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가 되다 (5/45)

노예가 되다

노예 각인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제법 정성 어린 치료를 받았다.

휴멜은 신관을 불러 나를 최대한 빨리 회복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의 바람대로 신관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나를 치료했다.

비록 최하급이었지만 포션도 두 병이나 마실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포션의 효과가 거의 없어 포션 치료는 바로 중단되었다.

신성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하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상처가 벌어졌다. 때문에 이 방법 역시 바로 중단되었다.

그 밖에도 신관은 여러 가지 치료법을 다양하게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신관은 알아차렸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나를 위한 최고의 치료법임을.

신관은 치료비를 거의 받지 못한 채 백작가에서 쫓겨났다.

나는 부활하고 나서 처음으로 마음껏 먹고, 마음껏 잠을 잘 수 있었다. 상처는 놀라운 속도로 아물어 갔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자 피부에 난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 나머지는 그동안 혹사시킨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력을 회복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기존에 해 왔던 대로 잘 먹고, 잘 자는 것뿐이었다.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카렌이 나를 찾아왔다.

“오랜만이야, 바퀴벌레.”

“바퀴벌레?”

“몰랐어? 네놈의 별명. 말뚝의 형벌에서 무려 10일을 버틴 바퀴벌레와 같은 생명력의 소유자. 마음에 들어?”

“헛소리는 집어치워.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지?”

내 신분은 현재 노예였기 때문에 나는 노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았고,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추지도 않았다.

나는 나의 목숨을 가지고 논 상대를 존중해 줄 만큼 호인도 겁쟁이도 아니었다.

“네놈처럼 건방진 노예는 이 세상에 없을 거다. 휴멜 님만 아니었으면 발목을 잘라 평생 기어 다니게 만들어 주는 건데. 아쉽네.”

카렌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그녀를 쳐다봤다.

카렌은 작게 한숨을 쉰 후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설마 해서 묻는 건데……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글을 읽을 수 있어?”

카렌의 목소리에 절망과 좌절이 묻어 있었다.

기억을 잠시 더듬어 본 후 카렌이 가져온 책을 펼쳐 아무 곳이나 훑어봤다.

문자가 머릿속에서 의미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읽을 수 있나 보군.”

“진짜? 진짜로?”

믿지 못하는 눈치기에 책에 적혀 있는 문장을 몇 개 읽어 주었다.

“어떻게 글을 알고 있는 거지?”

나도 알고 싶다. 나의 과거에 대해.

나는 어떻게 글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다행이군.”

카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멜 님의 전언. 어차피 먹고 자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으니 남는 시간 동안 책을 읽을 것. 기한은 3일. 만약 네놈이 글을 몰랐다면 꼼짝없이 내가 읽어 줘야 할 뻔했어.”

카렌이 기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카렌이 건네 준 책을 훑어봤다.

모두 세 권으로 각각 대륙의 역사를 기록한 책, 무술의 기초에 관한 책, 전략과 전술에 관한 책이었다.

어느 책도 노예가 읽을 만한 책이 아니었다.

‘황제가 되겠다는 말이 진짜였나…….’

나에게 퍼스트 나이트의 자리를 주겠다던 휴멜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해 볼 테니까 농땡이 피우지 마. 휴멜 님은 실망을 참지 못하시는 분이거든. 물론 나도 그렇고.”

카렌이 미소를 지었다. 맹독을 머금고 있는 잔인하고 사악한 미소였다.

“나에게 각인 마법을 걸어 준 마법사를 만날 수 있을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카렌이 방을 나가기 직전 내가 물었다.

그녀는 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걸. 휴멜 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주아주 먼 길을 떠났거든. 궁금한 게 뭔데? 웬만한 건 내가 답해 줄 수 있는데.”

“아니. 됐어.”

카렌은 싱긋 웃은 후 방을 나갔다.

나는 그녀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법사가 죽었군.”

예상했던 일이었다.

자신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겠지만 마법사는 휴멜의 반역 선언을 들었다. 휴멜의 성격상 살려 뒀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휴멜의 목표가 어느 정도 진실이라는 말과 같았다.

“퍼스트 나이트라…….”

문득 웃음이 나왔다.

“분명 황제를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고 했었지…….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는데.”

나는 조금 유쾌해진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휴멜의 말처럼 나는 먹고 자는 일 외에 달리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를 돌봐 주는 하인과 하녀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그들보다 지위가 낮은 노예였기 때문이다.

백작가에서 내가 노예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말뚝의 형벌 역사상 최고 생존 기록을 경신한 몸이었다.

하인과 하녀들로선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노예를 정성껏 간호해야 하는 일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는 다른 노예들처럼 비굴하게 굽실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심부름을 시키기까지 했으니 그들로선 기가 찰 노릇일 것이다.

“이 책을 가져다 놓고 다른 책 좀 가져다줘. 역사책 위주로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

나는 먹고 있던 빵을 조금 찢어 나의 말을 무시한, 집사 교육을 받고 있는 백작가의 유능한 하인에게 던졌다. 빵 조각이 하인의 머리에 맞았다.

“재프,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열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 재프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울화통이 터진 듯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지, 지금 나한테 빵 조각을 던진 거냐?”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재프를 쳐다봤다.

“너, 너…… 노예 놈 주제에 감히…….”

“나는 휴멜의 노예지, 너의 노예가 아니잖아.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책이나 가져다 달라니까.”

“너…… 너…….”

재프는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는 한참 만에 분노를 가라앉힌 후 책을 획 낚아챘다.

“언젠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재프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방을 나갔다.

나의 버릇을 고쳐 준다며 달려들었던 하인 하나가 카렌의 채찍에 맞아 죽은 후 나를 건드리는 하인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노예였지만 휴멜의 비호 속에 귀족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몸이 회복되는 것이었으니까.

휴멜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를 위해서였다. 빨리 회복되어야 빨리 강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휴멜은 강해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재프가 나가자 방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왔다. 슬그머니 들어온 바람이 방 안을 돌아 나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어스름한 땅거미가 저택을 감싸 안았다. 노을이 하늘을 노랗게 물들였다.

나는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말뚝의 형벌은 내게 두 가지를 남겨 주었다.

하나는 몸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흉터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힘’이었다.

돌팔매질을 연습할 때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힘이 극한의 상황에서 다시 발현되었다. 게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 발현된 힘은 어느 정도 나의 의지로 조절이 가능했다.

힘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몸 안에 움츠리고 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만 조금씩 분출되었다.

나는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틈틈이 명상을 했다.

명상을 통해 힘의 크기를 파악하고, 흐름을 느끼고, 힘을 끄집어내는 연습을 했다.

어느 정도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되자 마침내 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진정한 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힘은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Breath처럼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만큼 압도적인 크기와 광폭함을 지니고 있었다.

돌팔매질을 할 때 내가 끌어다 쓴 힘은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 올린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뻔했다. 모든 힘이 폭발하였을 때 과연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전율이 흘렀다.

“아마 몸이 먼저 부서져 버리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명상에 집중하였다.

전생의 기억을 잃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글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제법 잘살았던 모양이다.

귀족은 아니었다. 귀족이란 인종에게 느끼는 거부감도 그렇고, 막연하게 귀족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상인쯤 됐을 것이다.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류를 읽고,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글을 배운 것이리라.

사실 책을 본다는 것은 귀족이 아닌 이상 무척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쓸 정도로 명망이 높은 인물은 대부분 귀족가에 의탁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귀족들은 그들의 지식을 가문을 위해서만 쓰고 싶어 했다.

때문에 명망 높은 인물이 책을 쓴다 할지라도 그 책은 그가 머물고 있는 귀족 가문 내에서만 보관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책은 귀족의 자산이 되어 귀족이 아닌 자들은 평생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한 책을 나는 벌써 수십 권째 읽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책을 읽었고 휴멜은 결코 나에게 책이 떨어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책 속에 파묻혀 사는 동안 나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기억을 잃은 나에게 이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나 다를 바 없었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역사, 새로운 영웅, 새로운 음식, 새로운 옷, 새로운 전통, 새로운 문화.

모든 것이 새로웠고, 그래서 모든 것이 재미있었다.

책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으며, 시야가 넓어졌고, 생각이 깊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수확은 내 안에 움츠리고 있는 힘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법입문≫이란 책을 통해 내 힘의 정체가 마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굉장히 커다란 수확이었다.

미지의 힘을 단련하는 것과 정체를 알고 있는 힘을 단련하는 것은 효율과 성과 면에서 천지 차이였기 때문이다. 일단 힘의 정체를 알고 나자 수련의 질이 몇 단계나 높아졌다.

지금 하고 있는 명상 역시 ≪마법입문≫에 쓰여 있던 마나 수련법 중 하나였다. 힘의 정체가 마나라는 것을 몰랐다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수련이다.

명상을 시작하자 고요하게 잠자고 있던 힘, 마나가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는 ≪마법입문≫에 쓰인 마나와 내 몸속의 마나가 근본적으로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법입문≫ 속의 마나는 공기, 나무, 물과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의 일부분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수련을 통해 마나를 이용할 수 있었다. 마나를 이용해 기사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마법사는 마법을 시전할 수 있었다.

이렇듯 ≪마법입문≫에서 정의 내린 마나란 존재는 자연에 존재하는 힘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의 마나는 달랐다.

성질은 ≪마법입문≫의 마나와 동일했지만 운용 방법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마법입문≫에 의하면.

마나를 사용하기 위해선 우선 몸 안에 마나를 축적해야 했다. 그렇게 축적한 마나를 실제 힘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선 몸 안에 마나가 흐를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했다.

마나 수련법이란 대부분 이 통로를 만드는 방법과 통로의 크기를 넓히는 방법을 의미했다.

반면 나의 마나는 이렇게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새삼스레 마나를 축적할 필요도 없었고, 통로가 없어도 그럭저럭 잘 흘러 다녔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많은 실험 끝에 나는 나의 마나가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의 마나는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흥분하거나 분노하여 감정이 격해지면 이에 동조해 기하급수적으로 분출되었다. 마찬가지로 분출되는 마나양에 비례해 나의 고통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다시 말해 나의 마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와 같았다.

마치 나의 또 다른 자아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분노와 복수, 폭력과 파괴처럼 어두운 감정에 특화된 자아였다.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의 크기만큼, 버텨 낼 수 있는 육체의 한계만큼 사용할 수 있는 마나라…….”

절체절명의 순간,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구명절초의 힘이 될 수도 있었고, 나 스스로 나 자신을 파괴하는 과유불급의 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

사용하기 어려운 힘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히려 불안정하고 위험한 힘이었기에 더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휴멜 같은 천재를 안전한 방법만으로 이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덜컹!

노크도 없이 재프가 들어왔다.

나는 잽싸게 가부좌를 풀고 침대에 누웠다.

집사 교육을 받을 만큼 똑똑하다고 해도 재프는 하인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마나 수련법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여기 있다.”

재프가 나를 향해 책 두 권을 집어 던졌다. 나는 양손에 한 권씩 책을 받아 든 후 씩씩거리는 재프를 쳐다봤다.

“이 책이 너의 목숨값보다 더 비싸다는 데 내 생명을 걸 수도 있어. 만약 찢어지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을 질 것 같아? 받지 못한 나? 집어 던진 너?”

재프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나를 노려봤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은 눈치였다.

결국 재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재프가 가져온 책의 제목을 살폈다.

≪아르센 제국의 탄생과 몰락≫

≪2차 종족 전쟁에 대한 고찰≫

나는 아르센 제국에 관한 책을 선택했다.

이미 해가 저문 상태였지만 책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의 시력은 부엉이만큼 좋았기 때문이다.

휴멜의 가문은 남쪽 대륙의 지배자인 자타르 왕국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 권력의 대귀족—자타르 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이었다.

그런 가문인 만큼 가지고 있는 책의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명성 높은 이들의 심득이 적혀 있는 책들은 여러 면에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책을 보여 준 것 하나만큼은 휴멜에게 감사해야겠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예전에 쫓겨났던 신관이 다시 찾아와 내 몸 상태를 정밀하게 확인하였다.

나는 후유증 하나 없이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놀랍군. 회복 마법이나 포션 없이 이렇게 빨리 회복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물론 회복 마법과 포션이 소용없는 사람도 네가 처음이었지만.”

신관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의 몸을 해부하여 어째서 회복 마법과 포션이 소용없는 것인가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축하해.”

카렌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회복을 기뻐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의 간병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는 목소리였다.

그 차이를 모르는 신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봤다.

“노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요?”

카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신관의 얼굴이 더욱더 얼떨떨해졌다. 그러다 자신이 놀림 당했다고 여겼는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치료비는 신전으로 보낼게요.”

“알았습니다. 그럼.”

신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일종의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카렌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이불을 들치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에 밀착되었다. 달콤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뭐, 뭐하는 짓이지?”

나는 화들짝 놀라 침대 밖으로 뛰어내렸다.

카렌은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나를 쳐다봤다. 눈을 살짝 치켜뜬 모습이 마치 장난기 가득한 고양이의 눈처럼 보였다.

“이렇게 잽싼 것을 보니 신관의 말처럼 다 나은 게 맞나 보네. 후훗!”

“장난이 지나치군.”

카렌은 침대 위로 올라가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했다.

“장난이 아니야. 이 침대는 원래 내 거였다고. 내 침대에 내가 눕는 게 뭐가 어때서? 그동안 네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나는 낯선 곳에서는 잠을 못 자는 체질이란 말이야. 머리카락도 푸석해지고 지금도 졸려서 죽을 지경이야. 네놈이 여신에게 저주받은 몸을 가지고 있는 바람에 치료가 늦어져서, 아! 그래서 그런지 요즘 네놈의 별명이 바뀌었더군. 말뚝의 형벌 때만 해도 바퀴벌레였었는데 신관의 치료가 실패하고 나서부터는 악마의 자식이라고…….”

“잘 자라. 나는 나가 있도록 하지.”

새로운 방식의 축객령이었다. 가만 놔두면 혼자서 하루 종일이라도 떠들 기세였다.

나는 카렌을 놔두고 방을 나왔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카렌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관에 있는 응접실로 가 보렴. 휴멜 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야.”

쾅!

문을 닫았다.

“휴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깨달았다.

짧고 달콤했던 휴식이 끝이 났음을.

나는 지나가는 하녀를 불러 세웠다.

“본관이 어디 있지?”

허리를 굽실하려던 하녀는 나를 알아보더니 인상을 팍 썼다. 대꾸도 안 하고 그냥 가려는 하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노예 주제에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는 것이냐!”

“…….”

나는 하녀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하녀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협박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사실을 말해 주었다.

“휴멜이 나를 찾는다. 늦으면 당신 때문이라고 말해 주지.”

“휴멜 님이?”

갑자기 하녀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혐오감에서 공포로 바뀌었다. 워낙 순식간의 변화라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제, 제발 저 때문에 늦었다고 하지 말아 주세요.”

하녀가 내 옷을 붙잡고 늘어졌다.

걱정하지 마라, 그냥 본관의 위치만 물어본 것이다, 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는 막무가내로 용서를 구했다.

결국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하녀는 울면서 본관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녀는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몇 번이나 약속을 재확인했다.

휴멜이 하인, 하녀들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정확히 몰랐던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돌이켜 보니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재프도 휴멜의 이름만 나오면 꼬리를 말고 도망쳤었다.

결과적으로 협박한 꼴이 되고 말았다. 기분이 씁쓸했다.

나는 하녀가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본관으로 향했다.

* * *

호엔레른 백작.

자타르 왕국의 4분의 1을 백작령으로 다스리고 있는, 그것도 왕국 최대의 곡창 지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 중의 귀족.

왕에 버금갈 만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는 대귀족답게 호엔레른 백작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 권세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백작의 저택이었다.

저택의 크기는 웬만한 마을보다 컸다. 저택 안에 있는 연무장에선 수천 명의 병사가 군사훈련을 할 수 있었고, 그들이 머물고 있는 건물의 수만 해도 수십 채에 달했다.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귀족이라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크기는 정말 크네. 그래도 이 정원은 정도가 심한 것 같은데. 입구에서 저택까지 걸어오려면 한나절은 걸리겠군. 그건 그렇고…… 여기가 어디지?”

나는 하녀가 알려 준 방향으로 걸었다. 그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택은 지도가 필요할 만큼 넓었다.

나는 사슴 모양으로 다듬어진 정원수를 세 번째 보고 난 후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물어볼 사람을 찾아야겠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산책하듯 한가로이 걸었다.

휴멜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그의 인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심장에 검을 쑤셔 넣겠다는 바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도 못했다.

하늘 정중앙에 노란 태양이 떠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태양은 마지막 열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무 그늘이 무척이나 시원해 보였다. 그 아래 누워 한숨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는데 낯익은 얼굴의 하인이 내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재프와 함께 나의 시중을 들었던 하인이다.

이름이 메튜라고 했던가.

“여기서 뭐하는 것이냐!”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메튜가 눈을 부라렸다.

“자려고 하는 중인데?”

“휴멜 님께서 널 불렀다고 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나의 질문에 메튜는 우물쭈물했다. 내가 본의 아니게 겁을 줬던 하녀와 만난 듯했다.

“휴멜 님께서 찾으시는데 얼른 갈 생각은 않고 지금 잠을 자려 한다고? 그러다 늦으면 릴리 핑계를 대려고 하는 거지?”

메튜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하녀 이름이 릴리였나 보다.

메튜가 난리를 치는 통에 잠이 다 달아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메튜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기로 했다.

“그럼 네가 본관까지 안내해 줘. 저택이 너무 넓어서 본관이 어디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지, 진짜? 그래도 될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메튜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곧바로 헛기침을 흠흠, 하더니 다시 인상을 썼다.

“좋아. 할 일은 많지만 내가 특별히 안내해 주지. 나를 따라와라.”

뭔가 이상했지만 나는 잠자코 메튜의 뒤를 따라갔다.

한참 후 메튜와 함께 도착한 곳은 으슥한 창고 앞이었다.

“여기는…… 본관이 아니군.”

나는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메튜를 쳐다봤다. 메튜의 얼굴은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건방진 놈. 노예 주제에 감히 우리와 맞먹으려 하다니. 오늘 한번 죽어 봐라.”

메튜가 으르렁거리며 잽싸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창고 뒤쪽에서 검은 복면을 쓴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크크크! 멍청한 노예 놈. 이렇게 쉽게 함정에 빠지다니. 잘했다, 메튜.”

“헤헤헤!”

복면인 뒤쪽으로 도망친 메튜가 간사한 얼굴로 웃었다.

“우리가 왜 네놈을 이리로 데려온 줄 아느냐?”

가장 앞에 서 있던 복면인이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모르겠는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험악한 말들이 쏟아졌다.

“저, 저놈이 아직도 반말을!”

“형님! 그냥 밟아 버립시다. 이 건방진 노예 놈하고 무슨 말을 합니까?”

“무릎 꿇고 애걸복걸해도 시원찮을 판에.”

선두의 복면인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모두 입을 다물었다.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에 한숨만 새어 나왔다.

“네놈이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모른다니까.”

“몰라? 진짜 몰라?”

“재프, 짜증 나니까 자꾸 묻지 마라.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선두의 복면인이 입을 꽉 다물었다.

재프는 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복면을 쓰고 음성 변조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복면인의 정체가 재프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의 변장은 어설펐다.

“누, 누가 재프냐? 나는 재프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 줄게. 대신 메튜를 빌려 줘. 본관까지 가야 하거든.”

내가 본관 얘기를 꺼내자마자 재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휴멜 님을 들먹이면 우리가 겁에 질릴 줄 알았냐! 오냐오냐해 주었더니 이제는 아예 휴멜 님을 이용해 릴리를 겁탈하려 하다니! 오늘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 될 줄 알아라!”

하녀에게 길을 물어본 게 어쩌다가 겁탈 시도로 변질되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재프는 사정을 설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발을 날렸다. 나는 옆으로 슬쩍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그러곤 재프의 발을 걷어찼다.

중심을 잃은 재프가 허공에 부웅 떴다.

그러곤 철퍼덕!

재프는 포대 자루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컥!”

넘어진 충격으로 기도가 막혔는지 재프가 숨을 컥컥거렸다.

“노예…… 주제에…… 감히…….”

방심하다 불의의 일격에 당한 재프가 사나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몸을 추슬렀다. 살기마저 느껴졌다.

“밟아!”

재프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나를 향해 개떼처럼 달려드는 복면인들을 보자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이들이 나를 싫어하듯 나 역시 이들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나는 노예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노예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 차이로 인해 생긴 나를 향한 모욕과 경멸은,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사실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물론 이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가축으로 취급받을 만큼 경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예가 마치 귀족이라도 되는 양 자신들을 부려 먹었으니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평범한 노예였더라면 진즉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휴멜과 관련된 일이 내겐 그랬다.

주인이 미우니 그 주인을 모시는 사람들까지 밉게 보였다. 게다가 놀자고 덤비는데 놀아 주지 않을 만큼 나는 나쁜 인간이 아니었다.

“와라!”

이것도 저것도 다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퍽!

퍽!

퍽퍽퍽!

“크헉!”

“이 노예 놈이…… 컥!”

“뭐가 이렇게 빨…… 큭!”

나의 육체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휴멜과의 대결, 말뚝의 형벌 등을 통해 육체의 한계를 몇 번씩이나 경험하였다. 육체는 신기하게도 죽음의 한계를 경험할 때마다 더욱더 강해졌다.

게다가 잃어버렸던 마나의 힘까지 되찾았다.

현재 나의 힘은 처음 휴멜과 싸웠을 때보다 두 배 이상 강해져 있었다. 비질이나 하는 하인 정도는 얼마든지 때려눕힐 수 있는 힘이었다.

바람과 바람 사이를 가르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복면 너머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맛으로 복면인들의 부상 상태를 알 수 있었다.

퍽!

이놈은 코뼈가 내려앉았으니 좋은 여자 만나긴 글렀고.

퍽!

이놈은 턱이 부서졌으니 당분간 죽만 먹어야 할 거고.

퍽!

이놈은 아랫배를 맞았으니 피똥 좀 싸겠구나.

신이 나서 날뛰다 보니 어느새 서 있는 복면인이 한 명도 없었다.

멀쩡한 사람은 메튜뿐이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짓말…….”

메튜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20명에 가까운 복면인들이 땅바닥에 누워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메튜의 뒷덜미를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때, 때리지 마세요! 저는 시켜서 한 것뿐이에요!”

“본관까지 안내해라.”

“때리지 않을 거죠?”

메튜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처럼 나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면.”

“이쪽입니다!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록 지름길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끙끙거리는 복면인들을 뒤에 남긴 채 도망치듯 뛰어가는 메튜의 뒤를 따라갔다.

메튜는 지름길로 안내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안내하기에 또 다른 함정인가 싶어 경계심이 들었지만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눈앞에 거대한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호엔레른 백작이 거주하고 있는 저택의 중심부, 본관이었다.

본관에 도착해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자 지나가던 하녀 한 명이 나를 응접실까지 안내해 주었다. 휴멜에게 내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는지 군소리 한마디 없었다.

뜨거운 햇살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을 모두 닫아 놨음에도 불구하고 응접실 안은 가을 날씨처럼 선선했다. 백작가의 마법사가 만든 아티팩트가 천장 한가운데 붙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방의 한쪽 벽은 커다란 책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책장에는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수백 권은 족히 넘는 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봤던 책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저벅저벅.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와 소리의 간격이 소름이 끼칠 만큼 균일했다. 신체의 움직임을 마음먹은 대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발소리였다.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강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건만 벽 너머로 느껴지는 기세에 벌써부터 몸이 긴장되었다.

마나의 힘을 깨달아서일까.

휴멜이 얼마나 강한 인간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가히 절망적인 강함이었다.

“이 정도는 돼야 재미가 있지.”

나는 각오를 새롭게 다잡았다.

딸칵.

문이 열리면서 나의 원수이자 주인인 휴멜이 들어왔다.

나는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휴멜을 노려봤다. 그는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몸이 다 나았다고 들었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휴멜과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휴멜을 보는 순간 의자를 박차고 달려들 뻔했다. 지금도 주먹을 뻗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상대는 단 한마디 단어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는 나의 주인이었다.

노예 각인 마법은 뇌에 마법진을 그려 넣는 마법이었다. 마법진은 폭발 마법으로 주인이 시동어를 말하는 순간 발동되었다.

다시 말해 주인이 미리 지정해 놓은 시동어를 외치는 순간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마법진이 폭발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동어를 외치기 전에 주인을 죽일 수도 없었다. 어떠한 이유가 됐건 주인이 죽는 순간 마법진이 폭발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노예 각인 마법에 걸린 노예들은 주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몸을 날려야 했다.

배신을 막기 위해 탄생한 절대복종 마법.

그것이 바로 노예 각인 마법, 슬레이브 스템프였다.

“말투가 마음에 안 드는데. 내가 지금 당장이라도 네 머리통을 폭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럼 그렇게 해 보시지. 내 몸은 노예가 됐지만 내 마음까지 노예가 된 것은 아니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했을 텐데.”

휴멜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끈끈한 살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와 허리를 지나 목을 옭아맸다.

전에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괴로웠었다. 하지만 마나 수련 덕분인지 지금은 제법 견딜 만했다.

내가 살기를 참으며 계속 노려보자 휴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개차반 같은 말투는 용서해 주지. 어차피 내가 원했던 건 말씨 고운 인형이 아니었으니까.”

“나를 부른 이유나 말해라.”

휴멜이 품속에서 문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휴멜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곁눈질로 보니 노예 계약서였다.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칼리온, 너는 나의 전투 노예로 등록되었다. 일반 노예들보다는 행동의 자유가 있으니 움직이는 데는 조금 편할 거다.”

“전투 노예?”

“말했을 텐데? 너를 퍼스트 나이트로 만들겠다고. 하지만 현재 네 실력으론 연무장에서 뒹굴고 있는 기사 수련생도 이기기 힘들지. 너는 너무 약해.”

휴멜의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너는 너무 약해.

나도 모르게 살기를 내뿜고 말았다.

순간 휴멜에게서 뿜어져 나온 살기가 나의 살기를 집어삼켰다.

“건방을 떠는 것도 정도껏 해라. 한 번만 더 나에게 살기를 보이면 사지를 잘라 돼지우리에 집어 던지겠다.”

아까의 살기가 시험용이었다면 이번 살기는 본심이었다.

몸이 제멋대로 덜덜덜 떨렸다. 마나에 민감해진 몸이 제멋대로 겁에 질려 버렸다.

나는 양손을 깍지 낀 채 온몸에 힘을 주었다.

멈춰라!

빌어먹을 떨림아, 당장 멈춰!

나는 억지로 몸을 진정시켰다.

그의 눈동자에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형용할 수 없는 굴욕과 패배감.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차로 목을 축이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약해. 칼리온, 너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강해져야 해. 나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거든.”

휴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해지라는 게 너의 명령인가?”

“강해져라. 그게 노예인 네가 따라야 할 첫 번째 명령이다.”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이라면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빨리 강해질 수 있는 무대를 준비해 뒀다. 카렌이 안내해 줄 것이다.”

방을 나오려는데 휴멜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노예 각인은 위험부담도 크고 돈도 많이 드는 마법이지. 그래서 평범한 노예들에게는 하지 않아. 정말 필요한 노예에게만 하지. 그러니 칼리온, 나에게 네가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 증명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버려질 것이다.”

휴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섬뜩하고 잔인한 늑대의 미소였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오니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강해지라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오늘 같은 패배감은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복도를 걸었다. 손과 발이 여전히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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