 강림한 땅처럼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선원들이 머물렀던 해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식기와 침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기 전에 한 군데 반드시 정찰해야 할 곳이 있었다.

선원들을 죽음으로 내몰던 곳.

바로 오두막이었다.

위치를 바꿔 오두막이 보이는 장소로 이동했다. 바위를 밟고 뛰어올라 나뭇가지 위에 안착했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잔가지를 아래로 내리자 나뭇잎 사이로 해안이 보였다.

오두막이 있어야 할 위치가 텅 비어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스물스물 기어올라 왔다.

최대한 신중히 주변을 살핀 후 조심스럽게 해안가로 걸음을 옮겼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타고 비릿한 피 냄새가 날아왔다.

새하얀 모래밭 중간 중간에 검은 점이 박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끝으로 모래를 헤쳤다. 하얀 모래 안쪽에 검붉은 모래가 숨어 있었다. 피를 머금은 모래였다.

오두막이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점점 피 냄새가 짙어졌다. 오두막은 깨끗하게 증발한 상태였다. 나무 부스러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발끝으로 오두막 자리의 모래를 헤치니 새카만 흙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겨운 피 냄새가 훅 올라왔다.

“이 정도로 깨끗하게 흔적이 없다는 것은 일부러 그랬다는 건데.”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살던 곳을 일부러 없앴다?”

불길한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던 베네딕트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인가. 그렇다는 것은 드디어…….”

그때 모래밭에 떨어져 있던 한 가닥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이건?”

피처럼 붉은 빛깔이 감도는 한 뼘 길이의 머리칼.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겨울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얼굴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살아 있었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에 당했다고는 하지만 얼굴 가죽이 불탄 정도로 죽을 만큼 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를 배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복수의 기쁨을 좀 더 오래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칫! 골치 아프게 됐는데.”

카렌의 무력은 거의 베네딕트급이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수도 있었다. 방심을 틈타 한 방 먹여 주긴 했지만 제대로 붙는다면 상당히 위험한 싸움이 될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순간.

쾅!

숲 속에서 땅이 흔들릴 만큼 강한 폭발이 일었다. 먼지구름이 나무 위로 솟아올랐다.

쾅!

쾅! 쾅!

폭발은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애초부터 삼룡과 베네딕트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불과 기름이 지근거리에서 넘실거렸으니 점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급히 폭발의 진원지로 몸을 날렸다.

삼룡의 진영은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다. 넓은 구덩이가 수십 개나 파여 있었고, 주변의 나무가 깡그리 베어져 있었다. 의외로 투사들의 시체가 적었다.

삼룡의 진영에 짙게 배어 있는 마나의 냄새로 보아 제법 강력한 공격이 퍼부어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죽은 자가 너무 적었다.

공격자의 능력을 봤을 때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시체는 고작 세 구뿐이었다. 그나마 두 구는 폭발의 여파에 휘말려 목이 부러진 듯했다. 적의 공격을 받고 제대로 죽은 시체는 단 한 구였다.

시체의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뒤집어져 있던 시체를 반대로 뒤집었다.

“음…….”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만큼 시체의 상태는 처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크고 작은 상처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특히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의 형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검으로는 절대 만들지 못하는 상처였고, 카렌이 살아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두 구의 시체도 뒤집어 보았다. 두 구의 시체 역시 온몸이 갈가리 찢겨 있었다.

“목이 부러져 죽은 시체에게 매질이라.”

그녀다운 광기였다.

쾅!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잠자고 있던 최강의 투사와 최악의 마녀가 적무도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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