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
동굴 밖으로 나오니 수평선 너머로 피처럼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잠자던 숲이 서서히 깨어났다. 풀벌레가 사방에서 울었다.
바위산을 내려와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나뭇잎과 잔가지가 밟혔다. 싱그러운 공기가 폐와 머리를 정화시켰다. 상쾌한 바람이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러곤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나열했다.
“일단은…….”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리치의 동굴에 숨어 수련을 시작한 지도 어느새 한 달이었다. 이 한 달 동안 나는 한 가지를 얻고, 한 가지를 잃었다. 얻은 것도 정보였고, 잃은 것도 정보였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은 내 힘의 근원을 깨닫게 해 주었다.
단지 그뿐이었음에도 내 힘은 몰라볼 정도로 강해졌다. 마력의 통제력과 운용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나는 내 힘의 한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했다.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 채 싸움을 시작할 순 없었다.
헬 오브 인피니티를 응용한 수련 덕분에 힘의 한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사실 정확하게 알기 위해선 고작 한 달로는 어림도 없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얻은 것이 나에 대한 정보였다면, 잃은 것은 적에 대한 정보였다.
힘의 한계를 재정립하는 동안 나는 숲의 상황, 정확히 말하면 삼룡을 비롯한 투사들과 베네딕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리치에게 정찰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리치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를 믿지 못했다.
확신할 수 없는 정보를 얻느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조금 늦더라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내 머리로 판단하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결정했다.”
삼룡이 지휘하고 있을 투사들의 동향도 중요하지만 일단 가장 신경 쓰이는 쪽을 먼저 정찰하기로 했다.
나는 나를 패배시켰던 존재, 베네딕트가 있는 해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쏴아아!
너무 다가가는 것도 위험하다 싶어 파도 소리가 은은하게 들릴 만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해안의 동태를 살폈다.
해안에서 10여 명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카렌이 타고 왔던 배의 선원들이었다. 한 달 새 그들은 바닷바람과 강렬한 햇볕에 그을려 새카맣게 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원들은 아침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닥불에서 연기가 솟았고, 커다란 솥단지가 모닥불 위에 걸려 있었다.
10여 명이나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눈짓과 간단한 수신호에 의지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간혹 물건끼리 부딪치거나 또는 떨어뜨려 작은 소리라도 날라치면 모두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그들은 가능하면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해안은 묘한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중심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오두막은 선원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 위치해 있었다.
작지만 튼튼해 보이는 오두막이었다. 베네딕트가 부수었던 배의 파편으로 만든 오두막이 분명했다.
해안의 침묵은 바로 그 오두막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어둡고 음침한 기운이 오두막을 감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불길한 기운이 꿈틀댔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좀 더 유심히 해안 주변을 살폈다.
“역시…….”
선원들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카렌과 함께 온 선원의 숫자는 거의 100명에 이르렀다. 적무도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졌던 투사들과의 전투에서 제법 많은 수가 죽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수십 명은 남아 있어야 했다.
“숲으로 사냥이라도 간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근처 숲 속을 돌아다니며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해안을 계속 살폈다.
선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전쟁터 한가운데 서 있는 병사와 비슷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절망으로 점점 시들어 가는 전장의 잡초들과 완전히 똑같았다.
요리가 끝나자 선원 하나가 나무 그릇에 음식을 퍼 담았다. 그는 지나치지 않나 생각될 만큼 수북이 음식을 담았다. 거의 열 사람 몫은 되어 보였다. 그가 묵직해 보이는 그릇을 들고 돌아서자 그때부터 선원들 사이에 보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이할 만큼 무거운 침묵이었다.
선원들은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바쁘게 움직이던 시선이 하나, 둘 한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시선을 가장 많이 받은 선원이 사색이 된 채 몸을 떨었다.
그렇게 무언의 투표가 끝나고 나무 그릇을 올린 쟁반이 선택받은 선원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절망적인 얼굴로 쟁반을 건네받았다.
선원은 쟁반을 든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료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오두막으로 향했다.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사람처럼 선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두막 안으로 선원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어째서 선원들의 숫자가 적은지 알 수 있었다.
소름 끼치는 살기가 오두막 안에서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동시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처절한 비명이 침묵하고 있던 해안을 찢어발겼다.
비명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해안은 전보다 더욱더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덜컹!
오두막의 문이 세차게 열렸다.
휘익!
동그란 물체가 오두막 안에서 튀어나왔다. 물체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기적적으로 바로 섰다. 나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물체는 바로 조금 전 쟁반을 들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던 선원의 머리였다.
동료의 머리를 보고도 선원들은 침묵을 지켰다. 도망칠 의지조차 잃은 듯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마냥 쳐다볼 뿐이었다.
동료의 시체를 묵묵히 치우는 선원들을 지켜보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첫 번째 정찰이 끝났다.
나는 다음에 살펴볼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지?”
수풀에 숨어 있던 붉은 머리칼의 투사 하나가 투덜거렸다. 그 옆에 있던 다른 투사가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파나티 님 머릿속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알아서 자멸하고 있으니 좀 더 기다리시려나 보지.”
“더 기다릴 필요가 있나? 숫자도 웬만큼 줄었고, 사기도 바닥일 거고. 지금 당장 쳐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붉은 머리가 해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아침에 죽은 선원의 피가 마치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백사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파나티 님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생각은 무슨. 그냥 무서운 것이겠지, 베네딕트가.”
“어쩔 수 없잖아. 상대는 트리플 A 등급의 투사라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우리 쪽에는 A 등급 이상이 100명도 넘잖아. 더블 A 등급도 열 명이나 되고. 아무리 베네딕트라고 해도 우리 모두를 막을 수는 없어.”
“……그렇겠지. 하지만…….”
“하지만 뭐?”
빨간 머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에잇! 몰라! 나도 모른다고!”
결국 투사들의 대화는 양쪽 모두 짜증을 내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나는 그들의 머리 위에 위치한 나뭇가지에 누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봤지만 투사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히 나무를 내려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숲 속 곳곳에 투사들이 숨어 있었다. 자신들의 적이 해안에만 몰려 있다고 여겨서인지 나의 접근에는 완벽하게 무방비였다.
베네딕트의 진영을 정찰하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삼룡의 진영을 정찰하는 것은 베네딕트의 진영보다 몇 배나 어려웠다.
보란 듯 해안에 모여 있는 선원들과 다르게 투사들은 숲 속 곳곳에 은신해 있었다. 그들을 찾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다가가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자연히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해안 주변에 숨어 있는 투사들을 전부 살펴보는 데 4일이 걸렸다. 해안을 감시하는 투사들이 아침저녁으로 교대를 한 탓에 같은 장소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삼룡 밑에 있는 투사들의 숫자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수고해.”
“그래, 고생했다.”
교대하는 시간을 노려 돌아가는 투사의 뒤를 밟았다. 투사는 내가 뒤쫓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성큼성큼 숲 속으로 들어갔다.
투사는 강을 거슬러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자 폭포 소리가 귀를 때렸다.
콰르르르!
낯익은 폭포였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폭포였다. 식인 물고기에게 뜯어 먹힐 뻔한 폭포였으니까.
투사들의 새로운 요새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멸망했던 왕국의 유적이 투사들의 잠자리로 탈바꿈되었다. 허물어진 석조 건물 사이사이에서 투사들이 뒹굴고 있었다.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새로운 요새를 쭉 둘러보았다.
해안을 감시하고 있는 투사들을 제외하고도 100명이 훨씬 넘었다. 절망에 물들어 있던 선원들과 달리 투사들은 제법 활기차 보였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어떻게 걸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뚱뚱한 사내였다.
사내의 이름은 베이도르.
나와 함께 용의 칭호를 받았던 자.
베이도르의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조금 내미는 순간 베이도르가 고개를 획 돌려 내 쪽을 쳐다봤다.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저벅.
저벅.
육중한 느낌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저벅.
내가 숨어 있는 나무 바로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무성한 나뭇잎 틈새로 언뜻 베이도르의 모습이 보였다.
주먹에 힘을 주었다.
들키기 전에 기습하기 위해서였다.
탈출할 방향을 빠르게 점검했다. 그리고 뛰어내릴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베이도르의 고개가 위로 향하려는 순간.
그래서 나뭇가지를 박차고 뛰어내리려는 순간.
“베이도르 님!”
멀대같이 키가 큰 투사가 베이도르를 불렀다.
나무 위로 향하던 베이도르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꺾였다.
“무슨 일이냐?”
“파나티 님이 찾으십니다.”
“왜?”
“이유까지는 저도 잘…….”
키 큰 투사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할 말 있으면 지가 올 것이지. 만날 오라 가라야. 몸도 무거워 죽겠구만.”
베이도르가 인상을 찌푸리자 키 큰 투사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젠장!”
베이도르는 키 큰 투사를 앞세운 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내가 숨어 있는 나무를 흘끔 봤다.
고개를 한차례 갸웃한 후.
뒤뚱뒤뚱.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베이도르가 사라졌다.
“휴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만약을 대비해 장소를 바꾸기로 했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폭포 아래 위치한 호숫가에 몸을 숨겼다.
“위험했다.”
물론 들켰다 하더라도 당장 끝장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힘은 이미 오룡이니, 삼룡이니 하는 레벨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 당장 베네딕트와 다시 싸운다 할지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불필요한 희생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정찰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치밀하진 않았지만 제법 그럴싸한 계획이었다.
사실 가장 좋은 계획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베네딕트와 삼룡을 충돌시킨 후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베네딕트도 바보가 아닌 이상 투사들과 정면으로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치고 빠지기를 하며 각개격파 할 가능성이 컸다.
베네딕트의 실력과 기동력을 고려해 봤을 때 삼룡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어 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아마 전멸을 당하리라.
물론 그 대가로 베네딕트 역시 지칠 것이다. 운이 좋다면 팔다리 중 하나가 잘릴 수도 있다.
그 순간을 노려 습격한다면 필승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투사들의 개죽음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번 싸움이 아닌 보다 먼 미래에 벌어질 ‘그 싸움’을 위해.
모든 것은 ‘그날’을 위해.
삼룡의 진영을 정찰하는 데 4일이나 소모했다.
베네딕트가 언제 움직일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다만 선원의 숫자가 영이 되는 순간이 바로 그때일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만약 나의 확신대로 베네딕트가 움직인다면, 선원들의 숫자를 고려해 봤을 때 그는 조만간 움직일 것이 확실했다.
“서둘러야겠군.”
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풍덩!
거대한 뭔가가 물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숨어 있던 바위 뒤로 몸을 다시 감췄다.
첨벙첨벙!
더위를 참지 못한 투사 하나가 자맥질을 하러 온 듯했다.
“잘됐군. 첫 번째는 저놈으로 하자.”
내가 세운 계획은 단순했다.
베네딕트와 투사들이 싸움을 벌이기 전에 투사들을 내 부하로 만드는 것이었다.
삼룡은 투사들을 이용하여 베네딕트를 잡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있어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하지만 나는 베네딕트와 정면으로 싸울 예정이었다. 삼룡에 의해 투사들이 희생되기 전 그들을 내 밑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적무도 투사들의 전투력은 전장에서 수십 년 굴러먹은 노련한 용병에 버금갔다. 나에겐 나만의 군대가 필요했고, 적무도의 투사들은 내 군대가 지니고 있어야 할 모든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재들을 베네딕트 따위에게 헌납할 수는 없었다. 한 명이라도 많이 내 부하로 만들어야 했다.
첨벙첨벙!
물장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수영하고 있는 투사를 제외하고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투사들의 새로운 요새와도 제법 거리가 있으니 조금 시끄럽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킨 후 호숫가로 걸어갔다.
놈은 잠수를 했는지 수면 위에 없었다. 동심원이 시작되는 곳을 쳐다봤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뜀박질 한 번이면 다다를 듯싶었다.
자세를 낮춘 후 다리에 힘을 주었다. 놈의 머리가 튀어나오는 순간을 노려 달려들 생각이었다.
소란을 떨면 귀찮아질 테니 한 방에 기절시키자.
각오를 다지며 점점 잔잔해지는 수면을 지그시 살폈다.
잠시 후.
“푸학!”
놈이 수면을 찢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팟!
나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놈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공중에서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그대로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퍽!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웬 놈이냐!”
얼굴을 맞고 기절했어야 할 놈이 커다란 손으로 내 발목을 잡았다.
“건방진!”
놈은 손아귀에 힘을 준 후 내 몸을 수면 위로 패대기쳤다. 나는 반대쪽 발을 휘둘러 놈의 턱을 노렸다.
“큭!”
놈은 공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다. 나는 물에 거꾸로 처박히기 직전 몸을 회전시켜 무사히 착지했다.
생각 외로 실력이 좋은 놈이거나, 아니면 삼룡의 레벨을 뛰어넘었다고 판단했던 내 힘이 자만이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건 낭패였다. 동료들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전에 놈을 쓰러뜨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도망쳤다 다음 기회를 노릴까 생각하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어, 어라? 사, 살아 있었구나.”
놈은 소리를 질러 적의 침입을 알리는 대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왜 여기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놈은 여전히 겸연쩍어했다. 그리고 그러한 놈의 ‘가식적인’ 모습이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놈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최선을 다해 멀리, 아주 멀리 도망쳐라! 부디 오래오래 살아남길 바란다!
나는 웃었다. 내 미소를 보자 놈도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그렇게 안 했으면 우리 모두 죽었을 거야. 결과적으로 둘 다 살아 있으니 내 작전이 성공한 것 아니겠어? 하하하!”
저놈의 주둥이에 주먹을 먹이지 않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슈욱!
다크섀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을 끌어 올리자 수면이 부르르 떨렸다. 기회를 노리며 주변을 맴돌던 식인 물고기들이 황급히 도망쳤다.
“이, 이봐? 장난하는 거지?”
놈이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장난?”
마력을 더 끌어 올리자 수면 위에서 물방울들이 퐁퐁 솟아올랐다. 마치 땅에서 하늘로 비가 거꾸로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사과할게! 사과하면 되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놈은 은근슬쩍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 이중적인 모습이 분노를 부채질했다.
팟팟팟!
수면 위를 달렸다. 그리고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물 위를 달리다니! 네가 무슨 마법사냐!”
놈은 양손을 물속에 담근 후 마나를 폭발시켰다.
쾅!
천둥소리와 함께 호수의 물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광!
주먹과 파도가 충돌하는 순간 호수의 물이 거꾸로 솟구쳤다.
그리고 잠시 후.
후두둑!
후두둑!
폭포를 거슬러 올라갈 만큼 높이 솟구친 물이 장대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할 말이 많지만…… 일단 맞고 시작하자!”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나는 나를 버리고 도망쳤던 곰 같은 체구의 투사 마렉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마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 * *
마렉과 미친 듯이 나누고 싶었던 몸의 대화는 안타깝게 실패했다. 수차례의 공방이 오간 후 마침내 기선을 제압한 순간 삼룡과 투사들이 몰려왔던 것이다.
나는 한 방이라도 먹여 줄 생각으로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지만 마렉은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얄밉게도 방어에만 집중했다.
“살아 있었구나, 칼리온! 저놈을 잡아라!”
삼룡 중 하나인 파나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시모프 님의 원수를 갚자!”
투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젠장!”
이성과 감정이 충돌했다.
누가 봐도 도망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능글맞게 웃고 있는 마렉의 얼굴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두고 보자!”
결국 뒷골목 시정잡배가 할 법한 대사를 던진 후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마렉의 주둥이를 갈기는 것도, 은밀히 투사들을 납치한다는 계획도, 모두 망치고 말았다.
으드득!
이빨이 갈릴 만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게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는데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쫓아왔다. 나를 쫓아올 수 있을 만큼 빠른 놈은 삼룡을 제외하곤 없었다.
역시 싸워야 하나.
각오를 다지며 추적자를 살폈다.
마렉이었다.
사과해도 시원찮을 판에 나를 잡으러 쫓아오는 마렉을 보자 분노가 솟구쳤다. 나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마렉의 의도는 나를 추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내 곁을 쌩 지나갔다.
“뭐, 뭐지?”
나는 멀어지는 마렉의 등을 멍하니 쳐다봤다.
“칼리온, 안 도망치고 뭐해? 그러다 잡힌다!”
마렉이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역시 저놈의 주둥이를 갈겨 주진 않고선, 그래서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어 놓지 않고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렉!”
나는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의 결심을 눈치챘는지 마렉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마렉과 함께 숲 속을 내달렸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마렉을 노려봤다. 전력으로 달린 덕분에 투사들의 추격에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나와 마렉은 투사들의 추격을 따돌린 후에도 한참 동안 숲 속을 헤치고 다녔다.
마렉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재빨랐다. 잡힐 듯 잡힐 듯 요리조리 도망을 다녔다. 몇 번이나 따라잡았지만 시원하게 때려눕힐 수는 없었다. 삼룡급 투사인 마렉이 싸울 의지를 버린 채 도망만 다녔기 때문이다.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삼룡급 투사는 정말로 빨랐다.
하지만 술래잡기도 이제 끝이었다.
스태미나 싸움에서 마렉은 나를 이길 수 없었다. 아니, 설령 휴멜이라 할지라도 스태미나 싸움으론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겐 무한이나 다름없는 마력이 있었으니까.
나는 숨을 가라앉힌 후 대자로 널브러져 있는 마렉에게 다가갔다.
마렉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호흡 곤란이라도 온 듯 몹시 괴로워 보였다.
“……독한 놈.”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마렉이 중얼거렸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마, 마음대로 해라! 이 지긋지긋한 놈아!”
마렉이 소리쳤다.
슈욱!
다크섀도우를 꺼냈다.
“설마 나를 주,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살짝 겁에 질린 얼굴로 마렉이 말했다.
“글쎄.”
나는 주먹에서 우드득 소리를 내며 미소 지었다.
“자, 잠깐! 잠깐 기다려! 사과할게! 진짜로 사과한다고!”
사색이 된 마렉이 양손을 휘저으며 발버둥 쳤다. 그 모양새가 우스워 나도 모르게 진짜로 웃을 뻔했다.
처음 마렉을 봤을 땐 분노밖에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술래잡기를 하며 지칠 때까지 뛰어다니는 동안 웬일인지 가슴이 시원해졌다. 응어리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용서해 주는 것은 뭔가 억울했다. 그래서 조금 장난을 쳐 보기로 했다.
“늦었어. 크크크!”
나는 살기를 뿌리며 마렉의 멱살을 쥐었다.
우드득!
주먹을 꽉 쥐자 관절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칼리온? 장난이지? 그렇지?”
“장난인지 아닌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거다.”
주먹을 추어올렸다. 검붉은 마력이 주먹을 감쌌다.
“내가 네 목숨을 구해 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
다급한 목소리로 마렉이 소리쳤다.
주먹을 휘둘렀다.
쾅!
“큭!”
마렉의 머리맡에 주먹 크기만 한 구멍이 파였다.
“뭐, 뭐야?”
“좋아. 은혜를 갚았으니 이제 용병단을 만들자는 얘기는 없어진 거다.”
나는 마렉의 멱살을 놔주며 씨익 웃었다. 그제야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마렉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하하!”
참았던 웃음이 끝내 터져 나왔다.
“도와줄 거야, 말 거야?”
마렉은 내 질문을 무시했다. 그러곤 생긴 것답지 않게 뾰로통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울컥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젠장. 진짜로 한 방 먹였어야 했는데.”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마렉의 몸이 움찔했다.
“도와줄 거야, 말 거야? 도와주지 않을 거면 삼룡이 있는 곳으로 썩 꺼져 버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은은하게 살기를 뿌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는 진짜로 적이다.”
“치사하게 또 협박하는 거냐?”
“협박하는 게 아냐. 제안하는 거다. 협상이라고도 하지.”
나는 마렉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마렉은 쓸개를 씹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할 거야?”
“도와줄게! 도와주면 될 거 아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렉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도와주는 것을 조건으로 뭔가를 뜯어낼 속셈이었으리라.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렇게 짜증 낼 필요 없어. 어차피 베네딕트와 싸울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래서 내 쪽에 붙은 거 아니야? 베네딕트를 나에게 떠넘길 생각이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정곡을 찌른 듯 마렉의 몸이 다시 움찔했다.
“빨리 일어서. 삼룡들이 채비를 갖추기 전에 몇 명이라도 건져야 돼.”
마렉이 내키지 않은 얼굴로 뭉그적뭉그적 몸을 일으켰다.
기어이 놈의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 * *
사삭!
사사삭!
풀잎을 밟으며 천천히 이동했다. 덤불 뒤에 숨어 앞을 살폈다. 해안을 정찰하고 있던 투사가 하품을 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끔뻑끔뻑하던 눈꺼풀이 완전히 닫힌 순간.
팟!
덤불을 뚫고 투사에게 달려들었다.
“헉! 누, 누구, 컥!”
수도로 투사의 목젖을 쳐 입을 다물게 했다.
“좀 더 자도록 해라.”
퍽!
투사의 뒷덜미를 가격하여 기절시켰다.
“아홉 명짼가…….”
“열 명입니다.”
하늘에서 시커먼 것이 뚝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나가려던 공격을 간신히 억눌렀다.
“평범하게 등장하라고 했을 텐데.”
“조심하겠습니다.”
리치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렉은 잘하고 있겠지?”
“현재까지 여섯 명을 제압했습니다.”
“여섯이라.”
“숫자가 적은 것은 그가 당신과 달리 혼자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어, 그 정도는.”
나는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는 태양을 쳐다봤다. 어스름한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투사들의 교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겠군. 이놈을 숨겨 놓고 바로 오도록.”
“알겠습니다.”
기절한 투사를 들고 리치가 날아올랐다. 멀리 사라지는 리치를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휙!
다음 장소를 향해 몸을 날렸다.
퍽!
주먹으로 명치를 올려쳤다. 투사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절했다.
“더 이상은 무리겠지.”
태양을 삼킨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반짝이는 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보름달이 창백한 얼굴로 적무도를 내려다봤다.
투사들의 교대 시간이 코앞이나 다름없었다.
잘린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스팟!
땅에서 검은 물체가 솟아올랐다.
반사적으로 땅을 구르기 위해 허리를 굽히려는 순간, 검은 물체의 정체를 눈치챘다.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정쩡한 자세를 바로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말뿐인 사과였다. 리치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리치와 나는 슬레이브 스템프란 노예 각인 마법으로 묶여 있었다. 때문에 주인인 나는 노예인 리치의 마음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독심술처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뿌연 안개 속에 서 있는 그림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정도는 되었다.
리치는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깜짝깜짝 놀라는 나의 반응을.
“오늘은 여기까지다. 가자.”
인상을 구기며 그루터기에서 일어섰다. 리치가 기절해 있는 투사를 들고 내 뒤를 따라왔다.
숲은 캄캄했다. 어디선가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스스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무성하게 우거진 덤불을 뚫고 지나가자 자그마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는 정신을 잃은 투사들이 빽빽이 쓰러져 있었다.
리치가 들고 있던 투사를 공터로 휙 던졌다.
“늦었잖아.”
도착해 있던 마렉이 나를 향해 툴툴거렸다. 그는 나무 기둥에 비스듬히 기댄 채 하품을 했다.
“몇 명이나 잡아 왔어?”
“아홉 명.”
내가 잡아 온 숫자를 합치면 모두 24명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네가 도움이 될 때도 있군.”
“뭐야!”
발끈하는 마렉을 무시하고 리치를 불렀다.
“동굴로 데려갈 거니까 현혹 마법을 걸어 줘.”
“귀찮게 꼭 그래야 돼?”
마렉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최대한 조용히 가야 돼. 동굴의 위치를 들키면 작전이 모두 물거품이 되니까.”
“아예 이지를 빼앗는 게 낫지 않을까요?”
리치의 눈동자에서 기광이 꿈틀거렸다. 마렉이 슬쩍 뒤로 물러섰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인형이 아니야. 동굴까지 조용히 갈 만큼이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당신의 생각이 그렇다면.”
리치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후 리치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리치는 기절해 있는 투사를 한 명씩 깨워 현혹 마법을 걸었다. 현혹 마법에 걸린 투사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달을 쳐다봤다.
“칼리온, 진짜 괜찮은 거야?”
은근슬쩍 다가온 마렉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저 리치…… 몬스터잖아. 그것도 언데드 몬스터.”
“그래서?”
“그래서라니? 어째서 몬스터와 함께 다니는 거지? 네 몸을 빼앗으려고 했던 놈이잖아.”
슬쩍 리치를 살핀 후 마렉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데드 몬스터와 엮여서 좋을 일 하나 없어.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틈을 이용해 해치우자. 저번에 네가 했던 것처럼 말이야.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제아무리 리치라도 물리칠 수 있어.”
“괜찮으니까 신경 꺼.”
“하지만…….”
“만약 리치와 싸울 일이 생기면 그냥 도망가도 돼. 저번처럼 말이지. 이번에는 절대로 비난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비꼬는 말로 들렸는지 마렉이 인상을 구겼다.
마렉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리치가 작업을 완료했다. 스무 명이 넘는 투사들이 일렬로 선 채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달을 보면 변신한다는 라이컨스로프처럼.
딱!
리치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리치를 향해 투사들의 머리가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일사불란한 동작이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최대한 조용히 이동한다. 목표는 동굴.”
딱!
리치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투사들이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몽롱한 눈을 한 채 술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는 20여 명의 투사들. 무척이나 기괴한 광경이었다.
이탈하는 투사가 없나 확인하기 위해 행렬의 맨 뒤에 자리를 잡았다. 마렉은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멀찌감치 떨어진 채 따라왔다.
깊은 밤이 돼서야 동굴에 도착했다.
리치는 투사들을 동굴 깊숙한 곳에 몰아넣었다. 그러곤 땅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라이트닝 프리즌Lightning Prison!”
마법진에서 전류가 튀었다.
파지직!
수십 개의 창으로 갈라진 전류가 마치 쇠창살처럼 투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딱!
리치가 손가락을 튕기자 투사들의 눈빛이 서서히 바뀌었다. 마치 잠을 자다 깨어난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눈빛에 초점이 돌아왔다.
“여기는?”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여기가 어디야?”
정신을 차린 투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다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지그재그 모양의 위험한 창살을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노련한 투사들답게 패닉에 빠지는 대신 상황을 살피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역시나 내게 필요한 인재들다웠다.
“우리를 가둔 것이 당신들이오? 모습을 보이시오.”
투사들 중 하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마렉은 어둠 속에 있었고, 리치는 검은색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눈치 빠른 리치가 라이트 마법으로 동굴을 밝혔다.
“헉!”
나와 마렉의 얼굴을 확인한 투사들이 숨을 삼켰다.
“……마렉 님, 어째서 저희들을 가둔 겁니까?”
덩치 탓인지 투사는 나보다 마렉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내가 가둔 게 아니야. 너희들을 가둔 건 이놈이지.”
마렉이 턱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설마 육룡?”
“배, 배신자, 아니 칼리온 님이다.”
나를 배신자라고 불렀던 투사가 얼른 입을 가렸다.
배신자라.
엄밀히 따지면 시모프를 죽인 사람은 베네딕트였다. 하지만 굳이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해가 아니었으니까.
“어째서 저희들을 가둔 것입니까? 복수입니까?”
덥수룩한 수염의 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복수를 위해서지.”
20여 명의 투사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너희들을 향한 복수가 아니니까.”
“……그럼?”
“자세한 건 알 필요 없고. 우리는 투사잖아. 내 쪽에 붙을지, 아니면 의리를 지킬지만 선택해.”
“삼룡과 싸우실 생각입니까?”
“아니. 삼룡을 잡아먹을 생각이다.”
투사들이 저마다 고민에 빠졌다.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편이 되겠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쪽은 용이 세 마리였고, 이쪽은 용이 두 마리였다. 게다가 삼룡에겐 100여 명이 넘는 투사들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전력만 생각하면 내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지금 당장 대답해 줄 필요는 없어. 나중에 다시 물으러 오겠다.”
감옥을 떠나려고 하는데 덥수룩한 수염의 투사가 리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분은 누구입니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전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마법사다.”
“……요새에 마법사가 있었나?”
고민에 빠진 투사들을 뒤로하고 감옥을 떠났다.
* * *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마렉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마렉은 고개를 끄덕인 뒤 숲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쾅!
콰광!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뿌리째 뽑혀진 나무 몇 그루가 하늘로 솟구쳤다. 나무는 빙글빙글 공중제비를 돌다 쿵 소리를 내며 땅에 거꾸로 박혔다.
“젠장! 저쪽이다!”
“쫓아가! 놓치지 마라!”
“도망가지 말고 정정당당히 싸우자! 이 겁쟁이야!”
제발 도발에 넘어가지 않길 기도했건만 역시나 신은 내 편이 아니었다. 마렉의 고함 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다.
“내 이름은 마렉! 남자 중의 남자다!”
쾅!
콰과광!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제초 작업을 하듯 나무들이 휙휙 하늘로 날아올랐다.
“멍청이 중의 멍청이 같으니라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벌써 세 번째였다.
사삭!
사사삭!
흩어져 있던 투사들이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빠르게 모여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투사들에게 잡히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싶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물불 못 가리는 멍청이라도 없는 것보단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진짜 미치겠군.”
다시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투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였다. 주변이 폐허로 변했고, 일곱 명의 투사가 땅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 씩씩거리고 있던 마렉이 나를 발견하곤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싸우는 척만 하다 도망치라고 했을 텐데.”
“미, 미안.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그만…….”
미안해하는 저 표정이 꾸며 낸 표정이라는 데 마력 전부를 걸 수도 있었다.
패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살기 때문이었다.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나는 땅바닥에 거꾸로 박혀 있는 일곱 투사를 가리켰다.
“죽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
자신 없는 말투로 마렉이 말했다. 그러곤 밭에서 무를 뽑듯 땅바닥에 박혀 있는 투사들을 쑥쑥 뽑아냈다.
“컥!”
“쿨럭!”
“헉! 헉!”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 투사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거렸다.
사사삭!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나는 널브러져 있는 일곱 투사 중 두 명을 양쪽 옆구리에 끼웠다. 그러곤 동굴을 향해 달렸다.
“같이 가!”
마렉 역시 양쪽 옆구리에 투사 두 명을 끼운 채 내 뒤를 쫓아왔다.
투사들의 추격은 매서웠다. 그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동굴로 돌아왔을 때 나는 빈손이었고, 마렉은 한쪽 옆구리가 비어 있었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사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습을 해 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양쪽 모두를 놓쳤고, 마렉은 용케 한 놈을 다시 기절시켰다.
마렉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애초에 이 고생이 누구 때문인데 싶어 순간 울컥했다. 간신히 분을 삼키고 동굴로 향했다.
“오늘은 한 놈뿐인가? 낚시 실력이 나날이 쇠퇴하고 있구먼. 크크크!”
동굴의 문지기 쿠차차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시끄럽다! 잠만 퍼질러 자는 고장 난 머리통 주제에!”
마렉이 으르렁거렸다.
“뭐, 뭐라고? 고장 난 머리통? 덩치만 커다란 멍청이가 죽으려고 용을 쓰는구나!”
“뭐? 멍청이?”
마렉은 들고 있던 투사를 집어 던진 후 아티팩트를 상대로 욕을 퍼부었다. 아티팩트 역시 인간을 상대로 맞불을 놓았다.
고장 난 아티팩트와 덩치 큰 멍청이의 설전은 화려하고 현란했으며, 지저분하고 패륜적이었다.
나는 땅바닥에 버려져 있는 투사를 옆구리에 끼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무척이나 피곤했다.
동굴 깊숙한 곳에 만들어 놓은 감옥에 도착했다.
감옥 앞을 지키고 있던 리치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전기로 된 창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휙!
들고 있던 투사를 감옥 안으로 던졌다. 안쪽에 있던 투사들이 새로 들어온 신입에게 다가갔다.
파지직!
창살이 복구되었다.
평소처럼 감옥을 떠나려는데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온 님.”
돌아서자 덥수룩한 수염의 투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감전되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창살 가까이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수염 투사가 잠시 망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결정했습니다.”
수염 투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결심과 망설임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모두 결정한 건가?”
“아닙니다. 저를 포함하여 다섯 명입니다.”
네 명의 투사가 수염 투사처럼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두 명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고, 다른 두 명은 내 눈길을 피했다.
“만약을 대비해 간단한 금제를 할 것이다. 결정을 취소하고 싶으면 지금 하는 게 좋을 거야.”
“금제라면?”
“마나의 약속이다. 조건은 하나, 배신하지 말 것.”
마나의 약속.
맹세를 어기는 순간 세상의 모든 마나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는 궁극의 금제.
적무도의 투사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나가 얼마나 중요한 힘인가도 잘 알고 있었다.
창살 앞에 서 있는 다섯 명뿐만 아니라 모든 투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겁먹을 필요 없을 텐데. 배신할 것이 아니라면.”
“만약…….”
투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삼룡과의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항복하지 말고 그냥 싸우다 죽으라는 것입니까?”
“내가 죽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 그리고 평생 내 밑에 있으라는 것도 아니다. 기한은 1년. 1년 후에는 나를 배신하건, 멀리 도망가건, 상관하지 않겠다.”
웅성거림이 멈췄다. 저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했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수염 투사였다.
“칼리온 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삼룡 밑에 있으나 칼리온 님 밑에 있으나 저 같은 놈에겐 마찬가지니까요. 그래서 이왕이면 칼리온 님 밑에 있기로 결정했습니다. 요새에 있을 때 신세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몸이 찌뿌듯해서 참을 수가 없군요. 좀이 쑤실 지경입니다.”
“신세라고?”
“요새의 전쟁 때 저를 구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칼리온 님은 기억 안 나실지도 모르겠지만.”
수염 투사의 말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수염 투사의 눈동자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는 것.
내 편이 되기로 결심했던 다섯 가운데 둘이 포기했다.
“제 이름은 메이어입니다. 앞으로 1년간 절대로 칼리온 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베르토입니다.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페니입니다.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수염 투사 메이어와 나머지 두 명이 마나의 약속을 했다.
리치가 세 투사를 감옥 밖으로 꺼냈다.
“이제야 살 것 같네.”
메이어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온몸에서 뚜두둑 소리가 났다.
“따라오도록.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겠다.”
나는 세 투사를 데리고 감옥을 나왔다.
“그럼 수고들 해.”
메이어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료들에게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내 뒤를 쫓아왔다.
동굴 밖으로 나왔다.
마렉과 쿠차차가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땅바닥이 그을려 있고, 동굴 벽에 칼자국이 있는 것을 보아 무력 충돌까지 한 모양이었다.
아티팩트와 진심으로 싸우는 인간이나, 물건 주제에 인간을 도발하는 아티팩트나.
“가지가지 하는군.”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뭐, 상관없겠지. 바보는 바보끼리 놔두고…….”
나는 처음으로 생긴 세 명의 부하를 쳐다봤다.
객관적인 전투력으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메이어가 육룡 중 하나였던 마렉보다 훨씬 더 듬직하게 보였다. 나머지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놈들은 뭐냐?”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 마렉이 잠시 싸움을 멈추고 물었다.
“이 순간부터 우리 편이다. 그리고 앞으론 우리끼리 사냥을 나갈 거니까 넌 따라오지 않아도 돼. 와서 방해할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여기서 쿠차차랑 놀고 있어라.”
“누기 이런 멍청이랑 놀단 말이냐!”
쿠차차가 발끈했다. 동시에 마렉도 발끈했다.
“뭐? 멍청이? 이 돼지 머리가!”
또 싸우기 시작하는 두 바보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머, 머리가 말을 해?”
“저거 혹시 오크 머리 아냐?”
“오크 머리가 왜 동굴 입구에 걸려 있는 거지?”
메이어와 베르토와 페니는 말하는 아티팩트를 향해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동굴의 문지기인 쿠차차라고 한다. 말을 할 줄 아는 희한한 오크 머리로 보이겠지만…….”
그때였다.
화르륵!
쿠차차가 마렉을 향해 불을 뿜었다.
“……보다시피 사나운 구석이 있으니 알아서 조심하도록.”
꿀꺽.
새로운 부하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말 잘 듣는 부하가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절실히 느꼈다.
“저놈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망치는 투사의 앞을 메이어가 선점했다. 동시에 베르토와 페니가 투사의 뒤를 가로막았다.
“젠장!”
투사가 메이어 쪽으로 돌진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돌멩이 하나를 슬쩍 주워 들었다.
그때였다.
휘익!
바람 소리와 함께 메이어의 몸이 두 개가 되었다.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가 투사를 덮쳤다.
“어, 어느 쪽이 진짜냐?”
투사는 당황한 얼굴로 양쪽 메이어를 전부 공격했다.
부웅!
부웅!
검이 허공을 갈랐다. 양쪽 모두 헛방을 치자 투사가 당황했다.
“제법인데.”
메이어는 자신과 분신 사이를 매우 빠른 속도로 오가며 양쪽 모두를 움직였다. 다시 말해 어느 쪽도 가짜였다. 동시에 양쪽 모두 진짜였다.
투사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죽어! 이 유령 같은 놈아!”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투사가 소리를 질렀다.
순간.
팡!
공기가 폭발하면서 메이어의 신형이 사라졌다. 일순 나조차 자취를 놓칠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어, 어디로, 컥!”
어느새 메이어의 주먹이 투사의 복부에 꽂혀 있었다. 기절한 투사가 메이어에게 몸을 기대며 쓰러졌다.
털썩!
투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메이어가 투사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혹시 다쳤나 싶어 얼른 다가갔더니 메이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준비운동을 했어야 했습니다.”
무심코 멈칫했다. 마치 데자뷰처럼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메이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메이어의 말처럼 나는 그를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아마 성벽을 타고 기어 올라온 리자드맨이었을 것이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의 심장을 도려내려 했던 몬스터는.
나는 리자드맨의 머리를 날려 버렸고, 머리가 사라진 리자드맨은 중심을 잃고 메이어 위로 쓰러졌다. 메이어는 다리가 풀린 듯 리자드맨에 떠밀려 함께 쓰러졌다.
그때도 똑같은 변명을 했었다.
준비운동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당시 요새에는 빠른 발로 유명한 투사가 있었다. 그는 빠른 발과 현란한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적을 쓰러뜨리는 폭발력 넘치는 전투력의 소유자였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명성과 전투력만 놓고 보면 능히 용이 되고도 남을 투사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용이 될 수 없었다.
모든 힘을 일시에 격발시키는 전투 방식은 그의 몸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때문에 그는 두어 명의 적을 쓰러뜨린 후 항상 숨을 헐떡거려야 했다.
속도만으론 베네딕트조차 능가할 것이라 평가되었던 투사. 재능을 받쳐 주지 못하는 육체 때문에 절대로 용이 될 수 없었던 이무기.
“……질풍의 메이어.”
“기억하시는군요. 영광입니다.”
부들거리는 무릎을 꽉 누른 채 메이어가 씨익 웃었다.
현재까지 확보한 투사들의 숫자는 39명.
남아 있는 투사들의 숫자는 82명. 그리고 이들을 이끌고 있는 삼룡과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베네딕트.
갈 길이 아직도 멀었다.
“좀 쉬었으면 이제 일해야지.”
다리의 떨림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메이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대장을 잘못 선택한 것 같은데요. 이렇게 부려 먹을 줄이야. 으샤!”
메이어가 기합을 넣으며 벌떡 일어섰다.
“준비운동도 끝났으니 땀 한번 제대로 흘려 볼까요, 대장?”
말 잘 듣는 부하가 있다는 것.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