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사가 되다 (6/45)

투사가 되다

휴멜과 헤어진 후 곧장 카렌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하녀를 불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낯익은 얼굴의 하녀, 릴리가 겁에 질린 얼굴로 빵과 스튜를 가져다주었다.

재프 일당이 나와의 대결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릴리는 굉장히 고분고분하게 내 말을 들었다.

배를 채운 후 의자에 누워 잠을 청했다.

휴멜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제대로 쉴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나를 극한까지 몰고 갈 것이 분명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는지 방 안이 어두컴컴했다. 비몽사몽간에 주위를 둘러보자 카렌이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범한 거야, 아니면 머리가 나쁜 거야?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알고는 있어?”

나는 크게 하품을 하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잠을 자고 났더니 배가 고팠다. 점심때 먹다 남은 빵을 입속에 넣었다. 조금 굳었지만 먹을 만했다.

“기가 막히는군. 빵 그만 먹고 이 옷으로 갈아입어.”

카렌이 들고 있던 옷을 내 쪽으로 던졌다.

온통 검은색으로 된 옷이었다.

“암살이라도 시키려는 건가?”

“그 실력으로 암살을? 아직 100년은 일러.”

카렌이 코웃음 치며 나를 비웃었다.

나는 옷을 든 채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뭐해? 빨리 안 갈아입고?”

그래도 내가 망설이고 있자 이유를 깨달은 그녀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창피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네놈의 알몸은 이미 질리도록 보아 온 몸이야. 옷 갈아입는 것 정도로 뭘 그래? 새삼스럽게.”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등을 돌린 채 옷을 갈아입었다.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뭐야? 아니면 사용하고 싶은 무기라든가. 잘 생각해 보고 말해. 공짜로 무기를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옷을 다 갈아입고 돌아서자 카렌이 물었다.

무기라…….

그동안 내가 사용했던 무기들을 떠올려 보았다. 잡다한 것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무, 기, 로 사용했던 것은 세 개가 전부였다.

돌멩이. 단검. 롱 소드.

일단 돌멩이를 제외하고.

남은 것은 단검과 롱 소드.

손안에 남아 있는 단검과 롱 소드의 감촉을 보아 나는 전생에 검을 사용했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검을 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정신적인 면도 그렇고 육체적인 면은 더욱 그러했다.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 같은 무기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휴멜은 나에게 최대한 빨리 강해질 것을 요구했다.

몸에 남아 있는 감각을 일깨우며 검술을 익히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다.

물론 나에게 검의 재능이 넘쳐흘러 생각보다 빨리 원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의 재능이 휴멜의 재능을 넘어설 것 같지가 않았다. 마음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는데 결과가 좋게 나올 리 없었다.

나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는 나만의 무기가 필요했다. 검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빨리 강해질 수 있는 나만의 무기가 필요했다. 휴멜의 무기와 차별화된 나만의 무기가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너클Knuckle을 줘.”

나의 무기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육체였다. 그리고 육체의 힘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검이 아니라 주먹이었다.

“너클?”

카렌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리고 단검 하나하고.”

단검은 꼭 싸울 때가 아니더라도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가지고 있으면 편리할 것이다.

“휴멜 님 말만 믿고 미리 검을 골라 놨는데. 헛수고였잖아. 귀찮은데 그냥 검으로 하면 안 될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카렌을 쳐다봤다. 카렌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따라와.”

나는 카렌을 따라 방을 나갔다.

카렌은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으슥한 건물로 나를 끌고 갔다.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 주위가 대낮처럼 밝았다. 많은 수의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호엔레른 백작가의 무기 창고야.”

카렌이 다가가자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온 게 싫은가 보네?”

“아, 아닙니다. 방명록을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여쭤 본 것입니다.”

카렌이 말하자 옆에 서 있던 다른 병사가 서둘러 변명했다. 병사들의 얼굴에서 은은한 공포가 느껴졌다. 이들은 아름다운 얼굴 안쪽에 숨겨진 카렌의 이중성을 알고 있었다.

“이놈에게 무기를 주려고 왔어. 휴멜 님에게 허락받은 일이니까 방명록에는 알아서 적당히 써 놓도록.”

“휴멜 님께서…….”

병사들이 나를 쳐다봤다.

노예의 본분을 깡그리 무시한 나의 만행이 제법 알려진 듯 병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빨리 따라와.”

카렌은 어느새 문을 열고 무기고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병사들의 살벌한 눈빛을 뚫고 카렌에게 다가갔다.

무기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쇠붙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온갖 종류의 무기가 무기고 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종류도 종류였지만 양이 대단했다. 차곡차곡 쌓인 롱 소드만 해도 수천 자루는 되어 보였다.

내가 넋을 잃고 구경하고 있자 카렌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달이 하늘 꼭대기에 오면 무기고에서 내쫓을 거니까 알아서 해.”

카렌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하늘을 쳐다보자 달이 하늘 꼭대기를 향해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얼른 무기의 바다를 헤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무기는 역시 검이었다.

평범한 롱 소드뿐만 아니라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 투 핸드 소드Two Hand Sword, 레이피어Rapier, 클레이모어Claymore, 시미터Simitar 등 각양각색이었다.

날이 활처럼 휘어진 시미터를 들고 허공에 휘둘러 보았다.

휙!

휘익!

살짝 휘둘렀는데도 시미터가 바람의 결을 갈랐다. 모양새만큼이나 날렵한 검이었다.

시미터 이외에도 바스타드 소드와 클레이모어를 휘둘러 보았다.

“대량으로 만든 것들이지만 백작가에서 자랑하는 대장장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들이야. 담금질도 제대로 되어 있고, 무게중심도 제법 잘 잡혀 있어. 솔직히 말해 병사들이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검이야.”

카렌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에 들었다.

역시 나는 검을 사용했었나 보다. 좋은 검을 보니 그것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눈을 돌려 다른 구역을 살펴보았다.

철퇴 구역을 지나니 배틀 엑스Battle Ax 구역이 나왔다. 배틀 엑스 구역 옆에는 다양한 모양의 창이 세워져 있었다. 창 옆에는 활과 화살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암기와 같이 변칙적인 무기였다. 모양을 보고도 그 용도를 알 수 없을 만큼 희한한 무기가 한가득 있었다.

드래곤 모양의 조각상을 손으로 집으려 하자 카렌이 넌지시 말했다.

“어설프게 찔리면 고통만 늘어날 테니 이왕이면 두 손으로 잡아. 그래야 고통이 없을 거야.”

만지는 순간 고슴도치처럼 바늘이 튀어나오는 암기였다. 당연히 바늘 끝에는 독이 묻어 있을 것이다.

나는 얼른 손을 거뒀다.

“구경 다 했으면 이제 무기를 골라.”

카렌이 깐깐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민했다.

무기고 안에 있는 무기들은 검, 창, 활처럼 대부분 병사들이 사용할 만한 무기뿐이었다. 그나마 암기 정도가 예외였지만 암기는 말 그대로 암기일 뿐 제대로 된 무기가 될 수 없었다.

“무기는 이것이 전분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렌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클이 필요하다고 그랬지? 이곳에 있는 무기는 대부분 병사들을 위한 것이니 네가 원하는 건 없을지도 몰라. 저쪽을 한번 찾아봐.”

카렌은 무기고의 가장 구석진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차곡차곡 정돈되어 있는 다른 곳과는 달리 카렌이 지목한 곳은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이것도 무기인가?”

“분류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냥 쌓아 놓은 거야. 나도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니까 알아서 뒤져 보도록 해.”

날카로운 것들이 많아 맨손으로 뒤적이기 힘들었다.

나는 쇠막대기를 찾아 그것으로 무기 더미를 뒤적였다.

짤랑!

철그렁!

바닥에 떨어진 무기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카렌의 말처럼 무기 더미에는 잡다한 무기들만 가득했다. 무기 더미의 바닥까지 뒤적인 후에야 간신히 너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는지 온통 녹이 슬어 있는 너클이었다. 나머지 한 짝은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백작가의 무기고까지 들어왔는데 건진 것이 고작 녹슨 너클뿐이라니.

“무기는 몇 개나 가져갈 수 있지?”

“보기보다 욕심이 많네. 개수는 상관없으니 필요한 만큼 골라. 물론 들고 가지 못할 만큼 많으면 곤란하겠지만.”

나는 창문 너머로 달의 위치를 확인했다. 달은 거의 하늘 꼭대기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우선 검이 놓여 있는 구역에서 가볍고 날이 잘 선 단검 하나를 챙겼다. 그러곤 암기 구역으로 가 쓸 만한 암기가 없는지 자세히 살폈다.

내가 손가락 크기의 작은 막대를 들자 웬일인지 카렌이 부연 설명을 해 줬다.

“스네이크Snake.”

“스네이크?”

“막대 끝에서 바늘 모양의 암기가 발사되는 암기. 보통 이런 종류의 암기는 은밀하게 사용해야 하지. 암기가 날아가는 방향이 일직선이기 때문에 피해 버리면 그만이거든. 하지만 스네이크는 달라. 암기의 움직임이 마치 뱀처럼 요동치지. 그 움직임 때문에 피하기가 제법 어려워. 그래 봐야 어차피 수준 이하의 하수들에게나 통용되는 암기지만.”

나는 암기 구역을 계속 살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서늘하면서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이건?”

마나의 기운이 분명했다.

나는 커다란 항아리 뒤쪽에서 마치 일부러 숨긴 듯 놓여 있는 작은 반지를 찾아냈다.

쌀알만 한 크기의 파란색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였다. 그 파란색 보석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칫! 발견해 버렸네.”

카렌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 반지는 뭐지?”

“마나석 안에 마법을 저장해 놨다가 나중에 사용할 수 있는 그냥 평범한 반지야.”

“…….”

“그냥 평범한 반지라니까. 신경 쓸 것 없어.”

“…….”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반지는 절대로 평범한 반지가 아니었다.

“아티팩트군.”

“칫!”

카렌이 다시 혀를 찼다. 그녀의 반응에서 나는 횡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사들을 위한 무기고에 아티팩트가 놓여 있다니.

호엔레른 백작은 장난이 지나친 인물이거나 아니면 아티팩트의 가치를 모르는 바보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마법을 저장했다가 나중에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 마법은 몇 개까지 저장할 수 있지?”

“모두 세 개. 그리고 1레벨 마법밖에 저장할 수 없어.”

“사용 방법은?”

“마법사를 시켜 필요한 마법을 반지의 마나석에 불어 넣으면 돼. 그런 후에 저장되어 있는 마법의 이름을 외치면 자동으로 마법이 시전되지.”

“지금은 무슨 마법이 들어 있지?”

“나도 몰라. 아마 아무 마법도 들어 있지 않을걸. 이 반지는 5년째 이곳에 있었다고.”

횡재에 대한 기쁨이 가시자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카렌은 어떻게 이 반지의 용도와 사용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일까?

“5년 동안이나 이 자리에 있었다고 했지? 어째서 반지를 회수하지 않고 가만 놔둔 거지?”

카렌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 반지는 전대 호엔레른 백작이 숨겨 놓은 아티팩트야. 장난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멍청이였지. 얼마나 장난을 좋아했느냐 하면 죽기 직전에 남긴 유언이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그동안 모아 놓은 아티팩트들을 저택 곳곳에 숨겨 놓았으니 찾는 사람이 임자다’였다고 하더라. 정말 황당하지 않아? 찾는 사람이 임자라니.”

“찾는 사람이 임자라…….”

아티팩트가 무기고에 놓여 있는 이유는 알았지만 첫 번째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반지의 위치를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가져가지 않았지? 찾는 사람이 임자라며?”

“전대 호엔레른 백작의 보물찾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거든.”

“조건?”

“아티팩트의 소유권은 백작가의 인물로 제한하되, 기사 훈련생 이상은 자격이 없다는 조건.”

어처구니없는 조건이었다.

전대 호엔레른 백작의 조건은 백작가의 보물을 아랫것들에게 그냥 나눠 준다는 의미와 같았다.

상식적으로 지금의 호엔레른 백작이 그러한 조건을 용납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아티팩트 반지가 내 손에 들려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으면 물어보면 된다.

“그러한 조건이면 백작가에 손해가 클 텐데? 지금의 호엔레른 백작이 동의했을 리가 없어.”

“물론이야. 전대 호엔레른 백작이 죽자마자 그 자리를 물려받은 지금의 백작은 마법사들을 불러 아티팩트들을 모두 회수했어.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백작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효자였다는 거야. 귀족 주제에 말이지. 한마디로 말해 제 아비를 꼭 닮은 멍청이지.”

자신의 주인의 주인을 그녀는 거리낌 없이 비웃었다.

“백작은 아버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어. 그래서 괜찮은 것들만 추려 낸 다음 나머지는 도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지. 네가 들고 있는 반지가 바로 그중 하나야. 언뜻 보면 유용해 보이지만 막상 사용하려고 하면 제한이 상당히 많은 아티팩트지.”

카렌의 마지막 말을 듣자 횡재했다는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법을 세 개밖에 담지 못하는 저장 용량이나, 1레벨 마법밖에 안 되는 마법 제한은 그리 큰 제한이 아니었다. 가장 큰 제한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

마법 반지를 사용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바로 마법사에게 마법을 담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마법사를 만나 마법을 부탁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짓이었다.

지킬 수 없는 자에게 보물은 재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지를 보여 주는 순간 마법사에게 살해당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반지를 든 채 고민하고 있자 카렌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귀찮게 하는군. 반지는 나한테 줘. 백작가의 마법사를 불러 마법을 받아 올 테니. 휴멜 님 명령만 아니었으면……. 칫!”

카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너클 하나. 단검 하나. 마법 반지 하나.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무기고를 나오려는 순간 카렌의 말이 떠올랐다.

전대 백작이 저택 곳곳에 아티팩트를 숨겨 놨다고 했었지.

그 말은 무기고 안에 아티팩트가 더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기고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마나의 냄새를 맡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운이 좋군.’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잡동사니 무기를 쌓아 놓은 곳에서 마나의 짙은 기운이 느껴졌다. 기운의 정도로 봤을 때 마법 반지보다 훨씬 상위의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시간 다 됐어. 나가자.”

“잠깐만. 하나만 더 찾고.”

나는 재촉하는 카렌을 무시하고 쇠막대기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파헤쳤다.

톱니바퀴처럼 생긴 원반 모양의 무기를 들추자 그 아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고 납작한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시간 다 됐다니까.”

나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미처 확인해 볼 겨를도 없이 품 안에 몰래 집어넣었다.

나는 카렌에게 떠밀리듯 무기고를 나왔다.

“마구간 있는 데서 기다리고 있어. 죠가 안내해 줄 거야.”

나는 죠라고 불린 병사를 따라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까지 안내한 후 다시 무기고로 돌아갈 때까지 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날씨가 제법 선선했다.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마차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마차에 달린 작은 창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타. 네놈이 굼뜨게 움직이는 바람에 늦어졌잖아.”

마차의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남자처럼 헐렁한 셔츠에 바지만 입고 있던 카렌이 웬일인지 눈이 부실 만큼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카렌의 드레스는 여성미를 노골적으로 강조한 옷이었다.

코르셋을 얼마나 조였는지 허리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잘록했다. 또한 옷의 앞부분이 깊이 파여 있어 가슴이 절반이나 드러나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자 나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카렌의 가슴이 출렁거렸던 것이다.

나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천장만을 노려봤다.

“반지는?”

카렌의 드레스와 가슴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아티팩트가 떠올랐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반지를 건넸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묻지 않았으면 자신이 가지려고 했던 게 분명했다.

“회복 마법인 힐Heal, 불꽃 마법인 파이어 볼Fire Ball, 전격 마법인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를 담았어. 내 마음대로 선택한 마법인데 마음에 들어?”

“힐이 나에게 통할까?”

하인들의 말처럼 악마의 저주를 받았는지 나의 육체는 포션이나 신성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네놈이 악마의 자식인 걸 깜박 잊고 있었네.”

카렌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힐을 선택한 것은 고의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냥 이걸 읽어 봐. 난 조금 잘 테니까. 밤에 활동하면 머릿결 다 상하는데. 휴멜 님도 너무하시지.”

카렌이 얇은 종이 묶음을 내밀었다.

나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조용히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종이에는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이 적혀 있었다.

그곳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도박장이었다. 그것도 카드나 주사위처럼 평범한 도박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몬스터를 싸우게 하는 결투 중심의 도박장, 즉 투기장鬪技場이었다.

투기장에서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싸우는 것.

그리고 무조건 이기는 것.

‘휴멜이 준비해 뒀다는 무대가 투기장이었군.’

확실히 실전만큼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투기장은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 하는 곳이었다.

살아남는다면…… 틀림없이 강해질 것이다.

전의가 불타올랐다.

* * *

“옷이 불편해서 잠이 안 오네.”

카렌이 짜증을 내며 눈을 떴다. 나에게 짜증을 퍼붓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왜 귀족 영애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거추장스러운 옷 따위 입고 싶어서 입은 게 아니야. 다 네놈 때문이라고.”

“나 때문이라고?”

“앞자리는 귀족밖에 앉을 수 없단 말이야.”

다시 말해 내가 싸우는 모습을 관람한 뒤 휴멜에게 보고하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발전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경고였다.

“역시 이런 옷은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 호흡 곤란으로 실신하는 귀족 여인들이 많다고 하더니 진짜로 숨쉬기가 힘드네. 아, 답답해.”

마차는 한참을 달렸고, 카렌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기절할 것 같다는 말과 다르게 그녀는 쉼 없이 떠들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히히힝!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잠시 후.

똑똑!

마차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벌꺽!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마부가 아니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스무 살 즈음의 청년이 문밖에 서 있었다. 여자인가 싶을 만큼 예쁘게 생긴 미청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듀란이라고 합니다.”

듀란이 손을 내밀었다.

카렌이 듀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어느새 나비 모양의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고마워요, 듀란.”

카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 귀족의 영애처럼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변한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부채를 흔드는 등의 작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품위가 흘러넘쳤다.

그동안 내가 봐 온 카렌이 맞나 싶을 만큼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아가씨께선 이곳이 처음이십니까?”

“그래요.”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이름을 꼭 말해야 하나요?”

“호칭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럼…… 안젤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안젤리아 아가씨.”

카렌이 도도한 몸짓으로 부채를 흔들었다.

투기장은 귀족들이 즐기는 유흥거리였지만 떳떳하게 드러낼 만큼 고급스러운 유흥거리는 아니었다. 따라서 진짜 귀족이라면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듀란의 표정에서 경계심이 수그러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관람이십니까? 아니면…….”

“투사를 등록하러 왔어요.”

“아! 그러셨군요. 투사로 등록하실 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카렌은 부채로 나를 가리켰다.

듀란이 내 쪽을 쳐다봤다.

기분 나쁜 시선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이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비웃음이 스쳤다.

“투사가 되실 분이라고 하기엔 몸이 상당히 호리호리하군요. 안젤리아 아가씨, 이곳은 험한 곳입니다.”

듀란의 말투를 보아하니 나를 카렌의 밤 시중이나 드는 시종으로 착각하는 듯했다.

미청년의 착각에 나는 불쾌했고, 카렌은 흐뭇해했다.

“칼리온이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보기보단 힘이 세답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듀란.”

“안젤리아 아가씨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투사로 등록하기 위해선 절차가 필요하니 안으로 들어오시죠.”

듀란은 거대한 원형경기장 안으로 카렌을 안내했다.

“반항하지 말고 이곳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이것은 명령이야. 그리고 부디 휴멜 님을 실망시키지 마.”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카렌이 듀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육중한 체구의 남자가 마차로 다가왔다.

“제 이름은 카스트로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나는 잠자코 마차에서 내렸다.

카렌의 명령은 곧 휴멜의 명령이었다.

카렌의 말처럼 나는 휴멜을 실망시켜선 안 되었다. 그를 능가할 만큼 강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주변의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원형 모양의 투기장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길가에 좌판을 펼친 상인들이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손님! 물건 좀 보고 가세요!”

“아르센 제국에서 건너온 장식품 팝니다! 지금 아르센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장식품들입니다! 보고들 가세요!”

투기장 옆쪽으로 주점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술에 취한 주정뱅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렀다.

그때 투기장 안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죽여! 죽여 버려!’라는 외침이 험악한 욕설과 함께 들려왔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윽고 조금 전보다 훨씬 큰 함성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광란의 밤이었다.

카스트로를 따라 투기장의 뒷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길게 뻗어 있었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따라 꽤 오랫동안 아래로 내려갔다.

벽 중간 중간 빛나는 구슬이 박혀 있었다.

희미하게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라이트Light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계단이 끝나자 어두운 복도가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복도를 걷고 있는데 천장의 구슬과 구슬 사이, 빛이 비치지 않는 사각지대에 시커먼 그림자가 달라붙어 있었다.

휘익!

의아해할 시간도 없이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그림자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하압!”

나는 아슬아슬한 거리로 단검을 피하며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천장에서 뛰어내린 속력에 힘을 보태기 위해 그림자의 등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쿵!

“컥!”

그림자는 개구리처럼 내 발밑에 대자로 뻗었다.

나는 그림자를 밟고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림자가 천장에 붙어 있는 모습을 미리 보지 못했다면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합격입니다.”

카스트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짓이냐?”

주변을 경계하며 묻자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투사가 되기 위한 시험입니다.”

“투사?”

“투기장에서 싸우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카스트로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를 따라 계속 복도를 걸어갔다. 한 번 습격을 받은 터라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어투에서 시험이 한 번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다.

복도의 벽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구슬의 빛은 희미했으며 복도의 절반도 채 밝히지 못했다. 암습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구슬의 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까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섬뜩!

불길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살피니 복도의 벽면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모르는 척 옆을 지나갔다.

부욱!

가죽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벽면이 벗겨지면서 암살자가 튀어나왔다.

“어딜!”

나는 빙글 회전하며 동시에 그 회전력을 이용해 팔꿈치로 암살자의 얼굴을 때렸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일격을 먹일 수 있었다.

쿠당탕!

암살자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바닥에 널브러진 암살자가 한차례 몸을 꿈틀거린 후 움직임을 멈췄다.

카스트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쫓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습격이 끝난 직후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느슨해져 있었다.

암살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발밑에서 칼날이 솟아올랐다. 칼날은 정확히 사타구니를 노리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불의의 일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칼날을 쥐었다.

“큭!”

손바닥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쨍!

나는 손아귀에 힘을 줘 칼날을 부러뜨렸다. 그러곤 부러진 칼날을 바닥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푸슛!

칼날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암살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피 냄새가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보아 칼날에 맞은 게 분명했다.

황급히 뒤로 물러서 칼날을 잡았던 오른손을 살펴봤다. 새끼손가락이 절반이나 잘려 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맨손으로 칼날을 부러뜨리다니. 힘이 세시군요. 게다가 몸놀림도 빠르고. 하지만 이 정도 함정에 쉽게 걸려드는 것으로 보아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듯하군요. 또한 결과적으로는 살아남았지만, 맨손으로 칼날을 잡는 선택은 무모한 방법이었습니다. 보통 암살자들은 칼날에 독을 바르거든요.”

상처를 지혈하고 있던 나는 독이라는 말에 움찔했다.

카스트로는 내 반응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안심하십시오. 시험의 목적은 실력을 알아보는 것이지 죽이기 위함이 아니니까요. 물론 절반쯤은 죽어서 나가지만 말이죠. 하하하!”

카스트로는 나에게 붕대를 건네주었다.

“따라오십시오. 머물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시험은 끝난 건가?”

“시험은 모두 끝났습니다. 칼리온 님께선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투사 등급은 F 등급입니다.”

“F 등급은 어느 정도의 등급이지?”

“투사 등급 중 가장 낮은 등급입니다. A 등급으로 갈수록 실력이 좋은 투사를 의미합니다.”

“A 등급이 최고인가?”

“아닙니다. A 등급 위로 세 등급이 더 있습니다. 더블 A(Double A) 등급과 트리플 A(Triple A) 등급입니다. 그리고 최상위 등급이자 전 대륙을 통틀어 단 네 명뿐인 S 등급이 있습니다.”

S 등급의 투사.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또한 얼마나 더 강해져야 S 등급이 될 수 있을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휴멜이라면 무슨 등급을 받게 될까 생각하다 피식 웃고 말았다.

투기장의 등급 따위로 휴멜을 평가하려 하다니.

전 대륙에 단 네 명뿐이라는 S 등급 투사가 전부 덤벼도 휴멜을 이기진 못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F 등급이라…….”

솔직히 실망했다.

가장 낮은 투사 등급이라니.

나의 육체적 능력이라면 최소한 중간인 C 등급 정도는 나올 줄 알았다.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특별 추천이 있거나 이미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 아니면 실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F 등급부터 시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표정을 보더니 카스트로가 위로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는 한 손으로 붕대를 감으며 카스트로의 뒤를 쫓았다.

그는 시험이 끝났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 절대로 방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곳이 F 등급 투사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럼 이만.”

카스트로는 문 앞에 나를 세워 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접수대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나를 흘끔 쳐다봤다.

“새로 오신 투사십니까?”

접수원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배정받기 위해서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접수원은 양피지와 펜을 꺼낸 후 질문을 시작했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칼리온.”

“나이는 몇입니까?”

“열일곱 살.”

몇 살로 할까 고민하다 그냥 외관과 비슷하게 말했다.

접수원의 눈이 커졌다. 조금 놀란 듯 보였다.

“무기는 무엇을 사용하십니까?”

그 밖에도 접수원은 내 신상에 관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물었다. 수십 개가 넘는 질문 끝에 접수원이 펜을 내려놓았다.

“왼쪽으로 가시면 F 등급 투사들이 수련을 할 수 있는 연무장이 있습니다. F 등급에서 D 등급까지의 투사에게는 개인 연무장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오른쪽으로 가시면 숙소가 나옵니다. 칼리온 님의 방은 끝에서 두 번째 방으로 푯말에 F-147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접수원은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투기장의 투사들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원칙적으로 밖의 출입이 제한됩니다. 만약 밖으로 나가시길 원할 경우 수행원과 동행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하인과 하녀를 통해 심부름을 시켜 주십시오. 또한 투사들 사이의 사적인 싸움은 절대로 금지입니다. 싸움은 오직 경기장 안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투사들에게 막대한 대전료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멋대로 행동하다 몸이 상해 저희가 손해를 입는다면 그 손실은 고스란히 해당 투사의 빚이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주의 사항은 이 두 가지입니다. 나머지 주의할 사항은 그때그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접수원이 방금 작성한 문서를 들고 카스트로가 나간 방향으로 사라졌다.

나는 갈림길 앞에 서서 어느 쪽으로 갈까 고민했다.

결국 왼쪽을 선택했다.

얼마 걷지 않아 퀴퀴한 땀 냄새가 훅 풍겨 왔다.

연무장에는 10여 명의 투사들이 제각각 수련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연무장 구석에 앉아 자신의 무기를 손질하며 수련 중인 투사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연무장에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살벌한 공기가 흘렀다.

내가 나타나자 투사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움직였다.

무기를 손질하던 투사뿐만 아니라 수련 중이던 투사들까지 곁눈질로 나를 쳐다봤다. 그들은 새로 나타난 경쟁자를 분석하기 위해 부지런히 눈알을 굴렸다.

나는 칼날 같은 시선을 받으며 연무장을 구경했다.

지하에 만들어진 연무장치고는 제법 넓었다. 천장에 박혀 있는 수십 개의 구슬이 연무장을 밝히고 있었다.

흙바닥은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연무장 한쪽에 우물이 있었고, 공기는 환기가 안 되는지 곰팡내가 났다.

‘훈련하기에는 최악의 장소로군.’

하지만 연무장의 상태보다 더 최악인 것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적들이 자신의 수련 모습을 지켜본다는 사실이었다.

수련하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적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고, 설사 그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최소한 적의 무기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적의 무기가 무엇인지만 사전에 알아내도 싸움을 하는 데 엄청나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상대의 무기에 맞는 대처 방법을 미리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단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 투사들을 쳐다봤다.

실망감이 더욱 커졌다.

F 등급은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투사들의 등급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적한 장소를 골라 바닥에 앉았다.

과시하듯 수련하고 있는 투사들의 실력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투사들의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검이 가장 많았고, 창, 도끼가 뒤를 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무기도 있었다. 칼날이 톱날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검이었다.

검술을 보아하니 적의 살을 찢어발길 수 있는 베기 공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휘익!

“하앗!”

쉐엥!

“타앗!”

14명의 투사들이 진지한 얼굴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무기를 손질하던 투사들 역시 하나하나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 수련을 시작했다.

F 등급 투사들의 실력은 느리고 조잡했으며, 단조로우면서도 정교하지 못했다.

나는 말뚝의 형벌을 받으며 보아 왔던 백작가 기사들의 검술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투사들의 수련을 조금 더 구경하다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F-147이란 푯말이 달린 방을 찾아 문을 열었다.

배정받은 방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토굴처럼 벽과 천장이 흙으로 되어 있었지만 1인실치고는 넓었고, 침대도 제대로 놓여 있었다.

침대에 누워 숨을 깊이 들이쉬자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흙냄새를 맡자 동굴에서 머물렀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문득 반딧불의 춤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흙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