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변화 (9/45)

변화

나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개인 연무장에서 보냈다.

개인 연무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검을 수련하는 공간으로 쓰기에는 빡빡했고, 창은 무리였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권각을 사용했기 때문에 수련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연무장 한가운데 서서 말뚝의 형벌을 받으며 관찰했던 기사들의 검술을 떠올렸다.

검의 움직임. 검의 각도. 검 끝이 노리는 위치.

나에게는 무술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스승도 없었다. 유일하게 참고할 수 있는 것은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뿐이었다.

나는 백작가의 검술을 참고하여 나만의 권각술을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복잡한 검술도 결국은 세로 베기, 가로 베기, 찌르기의 조합이었다.

나는 검술 특유의 현란한 움직임을 모두 배제하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만 추려 냈다. 그리고 그렇게 추려 낸 형태를 주먹과 발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엉망진창이었다.

마치 술 취한 주정뱅이의 춤사위 같았다. 수련을 하고 있는 나조차 헛웃음이 나올 만큼 형편없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백작가의 검술을 연구하고, 연구 결과를 토대로 권각술을 만들어 수련하고, 수련한 결과를 투사와의 싸움에 적용시켜 실효성을 검증했다.

서서히 나의 권각술이 윤곽을 드러냈다.

검술이 세로 베기, 가로 베기, 찌르기의 조합이라면, 나의 권각술은 주먹으로 때리기, 발로 차기 그리고 피하기의 조합이었다.

보다 빠르게 때리고, 보다 빠르게 차고, 적의 공격이 닿기 전에 피한다.

만들고 나서 생각하니 제대로 된 무술이라기보다 신체 능력에 의지한, 임기응변에 가까운 권각술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내 한계인 것을.

쿵!

파팟!

나는 발을 구르며 주먹을 뻗었다. 주먹의 위치가 원래 노렸던 곳보다 낮았다.

휘익!

발차기를 했다. 얼굴을 노렸지만 발이 허리까지밖에 올라가지 않았다.

아이언 피스트와 족쇄 때문이었다.

“헉, 헉…….”

나는 연무장에 드러누웠다.

근육도 근육이지만 손목과 발목, 무릎과 팔꿈치 같은 관절 부위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팔과 다리에 쇳덩이를 차고 수련을 시작한 지도 어느새 한 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몸을 파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근육이 찢어지고 인대가 늘어났다. 수련은커녕 팔을 들어 올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역시 내 육체는 평범한 육체가 아니었다.

육체는 혹사에 가까운 수련에 빠르게 적응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제대로 된 권각술을 수련할 수 있었고,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쇳덩이를 단 채 C 등급 투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휴식을 마친 후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몸을 혹사시켰으니 이제는 치료를 할 때였다. 아이언 피스트를 벗어 옆에 내려놓았다.

서서히 마나를 일으키자 피부를 뚫고 다크섀도우가 올라왔다. 나는 호흡에 맞춰 들숨에는 다크섀도우를 꺼내고, 날숨에는 다크섀도우를 집어넣었다.

호엔레른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을 응용한 나만의 마나 수련법이었다.

나는 카렌이 전해 준 책을 암기한 후 불태워 버렸다.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은 ≪마법입문≫의 마나 수련법과 완전히 달랐다.

≪마법입문≫의 마나 수련법이 기사의 검술이라면,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은 용병의 검술과 같았다. 그만큼 실용적이며 패도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매우 안정적이었다.

다시 말해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은 안전하면서도 효과가 빠른 사기적인 수련법이었다.

호엔레른 백작가는 자타르 왕국에서 기사단장, 즉 퍼스트 나이트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 비밀이 이제는 내 머릿속에 있었다.

들숨에 다크섀도우를 꺼내고.

날숨에 다크섀도우를 집어넣고.

들숨과 날숨.

호흡에 맞춰 몸 안의 마나를 회전시켰다.

간혹 호흡이 흐트러지거나, 마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마다 격렬한 고통과 함께 마나가 억류했다.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을 멋대로 변형시켰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나는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 중에서 안전장치를 모두 제거한 핵심만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빠른 수련법이었고, 또한 가장 위험한 수련법이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마나 수련법을 내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은 사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하지 못할 허튼짓이었다.

나의 마나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면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나 역류의 대가는 오직 하나였기 때문이다. 바로 심장이 폭발하는 것.

하지만 운이 좋게도, 혹은 운이 나쁘게도, 나의 마나는 특별했다.

수련법을 바꾼 대가로 하루에도 몇 번씩 마나가 역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심장은 무사했다.

보통의 마나가 심장에 축적되는 것과 달리 나의 마나는 몸 전체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나가 역류할 때마다 심장이 터지는 대신 온몸의 신경과 근육이 찢어졌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만큼 압도적인 고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나를 이용해 상처를 치료하며 불굴의 의지와 그 의지를 능가하는 복수심으로 고통을 참아 냈다.

그렇게 자해와 치료를 반복하며 나만의 마나 수련법을 만들었다.

다크섀도우를 이용한 나만의 수련법이었다.

들숨과 날숨.

호흡에 맞춰 양손의 다크섀도우가 깜박였다.

지친 몸이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마치 치료 마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마나를 회전시킬 때마다 육체의 고통이 사라졌다.

잠시 후.

“휴우우우우!”

나는 길게 숨을 내쉰 후 마나 수련 겸 치료를 마쳤다.

옆에 내려놨던 아이언 피스트를 손에 끼었다. 몸 이곳저곳이 뻐근했지만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쿵!

휘익!

나는 진각을 밟으며 힘차게 주먹을 뻗었다.

깊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방에서 나왔다. 거의 한 달 만의 외출이었다. 아이언 피스트와 족쇄는 벗지 않았다.

나는 마나 수련할 때를 제외하곤 밥을 먹을 때조차 쇳덩이들을 벗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D 등급 투사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단순히 걷기만 했는데도 팔다리가 뻐근해졌다.

투사들은 등급이 낮을수록 위층에 거주했다.

즉 투기장 바로 아래층이 F 등급 투사의 거주 구역이었고, 그 아래층이 E 등급 투사의 거주 구역이었다.

따라서 등급이 높아질수록 많은 공간을 할당받을 수 있었다. 투사들의 숫자가 적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위층인 F 등급 투사의 거주 구역은 200명에 가까운 투사들이 나눠 가진 데 반해, 가장 아래층은 불과 11명의 B 등급 투사들이 공간을 나눠 가졌다.

A 등급부터는 투기장 밖에서 생활했다.

C 등급 투사부터 개인 연무장이 주어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D 등급 투사의 연무장에 도착한 나는 조심스레 연무장 안쪽을 살폈다.

원칙적으로 상위 등급의 투사가 하위 등급 투사의 연무장에 찾아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연무장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삐익!

나는 짙은 어둠을 향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부스럭!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일어섰다. 그림자는 후다닥 내 쪽으로 뛰어왔다.

“소리를 내시면 어떡합니까? 들키면 큰일 납니다.”

그림자, 열 번째 경기에서 나에게 패한 전투 마법사 릭이 안절부절못하며 사방을 살폈다.

“걱정하지 마. 아무도 없으니까.”

내 말에도 릭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럴 때는 빨리 사라져 주는 것이 최고의 방법임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알고 있었다.

“어제 경기에서 이겼다고 들었다. 대전료는 아마 40루덴이었지?”

“여기…… 있습니다.”

릭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얼굴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처럼 목숨값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건네려니 아까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딴생각을 하기 전에 돈주머니를 낚아챘다.

“다음에도 부탁해.”

안타까움에 몸부림치는 릭을 남겨 두고 D 등급 투사의 거주 구역을 빠져나왔다.

나는 한층 더 위로 올라갔다.

E 등급 투사의 거주 구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나와 첫 경기를 벌였던 그리고 두 번째 경기에서 내 발목을 잡아끌었던, 웨펀 마스터 웰런이었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형님.”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의 왼쪽 팔을 쳐다봤다. 왼팔의 소매가 헐렁했다.

“지난 경기에서 잘렸습니다. 역시 E 등급에선 잔머리가 통하지 않더군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왼팔이 있었던 곳을 쓰다듬었다. 왼팔이 들어 있어야 할 소매가 뱀처럼 흐느적거렸다.

동정심은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이곳은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는 곳, 투기장이었다.

팔 하나만 잘린 채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대단한 행운이었다.

웰런과 나의 인연은 악연이면 악연이었지 좋은 인연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나와 만나고 싶다는 쪽지를 하인을 통해 보내왔다.

이유가 궁금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무슨 소문?”

“경기에서 살려 준 투사에게 목숨값을 받는다는 소문입니까? 사실입니까?”

그토록 조심했건만 어디서 새어 나간 모양이다. 돈을 뜯긴 투사가 술을 먹고 지껄였는지도 몰랐다.

비자금을 만들어 휴멜과의 싸움에 사용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무너져 내렸다. 소문이 카렌의 귀에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이었기 때문이다.

허튼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카렌과 휴멜의 경계심을 높여 줄 필요는 없었다.

“형님, 사실입니까?”

웰런이 재차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여기 제 목숨값이 있습니다. 모아 놓은 돈이 별로 없어 세 경기 치 대전료보다는 적습니다만 현재 가지고 있는 게 이것뿐입니다. 부족한 것은 나중에라도 반드시 갚겠습니다.”

“나는 달라고 한 기억이 없는데?”

내가 목숨값을 받기 시작한 것은 네 번째 경기부터였다. 따라서 첫 번째 경기의 상대인 웰런이 나에게 목숨값을 지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웰런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팔이 잘리는 바람에 투기장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냥 가면 왠지 뒷간에서 밑도 안 닦고 나온 기분이 들 것 같아 목숨값을 내려는 것이니 받으십시오.”

정작 나에게 목숨값을 줘야 하는 여섯 명의 투사들은 돈을 줄 때마다 손을 벌벌벌 떤다. 그중 두 명은 아예 투기장을 나가 버렸다.

그놈들과 비교하면 웰런은 바보가 아닐까 의심될 만큼 고지식했다.

잔머리만 굴리는 놈인 줄 알았더니 사람을 완전히 잘못 본 것이다.

외팔이가 된 투사가 빈털터리로 새로 시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을 걱정해 줄 여유 따윈 내게 없었다.

나는 웰런이 건네는 돈주머니를 받았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웰런이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의외로 당당해 보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깐!”

웰런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볼일이 끝났는데 왜 부르냐는 얼굴이었다.

나도 왜 불렀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동정심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가 아니었다. 좀 더 그럴듯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돌아올 테니.”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 아래 숨겨 놓은 돈주머니를 꺼냈다. 그동안 모아 놓은 전 재산이었다.

릭과 웰런에게서 받은 돈을 합치니 거의 250루덴쯤 되었다.

평민의 한 달 생활비가 5루덴 정도였으니 250루덴이면 상당한 거금이었다.

전 재산을 들고 다시 E 등급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입구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웰런이 벌떡 일어났다.

방을 갔다 오는 동안 정리한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차라리 모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만큼 허점투성이 계획이었다.

그래도 나는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새가 높이 날고 있다고 하여 활을 쏘지 않는다면 그 새는 영원히 잡을 수 없다. 화살이 닿든, 닿지 않든 그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새를 잡으려면 가장 먼저 활을 쏘아야 한다.

“투기장을 나가면 무엇을 할 생각이지?”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예상대로 웰런은 무계획이었다.

나는 250루덴이 담긴 돈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휙!

짤랑!

웰런은 엉겁결에 돈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슬쩍 안을 살펴보더니 금액에 놀란 듯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잠시 후 두 눈을 꼭 감고 돈주머니를 내게 내밀었다.

“형님, 이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 돈을 준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냥 주는 돈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웰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를 고용하고 싶다.”

“고용?”

“어차피 할 일이 없다면 나를 위해 일해라.”

“일…… 말입니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오래 살고 싶다면 거절하는 편이 좋을 거야. 참고로 거절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일단 들어 보자는 생각이면 후회할 거야.”

나는 최대한 살기를 담은 후 방긋 웃어 주었다.

협박을 할 때는 웃으면서.

휴멜에게 배운 기술이었다.

웰런의 눈빛이 일변했다. 눈동자가 반짝였다. 잔머리가 좋은 놈답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늘 그렇듯 위험은 곧 기회였다. 반대로 기회는 곧 위험이었다.

위험과 기회 사이에서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웰런이 돈주머니를 꽉 붙잡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후회할 텐데.”

“어차피 밑바닥 인생 아닙니까. 조금 더 후회한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나는 웰런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웰런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나는 네 형님이 아니다. 다시는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알겠습니다, 형님.”

웰런이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와아!

쿵!

쿵!

흥분한 사람들이 발을 굴렀다.

투기장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 와중에도 나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투기장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첫 경기를 떠올려 보면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었다.

C 등급 투사가 된 후 첫 번째 경기.

나와 싸우고 있는 상대는 온몸에 털이 덥수룩하게 나 있는, 원숭이처럼 생긴 남자였다.

그는 칼날이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는 단검을 든 채 미친 사람처럼 침을 흘리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털북숭이 원숭이는 단검을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마치 곡예사의 묘기처럼 단검이 손등을 타고 빙글빙글 돌았다.

무기를 함부로 다루는 놈이었다.

“팔다리를 부러뜨린 뒤 살가죽을 벗겨 주마. 기다려라, 아가야. 헤헤헤!”

예상이 틀렸다.

단검의 용도는 무기가 아니었다.

투기장의 투사들은 대체로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들어오는 경우.

강해지기 위해 들어오는 경우.

그리고 살인을 하기 위해 들어오는 경우.

나는 열한 번째 상대가 어디에 포함되는 투사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털북숭이 원숭이는 비명과 피를 좋아하는 완벽한 살인귀였다.

두웅!

북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끼요요요!

원숭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부웅!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린 손가락이 눈을 노리며 날아왔다. 몸을 낮춰 피한 후 주먹을 뻗었다.

끼요욧!

원숭이는 뒤쪽으로 뛰어 내 공격을 피했다. 그러곤 양손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달려왔다.

경기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죽여랏!”

“가슴을 찔러! 심장을 찌르라구!”

“머리다! 피해!”

고함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막무가내 공격이었다. 전투 기술만 놓고 보면 차라리 F 등급 투사가 더 나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원숭이는 여태껏 상대해 보았던 그 어떤 투사보다 빨랐고, 또한 힘이 셌다.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휘어져 들어오는 갈고리 손가락 공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원숭이는 기술적 부족함을 육체적 능력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마치 나처럼.

‘곤란한데.’

나에겐 가장 귀찮은 상대나 다름없었다.

서로의 장기가 같을 경우 승부는 대개 비교 우위에 의해 결정된다. 누가 더 빠른가, 누가 더 정확한가처럼.

원숭이의 육체적 능력은 인간의 기준치를 월등히 웃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과 비교했을 때의 일이었다.

원숭이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육체의 소유자였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질 이유 따위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이언 피스트와 족쇄로 육체의 힘을 억눌러 놓은 상태였다. 건장한 체격의 청년을 등에 업고 경기를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가야, 이리 온! 안 아프게 해 줄게! 헤헤헤!”

원숭이는 일직선으로 달려와 나의 허리를 껴안으려 했다. 척추를 부러뜨릴 속셈이었다. 단검을 물고 있는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발을 놀려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그가 내 쪽으로 몸을 틀면서 개구리처럼 펄쩍 뛰었다.

“큭!”

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젖혀 땅에 드러누웠다.

그의 몸이 내 몸 위를 스치며 날아갔다.

섬뜩!

살기를 느낌과 동시에 바닥을 굴렀다.

쿵!

어느새 다가온 원숭이가 털이 숭숭 나 있는 다리로 내가 누워 있던 곳을 내리찍었다. 땅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안 아프게 해 준다니까! 뭐가 무서워서 자꾸 도망치는 거야? 이 원숭이 같은 아가야!”

원숭이가 나에게 원숭이라 부르며 화를 냈다.

나는 원숭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일어섰다.

‘바보 같은 놈!’

그의 말이 가슴을 울렸다.

나란 놈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자꾸 도망치는 것이냐.

상처 입는 것이 두려운 것이냐.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냐. 아니면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냐.

“그딴 것을 두려워해서는 평생 휴멜을 이길 수 없을 거다, 이 바보 같은 놈아.”

나는 나에게 말했다.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달려들었다.

원숭이가 헤벌쭉 웃으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나도 주먹을 휘둘렀다.

두 주먹이 적을 물어뜯기 위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의 주먹이 먼저 내 배를 때렸다. 아이언 피스트 때문에 속도에서 뒤처진 탓이었다.

퍽!

“커헉!”

배에 구멍이 난 듯한 충격이었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꽈직!

아이언 피스트가 원숭이의 얼굴에 꽂혔다. 원숭이는 앞니가 다 부러진 채 뒤로 쓰러졌다.

제대로 체중이 실린 주먹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가격 직전 배를 얻어맞아 파괴력이 급감한 주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방에 원숭이를 쓰러뜨렸다.

아이언 피스트를 낀 주먹을 쳐다봤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믿어야 했다.

다시는 망설이지 않겠다.

다시는 주저하지 않겠다.

다시는 도망치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몸을 일으키는 원숭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경기가 끝난 후 방으로 돌아왔다.

옷을 벗은 후 배를 살피니 주먹 모양의 멍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욱신거렸다.

똑똑!

카스트로인가 싶어 문을 열었더니 하인인 던츠가 서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들고 있던 음식 바구니를 내게 건넸다.

“내가 아닌데.”

음식을 부탁한 적이 없었기에 하인의 잘못을 일깨워 주었다. 심부름을 착각한 모양이었다.

“웰런 투사님의 쪽지가 들어 있습니다.”

문을 닫으려고 하자 던츠가 황급히 음식 바구니를 문틈으로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웰런이?”

그는 오늘 아침에 투기장을 떠났다. 좀 더 투기장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계획을 위해선 떠나야 했다.

그 계획 중 하나는 내가 찾아갈 때까지 절대로 연락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빨리 계획이 어긋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음식 바구니를 받으며 동시에 던츠의 손에 수고비를 쥐여 주었다.

슬쩍 손안을 확인한 던츠가 미소를 지었다.

“빈 바구니는 문 앞에 놔두시면 됩니다.”

웰런의 쪽지는 바구니 가장 밑에 숨겨져 있었다. 쪽지를 펼치자 밑도 끝도 없이 한 문장이 달랑 적혀 있었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누가 훔쳐볼 것을 대비해 일부러 간단하게 쓴 듯했다.

최소한의 정보가 적혀 있었지만 나는 쪽지가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깨달았다.

웰런은 짧은 문장을 통해 내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내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이 떠올린 새로운 계획을 실행하겠노라고.

물론 웰런이 떠올린 ‘더 좋은 생각’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투기장을 나가 버린 이상 그와 연락할 방법은 전무했다. 연락을 하지 못하니 말릴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웰런이 배신하지 않았다고, 나의 안목이 옳았다고, 믿는 것이었다.

“버리는 패라고 생각하자. 그러는 편이 좋겠어.”

어차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먼 미래의 가능성에 투자한 것이었다.

일단 씨앗을 심었으니 기다려 보기로 하자.

아름다운 꽃을 품고 있는 씨앗인지, 싹은커녕 시커먼 거름이 될 썩은 씨앗인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정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생각하느라 나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숨을 내쉬었다. 몸 안에 휘몰아치던 마나의 기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나 수련을 끝내고 점심을 먹고 있는데 던츠가 카스트로의 전언을 가져왔다.

“안젤리아 님이 오셨으니 응접실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알았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고 던츠를 따라나섰다.

카렌이 지정해 준 시간은 두 달이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이 딱 두 달째 되는 날이었다. 수련만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응접실은 여전히 화려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카스트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카스트로가 방을 나가자마자 카렌이 귀족 영애의 가면을 벗어 던졌다. 응접실만큼이나 화사한 미소가 사라지고 나른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오랜만이야.”

나는 아무 말 없이 카렌을 쳐다봤다.

카렌이 방긋 웃었다.

그때였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나는 고개를 옆으로 획 움직였다.

픽!

날카로운 뭔가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뺨이 축축해졌다.

그것이 피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을 줘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잽싸게 몸을 일으킨 후 쓰러진 의자를 방패 삼아 카렌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

카렌의 공격은 위협 차원이 아니었다. 진짜로 목이 잘려 나갈 뻔했다.

그녀는 한 줌의 살기도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치명적인 공격을 펼쳤다.

“그렇게 화내지 마. 확인해 본 것뿐이니까. 마나 수련을 열심히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기에 난 또 게으름을 피운 줄 알았지 뭐야. 확인 결과는 합격! 축하해. 역시 바퀴벌레라는 별명답게 이번에도 살아남았구나.”

짝짝짝!

카렌이 작게 박수를 쳤다. 축하하는 건지 아쉬워하는 건지 알쏭달쏭한 말투였다.

카렌의 공격.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휴멜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던, 십수 명의 인간을 먼지로 만들었던, 푸른 빛깔의 초승달.

색깔도 없었고 형체도 없었지만 카렌의 공격은 푸른 초승달이 품고 있었던 기운과 흡사했다.

그 기운이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마나였다.

카렌은 마나를 응축하여 암기처럼 발사한 것이었다.

마나를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니.

솔직히 충격이었다.

마나를 치료 목적으로만 사용하던 나에게 카렌의 일격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과 같았다. 지금보다 더욱더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물론 깨달음을 준 것과 내 목숨을 노린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였다. 머리가 아찔해질 만큼 분노가 끓어올랐다.

“근데 참 이상하네. 내 공격을 피할 정도면 제법 마나에 익숙해졌다는 뜻인데, 어째서 마나가 느껴지지 않지? 흐음…….”

카렌이 의심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확인이 끝났으면 나는 가 보겠다.”

나는 얼른 말머리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을 나오는 동안 카렌의 날카로운 시선이 계속 목덜미를 간질였다.

응접실을 나오자마자 카스트로를 찾았다.

“외출 준비를 해 줘.”

“또 외출입니까?”

“병기점에 갈 일이 있어.”

“하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고 들었습니다만.”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카스트로가 불만 섞인 얼굴로 테론을 불렀다.

나는 테론과 함께 투기장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 지난 거리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담벼락 그늘에 아직까지 녹지 않은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봄이었지만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멋을 내기 위해 얇은 옷을 입고 나온 사람들이 후회막심한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은 계절의 흐름과 상관없이 사시사철 여름인 곳이었다. 그것도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뜨거운 한여름이었다.

깡!

깡!

골목을 돌자 대장간 ‘드래곤의 숨결’이 나타났다.

“할렌드! 네 손님이다!”

내 얼굴을 알아본 대장장이 한 명이 턱수염을 불렀다.

병기점에서 먼지를 털고 있던 턱수염, 할렌드가 알은체하며 내게 다가왔다.

“주문했던 족쇄를 받으러 왔습니다.”

일주일 전 투기장의 하인인 던츠를 통해 족쇄를 주문했었다.

주문한 족쇄는 지금 차고 있는 것보다 정확히 두 배 더 무거운 족쇄였다.

마나 수련을 통해 나는 점점 더 많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나의 사용량이 증가할수록 육체의 힘 역시 점점 더 강해졌다.

지금에 와서는 아이언 피스트와 족쇄를 차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선 좀 더 무거운 쇳덩이가 필요했다.

할렌드가 난처한 얼굴로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는 나의 시선을 피했다.

자존심이 강한 대장장이의 행동이 아니었고, 나는 족쇄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늘이 족쇄를 받기로 한 날이 아닙니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오늘이 맞소. 그런데…….”

“그런데?”

“크흠!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소.”

할렌드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기한은 넉넉하게 드린 것 같습니다만.”

“그게…… 에잇! 만드는 도중 괜찮은 생각이 떠올라 내 마음대로 족쇄의 모양을 바꾸었소. 그래서 아직 완성이 안 된 것이오.”

그는 오히려 내게 화를 내었다. 차라리 이 모습이 그다웠다.

처음부터 추궁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도전적으로 쳐다보는 할렌드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그럼 언제까지 완성됩니까?”

“마음에 안 들면 안 사면 되잖…… 응? 언제까지 완성되냐고?”

할렌드는 지레짐작으로 소리를 버럭 지르다 벙찐 표정이 되었다.

“크흠! 마무리 작업만 남았으니 늦어도 오늘 오후쯤이면 완성될 거요. 분명히 마음에 들 거라 확신하오!”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이제야 일류 대장장이다웠다.

“대장간에서 마음대로 바꾼 것이니 돈을 더 달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나는 할렌드가 뭐라 말하기 전에 얼른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등 뒤에서 테론이 조용히 물었다.

“어차피 바람 쐴 겸 나온 거니까 이참에 마을 구경이나 하지, 뭐.”

“목적지 이외의 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규칙에 어긋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막아 보든가?”

나는 뒤에서 졸졸 따라오고 있는 테론을 돌아봤다.

서서히 살기를 일으켰다.

테론이 입술을 꽉 깨문 채 땀을 뻘뻘 흘렸다.

옆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테론을 쳐다봤다. 겨울 날씨에 버금가는 꽃샘추위에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으니 의아할 만도 했다.

“투사와…… 싸우는 것도…… 규칙에…… 어긋납니다.”

테론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살기를 거뒀다.

“헉, 헉…….”

테론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가 볼까?”

나는 다정하게 말한 뒤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사과 하나를 사서 베어 먹으며 건달처럼 어슬렁거렸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벌써 다섯 번째 외출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하인에게 심부름시키면 될 것을 일부러 내가 간다고 했다.

나는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투기장의 공기는 항상 음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더욱 심했다. 핏빛 광기와 끈적끈적한 살기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을의 공기는 달랐다. 폐는 물론, 머릿속까지 정화해 줄 만큼 청량했다.

다시 한 번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아앗!”

열 살 무렵의 소년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나에게 쓰러졌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소년의 허리를 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와 함께 순간적으로 소년의 작은 손이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소매치기였다.

나는 붙잡은 허리를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철퍼덕!

“아아악!”

아까와 달리 소년이 진짜로 비명을 질렀다. 깨진 무릎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어린아이에게 무슨 짓이에요!”

과일 바구니를 머리에 짊어지고 가던 여자가 얼른 뛰어와 애처롭게 울고 있는 소년을 일으켜 세우며 쏘아붙였다.

“어휴! 이 상처 좀 봐! 이봐요, 당신! 이렇게 작은 아이를 집어 던지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여자의 분노 어린 질책을 듣자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어째서 소매치기인 꼬맹이가 아니라 내가 욕을 먹는 거지? 단지 내 돈을 지켰을 뿐인데.

화악!

짜증이 폭발하면서 살기가 일었다.

“꺄아악!”

여자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바구니가 뒤집어지면서 과일들이 땅바닥에 쏟아졌다.

생전 처음 느껴 봤을 흉포한 기운에 여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스윽!

항상 뒤에만 서 있던 테론이 여자의 앞을 막아섰다.

“살인은 규칙에 어긋납니다.”

살인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테론의 말을 듣자 다시 짜증이 솟구쳤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막아 보든가?”

나는 살기를 더욱 내뿜었다.

채앵!

테론이 검을 뽑았다.

깜짝 놀란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테론 뒤에 숨어 있던 여자가 소년을 꽉 끌어안았다.

수행원의 역할은 투사의 안전을 지켜 주는 것이었다. 그런 수행원이 투사와 싸운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불법 중의 불법이었다.

고지식한 테론이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막아서려 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감정이 가라앉자 주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행인들이, 마치 오크를 보듯 혐오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테론의 시선이, 여자의 시선이, 행인들의 시선이 낯익었다.

증오와 분노. 원망과 무력감.

바로 휴멜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었다.

커다란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살기를 거뒀다.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기다리십시오!”

뒤에서 테론이 쫓아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째서 내가 변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했다.

일부러 복잡한 골목길로 들어가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니 테론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했다.

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가자 자연스럽게 마을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은 매우 컸다. 눈이 어지러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 물고기 모양의 분수가 있었다. 분수 주위로 아름답게 꾸민 아담한 화단과 나무로 만든 긴 의자가 보였다.

나는 빈 의자에 앉아 최근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무엇이든 힘으로 해결하려 했으며 살기를 남발했다. 특히 하인이나 나보다 등급이 낮은 투사에게 더욱더 심하게 행동했다.

나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개차반이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투기장의 광기 어린 분위기에 오염된 것일 수도 있다. 생명체와 같은 나의 마나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전생의 성격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나는 변하고 있었다.

인간적으로는 좋지 않은 방향이었지만, 투사로선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강해지고는 싶었지만 그러는 동안 휴, 멜, 처, 럼,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들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진짜로 변하긴 변했구나.”

마음이 무척이나 씁쓸했다.

나를 괴물 쳐다보듯 바라보던 여자의 눈빛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 * *

마을을 둘러보다 태양이 머리 위를 지날 때쯤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왔소.”

할렌드는 아침과 다르게 당당했다. 오히려 왜 이제 왔냐는 듯 나를 책망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족쇄를 얼마나 잘 만들었기에 이렇게 뻔뻔해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아, 어떻소?”

할렌드가 완성품을 건넸다.

기존의 족쇄에 비해 몇 배나 작은 크기였다. 모양도 예쁘장한 장식품 같았다.

팔찌 모양의 족쇄였다.

크기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무게는 지금 차고 있는 족쇄에 버금갔다.

크기와 모양은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무게가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히 전에 만들었던 족쇄보다 두 배 정도 무겁게 만들어 달라고 했을 텐데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그 물건을 잘 보시오.”

묘하게 자신감 넘치는 대장장이의 말대로 나는 한 번 더 팔찌 모양의 족쇄를 살폈다.

평범한 팔찌가 아니었다. 팔찌에는 네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구멍은 뭡니까?”

“용케 발견했군. 역시 눈썰미가 좋아. 하하하!”

구멍이 네 개씩이나 뚫려 있는데 발견 못 할 리가 없었다.

“그 구멍에 이 쇠막대를 끼워 보게.”

나는 할렌드가 준 손톱 길이의 작은 쇠막대를 네 개의 구멍 중 한 곳에 끼워 넣었다.

딸깍!

“음?”

쇠막대가 팔찌에 장착되는 순간 미약하게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나의 기운과 함께 팔찌의 무게가 두 배로 늘어났다.

“설마 아티팩트?”

나는 깜짝 놀랐다.

“아티팩트임을 단번에 알아보다니. 역시 보통 손님이 아니었군. 아이언 피스트를 끼고 날뛸 때부터 내가 알아봤지. 하하하!”

할렌드가 놀란 나를 보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쇠막대 하나를 끼울 때마다 팔찌의 무게가 증가하오. 쇠막대 하나당 대략 팔찌 하나라고 보면 될 거요.”

즉, 쇠막대를 다 끼우면 처음보다 다섯 배 무거워진다는 말이었다.

원하는 대로 무게를 조절할 수 있으니 육체를 단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족쇄였다.

“마음에 드시오? 그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시오? 때마침 마법사 친구 놈이 찾아온 덕분에 간신히 만든 물건이오. 그러니…….”

힘들게 만들었으니 알아서 가격을 매겨 보라는 뜻이었다.

장인정신이 발동한 대장장이가 멋대로 만든 물건이었기에 사실은 돈을 더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물건이 워낙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바꿀 족쇄값을 미리 준다고 생각하자.’

쇠막대를 끼울 구멍이 네 개이니 나는 약속한 금액의 네 배를 주기로 했다.

“말도 안 되오! 무려 아티팩트란 말이오!”

예상했던 대로 할렌드가 펄쩍 뛰었다.

“싫으면 관두십시오. 그냥 평범한 족쇄나 사 가겠습니다.”

나는 흥미를 잃은 척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끄응…….”

고민 좀 될 것이다.

아이언 피스트조차 구석에 처박혀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보다 다섯 배나 무거운 족쇄가 쉽게 팔릴 리 없었다. 아니, 나처럼 한계를 초월한 인간이 또 있을 리 없으니 영원히 팔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할렌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알았소! 사 가시오! 에잉!”

할렌드의 말에 옆에 있던 모든 대장장이들이 펄쩍 뛰었다.

“절대로 안 돼!”

“아티팩트라고! 아티팩트의 가치를 몰라서 그래?”

“차라리 나한테 팔아!”

대장장이들이 난동을 부리기 전에 차고 있던 족쇄를 풀고, 새로운 족쇄를 양쪽 발목에 하나씩 찼다. 그러곤 쇠막대를 하나씩 박아 무게를 두 배로 늘렸다.

돈주머니를 던져 주고 얼른 대장간을 빠져나오자 등 뒤로 ‘저 날도둑 잡아라!’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족쇄를 처음 찼던 날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 묵직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무게에 익숙해질 겸 가볍게 달리기를 시작했다.

투기장 앞에 테론이 서 있었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의 옆을 스윽 스쳐 지나갔다.

사과는 하지 않았다.

테론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뒤를 쫓아올 뿐이었다.

투기장이 발칵 뒤집혔다.

나는 어린 소년을 죽이려고 한 살인미수범에, 여인을 겁탈하려고 한 강간범에, 그것을 막으려고 한 수행원을 따돌리고 도망친 규칙 위반자가 되어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투기장에서 바로 쫓겨나야 할 테지만 운이 좋게도 나는 제법 인기가 있는 투사였다.

역대 최단기간에 C 등급에 도달한 천재 투사였으며, 드레이크를 죽인 전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나를 무작정 쫓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투기장의 관리인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의 주인인 안젤리아, 즉 카렌이 불려왔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리고 카렌이 투기장의 관리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니, 그것은 소문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 결과…….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작은 조각배 위에 누워 있어야 했다. 배가 위아래로 출렁거리며 해류를 따라 천천히 흘러갔다. 달빛이 고운 밤이었다.

쏴아아!

파도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시커먼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보석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구름에 반쯤 묻혀 있는 초승달이 여인의 눈썹처럼 고왔다. 숨을 쉴 때마다 짭조름한 냄새가 났다.

몸을 일으켰다.

멀리 나를 버리고 떠나는 함선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각배 한쪽 구석에 투박한 모양의 단검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카렌의 글씨체였다.

재주껏 살아남아. 기한은 3년.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와 나를 불쾌하게 만들지 말아 줘.

편지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편지가 바람을 타고 밤바다 너머로 사라졌다.

“살아남으라니. 가장 쉬운 과제잖아.”

쏴아아!

쏴아아!

파도 소리가 점점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망망대해 안에 섬 하나가 떠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섬은 사형수의 잘린 머리처럼 섬뜩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카스트로가 말해 준 섬의 이름이 떠올랐다.

적무도赤霧島.

핏빛 안개의 섬.

조각배가 천천히…… 천천히…… 어둠으로 물든 섬으로 흘러갔다.

to be continue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