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렉
“하압!”
“하앗!”
남쪽 성벽에 위치한 연무장에서 수십 명의 투사들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연무장이라고 해 봐야 별것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일 뿐이었다.
나 역시 수십 명의 다른 투사들과 함께 수련을 하고 있었다.
투기장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하지만 이곳은 요새였고, 이들은 그럭저럭 나의 전우들이었다.
“타앗!”
주먹을 뻗었다.
목표했던 지점에서 주먹을 끊어 쳤다. 공기가 팡,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후우우.”
주먹을 거둬들이며 숨을 내쉬었다.
내가 하고 있는 수련은 예나 지금이나 간단했다. 한 호흡에 얼마나 많이 움직일 수 있는가였다.
고수와의 싸움은 순간의 차이로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훈련은 호흡하기 위한 찰나의 순간마저 최소로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1년 내내 여름인 곳답게 햇볕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연무장 옆에 위치한 그늘막으로 걸어가 그늘 위에 벌렁 누웠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거칠어진 호흡을 안정시키며 수련 중인 투사들을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연무장 반대쪽에 자리 잡고 있는 또 하나의 그늘막이 눈에 띄었다.
그늘막은 반구를 다시 반으로 자른 모양이었다. 그렇게 자른 두 개의 반구를 연무장 양쪽에 하나씩 세워 놓았다.
두 개의 그늘막을 하나로 합쳐 반구를 만들면 괴물 거북이의 등껍질이 된다.
괴물 거북이라…….
그것이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내가 한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수련.
불현듯 그때의 괴물 거북이를, 지금의 나라면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아마 쉽진 않으리라.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괴물 거북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괴물 거북이를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베네딕트의 오러 블레이드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휴멜 이후로 처음이었다. 내게 벽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이길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투지는 불타올랐지만 몸이 본능적인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싸우기도 전에 전의가 꺾이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불쾌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이럴 때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수련이었다.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자마자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을 토대로 만든 나의 권각술은 원래 무늬만 그럴싸한 무술이었다.
하지만 3년 동안 계속된 수련과 수백 번이 넘는 실전 경험으로 인해 지금은 제법 그럴듯하게 다듬어진 상태였다.
때문에 지금의 권각술은 수련을 하던 투사들이 수련을 멈추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볼 만큼 진화해 있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나의 권각술은 정해진 초식이 없는 실전 무술이었기 때문에 수련 역시 가상의 적을 상정하여 머릿속으로 가상의 전투를 벌이며 몸을 움직이는 이미지 수련이 주를 이루었다.
이번에 상정한 적은 드레이크 두 마리와 몽둥이를 든 오우거 다섯 마리였다.
크아앙!
오우거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든다.
쓰으으읍! 화악!
드레이크가 브레스를 내뿜는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적의 공격을 피하고,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적의 약점을 공격했다.
빠르게.
더욱더 빠르게.
가상 전투가 진짜라고 여겨질 만큼 몰입될수록 몸이 점점 더 빠르게 반응했다.
휘익!
마지막 오우거의 심장에 주먹을 박아 넣는 순간.
“오오!”
투사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정신이 흐트러지며 나는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귀환했다.
연무장 구석에서 시작한 수련이 눈을 떠 보니 연무장 중앙에 내가 서 있었다. 이리저리 날뛰다 보니 연무장 중앙까지 움직인 것이었다.
자연히 연무장 중앙에서 수련하고 있던 투사들은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수련을 방해했군. 사과하지.”
“아, 아닙니다.”
“오룡의 수련을 볼 수 있게 돼서 영광입니다.”
투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눈에는 감탄과 시기, 존경과 질투가 혼재되어 있었다.
오룡이라…….
괴물 거북이는 요새 최강자였던 구룡을 사룡으로 만들었다. 그 후 3년의 시간 동안 두 명이 더 죽고, 세 명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 세 명 중 한 명이 바로 나였다.
투사들의 시선 때문에 더 이상 연무장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번 더 사과한 후 그늘막으로 향했다.
그늘막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투사들이 슬그머니 일어나 반대편 쪽의 그늘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넓은 그늘막은 결국 나 혼자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라고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나와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연무장에서 수련을 할 때마다 거의 대부분 그늘막 하나를 고스란히 차지했다.
결국 오늘도 투사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 * *
요새 광장에 있는 우물가는 웬일인지 텅 비어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상의를 벗은 후 바가지에 물을 퍼 머리에 부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며 뜨겁게 달구어진 몸을 식혔다.
우물에 내 모습이 아른거렸다.
떡 벌어진 어깨에 탄탄한 가슴. 너무 우람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잘 발단된 근육. 노련한 투사의 상징인 상처가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3년.
앳된 모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대충 몸을 식히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 곰처럼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3개월 전에 왔다는 신참.
불과 3개월 만에, 그것도 전쟁 한번 치르지 못한 신참 주제에, 여섯 번째 용이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사내.
오룡을 찾아다니며 시비를 걸고 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보다.
“네놈이 칼리온이냐?”
사내가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가 나를 무서워하는 이곳에서 신참에게 반말을 들으니 제법 신선한 느낌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곰처럼 덩치가 큰 남자였다. 체구가 내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어깨에 메고 있는 투 핸드 소드는 그의 체구에 어울릴 만큼 거대했다. 덥수룩한 머리칼과 잡초처럼 자라 있는 수염. 그리고 머리칼 아래 숨어 있는, 얼굴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검상.
“내 이름은 마렉이다.”
“이름 교환이 하고 싶어서 나를 불러 세운 건 아닐 텐데.”
내 말에 마렉이 씨익 웃었다.
“다른 놈들은 모두 내 말을 무시하던데, 그나마 말이 통하는 놈이군. 마음에 들어.”
젖어서 축축해진 바지가 자꾸 달라붙어 기분이 나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수련하는 모습을 봤다. 아주 가관이더군. 겉으로만 화려한 그런 춤사위를 추는 놈이 오룡이라니. 솔직히 실망했다.”
“네놈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춘 춤이 아니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그건 그렇고 보기보다 소심하군. 덩칫값 못 하게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만 말해.”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오늘은 인사 정도만 하지. 흐흐흐!”
마렉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검상이 일그러지며 인상이 흉포하게 바뀌었다. 웃고 있었지만 눈이 차가웠다.
순간.
마렉이 등에 메고 있던 투 핸드 소드를 뽑아 나에게 휘둘렀다.
검은 나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췄다. 뒤늦게 바람이 불어와 나의 머리칼을 들었다 놨다.
마렉이란 이름의 이 남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하다.
이놈은 강하다.
투기가 끓어올랐다. 몸의 근육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주먹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마렉을 향해, 최대한 호의를 담아, 씨익 웃어 주었다.
“역시 마음에 들어. 다른 오룡들은 모두 겁쟁이들이라 너무 실망했는데 이제야 재미있어지겠어. 하하하!”
마렉은 웃음을 터뜨리며 우물가에서 사라졌다.
마렉과 헤어진 후에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내 집은 요새 광장에서 동쪽 성벽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고,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원래 집은 3년 전 괴물 거북이가 무너뜨렸다.
“젠장.”
생각해 보니 그 망할 거북이 때문에 요새 전체가 뒤집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트아르가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자고 있었다.
일부러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옷을 갈아입었지만 트아르는 여전히 코를 드르렁 골며 깨어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발끝으로 그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음……. 으음…….”
잠꼬대하듯 한참을 우물거린 끝에야 트아르가 깨어났다.
“왔냐?”
“왔냐가 아니다. 왜 자꾸 내 집에서 자는 거지?”
“매정한 놈. 요새에서 이곳이 가장 시원한 장소라고. 이렇게 좋은 곳에다 집을 지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 설마 잊은 건 아닐 테지?”
“네놈이 여관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으로 내 이름을 팔았다는 것은 잊지 않고 있다.”
돌팔매질로 하피를 쫓아낸 공로를 인정받아 나는 요새에서 가장 좋은 명당자리를 신참 주제에 얻을 수 있었다.
그때 가장 강력하게 내 편을 들어 준 사람이 바로 트아르였다.
생명의 은인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자신이 혜택을 보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는 것이 얼마 안 가 밝혀졌다.
“우리 사이에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잖아. 하하하!”
트아르가 시선을 회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보통은 이쯤에서 돌아가는 것이 순서였지만 트아르는 오늘따라 돌아가지 않고 계속 뭉그적거렸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지?”
트아르가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왜?”
“보통 놈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어리바리하던 신참이 요새 최강이라는 오룡이 될 줄이야. 역시 인생은 모르는 거야.”
“구룡이니, 오룡이니 다 말장난이란 걸 알고 있을 텐데. 어차피 이곳의 왕은 한 명뿐이니까.”
요새에서 가장 큰 건물의 주인.
요새 유일의 트리플 A, 아니 적무도에 있어 인정받을 수 없었을 뿐, 실질적으론 S 등급이라고 여겨지는 투사.
베네딕트.
“그렇지. 그놈 한 명뿐이지.”
트아르의 얼굴에 작은 원망이 스쳐 지나갔다.
투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전쟁 때마다 고군분투하는 트아르에게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의 전쟁에 출전하지 않는 베네딕트는 원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베네딕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대장이라는 호칭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얼른 본론을 다시 물었다.
“3일 후에 전쟁이 시작돼.”
……그렇군. 벌써 100일이 된 건가.
투기장에서 보내오는 몬스터와의 전쟁은 100일 간격으로 벌어졌다.
투기장 놈들은 공간이동 마법을 이용해 데려온 몬스터와 숲의 몬스터를 챰Charm 마법으로 현혹하여 요새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부탁하지.”
트아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네딕트의 영향을 받았는지 예전의 구룡을 포함한 지금의 오룡 역시 어지간해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요새가 함락되기 직전이 되어서야 귀찮다는 얼굴로 전쟁에 참여했다.
반면 나는 오룡이 되기 전에도, 오룡이 되고 나서도, 처음부터 전쟁에 참여했다.
단순히 실전 경험을 이용해 권각술을 갈고닦기 위함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로 나로 인해 인명 피해가 줄어드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트아르의 부탁은 이번에도 전쟁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목숨이 위험하면 도망칠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해.”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트아르는 평안한 얼굴로 집을 나갔다.
적무도까지 끌려온 투사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남의 목숨을 구하는 데 노력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나에게 나의 삶이 있듯 트아르에겐 그의 삶이 있을 테니까.
내 삶을 살아가는 것도 힘든 마당에 남의 삶까지 간섭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트아르의 사연을 알게 될 때가 오더라도 일부러 피해야 할 판이었다.
트아르가 나가고 적막해진 방에 앉아 마나 수련을 시작했다.
거대한 마나가 꿈틀거리며 몸속을 내달렸다. 3년 동안의 성과였고,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모든 의식을 마나의 움직임에 집중시켰다.
한밤중이 될 때까지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3일 후.
눈을 뜨니 아직 새벽이었다.
밖으로 나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기지개를 펴고 다리를 찢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다 문득 발목에 찬 족쇄가 생각났다.
3년 동안 꾸준히 무게를 늘린 덕분에 현재 족쇄의 구멍은 모두 메워진 상태였다. 즉 지금 족쇄의 무게는 처음의 다섯 배였다.
요새에 대장간이 없는 게 아쉬웠다.
거의 1년 동안 족쇄의 무게를 올리지 못했다. 지금에 와선 차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 간혹 헷갈릴 정도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3년여의 시간 동안 나와 함께해 온 나의 벗을 살폈다. 매끈거렸던 첫 모습과 다르게 표면이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여전히 단단했고, 또한 튼튼했다.
챙!
두 주먹을 가볍게 부딪쳤다.
아이언 피스트가 청아한 소리로 대답했다.
“뭘 멍하니 있어? 화살을 쏘란 말이야! 네놈 팔은 장식이냐?”
3년 전이나 지금이나 트아르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극성스러워졌다.
“하앗!”
휘익!
퍽!
동쪽 성벽 위로 올라온 몬스터 중에서 까다로운 놈들만 대충 정리한 후 북쪽 성벽을 향해 뛰었다.
“칼리온! 어디 가는 거냐?”
트아르가 내 이름을 똑바로 불러 주는 것도 3년 동안 변화된 것들 중 하나였다.
“잔챙이들은 알아서 정리해. 몬스터가 이쪽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나름 베테랑스러운 내 말에 트아르가 씨익 웃었다. 안심하는 얼굴을 보니 내가 도망이라도 치는 줄 알았나 보다.
북쪽 성벽은 숲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곳이라 항상 가장 많은 수의 몬스터가 공격했다.
도착하고 보니 동쪽 성벽보다 몇 배나 많은 수의 몬스터가 바글거리고 있었다.
휘익!
퍽!
슈웃!
퍽!
나는 빠르게 움직이며 오우거나 트롤처럼 하위 등급 투사들에게 위협이 되는 몬스터 위주로 사냥을 시작했다. 몬스터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충격을 입혀 기절시키는 등 몬스터를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식으로 사냥 속도를 높였다. 마무리는 북쪽 성벽을 수비하는 투사들에게 맡겼다.
나는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몬스터를 쓰러뜨렸다. 대부분 자신이 누구에게 당한 건지도 모를 것이다.
몬스터가 쓰러지는 속도와 몬스터가 받은 충격의 정도를 가늠하여 나의 권각술이 전에 비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체크했다.
벌써 열한 번째 전쟁이었기에 긴장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숨도 거의 차오르지 않았다.
기계적일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몬스터를 쓰러뜨리다 보니 금세 목표했던 몬스터를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이럴 수가!”
“괴, 굉장해! 순식간에 오우거를 쓰러뜨렸어!”
“역시 오룡이야!”
경이로운 얼굴로 환호를 지르고 있는 투사들을 뒤로하고 서쪽 성벽을 향해 달렸다.
서쪽 성벽과 남쪽 성벽의 몬스터를 정리하고 다시 동쪽 성벽으로 돌아오니 그제야 조금 숨이 차올랐다.
전쟁은 압도적으로 투사 쪽이 유리했다.
괴물 거북이에 의해 많은 투사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투기장은 금방 새로운 투사를 보충했다. 하지만 전쟁을 경험해 본 베테랑 투사의 수가 급감했기 때문에 신참을 이끌어 줄 사람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그로 인해 처음 1년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적무도에 온 신참 대부분이 첫 번째 전쟁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뿐만 아니라 요새도 두 번이나 함락될 뻔했다.
그러한 고난을 겪으며 성장한 이들이 바로 지금의 투사들이었다. 강할 수밖에 없었다.
요새의 투사들이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나란 존재 때문이었다.
요새에 살고 있는 투사의 수는 평균적으로 600〜700명 정도였다. 그리고 투기장의 목표는 매전쟁 때마다 투사의 수를 100〜150명 정도씩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투기장은 대략 그 정도 숫자가 죽어 나갈 만큼 몬스터의 종류와 수를 조절했다.
하지만 나란 존재로 인해 투기장의 계획은 번번이 물거품이 되었다.
투사의 수를 줄여 줄 강력한 몬스터를 내가 쓸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는 투기장 입장에선 밸런스 파괴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해파리 모양의 눈알이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었다. 그만큼 나는 투기장에 있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네딕트나 다른 오룡들처럼 얌전히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요새의 투사 수가 역대 최대를 돌파했다고 시시덕거리던 트아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은 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하는 짓이지만 마치 트아르를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아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쿵!
쿵!
“왔구나. 이번엔 무엇이지?”
요새의 전쟁은 말만 전쟁일 뿐 투기장의 경기와 비슷했다. 관객의 재미를 위해 처음에는 약한 놈을, 그런 후 단계별로 위험수위를 높이고 종국엔 조금은 벅찬 놈을 보내 대량 학살과 함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이다.
쿵!
쿵!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숲 속에서 성벽만 한 높이를 가진 인간 형태의 인형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헉! 골렘이다!”
“스톤 골렘Stone Golem이다!”
투사들이 경악했다.
골렘은, 그중에서도 스톤 골렘은 몬스터가 아니라 공성 병기로 쓰이는 일종의 전쟁 무기였다.
몬스터가 아니라 아예 공성 병기를 보내다니.
투기장 놈들이 제법 작정한 듯했다.
스톤 골렘으로 성문이나 성벽을 부수고 몬스터를 쏟아부을 속셈이 분명했다. 소수의 강력한 몬스터가 나에게 제압당하니 아예 양으로 밀어붙이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스톤 골렘이 성문이나 성벽 둘 중의 하나만 부술 수 있다면 투기장 놈들의 계획은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젠장…….”
트아르가 침음성을 삼켰다.
“칼리온, 어쩌지?”
“왜 나를 보는데?”
“지금이야말로 오룡이 등장할 때잖아.”
“그럼 여태까지 날뛴 건 뭔데?”
트아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헛소리 말고 저놈의 약점이나 알려 줘.”
트아르는 전직이 무엇인지 의심될 만큼 아는 것이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싸움질로 평생을 살아 무식한 사람이 대부분인 투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놈이었다.
내 말에 트아르가 반색을 했다.
“골렘은 마나석으로 만든 코어를 이용해 만들지. 저놈 몸에 주먹만 한 크기의 코어가 박혀 있을 거야. 그것을 부수면 돼.”
“그게 어디 있는데?”
“그야…… 나도 모르지.”
“지금 장난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저 커다란 놈을 잘게 부숴서 코어의 위치를 확인하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사납게 노려보자 트아르가 목을 움츠렸다.
“…….”
무언의 긍정.
“젠장! 네놈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북쪽 성벽을 향해 뛰어갔다.
성벽만 한 크기의 골렘 몸 안에 있는 코어를 찾으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언을 하다니.
나는 북쪽 성벽에 도착할 때까지 트아르에게 욕을 퍼부었다.
와아!
“굉장한 놈이다!”
“믿을 수가 없군!”
걸음을 멈췄다.
북쪽 성벽의 분위기가 예상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절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충격을 받았으리라 여겼던 곳에서 함성이 일고 있었다.
“뭐지?”
나는 황급히 북쪽 성벽으로 달려갔다.
투사들이 성벽에 기댄 채 요새 밖을 보며 누군가를 응원하고 있었다.
투사들 틈새를 파고들어 요새 밖을 살폈다.
곰 같은 체구의 사내 한 명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트아르의 조언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이얏호!”
쾅!
골렘의 왼쪽 엄지발가락이 부서졌다.
“하압!”
쾅!
골렘의 무릎, 배, 어깨를 차례로 밟고 올라가 오른쪽 귀를 박살 냈다.
코어를 찾기 위해 날뛰고 있는 것이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표정이 너무 생생했다. 파괴 그 자체를 즐기는 얼굴이었다.
쾅!
와아아!
골렘의 몸뚱이가 부서질 때마다 구경하고 있던 투사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우연이라고 확신한다, 마렉의 검이 왼쪽 눈알에 숨어 있던 코어를 베었다.
콰과광!
실 끊긴 인형처럼 한순간에 골렘이 무너져 내렸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와아아아아!
함성이 요새를 뒤흔들었다.
“마렉! 마렉!”
“마렉!”
“마렉!”
투사들이 골렘 슬레이어의 이름을 연호했다.
마렉이 요새의 여섯 번째 용으로 추대되는 순간이었다.
스톤 골렘을 쓰러뜨리고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근처의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마렉을 보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또 한 마리의 용을 탄생시킨 열 번째 전쟁이 막을 내렸다.
* * *
전쟁이 끝나면 축제가 벌어진다.
투사들의 축제는 술과 음식과 노래가 있는 평범한 축제가 아니다. 환희와 광기가 공존하는 피의 축제였다.
발작한 간질 환자 같은 축제가 끝나면 그다음 순서는 요새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시체를 요새 밖에 내다 버리고, 피를 닦는다. 부상자는 치료하고, 부서진 곳은 수리한다.
얼추 전쟁 전의 모습을 되찾으면 그때부터는 죽어라 수련하는 일만 남았다. 다음 전쟁 때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이때까지 대략 보름쯤 걸린다.
물론 오룡, 아니 이제는 육룡에 속하는 나는 복구 작업에서 제외된다.
전쟁 때처럼 복구 작업을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가 복구 작업에 힘을 쓰고 있는 보름이라는 시간.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귀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텅 빈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연무장은 적막에 가까울 만큼 조용했다.
연무장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몸을 움직였다.
투사들이 있을 때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동작이 움츠러들었었다. 수련의 특성상 다른 투사들을 공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이 편하니 평소보다 몸놀림이 훨씬 빨라졌다.
오우거를 쓰러뜨리고, 외눈박이 거인인 사이클로프스Cyclops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오크의 머리를 부수고, 하피의 날개를 꺾었다.
“헉……. 헉…….”
모든 적을 쓰러뜨리고 눈을 뜨니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모처럼 만족스러운 수련이었고, 기분이 무척이나 상쾌했다.
우물에서 물 몇 바가지 뒤집어써 먼지를 대충 씻어 낸 다음 배식하는 곳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왜 이것밖에 안 줘!”
“내 스튜에는 건더기가 하나도 없잖아! 국물만 먹으란 소리냐!”
“이걸론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배식을 하는 곳이 꽤나 소란스러웠다. 투사들이 스튜 냄비 앞에 모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시끄러! 닥치고 그냥 주는 대로 처먹어!”
요리 담당 투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뭐야? 지금 나한테 처먹으라고 한 거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뒈지는 수가 있어.”
“한번 해보자는 거냐?”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챙!
챙! 챙!
투사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흉흉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대치하고 있는 투사들 사이로 걸어갔다.
“헉! 오, 오룡, 아니 육룡이다!”
마치 썰물이 빠지듯 투사들이 옆으로 물러섰다. 자연스레 흐지부지 싸움이 중단되었다. 검을 뽑았던 투사들이 혼란을 틈타 은근슬쩍 검을 집어넣었다.
생각해 보니 두세 달 전부터 이런 다툼이 잦아지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결국 가장 쉬운 방법으로 내 의중을 투사들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인상을 쓰며 살기를 일으켰다. 그러곤 천천히 투사들을 둘러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투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경고해 뒀으니 당분간은 잠잠할 것이다.
조용한 침묵 속에 배식이 다시 시작되었다.
빵과 과일을 하나씩 들고 나무 그늘로 향했다.
빵과 과일을 먹고 그늘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머리맡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찾았다.”
굵은 목소리였다.
쓰윽.
검은 그림자가 내 몸을 덮었다.
누운 자세 그대로 눈을 치켜떴다. 푸른 나뭇잎 한가운데 마렉의 얼굴이 있었다.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 다니는구나. 나와 부딪치는 게 그렇게 무서웠냐? 크크크!”
마렉이 웃으며 말했다. 얼굴의 검상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렉과 마주 보고 섰다.
뿜어내는 기세를 봤을 때 결코 나의 아래가 아니었다. 공성 병기인 스톤 골렘을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투 핸드 소드로 때려 부수는 놈이었다.
그래도 왠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나도 작은 키는 아니었건만 마렉은 그런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올려다보고 있자니 목이 아팠다.
“여기서 한판 붙을까? 아니면 좀 더 조용한 곳으로 갈까? 그래도 오룡이라고 불렸던 놈인데 다른 놈들이 보는 앞에서 개박살 나면 쪽팔리겠지.”
마렉이 씨익 웃었다.
나도 씨익 웃었다.
쿵!
나는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방심하고 있는 마렉의 배에 주먹을 먹였다.
“컥!”
기습적인 일격에 그는 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굽혔다.
“이제야 눈높이가 같아졌군.”
“갑자기…… 무슨…….”
“싸우고 싶으면 샌님처럼 물어보지 말고 그냥 선빵을 날리라구. 우리는 투사잖아.”
나는 마렉을 향해 한 번 더 씨익 웃어 주었다. 그러곤 팔꿈치로 마렉의 턱을 올려쳤다.
퍽!
뇌가 진탕 흔들렸을 것이다.
마렉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실이 끊긴 인형처럼 그의 몸이 철퍼덕 넘어갔다.
주변에 있던 수십 명의 투사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우리 쪽을 바라봤다.
“쪽팔리게 해서 미안하군.”
마렉에게 정중히 사과한 후 광장을 떠났다.
다시 연무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연무장에 도착할 즈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칼리온!”
트아르였다.
“찾았잖아.”
“왜?”
이놈과 엮이면 귀찮은 일만 생긴다. 이번에도 그랬다.
“부탁이 있는데.”
“바빠.”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아직 듣지도 않았잖아.”
“안 들어도 돼. 어차피 거절할 거니까.”
나는 트아르를 무시한 채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트아르가 나의 무시를 무시하며 졸졸 따라왔다.
“그래도 일단 들어 봐. 들어 보면 생각이 바뀔 거야.”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트아르가 장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트아르의 말을 요약하면.
첫째, 요새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이다.
둘째, 하지만 두 달에 한 번 투기장에서 생활필수품과 무기와 곡식을 보내 준다.
셋째, 일주일 후가 그날이다.
“……그래서 네가 가 주었으면 한다.”
“귀찮아.”
그러고 보니 농사도 짓지 않는 곳에서 매일 빵이 나오고, 고기에 제대로 향신료가 뿌려져 있는 게 신기하긴 했었다.
3년 동안이나 그 사실을 몰랐다니.
아니,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내 머릿속은 온통 수련 생각뿐이었으니까.
“그 물품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면 너도 곤란할 텐데. 잘못하면 빵이나 향신료 없이 살아야 할지도 몰라. 어때? 무섭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아무 사고 없이 잘 가져왔잖아. 새삼스레 왜 그래?”
내 지적에 트아르가 난처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게…….”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은…… 지난번에 가져온 물품의 양이 형편없이 적었어. 물품을 운반한 투사들 말로는 원래부터 양이 적었다고 하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모두 물품을 운반한 놈들이 빼돌렸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도 그럴 게 작년부터 그놈들이 가져오는 물품의 양이 조금씩 줄어들었거든. 그러다가 이번에 눈에 띌 만큼 양이 준 거지. 그것 때문에 배식의 양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요즘 요새의 분위기가 흉흉해. 게다가 계약 기간이 만료된 투사들을 대륙으로 옮겨 주던 투기장의 배도 약속한 날짜가 몇 개월이나 지나도록 오지 않고 있어.”
배식 문제로 싸우는 일이 많아졌지만 식량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 줄은 몰랐다. 단순히 더 많이 먹고 싶어 하는 투사들의 욕심 때문인 줄 알았다.
모를 수밖에 없었다. 식량은 항상 오룡에게 먼저 지급되었기에 식량의 부족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륙으로 귀환해야 할 투사들이 걱정과 불안에 떨고 있어. 투기장이 게임의 룰을 바꾼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진짜로 우리를 전부 말려 죽일 셈이거나 아니면 우리끼리 자멸하는 꼴을 구경하고 싶어진 건지도 모르지. 우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승리한 탓에 손님들이 떨어져 나갔을 테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정상 배가 늦을 수도 있잖아.”
“느낌이 좋지 않아. 증거가 있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요즘 들어 섬의 안개가 점점 더 붉어지고 있어. 예전에는 그냥 불그스름한 정도였지만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붉은 핏빛이야. 그리고…….”
트아르의 얼굴이 더욱더 심각해졌다.
“섬의 몬스터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점점 포악스럽게 변하고 있어. 사실 어제 사냥을 나간 자들 중 한 명이 죽었어. 짐승들이 습격했다고 하더군. 믿어져? 몬스터도 아니고 짐승이, 그것도 무리 지어 사냥 나온 투사를 공격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아니,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짐승 따위에게 요새의 투사가 죽는다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일까?”
황금 털 원숭이에게 습격당해 본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었지만 황금 털 원숭이는 사실 짐승보다는 몬스터 쪽에 가까운 놈이었다.
트아르가 말하고 있는 짐승은 그런 놈이 아닐 것이다. 평소에 고기를 제공해 주던 진짜 짐승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몬스터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투사가 짐승에게 물려 죽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방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아. 만약 투기장이 의도적으로 물품의 양을 줄이고 배도 보내지 않은 채 섬에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조만간 큰 위험이 닥칠 거야. 불길해. 그러니 네가 물품을 가지러 가 주었으면 싶어. 물품의 양이 정말로 줄고 있는 건지 아니면 운반하는 놈들이 빼돌린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트아르의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일 수도 있었다. 위기가 닥쳤다고 판단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트아르의 부탁을 수락했다.
트아르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조만간 요새를 떠나야 하는 몸이었다.
적무도에 오면서 받았던 카렌의 지령.
-재주껏 살아남아. 기한은 3년.
그 3년의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남은 기한은 앞으로 두 달 남짓이었다.
카렌의 지령에는 기한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3년 안에 호엔레른 백작가로 돌아오라는 것인지, 아니면 3년 안에 적무도로 데리러 온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두 가지 경우를 모두 고려해야 했다.
자타르 왕국의 투기장에서 적무도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한 달 정도였다.
신참을 내려 주고 계약이 만료된 투사들을 데려가는 배가 6개월에 한 번씩 오니 이번에 오게 될, 약속 날짜를 어기고 있는 배가 도착하기 전에 카렌이 오지 않으면 나 스스로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탈출 계획은 간단했다.
투기장의 배에 잠입하는 것. 수틀리면 배를 점거하는 방법도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런 허술한 계획을 짜고 있는 찰나에 전혀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되었다. 그동안 몰랐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두 달에 한 번 투기장에서 보내 주는 지원 물품이 바로 그것이었다.
트아르의 말에 따르면 전쟁 때 몬스터를 소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지원 물품이 옮겨진다고 한다. 만약 공간이동 마법을 시전하는 그 마법사만 생포할 수 있다면 적무도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언제, 어느 때라도 가능할 것이다.
충분히 해 볼 만한 도박이었다.
트아르가 홀가분한 얼굴로 사라지고 난 후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투기장에서 보내온 물품을 가지러 가는 동안에는 제대로 된 수련을 하지 못할 테니 그 전에 많이 해 놓고 싶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노을이 하늘을 노랗게 물들였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이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비가 내릴 듯싶었다.
수련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무장을 나가려는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마렉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만큼 낯선 눈이었다.
호탕함과 장난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눈. 그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푸른 빛깔의 불꽃.
“따라와라.”
마렉은 연무장을 나가려고 하는 나를 다시 연무장으로 끌고 갔다.
“아까는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목소리.
그는 투 핸드 소드를 꺼내 나를 노렸다. 눈빛이 결연했다. 눈동자 너머로 강한 의지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본심이었다.
마렉의 마음이 본심임을 알기에 이번에는 나 역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뜨거운 마음이 나를 들뜨게 하였다.
“아까와는 다를 것이다. 경고하지. 최선을 다해라.”
“기분이 내키면 그러지.”
마렉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쉬었다. 나는 온몸에 힘을 뺀 채 팔을 늘어뜨렸다.
적막이 흘렀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선이 부딪쳤다.
나도, 마렉도, 상대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눈과 눈이 부딪치고 기세와 기세가 뒤엉켰다.
2차전이 시작되었다.
마렉은 거대한 크기의 검을 질질 끌며 다가왔다. 마렉의 뒤로 일직선의 끌린 자국이 생겼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몸이 죽 늘어난 것처럼 앞으로 뻗어 나왔다.
사람 몸통만 한 투 핸드 소드를 든 채 이런 움직임이라니.
그의 말처럼 아까와는 달랐다. 조금의 방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렉은 달려오던 힘을 이용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쳤다. 그대로 내 몸을 동강 낼 기세였다.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검에 담긴 기운이 폐부를 짓눌렀다.
나는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부웅!
목표를 잃은 검이 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검을 크게 휘두른 직후라 마렉의 몸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나는 그의 발목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마렉은 뒷걸음질 치며 헛손질한 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얼른 손실을 따져 본 뒤 공격을 포기했다.
나는 기껏 해야 발목뼈를 부러뜨리는 정도지만 마렉의 검은 내 허벅다리를 잘라 낼 게 분명했다.
마렉은 덩치에 걸맞게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검술을 구사했다. 그는 보기만 해도 무거운 투 핸드 소드를 한 손으로 휘둘렀다. 게다가 그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공격과 공격 사이의 공백도 별로 없었다.
부웅!
부웅!
나는 살짝살짝 몸을 움직여 검을 피했다.
검이 옆을 스치고 지날 때마다 검풍에 머리칼이 휘날렸다.
한차례 격돌 후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칫! 한 방 거리도 안 되는 놈이 쥐새끼처럼 날래구나.”
한 방 거리라…….
쓸모없는 호승심이 도졌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콱 주었다.
챙!
두 주먹을 부딪친 후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을 테니 정면으로 붙어 보자. 네가 얼마나 센지 내게 한번 보여 줘 봐.”
자존심이 상한 듯 마렉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후회하지 마라!”
휘오오오!
거센 바람이 마렉을 감쌌다.
휘익!
마렉이 응축된 공기를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섬뜩한 기운이 나에게 쏟아졌다.
나는 두 팔을 X 자로 교차시켜 얼굴을 막았다. 약속대로 몸으로 받아 낼 심산이었다.
사서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멍청한 짓이란 말인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맹렬히 비난하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쾅!
팔이 저릿저릿했다.
충돌한 기운이 먼지구름을 만들었다. 먼지 장막을 뚫고 마렉이 날아왔다. 그의 검이 푸르스름한 빛을 뿌렸다.
마나를 주먹에 집중했다.
피부 아래 숨어 있던 아티팩트가 피부를 뚫고 올라왔다.
오른손에 힘을 준 후 그대로 휘둘렀다.
쾅!
주먹과 검이 부딪쳤다.
부딪친 자리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샥!
아이언 피스트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리고…….
쾅!
이어서 다크섀도우와 검이 충돌했다.
파샥!
이번에는 검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파파팟!
금속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워낙 가까운 거리라 파편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파편이 살을 찢었다.
마렉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파편을 피해 뒤로 후퇴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반대로 파편의 영향력 안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차이였지만, 결정적인 차이였다.
순간 마렉의 허리춤에서 단검이 폭사되었다.
나는 몸을 교묘하게 비틀어 단검을 피했다.
비장의 한 수가 허무하게 실패하자 마렉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그 대가로 놈의 얼굴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재미있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으로 마렉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휴우…….”
옷이 폭발의 여파로 완전히 누더기가 되었다.
어느새 모여든 투사들이 거의 알몸과 다름없는 나를 쳐다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오룡이 싸운 건 처음 봐.”
“오룡이 아니라 육룡이지.”
“어찌 됐건 부딪칠 때마다 쾅쾅 울리는 게 박진감 끝내주는데!”
“검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는 것은 또 어떻고!”
“연무장이 아주 박살이 났어. 과연 요새 최강이라 불리는 육룡이야.”
나는 자리를 떠났다.
투사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알몸으로 집까지 돌아왔다.
과거에 한차례 경험이 있었기에 그리 창피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후두둑!
문을 닫는 순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엎어져 있을 거구의 사내가 문득 떠올랐다. 감기 걱정을 해 줄 사이도 아니었기에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달궈진 피가 좀처럼 식지 않았다.
마렉과의 싸움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이겼지만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훨씬 더 쉽고, 훨씬 더 안전하게 이길 수 있었건만 쓸데없이 정면 승부를 하고 말았다.
덕분에 아이언 피스트가 부서지고, 파편에 베인 상처가 말도 못 하게 쓰라렸다.
좀 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었다. 좀 더 완벽해질 필요가 있었다. 나를 파멸로 몰고 가고자 하는 운명과 맞서기 위해서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쏴아아!
빗줄기가 시원스럽게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