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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16/45)

서바이벌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악마가 음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섬뜩한 환청이 귓가에 맴돌았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에 증오가 일었다.

죽이자.

모두 죽이자.

마치 감았던 눈을 뜬 것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살의가 번뜩였다.

살의를 느끼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일곱 투사 중 약한 편에 속하는 네 명이 검을 뽑아 들고 서로를 향해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눈은 흰자위만 보일 만큼 돌아가 있었고, 입으론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푹!

서걱!

팔이 잘리고, 배가 찔려 내장이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죽어 가면서도 검을 휘두른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무한한 증오로 고통을 잊는다. 심지어 자신조차 증오스럽다.

이런 건 정상이 아니야.

두근!

두근! 두근!

격렬한 위험신호.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마나 수련에 익숙해진 후로 한 번도 발작하지 않았던 마나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휴멜을 만나기 전 돌팔매질을 연습하다 폭주해 버렸던 그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몸이 풍선처럼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처절한 고통이 끔찍한 살의를 파괴했다. 고통과 살의의 틈새에서 한 줌의 이성이 희미하게 깜박거렸다.

악마의 속삭임 사이로 이성이 소리쳤다.

나는 이성의 외침을 좇아 숲으로 뛰었다. 악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을 놀렸다.

귓가에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비가 내렸다.

쏴아아!

하늘은 어둡고 빗줄기는 거칠었다. 달은 구름 속에 숨어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나는 달렸다.

첨벙!

흙탕물을 밟았다.

진흙이 얼굴까지 튀어 올랐다. 진흙이 들어가 따끔거리는 눈을 감았다 뜨자 갑자기 눈앞에 두꺼운 나뭇가지가 나타났다. 급히 몸을 비틀어 나뭇가지를 피했다.

후두둑!

밑 뚫린 독처럼 거침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만이 적막을 흔들고 있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 으스스한 한기가 어디선가 몰려왔다.

“헉……. 헉…….”

비가 떨어지지 않는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악마의 속삭임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살의가 가라앉고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악마가 나타났다.

이제야 트아르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은유도 없었다. 그는 진실만을 말했다.

진짜 악마는 아닐 것이다. 악마의 형상을 한 무언가일 것이다. 대상의 정신을 잠식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현혹 마법의 일종일 것이다.

전쟁 때 요새를 향해 돌격하던 몬스터의 눈과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투사들의 눈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악마의 형상을 한 연기가 바람에 흩어질 때까지 악마의 유혹은 계속됐을 것이다.

“그리고 강한 놈들만 살아남았을 테지.”

나는 주변에 정신을 집중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요새의 아비규환에서 살아남은 후 사룡을 중심으로 뭉친 투사들 중 하나이리라.

시모프와 적대한 이상 숲 속의 투사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해야 했다.

다시 동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다.

지금부터는 모두가 적이었다.

같은 자리에, 그것도 위치가 발각된 곳에서 오래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나는 어둠으로 물든 숲으로 몸을 날렸다.

문득 마렉이 생각났다. 마렉이라면 사룡의 회유에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머릿속에서 마렉을 지워 버렸다. 그가 나를 적으로 여긴다면 상대해 주면 그뿐이었다.

요새의 투사들은 어차피 그런 관계였으니까.

이틀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세이렌 왕국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줄기차게 쫓아오던 시선이 반나절 전부터 느껴지지 않았다.

요새에 오기 전 숲 속에서 헤맸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 숲에 대해 나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숲은 믿기 힘들 만큼 조용했다.

숲 속을 이틀이나 뛰어다녔지만 몬스터는커녕 짐승조차 거의 보지 못했다.

트아르가 말했던 이상한 징조들.

내가 경험했던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이 모든 것이 현혹 마법을 시전했던, 마법사로 추정되는 놈의 수작일 확률이 높았다.

“그놈도 이 숲 어딘가에 있겠지.”

어쩌면 하늘 위를 날아다니며 전우였던 이들이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날뛰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오래 잘 생각은 아니었다. 해가 뜨기 전, 그래서 어둠이 전부 사라지기 전에 다시 움직일 계획이었다.

줄기차게 쫓아다니던 날파리를 떼어 냈으니 이제는 내가 날파리가 되어야 할 차례였다.

투기장의 배가 언제 올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시모프의 말대로 만약 이 모든 것이 투기장 놈들의 짓이라면 새로운 게임의 승자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배가 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승자가 되는 방법은, 아마도, 현혹 마법을 시전한 마법사를 잡거나 죽이는 것이리라.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게임을 종료시켜야 했다. 배가 오지 않으면 적무도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약속된 3년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 하면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똑!

나뭇잎에 맺혀 있던 이슬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똑!

똑!

한 방울, 두 방울.

이슬이 계속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휘이잉!

똑!

바람에 날린 이슬방울이 콧잔등 위로 떨어졌다.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새벽 공기에서 절대로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눈을 감은 채 감각의 범위를 확장하였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 바람에 춤추는 수천 개의 나뭇잎이, 느껴졌다.

어디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안전을 확인한 후 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똑!

물방울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에게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동체 시력이 있었다. 물방울의 낙하가 슬로우Slow 마법이 걸린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여인의 눈물처럼 투명한 빛깔이 아닌, 붉디붉은 빛깔.

물방울, 아니 핏방울이었다.

오싹!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불길한 느낌은 빗나간 적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일순 심장이 멈췄다.

머리 바로 위 나뭇가지에 사람의 머리가 매달려 있었다. 머리카락으로 질끈 동여맨 머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육룡의 일원이자 요새에서 나에게 얻어맞고 도망친, 시모프의 머리였다.

시모프의 머리가 어째서 여기에.

……그리고 어떻게.

나의 감각은 더할 나위 없이 예리했다.

비록 잠을 자고 있긴 했지만 경계심이 무뎌질 만큼 숙면을 취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습에 대비할 수 있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무 위를 기어가는 벌레의 발소리마저도 나의 감각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오싹!

순간 가느다란 살기가 목덜미를 간질였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희미한 살기였다.

살기의 방향을 알아내기 위해 가만히 눈동자를 굴렸다. 살기는 어디에도 없었고, 또한 어느 곳에나 있었다. 움직일 수도,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는 기분.

그때였다.

사사삭!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나뭇가지를 박차며 나무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바람이 달리는 것처럼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휘익!

휘익!

그들은 나뭇가지를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러곤 나를 향해 다짜고짜 단검을 집어 던졌다.

슈슈슉!

단검을 피하기 위해 나뭇가지 아래로 몸을 날렸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른 후 몸을 일으키려 하자 어느새 다가온 습격자 한 명이 검으로 나의 미간을 노렸다.

“움직이지 마.”

“…….”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애꾸가 되고 싶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시모프 님의 제의를 거절한 것도 모자라 감히 암살을 하다니! 곱게 죽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크크크!”

그의 검이 조금 전진했다.

핏방울이 또르르 콧잔등을 타고 흘러 입술에 닿았다. 비릿한 쇠 맛이 났다.

나는 행동의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았고, 애꾸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눈앞의 쓰레기를 치워 버리기로 했다.

누운 자세 그대로 몸을 빙글 돌리며 다리로 바닥을 쓸었다. 다리를 가격당한 습격자가 중심을 잃고 허공에 부웅 떴다.

철퍼덕!

“컥!”

습격자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나는 회전력을 이용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습격자의 목을 발로 밟았다.

우드득!

그의 목이 기묘한 각도로 구부러졌다.

“죽어라!”

나머지 한 명이 내게 달려들었다.

습격자의 검이 빛을 뿜으며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예기를 품은 바람이 검을 에워쌌다. 요새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투사답게 마나의 사용이 자연스러웠다.

마나를 품은 검에 대항하기 위해 나 역시 마나를 일으켰다.

손날을 검처럼 휘둘렀다.

검과 손이 부딪쳤다.

습격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나 역시 습격자를 비웃었다.

쨍강!

서걱!

손날이 칼날을 마치 종이처럼 잘랐다. 단단함을 넘어선 날카로움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습격자의 검과 머리가 날아갔다.

후두둑.

시체에서 뿜어진 피가 비가 되어 쏟아졌다.

땅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아침의 맑은 공기를 빠르게 먹어 치웠다.

나는 옷에 피가 묻지 않도록 뒤로 물러섰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자.

누군가 나의 감각을 속이고 시모프의 목을 가져왔다. 만약 그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나는 영원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호의적인 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친구에게 사람의 목을 선물하는 인간은 별로 없을 테니까.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투사들. 그들은 시모프의 살해자로 나를 지목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시모프를 죽인 놈이 나에게 죄를 덮어씌웠다는 것.

멀리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해를 이해시킬 가능성은 형편없을 만큼 낮았다. 설사 이해시킬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때쯤이면 나는 죽느니만 못한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안됐지만 습격자들은 전장을 잘못 선택했다. 나에게 이 숲은 안방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습격자들과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 * *

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놈의 주위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습격자들은 대략 A 등급 수준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간혹 B 등급인 경우도 있었지만 어쩌면 실력을 발휘하기 전에 죽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무기이자 수련 도구였던 아이언 피스트가 마렉과의 싸움에서 박살 난 이후로 나는 다크섀도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비록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A 등급의 투사 10여 명을 순식간에 제압해 버린 것은 상당히 놀라운 결과였다.

주먹의 속도가 아이언 피스트를 끼고 있을 때보다 두 배 이상 빨라진 느낌이었다.

발목의 족쇄를 풀었을 때 과연 내가 얼마나 더 강해질지 생각만 해도 전율이 흘렀다.

나는 동료가 모두 죽었음에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유일한 생존자에게 물었다.

“갑자기 나를 공격한 이유가 뭐지?”

“괴물 같은 놈!”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단검을 꺼내 놈에게 집어 던졌다.

휘익!

푹!

놈은 옆으로 머리를 획 숙여 간신히 단검을 피했다. 단검은 놈의 왼쪽 귓불을 스치고 지나 뒤에 있는 나무 기둥에 박혔다.

“큭!”

“마지막 기회다. 나는 묻고 너는 대답한다. 이해됐지? 나를 공격한 이유가 뭐냐?”

나는 제안을 했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내 소관이 아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던질 거니까.

“네놈은 곧 죽을 것이다. 처참하게 울부짖으면서 말이지. 크크크!”

안타깝게도 놈은 나의 제안을 거절하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해 보는 돌팔매질이었다.

빗맞으면 꼴사나운데.

피식 웃으며 서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붉은 안개로 가려진 숲 너머에서 나를 지켜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들에게 우습게 보이면 모두가 나에게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면 언행일치를 해야 했다.

심호흡으로 정신을 집중한 다음 놈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쒜에에에엑!

“헉!”

놈이 숨을 삼키더니 날아오는 돌멩이를 향해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은은한 푸른빛이 검에 감돌았다.

돌멩이와 검이 충돌했다.

돌멩이에 담긴 마나와 검에 담긴 마나가 자웅을 겨뤘다.

쨍!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이 산산조각 났다. 돌멩이는 계속 날아가 놈의 가슴을 뚫고, 그 뒤에 서 있던 아름드리나무에 푹 꽂혔다.

“마, 말도…… 안 되는…….”

놈은 뻥 뚫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절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록 오해라곤 하지만 어차피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겠지.”

어차피 도망치려 해도 이제는 너무 늦었다.

숲 속에 있는 모든 투사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도망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러니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반대로 놈들을 도망가게 하는 것뿐이었다.

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냥을 시작하자.

“타앗!”

퍽!

빙글 회전하며 습격자 18호에게 돌려차기를 먹였다.

17호, 아니 19호였던가.

한 번 어긋나자 카운트가 계속 헷갈렸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이었기에 그냥 18호로 결정했다.

18호의 턱이 반대로 돌아갔다. 부러진 이빨이 후두둑 하늘을 날았다.

나는 쓰러지는 18호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그대로 무릎으로 찍었다.

퍽!

꽈직!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18호의 두개골이 함몰되었다.

“이 괴물 같은 놈! 제발 좀 뒈져라!”

습격자 19호가 등장했다.

놈은 나무 위에 은신하고 있다 나를 노리며 뛰어내렸다.

빙글!

퍽!

공중제비를 돌며 놈의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다.

“크어어억!”

19호는 몬스터에 버금가는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던 19호는 자신이 뛰어내린 나뭇가지 위에 빨래처럼 걸렸다.

19호의 비명을 듣고 20호와 21호가 뛰어왔다.

나는 우거진 풀숲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며 추격을 뿌리쳤다. 두꺼운 나무 기둥 뒤에 숨어 동정을 살피니 20호와 21호가 수색을 위해 서로 갈라서는 모습이 보였다.

몰래 20호의 뒤를 쫓아가 뒤통수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쉐에엑!

파공성을 듣고 뒤로 돌아선 20호가 손으로 돌멩이를 덥석 잡았다.

우드득!

손목이 뒤로 꺾이며 20호의 팔목이 부러졌다.

나는 돌멩이를 세 번 더 던졌고, 20호는 끝내 머리통이 부서졌다.

바스락!

바스락!

지겨운 놈들. 쉴 틈을 안 주는구나.

나는 다시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포기하거나 항복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법이다.

시체로 산을 쌓고, 흐르는 피로 강물을 만들며 계속 날뛰었다.

“후우……. 후우…….”

거칠어진 숨소리.

붉은 피로 흠뻑 젖은 양손.

경련하는 근육.

땅바닥에 드러누워 잠자고 싶은 욕망.

“이, 이, 이 악마 같은 놈!”

대꾸할 힘도 없었다.

나는 놈들을 향해—결국 카운트를 까먹었다—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피곤했고, 잠을 자고 싶은 욕망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죽어랏! 악마!”

“으아아아악!”

나를 향한 놈들의 눈에서 절망과 공포를 넘어선 광기를 보았다. 놈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쨍강!

45호, 아니 46호였던가.

어쨌든 마지막 습격자의 검이 부러지는 순간 갑자기 적막이 찾아왔다.

그동안의 혈투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사방이 고요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탐색했다. 완전히 도망친 것인지, 아니면 작전상 후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더 이상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휴식을 취할 장소를 찾기 위해 나는 쓰러지려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정신이 몽롱했다. 발이 제멋대로 비틀비틀 움직였다. 똑바로 걸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덕분에,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틀.

휘청거리며 왼발을 내딛는 순간.

휘익!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음?”

뜨거운 액체가 뺨을 간질였다.

손으로 닦아서 확인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옆에 서 있는 나무 뒤로 몸을 날렸다.

붉은 피가 손을 물들이고 있었다.

“누구냐!”

나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소리를 질렀다.

시커먼 나무 그늘 안에서 낯익은 얼굴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안경을 벗고 있었지만 나는 사내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아니 어쩌면 만나고 싶었던 상대였기 때문이다.

휘이잉!

바람이 전장을 가로지르며 피를 머금었다. 비릿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섬뜩!

바람은 혈향과 함께 살기를 품고 있었다.

검보다 예리하고, 송곳보다 뾰족하고, 거미줄보다 끈적거리는 핏빛 살기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한여름처럼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숨을 쉬기가 괴로웠다.

역시 베네딕트는 강하다. 말도 못 하게 강하다.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흥분.

베네딕트와 나 사이에는 시체와 곧 시체가 될 부상자로 가득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베네딕트의 눈치를 살피며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심장에 한 명, 한 명 친절히 다크섀도우를 박아 주었다.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모두 베네딕트 때문이었다. 그와의 싸움에 100퍼센트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방해, 하다못해 죽어 가는 부상자의 신음 소리조차, 그들이 암기를 던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 둘 수 없었다.

그런 각오와 그런 집중력 없이는 베네딕트와 싸울 수 없었다. 그만큼 이 사내가 품고 있는 기운은 가공할 수준이었다.

“놀랍구나. 정말로 3년 전의 그 애송이가 맞나 싶군.”

나로 하여금 부상자들조차 ‘확인사살’ 하게 만든 요새의 최강자가 풀잎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내가 준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선물?”

“놓쳤던 육룡의 머리 말이다.”

나의 콧잔등 위로 핏물을 뚝뚝 떨구던 시모프의 머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이놈이었구나.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폭발할 듯 두근거리는 심장이 짜릿짜릿하다.

얼마나 강한 놈인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쥐새끼처럼 몰래 가져다 놓은 선물 말이군.”

“자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깨울 수가 없었다.”

베네딕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는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았다.

“요새는 네가 그런 것이냐?”

시모프는 베네딕트가 투기장의 앞잡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베네딕트를 통해 마법사의 위치나 투기장의 배가 언제쯤 올 것인지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다소 거친 방법을 사용해야겠지만.

“요새? 설마 자네도 내가 투기장의 앞잡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지?”

“떳떳하다면 왜 도망친 거지?”

“투사들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다. 다만…….”

“다만?”

베네딕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이런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려고 자네를 찾은 게 아닌데. 말이 너무 많았군.”

죽음과 같은 고요.

산새도, 벌레도, 숨을 멈춘 공간.

바람이 불어와 땅에 떨어진 나뭇잎을 둥실 들어 올렸다.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허공을 맴돌던 나뭇잎이 나와 베네딕트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작디작은 나뭇잎이 절묘하게 베네딕트의 모습을 가렸다.

바람에 떠밀린 나뭇잎이 하늘로 솟구치는 순간.

사샥!

공기가 크게 요동치면서 베네딕트의 모습이 사라졌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휘둘렀다.

채앵!

“크윽!”

나는 목을 노리며 날아오던 베네딕트의 검을 간신히 쳐 냈다. 손이 저릿저릿할 만큼 강한 일격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검의 광풍이 나를 덮쳤다.

채앵!

채앵! 채앵!

정신없이 양팔을 움직여 공격을 방어했다.

베네딕트의 검은 빠르고, 강맹했으며, 은밀하고, 치명적이었다.

검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잔상만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본능 반, 요행 반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때였다.

광풍 같던 검의 기세가 급변하더니 마치 봄날의 순풍처럼 부드럽게 심장을 찔러 왔다.

검이 심장을 꿰뚫기 직전 나는 간신히 칼날을 붙잡았다.

“하압!”

쨍강!

나는 손아귀에 힘을 줘 검을 부러뜨렸다.

베네딕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마나가 담긴 검을 엿가락처럼 부러뜨리다니. 보통 장갑이 아니었구나.”

베네딕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마음에 안 들어 부러진 검 조각을 놈에게 집어 던졌다. 놈은 고개만 살짝 틀어 나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었다.

나는 조금 전의 일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잠시 후 번개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번쩍했다.

베네딕트가 마구잡이로 장난스럽게 휘두르던 검의 궤적이 낯이 익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생각해 보니 베네딕트의 광풍 같은 공격을, 위태롭게나마 막아 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검술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대륙에 알려진 모든 검술을 통틀어 나에게 낯익은 검술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검술.

“네놈은…… 휴멜과 무슨 관계냐?”

베네딕트의 검술은 바로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이었다.

“카렌 님 말씀대로 예의가 없는 놈이구나. 감히 휴멜 님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다니.”

베네딕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들을 연달아 들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아마…… 칼리온이었던가? 그나저나 자네는 몇 번째지? 37번째? 38번째? 참고로 나는 19번째다. 까마득한 선배라 할 수 있지.”

“무슨 말이지? 뭐가 19번째란 말이냐?”

“모르는 척하는 건가?”

베네딕트가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진짜로 모르는 것인가? 그 정도도 모르면서 어떻게 휴멜 님을 모시고…… 아니,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요새로 오지 않았었지. 처음부터 버릴 작정으로 아무것도 알려 주시지 않은 건가.”

“나는 네놈과 다르게 담소를 나눌 만큼 두 연놈이랑 친하지 않거든.”

두 연놈은 당연히 휴멜과 카렌을 뜻했다.

“연놈?”

베네딕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예의가 없는 놈이 아니라 아예 미친놈이었구나.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웃음소리에서 은은하게 살기가 배어 있었다.

“왜 버림받았는지 알 것 같군. 그 지랄맞은 성격을 가지고 용케도 아직 살아 있구나. 그분 성격상 가만 놔뒀을 리 없을 텐데. 이상하군. 뭐, 그분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어쨌든 나는 19번째 전투 노예다. 내 밑으로 몇 명이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 위로는 전부 죽었다는 거다. 내가 직접 목을 잘랐으니 의심은 하지 않아도 된다.”

“19번째 전투 노예…….”

베네딕트의 정체를 듣는 순간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커다란 착각 하나가 부서져 내렸다.

어째서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째서 휴멜이 나의 재능에 반해서, 혹은 내 안에 숨겨진 힘을 꿰뚫어 보고, 혹은 미친 듯이 심심해서, 나를 노예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보다는 싹수가 보이는 놈을 잡아다 죽음의 구렁텅이로 집어 던진 후 살아남는 자만 추린다고 생각하는 게 올바른 판단이 아니었을까.

휴멜이라면.

자신의 부하조차 망설임 없이 베는 바로 그 휴멜이라면.

-너는 나의 퍼스트 나이트가 될 것이다.

휴멜이 하지 않았던 뒷말이 어렴풋이 들리는 듯했다.

웃음 띤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베네딕트와 나는 같은 전투 노예였다.

그리고 휴멜에게는 전투 노예가 두 명씩이나 필요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퍼스트 나이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베네딕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베네딕트는 휴멜이 고른 놈들 중 최강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 재능 중의 재능을 가진 놈이었다.

베네딕트는 분명 19번째 이후로는 모두 자신이 죽였다고 말했었다. 그 기록을 중단시키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나는 발목의 족쇄를 풀었다.

다리가 3년 만에 자유를 되찾았다.

통!

통!

구속의 대가를 확인해 볼 겸 가볍게 점프를 해 봤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번 해 보기로 했다.

통!

통!

가볍게 점프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휘이잉!

사샥!

바람이 등을 떠미는 순간 그대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베네딕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주먹을 뻗을 새도 없어 그대로 머리로 들이받았다.

팍!

박치기가 성공하기 직전 베네딕트가 양손으로 내 머리를 붙잡았다.

“크윽!”

나의 공격을 완전히 흘리지 못했는지 베네딕트의 몸이 뒤쪽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밀어붙일 때 끝장을 봐야 했다.

나는 그동안 수련해 왔던 그리고 실전을 통해 갈고닦은 권각술을 모두 펼쳤다.

족쇄에 묶여 있던 권각술이 족쇄를 풂과 동시에 날개를 달았다. 힘과 속도를 얻은 권각술은 이미 과거의 그것이 아니었다.

휘익!

파앙!

휘리릭!

주먹과 발을 바람보다 빠르게, 망치보다 강하게 휘둘렀다. 부위를 가리지 않고 베네딕트의 온몸을 노렸다.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정신없이 공격했다.

몸을 좌우로 빠르게 흔들다 오른쪽으로 휙 움직였다. 그러곤 아래에서 위로 주먹을 올려쳤다.

베네딕트는 양손을 X 자로 교차시켜 내 공격을 방어했다.

퍽!

베네딕트의 몸이 허공에 부웅 떠올랐다. 그는 공중제비를 돈 후 멀리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팔이 부러질 뻔했군. 사람의 몸이 이렇게도 빠를 수 있다니. 하지만 그게 전부군.”

베네딕트는 팔을 주무르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발의 족쇄까지 풀었음에도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보다 작은 체구의 베네딕트가 갑자기 거대하게 보였다.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은 철옹성의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다.

나는 잡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적에게 겁을 먹어서 어쩌자는 말이냐.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내뱉는다.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았다.

“좋은 눈이다.”

베네딕트가 땅바닥에 꽂혀 있던 죽은 투사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검의 무게를 가늠하기 위해서인지 허공에 몇 번 검을 휘둘렀다.

“뽑아서 그 장갑과 함께 가져다 드리면 카렌 님이 좋아하시겠구나.”

베네딕트의 새로운 검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검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검신에 흐르는 차디찬 살기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내 몸까지 옥죄여 왔다.

나는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며 베네딕트와의 간격을 재 보기 시작했다.

움찔.

움찔.

뭔가가 나를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몇 번이나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끝내 제자리를 지켰다.

나를 망설이게 하는 것.

마치 전쟁 때 요새 위에 떠 있던 해파리 눈알처럼, 무언가가 하늘 위에 떠서 나와 베네딕트의 싸움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눈에, 그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生과 사死를 관장하는 사신邪神이었다. 사신은 거대한 낫을 어깨에 멘 채 나와 베네딕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베네딕트가 검을 고정시킨 채 내가 움직이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대치한 상태로 우리는 원을 그리며 돌았다.

“질질 끄는 건 성미에 안 맞는데. 오기 싫다면 내가 가지.”

순간 베네딕트의 몸이 죽 늘어났다.

미처 준비할 새도 없었다.

검은 분명 하나일진대 어찌 된 영문인지 수십 개의 검이 사방에서 나를 노리며 날아왔다.

나는 허상 속에서 진실한 검을 찾는 복잡한 방법 대신 간단하면서도 보다 나다운 방법으로 검을 막기로 했다.

휙!

휙! 휙! 휙!

나는 모든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베네딕트의 검은 잔상만 보일 만큼 빨랐지만, 족쇄를 벗어 던진 나의 육체 역시 놀랄 만큼 빨랐다.

게다가 검은 하나인 데 반해, 나는 양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트의 검은 놀랄 만큼 빠르고, 또한 정교했다.

검이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간격으로 살짝살짝 움직이며 나의 수비벽을 비집고 들어왔다.

챙!

챙! 챙!

수백 개의 불꽃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막기만 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튼튼한 몸뚱이를 이용한 나만의 전투술.

나는 치명적인 공격만 방어하며 베네딕트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방어를 무시한 허상 중 몇 개는 말 그대로 허상이었고, 몇 개는 허상이 아니었다.

즉시 온몸에 상처가 생겨났다.

“크윽!”

검이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렇게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사정거리 안에 베네딕트가 들어왔다.

그때였다.

별안간 검의 폭풍이 사라졌다.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베네딕트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 그렇구나.

베네딕트가 나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사정거리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호랑이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었다.

“생각보다 잘 자라긴 했다만 결국 여기까지인가. 휴멜 님이 어째서 자네를 선택하셨는지 궁금하군. 그동안 내가 싸웠던 후보들 중 자네만큼 약한 사람은 없었어. 실망이군.”

베네딕트의 검이 춤추듯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소름이 끼칠 만큼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파괴의 기운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천지를 양단할 기세로 밀려오는 베네딕트의 검은 넘지 못할 절벽 같았다.

검의 허상이 수십 개를 넘어 수백 개에 달했다. 검이 앞과 뒤, 위와 아래, 심지어 뒤쪽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를 에워쌌다.

그제야 나는 내가 베네딕트의 실력을 얼마나 얕잡아 봤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여태껏 본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오러 블레이드는 구경하지도 못했다.

하늘에서 수백 개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푸르스름하게 마나를 머금은 검이었다.

쾅!

푸른 파도가 해일이 되어 나를 덮쳤다.

순간 영원히 지켜보고 있을 것 같던 사신이 몸을 움직였다. 사신은 거대한 낫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휘이익!

땅으로 떨어진 낫은 하얀 호선을 그리며 나의 가슴을 베었다.

“……크윽.”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계치 이상 마나를 끌어 올려 몸을 보호했건만 오른쪽 옆구리에서 시작된 자상이 왼쪽 가슴까지 그어져 있었다. 굵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발작적으로 기침을 했다.

피를 한 사발이나 쏟아 낸 후에야 기침이 멎었다.

저벅……. 저벅…….

베네딕트가 다가왔다.

“다른 건 몰라도 몸뚱이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나의 검을 정통으로 맞고도 고작 그 정도 상처뿐이라니.”

시커먼 그림자가 나의 몸을 덮었다.

“선배의 아량으로 한 번에 끝내 주마. 대신 지옥에 있는 녀석들에게 내 안부나 전해 주게. 하하하!”

베네딕트가 검을 치켜들었다.

새하얀 빛이 검을 감쌌다. 그 빛이 너무 찬란하여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지독한 데자뷰.

-잘 봤지? 검은 이렇게 휘두르는 거야. 연습은 지옥에서 해 봐라.

귓가를 간질이는 휴멜의 조롱 어린 목소리.

빠드득!

치솟는 분노를 느끼며 이를 갈았다.

휘익!

오러 블레이드가 새하얀 섬광을 뿌리며 날아왔다.

폭발하는 분노.

그리고 폭주하는 마나.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 찰나의 시간.

덥석!

파지지직!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손이 잘릴 각오로, 하얀 빛줄기를 움켜쥐었다. 불꽃이 격렬하게 튀었다.

“크윽!”

결국 견디지 못하고 손에 힘을 풀었다. 다크섀도우와 함께 손바닥이 거의 절반이나 잘려 나갔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토록 원했던 시간과 파고들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나는 최초이자 최후의 기회를 움켜쥐기 위해 베네딕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베네딕트의 검은 믿기 힘들 만큼 경이적인 속도였지만, 마지막 일격에 모든 것은 건 나의 주먹도 그에 못지않았다.

서걱!

검이 나의 몸을 가르며 지나갔다.

퍽!

주먹이 베네딕트의 늑골을 부수며 꽂혔다.

그렇게 주먹과 검이 X 자로 교차하며 서로를 때렸다.

“크윽!”

“커헉!”

베네딕트가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아니, 뒤쪽으로 몸을 날려 나의 공격을 흡수한 것이다.

나는 피로 물든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살을 찢고 뼈를 부러뜨렸다. 하지만 목표로 했던 심장은 파괴할 수 없었다.

반면 나의 상처는.

푸확!

핏줄기가 몸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내장이 흘러나올 만큼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몸을 추스른 베네딕트가, 늑골이 박살 나면서도 놓지 않았던 검을 들고, 절뚝절뚝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상처 입은 늑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상처의 고통과 망가진 자존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눈동자에 기광이 번뜩였다.

여기까지인가…….

승리의 가능성이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회를 노렸다.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나 스스로를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베네딕트가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몰래 주운 돌멩이를 던졌다. 아니, 던지려고 했다.

그 순간.

피이이잉!

하늘에서 바위만 한 불덩이가 떨어졌다. 불덩이는 베네딕트를 노리고 있었다.

쾅!

땅이 진동했고, 열폭풍이 밀려왔다.

“큭!”

얼굴을 감싼 채 몸을 움츠렸다. 열폭풍에 한참을 날아가 풀숲에 처박혔다.

“누구냐!”

베네딕트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와 다르게 베네딕트는 열폭풍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만큼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음산한 목소리였다.

“크윽!”

베네딕트가 신음성을 흘리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노려봤다.

부스럭.

숲 속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걸어 나왔다.

검은 로브를 걸친 마른 체구. 한 손에 들린 마나 스틱. 로브에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감싸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목소리로는 더 불가능했다. 쇳소리가 섞인 음산한 중성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놈이 요새의 투사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그리고 베네딕트를 요새에서 도망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마법사임을.

“……방심했군.”

베네딕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처럼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클클클!”

기분 나쁜 웃음소리였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 마법진도 완성되었고 피의 제물도 충분하다. 드디어 드디어 날아왔구나. 드디어.”

마법사는 격정을 참지 못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법진?

피의 제물?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베네딕트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마법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푸른 초승달이 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

“실드.”

화아악!

하얀 장막이 마법사의 주변을 감쌌다.

쾅!

초승달과 실드가 부딪쳤다. 그 여파로 마법사의 모자가 훌렁 벗겨졌다.

마법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본능적인 공포로 일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법사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동자, 코, 귀, 입술, 심지어 피부도 없었다.

완벽한 해골이었다.

“이, 이럴 수가! 설마…….”

베네딕트조차 경악했다.

대륙의 창조주이자 빛의 여신 파이레스트와 태초부터 전쟁을 벌여 온 어둠의 일족 마족.

그 마족을 섬긴다고 알려진 흑마법사가 마족에게 영혼을 바치면 마족은 그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한다.

그렇게 마족의 힘을 빌려 언데드로 변화한 인간형 몬스터.

모든 인간들로부터 재앙의 사자로 배척받는 마족의 종자. 사악하고 음험한 시체들의 제왕. 생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죽음의 마법사.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바로 죽음조차 초월한 암흑의 마법사, 리치Lich였다.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시모프를 비롯해 요새에서 생존한 모든 투사들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투기장이 아니었다. 지원 물품의 양을 줄이고 배를 보내지 않은 것은 투기장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핏빛 안개가 짙어진 것은, 숲의 몬스터와 짐승이 사라진 것은, 투기장의 마법사를 죽인 것은 그리고 현혹 마법으로 요새의 투사들을 광전사로 만든 것은, 투기장이 아니었다.

저놈이다.

저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베네딕트가 신중한 얼굴로 리치를 쳐다봤다. 처음과 달리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베네딕트와 리치.

둘 다 괴물이었다.

한쪽은 천재 중의 천재 휴멜이 선택한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는 검사였고, 다른 한쪽은 영겁의 세월을 살 수 있는 최상위 언데드 마법사였다.

“내놓아라. 네 품 안의 푸른 돌은 내 것이다.”

“이것 말인가?”

베네딕트가 품 안에서 짙푸른 빛깔의 작은 돌멩이를 꺼냈다. 돌멩이에서 청량한 마나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예전에 말뚝의 형벌을 받을 때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마나석이었다.

“내 애완동물을 죽인 것도 모자라 마나석까지 훔치다니. 네 심장을 꺼내 똑같이 만들어 주마. 네 심장으로 축배를 들리라.”

리치가 공격을 시작했다.

쾅!

쾅! 쾅!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지고, 땅에서 뾰족한 얼음 기둥이 솟았다. 휘몰아치는 바람은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베네딕트는 리치의 마법을 피해 다니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다. 나에게 박살 난 늑골 때문에 갈수록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싸움의 결과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겠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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