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의 형벌
짤랑!
짤랑!
두 개의 수갑이 양쪽 팔목과 양쪽 발목에 채워져 있었다. 걸을 때마다 수갑의 쇠사슬이 부대껴 쇳소리를 냈다.
“시끄러! 조용히 걷지 못해!”
퍽!
“크윽!”
옆에 있던 병사가 창대 끝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숨이 턱 막히는 충격에 허리를 굽혔다.
쇠사슬에 발이 엉켜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허리를 세우자 병사가 기어이 발목을 걷어찼다.
철퍼덕!
나는 흙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렸다.
수갑 때문에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수갑의 한쪽 끝이 짐수레에 묶여 있는 바람에 짐수레를 따라 질질 끌려갔다. 여전히 알몸이었기에 바닥에 쓸린 살갗이 벗겨졌다.
“킥킥킥!”
“저 꼬락서니 좀 봐.”
적의에 찬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복면인 그리고 나와의 연이은 싸움으로 병사들의 수는 고작 15명만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여덟 명은 중상을 입어 짐수레 위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질질 끌려간 뒤에야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죽지 못한 걸 후회하게 해 주마. 크크크!”
다리를 걸었던 병사가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그렇게 복수가 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죽여 보시지, 겁쟁이.”
“이, 이 새끼가…….”
병사가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려다 얼른 집어넣었다. 휴멜이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병사는 내 곁에서 얼른 떨어졌다. 그러면서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 밤에 두고 보자.”
나는 병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휴멜을 노려보았다. 휴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휴멜은 나를 생포한 후 병사들에게 던져 주며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덕분에 나는 병사들에게 맞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휴멜은 냉정하고 잔인한 상관이었고, 병사들의 복수심은 자신의 생명을 걸 정도로 크지 않았다.
대신에 병사들은 죽지 않을 만큼만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넘어뜨려 짐수레에 질질 끌려가게 만드는 것은 기본이었다. 내가 했던 일을 일깨워 주려는 듯 돌멩이를 던져 머리를 맞히기도 하고, 밥그릇을 엎어 흙이 뒤섞인 음식을 개처럼 핥아 먹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밤마다 계속되는 집단 구타였다. 병사들은 두 명씩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섰고, 불침번들은 깨어 있는 시간 내내 나에게 폭력을 가했다.
제때에 아물지 못한 상처에서 고름이 새어 나왔다. 나의 몸은 피와 고름과 시퍼런 멍 자국으로 점점 더 흉물스럽게 변했다.
휴멜은 병사들의 행동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처음 명령했던 대로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상관의 무관심에 병사들이 용기를 얻었다. 그들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졌다.
그렇게 5일 밤이 지나자 폭력의 후유증과 수면 부족으로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맞으면서 졸 정도였다.
그리고 또다시…… 악몽 같은 밤이 찾아왔다.
밤이 되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낮 동안 달구어진 세상이 서서히 식었다. 별똥별 하나가 북쪽 하늘을 향해 떨어졌다.
나는 수레바퀴에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모닥불의 불빛이 눈꺼풀에 아른거렸다.
저벅저벅.
놈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고통에 대한 공포보다 잠에 대한 욕구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저벅.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잠깐의 적막이 흐른 후.
“흡!”
돌돌 말린 헝겊이 입속으로 들어왔다. 한 명이 헝겊으로 입을 막고 있는 동안 다른 한 명이 내 배를 걷어찼다.
퍽!
“큭!”
“낮에는 잘도 지껄였겠다? 뭐? 당장 죽여 보라고? 겁쟁이? 좋아! 소원대로 죽여 주지! 죽어라, 이 새끼야!”
나의 육체는 괴물 같은 회복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밤 벌어지는 폭력의 축제 속에 나의 육체는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체.
모든 근육이 상처를 입어 병사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속절없이 맞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불침번이 바뀔 때마다 번갈아 가며 이어진 폭력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휴멜이 잠에서 깰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
불침번들이 마지막 발길질을 한 후 자리로 돌아갔다.
끈질기고 집요한 발길질이 멈추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부어 오른 자리가 후끈거렸다.
나는 고통을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출발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잠을 자 둬야 했다.
최대한 아프지 않은 자세로 몸을 말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폭력의 밤이 지나갔다.
산에서 내려오자 도로가 나왔다.
구불구불한 도로가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도로 양옆으로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사슴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향긋한 꽃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하늘에선 독수리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일주일을 걷자 첫 번째 마을이 나왔다.
부활한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인간 세상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나에 대한 세상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나는 죄인처럼 수갑을 차고 있었고, 발가벗고 있었으며, 피와 고름으로 더러웠고, 역한 냄새까지 났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를 구경했다. 절반은 나의 상처를 동정했고, 절반은 나의 알몸을 비웃었다.
나는 묵묵히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발가벗고 있었지만 창피한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고통과 수면 부족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야는 흐릿했고, 귀는 먹먹했다.
여관에 도착했다.
여관의 주인은 나를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나리, 저 죄인도 방으로 들이실 겁니까?”
주인은 최대한 정중하고, 완곡하게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그럴 수야 없지. 냄새가 나서 같이 있을 수가 없거든. 그렇다고 방 하나를 따로 잡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쩐다?”
휴멜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주인을 쳐다봤다.
휴멜의 마음을 읽은 주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저희 여관에 마구간이 있는데 마침 한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그곳에 머물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마구간이라. 괜찮군.”
나의 잠자리가 결정되었다.
여관의 주인이 안내해 준 마구간은 무척이나 더러웠다. 나의 잠자리가 될 공간은 특히나 더 더러웠다.
바닥에 말똥이 가득했다.
나를 마구간까지 끌고 온 병사는 기둥에 나를 묶자마자 코를 감싸 쥐고 밖으로 도망쳤다.
그의 행동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밤은 폭력이 없다는 것을. 말똥으로 가득 찬 이곳에 그들이 오지 않을 것임을.
그들에게는 더러운 마구간에 불과하겠지만 나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휴멜에게 붙잡히고 난 후 나는 처음으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마구간 밖으로 끌려나온 나에게 병사들이 물을 퍼부었다. 피와 고름과 말똥이 물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래도 말똥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데.”
“더러운 놈 같으니.”
“이걸 사용하면 냄새가 좀 사라지지 않을까?”
병사 한 명이 포대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그걸로 어떻게?”
“잘 봐.”
병사는 포대 자루의 이곳저곳을 검으로 찢어 처음 입고 있었던 가죽옷과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곤 그것을 나에게 입혔다.
“푸하하하!”
“옷이 너무 멋진데. 하하하!”
“이렇게 세련된 옷은 평생 처음 본다. 나도 하나 만들어 입어야겠는데. 크크크!”
병사들과 여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을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졌나 기웃거리다가 내 모습을 보고 크게 자지러졌다.
웃음거리가 되고 있었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쨌든 옷이 생긴 것이니까.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휴멜은 부상자들과 말을 타지 못하는 병사 서너 명을 마을에 남긴 후 마을을 떠났다.
그는 여관 주인에게 구입한 말을 타고, 그동안 지체한 시간을 메우려는 듯 도로를 질주했다. 병사들 역시 말을 타고 상관의 뒤를 쫓았다.
그제야 나는 병사들이 나를 씻긴 이유를 깨달았다. 나를 말에 태워야 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번갈아 가며 나를 태우고 달렸다.
그중 한 명이 달리는 말에서 나를 떠밀었다. 말에서 떨어진 충격에 하마터면 목이 부러질 뻔했다.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서걱!
휴멜은 망설임 없이 나를 말에서 떨어뜨린 병사를 죽였다.
말 한 마리가 주인을 잃었다. 나는 주인을 잃은 말의 안장에 묶였다. 말고삐를 병사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바싹 엎드려 말갈기를 꽉 움켜쥐어야 했다.
“이럇!”
두두두두!
휴멜과 병사들은 쉼 없이 말의 배를 걷어찼다.
얼마나 달렸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말도 사람도 급속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래도 휴멜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새하얀 태양이 작열하는 드넓은 벌판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말이 지나가는 길에 뿌연 먼지구름이 흔적처럼 남았다.
질주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이 났고, 해가 떠오르기 전에 다시 시작됐다.
가혹한 행군 덕분에 나는 제법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피곤에 전 병사들은 나를 괴롭히는 대신 잠을 자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달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 * *
두 명의 병사들이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먼발치에서 휴멜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
대문에서부터 저택까지의 거리가 까마득했다.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것은 넓은 정원이었다. 각가지 동물 형상으로 다듬어진 정원수, 형형색색의 꽃, 그 안에서 뛰어노는 다람쥐.
정원이 아니라 숲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꼬마를 연무장 말뚝에 묶어 놔라.”
휴멜은 병사들에게 나를 맡긴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가장 어린 병사가 나를 저택 뒤쪽으로 끌고 갔다.
저택 모퉁이를 돌자 연무장이 나타났다.
“하압!”
“타앗!”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렸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시커멓게 탄 남자들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부웅!
휘익!
빠르고 정교한 검술이었다.
검의 흐름이 낯이 익어 자세히 살펴보니 휴멜의 검술이었다. 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니 휴멜의 검술과는 또 달랐다. 전체적인 틀은 같았지만 모두 저마다의 개성이 들어가 있었다.
“빨리 안 따라와! 어디서 뭉그적거리고 있어!”
병사가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철퍼덕!
짤랑짤랑!
나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훈련을 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내 쪽을 쳐다봤다. 훈련을 방해받은 게 기분 나쁜 듯 몇 명이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냐?”
제일 가까이 있던 기사가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
그는 대머리였는데,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가 햇살을 반사하여 마치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내 엉덩이를 걷어찼던 병사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 누더기를 걸친 놈은 누구냐?”
“도망친 농노입니다.”
“농노를 어째서 연무장에 데려온 거지? 잡은 자리에서 즉시 목을 베는 것이 규칙일 텐데.”
대머리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대답 여하에 따라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휴멜 님께서 이놈을 연무장 말뚝에 묶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당황한 병사가 허겁지겁 변명했다.
“휴멜이? 그놈이 어째서 농노 따위를 말뚝에 묶어 놓으라고 하는 거지?”
“이 간악한 놈이 탈출을 시도하면서 병사 14명을 죽였습니다.”
대머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 비리비리한 꼬마 놈이 호엔레른 백작가의 병사를 14명이나 죽였다고?”
“그렇습니다.”
병사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오……. 알았다. 가 봐라.”
대머리는 파리를 쫓듯 손을 휘둘렀다.
병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이었다.
대머리가 검집을 휘둘러 나의 발을 후려쳤다.
딱!
“크윽!”
왼쪽 발의 정강이뼈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노려보자 대머리의 눈에 다시 이채가 스쳤다.
“과연…….”
대머리는 나를 한 번 더 쳐다본 후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기사들이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조용히 따라와라. 한 번만 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병사는 자기 잘못을 나에게 떠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연무장의 말뚝.
비유법이 전혀 없는 이름 그대로의 물건이었다.
나무로 된 말뚝이 연무장 한쪽 끝에 박혀 있었다.
웬만한 집보다 길이가 길었고, 색깔이 검붉었다. 근처로 다가가자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나무 말뚝의 색깔이 검붉은 이유를 깨달았다. 수없이 많은 피로 덧칠이 되어 색깔이 변질된 것이었다.
병사는 말뚝에 달린 갈고리에 팔의 수갑을 걸었다. 그러곤 도르래의 밧줄을 잡아당겼다.
끼기긱!
끼기기긱!
갈고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나 역시 양팔을 들어 올린 채 끌려 올라갔다. 병사는 나를 까치발을 해야 간신히 땅에 닿을 만한 높이까지 끌어 올렸다.
어깨가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대머리에게 맞은 왼쪽 정강이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뼈에 금이 간 것이 확실했다.
“크크크!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참고로 최고 기록은 5일이었다. 아 참! 이제 이것은 필요 없을 거다.”
부우욱!
병사가 나의 옷을 잡아 뜯었다.
나는 다시 알몸이 되었다.
피와 상처로 흉측하게 변한 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쪽을 쳐다보고 있던 기사 몇 명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지독하게 당했는데.”
“더 때릴 것도 없겠어.”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니까.”
“마침 저기 오는군.”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연무장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남자처럼 크고 당당했다.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찰랑거렸다. 코는 오뚝했으며 살짝 부푼 입술은 도드라졌다. 피부가 첫눈처럼 하얗다.
“말뚝지기가 카렌인가 본데.”
“불쌍하군. 가뜩이나 몸이 만신창인데 하필 마녀가 말뚝지기니.”
“이틀 못 넘긴다에 한 달 치 봉급을 걸지.”
“지금 내 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내게 볼일 있는 사람?”
카렌이라고 불린 여자가 기사들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기사들이 흠칫 몸을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아, 아냐. 아무 얘기도 안 했어.”
“흐음…….”
카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사들을 바라봤다.
기사들은 딴청을 부리다 이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저것들도 사내라고.”
카렌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대단한 미인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어 몸의 굴곡이 여과 없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날씬하면서도 나올 때는 나오고 들어갈 때는 들어간 볼륨 있는 몸매였다. 얼굴은 귀엽고 순진한 인상이었지만 눈빛이 고양이처럼 도발적이었다.
“내 이름은 카렌. 기억해 놓을 필요는 없어. 어차피 금방 죽을 테니까.”
그녀는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얼굴을 지나 목을 타고 내려와 가슴을 훑었다. 주로 상처 부위를 더듬었고 그러는 바람에 그녀의 손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후로도 그녀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고 내 몸의 상처를 하나하나 매만졌다.
“꽤나 심하게 당했어.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혀를 깨물고 자살을 했거나 머리가 미쳐 버렸을 텐데. 보기보다 의지력이 강하네.”
그녀는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축였다. 표정에서 즐거움이 묻어났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여전히 귀엽고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그녀는 더 이상 예쁘기만 한 여자가 아니었다.
카렌은 휴멜과 같은 인종이었다.
“그렇게 노려보면…… 이 예쁜 누나가 무섭잖니.”
푹!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상처를 헤집으며 배 안으로 들어왔다.
배 안에서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손톱이 내장을 살살 긁었다. 색다른 경험이었고, 소름 끼치는 경험이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카렌이란 이름의 이 여자는 화사한 외모 속에 독을 품고 있는 여왕 거미였다.
“휴멜 님의 전언이야. 앞으로 10일 동안 말뚝의 형벌에서 살아남는다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하셨어.”
그녀는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허리춤에서 붉은 빛깔의 채찍을 꺼냈다. 보통의 채찍보다 두 배쯤 길어 보이는 채찍이었다.
“휴멜 님도 너무하시지. 이 땡볕으로 나를 내보내시다니. 머릿결 다 상하겠네. 그러니 10일 동안 버티겠다는 생각 따윈 하지 말고 나를 위해 최대한 빨리 죽어 주렴.”
피리릭!
팍!
채찍이 나를 향해 날아오다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채찍에 맞은 땅이 깊숙이 파였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네놈이 맞을 횟수는 모두 열 대고, 맞을 때마다 숫자를 세야 돼. 숫자를 세지 않으면 계속 때릴 수 있으니까 빨리 죽고 싶으면 그냥 기절해 버려. 간단하지? 대충 설명은 끝난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채찍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피리릭!
채찍이 뱀처럼 몸을 흔들었다.
농노의 마을에서 병사들에게 무수히 많은 채찍질을 당했다. 휴멜에게 붙잡혀 끌려오는 동안 병사들에게 매일 밤 얻어맞았다. 그래서 고통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자인 카렌의 채찍질을 얕봤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철썩!
“커헉!”
채찍은 왼쪽 팔꿈치를 때렸다.
단 한 방에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팔꿈치에서 시작된 고통이 살을 파고들어 뼈까지 진동시켰다. 짐승의 이빨이 팔을 통째로 잡아 뜯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잘했어. 그렇게 하는 거야. 괜히 오래 살려고 바동거리지 말고 입을 꽉 다물고 있어. 아니, 이왕이면 비명이나 좀 질러 주든가.”
채찍이 허공에서 똬리를 틀었다 순식간에 촉수를 뻗었다.
피리리릭!
철썩!
“큭! 하, 하나…….”
이번에는 오른쪽 팔꿈치였다. 지독한 고통으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한 줌의 이성이 간신히 살아남아 숫자를 말했다.
“칫! 바동거리고 싶은가 보네. 하긴 휴멜 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놈치고 독하지 않은 놈이 없었지. 귀찮게 됐어.”
피리릭!
철썩!
피리릭!
철썩!
“두울…… 세엣, 네엣…….”
한계였다.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카렌의 채찍은 병사들의 채찍과 그 수준이 달랐다. 근육과 근육 사이, 뼈와 뼈 사이를 교묘한 솜씨로 노리고 있었다. 사지가 뜯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춤추듯 날아오는 채찍을 보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몸부림치던 의식이 사라져 갔다.
그때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예전에 경험했던,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바로 그 힘이었다.
거대한 힘이 혈관을 타고 몸속을 내달렸다. 수천 마리의 개미가 온몸을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엄청난 고통이 잠들어 가던 이성을 깨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내부의 고통으로 인해 외부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 아홉…… 큭.”
카렌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보기보다 터프하네. 다섯 번 안에 기절시킬 자신이 있었는데. 내 실력도 이제 한물갔나 봐. 음……. 어차피 오늘 죽이기는 힘든 것 같고. 자아, 마지막은 어디로 때려 줄까?”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아 그녀는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용암처럼 뜨거운 힘이 혈관을 불태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주제에 숫자도 제대로 세고, 비명도 안 지르고. 말뚝지기를 맡은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줄래? 저기 뒤에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안 보여? 서비스 차원에서 비명도 좀 질러 주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그래야 흥이 살 것 아니야. 말뚝의 형벌 역사상 네놈처럼 재미없는 사람은 없었을 거다.”
카렌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나를 노려봤다.
“마지막은 내 명예를 걸고 기필코 비명을 지르게 해 주마.”
그녀는 의욕을 불태우며 어디를 때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조금도 없었다. 빨리 그녀가 사라지길 바랄 뿐이었다.
내게는 용암과도 같은 힘을 다스릴,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결정했어! 후후후!”
잠시 후 카렌이 눈빛을 반짝이며 음흉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좀 아플 거야. 만약 비명을 지르지 않고 제대로 숫자를 세면 네가 정말로 대단한 놈이라는 걸 인정해 주겠어.”
네 인정 같은 것은 필요 없으니까 얼른 때리고 꺼져 버려라.
내 마음을 읽었는지 카렌이 곧장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여태까지 위에서 아래로 꽂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 순간 채찍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피리릭!
철썩!
“남자의 급소. 후훗!”
강렬한 벼락이 꼬리뼈에서 정수리까지 뻗쳤다. 고통을 초월한 고통에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버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순식간에 의식이 날아갔다. 동시에 몸 안에서 날뛰던 힘도 사그라졌다.
“여얼…….”
기적처럼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 어떻게 참을 수 있지? 네놈은 여자였냐?”
내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 * *
말뚝의 형벌.
죄인을 말뚝에 묶은 후 죽을 때까지 방치해 놓는, 호엔레른 백작가의 전통적인 형벌.
죄질이 심할 경우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는데 때리는 횟수는 보통 하루에 열 대를 넘기지 않았다.
너무 많이 때려 일찍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를 세지 못해 맞아 죽는 죄인이 태반이었다.
채찍질하는 사람은 죄인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가 지정할 수 있었는데,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을 말뚝지기라고 불렀다.
나는 휴멜의 병사를 죽여 그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래서 죄인이 되어 말뚝에 묶였다. 그리고 휴멜은 말뚝지기로 자신의 부관인 카렌을 선택했다.
이상이 카렌이 설명해 준, 내가 말뚝의 형벌을 받게 된 경위였다.
“일광욕은 잘하고 있지? 오늘도 무지 덥네. 여기까지 걸어오는데 벌써 땀으로 흠뻑 젖었어. 망할 햇빛 때문에 머리카락이 푸석거려.”
카렌이 짜증을 내며 다가왔다.
땀에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속살이 은은하게 비쳤다. 굉장히 유혹적인 모습이었지만 이 외모가 거짓임을 알기에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발가벗고 있으면 창피하지 않아? 백작가에서 네놈의 알몸을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하더라. 심지어 어린 하녀들까지 전부 봤다고 하던데. 나 같으면 더 이상 창피당하기 전에 콱 죽어 버렸을 텐데. 왜 자꾸 살아 있는 거야?”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카렌이 기분이 상한 듯 혀를 찼다.
나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 묶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물과 음식은 일절 주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입에서 메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카렌이 주변을 쓰윽 둘러본 후 달걀만 한 가죽 주머니를 내 입속에 넣어 주었다.
이빨로 깨물자 가죽이 찢어지면서 청량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체를 삼키자 조금이나마 기력이 회복되었다.
나는 가죽을 씹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액체를 짜냈다.
죽어 가던 생명이 다시 타올랐다. 몽롱했던 정신이 점차 또렷해졌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오면서 사라졌던 고통이 다시 시작됐다.
“퉤!”
가죽을 뱉어 내자 카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주웠다.
그녀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짓이겨져 있는 가죽을 손수건에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휴멜 님의 생각은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이렇게 비리비리하고 약해 빠진 놈이 뭐가 좋다고 포션까지 먹이는 거지?”
카렌은 말이 많았다. 혼자서도 잘 떠들었다. 대부분 시시껄렁한 잡담이었지만 간혹 유용한 정보도 섞여 있었다. 지금처럼.
포션이라.
하루에 한 번 내가 마시고 있는 청량한 액체의 정체가 포션이었다니.
조금 놀랐다.
포션은 신관만이 제조할 수 있는 절세의 회복 물약이었다.
신성력의 크기가 포션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에 고위 신관이 만든 포션일수록 효과가 크고, 가격 또한 매우 비쌌다. 대신관이 만든 최상급 포션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알려져 있었다.
어쨌든 포션은 백작가의 기사가 죄인에게 줄 정도로 흔해 빠진 물건이 아니었다.
포션 덕분에 나는 사람이 음식과 물을 먹지 않고 얼마나 살 수 있나 세계기록에 도전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만 되면 기사는 물론 하인들까지 찾아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내기라도 한 듯했다.
이 백작가 놈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사람 생명을 가지고 내기하는 것을 즐기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의 바람대로 나는, 포션을 마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포션은 마치 물을 타 희석시킨 것처럼 그 명성에 비해 효과가 미미했다.
나에게는 물을 마시는 것 이상의 치유 효과를 주지 못했다. 내 육체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회복력과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포션까지 먹이면서…… 나를 괴롭히는…… 목적이 뭐지?”
입이 바싹 말라 있어 발음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나도 몰라. 휴멜 님은 일일이 설명을 해 주시는 분이 아니거든.”
카렌은 말뚝 옆에 서 있는 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때리는 건 좀 쉬었다 할게. 덥다, 더워.”
그녀는 작은 빗을 꺼내 정성스레 빗질을 시작했다.
나는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한 채 연무장 쪽을 쳐다봤다.
연무장에서는 기사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나는 자꾸 가라앉으려고 하는 의식을 억지로 끄집어낸 후 기사들의 훈련을 집중적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휴멜은 말도 안 될 정도의 천재였고, 때문에 그동안 내가 해 왔던 허접스러운 방법으론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좀 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사들의 훈련을 관찰하는 것은 나에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백작가의 검술은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었다. 흐름은 자연스러웠으며 칼끝이 향하는 곳은 살인에 최적화된 위치뿐이었다.
검술에 무지한 내가 봐도 수준이 느껴질 만큼 훌륭한 검술이었다. 게다가 더 좋은 것은 덤으로 휴멜의 검술을 파악해 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기사의 훈련 모습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검술이 노출된 기사는 그만큼 약점을 파악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들은 훈련을 아무 곳에서나 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기사들의 수련을 본다는 것은 일종의 기연과도 같았다. 물론 이따위 기연은 원하지 않았지만.
기사들은 다양한 동작을 반복적으로 연습했고, 나는 밤이 되어 연무장에 홀로 남을 때마다 머릿속으로 그 동작들을 연습했다.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기사의 검술은 눈이 현혹될 만큼 화려하고 빠른 쾌검술이었다. 이에 반해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은 군더더기가 거의 없는 실용적인 검술이었다.
기사의 검술이라기보단 효율적으로 적을 살상하는 것이 목적인 용병의 검술, 즉 용검술과 크게 닮아 있었다.
“이 날씨에 덥지도 않은가. 보고만 있어도 땀이 나는 것 같네.”
자기도 기사인 주제에 카렌이 짜증 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때마침 훈련 교관, 내 정강이뼈를 검집으로 후려친 대머리 기사가 연무장의 기사들을 단상 앞에 집합시켰다.
연무장 곳곳에서 따로따로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단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20명쯤 되는 기사들이 단상 앞에 사열 종대로 섰다.
기사들의 얼굴 위로 긴장감이 떠올랐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대머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대련을 실시한다. 규칙은 전과 동일하다. 대련은 실전처럼 하되 급소를 노리는 등의 치명적인 공격은 제한한다.”
말을 마친 대머리가 기사들을 스윽 훑어봤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두 기사를 가리켰다.
“앞으로!”
지목을 당한 두 기사가 각자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면서 앞으로 나왔다. 두 기사는 햇볕이 내리쬐는 연무장 한가운데 서서 결투의 예를 취했다.
“나이트 가브리엘!”
“나이트 루이첼!”
크고 경직된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대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른 기사들이 두 기사 주위를 원형으로 에워쌌다.
“시작!”
호령과 동시에 루이첼이란 이름의 기사가 망설임 없이 돌진했다.
두 기사의 검이 부딪쳤다.
챙! 챙!
검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조차 깜빡거리지 않았다.
부웅!
가브리엘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루이첼이 간신히 쳐 냈다.
“크윽!”
루이첼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두 기사의 대결을 머릿속으로 분석했다.
루이첼의 검은 가브레엘에 비해 빠르고 화려했지만 그만큼 가벼웠다. 반면 가브리엘의 검은 검로가 훤히 보일 만큼 투박하고 우직했지만 그만큼 힘이 넘쳤다.
즉, 루이첼이 쾌검이었다면 가브리엘은 중검이었다.
한차례 격돌 후 루이첼은 자신의 장점을 더욱 살리는 쪽으로 검술을 수정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어차피 힘으로 이기려 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휘익!
휙!
루이첼의 검이 빠르게, 더 빠르게 움직였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반사된 햇살이 어지럽게 번쩍였다.
챙! 챙!
루이첼은 완력의 부족함을 속도로 만회하고 있었다.
힘과 속도의 대결.
가브리엘이 검을 높이 치켜든 후 태산조차 양단할 기세로 내리쳤다. 루이첼은 검으로 막는 것을 포기하고 바닥을 굴러 몸을 피했다.
목표를 잃은 가브리엘의 검이 푹 땅에 박혔다.
“지금이닷!”
루이첼은 상대의 허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놀란 가브리엘이 급히 검을 들어 방어해 봤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검이 어느새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와아!
승부가 결정되었다.
두 기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얼굴을 노려봤다. 한쪽은 웃음을, 한쪽은 분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트 루이첼 승!”
“역시 루이첼이야!”
“가브리엘이 유리했었는데 운이 좋았어.”
시끄러운 환성 속에서 두 기사는 서로에 대한 경례로 대련을 마무리했다.
대머리가 다음 대련자들을 지목했다.
두 번째 대련자들이 대련을 시작했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박진감 넘치는 대련이었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카렌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슬슬 시작해 볼까?”
채찍이 내 몸을 할퀴었다.
나는 채찍의 움직임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다 채찍이 몸에 닿는 순간 몸을 슬쩍 움직여 충격을 최소화했다. 뛰어난 동체 시력이 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채찍을 맞는 양이 늘어날수록 충격을 흡수하는 요령도 숙달되었다.
휘리릭!
짝!
열 번째 채찍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드디어 귀찮은 말뚝지기의 의무에서 벗어나는구나. 네놈은 아마 정오쯤 풀려날 수 있을 거야.”
카렌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방긋 웃었다. 그녀는 채찍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후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살아남은 걸 축하해. 그럼 몸조리 잘하고, 조만간 또 보자.”
나는 멀어져 가는 카렌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니.
까무러쳤다 깨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시간관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니, 일부러 무시했다.
인간이 어찌 아무것도 먹지 않고 10일을 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 뙤약볕 아래 묶여.
그래서 일부러 날짜를 세지 않았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런데…… 정말로 열흘을 버텨 내다니.
“그렇구나……. 오늘이…….”
나는 또다시 살아남은 것이다.
그래, 살아남았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목이 갈라져 쇳소리 같은 웃음만 새어 나왔다.
나는 미친놈처럼 낄낄거리며 웃었다.
“기분이 좋은가 보군.”
익숙한 목소리였다.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다가왔는지 바로 앞에 휴멜이 서 있었다.
휴멜임을 인지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앞으로 돌진했다. 양팔과 양다리가 묶여 있으니 박치기라도 해 줄 생각이었다.
짤그랑!
“큭!”
갈고리의 길이가 짧아 휴멜 근처에 가 보지도 못한 채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쯤이면 정신이 붕괴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성깔이 대단하군.”
나의 발악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휴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온 것 아닙니까.”
휴멜 뒤에 서 있던 검은 로브의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내 발치에 쭈그리고 앉더니 말뚝을 중심으로 기묘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형이상학적인 도형과 알 수 없는 문자로 이뤄져 있었다.
검은 로브의 남자는 그림의 중심에 푸른 빛깔이 감도는 돌을 내려놓은 후 뒤로 물러났다.
“네가 죽였던 호랑이의 마나석이다. 이렇게 사용하긴 아깝지만 하는 수 없지.”
“휴멜 님, 시작하겠습니다.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휴멜이 뒤로 물러서자 검은 로브의 남자가 생전 처음 듣는 언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나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나석에서 시작된 빛이 그림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그림 전체가 환한 빛을 뿌렸다.
남자는 마나석에 손을 댄 채 주문을 외쳤다.
“소울 브레이크Soul Break!”
화악!
아래에서 뿜어져 올라온 빛이 내 몸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영혼의 그릇이 부서지는 것 같은 치명적인 고통이었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나는 마법의 정체를 깨달았다.
소울 브레이크.
이름 그대로 정신 붕괴 마법이었다.
나는 사라지려고 하는 의식을 붙잡고 늘어졌다.
휴멜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고통을 인내하는 것은 나의 특기나 다름없었다. 바로 휴멜이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마법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뜨고 검은 로브의 남자,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마법사는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나를 감싸고 있는 빛이 점점 옅어졌다. 마나석에 감돌던 푸른빛이 점점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그냥 각인을 시작해라.”
휴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정신을 붕괴시키지 않은 상태로 각인했다가는 시전자인 저 역시 죽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가 죽을 수 있으니 못 하겠다는 말이었다.
“멍청한 놈. 나는 네놈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마나석을 쓰레기로 만든 놈을 내가 살려 둘 것 같아? 각인에 성공하지 못하면 넌 죽어. 내 손에 죽는 것보다 스스로 자살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편이 훨씬 고통이 적을 테니까.”
휴멜의 살기가 느껴졌다.
마법사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마법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는 사이 마나석의 푸른빛이 거의 사라졌다. 나의 영혼을 뒤흔들던 고통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마법이 끝나 가고 있었다.
마침내 마법사가 결정을 내렸다.
“이제부터 네게 각인 마법을 시전할 것이다. 노예의 인장이라고 불리는 각인 마법이다.”
마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법을 설명했다.
“이질적인 힘이 네 몸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힘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거부하면 너와 나 둘 다 죽게 될 것이다.”
“크크크! 나에게…… 노예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노예로 만들 것이니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웃기는 놈 아닌가?
나는 마법사를 비웃었다.
“죽는 것보다는 노예가 되는 게 나을 텐데?”
휴멜이 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바로 코앞에 휴멜의 얼굴이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코를 물어뜯었을 것이다.
“휴, 휴멜 님! 아직 마법진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시면 소울 브레이크의 영향으로 정신이 붕괴…….”
“네놈의 마법 따위가 내게 통할 것 같아? 조용히 닥치고 있어.”
휴멜은 다시 나를 쳐다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꼬마야, 아니 칼리온이라고 했던가. 칼리온, 여기까지 버티고 나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억울할 텐데? 죽으면 복수도 할 수 없잖아.”
“이지를 상실한 인형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착각이 심한데. 고작 인형 하나를 만들기 위해 내가 마나석까지 사용한 줄 알아? 노예의 인장은 인형을 만드는 마법이 아니야. 배신을 막기 위해 만든 단순한 족쇄 마법에 불과하지. 나를 증오하고 있는 너 같은 놈을 곁에 두기 위해 이 정도 족쇄쯤은 필요하지 않겠어?”
“어째서…… 나를 곁에 두려고 하는 것이냐?”
“너를 퍼스트 나이트로 만들기 위해서다. 물론 지금 당장은 무리지만 내가 황제가 되는 날, 너는 나의 퍼스트 나이트가 될 것이다. 내 말에 거짓이 없음을 마나에 대고 맹세하지.”
이놈이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희생양으로 사용하기 위해 나를 붙잡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놈은 처음부터 농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퍼스트 나이트라니.
퍼스트 나이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수호 기사.
먼 옛날 아칼레스라는 남자가 있었다.
작은 왕국의 일곱 번째 왕자로 태어난 그는 불과 열다섯 살의 나이에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되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왕궁에서 탈출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독살되었으며 자신을 옹호하던 귀족들은 모두 축출되었다.
빈털터리로 쫓겨난 열다섯 살 왕자를 받아 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제외하곤.
아칼레스의 소꿉친구이자 촉망받던 기사 후보생 한 명만이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그를 따라나섰다.
열다섯 살 동갑내기 친구는 허허벌판에 서서 운명에 저주를 퍼붓던 아칼레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당신의 검이 되리라. 거부하는 자를 베고, 가로막는 것을 부수고, 따르는 자를 지키리라.”
클레모니아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아칼레스 대제의 첫 번째 기사.
아칼레스의 검이 되어 대륙을 거침없이 누볐던 무적의 기사.
그리고…….
“나의 첫 번째 기사여! 너의 검이 나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라. 네가 살린 목숨을 네가 거둬 가는 것에 불과할지니 어느 누구도 네게 죄를 묻지 못할 것이다.”
황제를 죽여도 죄를 물을 수 없었던 유일한 기사.
퍼스트 나이트 에드란 드 모로.
그 후 세월이 흘러 퍼스트 나이트는 기사단의 수장, 즉 기사단장을 뜻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에드란 드 모로 이후 퍼스트 나이트는 모든 기사가 추구해야 하는 기사의 정점이 된 것이다.
휴멜은 그 퍼스트 나이트의 칭호를 나에게 준다고 말했다. 간신히 그의 목적을 알았지만 너무 허황되어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휴멜은 자신의 말이 진심임을 맹세했다. 그것도 마나에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맹세를 어기는 순간 세상의 모든 마나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는 마나의 약속이었다.
나를 속이기 위한 것치고는 대가가 너무 컸다.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 분명 황제가 된다고 한 것 같은데?’
휴멜의 이름은 휴멜 드 호엔레른이었다. 호엔레른이란 성이 붙어 있으니 현재 그는 백작가의 자식이 분명했다.
공작이나 후작도 아닌 백작가의 자식이 왕도 아니라 황제가 된다?
반역을 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밝힌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마법사의 표정도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시작해라.”
마법사는 휴멜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렸다. 그만큼 휴멜의 반역 선언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스릉.
휴멜이 검을 뽑았다.
마법사가 허겁지겁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슬레이브 스템프Slave Stamp!”
노예 각인 마법이 시전되었다.
차갑고 난폭한 기운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이질적인 힘의 침범에 몸이 본능적으로 힘을 밀어냈다.
“받아들여라! 거부하면 너는 죽는다!”
나는 휴멜의 말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이질적인 힘이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제, 제발 거부하지 마라!”
마법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질적인 힘의 크기가 급격히 커졌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마법사가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마법사의 힘을 거부하면 확실히 죽을 것이다. 마법사의 절박한 얼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휴멜의 말만 믿고 마법사의 힘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휴멜의 말을 신용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네놈은 진짜로 죽을 셈이냐! 죽더라도 제발 힘을 받아들인 후에 죽어라!”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리고, 분석하고, 평가를 내렸다. 장점과 단점을 따지고,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위험을 고려했다.
그리고 최후의, 최후의 순간 나는 마법사의 힘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휴멜의 말이 전부 거짓말일지라도 오직 한 가지 진실인 것이 있었다.
그의 말처럼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죽도록 고생만 하다 진짜로 죽는, 한마디로 말해 개죽음일 뿐이었다.
게다가 설령 속았다 할지라도 나에게는 마나의 약속이 남아 있었다. 휴멜에게 속았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최소한 휴멜의 마나는 날려 버릴 수가 있었다. 마나를 잃는다는 것은 휴멜과 같은 기사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게 분명했다.
휴멜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복수의 기회가 있었다.
그래.
모든 것은 복수를 위해서.
나는 경계심을 풀고 본능을 다독였다. 조심스럽게 마법사의 힘을 받아들였다.
마법사의 힘이 조각칼이 되어 뇌에 그림을 새겨 넣었다. 달궈진 쇠붙이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더 이상 고통을 참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기꺼이 의식을 놓아주었다. 의식은 기다렸다는 듯 하늘 높이 훨훨 날아갔다.
모든 세상이 순식간에 캄캄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