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공방전
다음 날 아침 일찍 트아르가 찾아왔다.
“거기서 뭐 해?”
트아르는 지붕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곤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보름달이 너무 아름다워서.”
암습을 막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말할 수 없어 보름달 핑계를 댔더니 어린놈이 꼴값한다고 어이없어한다.
“숲에서 많이 시달린 듯해서 오늘까지는 쉬게 해 주려고 했더니 헛소리하는 것을 보니 괜찮은 듯하구나. 오늘부터 네가 할 일을 알려 줄 테니 따라와.”
사실 괜찮지 않았다.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과 팽팽한 긴장 덕분에 잊고 있었던 아픔이 요새에 오자마자 흐물흐물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대로 편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그 결과 그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고통이 한 번에 폭발했다. 마치 호엔레른 백작가의 연무장에서 받았던 말뚝의 형벌을 받고 난 직후처럼 근육은 물론 뼛속까지 시큰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고 트아르를 따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서 시작한 찌릿한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끝까지 기어 올라왔다. 불에 지진 듯 온몸이 화끈거렸다.
“헉, 헉…….”
단지 걷고 있을 뿐인데도 입에서 단내가 풍기고,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아침 햇살이 한여름 뙤약볕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눈앞이 아찔하고, 멀미가 날 만큼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트아르의 뒤를 쫓아갔다. 나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트아르가 걸음 속도를 조금 늦춰 주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요새 동쪽에 위치한 성벽이었다.
성벽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수십 명의 투사들이 나무와 돌로 구멍을 메우고 있었다.
그 옆쪽으로 역시 수십 명의 투사들이 나뭇가지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있었다.
투사들의 얼굴이 진지했다.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흡사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트아르에게 물었더니 트아르의 표정이 여태까지와 다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전쟁이라도 준비하냐고? 당연히 전쟁 준비지. 그럼 이게 무엇으로 보이는 거지?”
약간은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흥분을 가라앉힌 트아르가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알려 주는 게 낫겠군. 3일 후 우리는 섬의 몬스터들과 전쟁을 치른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섬의 몬스터?”
“직접 보면 알 수 있으니까 일단은 그렇게만 알고 있어. 어차피 우리 같은 아래 등급은 후방 지원이나 하니까 그냥 시키는 것만 잘하면 돼. 신참, 너는 아직 몸이 안 좋으니 오늘은 일하지 말고 요새를 돌아다니면서 얼굴도장이나 찍어 놔. 그리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좀 외워 놓고.”
말을 마친 트아르는 구멍 난 성벽을 복구하는 일을 시작했다.
나는 그늘을 찾아 그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휴식을 취하며 사람들이 하는 일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벌써 몇 번씩이나 해 본 사람들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일의 역할 분담도 잘되어 있어 힘센 사람이 바위나 통나무를 들고 오면, 망치와 도끼를 들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적당한 크기로 부수거나 잘랐다. 그리고 그렇게 다듬어진 바위나 통나무를 이용해 뻥 뚫린 구멍을 메웠다.
다른 한쪽에선 화살을 만들거나, 칼날을 가는 등 무기 손질이 한창이었다.
거친 농담이 오고 가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지만 웃음소리가 메말라 있었다. 습관적으로 웃는 것에 불과했다. 투사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몸이 좀 괜찮아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아르의 말처럼 요새를 기웃거리며 지형과 투사들의 얼굴을 익혔다.
눈대중으로 헤아린 투사들의 수는 대략 500명에 가까웠다. 집 안에 있거나 길이 엇갈려 보지 못한 사람까지 고려하면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요새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기에 제법 북적거리는 느낌이었다.
낯선 얼굴로 돌아다니는 내가 누군지 궁금했는지 투사들이 흘끔흘끔 나를 쳐다봤다.
몇 명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새로 왔다고 말해 줬더니, 반은 반갑다고 하고, 나머지 반은 불쌍한 놈이라고 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 배식으로 나눠 주는 빵을 받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의 위치를 확인해 퇴로를 확보한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적무도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해 보는 마나 수련이었다.
아이언 피스트를 벗은 후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잠잠했던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가슴속 깊은 곳에서 파문이 일었다.
슈욱!
다크섀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숨을 내쉬며 마나의 흐름을 끊었다.
스르륵!
다크섀도우가 손 안쪽으로 녹아들었다.
오랜만에 하는 수련이라 그런지 마나의 움직임이 거칠고 투박했다. 다크섀도우의 깜박임 역시 느렸다.
정신을 집중하고 수련에 빠져들었다.
슈욱!
스르륵!
슈욱!
스르륵!
모든 의식을 마나 수련에 집중시켰다. 잡생각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그렇게 무無의 세계로 침잠하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밤이 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배가 난리를 쳤다. 점심때 받아 놓은 빵이 발치에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빵을 먹으며 가부좌를 풀었다.
뼈마디에서 뚝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온몸이 뻐근하고 무거웠다. 하지만 시큰거리던 고통은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빵을 다 먹은 후 집을 나왔다.
요새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성벽에서 요새 밖을 정찰하는 투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적막했지만 평화롭지는 않았다. 폭풍 전야처럼 긴장감을 품고 있는 밤이었다.
지붕으로 올라가 대자로 누워 하늘을 쳐다봤다. 수천만 개도 넘는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요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보였다. 왕궁을 개조해 만든 베네딕트의 집이었다.
5층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베네딕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짝 창가에 서서 요새를 바라보기도 했다.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 고심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소풍 전날 들떠 있는 아이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베네딕트와 눈이 마주쳤다. 스쳐 지나가듯 아주 짧은 마주침이었다.
찌릿!
물속에서 라이트닝 볼트를 터뜨렸을 때처럼 몸에 전류가 흘렀다. 살기를 전혀 담고 있지 않은 무심한 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트가 방의 불을 껐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방 안의 짙은 어둠 속 어딘가에 베네딕트가 서 있음을.
나는 지붕을 내려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베네딕트의 눈빛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트리플 A 등급이라…….”
투기장의 실질적인 최고 등급이었다. 하지만 휴멜보다는 약할 것이 분명했다.
휴멜보다 약한 상대에게 기가 죽었다는 사실에 갑자기 분통이 터졌다.
잠자고 있던 투지가 끓어올랐다.
나는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나 수련 겸 치료를 시작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신참! 빨리 나오지 못해!”
트아르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몸이 아파서 쉬어야겠어.”
“여기가 무슨 평화로운 시골인 줄 알아?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단 말이다! 기어 나와서 바닥이라도 쓸어!”
트아르의 말대로 하는 것은 쉽다. 다시 말해 바닥을 청소하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몸을 전쟁이 있기 전까지 회복시키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몸이 아프다니까.”
“어제는 잘만 걸어 다녔잖아!”
“그래서 몸이 탈 난 거 같아.”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계속 말했다.
쾅!
“신참 주제에!”
트아르가 문을 걷어찬 후 씩씩거리며 사라졌다.
이로써 요새에서 나를 챙겨 줄 유일한 보호자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트아르를 보호자로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 나를 챙겨 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마나를 일으켰다.
점심 무렵이 되자 배가 미친 듯이 고팠다. 그러고 보니 어제, 오늘 합쳐 빵 하나밖에 먹지 못했다.
꼬르르륵!
위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음식을 요구했다.
배식을 하는 곳으로 가 점심 메뉴인 스튜를 투박한 나무 그릇에 담으려 하는데 요새의 요리를 맡고 있는 홀쭉한 인상의 빼빼 마른 투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못 보던 얼굴인데. 네놈 이름이 혹시 칼리온이냐?”
“그런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트아르에게 들었지.”
“그렇군.”
나는 대답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국자에 스튜를 퍼 그릇에 담았다.
순간.
휘익!
퍽!
요리사의 국자가 나의 그릇을 향해 날아왔다. 기습적인 일격이었다.
그릇이 허공에 떠올랐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연히 그릇에 담겼던 스튜 역시 바닥에 다 쏟아졌다.
“무슨 짓이냐!”
두 번째 공격에 대비해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쳤다.
“낄낄! 제법 몸이 잽싼데.”
“저놈이었군. 트아르가 재수 없는 신참이라고 욕을 하던 놈이.”
주변에 있던 투사들이 나를 비웃었다.
요리사가 국자로 나를 가리키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배식을 받기 위해 모인 100여 명이 넘는 투사들이 조롱 섞인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도와주려고 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난리를 칠 것인가 궁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사이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트아르의 얼굴을 발견했다.
아아…….
그렇게 된 것이군.
나는 단번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원흉은 트아르였다.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트아르가 꾸민 일이 분명했다.
나는 난리를 치라고 요구하는 모두의 기대를 배신했다.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헤이! 겁쟁이!”
“그냥 도망치는 거냐?”
“에잇! 김샜네.”
뒤에서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요새 중앙에 위치한 광장에 있는 연못에서 배가 부를 때까지 물을 퍼마셨다.
집으로 돌아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배가 미친 듯이 꼬르륵거렸다.
“며칠 굶는다고 안 죽어. 그러니 조금만 참아.”
오른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타일러 봤지만 꼬르륵 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길게 한숨을 쉰 후 마나 수련을 시작했다.
꼬르륵 소리 때문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지만 한 번 집중이 되자 자연스럽게 배고픔이 사라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쾅! 쾅!
“야, 이 새끼야! 빨리 튀어나오지 못해!”
시끄러운 소리에 깊이 가라앉아 있었던 의식이 서서히 떠올랐다. 일순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쾅!
쾅! 쾅!
“오늘도 아프다는 핑계로 안 나오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트아르는 문짝을 부술 기세였다.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둑!
뚜두둑!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 몸을 풀었다. 근육과 뼈마디가 시원했다. 크게 기지개를 켠 뒤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주먹을 뻗었다.
아직 최고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한 기분이었다. 몸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진짜 문을 안 연다 이거지? 후회하지 마라!”
문밖에서 은은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트아르가 문을 부수기 전에 얼른 문을 열었다.
때마침 주먹을 뻗으려 자세를 잡던 트아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한 나의 모습에 트아르가 폭발했다.
“죽어!”
트아르는 멈췄던 움직임을 재개했다. 다만 목표를 문짝에서 나의 얼굴로 바꿨을 뿐이다.
물론 진심으로 나를 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의 공격이었기에 고개를 까딱 움직이는 것만으로 트아르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신참 주제에 가, 감히 내 공격을 피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이었나 보다.
휙!
회익! 훼엑!
정권 지르기, 앞차기, 돌려차기, 이단 옆차기, 눈 찌르기…….
“헉, 헉……. 이 쥐새끼 같은 놈…….”
혼자 난리를 부리다 지쳐서 나가떨어진 트아르가 숨을 헐떡대며 나를 노려봤다.
“무슨 일이지?”
자신에게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트아르가 공격을 포기하고 애꿎은 바닥만 걷어찼다.
“그걸 몰라서 물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얘기해 줬잖아? 오늘마저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다고 했다가는 그대로 요새 전체의 투사들에게 공적으로 몰리게 될 거야. 그게 불쌍해서 이 몸이 친히 찾아왔건만 감사하다고 절은 못할망정 …….”
“오늘이 무슨 날인데?”
“허! 정말 모르고 있잖아. 하긴…… 너처럼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지. 신참의 경우 정작 시작되기도 전에 과도한 긴장으로 미쳐 버리는 놈도 있거든. 어쨌든 오늘은 나를 따라와야겠다.”
트아르의 모습이 진지해 보여 따라갈까 하다가 넌지시 튕겨 보았다. 마나 수련을 조금만 더 하면 몸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는 미련도 조금 남아 있었다.
“조금 이따 가지. 아직 몸이…….”
“지금 당장 따라와야 돼. 이번에도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도망치면 밥 굶는 것 정도로 끝나진 않을 거야.”
트아르가 나의 말을 자르며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이전처럼 장난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은은하게 살기를 품고 있는 목소리였다.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아 주변을 훑어보니 오가고 있던 투사들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단체로 달려들 정도로 저돌적이고 전투적인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따라가지. 잠깐 기다려.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요새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지급받은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으며 곁눈질로 창문 너머 거리를 살폈다.
트아르와 함께 온 것이 분명한 투사들뿐만 아니라 우연히 집 앞을 지나가는 투사들 역시 살기등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나를 해코지하기 위함이 아닌 듯했다. 요새 전체가 위험한 무언가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
트아르를 따라 요새를 구경했던 날 그에게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전쟁.
몬스터와의 전쟁.
“……분명 3일 후라고 했었지.”
마나 수련에 빠져 시간개념이 분명치 않았지만 시간상으로 봐서 오늘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트아르의 살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의 겁쟁이는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지만 전쟁이 벌어지고 나서의 겁쟁이는 적과 마찬가지였다.
아직 어떤 전쟁이고, 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싸움이 될지, 의미 있는 싸움이 될지 확인이 필요했다.
트아르를 따라 동쪽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 한가운데 커다랗게 뚫려 있었던 구멍이 나름 튼튼하게 메워져 있었다.
투사들이 성벽을 바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화살과 창 같은 무기를 성벽 위로 나르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투사들인 만큼 겁에 질린 자는 없었다. 모두 살기와 투기를 뿌리고 있었다. 공기 중에 응축된 투기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꿈틀거렸다.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이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조차 덩달아 투기가 끓어올랐다.
나의 달라진 기세에 놀랐는지 트아르가 한 발 옆으로 물러섰다.
“완전 겁쟁이는 아니었군.”
트아르는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겁에 질린 내 모습을 보고 싶었나 보다.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게 안 보여? 가만히 있지 말고 몸을 움직여!”
“그 전에 뭐 좀 먹을 수 있을까? 배가 고파서 참기가 힘드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예외는 없어.”
“빡빡하긴.”
나는 주린 배를 감싼 채 화살 더미가 쌓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참!”
뒤를 돌아보니 트아르가 헝겊 주머니를 던졌다.
공중에서 잡아챈 뒤 내용물을 살폈다. 헝겊 주머니 가득 육포가 들어 있었다.
“마지막 만찬이 될지도 모르니까 인심 한번 쓰지.”
트아르가 멋있는 척 폼을 잡았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맙군.”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뒤 화살 더미를 나르기 시작했다.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투덜거리며 트아르가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 아래의 화살을 성벽 위로 나르고 있는데 요새 밖을 바라보며 고심하고 있는 트아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주변의 투사들에게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다시 요새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트아르는 B 등급 투사였다. 요새 전체로 봤을 때는 최하위 등급이나 다름없었다. 요새에서 가장 낮은 등급은 C 등급이었다.
그런 트아르였지만 아무도 트아르를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트아르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지금도 그렇다. 트아르의 심부름을 해 주고 있는 투사는 보다니스란 이름의 A 등급 투사였다.
투사에게 실력은 곧 법이었고, 그 실력을 분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등급이었다. 따라서 하위 등급의 투사가 상위 등급의 투사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의미였다.
트아르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트아르에게 상위 등급 투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몬스터와의 전쟁이 상위 등급 투사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릴 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화살을 다 옮기고 난 후 더 이상 할 일이 없자 성벽에 기대 육포를 씹어 먹었다. 다른 투사들도 자신들의 무기를 손질하거나 초조한 얼굴로 서성거렸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투사들이 한 명, 한 명 입을 다물었다.
요새는 전염병이 번지듯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휘이잉!
숲에서 불어오는 삭막한 바람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육포를 다 먹을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숨이 죌 듯한 침묵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성벽에서 가장 높은 감시탑에 있던 투사가 소리쳤다.
“온다!”
침묵이 거짓말처럼 깨어졌다. 공기 중에 첩첩이 쌓여 있던 투기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감시탑의 투사가 침묵을 깨뜨리는 순간 요새 위로 거대한 붉은 구슬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해파리 모양의 눈알이었다. 요새 위에 떠 있는 눈알의 수는 자그마치 수십 개에 달했다.
눈알에서 흘러나오는 끈적이는 마나가 몸에 달라붙었다.
마나를 떨쳐 내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 머리맡에서 트아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용없어. 게다가 해로운 마법이 아니니까 그냥 참아.”
“저 눈알은 뭐지?”
“일종의 원거리 송신 마법이랄까. 투기장에 오는 것을 꺼리는 귀족이나 상인들을 위해 특별하게 개발된 마법이라고 하더군. 수신용 구슬을 이용해 집에서 감상하는 거지.”
“그 말은…….”
“그래. 투기장에서 싸우는 것과 똑같은 거지. 구경하는 놈들만 눈알 너머에 있을 뿐. 자, 받아.”
나는 트아르가 던져 주는 활을 받았다. 종류를 알 수 없는 뼈로 만든 활이었다.
“활은 쏠 줄 알아?”
“쏴 본 적 없는데.”
“알려 주지. 잘 봐.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기고, 그다음 놓으면 돼.”
트아르는 어깨에 메고 있던 자신의 활을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퉁!
삐이이이익!
화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효시嚆矢였다.
동시에 북쪽, 남쪽, 서쪽의 성벽에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벽 아래에서 긴장을 풀고 있던 투사들이 모두 성벽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때, 간단하지?”
트아르는 궁사들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 듯 거침없이 내뱉었다.
“화살 쏘는 법을 배웠으면 빨리 올라와서 미친 듯이 쏘라고! 그리고 항상 보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쇼맨십을 발휘하도록!”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남기며 트아르가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지랄.”
나는 트아르의 뒤통수를 향해 대답한 후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 위에 서자 숲의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저 멀리 시커먼 먼지구름이 요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구구구구!
땅이 진동했다. 성벽이 은은하게 떨리고 있었다. 투사들의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쿵!
쿵!
나무들이 요새를 향해 한 그루씩 쓰러졌다. 쓰러지는 나무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요새 근처의 나무가 모두 쓰러졌다.
“음…….”
나는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나무 뒤에 숨어 있었던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무도의 몬스터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모두 모여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섬의 생명체는 모두 모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몬스터와 짐승이 내뿜는 적의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적의 숫자도, 그들이 내뿜는 적의도 아니었다. 그들의 조합이야말로 진정으로 날 놀라게 했다.
“어떻게 오크와 코볼트가 함께 있을 수 있지?”
코볼트는 나에 대한 복수로 불탔을 때조차 오크를 피해 다녔다. 오크의 기척이 느껴지면 혼비백산 도망치기 바빴던 코볼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크와 코볼트는 천적 관계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천적 관계인 저들이 다정하리만큼 가깝게 붙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고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숲의 몬스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떻게 모였는지 그리고 왜 요새로 쳐들어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요새의 투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고민을 해결할 겨를도 없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확!
눈부실 만큼 환한 빛이 요새를 감쌌다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살기가 요새 안으로 밀어닥쳤다.
익숙한 느낌.
숲의 살기였다.
나는 살기를 막아 주었던 마법 장벽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두두두두두!
몬스터들이 요새를 향해 진격했다. 요새가 달달달 흔들릴 정도로 지축이 울렸다.
쿠에엑!
크헝!
취익!
몬스터들의 포효가 공기를 찢었다.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곳은 숲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북쪽 성벽이었다. 때문에 가장 많은 투사들이 배치되어 있는 곳도 북쪽 성벽이었다.
수백 개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활공하던 화살들이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떨어져 몬스터들의 몸을 꿰뚫었다.
선두에서 돌격하던 몬스터들이 고슴도치가 되었다. 뒤따르던 몬스터들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동료의 시체를 밟으며 계속 전진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100여 마리가 넘는 몬스터가 죽었지만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몬스터를 흥분시키기만 했다. 그들은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전우의 몸을 뜯어 먹으며 광기를 불태웠다.
투사들의 수성 전략은 간단했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하위 등급 투사는 일단 활과 창으로 요새 밖의 몬스터를 쏘거나,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몬스터를 찔렀다. 그리고 화살과 창의 공격을 뚫고 성벽 위까지 올라온 몬스터는 상위 등급 투사가 해결하는 단순한 전술이었다.
전술이 단순한 만큼 중요한 것은 병력의 운용이었다.
위험한 곳을 잽싸게 파악하여 필요한 병력을 빨리 충당해 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 때문에 트아르가 하위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상위 등급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트아르는 병력의 운용을 담당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공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트아르가 분주해졌다.
특히 북쪽 성벽에 미처 달라붙지 못한 몬스터들이 자연스럽게 동쪽과 서쪽으로 달라붙으면서 본격적으로 트아르의 지시가 시작되었다.
“빨리 화살을 쏘란 말이야! 거기! 창 든 놈! 뭐하고 있어! 지금 낚시라도 할 셈이야! 몬스터가 성벽 위로 올라와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 때까지 구경만 할 셈이냐!”
트아르는 연속으로 화살을 날리면서도 용케 주변 상황을 파악해 정확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슈슛!
슈슈슛!
조준을 하는 투사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시위를 당김과 동시에 무조건 하늘을 향해 활을 쏠 뿐이었다. 그렇게 발사된 눈먼 화살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요새 밖에서 우글거리고 있는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딜 기어 올라오는 거냐!”
“뒈져라! 이 돼지머리야!”
성벽에 달라붙어 있는 창을 든 투사들이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몬스터를 창으로 찔러 떨어뜨렸다. 화살을 담당하는 투사에 비해 창을 든 투사들은 훨씬 힘들었다.
요새는 잘 다듬어지지 않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그래서 일반 성벽보다 요철이 많았다. 때문에 사다리와 같은 도구가 없어도 몬스터들이 기어 올라오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몬스터들이 벽에 달라붙어 줄기차게 기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창수들이 바빴다.
아무렇게나 쏘아도 백발백중의 명사수가 될 수 있는 궁수에 비해 창수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고 있었다.
멍청할 만큼 일직선으로 기어 올라오는 몬스터는 오크뿐이었다. 대부분의 몬스터, 특히 거대한 거미 몬스터인 헬 스파이더Hell Spider와 파충류에 가까운 리자드맨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창을 피하며 성벽 위로 올라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제대로 찌르란 말이야! 계속 올라오잖아!”
“젠장! 하고 있어! 이 새끼들이 너무 빠른 걸 어떡해!”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그럼 더 빨리 찌르면 되잖아, 이 굼벵이야!”
“뭐? 굼벵이! 너나 똑바로 잘해! 나보다 더 헛방이 더 많은 주제에!”
창수들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창을 휘둘렀다.
나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궁수였기에 주변 상황을 조금은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여유는 얼마 가지 못했다.
슈슛!
뚝!
몬스터의 힘줄로 만든 활시위가 끊어졌다. 화살을 멀리 날리기 위해 있는 힘껏 최대한 잡아당기다 보니 그만 줄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잠시 무엇을 해야 할지 멍하니 있자 귀신같이 알아챈 트아르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신참!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뭘 넋 놓고 구경하고 있는 거냐? 평생 넋 놓게 만들어 줄까?”
“하지만 활이…….”
“활이 없으면…… 이크!”
나에게 빽 소리를 지르던 트아르가 성벽 위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 오크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오크의 이마를 뚫었다.
“활이 없으면 창이라도 잡아!”
트아르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이 옳았다. 무기를 잃었다고 해서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는 창수를 구석진 곳에 끌어다 놓은 후 그의 창을 집어 들었다.
“하압!”
성벽 위로 반쯤 기어 올라온 황금빛 털을 가진 원숭이의 목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푹!
꽥!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원숭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숲 속에서 나를 노렸던 그 원숭이인가 잠깐 생각하다 이내 창을 휘두르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하앗! 하압!”
떨어뜨려도, 떨어뜨려도, 몬스터는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입을 벌리며 달려들던 늑대인간, 라이컨스로프의 목구멍에 창을 박아 넣었다.
라이컨스로프는 목구멍이 뚫린 상태에서도 나의 얼굴을 잡아 뜯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나는 얼굴을 뒤로 빼며 라이컨스로프의 배를 걷어찼다.
날카로운 손톱이 코끝을 스치며 지나갔고, 라이컨스로프는 하늘을 날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젠장!”
빗나간 라이컨스로프의 손톱이 창대를 치는 바람에 창이 부러지고 말았다.
다시 빈손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처음 때처럼 멍하니 있지 않았다.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몬스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 퍽!
한 방에 한 마리씩 몬스터가 튕겨져 나갔다.
활을 쓸 때보다, 창을 쓸 때보다 훨씬 편했다. 그리고 훨씬 빨랐다. 역시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팔다리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을 때 네 마리의 리자드맨과 싸움을 하고 있는 투사의 모습이 보였다.
B 등급 투사에 버금가는 리자드맨 네 마리를 거침없이 몰아붙이고 있는 투사는 보다니스란 이름의 A 등급 투사였다.
그때였다.
코볼트 한 마리가 몸을 낮춘 채 투사의 뒤로 몰래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몬스터들에 의해 부서진 성벽의 파편을 주워 코볼트를 향해 집어 던졌다.
쉐에엑!
퍽!
돌멩이가 코볼트의 척추를 부러뜨렸다.
보다니스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코볼트를 흘끔 돌아본 후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씨익 웃었다.
“흐읍!”
보다니스의 검에 푸른 기운이 일렁거리더니 순식간에 리자드맨 네 마리가 도륙당했다. 그러곤 마치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나를 향해 다시 씨익 웃었다.
애초에 칭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늘을 수놓던 화살이 조금씩 뜸해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없어졌다. 화살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알아서 무기를 찾아!”
트아르가 활을 집어 던지며 외쳤다.
궁수들은 트아르의 지시에 따라 각자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혹은 시체가 된 동료의 무기를 주웠다.
“가능하면 혼자 싸우지 마라! 그냥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도망 다녀!”
궁수였던 투사들은 트아르의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성벽 위에 올라온 몬스터와 실질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위 등급 투사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들을 보조했다.
상위 등급 투사가 몬스터에게 상처를 입히면 궁수였던 투사들이 벌 떼같이 달려들어 마무리를 지었다.
물 흐르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연합 공격이었다.
나는 궁수부대에 속해 있었지만 일찌감치 창수부대와 같은 일을 했기에 궁수부대에서 이탈해 성벽 아래에서 기어 올라오는 몬스터와 계속 드잡이질을 해야 했다.
나는 불나방처럼 성벽을 기어오르는 몬스터를 향해 미친 듯이 손발을 놀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양 주먹과 양발이 피로 흠뻑 젖고, 어깨에 쇳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을 무렵, 성벽 위로 기어 올라오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후우, 후우…….”
조금 숨을 쉴 수 있는 여유가 확보되자 성벽 위아래로 가득 널려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투사들이 긴장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예상보다 치열한 전투가 아니었다.
아니, 전쟁이라기보다 학살에 가까웠다.
숫자는 몬스터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개개인의 전투력은 투사들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몬스터 중에서 강하다고 알려진 리자드맨과 트롤Troll조차 마나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A 등급 이상의 투사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드레이크와 함께 몬스터 세계에서 먹이사슬 최상위에 위치한 폭식자 오우거Ogre 정도만이 A 등급 투사와 박빙으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오우거의 숫자는 많지 않았고, 성벽 위까지 올라오는 숫자는 훨씬 더 적었다.
게다가 요새에는 구룡九龍으로 불리는 더블 A 등급 투사가 아홉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거처에서 나오지조차 않고 있는, 요새의 대장이자 유일한 트리플 A 등급의 투사 베네딕트가 있었다.
무한이라고 생각될 만큼 많았던 몬스터의 숫자도 이제는 눈에 드러날 만큼 줄어든 상태였다.
부상자는 많았지만 사망자는 10여 명뿐이었다.
완벽한 승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멍청한 놈! 오른쪽 가슴을 찔러야지! 리자드맨의 심장이 오른쪽에 있다는 것도 몰라?”
“시끄러! 잠시 착각한 것뿐이야! 한 번만 더 나를 멍청한 놈이라고 부르면 네놈 엉덩이에 이 창을 꽂아 줄 테다!”
투사들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히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어째서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때였다.
푸드득!
푸드득!
숲 속 멀리서 거대한 새들이 날아올랐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니 새가 아니었다.
인간의 얼굴에 새의 몸통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 하피Harpy였다.
꺄! 꺄르륵!
꺄르륵! 꺄르륵!
수백 마리의 하피가 여자의 웃음소리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요새를 향해 날아왔다.
“……젠장. 진짜 공격은 하피였군. 어쩐지 너무 달려든다 했어. 우리를 지치게 하려는 미끼였구나. 화살도 다 떨어졌는데 하필 하피라니. 새끼들, 제법 머리 좀 썼는데.”
트아르가 신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머리를 썼다니? 대체 누굴 말하는 거지?”
“누구냐니? 당연히 투기장 놈들이지!”
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대답했다.
순간 하나의 가정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하늘 위에 떠 있는 해파리 모양의 눈알을 쳐다봤다.
“……그렇군.”
전쟁에 대해 품고 있었던 대부분의 의문이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핵심은 투기장이었다.
쉽게 말해 이 요새는 투기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지금의 전쟁 역시 관객의 즐거움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작된 셈이었다.
때문에 투사들의 얼굴에 긴장감만 있고, 죽음의 공포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균형에 맞는 상대가 나타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요새의 투사들이 모두 죽어 버린다는 것은 투기장이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그렇다.
이 전쟁은 투기장에서 했던 경기와 똑같았다. 다만 스케일만 커졌을 뿐이다.
때문에 요새의 투사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준비를 했던 것이다.
투기장이 투사를 소중히 여긴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관객의 재미를 빼앗지 않는 범위 안에서였다. 때문에 조금 벅찬 정도의 시련을 준비할 가능성이 높았다.
조금이라도 살아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투사들은 그토록 열심히 전쟁 준비를 했던 것이다.
“신참! 쓸데없는 생각은 나중에 해. 지금은 살아남을 생각만 하라고. 하피는 꽤 위험한 놈이야.”
트아르의 말은 옳았다. 아니, 틀렸다.
하피는 꽤 위험한 놈이 아니었다. 매우 위험한 놈이었다. 특히 궁수와 창수를 하던 하위 등급 투사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몬스터였다.
하피의 몸은 평범한 칼질로는 상처가 나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또한 공중을 날아다니기 때문에 공격을 받는 입장에서는 공격과 방어, 양쪽 모두 힘들었다. 게다가 제법 높은 지능을 지니고 있어 무척이나 교활했다.
푸드득!
꺄르륵!
하피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교활한 놈들답게 하피들은 하위 등급 투사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하피들은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로 투사의 머리를 터뜨리거나, 낚아채서 하늘 높이 날아간 후 아래로 떨어뜨렸다.
“으아악!”
“놔! 이 괴물 새야! 저리 꺼지지 못해!”
투사 한 명이 하늘로 끌려 올라간 후 비명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땅으로 추락한 투사는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곤죽이 되었다.
상위 등급 투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하피를 공격했지만 모든 지역을 커버할 수는 없었다. 영악한 하피들은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그대로 하늘로 도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저리 꺼져! 이 망할 새대가리, 아니 사람 대가리야!”
트아르의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하피가 트아르의 어깨를 잡고 하늘로 날아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유쾌한 비명을 지르니 배포가 크다고 해야 할지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고 해야 할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달려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나는 돌멩이를 주워 하피를 향해 집어 던졌다.
쉐에엑!
딱!
코볼트의 척추를 부러뜨렸던 돌멩이가 하피의 머리에 직격했다. 코볼트와 다르게 하피의 머리는 깨어지지 않았다. 마치 바위에 부딪친 것처럼 돌멩이가 튕겨져 나갔다.
비록 하피의 머리를 부술 순 없었지만 큰 충격을 줄 수는 있었다.
트아르를 붙잡고 막 날아오르려던 하피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 틈을 이용해 트아르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고맙네, 친구! 나 좀 지켜 주게!”
내 위치가 건방진 신참에서 방패막이로 쓸 만한 동료로 순식간에 격상되었다.
꺄르르르륵!
그사이 트아르를 놓친 하피가 화난 얼굴로 울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곤 쥐를 노리는 부엉이처럼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하강했다.
나는 하피의 동선을 끝까지 주시한 후 슬쩍 뒤로 움직였다. 그러곤 내 옆을 스치며 지나가는 하피의 몸통을 걷어찼다.
꿰에에!
오리 같은 괴성을 지르며 하피가 다시 날아올랐다.
“칫!”
한 방에 끝낼 수 있었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나의 기습적인 일격에 놀랐는지 하피는 내 머리 위만 맴돌 뿐 조금 전과 같은 저돌적인 공격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나는 호엔레른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을 떠올렸다.
다크섀도우에 마나를 싣는 것은 조금이나마 성공했다. 이제는 다른 것을 시험해 볼 차례였다.
돌멩이를 주웠다.
꺄르륵! 꺄르륵!
하피의 울음소리에서 노기가 느껴졌다.
나는 돌멩이에 마나를 주입했다.
다크섀도우의 경우는 특수한 아티팩트였기에 성공한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사물에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선 아티팩트 이외의 것으로 시도를 해 보아야 했다.
적당한 위기와 적당한 긴장감.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최적의 조건이었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를 사물에 담아 위력을 증가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육체에서 흐르는 마나는 조절이 가능하지만 육체를 떠난 마나는 그 흐름을 조절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마나의 주입량이 조금만 틀어져도 이렇게.
파삭!
돌멩이가 가루로 변했다.
나는 다른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한 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훨씬 적은 양의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곤 하늘에 떠 있는 하피를 향해 집어 던졌다.
쉐에에엑!
그냥 던졌을 때보다 확실히 속도가 증가하였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빠른 속도가 아니었다.
하피가 날렵하게 방향을 틀어 돌멩이를 피했다.
꺄르륵! 꺄르륵!
하피가 마치 나를 비웃는 듯 울었다.
다시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첫 번째 시도와 두 번째의 시도를 참고하여 그 중간쯤 되는 마나를 주입했다.
휘익!
하피가 크게 급선회하는 순간을 노려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쒜에에엑!
돌멩이는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성처럼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날아갔다. 마나를 머금은 돌멩이에서 푸른빛이 아닌 검은빛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푸욱!
꿰에엑!
돌멩이가 하피의 몸을 꿰뚫었다.
저격당한 하피는 빙글빙글 나선을 그리며 땅으로 추락했다.
쿵!
떨어진 충격으로 양다리와 한쪽 날개가 부러진 하피가 몸부림을 치며 발버둥 쳤다.
나는 아이언 피스트로 하피의 머리를 한 방에 부수어 버렸다.
“너, 생각보다 싸움을 잘하는구나.”
트아르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얼굴색을 싹 바꾸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신참! 뭘 멍하니 있어? 지금 동료들이 죽어 가고 있는 게 안 보여? 빨리 도와주지 못해!”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의 위상이 다시 신참으로 돌아왔다.
“던질 만한 돌멩이를 찾아봐. 성벽 위라 그런지 던질 만한 게 별로 없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트아르가 대답했다.
“저번에 내가 데리고 간 곳 기억나지? 구멍이 뚫려 있었던 성벽 말이야. 그곳으로 가면 원하는 만큼 돌멩이를 구할 수 있을 테니 얼른 튀어 내려가!”
나는 트아르가 말한 곳으로 뛰어갔다.
성벽의 구멍을 메우는 데 사용한 바위의 파편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일단 한 움큼 쥔 후 투사들을 공격하는 하피들을 겨냥해 돌팔매질을 시작했다.
아직 돌멩이에 마나를 담는 데 능숙하지 않아 날아가는 돌멩이의 위력이 천차만별이었다. 날아가는 도중에 허공에서 가루가 되는 돌멩이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돌멩이에 마나를 담는 것이 익숙해졌고, 능숙해졌다.
쒜에엑!
쒜에엑!
푸욱!
퍼억!
잠깐 사이에 하늘에 떠 있는 하피 수십 마리를 땅으로 추락시켰다.
여태껏 당하고만 있던 투사들이 하피가 땅으로 떨어질 때마다 우르르 달려들어 곤죽을 만들었다.
분노한 하피들이 나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내 주위에는 트아르의 지시를 받고 달려온 상위 등급 투사들이 바글바글했다.
결국 하피들은 돌멩이에 당하지 않을 만큼 높은 곳으로 도망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늘 꼭대기에서 시끄럽게 울음을 토하던 하피들이 결국 숲으로 날아갔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저절로 손에 힘이 풀렸다. 들고 있던 돌멩이가 툭 하고 떨어졌다.
“끝났나…….”
“끝나긴 뭐가 끝나! 그런 실력이 있었으면 진즉에 말해 줘야 했을 거 아냐! 냉큼 북쪽 성벽으로 가지 못해! 하피가 여기만 습격했는지 알아!”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던 트아르가 빽 소리를 질렀다.
“빨리 따라오지 못해!”
트아르를 따라 북쪽 성벽으로 뛰어갔다. 북쪽 성벽 역시 하피를 처리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나는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하피가 떨어질 때마다 투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윽고 북쪽 성벽의 하피들도 숲으로 도망을 쳤다.
나는 곧장 서쪽 성벽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서쪽 성벽의 하피들을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남쪽 성벽으로 갔다.
남쪽 성벽의 하피마저 사라지자 약속이나 한 듯 성벽 아래에서 기웃대던 몬스터들도 숲으로 도망쳤다.
몬스터의 포효와 고통에 찬 비명과 악에 받친 기합 소리가 갑자기 뚝 멈췄다.
사방이 조용했다.
찰나의 침묵.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와아!
우아아!
“끝났다! 몬스터들이 물러갔다!”
“이겼다!”
투사들이 한꺼번에 환호성을 질렀다. 요새가 들썩거릴 만큼 커다란 함성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살아남았다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요새 곳곳에 몬스터와 투사의 시체가 널려 있었지만 산 자의 기쁨이 죽은 자의 슬픔을 지워 버렸다.
“휴우…….”
돌멩이를 던진 오른쪽 어깨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연속해서 수백 번이나 마나를 끌어 올린 탓에 온몸의 신경이 불에 탄 것처럼 화끈거렸다. 염산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꾸르륵!
긴장이 풀리자 허기가 몰려왔다.
나는 벌러덩 누워 있는 트아르에게 다가갔다.
“배가 고프군. 제법 열심히 일한 것 같은데 이제는 밥을 먹어도 되겠지?”
트아르가 피식 웃었다.
“미친놈. 사방이 피바다구만. 이 와중에 밥 생각이 나냐?”
와아아!
투사들의 환호성이 끊이질 않았다.
한나절 동안 계속된 몬스터의 공격 때는 10여 명밖에 죽지 않았다. 반면 하피들의 공격 때는 잠깐 동안 100여 명이 넘게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아르의 얼굴은 밝았다.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어. 투기장 놈들도 깜짝 놀랐을 거야. 하피를 몇백 마리나 준비한 것을 봐선 요새에 있는 투사의 수를 절반 이하로 줄일 셈이었던 것 같은데 네 덕분에 잘 막을 수 있었다.”
트아르가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무척이나 어색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투사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불렀다. 투사들이라 그런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늘 한 점 없는, 오직 웃음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정색할 것 없어.”
내 표정을 읽었는지 트아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쯤이면 눈치챘겠지만 여긴 네가 있었던 투기장과 별반 다를 게 없어. 오히려 더한 곳이지. 투기장도 목숨을 내놓는 곳이지만 이곳처럼 무차별적으로 죽이지는 않지. 거기선 항복이라도 있었지만 여긴 오로지 생존을 위한 투쟁뿐이거든. 그래서 살아났을 때의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야. 정신이 나가 버릴 정도의 환희 그 자체지.”
환호성과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투사들은 짓이겨진 시체와 피 웅덩이 사이를 뛰어다니며 춤을 추었다.
트아르의 말처럼 미친놈들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투사들의 발광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심지어 몬스터의 잘린 머리를 들고 다니며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르는 투사도 있었다.
그렇게 기쁨이 절정에 도달한 순간.
전쟁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쿵!
강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뭐, 뭐지?”
나와 함께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트아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쿵!
투사들은 굉음과 진동을 느끼지 못하는지 여전히 웃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 정신 차려! 뭔가 이상해!”
트아르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쿵!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트아르가 직접 움직였다. 그는 남쪽 성벽 위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나 역시 트아르의 뒤를 쫓았다.
“젠장…….”
성벽 위에 올라간 트아르가 침음성을 흘렸다.
“젠장…….”
뒤늦게 도착한 내 입에서도 저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쿵!
작은 동산만 한 크기의 거대한 거북이 한 마리가 요새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낯익은 놈이었다. 숲에서 나를 줄기차게 쫓아다녔던 바로 그 거북이 틀림없었다.
단 한 마리였지만 그 위압감은 결코 수백 마리의 하피에 뒤지지 않았다. 육중한 몸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땅이 진동했다.
“몬스터다! 모두 정신 차려! 무기를 들고 빨리 위로 올라와!”
공허한 외침이었다.
트아르의 목소리는 이미 정신 줄을 놔 버린 투사들의 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느릿느릿 다가온 거대한 거북이가 마침내 성벽 아래에 도착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트아르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싸움은 끝났어. 더 이상 몬스터가 올 리…….”
그는 갑자기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 위에는 해파리 모양의 눈알이 여전히 둥둥 떠 있었다. 적무도의 살기를 막아 주던 방어 마법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닌가? 아니야. 싸움은 확실히 끝났어. 그럼 저 망할 거북이는 대체 뭐지?”
트아르가 상황을 분석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마 투기장 놈들과 상관없이 그냥 온 건가?”
그때였다.
거북이의 머리가 등껍질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러곤 투석기에서 돌이 발사된 것처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튀어나왔다.
쾅!
거북이의 머리와 성벽이 부딪쳤다.
성벽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어, 어…….”
성벽 끝에 기대 거북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트아르가 균형을 잃고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덥석!
“신참! 저 괴물이 돌 머리를 또 부딪치기 전에 빨리 끌어 올려!”
간신히 성벽을 붙잡은 트아르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 소리를 질렀다.
얼른 달려가 트아르를 끌어 올렸다.
거북이의 머리가 다시 등껍질 안으로 들어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쾅!
“바보 같은 놈! 그런다고 성벽이 깨질 것…….”
쩌저적!
성벽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그어졌다.
“같으냐…….”
트아르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작아지더니 종국에는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북이의 머리가 다시 등껍질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트아르의 허리띠를 잡고 냅다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잘못하면 다리가 부러질 수 있을 만큼 높은 높이였고, 당연히 트아르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뭐하는 짓이냐아아아!”
쾅!
트아르의 긴 절규와 동시에 거북이의 머리가 성벽을 때렸다.
와르르르!
바위를 쌓아 올려 만든 단단한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나와 트아르는 운이 좋게도 곡식 자루를 쌓아 놓은 수레 위에 떨어졌다. 수레가 박살 나고 곡식 자루가 터졌지만 다행히 큰 상처 없이 둘 다 무사할 수 있었다.
트아르는 내게 화내는 것도 잊은 채 무너진 성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저거 다시 복구하려면 죽을 고생 하겠는데.”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내 말에 트아르가 정신을 되찾았다.
쿵!
쿵!
자신이 뚫은 성문으로 괴물 거북이가 당당하게 입장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승리에 취해 있던 투사들이 하나씩 제정신을 찾았다.
하지만 괴물 거북이는 투사들이 모두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쿵!
꽈직!
괴물 거북이가 앞발을 들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투사를 짓밟았다.
투사는 물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압사당했다.
다음 희생자는 몬스터의 머리를 들고 뛰어다니던 투사였다. 그는 괴물 거북이에게 상체를 뜯어 먹혔다.
“야, 이 새끼들아! 빨리 정신 차리지 못해! 다 뒈지기 전에 정신 차려!”
트아르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투사들이 서둘러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트아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었다.
남쪽 성벽을 부수고 들어온 괴물 거북이는 덩치만 커다란 변종 거북이가 아니었다.
숲에서 봤던 이놈의 위용은 예전에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드레이크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문득 도망친 농노들의 마을에서 싸웠던 돌연변이 호랑이가 떠올랐다.
요새에 침입한 괴물 거북이 역시 그 호랑이처럼 마나석을 먹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괴물 거북이의 크기와 힘을 봤을 때 꽤나 고위 마법사의 마나석을 먹었으리라 짐작되었다.
괴물 거북이의 모습에서 마나석을 짐작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돌연변이다!”
“마나석을 먹고 변형된 놈이다!”
“이 정도 덩치라면…… 마나석도…… 꿀꺽.”
투사들의 눈이 욕심으로 번뜩였다.
“모두 도망가! 북쪽 성벽으로 도망가라고! 이놈은 네놈들의 상대가 아니야!”
역시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사람은 트아르뿐이었다.
“마나석은 내 거다!”
“쳐라!”
탐욕에 물든 투사들의 돌격을 보며 나는 북쪽으로 달렸다.
잠시 후 트아르가 뒤를 쫓아왔다. 잔뜩 굳어 있는 그의 얼굴에서 괴물 거북이에게 달려들었던 투사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젠장……. 저런 괴물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괴물 거북이는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트아르에게 진실을 알려 줄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북쪽 성벽 역시 남쪽 성벽과 마찬가지로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남쪽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아랑곳 않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대로 축제를 즐기다 아무 준비 없이 괴물 거북이의 습격을 받는다면 남쪽 성벽의 투사들처럼 전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신 차려! 몬스터가 쳐들어왔다!”
“트아르, 무슨 헛소리야? 싸움은 끝났어. 우리가 이겼다고! 하하하!”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트아르는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번 맛이 가 버린 투사들을 제정신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쿵!
쿵!
노력한 보람도 없이 마침내 재앙이 나타났다.
재앙이 정신 나간 투사들을 덮쳤다.
크아아앙!
쩌렁쩌렁한 포효가 마치 폭풍처럼 몰아쳤다. 거대한 덩치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가 공기를 오염시켰다.
“뭐, 뭐야, 저건?”
압도적인 존재감과 살기를 인지한 투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쿵!
쿵!
괴물 거북이가 날뛰었다.
퍽!
꽈직!
“으아아악!”
“커헉!”
괴물 거북이는 근처에 있었던 수십 명의 투사들을 순식간에 몰살시켰다.
“죽어랏!”
A 등급 투사들이 검에 마나를 실어 괴물 거북이의 다리를 공격했다.
자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마나 소드였지만 괴물 거북이의 다리에는 작은 생채기밖에 내지 못했다.
A 등급 투사들의 공격은 오히려 괴물 거북이의 화만 돋우었다.
분노한 괴물 거북이가 앞다리를 높이 들어 올린 후 그대로 땅을 내리쳤다.
쾅!
요리조리 도망 다니며 마나 소드로 괴물 거북이의 몸에 상처를 입히던 A 등급 투사들이 강력한 땅의 진동에 의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어…… 어…….”
허공에 떠오른 투사들이 몸을 가누기 위해 바동거렸다.
휘리릭!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괴물 거북이가 채찍처럼 생긴 꼬리를 휘둘렀다.
팡!
팡!
철퍼덕!
철퍼덕!
꼬리에 맞은 투사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가 성벽에 부딪쳤다.
“모두 물러서!”
“이 괴물은 우리가 상대한다!”
베네딕트와 마찬가지로 몬스터와의 전쟁 때 거의 잠자코 있었던 요새의 실세 구룡이 마침내 몸을 움직였다.
아홉 명 전원이 더블 A 등급 투사인 구룡은 요새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최강의 투사들이었다.
구룡 중 쌍검을 쓰는 투사 래록스가 엄청난 기세를 뿌리며 괴물 거북이 앞으로 나갔다.
거침없이 전진하던 괴물 거북이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작은 인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의 마나석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찾아와 줘서 고맙다. 아프지 않게 꺼내 주마. 크크크!”
래록스는 검을 교차시켜 십자가 모양을 만들었다.
화아악!
공기가 요동쳤다. 래록스의 옷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쌍검에 마나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번쩍!
두 개의 검이 빛을 뿜었다.
거대한 십자가 모양의 광선이 괴물 거북이를 향해 날아갔다.
쾅!
폭발의 충격으로 거센 바람이 일었다. 바닥의 흙먼지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솟아올라 괴물 거북이를 집어삼켰다.
“오오! 쌍검의 래록스다!”
“역시 구룡이야!”
“한 방에 무찌르다니! 굉장해!”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투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회오리바람이 흩어지고 흙먼지가 가라앉은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괴물 거북이가 등껍질 안에 머리와 다리를 넣은 채라 등껍질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괴물 거북이가 머리를 빼꼼히 내밀어 주변 상황을 살피듯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래록스를 놀리는 듯했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래록스가 쌍검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집 크기만 한 푸른색 원반 수십 개가 괴물 거북이의 머리를 노리며 날아갔다.
위험을 느낀 괴물 거북이가 머리를 등껍질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쾅!
쾅! 쾅!
다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헉, 헉……. 어떠냐, 이 괴물아.”
래록스가 숨을 몰아쉬며 먼지구름을 노려봤다. 다른 투사들 역시 모두 숨을 죽인 채 먼지구름을 쳐다봤다.
그때였다.
슛!
바람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먼지구름을 뚫고 튀어나왔다.
세이렌 왕국의 왕궁보다 커다란 그것은 바로 괴물 거북이의 등껍질이었다.
“헉!”
래록스는 쌍검을 교차시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크기의 차이를 비교해 봤을 때 무모해 보이는 짓이 분명했지만 래록스는 자신의 힘을 믿는 얼굴이었다.
“하압!”
기합 소리와 함께 래록스가 마나를 개방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색 장벽이 래록스의 앞에 드리워졌다.
등껍질과 푸른색 장벽이 부딪치는 순간.
괴물 거북이의 머리가 등껍질 안에서 발사되었다.
쾅!
고막이 찢어지는 것 같은 충돌음.
래록스는 괴물 거북이를 너무 우습게 보았다. 놈의 머리는 성벽도 부수어 버리는 공성 병기나 다름없었다.
무지의 대가는 참혹했다.
쨍!
마나의 장벽이 깨어졌다.
퍼억!
괴물 거북이의 머리가 래록스의 몸을 들이받았다. 피 떡이 된 래록스가 젖은 수건처럼 철퍼덕 성벽 위에 달라붙었다.
“래록스!”
“이 망할 괴물 놈이!”
래록스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분노한 나머지 팔룡이 괴물 거북이에게 달려들었다.
“하합!”
“죽어!”
콰광!
콰과광!
더블 A 등급에 걸맞게 화려하고 강력한 공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괴물 거북이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괴물 거북이의 등껍질은 그 어떤 강력한 공격도 무위로 되돌렸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는 팔룡이 점점 구석에 몰리는 듯했다.
휘익!
퍽!
팔룡 중 격투기를 사용하던 투사가 괴물 거북이의 앞다리에 차여 하늘로 솟구쳤다.
순간 괴물 거북이의 입에서 붉은색 혓바닥이 채찍처럼 날아갔다. 마치 개구리가 파리를 잡아먹는 것처럼 혓바닥이 투사의 허리를 감아 입속으로 들어갔다.
“으아아아!”
투사가 절규와 함께 괴물 거북이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우드득!
뼈 씹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팔룡이 칠룡이 되었다.
“으……. 으…….”
투사들이 동요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구룡은 최강을 자랑하는 요새의 보루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잡아먹혀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칠룡은 급속도로 지쳐 가고 있었다. 강력한 공격을 위해 초반에 너무 많은 마나를 쏟아부은 탓이었다.
반면 괴물 거북이는 작은 상처만 입었을 뿐 처음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끄아아아!”
“사, 살려…….”
칠룡이 육룡이 되고, 육룡이 오룡이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죽을 거야…….”
“이, 일단 도망치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개죽음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죽음조차 우습게 여기던 투사들이 압도적인 무력 앞에 패닉 상태가 되었다.
투사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성문을 열고 요새 밖으로 도망치는 투사도 있었다.
나 역시 도망쳤다.
어디로 도망칠지 고민하다 일단 요새 안쪽으로 뛰었다. 요새 밖은 숲이었고, 숲과 나는 철천지원수였다.
괴물 거북이가 내 뒤를 쫓아왔다.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구룡의 생존자들이 발악을 하듯 외쳤다. 호기로운 외침과 달리 그들은 이미 마나가 고갈된 듯 괴물 거북이의 뒤를 쫓아오지도 못했다.
쿵!
쿵! 쿵!
와르르!
마치 잡초를 밟듯 괴물 거북이가 집들을 뭉개며 쫓아왔다.
요새 광장을 지나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요새에서 가장 커다란 집에 다다랐다.
“아무래도 자네를 쫓아오는 듯한데.”
머리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베네딕트가 지붕 위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괴물 거북이가 요새를 부수고, 투사들을 학살하고 있었음에도 베네딕트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제가 마음에 드나 봅니다.”
“흐음…….”
베네딕트가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절대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괴물 거북이가 노리는 대상이 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당장에 공적으로 몰릴 것이 분명했다.
나는 베네딕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짝사랑이었던가. 잡아서 암컷인지 확인해 봐야겠군.”
베네딕트가 씨익 웃으며 일어섰다.
스르릉.
단지 검을 뽑았을 뿐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구룡이라고 거들먹거리더니, 멍청한 놈들이군. 껍데기가 단단하면…….”
검에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뒤집으면 될 것을!”
베네딕트가 양손으로 검을 잡은 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되듯 거대한 힘의 파동이 검 끝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슈욱.
다크섀도우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빛깔의 마나가 점점 새하얗게 변하면서 베네딕트의 검에 서렸다. 아니, 단순히 서리는 것을 넘어 검을 매체로 새로운 마나의 검이 되었다. 상위급 기사만이 시전할 수 있다고 알려진 빛의 검, 오러 블레이드였다.
“하아아압!”
베네딕트가 힘을 개방했다.
오러 블레이드의 길이가 주욱 늘어났다. 원래 검의 길이에 두 배, 세 배를 넘어 열 배, 스무 배 가까이 길어졌다. 태양보다 밝은 빛이 오러 블레이드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앗!”
베네딕트가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며 그대로 오러 블레이드를 내리그었다. 하늘마저 양단할 기세였다.
괴물 거북이가 머리와 다리를 등껍질 안으로 획 집어넣었다. 하지만 베네딕트의 목표는 괴물 거북이의 단단한 등껍질이 아니었다.
쾅!
오러 블레이드가 땅을 후려쳤다.
푸확!
거대한 분화구처럼 땅이 파이며 그 충격으로 괴물 거북이가 홀라당 뒤집혔다.
“쳐라!”
괴물 거북이의 뒤를 간신히 따라온 구룡의 생존자들이 베네딕트를 대신해 명령을 내렸다.
“와아아!”
“복수다!”
도망치기 바빴던 투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푹!
서걱!
믿기 어려울 만큼 단단했던 등껍질에 비해 괴물 거북이의 배엔 그런대로 검이 박혔다.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던 괴물 거북이가 피를 흘리자 투사들이 흥분했다. 그들은 피가 흐르는 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상처의 크기를 벌려 나갔다.
고통을 참지 못한 괴물 거북이가 머리와 다리를 내밀었다.
휘익!
퍽!
휘익!
퍽!
바동거리는 팔다리에 치인 투사들이 피 떡이 되었다.
“히익!”
“모, 모두 물러서! 거북이가 다시 몸을 뒤집으려 한다!”
놀란 투사들이 괴물 거북이에게서 황급히 떨어졌다. 오직 단 한 명, 베네딕트만을 제외하고.
저벅저벅.
베네딕트는 괴물 거북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휘리릭!
괴물 거북이가 꼬리를 휘둘렀다.
베네딕트는 고개만 까닥 움직여 꼬리 공격을 피했다. 그의 검이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베네딕트와 괴물 거북이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괴물 거북이의 몸부림이 더욱더 거세졌다. 어떻게 해서든 몸을 바로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저벅.
걸음을 멈춘 베네딕트가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이 새하얀 빛을 뿌렸다.
그때였다.
쿵!
괴물 거북이가 한쪽 다리를 든 후 땅으로 세게 내리쳤다. 그 반동으로 괴물 거북이의 몸이 튕겨지듯 빙글 회전했다.
자세를 바로 한 괴물 거북이가 머리와 다리를 등껍질 안으로 숨기려는 순간.
휘익!
서걱!
소름 끼치는 절삭음이 들렸다.
스르릉.
베네딕트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괴물 거북이의 머리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주둥이를 뻐끔거렸다.
그러다 결국 분리된 머리가 땅으로 쿵 떨어졌다.
푸슛!
푸슈슛!
마치 고래 등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듯 머리가 잘린 곳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뿜어내는 피 역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말 그대로 피의 강이 흐를 지경이었다. 사방이 온통 시뻘건 색으로 변했다. 비릿한 악취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한 피의 세계에서 베네딕트가 기분 좋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괴물 거북이가 쏟아 내는 피로 목욕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자네, 혹시 거북이의 암수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알고 있나?”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베네딕트가 따뜻한 햇살 속에서 낮잠을 자는 고양이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나른함 속에 숨어 있는 지독한 광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