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기사 칼리온 3
● 차 례
폭풍 전야
탐색
점화
격돌
다크 블레이드Dark Blade
대륙으로
거래하다
용병 패
선전포고
폭풍 전야
쏴아아!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숲이 파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짹짹!
짹짹짹!
그 웃음소리에 이끌린 듯 새들이 노래를 불렀다. 햇살이 뜨겁고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평화롭고 조용한 오후.
바위산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흔들바위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투명하고 파란 하늘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바닷새 한 마리가 구름을 쫓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한 달.
투사들의 요새가 무너지고, 리치의 음모에 말려들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 대가로 기억을 각성하고.
그리고…….
밑천을 드러내면서까지 행했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작은 복수.
그로부터 한 달이 흘렀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냄새가 짭조름했다.
덜그덕!
덜그덕!
바람에 떠밀린 흔들바위가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듯 말 듯 어깨를 들썩였다.
가만히 몸을 일으켜 바위 위에 앉았다.
적무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짙은 녹색의 파도가 바람의 흐름에 따라 일렁거렸다. 붉은 안개와 살기가 사라진 적무도는 평범한 섬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겉으로만 평범해졌을 뿐 적무도를 감싸고 있는 기운은 예전보다 더욱 핏빛이었다. 섬은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적무도란 이름에 더 어울렸다.
적무도는 가짜 살기가 아닌 진짜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슬슬 내려가 볼까.”
바위산을 내려오다 작은 샘을 발견했다.
풍덩!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옷을 입은 그대로 몸을 던졌다.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고 있던 작은 동물들이 화들짝 놀라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곤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리치는 마족 소환을 위한 제물로 적무도에 있는 생명체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학살의 대상은 투사뿐만이 아니었다. 오크 같은 몬스터와 짐승, 심지어 곤충까지,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가 그 대상이었다.
리치는 시체도 남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생명체를 유린했다.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리치를 피해 보다 어두운 숲으로, 보다 깊은 땅속으로, 보다 높은 하늘로 몸을 숨겨야 했다.
그렇게 숨어 있던 생명체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었다.
다람쥐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바위 뒤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흠뻑 젖은 옷을 입고 터벅터벅 바위산을 내려왔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에 조금 여유를 부렸더니 동굴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옷이 바싹 말라 있었다.
동굴의 입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사람 두어 명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너비였다.
시커먼 구멍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나왔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굴 입구에 오크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평균보다 두 배나 커 보이는 머리였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 돼지 같은 들창코, 뺨에 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 두툼한 입술과 입술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 전체적으로 험상궂고 투쟁심이 느껴지는 사나운 인상이었다.
그때였다.
번쩍!
감겨 있던 오크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눈알이 희번덕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뭐야? 주인인가. 언제 또 나간 거지?”
적무도의 숲을 지배했던 오크 부족의 우두머리, 쿠차차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자고 있을 때.”
나는 한때 최상위 권력을 소유했던, 하지만 이제는 머리만 덩그러니 남은 채 노예로 전락해 버린 쿠차차에게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나 몰래 빠져나가다니. 대단하군.”
“그냥 걸어 나왔을 뿐인데.”
“험험! 어찌 됐건 자꾸 왔다 갔다 하지 마라. 귀찮으니까.”
리치의 노예이자 문지기인 쿠차차가 건방진 말투로 말했다.
타고난 투사인 오크로, 그것도 우두머리였던 오크로 만들었기 때문인지 동굴 앞에 걸려 있는 문지기는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오직 리치만을 진짜 주인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나에 대한 자세는 불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리치가 시키니깐 어쩔 수 없이 주인으로 불러 준다는 자세였다.
“알았다. 앞으로는 귀찮지 않도록 푹 쉬게 해 주마. 리치에게 말해서 말이지.”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최대한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영원히.”
“이, 이봐! 아니, 주인! 영원히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냐고!”
오크 머리의 다급한 외침을 무시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깊숙한 곳까지 쿠차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굴 안은 서늘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발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공터가 나타났다. 좁은 입구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은 공터였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 몇 번이나 청소하고 불을 이용해 소독까지 했지만 피 냄새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공터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숨을 들이쉰다.
슈욱!
숨을 내쉰다.
스르륵!
호흡에 맞춰 다크섀도우가 깜박거렸다. 깜박이는 속도가 예전보다 몇 배나 빨라졌다. 힘의 근원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마나, 아니 마력의 운용이 놀랄 만큼 자연스러워졌다.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천천히 내뱉었다.
수련을 마치고 동굴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성격 고약한 오크 머리 문지기가 눈을 감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꿈속에서 찾았는지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놀래 줄까 하다 관두기로 했다.
바위산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시작했다. 좀처럼 저녁거리가 잡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간신히 잡은 작은 토끼 한 마리를 들고 동굴로 돌아왔다.
“또 언제 나간 거지? 기척을 숨기는 솜씨가 훌륭하군.”
낮에 한 협박이 신경 쓰였는지 쿠차차가 감탄한 척 칭찬을 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불이나 뿜어 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쿠차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방진! 나를 또 고기구이용 불로 이용할 셈이냐!”
쿠차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문지기 주제에 문지기 역할을 제대로 못 하니 이런 곳에라도 써야지. 잔말 말고 불이나 뿜어.”
리치가 심심풀이로 만들어 놓은 문지기 쿠차차는 인간에 버금갈 만큼 지능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침입자를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쿠차차가 나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토끼를 다듬기 시작했다.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꺼냈다. 먹기 좋은 크기로 고기를 잘라 고문용으로 사용하던 쇠꼬챙이에 꽂았다. 그러곤 쿠차차의 입 쪽으로 쇠꼬챙이를 내밀었다.
“자아, 어서.”
쇠꼬챙이를 까딱까딱 흔들며 약을 올리자 쿠차차가 식식거렸다. 벌렁거리는 콧구멍에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쳇! 어디 두고 보자.”
늘 그랬던 것처럼 쿠차차는 훗날을 기약하며 분노를 삭였다.
잠시 후.
쓰으으읍!
쿠차차가 공기를 빨아들였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마나가 크게 출렁인 순간.
“파이어!”
화르륵!
쿠차차가 시뻘건 불꽃을 토해 냈다.
“어차피 할 거면서 튕기기는.”
토끼 고기는 금세 지글지글 익어 갔다. 나는 고기가 골고루 잘 익도록 쇠꼬챙이를 빙글빙글 돌렸다.
화르르륵!
기분 탓인지 아니면 불꽃 탓인지 쿠차차의 얼굴이 상기된 것처럼 보였다.
* * *
바위산 꼭대기.
나는 흔들바위 위에 누워 달을 바라봤다. 새하얀 달이 검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몸속의 마력이 꿈틀거렸다.
마력은 마족의 힘답게 낮보다 밤에 더욱더 기운이 넘쳤다. 밤에 활력을 얻는 것은 마력뿐만이 아니었다. 마력의 영향 때문인지 나 역시 점점 야행성 인간으로 체질이 바뀌고 있었다.
밤의 숲은 고요했다. 하지만 평화와는 거리가 먼 고요였다. 끔찍하고 파괴적인 힘이 숲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힘은 크게 두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베네딕트가 있는 해안 쪽과 그 해안을 감싸고 있는 숲이었다.
지금은 잠자고 있지만 조만간 깨어날 힘.
나는 그 순간을 대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슬 시작해 볼까.”
밤은 짧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오늘도 할 거냐?”
화가 덜 풀린 쿠차차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오늘 밤도 잠자긴 글렀군. 주인 때문에 내가 하루 종일 피곤하다고.”
“낮에 조는 걸 내 탓으로 하지 마. 애초에 넌 잠을 잘 필요가 없잖아. 엄밀히 말하면 생물이 아니니까. 마법으로 탄생한 아티팩트잖아.”
“시끄럽다. 주인 탓이라면 주인 탓인 줄 알아!”
답이 궁해지자 쿠차차가 신경질을 냈다.
오크는 본래 탐욕스러운 식탐으로 유명했다. 쿠차차는 아티팩트로 부활하면서 식탐을 잃는 대신 수면욕을 얻은 것 같았다.
제작자인 리치조차 아티팩트인 쿠차차가 잠을 자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쿠차차는 평범한 아티팩트가 아니라 자아를 지닌 아티팩트였다. 자아를 지닌 아티팩트는 보통의 아티팩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성격 더러운 문지기가 갑자기 황금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뭐, 뭐냐? 그 눈빛은?”
쿠차차가 떨떠름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최대한 음흉하게 보이게끔 씨익 웃어 준 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 이봐! 아니, 주인! 그 웃음의 의미는 뭐야? 대체 뭐냐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불안한 목소리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는 놈이었다.
동굴 안은 밝았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동굴 벽에 기괴한 모습의 그림자가 벽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빛이 닿지 않은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왼쪽 귀가 없는 남자였다.
“오늘도 하시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남자가 물었다.
“조만간 싸움이 일어날 거야. 살기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 슬슬 움직여야겠어.”
나는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수련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앞으로는 하고 싶어도 바빠서 못 할 테니까. 최대치로 가자.”
“최대치……입니까?”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입꼬리에 매달려 있는 미소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했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디 제가 죽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내가 마법진 한가운데 서기를 기다렸다가 어둠 속의 남자, 리치가 주문을 외웠다.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마법진이 빛을 뿌렸다.
주문이 완성되었다.
“헬 오브 인피니티!”
리치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화아악!
압도적인 빛이 동굴을 집어삼켰다. 눈이 멀 것처럼 환한 빛이었다. 손으로 눈을 가린 후 빛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마법진이 아니라 전쟁터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으아악!”
“크헉!”
비슷한 방어구를 착용한 병사들이 비슷한 무기를 들고 서로를 학살하고 있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두 왕국의 군대였다.
수십 번이나 반복한 수련이지만 할 때마다 놀라게 된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현실감 때문이었다.
리치가 선택한 마지막 수련 장소는 전쟁터였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피를 원하는 살귀의 웃음이, 피를 뿌린 희생자의 절규가 전쟁터에 메아리쳤다. 병사들이 내뿜는 공포와 절망이 하나, 둘 모여 거대한 살기로 둔갑되었다.
살기에 취한 병사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휘익!
눈먼 창이 나의 목을 노리며 날아왔다.
손가락으로 창날을 잡은 후 창대를 부러뜨렸다. 그러곤 겁에 질린 병사의 배를 걷어찼다.
“컥!”
멀리 날아간 병사가 바닥을 굴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검과 도끼가 날아들었다. 난도질당한 병사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간간이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며 과연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지 망설였다. 양쪽 모두를 적으로 규정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나는 붉은색 깃발을 흔들고 있는 진영을 적으로 규정했다. 깃발 안에는 포효하고 있는 사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슈욱!
다크섀도우를 꺼냈다.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리치가 준비한 전장은 기가 막힐 만큼 훌륭했다.
요구했던 대로 마지막에 어울리는 최대의 전장이었다.
“하아압!”
마력을 일시에 폭발시켰다. 그러곤 그 힘을 이용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목표는 사자 깃발 아래 말을 타고 앉아 있는 기사였다.
챙!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았다.
“휴메에에엘!”
꽝!
주먹과 검이 충돌했다.
나의 수련 방법은 단순했다.
머릿속으로 대전 상대를 상상한 후 마치 실제 전투처럼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게 상상한다고 해도 상상은 상상일 뿐이었다.
또한 뇌가 두 개가 아닌 이상 대전 상대의 공격 방향과 강도를 무의식적으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려 해도 수련 방법의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 진정한 최악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었다.
상상력을 통한 수련 방법에 한계를 느끼고 다른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중 문득 헬 오브 인피니티를 떠올렸다.
헬 오브 인피니티.
나의 정신을 붕괴시키기 위해 리치가 시전했던 정신 공격 마법이자 환상을 이용해 실제와 같은, 아니 실제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 있는 일종의 환각 마법.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만약…….”
만약에 헬 오브 인피니티를 수련에 이용할 수 있다면…….
질문의 답을 예상했다. 그리고 전율했다.
만약에 그럴 수만 있다면 실전 경험을 한 것과 흡사한, 아니 실전 경험을 능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헬 오브 인피니티를 이용하면 실제로는 경험하기 힘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극한의 상황을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연무장에서 검만 휘두른 기사의 살기와 살인을 해 본 기사의 살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실력이란 놈은 쏟아부은 시간에 비례해 성장한다. 하지만 어느 단계를 넘어선 순간부터는 성장 속도가 조금씩 시간에 반비례해지기 시작한다. 소위 ‘한계’ 또는 ‘벽’이라고 불리는 장애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벽을 기어 넘는다. 누군가는 압도적인 재능으로 벽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 봄으로써 벽을 부숴 버린다.
죽음의 아수라장을 걸어 본 사람의 검은, 지옥에서 길을 잃어 본 사람의 검은 그 어떤 검보다 무섭고 파괴적이었다. 그것은 노력과 재능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헬 오브 인피니티를 이용할 수만 있으면 그러한 아수라장을 수십 번, 수백 번 경험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사기적인 수련 방법이었다.
문제는 늘 그렇듯 나의 정신이 그것을 버텨 낼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리치의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헬 오브 인피니티는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 마법입니다. 환상의 강도를 얼마만큼 약하게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럼 일단 할 수 있는 가장 약한 강도로 마법을 써 봐. 그것을 토대로 강도를 조절하면 되겠군.”
그렇게 실험이 시작되었다.
확실히 상상력으로 수련하는 것보다 효과가 탁월했다. 너무 탁월해서 문제였다.
특히 리치의 말처럼, 정신 붕괴가 목적인 마법의 특성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수련에 가장 필요한 환상은 나의 한계와 비슷하거나 조금 능가할 정도의 적이 등장하는 환상이었다. 하지만 마법의 특성 때문인지 환상 속에 등장하는 적들은 하나같이 한계를 초월해도 이기지 못할 적뿐이었다.
헬 오브 인피니티를 이용한 첫 번째 수련에서 나왔던 적은 어처구니없게도 레드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의 이빨이 몸을 꿰뚫고, 발에 짓밟히고, 브레스에 녹아내리면서,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리치를 죽여 버릴까 수없이 생각했다.
간신히 마법이 풀렸을 때 정신적 타격으로 너덜너덜해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슬레이브 스템프로 묶여 있는 리치 역시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필사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이 리치의 죽음을 외쳤던 것이다.
첫 번째 수련 이후 나 못지않게 리치 역시 환상의 강도에 신경을 썼다.
그 결과 두 번째 수련에 나타난 적은 리치와 쌍벽을 이룰 만큼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인 죽음의 기사 데스나이트Death Knight였다.
나는 변변한 반격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수백이 넘는 데스나이트의 협공을 몸으로 받아 내야 했다.
세 번째 수련에 나타난 적은 몬스터가 아니라 거대한 탑이었다. 물론 돌로 만들어진 평범한 탑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함정으로 가득 찬 일종의 미궁이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출구를 찾기 위해 미궁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이 살해당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세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긴 리치가 다른 방법을 제안해 왔다.
“헬 오브 인피니티가 살상용 마법은 아니지만 이런 식이면 정신이 죽어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리치의 말처럼 치명적인 고통에 세 번이나 노출된 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탈진한 상태였다. 수련은커녕 진짜로 부서져 버릴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거꾸로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한 적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약한 적부터 시작해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시시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안전하겠지요.”
리치의 말이 옳았다. 수련의 효과를 보기도 전에 죽어 버린다면 그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인가.
때론 돌아가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일 수 있다.
다시 시작한 네 번째 수련에서 나는 오크보다 약한 고블린 세 마리와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다.
그렇게 적의 수위를 차츰 높여 갔다. 그리고 마침내 열 번째 수련에서 나는 수련다운 수련을 할 수 있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수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리치가 준비한 마지막 적은 휴멜이었다.
물론 휴멜의 능력은 실제와 달리 나의 능력에 맞춰져 있었다. 검술, 능력, 행동, 표정, 모든 면에서 환상 속 휴멜은 실제 휴멜과 달랐다. 리치가 멋대로 설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것은 겉모습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의 투지를 불사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압!”
모든 힘을 다해 주먹을 뻗었다.
“차앗!”
바람보다 빠르게 발을 휘둘렀다.
그동안 익혀 왔던 모든 기술, 모든 능력을 집약시켜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리치가 만든 휴멜은 나의 공격을 전부 무력화시켰다. 검술도 전투 방식도 진짜와는 확연히 달랐지만 벽처럼 느껴지는 막막한 느낌은 똑같았다.
휘익!
휘이익!
검이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잔상조차 남지 않을 만큼 빨랐다. 보고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험과 본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회를 노렸다.
목덜미가 서늘하다고 느낀 순간 반사적으로 주먹을 질렀다.
깡!
예상대로 목을 노리며 날아온 검과 다크섀도우를 낀 주먹이 부딪쳤다.
하지만 불꽃만 튀었을 뿐이다. 예상과 다르게 검은 파괴되지 않았다.
잊고 있었다.
아무리 실제와 비슷해도 이곳은 환상의 세계임을. 부러졌어야 했던 검이 부러지지 않고 멀쩡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가상의 공간임을.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휘익!
검이 공기를 가르며 현란하게 춤을 췄다.
근육이 찢어지고, 심장이 터졌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찢어진 근육이 붙고, 터진 심장이 재생되었다.
“오호! 재미있는 놈이군. 크크크!”
가짜 휴멜이 음침하게 웃으며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렀다.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나였기에 속절없이 베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무한의 고통이었다. 몇 번이나 경험한 고통이었지만 팔다리가 잘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것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아픔이었다.
“으하하하!”
가짜 휴멜의 광소와 함께 나의 죽음이 계속되었다.
* * *
“……크윽.”
수천 토막으로 잘렸던 몸에서 경련이 일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만큼 고통스러웠다. 환상 속에서 입었던 상처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쿨럭!”
시커멓게 죽은피를 뱉어 내고 나서야 고통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쿨럭!”
동굴 안쪽에 있던 리치 역시 피를 토했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내게 다가왔다.
“지셨군요. 당신에 대한 제 평가가 높았던 겁니까? 아니면 방심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가짜였지만, 휴멜의 얼굴을 한 놈에게 무참히 깨졌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휴멜에 대한 분노만큼은 세월도 약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첩첩이 쌓였다.
간신히 경련이 가라앉았다. 나는 힘겹게 일어나 동굴 입구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십니까?”
“바람 쐬러.”
“오늘은 그만하실 겁니까? 그만하신다면 저도 이만 다른 일을 하러…….”
“금방 올 거다.”
나는 리치의 말을 잘랐다.
“기다리겠습니다.”
리치가 다음 수련을 위해 마법진을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나의 상태를 고려하여 보다 약한 적으로 환상의 강도를 낮추는 것이 분명했다.
“놔둬. 한 번 더 할 거니까.”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리치가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설사 또다시 패배한다 할지라도 네가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조금 아플 수는 있겠지만.”
리치가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결국 내 말대로 마법진을 원상 복구 시켰다.
동굴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밤바람이 욱신거리는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드르렁!
나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던 쿠차차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연못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차가운 물에 얼굴을 씻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고통이 수그러들었다.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쿠차차는 여전히 수면 중이었다. 그의 얼굴이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평화로워 보였다.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쿠차차의 이마에 알밤을 먹인 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누, 누구냐! 숨어 있지 말고 정체를 밝혀라!”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동굴 안쪽까지 울려 퍼졌다.
툭!
데굴데굴!
마법진으로 향하는 도중 돌부리 같은 게 발에 차였다. 발에 차인 돌멩이가 멀리 굴러갔다. 주먹만 한 크기의 동그란 돌멩이였다.
“음?”
자세히 보니 평범한 돌멩이가 아니었다. 보석처럼 붉은 빛깔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또한 조각을 한 것처럼 표면에 형이상학적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비슷한 모양의 돌멩이가 세 개 더 있었다. 다른 돌멩이 역시 특이한 모양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은은하게 감돌고 있는 색깔만 서로 다를 뿐이었다.
돌멩이는 각각 파란색, 노란색, 하얀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원래 이 정도 크기였던가? 좀 더 작았던 것 같은데.”
돌멩이의 크기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커진 겁니다. 성장한 것이지요. 평범한 돌멩이가 아니니까요.”
어느새 다가온 리치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이 돌멩이가 성장한다고?”
날 놀리는 건가 싶어 리치를 노려봤다. 하지만 리치는 진지했다.
“돌멩이가 아닙니다. 당신이 소환 의식을 망친 덕분에 마족 대신 튀어나온 마수의 알입니다.”
“마수의 알?”
언뜻 들은 기억이 났다. 돌멩이처럼 생긴 네 개의 알을 바닥에 늘어놓은 채 분을 삼키던 리치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수면 마계에 사는 짐승인가?”
“짐승이라…….”
리치가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마계에서는 짐승 취급을 당합니다만, 과연 이곳 현계에서까지 짐승 취급을 당할지는 의문입니다. 그냥 몬스터라고 여기는 것이 나을 겁니다.”
리치가 설명조로 말했다.
“하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락한 피의 악마들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마계였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물이 평범할 리 없었다. 비록 말 못 하는 짐승일지라도 말이다.
“어떤 마수의 알이지? 센 놈인가?”
길들여 이용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넌지시 물었다.
“마수는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어미와 새끼조차 같지 않습니다. 마계에서는 호랑이 종자에서 토끼가 태어나는 일도 가능합니다. 때문에 알만 보고 어떤 마수가 태어날지 맞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태어나 봐야 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나는 실망을 숨기고 알을 한쪽 구석에 모아 놓았다. 그런 나에게 리치가 더욱더 실망스러운 정보를 알려 줬다.
“그리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설사 강력한 마수가 태어난다고 해도 마수는 마계에서 사는 짐승입니다. 이곳에서는 아마 태어나자마자 죽을 확률이 높습니다. 현계에 소환된 마족이 제대로 된 힘을 못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제야 나는 리치가 마수의 알을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강한 놈이 나올 확률도 적었거니와 설사 나온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시무시한 마계에서 소환되었다기에 솔직히 조금 기대했었다. 나는 밀려오는 실망감을 감추며 마법진으로 향했다.
“정말 아까와 똑같은 환상으로 괜찮겠습니까?”
리치의 얼굴에 불만과 불안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사 또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네가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약속하지.”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리치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약속이란 언어를 내뱉을 만큼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고 있지 못했다.
리치의 주문이 시작되었다.
마나가 개방되면서 마법진이 발동했다.
본래 헬 오브 인피니티는 마법진이 필요 없는 마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치는 굳이 마법진을 그려 마법을 시전했다. 환상의 강도를 조절하고, 정신이 파괴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아찔한 현기증이 밀물처럼 다가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흐릿했던 눈의 초점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으아악!”
“죽어랏!”
“사, 살려 줘!”
나는 전쟁터 한가운데 있었다.
저 멀리 휴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사라지기를 그리고 고통에 울부짖기를 바라는 마음을 주먹에 실었다.
그러곤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찼다.
쾅!
하늘로 날아올랐다.
“헉…… 헉…….”
마법진 안에 대자로 뻗어 숨을 몰아쉬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나는 간신히 리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치는 평소처럼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약속……했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리치가 인상을 찡그리며 동굴 안쪽으로 사라졌다.
“헉…… 헉…….”
거친 숨이 계속되었다.
리치에게는 잘난 척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할 만큼 멋지게 이긴 것이 아니었다.
가짜 휴멜과의 전투는 격렬했으며 또한 치열했다. 종국에 가서는 피 웅덩이를 뒹굴며 치고받고, 할퀴고, 깨무는 개싸움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기는가가 아니라 누가 이겼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휴멜의 목을 자르고 심장을 꺼내 터뜨렸다. 비록 환상 속의 가짜 휴멜이었지만 어찌 됐건 처음으로 놈을 쓰러뜨린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기쁨과 환희.
“하… 하하…… 하하하!”
실성한 것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유쾌한 기분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일이 잘될 것만 같았다.
웃음을 멈추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평화가 끝나 가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적무도의 평화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 밤일 것이다.
내일부터는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거대하고 난폭한, 차가우면서도 잔인한, 혈풍血風이 몰아칠 것이다.
위태롭게 이어지던 휴식 시간이 마침내 끝이 났다.
누워 있을 시간 따윈 앞으로 없으리라.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심장이 원래 속도를 찾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