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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15/45)

붕괴

휘이이잉!

피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어제 보았던 악마 형상의 연기는 바람에 흩어졌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전쟁이라도 있었나?”

요새 아래에 서서 성벽을 둘러보던 마렉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른 투사들은 입만 벌린 채 말도 꺼내지 못했다.

몬스터의 공격에도 끄떡없던 성벽이 군데군데 파괴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파괴된 성벽의 단면을 살폈다.

맨들맨들할 만큼 매끄러웠다. 힘으로 부순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무언가로 잘라 낸 흔적이었다.

돌을 두부 자르듯 벨 수 있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마나 소드의 흔적 같은데. 우리가 없는 틈을 타 나머지 사룡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킨 거 아냐?”

“그랬으면 차라리 좋겠군.”

나는 성문으로 향했다.

투사들이 출입할 때를 제외하곤 항상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성문을 여닫을 때 사용하는 쇠사슬이 끊어져 있었다.

다시는 닫히지 못할 성문을 지나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요새 안은 투사들의 시체와 피로 가득했다.

붉은 물감을 뿌린 것처럼 집, 성벽, 나무 할 것 없이 요새 전체가 피 칠갑 상태였다. 비릿한 피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투사들의 시체 역시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팔다리가 잘린 것은 그나마 멀쩡한 편이었다. 짓이겨지고, 불타고, 내장을 쏟아 낸 시체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혹은 나뭇가지나 집 옥상에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흡!”

“우엑!”

뒤따라 들어온 투사들이 구역질을 했다.

“……굉장하군.”

마렉이 한숨을 쉬듯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다 죽은 걸까?”

“찾아봐야지.”

단체로 구역질하고 있는 일곱 명의 투사들에게 숨어 있으라고 말한 뒤 요새 안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어 있었다. 세이렌 왕국의 유산은 돌무더기가 되었고, 나무로 만든 통나무집은 불타 버렸다. 요새 안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세이렌 왕국의 왕궁 역시 절반이나 무너져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베네딕트의 시체를 찾았다.

역시 발견할 수 없었다.

요새의 투사들이 전부 죽어도 베네딕트만은 죽지 않았을 거란 묘한 확신이 들었다.

시체의 수를 대략 헤아려 보니 300구 정도였다. 요새에 있었던 투사의 수가 800명 남짓이었으니 500명 가까이가 사라진 셈이었다.

“역시…….”

시체의 상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마렉이 굳은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빌어먹을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

“누군데?”

나 역시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마렉이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되물어봤다.

“시체에 있는 대부분의 상처가 검이나, 창같이 날카로운 무기에 의한 거야. 상처의 단면 역시 아주 매끄러워. 오랫동안 수련을 한 자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처지. 그리고…… 이 섬에서 미치도록 수련만 하는 인간들이 있는 곳은 한 곳뿐이지.”

마렉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투기장 놈들이 군대를 끌고 쳐들어왔을 수도 있지만.”

마렉과 나의 생각은 일치했다.

300구의 시체를 만든 범인은 바로 요새의 투사들이었다.

“단체로 마법이라도 걸렸나. 아니면 폭동이라도 일어난 건가? 요즘 요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잖아. 대체 왜 지들끼리 칼부림을 한 거지?”

서로가 서로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고 있는 와중에 마렉이 눈앞의 시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배식 때마다 살기등등하게 부딪치던 투사들의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마렉의 말처럼 정말 폭동이라도 일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대장 놈의 시체가 안 보이네. 역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잠깐, 조용히 해 봐.”

“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생존자 같군.”

“잘못 들었겠지. 시체를 보니 죽은 지 벌써 하루는 지난 것 같은데. 이 지옥 같은 곳에 생존자가 있겠어?”

마렉이 말하고 있는 중간에 다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신음 소리는 비교적 멀쩡한 통나무집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비릿한 냄새가 훅 코를 찔렀다. 바닥이 온통 피바다였다. 그 한가운데 인간으로 짐작되는 물체가 발가벗은 채 꿈틀대고 있었다. 온몸이 자상으로 난도질되어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나도 없었다. 눈동자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공허한 구멍만 뚫려 있었다.

인간의 형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나는 이 물, 체, 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취미가 고약한 새끼들이군. 일부러 이런 거 같은데?”

마렉의 말에 반응하듯 트아르의 몸이 꿈틀거렸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트아르의 몸에 반지를 대었다.

“힐.”

번쩍!

환한 빛이 트아르의 몸을 감쌌다 금방 사라졌다.

역시 1레벨 마법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한 줌이나마 기력을 회복한 트아르가 입을 열었다.

“카……리……온……이냐?”

“그래. 어떻게 된 거지?”

“악……마가…… 나타……났다……. 모두…… 미쳐……. 도……망쳐……. 함……정…….”

함정이라.

나를 잡기 위해서 트아르를 살려 놓은 것인가.

트아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죽여 줄까?”

“매번…… 신……세만…… 지는군. 크크크…….”

나는 주먹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슈슛!

다크섀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걱!

손날을 만들어 망설임 없이 트아르의 목을 잘랐다.

데구르르.

트아르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역시 네놈은 재미있어. 마법을 쓸 줄이야. 게다가 그 검붉은 장갑은 뭐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맨손이었는데.”

마렉도 나도 트아르의 죽음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요새의 투사들은 그런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뭘까. 이 더러운 기분은.

그때였다.

집 밖에서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젠장!”

마렉의 외침을 듣는 순간 나는 통나무집의 창문을 깨뜨리며 밖으로 몸을 던졌다.

콰쾅!

스톤 골렘의 주먹만 한 마나 볼Mana Ball이 통나무집을 강타했다.

통나무집이 으깨지면서 강력한 후폭풍이 나를 덮쳤다. 마나를 끌어 올려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둔탁한 둔기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슈슈슛!

슈슛!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하늘에서 화살 비가 쏟아졌다.

다크섀도우는 마나의 주입량에 따라 강도가 변화했다. 다시 말해 마나의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더 단단해졌다.

나는 양손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다크섀도우를 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손 자체가 금속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을 향해 양팔을 휘둘렀다.

휘익!

휘익!

팟팟팟팟!

다크섀도우를 이용해 나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모두 쳐 냈다.

팔을 얼마나 휘둘렀을까.

마침내 화살 비가 멈췄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땅이 화살로 새카맣게 뒤덮여 있었다.

짝짝짝짝!

30대 중반의 금발 남자가 나를 향해 박수를 쳤다.

“대단하군. 맨손으로 화살을 모두 쳐 내다니.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시험해 본 거니까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그건 그렇고 네 마나는 뭔가 이상하군. 마나 특유의 맑은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마치 들판의 야생마처럼 광포한 느낌이야. 파나티가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군. 그녀는 네가 마나가 없는 줄 알고 있거든. 하하하!”

낯익은 얼굴이었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와 같은 육룡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시모프란 이름이었을 것이다.

시모프 주위에는 50여 명의 투사가 활을 든 채 나를 노리고 있었다.

요새를 둘러볼 때는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이 많은 인원이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네가 그랬냐?”

폭삭 내려앉은 통나무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트아르에 관한 질문이었다.

“혹시 네 약점을 알고 있는지 가볍게 물어봤을 뿐이야. 안심해도 좋아. 아무것도 모르더군.”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내 말에 시모프가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냉정한데. 의외로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군.”

“무슨 뜻이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와 손을 잡자. 우리 육룡이 힘을 합치면 그 빌어먹을 앞잡이 놈도 없애 버릴 수 있을 거다. 그놈을 없애 버린 뒤 이곳을 탈출하여 대륙에 있는 투기장이란 투기장은 전부 싹 쓸어버리자.”

“앞잡이?”

“큰 집에서 개폼만 잡고 있던 베네딕트다.”

시모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베네딕트가 투기장의 앞잡이라고?”

“그렇다. 이 요새에서 투기장과 연락이 가능한 사람은 베네딕트뿐이었다. 요새가 어떻게 됐는지는 눈이 있으니 봤을 테지. 베네딕트는 투기장 놈들이 악마를 이용해 우리를 몰살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다. 아니, 알고 있었어. 제정신을 차린 우리가 베네딕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도망치고 난 후였으니까. 구린 구석이 없다면 도망칠 이유도 없을 테지.”

시모프의 입에서 ‘악마’란 단어가 나오는 순간 트아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악마가 나타났다.

트아르는 투기장 놈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단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것이라면…….

“악마라…….”

어제 나무 위에서 보았던 악마 형상의 연기가 떠올랐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섬뜩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었다. 어쨌든 시모프의 말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정보.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마도 투기장일 것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마법 공격으로 투사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두 번째 정보. 그 결과 하루 만에 요새가 초토화되고 살아남은 투사들은 모두 요새 밖으로 도망쳤다.

세 번째 정보. 사룡을 중심으로 뭉친 생존한 투사들은 베네딕트를 죽이고 투기장에 복수하고자 한다.

그리고 네 번째 정보. 사룡은 나를 자신들의 동료로 삼고자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시모프의 손을 잡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투기장 전체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이성이 말살된 놈들이었다. 손을 잡자는 제안을 거부한다면 그 즉시 베네딕트처럼 투기장 앞잡이로 몰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가슴이 거부한다.

심장이 거부한다.

무엇보다 두 주먹이 거부하고 있었다.

마나가 날뛰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파괴적인 기운이 용솟음쳤다.

“……결렬이군.”

시모프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한판 붙고 싶었잖아. 얼굴에 다 써 있어. 소원대로 한번 신 나게 놀아 보자.”

나는 웃는 얼굴로 전쟁을 선포했다.

“가능하면 손을 잡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그렇게 말하는 시모프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시모프 역시 적무도에 올 만큼 싸움에 미친 투사였다. 같은 육룡으로 평가받고 있는 나와 싸워 보고 싶지 않을 리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언젠가 네놈을 박살 내 버리고 싶었다. 전쟁 때 영웅 놀이나 즐기며 멍청한 잡놈들에게 추앙받는 꼴이 심하게 거슬렸거든.”

시모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점잖은 척은 집어치우고 어서 덤비기나 해, 이 개자식아!”

시모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화아악!

힘을 개방했다.

슈슈슛!

슈슛!

다시 화살 비가 날아왔다.

옆으로 몸을 날려 화살을 피한 후.

팟!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첫 번째 목표는 시모프가 아니었다.

나무 기둥을 베기 전에 우선 잔가지를 치기로 했다.

활을 든 투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투사들이었다. 그것도 싸움에 미친 요새의 투사들이었다.

챙!

챙!

금세 냉정을 되찾은 투사들이 활을 버리고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투사들의 눈에서 광기가 엿보였다. 육룡을 상대한다는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현혹 마법에 걸린 몬스터와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투사들이 조종당하고 있든, 자기 의지로 나와 싸우려 하는 것이든, 나는 적당히 해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가장 앞쪽에 있던 투사의 얼굴에 주먹을 뻗었다. 투사가 검을 휘둘러 주먹을 베려 했다.

주먹과 검이 부딪쳤다.

파샷!

검이 유리처럼 깨어졌다. 이어서 투사의 머리가 터졌다.

나는 투사들 사이로 착지했다.

휘리릭!

서걱!

서걱!

나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손날을 휘둘렀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다섯 투사들의 목이 일거에 떨어졌다.

푸슛!

목 없는 시체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숨어서 나와 시모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렉이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튀어나와 투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주웠는지 내 허벅지만 한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퍽!

퍽퍽!

“으아악!”

“크헉!”

마렉은 투사들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 다니며 그들의 머리를 납작하게 짓이겨 놓고 있었다.

나는 흘끔 시모프를 쳐다봤다.

자신의 부하들이 죽어 나가고 있음에도, 그는 뒤로 물러선 채 태평한 얼굴로 방관만 하고 있었다.

투사들 역시 그런 시모프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베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 먹을 정도였다. 나의 공격을 막기 위해 옆에 있던 동료를 내 쪽으로 떠미는 것은 별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진형을 짜서 나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이들에게서 동료의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단지 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을 뿐이었다.

그사이 마렉도 착실히 투사들의 수를 줄여 나갔다.

짓이기고, 짓이기고, 또 짓이기고.

쨍강!

손으로 검을 잡아 옆으로 비틀었다. 부러진 검날을 투사의 목에 꽂았다.

순식간에 투사들의 절반이 사라졌다.

여전히 시모프는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렉은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피에 미친 살귀처럼 날뛰었다. 지금도 끓어오르는 살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미 죽어 버린 투사의 몸을 발로 짓이기고 있었다.

그 순간.

휘오오오!

거대한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칼리온! 저놈이 뭔가 하려고 해! 막아!”

마렉이 소리쳤다.

여태껏 뒷짐을 지고 있던 시모프가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뒈져라! 하아아압!”

번쩍!

시모프의 양손이 하얗게 빛났다.

태양처럼 빛나는 거대한 마나의 덩어리가 나에게 날아왔다.

“크으악!”

“아악!”

집채보다 큰 마나 볼이 시모프와 나 사이에 서 있던 투사들을 먼저 덮쳤다.

펑!

펑!

마나 볼에 닿은 투사들의 몸이 폭발했다. 피와 살점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투사들이 죽어 나갈수록 마나 볼의 속도에 점점 더 가속도가 붙었다. 마치 투사들의 마나를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시모프의 얼굴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내가 펑 하고 터져 곧 가루가 될 것이라는.

하지만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나를 한계치까지 끌어 올려 오른쪽 주먹에 집중시켰다.

“쓰으으읍!”

숨을 크게 들이마셔 아랫배에 꽉 힘을 준 뒤.

마나 볼을 향해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다크섀도우와 마나 볼이 부딪쳤다.

번쩍!

쾅!

백색 섬광이 눈을 찔렀다. 굉음이 공기를 흔들었다. 충격의 여파로 시체들이 멀리 날아갔다.

마나와 마나의 충돌은 폭풍 같은 충격과 함께 불꽃같은 열기를 만들었다. 덕분에 옷의 대부분이 타 버렸다. 달구어진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휴우우우.”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럴 수가! 마나 볼을 주먹으로 깨뜨리다니!”

시모프가 경악했다.

추할 만큼 일그러진 얼굴. 마음의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부르르 떨리는 입가. 흔들리는 눈동자.

그래.

그 얼굴이다.

네놈에겐 그런 얼굴이 어울린다.

그 같잖은 자부심. 그 같잖은 힘. 그 같잖은 미소.

내가 전부 부수어 주지.

팟!

땅을 박차고 시모프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시모프가 옆에 있던 투사를 내 쪽으로 집어 던졌다.

퍽!

옆구리를 걷어차 투사를 날려 보낸 후 다시 시모프에게 달려들었다.

시모프가 검을 뽑아 몸통을 방어했다.

파샷!

주먹이 검을 부수고 시모프의 몸통을 때렸다.

“컥!”

시모프가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검 때문에 원하는 만큼 충격을 주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공격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시모프는 뒤로 날아가는 탄력을 이용해 잽싸게 도망쳐 버렸다.

예상치 못한 도주에 잠깐 멈칫한 사이 시모프의 모습이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설마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말만 번지르르한 자식이네.”

시모프와 공방을 주고받는 사이 나머지 투사들을 모두 정리한 마렉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쫓아갈 거야? 저런 놈은 기회가 왔을 때 죽여야 돼.”

마렉의 말이 옳았다. 게다가 부상도 당했기 때문에 추격하면 잡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왠지 투지가 확 사그라졌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역시 그 장갑…… 보통 장갑이 아니지? 마나 볼을 가르고, 마나가 실린 검을 박살 내는 게 맨주먹으로 될 리는 없고. 혹시 아티팩트?”

대답해 줄 의무는 없었기에 가볍게 무시했다.

“그것보단 앞으로가 문제야. 요새에는 대략 800명이 있었지.”

“그렇게나 많았나? 더 적었던 거 같은데. 착각한 거 아니야?”

대답을 회피하는 내가 못마땅한지 마렉이 툴툴거렸다.

“지금 죽인 놈들까지 합쳐도 아직 450명 정도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야. 물론 그중에는 베네딕트도 있겠지.”

베네딕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렉의 눈이 반짝였다.

마렉은 아직 베네딕트의 진짜 힘을 모르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그것을 보고도 마렉의 투지가 지금처럼 불타오를지 문득 궁금해졌다.

“일단 모여서 상의를 해 보자.”

나는 북쪽 성벽으로 향했다. 물품을 함께 가지고 온 일곱 투사들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일곱 투사들은 구석진 곳에 잘 숨어 있었다. 나와 마렉이 나타나자 크게 안도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가장 먼저 결정한 사항은 요새를 떠나는 것이었다. 이곳은 이미 요새로서의 가치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시체와 피로 거주지로서의 가치도 잃었다.

요새를 돌아다니며 쓸 만한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숲에서 지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다시 요새를 돌아다녔다. 요새는 철저히 파괴되어 있었다. 건질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약속 시간이 되어 다시 모였을 때 대부분이 빈손이었다. 그나마 밧줄과 붕대를 발견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실망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투기장 놈들이 보내 준 물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새를 나가려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먼저 나가 있어.”

마렉과 일곱 투사들이 요새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요새의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안쪽에 세 개의 항아리가 밀봉된 채 세워져 있었다. 뚜껑을 열자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촤악!

촤악!

항아리에 담긴 기름을 뿌리며 요새를 돌아다녔다. 세 개의 항아리가 모두 동날 때까지 요새 곳곳, 특히 시체들 위주로 기름을 뿌렸다. 항아리 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을 긁어모아 횃불을 만들었다.

요새를 빠져나오기 직전 기름으로 흠뻑 젖어 있는 시체에 횃불을 던졌다.

화르르르!

순식간에 수십 갈래로 갈라진 불꽃이 요새 안을 내달렸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불바다로 변한 요새를 뒤로하고 마렉과 일곱 투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불타고 있는 요새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들었던 곳이 파괴되었다는 슬픔보다 안전한 곳을 떠나 위험한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그들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하늘 좀 봐. 연기가 마치 뿔 달린 악마처럼 보이지 않아? 재수 없게시리.”

검은 악마 형상의 얼굴이 요새 위에 둥둥 떠 있었다. 공교롭게도 요새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악마의 형상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머리 양쪽에 뿔이 달려 있었고, 입은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귀는 뾰족한 삼각형 모양이었고, 눈은 감겨 있었다.

“진짜 기분 나쁜데.”

마렉이 인상을 쓰며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가자.”

요새에 등을 돌리고 숲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어? 어? 뭔가 이상한데?”

뒤를 돌아보자 투사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악마가 떠 있었다.

“뭐가? 똑같은데?”

“아니야. 잘 봐. 눈을…… 눈을 뜨려는 것 같아.”

“하아? 미쳤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저건 그냥 연기일 뿐이야. 눈을 뜨긴…… 무슨…… 눈을…….”

동료를 핍박하던 투사가 끝내 말을 멈췄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하늘만 바라봤다.

스르륵.

악마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검은색 연기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붉은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우리를 쳐다봤다.

흠칫!

악마가 미소를 지었다.

분명 미소였다.

마치 쥐를 발견한 고양이와 같은 미소였다.

잔혹하고, 냉정하고, 조금은 장난스러운.

스팟!

악마의 눈동자가 번쩍 빛나는 순간.

모든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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