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징조 (14/45)

징조

이틀 후.

일찍 잠을 잔 탓에 너무 일찍 잠에서 깨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요새가 어스름했다. 차가운 새벽바람에 닭살이 돋았다.

해가 뜨길 기다렸다가 어제 먹다 남은 육포로 아침을 때웠다.

아침을 먹고 다시 밖으로 나가자 투사들이 수레에 짐을 묶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를 알아본 투사들이 일을 멈추고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본격적으로 뜨거워지기 전에 요새를 떠났다. 일행은 나를 포함해 모두 여덟 명이었다.

“부탁해.”

트아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하면 도망칠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해.”

트아르의 미소를 뒤로하고 숲으로 향했다.

드드드드!

수레의 바퀴 자국이 땅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향긋한 풀 내음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오랜 시간 투사들이 들락날락거리며 닦아 놓은 길이 숲 안쪽으로 구불구불하게 보였다.

길 양옆으로 아름드리나무가 빽빽이 서 있었다. 멀리 풀을 뜯고 있는 토끼의 모습이 보였다.

수레에 누워 나뭇잎에 가린 하늘을 쳐다봤다.

나뭇잎 틈새로 보이는 하늘에 독수리 한 마리가 떠 있었다. 독수리는 먹이를 발견한 듯 하늘에서 원을 그리며 돌다 날개를 접으며 지상으로 활강했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시야를 가렸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그림자의 정체를 살피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3차전을 하러 왔나?”

내심 기대하며 물었더니 마렉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혼자 웃고 난 뒤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칼리온!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프러포즈를 받았다.

그것도 곰처럼 생긴 용병한테서.

너무나 생소한 경험이라 좀 더 대화를 나눠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요새를 먹자.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나머지 사룡은 물론 커다란 집에 박혀서 똥폼만 잡고 있는 놈을 꺾는 것도 결코 꿈이 아니다.”

“꿈이다. 그러니 다 잊고 내 앞에서 사라져라.”

나를 때려눕힌 건 네가 처음이다, 너의 주먹이 내 얼굴에 닿는 순간 알 수 없는 미지의 쾌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하고 말했으면 오히려 조금쯤 고민해 봤을 것이다.

요새를 먹자니.

생각보다 웃기는 놈 아닌가.

“역시 생각대로군.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크크크!”

생긴 것답지 않게 음흉한 웃음이다.

무시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나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생긴 것답지 않게 음흉한 웃음의 투사는 마찬가지로 생긴 것답지 않게 너무나 끈질겼던 것이다.

초입을 벗어나 숲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3년 만에 돌아온 숲은 조용했다.

풀벌레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기분 나쁠 만큼 고요했다. 침묵에 불길함을 느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투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본 후 마지막으로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만 믿겠다는 시선이었다.

드드드드!

수레바퀴 소리만이 침묵을 깨뜨렸다.

숲에 들어온 후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짙어지는 붉은 안개와 특유의 기분 나쁜 살기가 신경을 긁었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긴장감은 조금씩 고조되었다.

모두 느끼고 있었다. 숲이 심상치 않음을.

폭풍 전야와 같은 불안함이 무리에 감돌았다.

“젠장! 이놈의 살기. 기분 나빠 미치겠군. 어이! 내 뒤에서 알짱거리지 마. 나도 모르게 머리통을 부숴 버릴 수도 있으니.”

마렉만이 예외였다.

이놈만은 숲의 침묵에 관심이 없었다. 속 편한 놈인지, 조심성이 없는 놈인지, 하여간 신경이 둔한 놈인 것은 확실했다.

어느새 서쪽으로 이동한 태양이 마지막 열기를 내뿜었다.

해가 지자마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사시사철이 여름인 적무도였지만 역시 숲 속의 밤은 추웠다.

투사들이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나뭇가지를 모아 왔다. 이틀 전에 온 비 때문에 나무가 젖어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후회한다니까. 차라리 마법사가 되는 건데.”

“네놈 머리로 무슨 마법사? 게다가 마법사면 여태까지 살아 있을 것 같아? 첫 번째 전쟁에서 바로 죽었을걸.”

“하긴, 전투 마법사라고 으스대는 놈들 중 제대로 싸우는 놈을 못 봤으니.”

“어쩔 수 없지.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요새의 전쟁은 완전히 난전 위주잖아. 숨어서 후방 지원해 줄 곳도 마땅히 없으니 몬스터 몇 마리를 통구이로 만든 후 목이 뎅강 잘리는 거지. 사실 마법사가 난전을 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글렀잖아.”

모닥불을 피우며 투사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숲의 침묵과 살기에 조금 적응이 됐는지 얼굴색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어쩌면 불안함을 숨기기 위해 그러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모두 모닥불 근처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 메뉴는 말린 육포와 옥수수를 끓여 만든 수프였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달그락!

달그락!

자그마한 가방에서 큼지막한 조리 도구들이 튀어나오는 광경은 상당히 신기했다.

마법 가방은 재질과 용량에 따라 그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마렉의 것은 거의 최상품으로 보였다. 절대로 적무도에 끌려온 투사가 가지고 있을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마렉은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 따로 불을 피운 후 제, 대, 로, 된 요, 리, 를 만들기 시작했다.

생긴 것답지 않게 그는 음식을 잘 만들었다. 먹어 보지 않았기에 맛은 장담할 수 없지만 최소한 만드는 모습은 일류 요리사 못지않았다.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서서히 퍼져 나갔다.

빈곤하게 저녁을 먹던 투사들이 수프가 식고 있는 것도 잊은 채 몽롱한 시선으로 마렉을 쳐다봤다.

요리가 완성될 때쯤 되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마렉이 다가왔다.

“이런 젠장! 너무 많이 만들었잖아! 하는 수 없지. 칼리온, 나와 함께 저녁을 먹지 않겠나?”

나에게 다가온 마렉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연히, ‘저녁을 먹은 후 어떻게 하면 요새를 정복할 수 있을지 함께 상의해 보세.’란 말이 생략된 식사 초대였다.

“…….”

어린이도 눈치챌 수 있는 유치한 유혹을 단호히 무시하자 마렉은 어깨를 으쓱한 후 다른 투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닥불에 앉아 있는, 나를 제외한 모든 투사들이 간절함을 넘어 애절한 눈빛으로 마렉을 쳐다봤다.

“그러면 너, 나와 함께 먹고 싶으면 와도 좋아.”

지목당한 투사가 환호성을 올리며 냉큼 마렉에게 달려갔다.

“돼지 같은 놈!”

“오라고 한다고 냉큼 달려가는 것 좀 봐.”

자신을 욕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택받은 투사는 마렉의 요리를 먹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마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듯.

그 시선을 무시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콧속으로 스며드는 냄새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도 배 안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마렉이 듣지 못했길 진심으로 바랐다.

* * *

밤이 되어서도 숲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어두운 방 안에 홀로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나와 마렉을 제외한 투사들이 교대로 불침번을 섰지만 느낄 수 있었다. 밤새 잠을 이룬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심지어 마렉조차 잠을 자지 않았다.

어차피 자는 사람도 없었기에 조금 부지런을 떨어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다.

마법사를 사로잡기 위해선 원래 일정보다 빨리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마법사가 지원 물품을 소환하고 사라지기 전에 덮치기 위해선 예정보다 훨씬 빨리 도착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가자.”

나는 2년째 지원 물품을 가져오고 있는 길잡이를 채근하여 이동속도를 높였다.

“더 빠른 길은 없나?”

“있긴 합니다만…… 조금 위험합니다.”

길잡이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위험하지? 육룡 중 두 명의 힘으로도 헤쳐 나갈 수 없을 만큼 위험한가?”

나는 강압적으로 말했다.

길잡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닙니다. 이쪽입니다.”

“뭘 그렇게 서둘러? 어차피 물건이 오는 날은 정해져 있다며? 일찍 가 봐야 아무것도 없다고.”

마렉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굳이 나의 계획을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기에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지만 마렉이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웃긴 놈이었다.

길잡이의 말대로 새로운 길은 제법 험로였다.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수레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 오히려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때였다.

스스슥!

작은 소리였다.

“멈춰. 모두 무기를 들어.”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마렉이 큰 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인상을 쓰며 살짝살짝 흔들리고 있는 풀숲을 턱으로 가리켰다.

“오크?”

눈을 찌푸리며 풀숲을 노려보던 마렉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이 못생긴 돼지머리들아!”

예상했던 대로 마렉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싸움은 저놈에게 맡겨. 경계만 늦추지 말고.”

긴장한 투사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 마렉의 실력을 감상했다.

콰직!

콰콰쾅!

마렉은 양손에 도끼 하나씩을 들고 오크들 사이를 거침없이 누볐다. 도끼질 한 방에 오크 머리가 하나씩 사라졌다. 자르는 것이 아니라 어깨 아래에 쑤셔 박고 있었다. 광전사가 따로 없었다.

도끼가 빛을 뿜었다.

도끼가 움직일 때마다 푸른빛의 잔상이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마나 소드, 아니 마나 엑스인가.”

“오오! 도끼가 보이질 않아!”

“역시 육룡이야!”

투사들이 연방 감탄사를 터트렸다.

꾸에에엑!

꿰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오크들이 도망쳤다.

“오는 건 마음대로 와도 가는 건 허락을 받고 가야지!”

마렉은 오크들을 추적하여 숲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 후에야 다시 돌아온 마렉의 양손에는 도끼 자루만 들려 있었다. 마나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도끼가 깨져 버린 모양이었다.

“역시 너무 가벼워. 원하는 만큼 파괴력이 안 나와. 이게 다 네가 내 검을 부쉈기 때문이야.”

투덜거리는 마렉을 가볍게 무시하고 투사들에게 오크의 시체를 치우게 했다.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야 했기에 일이 끝날 때까지 앞에서 감시를 했다.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몬스터들이 몰려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크의 시체를 치운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밤이 될 때까지 이동했다. 낮에 한바탕 운동을 해서 피곤한지 마렉이 요리 대신 육포를 씹었다.

숲에서의 두 번째 밤.

역시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첫 번째 밤에는 이유가 없었지만 두 번째 밤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크는 복수를 신성시하는 종족이었고, 지금쯤이면 한 번쯤 습격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이 다 지나도록 오크는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를 찾지 못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은밀함보다는 신속함을 위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선명한 바퀴 자국만 따라와도 우리를 금방 발견했을 것이다.

“복수를 포기한 건가?”

“오크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럴 수도 있지. 이쪽엔 육룡 중 두 명이나 있잖아. 겁먹어서 도망쳤을 수도 있지.”

“죽는 게 무서워서 도망칠 정도라면 복수의 화신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걸.”

“그건 그렇지만…….”

투사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결국 날이 밝을 때까지 오크의 습격은 없었다.

더 확실한 기회를 노리기 위해 타이밍을 노리고 있거나, 혹은 투사들의 말처럼 복수를 포기했거나, 두 가지 가능성 중 전자로 가능성을 좁혔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무작정 빨리 이동할 수가 없었다.

빠르게 이동하는 중에 옆구리를 기습당하면, 물론 나와 마렉은 제외하고, 투사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젠장.”

하는 수 없이 이동속도를 줄였다. 대신 내가 직접 이동 경로를 정찰하여 지체된 시간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서둘렀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본래 계획보다 불과 하루 먼저였다.

“정지.”

나는 목적지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일행을 멈춰 세웠다.

우리가 일찍 왔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잘못하면 마법사가 도망쳐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 사로잡아야 했다.

“여기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도록. 불은 피우지 말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어디 가는데?”

“볼일이 있다.”

“같이 가.”

마렉이 달라붙었다.

“일행을 지켜 줘야지. 오크들이 습격할 수도 있잖아.”

“여태까지 오크의 오 자도 보이지 않았잖아.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지. 보이는 적은 무섭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적은 무서운 법이니까. 오크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것을 봐.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게 분명해.”

투사들이 간절한 눈으로 마렉을 쳐다보며 지원사격을 해 줬다.

“쳇! 알았다.”

마렉이 뚱한 얼굴로 수레 위에 드러누웠다.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조심스럽게 목적지로 향했다. 상대가 마법사인 만큼 마법 트랩에 걸리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썼다.

일부러 빙 돌아가느라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다. 높은 나무 위에 올라 목적지를 살폈다.

투기장의 물품으로 보이는 것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붉은 안개 탓에 자세히 보기 힘들었다.

“……젠장. 이미 왔다 갔나.”

물품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아 마법사가 온 것이 분명했다. 돌아갔는지의 여부는 아직 몰랐지만 숲은 일을 마치고 놀 만큼 좋은 곳이 아니었다.

물품을 소환하는 순간을 노려 생포하겠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디작은 희망을 품고 가까이 다가갔다.

“음?”

목적지의 풍경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차곡차곡 쌓여 있어야 할 물품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곡식 자루는 찢겨 있었고, 옷과 수건을 만들 천은 바람이 불 때마다 너풀너풀 날아다녔다. 흡사 태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모든 것이 난장판이었다. 또한 텔레포트Teleport 마법진이 그려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壇이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이상한데.”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빠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짐승이 한 마리도 없었다.

자루가 터져 곡식이 흩뿌려져 있고, 잘 말린 육포와 과일이 널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웃거리는 짐승이 한 마리도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아. 불길해.

트아르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숲에 들어오고 나서 지금까지 정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숲은 침묵했으며, 오크는 복수를 포기하고, 음식이 널려 있는데도 짐승이 꼬이지 않았다.

휘이이!

바람이 불었다. 붉은 안개가 파도처럼 넘실넘실 춤을 췄다.

“음?”

익숙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붉은 안개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비릿한 냄새.

바로 피 냄새였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신중하게 물품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피 냄새가 짙어지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휘이이!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펄럭!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파란색 천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아래 숨어 있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는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마나를 증폭시켜 준다는 마법사의 필수품 마나 스틱Mana Stick이 쥐여 있었다.

마법사였다.

아마도 공간이동 마법을 펼칠 수 있는 투기장 소속의 마법사이리라.

마법사는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마법사가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가슴이 활짝 개복되어 있었다.

심장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쓰기 위해선 마나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나석이 만들어지는 곳은 바로 심장이었다. 그러므로 심장만 사라졌다는 것은 누군가가 마나석을 노리고 마법사를 죽였다는 뜻이다.

누군가, 이 숲에, 있다.

그 누군가는 논리적인 목적을 가지고 살인을 행할 수 있는 종족, 인간이 분명했다.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그리고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일행이 머물고 있는 곳까지 한걸음에 달렸다.

푸홧!

점프하여 풀숲을 뚫고 일행이 있는 곳에 착지했다.

“헉!”

챙!

챙! 챙!

깜짝 놀란 투사들이 검을 뽑았다가 내 얼굴을 확인하곤 도로 집어넣었다.

“꼬랑지에 불붙은 여우새끼 같은데.”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마렉이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놀렸다.

마렉을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트아르의 말처럼 증거는 없었지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불길한 기분이었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곳은 위험하다고. 어서 도망치라고.

“바로 출발할 테니 최대한 빨리 준비해.”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투사들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준비를 서둘렀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냐? 뭔데? 무슨 일인데?”

“마법사가 죽었다.”

“응? 무슨 마법사?”

“가 보면 알아.”

투사들을 다그쳐 최대한 빨리 목적지로 향했다. 만약 오크들이 기습할 기회를 노리는 중이라면 지금이야말로 기다리던 최적의 타이밍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오크의 습격은 없었다.

“뭐, 뭐지?”

“완전 쓰레기가 됐잖아?”

“짐승들 짓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목적지에 도착한 투사들이 난장판이 된 물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쓸 만한 것들만 주워 담도록. 서둘러!”

나는 멍하니 서 있는 투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제정신을 차린 투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법사가 죽었다며? 마법사는 어디 있는데?”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마렉이 툭 내뱉었다.

“바로 네놈 옆에 있잖…….”

마렉의 옆을 가리키려던 내 손가락이 힘없이 떨어졌다.

없었다.

마법사의 시체가 사라졌다.

“……젠장.”

팔에 소름이 돋았다. 불길한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적색 경고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상황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

“출발한다!”

“하지만 아직 쓸 만한 게…….”

“나머지는 버린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투사들의 불평을 막기 위해 살기를 사용했다. 투사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들고 있던 물품마저 집어 던졌다.

요새로 돌아오는 내내 달렸다. 밤에도 거의 쉬지 않았다. 투사들은 힘에 겨워 헐떡거렸고, 수레의 바퀴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삐거덕거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돌아오는 시간을 거의 절반이나 단축시킬 수 있었다.

높은 나무 위에 올라 멀리 보이는 요새를 살폈다. 서두르면 하루 안에 도착할 만한 거리였다.

“음?”

손톱보다 작게 보이는 요새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밥을 짓기 위해 피운 불이 절대로 아니었다.

“젠장!”

불안함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나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소리를 질렀다. 쉬고 있던 투사들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본 요새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요새 위로 솟아오른 연기가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덜그덕!

덜그덕!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자 짐수레가 부서질 것처럼 덜컹거렸다.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 부서지지 않길 바라며 더욱더 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최악의 서바이벌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