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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18/45)

복수

눈을 떴다.

“……으으으.”

삭신이 쑤시고 뼈마디가 삐거덕거렸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목이 말랐다.

몸을 일으켰다. 막상 움직이자 생각보다 몸이 멀쩡했다.

거인의 주먹에 맞고 땅바닥에 꽂힌 충격으로 두세 군데 정도 뼈가 부러진 줄 알았는데 움직임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곳은?”

비릿한 피 냄새로 가득 찬 어두운 동굴 안이었다.

“다시 잡혀온 건가.”

나는 리치가 반으로 양단되는 것을 확인한 후 기절했다. 하지만 상대는 언데드 몬스터 리치였다. 육체가 두 동강 났다 해서 소멸할 만큼 약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라이프 베슬이 부서지기 전까지 리치는 불사에 가까운 괴물이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살폈다.

양쪽 팔목에 채워져 있어야 할 쇠사슬이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를 구속할 만한 그 어떤 장치도 보이지 않았다.

살며시 일어나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와 바위산 아래까지 내려올 동안 아무도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잡혀온 것이 아닌가?”

나를 잡아 온 것이 리치였다면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나를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렉인가. 아니, 그럴 리 없지.”

나를 미끼 삼아 도망치던 마렉의 뒤통수가 잊히지 않았다. 나를 살리기 위해 다시 돌아올 놈이 아니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나자.”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선 계속 살아 있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리치의 아지트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아지트로 돌아오는 리치와 마주치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숲 속으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부스럭.

풀숲을 헤치고 거친 인상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죽은 토끼가 들려 있었다.

리치에게 잡히지 않은 투사로 보였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기에 몰래 다크섀도우를 꺼냈다.

사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멈춰라.”

기습에 대비하며 경고했다.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젠장.”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내의 눈동자에 아른거리고 있는 검은 불꽃이 무척이나 낯익었기 때문이다. 바로 리치의 눈두덩에서 보았던 그 불꽃이었다.

“새로 얻은 육체인가 보군.”

주먹을 꽈악 쥐며 슬쩍 퇴로를 확인했다. 우연인지 아니면 노린 것인지, 가장 좋은 퇴로를 리치가 정확히 막아서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몸을 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됐거든요.”

혀가 생겼기 때문인지 말소리가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말소리가 아니었다.

“어째서 말투가…….”

그때였다.

휘익!

리치가 나에게 토끼를 던졌다.

“헉!”

황급히 뒤로 물러나다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툭!

토끼가 바닥에 떨어졌다. 토끼는 괴물로 변하지도, 폭발하지도 않았다. 토끼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토끼인 채였다.

“크크크! 놀라지 마십시오. 그냥 토끼일 뿐입니다.”

“뭐하는 짓이냐?”

리치의 비웃음에 열이 확 뻗쳤다.

“말했을 텐데요. 당신의 몸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제가 당신에게 건 마법은 소울 체인지란 영혼 교환 마법이었습니다. 당신의 정신은 거의 무너진 상태였고, 그래서 마법은 거의 성공할 뻔했죠.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당신에겐 또 다른 마법이 걸려 있었습니다.”

“……슬레이브 스템프.”

“맞습니다. 절대복종을 위해 탄생한 노예 각인 마법, 슬레이브 스템프였습니다. 노예 각인 마법은 주인의 허락 없이 절대로 취소시킬 수 없습니다. 옮기는 것도 불가능하죠. 왜냐하면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각인을 새겨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있던 제가 영혼을 바꿔치기하려 했습니다.”

“요점만 말해.”

“보통은 영혼이 바뀌는 순간 마법이 작동해 육체가 폭발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됐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죽었을 테고, 저는 원하는 육체를 잃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몸에는 슬레이브 스템프뿐만 아니라 또 다른 힘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마력입니다. 그것도 고위 마족만이 지니고 있다는 순수한 마력 말입니다.”

리치가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분주히 움직였다.

리치의 말에 따르면 소울 체인지와 슬레이브 스템프가 부딪치는 순간 나는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또 다른 힘인 마력 덕분에 몸도 빼앗기지 않고, 죽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은 나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을 때 가장 빠른 방법은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지?”

“마력은 혼돈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마력의 영향으로 두 개의 마법이 뒤죽박죽 섞이었습니다. 마력이 마법의 구조 자체를 변형시켰습니다. 그 결과…… 영혼이 바뀌는 대신 슬레이브 스템프가 바뀌었죠.”

“……슬레이브 스템프가 바뀌었다고? 그 말은…….”

“그렇습니다. 빌어먹게도 슬레이브 스템프가 제 라이프 베슬에 새겨졌습니다. 물론 새롭게 변형된 슬레이브 스템프의 주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 * *

요새가 무너지고, 그 원흉인 리치와의 싸움이 끝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배 저을 노를 만드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신참을 데려오는 투기장 배에 몰래 잠입할 계획이지만, 수틀리면 강탈할 생각이었다. 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투기장 배에 실려 있는 조각배만 훔치기로 했다.

슬레이브 스템프의 굴레에선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적무도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노를 완성한 후에는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을 골라 시간을 보냈다.

정말로 오랜만에 느끼는 한가로움이었다.

적무도에 오고 난 후로 거의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특히 요새의 붕괴부터 시작된 리치와의 싸움은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그 치열한 싸움이 끝나고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눈치채는 게 늦고 말았다.

적무도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붉은 안개와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붉은 안개와 살기도 리치 놈의 작품이었군.”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구슬은 최상급 마나석으로 착각할 만큼 청량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구슬은 리치의 생명력을 봉인해 놓은 라이프 베슬이었다. 마치 깨어진 것처럼 선명한 금이 구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리치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네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지금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나?”

“증명할 수 있습니다.”

리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저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을?”

의심을 버리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 리치를 생각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나 자신이 리치가 된 것처럼 리치의 생각과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두루뭉술하게 알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실험해 보기로 했다.

“라이프 베슬은 지금 몸에 지니고 있나?”

여유롭던 리치의 얼굴에 처음으로 불안이 깃들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없습니다.”

리치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리치의 마음이 떨리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군.”

리치의 동요가 더욱더 커졌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리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리치가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쿨럭!”

배 속에 숨겨 놓았던 라이프 베슬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왔다.

“슬레이브 스템프를 새긴 노예는 주인이 언제, 어느 때라도 죽일 수 있다고 하던데, 정말인지 궁금하군.”

“서, 설마!”

리치의 표정이 급변했다.

“자, 잠깐 기다렷!”

“죽어라.”

리치의 말을 기다려 줄 이유 따위 내게는 없었다.

리치의 죽음을 바라며 명령을 내리는 순간.

쩍!

한없이 단단해 보이던 라이프 베슬에 균열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리치의 몸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찢어졌다. 온몸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악!”

고통에 찬 리치의 비명.

리치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중단했다. 동시에 라이프 베슬의 균열이 멈췄다. 하지만 리치의 새로운 몸은 이미 누더기가 된 상태였다.

“새, 새로운…… 육체가…… 피, 필요…… 하겠군요.”

리치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 소멸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네 말을 믿겠다.”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리치와 헤어졌다. 그 후로 일주일 내내 리치를 보지 못했다. 어디선가 새로운 육체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리치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휴멜도 나를 느낄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편으론 만약 그랬다면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퍼스트 나이트를 원하는 휴멜에게 있어 나란 인간은 최악의 후보나 마찬가지였다.

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무엇이 답이건 상관없었다. 슬레이브 스템프의 족쇄에서 벗어난 이상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복수뿐이었다.

낮에는 배가 들어오나 바다를 살폈고, 밤에는 수련을 하였다.

마나 소드와 오러 블레이드를 중점적으로 수련했다.

숲 속에 떨어져 있는 투사들의 무기를 그러모아 마나의 주입량과 흐름을 바꿔 보면서 이것저것을 실험했다. 덕분에 불과 며칠 만에 수십 개의 무기가 고철이 되었다.

나는 고철이 된 무기를 버리고 땅에 널려 있는 자연의 무기, 나뭇가지를 들어 올렸다.

배가 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내가 자리를 잡은 장소는 공교롭게도 오크의 마을에 위치해 있는 감시탑이었다. 리치에 의해 오크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거리낌 없이 오크의 마을로 들어갔다.

절반만 남아 있는 등대 안에 누워 둥그렇게 뚫려 있는 천장으로 밤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잿빛 구름 속으로 숨었다. 바람이 구름을 움직이자 숨어 있던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등대 안으로 노란 달빛이 쏟아졌다.

머나먼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은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내 몸속에 잠들어 있는 힘이 마나가 아니라 마력이란 사실도, 되살아난 기억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나에게서 마나의 냄새가 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호엔레른의 백작가에서 ≪마왕-신화인가, 역사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역사서와 같은 제목과 달리 책은 거의 소설에 가까웠다.

저자는 티끌만 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대부분의 말이 이랬을 것이다, 로 끝나고 있었다.

어쨌든 책에 의하면 마왕과 인간이 싸웠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책의 내용이 사실이든, 꾸며 낸 이야기든,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살았던 곳은 상상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세계.

제법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감추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수련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지쳐서 잠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평선 너머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검은 점이 나타났다.

나는 만들어 놓은 노를 옆구리에 끼고 배가 정박하는 곳으로 부지런히 이동했다.

* * *

커다란 배가 천천히, 천천히 섬으로 접근했다.

나는 해안가 근처에 숨어 배를 염탐했다. 배를 염탐하면서 나는 내 계획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요새에서 도망친 투사들 중 리치에게 잡힌 투사는 100여 명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머지 투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도 고려해 보지 않았다.

육룡 중 하나인 시모프의 암살범으로 몰려 투사들에게 쫓겨 다녔던 추격전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시모프의 말대로라면 투사들은 투기장 놈들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적무도에서 탈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적무도를 둘러싸고 있는 소용돌이를 돌파할 만큼 커다란 배가 필요했다.

즉 그들은 투기장의 배를 습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나는 현재 적대 관계였다. 배에 접근하는 즉시 투기장의 배와 요새의 투사, 양쪽으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계획이 복잡하게 꼬여 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배가 적무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돌격!”

“와아!”

“죽여랏! 모두 죽여 버려!”

커다란 함성이 해안가를 뒤흔들었다.

배에서 막 내리고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재빠르게 대열을 정비하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구구구구!

대지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솟아올랐다.

선봉과 선봉이 부딪쳤다.

격렬한 부딪침이었지만 요란한 천둥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사신을 부르는 비명뿐이었다.

선두에 섰던 자들의 태반이 제 실력을 펼쳐 보이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챙!

파팟팟!

“크악!”

“죽어랏!”

“파, 팔이! 내 팔이!”

검과 도가 어울리고 창과 도끼가 날아다녔다.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었다. 운이 없는 자는 팔이 잘렸고 그보다 좀 더 운이 없는 자는 목이 잘렸다.

비명과 비명. 그리고 비명.

시체가 쌓이고, 피가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 고통 섞인 신음이 해안가를 가득 채웠다.

서걱!

검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굴러다니는 머리통이 하나씩 늘어났다.

푸슛!

머리통이 사라진 목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전황은 요새의 투사들 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붉은 머리의 마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카렌…….”

휘리릭!

휘리릭!

붉은 채찍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채찍이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투사들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카렌이 왜 여기에 온 거지? 설마 투기장의 배가 아니라 휴멜이 보낸 배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카렌이 내게 준 임무는 3년 동안 적무도에서 살아남으라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 나는 3년 동안 무사히 살아남았고, 이제는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

“데리러 온 건가?”

다르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카렌의 등장에 놀라 고개를 너무 내밀었다. 또한 흥분해서 날뛰는 마력의 기운을 감추지도 못했다.

카렌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왕 들킨 거…….”

나는 카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걱정과 다르게 이미 패색이 짙은 요새의 투사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숲 속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못 알아보겠는데. 애송이 티가 전혀 안 나. 훌륭한 사내가 되었군.”

3년 만에 보는 카렌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더욱더 아름다워졌다. 그녀는 풍성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곳 생활은 어땠어? 최근에 투기장 쪽에서 들은 바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던데.”

“좋은 곳이다. 너를 영원히 이곳에 가둬 놓고 싶을 만큼.”

“농담도 할 줄 알고. 진짜로 많이 컸네. 후후후!”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웃음소리였다.

일순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건 그렇고…….”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은은한 살기가 나를 에워쌌다.

“칼리온, 네놈은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죽기를 바랐다는 말투가 아니었다. 반드시 내가 죽었어야 했다는 말투였다.

“얼마 전 휴멜 님께서 네놈이 슬레이브 스템프를 지우려 한다는 것을 감지하셨다. 슬레이브 스템프는 절대복종을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기 때문에 노예가 마법을 지우려 하는 순간 그 주인이 바로 알아챌 수 있지. 분노하신 휴멜 님은 그 즉시 슬레이브 스템프를 폭발시키셨다. 그리고 나에게 네놈의 시체를 가지고 오라 하셨지. 자아, 여기서 질문.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살기가 점점 짙어졌다.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명해 줄 의무 따위는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 것은 여태까지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리치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진짜로…… 진짜로 지워졌구나! 지워졌어! 하하하하!”

참을 수 없는 기쁨이 터져 나왔다.

“미쳤어? 왜 갑자기 웃고 지랄이야. 아니,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시 끌고 가서 머리를 갈라 보면 되니까. 역시 네놈은 끝까지 날 귀찮게 하는구나.”

카렌의 기세가 점점 강해졌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추스르고 카렌과의 싸움을 준비했다.

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 순간인가.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흥분되었다.

그동안의 전투 경험을 토대로 최적의 작전을 구상했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은 바로 기습이었다.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모르고 있을 때, 그래서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절대로 다시 잡힐 수는 없었다. 다시 잡히느니 차라리 죽고 말리라.

팟!

카렌을 향해 도약했다.

그녀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파파팟!

휘익!

휘익!

그녀와의 거리 차이를 빠르게 좁힌 후 팔과 다리를 휘둘렀다.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휴멜 님이 보자고 하신다니까. 노예 주제에 감히 반항하는 것이냐!”

휘리리릭!

카렌의 무기인 붉은 채찍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원래 계획은 채찍을 피한 후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렌이 지껄인 ‘노예’라는 단어에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칼리온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이번 기회에 조금 알려 주기로 했다.

슈슛!

다크섀도우가 튀어나왔다.

덥석!

날아오는 채찍을 잡고 내 쪽으로 잡아챘다.

“제법인데? 후후후!”

나는 씨익 웃었다.

이번 공격이 끝난 후에도 어디 한번 웃을 수 있나 두고 보자고.

나중 일을 생각하면 실력을 최대한 숨기는 것이 현명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나란 놈은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인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 마력을 불어 넣었다. 단검에 검붉은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마력을 더 불어 넣자 단검이 검은빛을 뿌렸다.

그렇게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카렌을 향해 집어 던졌다.

“서, 설마! 오러 블레이드?”

카렌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웅!

오른손이 카렌의 얼굴을 뭉개 버릴 기세로 날아갔다.

“크윽!”

덥석!

카렌은 자신의 무기를 던져 버리고 양손으로 내 주먹을 잡았다.

“오러 블레이드라니! 운이 좋은 놈이군. 어쩌면 죽지 않을 수도 있겠어. 물론 다시 노예로 살아야 할 테지만. 후후후!”

웃음소리가 심하게 거슬렸다.

“그렇게 노예가 좋으면…… 네년이 하지 그러냐!”

나는 벼르고 별러 왔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파이어 볼!”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아티팩트 반지에 남아 있던 마지막 마법이 불꽃을 토했다. 내 주먹 때문에 양손이 묶인 카렌의 얼굴에 불꽃이 정통으로 꽂혔다.

화르륵!

카렌의 얼굴이 타올랐다.

“꺄아아악!”

카렌이 비명을 지르며 모래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태우고 있는 것은 자연적인 불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든 불이었다. 절대로 쉽게 꺼지는 불꽃이 아니었다.

카렌의 얼굴에서 부글부글 기포가 끓었다.

“꺄아아악!”

고기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때였다.

숲 깊은 곳에서 거대한 기운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카렌 님!”

팟!

다급한 외침과 함께 시커먼 인형이 숲 속에서 뛰쳐나왔다. 동시에 나는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숲 속에서 뛰쳐나온 사람은 바로 베네딕트였다.

그는 카렌의 몸을 부둥켜안은 채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푸시시!

불꽃이 꺼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최대한 빨리 몸을 움직였다.

“카렌 님! 카렌 님! 정신 차리십시오! 카렌 님!”

베네딕트의 애절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감히! 감히! 카렌 님께 이런 짓을! 크아아아!”

쾅!

콰쾅!

괴성과 함께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나무 위로 올라가 해안가를 살피니 카렌이 타고 온 배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용서하지 않겠다! 단 한 놈도 용서하지 않겠다! 단 한 놈도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크아아아!”

사자후와 함께 지독한 살기가 적무도를 후려쳤다. 살가죽이 찌릿찌릿했다.

하지만.

“크크크!”

악귀와 같은 얼굴로 절규하던 카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얼굴과 머리칼이 홀랑 타 버려 대머리가 되었다.

나무에서 내려와 바위산의 동굴을 향해 달렸다.

“크크크!”

카렌의 대머리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줄 안다는 정보를 바치면서 일궈 낸 작은 복수였다.

하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복수였다.

“하하하하!”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태풍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러나 그 중심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거친 폭풍이 된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천둥이 된다. 여인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방울이 해일이 된다.

그렇게 대란大亂의 씨앗을 품고 있기에 태풍의 중심은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다.

하지만.

잔잔했던 바람이 휘몰아쳤다. 태풍의 눈 안에서 잠자고 있던 운명이 요동쳤다.

대륙의 황제를 꿈꾸는 사내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는 순간.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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