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눈을 떴다.
사방이 캄캄했다. 몽마夢魔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나른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은 후 주변을 살폈다. 흐릿했던 초점이 점점 정상을 되찾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짤그랑!
짤그랑!
쇠사슬 소리와 함께 몸이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잡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심스레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내가 있는 곳은 숲 속이 아니었다. 거대한 동굴 안이었다. 동굴 천장에는 뾰족한 돌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었고, 공기는 닭살이 돋을 만큼 서늘했다.
짤그랑!
양손이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고문 기구가 즐비하게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 검붉은 핏자국이 흩뿌려져 있었다. 누군가 고문을 받고 있는지 동굴 안에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동굴 바닥에는 기하학적인 도형과 형이상학적인 문자로 이뤄진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 안에는 100여 명의 투사들이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죽은 것인지 아니면 마법으로 제압당한 것인지 투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법진 한가운데 작은 돌멩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베네딕트의 마나석으로 추정되는 돌멩이가 짙푸른 빛을 뿌려 어두컴컴한 동굴 안을 은은히 밝혔다.
움직이는 존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양손에 힘을 주었다.
짤그랑!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끼기긱!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쇠사슬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좀 더 힘을 높이기 위해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마나가 쇠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크섀도우랑 비슷하군.”
나는 다크섀도우를 얻었을 때처럼 쇠사슬에 마나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쇠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크섀도우와 달리 쇠사슬은 마나를 흡수하자마자 그 즉시 허공에 방출해 버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소용없어. 그 쇠사슬은 마나 사용자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아티팩트거든.”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마렉?”
“용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군.”
동굴 벽의 굴곡 때문에 마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로 보아 제법 멀쩡한 상태인 듯했다.
“이곳이 어디지?”
“나도 몰라. 요새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다시 눈떠 보니 여기던데.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던데 벽 때문에 가로막혀 모습은 보지 못했어. 분명한 사실은…….”
마렉이 말을 멈췄다.
“크아아악!”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마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를 잡아 온 새끼가 우리를 끔찍하게 좋아한다는 거지.”
“크아아악!”
다시 비명이 들렸다.
마렉이 입을 다물었다.
짤그랑!
짤그랑!
나는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짤그랑!
습관적으로 양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쇠사슬은 여전히 벽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크으으윽!”
단말마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역겨운 피 냄새가 동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가각!
가가가!
톱으로 뼈를 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 소리가 더욱더 커졌다.
며칠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동굴은 어두웠고, 고문당하는 자의 비명이 한순간도 멈추질 않았다.
마법진 안에 누워 있던 벌거벗은 투사들의 숫자가 이제 5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사라진 50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점점 짙어지고 있는 피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이려면 곱게 죽일 것이지, 왜 생난리를 피우며 죽이는 거지? 변태 새낀가.”
오랜만에 마렉이 입을 열었다.
“젠장! 차라리 싸우다 죽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런 식으로 개죽음을 당할 줄이야.”
나는 마렉의 말을 무시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 했다. 마렉과 달리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팟!
짤그랑!
있는 힘껏 양팔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쇠사슬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
“마나의 도움 없이 육체의 힘만으로 쇠사슬을 끊는 건 불가능하다니까.”
그 순간 비명이 뚝 그쳤다.
저벅저벅.
적막에 휩싸인 동굴에 발소리가 울렸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저벅.
발걸음 소리가 내 앞에서 멈췄다.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발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예상했던 대로 리치가 서 있었다.
덥석!
리치가 나의 머리칼을 움켜쥔 후 얼굴을 가깝게 들이밀었다.
“크윽!”
머리 가죽이 뜯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끼자 본능적으로 피가 차갑게 식었다.
리치의 몸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풍겼다. 눈알이 없는 눈두덩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리치의 시선을 따라 검은 기운이 나의 전신을 핥았다. 뱀의 혓바닥처럼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었다.
순간.
쾅!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잊고 있었던 기억의 편린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커먼 연기. 수천 마리의 까마귀.
시체. 불타 버린 시체. 목이 잘린 시체. 으깨진 시체.
그 시체 한가운데 서 있는 괴물.
썩어 문드러진 해골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반인반골半人半骨의 악마.
적색의 흉광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악마의 눈동자.
기억 속의 악마는 리치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컥!”
뜨거운 피가 혈관을 질주했다.
“대단하구나. 원래는 마나석을 훔쳐 간 놈을 육신으로 삼으려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크윽!”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리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나의 폭주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육체의 완성도도 뛰어나고 마나 역시 놀랄 만큼 광대하구나. 이런 놈이 나에게 굴러 들어오다니. 클클클!”
리치가 웃음을 터뜨렸다.
“두려워 말아라. 나와 한 몸이 되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진데 무엇이 두려워 그리 떨고 있는 것이냐. 클클클!”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폭주하는 마나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었지만 리치의 오해를 바로잡아 줄 여유 따윈 없었다.
“내 눈을 똑바로 보아라.”
리치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중얼거렸다. 눈알이 없는 눈두덩에서 검은 불꽃이 확 일어났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보아선 안 돼. 눈을 감아야 해.
나는 눈을 감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소울 체인지Soul Change!”
쾅!
다시 한 번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여전히 동굴 안이었다. 하지만 보이는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어느새 고문 기구가 걸려 있는 벽 쪽으로 옮겨져 있었던 것이다.
“흡!”
역한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냄새의 농도가 얼마나 짙은지 눈까지 따끔거릴 정도였다.
냄새의 원인이 고문 기구가 걸려 있는 벽 아래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살점과 뼈와 내장이었다. 핏물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발밑을 적셨다.
“젠장…….”
욕지기가 올라왔다.
“살아 있냐?”
멀리서 마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은 그런 것 같은데.”
“그곳은 좀 어때? 이곳보다 대접이 좋으면 나도 좀 옮겨 달라고 하고 싶은데. 크크크.”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수 있다니. 마렉의 정신세계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지옥이다. 네 말이 맞았어. 이 동굴의 주인은 변태 새끼가 분명해. 아니, 변태 몬스터인가.”
“몬스터? 우리를 붙잡고 있는 놈이 몬스터라고? 마법사가 아니라?”
마렉은 아직 마법사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항상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모를 만도 했다.
그래서 친절히 알려 주기로 했다. 동굴의 주인이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 불사신에 가까운 언데드 몬스터임을.
“마법사가 아니라 리치다.”
“리치? 설마 마족의 노예라는 그 리치?”
“조금이라도 빨리 죽으려면 말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어?”
나의 경고에 뭔가를 깨달았는지 마렉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화가 멈추자 적막이 흘렀다. 침묵이 내려앉은 동굴.
그때였다.
사사삭!
정면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 뒤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거미의 움직임처럼 은밀하고 신속한 기척이었다.
사사삭!
기척이 들리는 곳을 노려봤다. 바위 뒤에서 남자의 얼굴이 빼꼼히 삐져나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낯익은 얼굴이었다. 요새에서 창수를 하던 투사였다.
동굴까지 어떻게 들어왔을까, 하는 의문보다 탈출에 대한 희망이 용솟음쳤다.
“이쪽이다! 빨리 쇠사슬을 풀…….”
말을 끝까지 마칠 수가 없었다.
남자는 팔과 다리의 위치가 뒤바뀐 채 네발로 기어 나왔다. 마치 날개처럼 두 개의 팔이 등에 심어져 있었다. 그는 등에 있는 팔로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쳐다봤다.
남자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순간 모든 이성이 마비되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클클클! 어떠냐, 나의 새로운 애완동물이.”
바위 뒤에서 리치가 걸어 나왔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생명체는 마치 강아지처럼 리치의 발등에 머리를 비볐다.
나는 리치를 노려봤다.
“목적이 뭐냐? 해골바가지면 해골바가지답게 무덤가에서 시체랑 놀 것이지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조금이라도 빨리 죽으려면 말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어?”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마렉이 깐죽거렸다. 무신경한 건지, 아니면 개념이 없는 건지, 도통 이해 못 할 놈이었다.
“제물이 필요하다. 이 정도로는 턱없이 모자라. 강해지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하다. 피와 비명과 고통과 절망이 필요하다.”
“제물?”
리치는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마렉의 말처럼 리치는 마족의 노예이자, 마족의 개였다. 즉 적게나마 마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몬스터였다.
마족은 극단적으로 강함을 추구하는 어둠의 종족이었다. 때문에 강해지기 위해 적무도를 죽음의 땅으로 바꿔 놓았다는 리치의 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명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족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 역시 인, 간, 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클클클! 좋은 눈이다. 과연 소울 체인지를 견뎌 낼 만큼 의지가 강한 인간답구나.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리치가 마법진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벌거벗고 있던 투사들 중 한 명이 둥실 떠올랐다.
리치는 둥실 떠오른 몸을 손가락으로 조종해 고문 기구가 걸려 있는 벽에 밀착시켰다. 그러곤 고문 기구가 걸려 있는 벽에서 송곳처럼 생긴 못을 여러 개 집어 들었다.
때마침 벌거벗고 있던 남자가 깨어났다.
“으음……. 여, 여기가 어디지?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그는 머리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고는 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웩! 우웩!”
남자는 살육의 현장에서 도망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달라붙어 있는 벽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리치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헉! 괴, 괴물! 물러서! 물러서라!”
리치의 얼굴을 본 남자의 표정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쑤욱!
쑤욱! 쑤욱!
리치가 남자의 몸에 못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컥! 크헉! 끄으으!”
남자는 순식간에 표본실의 나비처럼 동굴 벽에 고정되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끙끙거렸다.
“새로운 육신이여, 잘 보도록 해라. 그리고 절규해라. 너의 정신을 붕괴시킨 뒤 그 몸뚱이를 내가 사용해 주마. 클클클!”
책에서 보았던 리치에 관한 내용이 언뜻 떠올랐다.
리치는 불사신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엄밀히 말해 불사신은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력을 라이프 베슬Life Vessel에 담아 영겁에 가까운 수명을 얻었을 뿐이다. 라이프 베슬이 깨어지면 그 즉시 소멸해 버리는 반쪽짜리 불사신이었다.
라이프 베슬은 수명만 보장해 줄 뿐 육체의 보존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리치의 몸은 부패되어 가고, 때문에 뱀이 허물을 벗듯 일정 기간마다 육체를 바꿔 줘야 했다. 즉 이번에는 내가 리치의 다음 희생양으로 낙점된 것이었다.
“크아아아악!”
리치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리치는 벽에 박혀 있는 남자의 혀를 자르고, 눈알을 뽑고, 배를 갈랐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남자를 고문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죽기 직전, 고통과 절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리치가 남자의 가슴을 갈라 펄떡거리는 심장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남자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끄…… 끄윽…….”
부풀어 오르는 몸이 성대를 짓누른 듯 남자가 끅끅거렸다.
그러다 결국.
펑!
남자의 몸이 폭발했다.
후두둑!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잠시 후 리치의 애완동물이 나타나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남자의 파편을 청소해 한곳으로 쓸어다 모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시체 더미가 조금 더 높아졌다.
청소를 마친 애완동물이 붉은빛이 감도는 돌멩이를 주워 리치에게 건넸다.
리치는 붉은 돌멩이를 꼼꼼히 살펴본 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클클클! 마력이 가득 차 있군. 역시 공포에 물든 인간의 심장이야말로 혈석을 만드는 데 최고의 도구다.”
마족의 생명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근원적 힘 마력. 마나와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힘.
혈석血石은 그러한 마력이 담긴, 평범한 방법으론 절대로 만들 수 없는, 그리고 만들 필요도 없는 돌멩이였다. 왜냐하면 혈석은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마족을 마계로부터 소환하는 것이었다.
동굴 안에 그려진 마법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리치의 계획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정말로 마족다운, 언데드 몬스터다운, 계획이었다.
리치가 못을 들고 다가왔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못을 집어 던졌다.
“어차피 내가 사용할 육체인데 망가뜨리면 나만 손해지.”
맨손으로 다가온 리치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소울 체인지를 거부할 만큼 지력이 강하다만 무한의 고통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자꾸나.”
리치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또다시 텅 빈 눈두덩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거렸다.
“헬 오브 인피니티Hell Of Infinity!”
마법이 시전되는 순간 리치의 손에 있던 빛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지독한 두통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무無의 공간에 둥둥 떠 있었다. 사방이 캄캄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대체……. 리치는 어디로 간 거지? 마렉! 마렉!”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큭!”
뭔가 강력한 힘이 나의 팔다리를 붙잡고 대자로 벌렸다.
“제, 젠장!”
결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스르륵.
스르륵.
내가 발버둥 치는 사이 무의 공간에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이 하나, 둘 나타났다. 검은 수십 개를 넘어 수백 개까지 불어났다.
수백 개가 넘는 칼날이 나를 노리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휘이익!
모든 검이 나에게 돌진했다.
“비이러어머어그을!”
푹!
푹! 푹! 푹!
고함과 함께 수백 개의 칼날이 동시에 온몸에 꽂혔다. 차가운 칼날이 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 특히 심장을 꿰뚫은 검의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소름 끼쳤다.
“크으윽!”
나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저주했다. 그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슈욱!
슈욱!
몸에 박혔던 칼날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칼날이 빠져나갈 때마다 살을 도려내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내 몸에 박혔던 수백 개의 칼날이 다시 허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내 몸을 향해 돌진했다.
푹! 푹!
슈욱! 슈욱!
수백 개의 검이 나를 구심점 삼아 모였다 흩어짐을 반복했다.
미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간신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환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나는 첫 번째 공격으로 죽었어야 했다.
수백 개의 칼날에 온몸이 찔리고도 살아 있을 수 있는 인간 따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이, 이건…… 화, 환상……이……야……. 환……상…….”
환상임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푹! 푹!
슈욱! 슈욱!
수백, 수천 번이 넘도록 칼날의 춤사위에 온몸을 유린당했다.
지옥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크헉! 헉, 헉…….”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동굴 안에 있었다.
“헉, 헉…….”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심지어 리치가 나의 머리를 들어 올려 내 상태를 점검해 볼 때조차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대단한 놈이군. 아직도 미치지 않았다니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구나.”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상처 하나 없는 몸에서 자상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 지독한 통증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일 다시 마법을 걸 것이다. 그때까지 마음껏 두려워하거라. 클클클!”
리치는 나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은 뒤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마나석 옆에 혈석 수십 개를 내려놓았다.
푸르스름하던 마나석이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마법진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법진 위에 누워 있던 벌거벗은 투사들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리치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마족을 소환하는 의식이 분명했다.
짤그랑!
양팔에 힘을 주어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마족 소환 의식이 끝나는 즉시 내 정신을 붕괴시키기 위한 리치의 고문이 다시 시작될 터였다.
그 전까지 어떻게든 도망쳐야 했다. 수백 개의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고통을 두 번씩이나 참아 낼 자신이 나에겐 없었다.
“그립군.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크크크!”
휴멜에게 사로잡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독한 고문을 받으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는 그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언데드 몬스터인 리치에게 몸을 빼앗길 판이었으니까.
“크크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웃음이 되어 갑자기 터져 나왔다. 미친 듯이 웃고 나자 가슴속이 조금이나마 후련해졌다.
“칼리온, 미친 거냐?”
마렉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군. 크크크! 내가 리치의 마법에 걸리고 얼마나 지났지?”
“반나절 정도다.”
“겨우 반나절인가.”
영원처럼 느껴졌던 그 시간이 고작 반나절이었다니.
새삼 마법의 위력에 치가 떨렸다.
“그나저나 리치는 어째서 너를 가만 놔두는 거지?”
“왜 내 얘기를 꺼내는 건데? 자기가 죽을 거 같으니까 같이 죽자는 심보냐? 걱정 마라, 곧 따라갈 것 같으니까.”
“무슨 말이지?”
“마법진에 널브러져 있는 놈들은 혈석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우리는 원래 데스 나이트Death Knight를 만들려고 했단다. 그런데 네놈의 매력적인 몸뚱이에 리치가 반하고 만 거지.”
나는 마렉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내가 몸을 빼앗기는 순간이 네가 데스 나이트가 되는 날이군.”
“그런 셈이지. 그러니 내가 데스 나이트가 되지 않도록 잘 좀 버텨 봐. 요새에서 최강이라고 불렸던 투사잖아. 그깟 고문에 무너져서야 되겠어?”
착각이 아니었다.
마렉의 목소리는 분명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깟 고문이라고 하지 마라. 네놈은 반나절은커녕 1초 만에 혀를 깨물 거다.”
“아쉽게도 부정하기 힘들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손이 이 지경이 되도록 벽을 파 낸 거 아니겠어?”
나와 마렉을 가리고 있던 동굴 벽 너머에서 커다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마렉의 얼굴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렉은 마법진 안에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 리치를 흘끔 쳐다본 뒤 조심스레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양쪽 팔목에는 여전히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다.
쇠사슬을 끊으려 했던 나와 달리 마렉은 벽을 파 내 쇠사슬을 뽑아내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겉으론 넉살 좋게 농담을 던지고 있었지만 마렉 역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빠져 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뭐하고 있어? 빨리 쇠사슬을 풀어 줘.”
내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마렉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금방이라도 리치가 돌아볼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운지 마렉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무슨 말?”
“나와 함께 요새를 먹자고 했던 것 말이야.”
“이 와중에 또 무슨 헛소리야?”
초조함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와 나도 모르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마렉이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곳에서 무사히 탈출하면 나와 용병단을 만들자.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대륙 최강의 용병단도 결코 꿈이 아니다.”
“꿈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쇠사슬이나 풀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마렉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건 부탁하는 게 아냐. 제안하는 거다. 협상이라고도 하지.”
“협박이겠지.”
“어찌 되었건 나는 너를 풀어 주고, 너는 그 대가로 나와 용병단을 만드는 거다. 어때? 갑자기 구미가 당기지 않아? 흐흐흐.”
마렉이 음흉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저 낯짝에 발자국을 새겨 넣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눌렀다.
“싫으면 관두든가. 나야 손해 볼 일 없으니까.”
마렉이 그동안 즐거웠다고 인사하며 휙 돌아섰다. 도살장인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걸어 들어가야 하는 황소의 마음으로 간신히 내뱉었다.
“……좋다. 용병단을 만들자.”
“흐흐흐. 진작 그럴 것이지, 계집애처럼 튕기긴.”
마렉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문 도구인 송곳을 이용해 쇠사슬의 자물쇠를 열었다.
딸칵!
딸칵!
그동안의 고생이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쇠사슬에서 쉽게 해방되었다.
딸칵!
딸칵!
쇠사슬에서 해방된 마렉이 손목을 주물거리며 씨익 웃었다.
“그럼 나가 볼까, 동업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리치를 살폈다.
마족 소환 의식이 절정에 다다랐는지 마법진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마법진 전체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굴이 흔들리면서 천장에서 흙가루가 떨어졌다.
“뭐하고 있어? 빨리 나가야지. 동굴 안에서 생매장당하고 싶어?”
“잠깐 기다려. 이렇게 나가면 뭔가 섭섭하잖아? 주인에게 인사 정도는 하고 나와야지. 나는 대접만 받고 도망치는 몰상식한 놈이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주먹만 한 크기의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마렉이 기가 찬다는 듯 어리벙벙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도 미쳤다는 소리 좀 듣는 편인데 네놈도 만만치 않구나. 어처구니없는 놈이군. 아무래도 동업자를 잘못 선택한 거 같은데.”
마렉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정도로 징징거리지 마라.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크크크!”
“나중이라고?”
내가 싸워야 할 적은 대륙의 황제를 꿈꾸고 있는 천재 중의 천재 휴멜 드 호엔레른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마렉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그때 가서 나를 원망하지 마라.
돌멩이를 쥔 손에 힘을 준 후 마법진 안에 앉아 있는 리치를 노렸다.
목표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입이었다.
타이밍은 마족이 소환되기 직전이었다.
공격 방법은 ‘있는 힘껏’이었다.
화악!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렸던 기회가 찾아왔다. 마법진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쿠구궁!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동굴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떨어진 고드름 같은 암석이 땅에 푹푹 박혔다.
리치가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마지막 주문을 외웠다. 엄청난 마나가 리치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지금이닷!”
팔을 뒤로 당긴 후 있는 힘껏 풀스윙으로 휘둘렀다.
쒜에에엑!
퍽!
돌멩이가 리치의 입에 정확히 박혔다. 돌멩이는 리치의 턱을 부순 후 뒤통수를 뚫고 나왔다.
“크아아아!”
리치가 비명을 질렀다.
“제법인데. 멋진 얼굴을 만들어 줬어. 크크크!”
마렉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쩌적!
쩌저적!
주문이 깨어지자 견고했던 마법진에 균열이 갔다. 갈 길 잃은 마나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사납게 날뛰었다.
“으음.”
“여……긴 어디지?”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마법진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 있던 투사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크아아아!”
쇠를 긁는 듯 소름 끼치는 비명이었다.
비명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메아리 때문인지 비명 소리가 점점 증폭되었다. 종국에는 골이 뒤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되었다.
“무, 무슨 소리야!”
“머, 머리가! 크윽!”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닥쳐!”
깨어난 투사들이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악을 썼다.
리치의 비명 소리가 딱 멈췄다.
“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에 모든 걸 망쳤다. 사지를 자르고 혀와 눈을 뽑아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영원한 고통 속에서 울부짖게 만들어 주리라.”
리치가 뻥 뚫린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눈동자도, 인상을 쓸 수 있는 피부도, 분노를 표현할 입술도 없었지만, 나는 리치의 분노를 몸서리치게 느낄 수 있었다.
“헉!”
“해, 해골이다!”
어둠에 적응한 투사들이 리치의 모습을 발견하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후아악!
리치의 로브가 거칠게 펄럭였다. 손에 들린 마나 스틱이 녹색 빛을 뿌렸다. 마나의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평범한 마법이 아니었다.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나는 동굴 밖을 향해 뛰었다. 마렉은 이미 저만치 앞쪽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곰 같은 덩치와 달리 상당히 잽싼 몸놀림이었다.
“도망쳐!”
나의 외침에 투사 몇 명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투사는 여전히 마법진 위에 주저앉은 채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잠시 후 동굴 안에 휘몰아칠 혈풍을 그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끼기긱!
리치의 애완동물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며 나의 앞길을 막아섰다.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 리치의 개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리라.
휘익!
서걱!
다크섀도우를 이용해 단숨에 애완동물의 목을 잘랐다. 바닥에 떨어진 애완동물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렀다.
그 순간 리치의 마법이 발현되었다.
“애시드 스톰Acid Storm!”
산성 폭풍이 투사들을 덮쳤다.
“끄아악!”
“몸이, 몸이 녹고 있…… 커헉!”
“사, 살려 줘!”
“도망쳐! 밖으로 도망쳐!”
동굴 안이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산성 폭풍에 휘말린 투사들이 물처럼 녹아내렸다.
“젠장!”
나는 맹렬히 뒤쫓아 오는 산성 폭풍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을 놀렸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리치가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지독한 살기로 인해 모골이 송연했다.
동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일단 지형을 살폈다.
내가 있는 곳은 적무도 가운데 위치한 바위산이었고, 동굴은 바위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람처럼 달려 산을 내려갔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어스퀘이크Earthquake!”
쿵!
엄청난 소리와 함께 땅바닥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땅의 파도에 휩쓸려 공중으로 튕겨져 나갔다.
“크흑!”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충격을 흡수한 뒤 그대로 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젠장!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냥 조용히 탈출하자니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다니! 어떻게 책임질 거야!”
신 나게 웃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큰 소리를 치는 마렉이었다.
하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하는 수 없지. 이대로 함께 있다간 둘 다 죽을 거다. 서로 다른 길로 도망쳐 저 괴물이 어느 쪽을 쫓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자.”
내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마렉이 후다닥 숲 속으로 도망쳤다.
“최선을 다해 멀리, 아주 멀리 도망쳐라! 부디 오래오래 살아남길 바란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마렉의 뒤통수를 멍하니 쳐다봤다.
리치가 누구를 쫓아올지 세 살 먹은 꼬마도 맞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나를 미끼로 삼아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게 분명했다.
욕이라도 해 주려는 찰나.
“나의 인형들이여, 저놈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알려 주어라.”
강한 마나의 파동과 함께 바위산이 검은빛에 휩싸였다.
미처 바위산을 벗어나지 못한, 그래서 검은빛에 휩싸인 투사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진짜 인형이 된 것처럼 눈동자에 초점이 풀렸다.
수십 명이 일제히 내가 있는 곳으로 획 고개를 돌렸다. 미리 연습해 본 것처럼 일사불란한 동작이었다.
리치는 악마 형상의 현혹 마법으로 요새를 유린했던 것처럼 또다시 투사들을 현혹시켰다.
투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쇠사슬에서 풀려난 덕분에 마나를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슈슛!
다크섀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앗!”
퍽!
주먹이 투사의 배를 꿰뚫었다.
하지만 광전사가 된 투사를, 고통을 잊은 듯 신음조차 내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눈을 공격했다.
덥석!
두두둑!
반대쪽 손으로 투사의 손가락을 잡고 위로 꺾었다. 그러곤 돌려차기로 관자놀이를 때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깊게 함몰되었다.
투사들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맨손이었던 그들에 비해 나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겼고, 집요했다. 실력과 능력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음에도, 공포와 두려움을 모르는 광전사들은 온몸을 던져 나의 발을 지체하게 만들었다.
살신성인에 가까운 그들의 노력은 성공을 거뒀다.
투사들을 모두 쓰러뜨렸을 때 내 머리 위에 리치가 둥둥 떠 있었다.
“나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든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클클클!”
리치의 로브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동굴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격렬했다. 양손을 움직여 허공에 알 수 없는 도형을 그렸다. 마나 스틱이 녹색 광채를 뿌리며 깜박였다.
차가운 한기가 꼬리뼈를 타고 흘렀다.
무슨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마나 위험한 마법인지는 알 수 있었다.
리치의 마법에 맞서기 위해선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상대는 베네딕트마저, 비록 시체는 보지 못했지만, 쓰러뜨린 괴물이었다.
그때였다.
베네딕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무기로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죽어 있는 투사의 넓적다리를 갈라 뼈를 꺼냈다. 사람의 뼈 중 가장 큰 대퇴골이었다.
나는 대퇴골을 들고 중단 자세를 취했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던 그, 것.
나의 마나가 보통의 마나와 달랐기 때문에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던 그, 것.
그 전 단계라 할 수 있는 마나 소드는 성공했었다.
그때처럼 자신감을 갖고, 정신을 집중하여.
마나 소드는 검이란 매개체에 마나를 입히는 것이었고, 오러 블레이드는 검을 매개체로 마나의 검을 새로이 만드는 것이었다.
공통점은 둘 다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매개체로 사용되는 것이 주로 검이었기에 마나 소드, 오러 블레이드라는 호칭이 붙었지만 사실 도끼든, 창이든 무기의 종류는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나뭇가지로도 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매개체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나의 흐름과 양을 절묘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센스.
나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폈다. 대퇴골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올라 뼈를 감쌌다. 마나 소드의 단계였다.
희열과 함께 실소가 나왔다. 평범과 거리가 먼 나의 마나답게 대퇴골을 감싸고 있는 마나의 색이 푸른 빛깔이 아니라 검붉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리치와 싸우기 위해선 마나 소드로는 어림도 없었다. 베네딕트가 보여 주었던 그것, 오러 블레이드가 필요했다.
정신을 더욱더 집중했다.
대퇴골에 계속 마나를 주입했다.
피부 밑에 숨어 있던 혈관들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몸이 버텨 낼 수 있는 마나 사용량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 순간.
뼈끝에서 거대한 힘의 파동이 분출되었다. 검붉은 색깔의 마나가 점점 새카맣게 변했다.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넓적다리뼈가 아니었다. 마나 소드를 넘어선 빛의 검, 오러 블레이드였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였다. 베네딕트처럼 검 전체를 빛으로 감쌀 수 없었다. 넓적다리뼈의 윗부분만 검은빛을 뿌리고 있었다.
넓적다리뼈 전체를 오러 블레이드로 만들기 위해선 마나의 양을 늘려야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육체가 먼저 파괴되어 버릴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해 나는 윗부분만 오러 블레이드화된 넓적다리뼈를 들고 하늘에 떠 있는 리치와 싸움을 벌여야 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리치였다.
휘이이잉!
휘이잉!
바람이 몰아쳤다. 사방에서 몰려온 바람이 한 지점에 뭉치기 시작했다. 바람의 덩어리가 점점 커졌다.
“윈드 피스트Wind Fist!”
마법이 시전되는 순간 바람의 덩어리가 반투명한 거인의 주먹으로 변화하였다.
거인의 주먹이 벼락처럼 하늘에서 떨어졌다.
쾅!
땅에 거대한 분화구가 생겼다. 근처에 있던 투사들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마법답게 윈드 피스트의 공격은 무척이나 빨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간신히 피했지만 충돌의 여파에 휘말려 하마터면 오러 블레이드가 깨어질 뻔했다.
쾅!
쾅!
나를 묵사발로 만들기 위해 윈드 피스트가 연속적으로 땅을 내리쳤다.
이렇게 피하기만 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마나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육체가 과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려 하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윈드 피스트의 공격을 피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되든, 안 되든, 승부를 걸어야 할 때였다.
나는 가장 커다란 나무를 향해 뛰었다.
윈드 피스트가 내 뒤를 쫓아왔다.
쾅!
윈드 피스트가 일으킨 충격파를 이용해 나무 위를 다람쥐처럼 뛰어 올라갔다.
탓탓탓!
팟!
가장 높은 곳의 나뭇가지를 밟고 하늘로 점프했다.
목표는 당연히 리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윈드 피스트가 리치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곤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젠장할!”
양손으로 넓적다리뼈를 잡고 크게 휘둘렀다.
펑!
오러 블레이드가 윈드 피스트를 베었다. 그리고 윈드 피스트가 넓적다리뼈를 박살 냈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절망을 느꼈다.
나의 무기는 영영 사라졌지만, 리치의 무기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클클클! 윈드 피스트!”
흩어졌던 바람이 다시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쾅!
재생된 거인의 주먹이 망치가 되어 내 몸을 후려쳤다.
“커헉!”
땅으로 떨어진 몸이 땅바닥에 푸욱 박혔다. 그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온몸의 뼈가 산산조각이 난 듯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하늘에 떠 있던 리치가 내 쪽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꼴좋구나. 클클클! 되도록 멀쩡한 상태를 원했지만 장난이 너무 지나쳤다. 이제 그 죗값을 치러야 할 때다.”
내 머리 위에 리치가 손을 얹었다.
“헬 오브 인피니티!”
“크아악!”
무한의 고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지옥에서 돌아왔을 때 나의 정신은 거의 부서진 상태였다. 무너진 영혼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한 줌의 이성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노력한 보람도 없이 리치가 나를 들어 올렸다.
“이 정도면 괜찮겠군. 버티느라 수고 많았다. 그러니 이제 그만 쉬도록 해라. 소울 체인지!”
리치와 눈이 마주쳤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픈 것을 넘어 새하얗게 변했다. 정신이 몸에서 분리되는 느낌과 함께 주변 풍경이 기형적으로 일그러졌다.
나무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늘이 쭈글쭈글해졌다. 초점이 어긋난 것처럼 리치의 몸이 두 개가 되었다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저항했다.
리치의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저항 의지를 높일수록 고통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고통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뚝!
한 줌의 이성이 작동을 멈췄다.
둔탁한 충격이 뇌를 강타했다.
뇌 속에 저장되어 있던 정보와 추억, 즉 ‘나’에 관한 모든 것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기억의 편린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강제로 지워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거의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
그렇게 내 이름조차 떠올릴 수 없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깨끗이 정화된 뇌에 문득 한 남자의 얼굴이 스르륵 떠올랐다.
뿌옇게 흐린 남자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와 동시에 사라졌던 기억들이 다시 폭발적으로 떠올랐다.
-하늘에 떠 있는 악마의 형상. 무너져 버린 요새의 모습. 몬스터들과의 전쟁. 괴물 거북이. 오크와의 추격전. 드레이크와의 대결. 말뚝의 형벌. 벌거벗은 채 끌려 다니던 굴욕의 시간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
뇌리에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휴멜 드 호엔레른…….”
나지막한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마치 마법의 시동어를 왼 것처럼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다. 허공을 떠돌던 영혼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무언가가 나의 영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빠르게.
더 빠르게.
나는 태양을 향해 솟아올랐다. 눈이 부셔서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화아악!
새하얀 빛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나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 * *
이것은 과거의 일.
머나먼 과거의 일.
이제는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전설이 되어 버린 신화시대의 일.
하지만 나에겐 단 하나뿐인 진실. 단 하나뿐인 역사.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지금 깨어나고 있었다.
싸움이 벌어진 벌판에는 잘리고, 으깨지고, 불타 버린 시체들이 가득했다. 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
독기를 머금은 시커먼 연기가 곳곳에서 솟아올랐고, 어디선가 비명이 계속 들려왔다. 눈이 부실 만큼 푸른 하늘에서 수천 마리의 까마귀들이 기분 나쁜 소리로 울어 댔다.
참혹한 벌판 한가운데 악마가 홀로 서 있었다.
악마의 모습은 참으로 흉악했다. 산발한 머리칼은 땅바닥까지 내려와 바닥을 쓸고 있었다. 온몸이 오래된 시체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누더기 옷이 바람에 펄럭였다.
얼굴은 부분 부분 해골이 보일 만큼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해골의 눈두덩은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공간 안에 싸늘한 적색의 흉광이 불꽃처럼 폭사되었다. 누더기 옷 밖으로 빠져나온 왼손은 아예 뼈만 남은 상태였다.
“크크크! 마침내…… 마침내…….”
지상에 강림한 어둠의 군주.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마족들의 왕.
파멸과 절망의 마왕 베르벨트.
반인반골의 마왕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이토록 격렬한 감정이 아직도 자신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크하하하하!”
충성을 다짐했던 수하들이 대부분 죽었다. 오른팔과 왼쪽 다리도 잃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승리했다.
베르벨트는 쓰러져 있는 인간의 왕을 쳐다봤다.
현계現界로 나와 힘의 대부분이 봉인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은 마왕이었다. 한낱 인간이 신에 가까운 존재인 자신을 이렇게 몰아붙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인간이란 종족은 멸종되어야 했다.
“박제로 만들어 끌고 다녀 주마. 그 눈으로 인류의 멸망을 잘 지켜보도록 해라. 크크크!”
그때였다.
부스럭!
고개를 돌리자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인간 병사가 부러진 칼날을 맨손으로 잡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칼날을 잡은 손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그래서 고위 마족조차 다가오지 못했던 벌판에 어떻게 인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
병사의 몸을 감싼 은은한 빛.
“나를 방해할 셈인가, 계집이여!”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여신을 향해 베르벨트는 소리를 질렀다.
병사는 분노와 희열과 광기로 뒤덮인 얼굴로 베르벨트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네년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닥쳐! 이 해골바가지 새끼야!”
병사는 칼날에 체중을 실어 베르벨트의 가슴을 찔렀다.
푹!
“빌어먹을 새끼야! 그냥 땅속에 처박혀 있지 왜 기어 나와서 난리를 치고 지랄이야! 다 죽었잖아! 부모도, 여동생도 그리고…… 그녀도! 네놈 때문에 다 죽었다! 그러니…… 이제는 네놈이 죽을 차례다!”
푹!
푹! 푹!
푸슛!
검은색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핏줄기가 병사의 얼굴을 덮쳤다. 하지만 병사는 그것을 모르는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계속 손을 움직였다. 검은 피로 뒤덮인 병사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피가 튀고 살점이 날렸다.
그리고 마침내 칼날이 심장을 찔렀다.
“크윽!”
힘의 근원인 심장에 구멍이 뚫리자 생명의 불꽃이 급속히 사그라졌다. 마계魔界로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병사의 몸을 감싸고 있는 여신의 힘이 마법 사용을 방해하고 있었다.
베르벨트는 다급했다. 현계에서의 죽음은 곧 소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이대로 소멸할 줄 아느냐! 나는 파멸과 절망의 마왕 베르벨트다!”
최후의 순간 베르벨트가 선택한 방법은 다른 생명체의 몸을 장악해 다시 부활하는 것이었다. 육체의 한계가 없는, 정신체에 가까운 마족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베르벨트는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생명체 안으로 스며들었다.
바로 자신의 심장을 찌른 인간 병사의 몸이었다.
인간 왕과의 싸움으로 지쳐 있다 할지라도 마왕은 마왕이었다. 베르벨트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무한에 가까운 마왕의 힘을 인간의 의지로 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하지만 베르벨트가 부활의 제물로 삼고자 한 인간 병사는 빛의 여신 파이레스트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인간이었다. 찬란한 여신의 영광을 담고 있던 그릇이었기에 베르벨트는 병사의 육체를 쉽게 빼앗지 못했다.
게다가 병사의 원한과 독기는 마왕인 베르벨트조차 감탄할 만큼 순수하고 지독했다.
그렇게 하나의 육체를 차지하기 위한, 주인과 손님의 처절하고 끔찍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신의 가호를 받은 병사의 의지와 마왕 베르벨트의 힘이 어둠의 시공간 안에서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한순간의 방심도 용납될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병사는 홀로 분투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또 얼마나 더 싸워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베르벨트의 공격에 몸을 던져 그대로 소멸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수백, 수천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병사는 무참히 죽어 간 가족과 그녀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무한의 시간 동안 계속된 극도의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의미를 잃어 갔다.
남은 것은 오직 독심毒心뿐이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흘러 마침내 최후의 일전이 벌어졌다.
이미 소멸을 각오한 병사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결코 소멸하고 싶지 않았던 베르벨트는 티끌만 한 여력을 남겨 놓았다.
작은 차이였지만 결정적인 차이였다.
병사, 칼리온은, 마왕 베르벨트를, 한입에 먹어 치웠다.
병사를 따라다니며 전쟁의 모든 상황을 지켜본 나의 영혼이 다시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부유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세포 한 조각까지 분열되는 듯한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세 개의 힘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뇌에 새겨져 있는 슬레이브 스템프와 영혼 교환 마법인 소울 체인지와 기억을 되찾고 각성한 어둠의 마나가 실타래처럼 뒤엉킨 채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날뛰었다.
콰과광!
백색 섬광과 함께 머릿속이 폭발했다.
“크아아아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의식이 날아가고, 심장이 정지했다.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치명적인 고통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근!
두근!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겁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이 개운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검처럼 잡았다.
지금이라면…….
잃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깨닫는 순간 그토록 광포했던 마나가 순한 양처럼 잠잠해졌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조금의 반항도 없이 흘러갔으며, 마나의 양을 늘려도 더 이상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그래. 지금이라면…….
마나를 움직였다. 한계치라고 생각했던 양보다 세 배나 많은 양이었다. 평상시라면 혈관이 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모든 신경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네 배…….
다섯 배…….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주위의 공기가 사납게 소용돌이쳤다.
여섯 배…….
일곱 배…….
그제야 다시 고통이 밀려왔다.
물론 지금의 고통은 예전의 고통과는 종류가 달랐다. 예전의 고통이 마나의 광포한 성질 때문이었다면, 지금의 고통은 순전히 육체의 한계로 인한 고통이었다.
아홉 배…….
코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나왔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모든 근육이 경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열 배.
“하아아압!”
모든 힘을 한꺼번에 개방했다.
마음먹은 대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쾌락이었다. 환희였다.
오러 블레이드의 길이가 주욱 늘어났다. 나뭇가지 길이의 두 배, 세 배를 넘어 열 배, 스무 배 가까이 길어졌다. 태양보다 밝은 빛이 오러 블레이드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앗!”
리치를 향해 그대로 오러 블레이드를 내리그었다. 하늘마저 양단할 기세였다.
서걱!
리치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 광경을 끝으로 세상이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