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의 시작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깊은 산속까지 침투했다. 달궈진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헉, 헉…….”
나는 달리던 것을 멈추고 호흡을 조절했다.
트롤과 같은 회복력을 지닌 체력도 불볕더위 아래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털썩!
나무 그늘에 주저앉은 나는 신경질적으로 나무 밑동을 후려쳤다.
퍽!
나무가 진동하면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어째서 사라진 거지?”
마침내 인정했다.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미지의 힘이 사라졌음을.
생사의 기로에서 간신히 살아났을 땐 다시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강함에 대한 욕망이 힘의 사용을 부채질했다.
욕망은 마치 한이 맺힌 것처럼 강함을 추구하였다. 욕망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무리가 오지 않는 한도까지 미지의 힘을 사용한 후 그 힘을 조금씩 늘려 나가는 식의 수련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나의 계획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다. 마치 거짓말처럼 미지의 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여도 미지의 힘은 발현되지 않았다. 악마를 떠올리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미지의 힘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둘 중 하나였다.
진짜로 사라졌거나, 아니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생존 본능이 미지의 힘을 완벽하게 억눌렀거나.
사라졌다면 방법 자체가 없는 것이고, 생존 본능이 관여되었다면 죽음을 초월하는 깨달음이 필요했다. 어느 쪽이든 사라진 힘을 되찾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짜증이 밀려왔다.
“목욕이나 해야겠다.”
지긋지긋한 태양을 한번 노려본 후 연못으로 걸음을 옮겼다.
풍덩!
발가벗은 후 연못에 뛰어들자 놀란 물고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못 물은 뼈가 찌르릉 울릴 만큼 차가웠다.
수면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여전히 여리고 앳된 소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수련의 성과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상체 근육이 발달하여 가슴과 어깨가 탄탄했고, 역삼각형 모양으로 균형이 잡혀 있었다. 가늘었던 팔 역시 상완이두근이 부풀어 올라 울퉁불퉁 굴곡이 생겼다. 상체뿐만 아니라 하체 근육 역시 건실했다.
불과 한 달 만의 성과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육체는 잘 발달되어 있었다.
몸을 씻기 시작하자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몸을 다 씻고 밖으로 나와 햇볕에 몸을 말리고 있는데 미약한 진동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땅바닥에 귀를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진동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급히 옷을 입고 진동음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젖히고 울창한 풀숲을 뛰어넘자 언덕 아래 병사들의 행렬이 보였다. 행렬을 이끄는 자는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 기사였다.
“기사 하나에 거의 100명에 육박하는 병사들이라……. 어디로 가는 거지?”
산의 지리는 이미 꿰뚫고 있었다.
병사들이 향하는 방향을 눈대중으로 헤아려 보니 목적지가 눈에 보였다.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는 은둔자들의 마을.
병사들이 향하는 방향에는 바로 그 마을이 있었다.
“음……. 어떡하지…….”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죽든, 잡혀가든 내 인생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경고 정도는 해 줄까.”
병사들의 행군 속도로 봤을 때 오늘 밤에나 도착할 듯싶었다.
나의 신체 능력이라면 마을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 정도는 벌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병사들을 앞질러 달려 나갔다.
세상에서 도망친 그들에게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괜히 가 봐야 불안과 두려움만 조성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가지 않았다.
가죽옷을 훔쳐 간 뒤로 한 달 만에 와 보는 마을이었다.
마을은 전보다 훨씬 더 조용했다. 황량할 만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흡!”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지독한 악취가 나를 반겼다.
마치 유령 마을처럼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산비탈에 개간한 밭에 잡초가 수북했다.
어디에서도 마을 사람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나의 이목을 피해 숨어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나의 감각은 야생동물을 초월했다.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벌써 도망쳤나 보군.”
잠깐 고민한 끝에 마을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놓고 간 물건 중 쓸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지난번과 다르게 마을 입구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마을로 들어서니 정말로 유령 마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을은 적막한 것을 넘어 황폐했다. 통나무집의 망가진 문짝이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거렸다.
마을 곳곳에 산짐승의 똥이 널려 있었다. 배설한 지 얼마 안 되는 똥부터 딱딱하게 굳은 똥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바람을 타고 지린내가 풍겨 왔다.
하루 이틀 상관에 만들어진 풍경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마을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자신들을 잡으러 오는 병사들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혹시?”
번쩍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나는 가죽옷을 훔쳤던 통나무집을 찾았다.
덜컹!
“흡!”
문을 열자 고기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죽옷을 훔친 대가로 잡아 왔던 토끼와 여우가 썩어 문드러진 상태로 바닥에 놓여 있었다. 놓인 위치로 보아 아예 건드리지도 않은 듯했다.
집 안을 둘러보니 의자나 항아리같이 무거운 물건을 제외한 모든 살림살이가 사라진 채였다.
마을 사람들은 도망친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나 때문이었다.
농노의 두려움과 공포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내가 지불한 가죽옷의 대가는 이들에겐 위치가 발각되었다는 신호에 불과했던 것이다.
집을 나와 마을을 빙 둘러보았다.
맨손으로 이 정도의 마을을 만들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한 삶의 터전을 망설임 없이 버리고 도망칠 만큼 그들은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평생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자유를 찾아 도망쳤건만 그 자유가 오히려 숨통을 죄고 있는 꼴이었다.
어쨌든 나로 인해 무사히 도망친 것과 다름없으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나는 찝찝한 기분을 털어 버리고 필요한 물건을 찾기 위해 마을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싯돌 몇 개와 만들다 만 가죽옷 하나를 찾아냈다.
워낙에 가난한 마을이었기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웠다. 단검이라도 하나 나왔으면 좋았으련만.
빈약한 수확물을 들고 마을을 빠져나오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병사들이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남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순간.
달그락!
무언가 발에 차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발에 차인 것이 무엇인지 살폈다.
“이것은…….”
동물의 정강이뼈가 발밑에 있었다.
정강이뼈 옆에는 수십 개의 뼈다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한곳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아 한 놈이 저지른 소행이 분명했다.
뼈다귀의 크기는 각양각색이었다. 작은 동물의 것도 있었고, 멧돼지처럼 큰 동물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곰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이었다.
두개골의 머리 부분에 손가락이 쑥 들어갈 만한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었다. 짐승의 어금니 자국이었다.
“곰의 머리를 물어뜯을 수 있는 짐승이라…….”
곰은 최강의 육식동물 중 하나였다. 머리통에 구멍이 뚫려 죽을 만큼 약한 동물이 절대로 아니었다.
“이런 짓이 가능한 것은 몬스터뿐인데.”
나는 체력 단련을 위해 한 달 내내 산을 휘저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몬스터를 보지 못했다. 산에는 그 흔하다는 고블린Goblin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증거물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때였다.
부스럭.
불길한 기운이 등 너머에서 느껴졌다. 등이 따끔거릴 정도로 강렬한 살기였다.
부스럭.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휘오오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 뒹구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가만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범인과, 마주쳤다.
붉은 기운이 도는 안광眼光.
놈은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자세로 몸을 낮추고 있었다.
살기가 짙게 배인 숨소리. 숨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산짐승의 누린내. 숨을 쉴 때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등 근육. 빳빳하게 일어선 긴 꼬리.
호랑이였다. 그것도 보통의 호랑이보다 거의 세 배나 큰 괴물 호랑이였다.
그르르르…….
호랑이는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그르렁거렸다.
하얀 송곳니가 섬뜩하게 빛났다. 놈은 맹수의 제왕다운 모습으로 서서 나를 가만히 지켜봤다.
꼬리뼈에서 시작된 한기가 척추를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마을 사람들의 행방도,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도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졌다.
모든 정신이 눈앞의 재앙에 집중되었다.
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와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힘이었다. 맹수와 맨손으로 싸워도 될 만큼 압도적인 강함이 아니었다.
평범한 호랑이일지라도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눈앞의 호랑이는 곰을 사냥해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호랑이가 움직였다.
놈은 내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돌며 연방 그르렁거렸다.
나 역시 호랑이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호랑이를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시선을 떼는 순간 호랑이가 덮쳐 오리란 걸 직감했다.
싸워서 이긴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호랑이의 급소를 딱 한 방만 제대로 먹인 후 그대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나의 힘으로 급소를 가격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딱 한 방만 제대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땀에 젖은 가죽옷이 몸에 달라붙었다. 옷에 신경이 쓰여 정신이 일순 흐트러진 순간.
크헝!
호랑이가 허공을 가르며 뛰어올랐다.
휘익!
앞발이 바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스쳤다.
나는 정신없이 발을 놀려 호랑이와 거리를 벌렸다. 호랑이는 여세를 몰아 연방 앞발을 휘둘렀다.
쾅!
와르르!
빗나간 호랑이의 앞발이 통나무집을 후려쳤다.
단 한 방에 통나무집이 무너졌다. 가공할 파괴력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호랑이는 자꾸 빗나가는 공격에 짜증이 나는지 크게 울부짖었다. 공격이 더욱 빨라졌다.
휘익!
부우욱!
앞발의 발톱에 가죽옷의 이음새가 걸렸다.
옷이 뜯어지면서 배에 가느다란 자상이 생겼다. 조금만 늦었어도 배 안의 내장이 다 쏟아질 뻔했다. 모골이 송연했다.
“헉, 헉…….”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던 체력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리가 무겁고 후들후들 떨렸다.
사냥감이 지쳤다는 것을 알았는지 호랑이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휘익!
나는 앞발의 궤적을 읽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휘익!
기회는 한 번뿐.
휘익!
3…….
2…….
1.
“하앗!”
나는 종이 한 장 차이로 호랑이의 공격을 피한 후 오른손 손가락을 앞으로 내질렀다.
목표는 호랑이의 오른쪽 눈.
물컹!
꽈직!
손가락이 눈알을 뭉개며 그 자리에 박혔다. 눈알이 터지는 느낌이 손가락을 타고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소름이 끼쳤다.
그 바람에 피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휘익!
퍽!
호랑이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앞발에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크윽!”
가격당한 방향으로 몸을 날려 충격을 흡수했음에도 일순 정신이 날아갈 만큼 아찔한 충격을 느꼈다.
부웅 날아가 바닥을 한참 구른 뒤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가격당한 왼쪽 팔이 힘없이 덜렁거렸다. 비껴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빠진 것이다.
크헝!
호랑이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날뛰었다.
나는 왼쪽 어깨를 감싼 채 사각지대가 된 호랑이의 오른쪽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빠져나갈 계획이었기에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호랑이와의 거리를 벌려 나갔다.
호랑이는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하는 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위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제법이군.”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나는 움찔 걸음을 멈췄다.
황급히 주변을 살피자 호랑이 너머 통나무집 지붕 위에 낯선 남자가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남자는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었다.
병사들의 행렬을 이끌고 있던 기사가 분명했다. 기사씩이나 되는 놈이 자기 병사들을 내팽개치고 혼자 달려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구석구석 살펴보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가 나타난 것은 호랑이와 내가 싸우고 있을 때가 분명했다.
호랑이에게 신경이 집중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의 감각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즉 통나무집 지붕 위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 감각을 속였다는 뜻이었다.
나는 우뚝 멈춰 선 채 남자를 쳐다봤다.
나의 이목을 속일 정도의 실력이라면 나를 제압하는 것쯤은 쉬울 것이다.
도망갈 수도, 싸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남자는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며 히죽 웃었다.
“먼저 온 보람이 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될 줄이야.”
마치 관찰을 하는 것처럼 남자의 눈이 내 몸을 훑었다. 뱀의 혓바닥이 닿은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마을에 사는 꼬마냐?”
다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붕 위의 기사는 나를 마을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산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마을 안에 있었고,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입을 법한 누더기 같은 가죽옷까지 입고 있었다.
영지에서 도망친 농노들은 대부분 처형된다. 살아남는다 해도 전쟁의 칼받이로 죽거나 광산과 같은 노역장에서 평생 짐승처럼 노동을 해야 했다.
“이 마을에 사는 꼬마냐고 물었는데?”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사는 꼬마가 아니라면 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남자의 눈이 더욱더 가늘어졌다. 입꼬리도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얼굴이 아니었다. 장난을 치는 꼬마의 얼굴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남자는 내 출신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답을 해야 했다.
플레이트 메일을 입을 정도의 기사는 준귀족에 속했다. 귀족이 아닌 자가 귀족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즉결 처분감이었다.
물론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귀족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을 믿고 도박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우연히…… 발견한 마을입니다. 텅 비어 있기에 쓸 만한 물건이 없나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남자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일단 넘어가 주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꼬마야, 무술을 배운 적이 있느냐?”
나는 조금 주저하다 대답했다.
“……없습니다.”
내가 하는 수련이 무술이면 세상에 무술이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흠……. 싸움질도 익히지 않은 꼬마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상대한다? 그것도 마나석을 먹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괴물을?”
“마나석?”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크르르르!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다.
“젠장.”
상처 입은 맹수가 한쪽뿐인 눈을 두리번거리며 나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호랑이의 살기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제안 하나 하지.”
남자는 여유 있는 얼굴로 나와 호랑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남의 집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담담한 목소리였다.
“내가 저 호랑이를 없애 주겠다. 대신 죄인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말해라.”
알고만 있다면 두말 않고 승낙했을 것이다.
그만큼 호랑이가 뿌리고 있는 살기는 어마어마했다. 온몸의 털이 전부 곤두설 지경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어디로 떠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곳에 왔을 땐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고집이 센 꼬마군. 하하하!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박수까지 치며 유쾌하게 웃었다.
저놈한테 달려들면 좋으련만.
저렇게 시끄럽게 구는데도 호랑이는 여전히 나만 찾고 있었다.
슈슛!
푹!
뭔가가 빛살처럼 날아와 발치에 꽂혔다. 동시에 호랑이의 시선이 획 나를 향했다.
“그걸 들고 호랑이와 한번 싸워 봐라.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하고. 하하하!”
남자는 공연을 관람하는 아가씨처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모습이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나를 장난감으로 여기는 놈의 모습에 나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발치에 박혀 있는 단검을 뽑았다. 그러곤 왼쪽 어깨를 나무에 들이받았다. 신음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쿵!
쿵!
쿵!
뚜둑!
세 번 만에 탈골된 어깨뼈가 제자리를 찾았다. 왼쪽 어깨가 불에 지진 듯 화끈거렸다.
크르르르!
독기가 오른 호랑이가 침을 흘리며 나를 쳐다봤다.
한쪽뿐인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호랑이가 내뿜는 살기에 살갗이 찌릿찌릿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후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단검에 불과하지만 제대로 된 진검을 손에 쥐자 마음이 한결 진정되었다.
바람이 불었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주르륵 떨어졌다. 바람에 날린 나뭇잎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크헝!
호랑이가 바람을 가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호랑이의 사각지대인 오른쪽으로 몸을 피했다.
놈은 예상했다는 듯 몸을 빙글 돌려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공격이었다.
휘익!
휘익!
팔과 다리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나는 모든 감각을 일깨워 호랑이의 공격을 피했다.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한 번 호되게 당한 탓인지 호랑이는 전처럼 무모하게 공격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네가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는 수밖에.
체력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호랑이에게서 등을 돌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 뜻밖의 상황에 잠시 멈칫한 호랑이는 이내 도망가는 나를 쫓아왔다.
호랑이의 숨소리가 목덜미를 간질였다.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발톱이 나의 등을 할퀼 것만 같았다.
두려움을 참으며 목표로 삼은 나무를 향해 계속 뛰었다.
팟!
그러곤 나무 기둥을 박차고 공중제비를 돌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털썩!
간신히 호랑이의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놈은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펄쩍펄쩍 뛰었다.
나는 목덜미의 털을 꽉 움켜쥔 채 단검을 역수로 고쳐 잡았다. 그러곤 호랑이의 왼쪽 눈에 박아 넣었다. 단검은 놈의 눈동자를 지나 뇌까지 관통했다.
격렬하게 발버둥 치던 호랑이가 일순 실이 끊긴 인형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간헐적인 떨림이 몇 번 지속되다 이내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크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박은 성공했고, 나는 살아남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꼬마구나. 정말로 마음에 들어.”
지붕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다.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툭!
목덜미가 따끔하더니 순간 세상이 캄캄하게 변했다.
나는 심연의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곳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락이었다.
쫘악!
차가운 물벼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오른쪽으로 획 돌아갔다. 왼쪽 뺨이 얼얼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지?”
한 대 얻어맞고 나자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한가운데 나무 기둥 두 개가 박혀 있었고, 나는 그 기둥 사이에 팔다리를 대자로 벌린 채 묶여 있었다.
병사들이 숲에 불이 번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통나무집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불씨와 함께 하늘에 휘날렸다.
나를 장난감 취급한 것도 모자라, 마을 한가운데 눈요깃감처럼 묶어 놓고, 심지어 뺨을 때리기까지 한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묻고 너는 대답한다. 어때? 간단하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기사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꼬마야, 이름이 뭐지?”
“저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저는 모릅니다.”
“쯧쯧쯧!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꼬마군.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야.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 함부로 다른 말을 지껄이면 안 되지.”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자와 교차해서 쥐새끼처럼 생긴 병사가 다가왔다.
“휴멜 님께서 친절하게 설명도 해 주셨잖아. 입을 조심해야지, 꼬마야. 이 형님께서 친히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마. 감사하게 배우라구. 흐흐흐.”
병사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채찍을 꺼내 땅바닥을 내리쳤다.
휘릭!
철썩!
땅이 파이면서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르침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말하는 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조만간 생각이 좀 바뀔 거다, 꼬마야.”
병사는 잔인하게 웃으며 채찍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채찍소리가 길고 험한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 * *
쫘악!
차가운 물벼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방울이 지나가는 곳이 무척이나 쓰렸다. 온몸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몇 대나 맞았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일흔 대 이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몸의 강인한 체력에 새삼 놀랐다.
채찍을 일흔 대나 맞을 동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몸이 강해진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강단이 있는 꼬마로군.”
휴멜이란 이름의 기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마을에 살던 죄인들이 어디로 도망쳤느냐?”
입술이 터져 똑바로 말하기 힘들었다.
나는 나를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자를 향해 모든 힘을 그러모아 말했다.
“모른다고…… 했잖아……. 이 미친……놈아…….”
병사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흘렀다.
“흐흐흐…….”
이유는 모르지만 유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미친놈은 나였나 보다.
“말귀는 여전히 못 알아듣고, 게다가 오히려 말버릇까지 없어졌군.”
휴멜의 목소리에 살기가 실렸다.
스릉.
검이 뽑히는 소리.
“휴, 휴멜 님, 제가 반드시 버릇을 고쳐 놓겠…….”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이 움직였다.
푸욱!
검이 병사의 심장을 관통했다.
병사는 자신의 몸에 박힌 검을 절망적인 얼굴로 내려다봤다. 심장에서 생명의 기운이 급속히 빠져나갔다.
“사, 살려 주십…….”
휴멜은 검을 빼내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털썩!
병사는 그대로 엎어졌다. 엎드린 자세로 몇 차례 부들부들 떨다 이내 잠잠해졌다.
구경하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휴멜은 병사들을 둘러본 뒤 한 명을 지목했다.
“나와.”
“네!”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휴멜은 병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사라졌다.
“나는 저놈처럼 허술하지 않을 거다.”
병사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의 고집을 꺾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기에 그도 나름대로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기대……하지. 흐흐흐!”
병사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이로써 나의 죽음이 확정되었다.
게다가 곱게 죽지도 못할 듯싶었다.
“크크크!”
그래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쫘악!
차가운 물벼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피와 섞인 물이 찐득찐득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몸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팔과 다리가 축 늘어졌다. 누군가 나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살아 있냐?”
나는 눈앞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힘겹게 눈을 떴다.
“살아 있군.”
빌어먹을 기사 놈이 눈앞에서 이죽거리고 있었다.
침을 뱉어 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내 발치에는 심장이 꿰뚫린 시체가 대여섯이나 있었다. 나를 만신창이로 만든 놈들이었다.
다음 놈은 또 누구냐?
나는 눈에 힘을 줘 휴멜을 노려보았다. 미소를 지었지만 제대로 표현됐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휴멜은 사열 종대로 서 있는 병사들을 훑어봤다.
휴멜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병사들의 시선이 땅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선택되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쪽팔리지만 네가 이겼다. 보통 꼬마가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독종일 줄이야. 괜히 아까운 인재만 버렸어.”
휴멜은 혀를 차면서 나에게 말했다.
스릉!
서걱!
검이 뽑히는가 싶더니 나를 구속하고 있던 밧줄이 잘라졌다. 나는 발치에 고인 피 웅덩이 위로 넘어졌다.
“원칙대로라면 네 녀석의 목을 베야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넌 나와 함께 가야겠어.”
휴멜의 한마디가 나의 미래를 결정했다.
나는 팔다리를 묶인 채 말이 끄는 짐수레 위에 휙 던져졌다.
다그닥!
다그닥!
덜컹덜컹!
“으으…….”
흔들리는 짐수레 위에서 몇 번이나 기절을 반복했다.
정신이 몽롱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살아 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바퀴 크기가 짝짝이인지 짐수레가 심하게 흔들거렸다.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것을 보아 아직 산을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저마다의 장기로 나를 고문한 탓에 가죽옷이 완전히 찢어져 버렸다.
다시 말해 나는 완벽하게 알몸이었다.
피딱지가 내려앉은 맨살 위로 한여름 뙤약볕이 작열했다. 한여름의 태양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열기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지독한 갈증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땡볕 아래 있으면서도 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몸 안의 수분이 전부 증발한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거봐! 아직 살아 있잖아. 하하하!”
“젠장! 명 한번 우라지게 긴 놈이네.”
“나한테 술 한 병 빚진 거야.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나를 뭐로 보고! 내가 내기 빚도 안 갚는 쪼잔한 놈인 줄 알아?”
“어때? 한 번 더 해? 이놈이 내일까지 살아 있을지 어떨지?”
“그럼 안 하려고 했어? 나는 죽는다에 걸지.”
“또? 그럼 나는…….”
병사들이 나를 소재로 내기를 하고 있었다.
창끝으로 등과 엉덩이를 찔러 내 반응을 살핀 후 그 반응을 참고하여 저마다 죽는다, 안 죽는다로 편이 갈렸다.
기사와 마찬가지로 그의 병사들도 나를 장난감 취급하고 있었다.
분노를 연료 삼아 죽어 가던 생명이 다시 타올랐다. 몽롱했던 정신이 점차 또렷해졌다.
나는 눈을 뜨고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어쭈, 우릴 노려보는데?”
“독종은 독종이네. 아직도 개길 힘이 남아 있다니.”
“눈 깔아! 너 때문에 동료가 여섯이나 죽었어!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내 버릴라!”
병사가 창대 끝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숨이 턱 막히는 충격에 허리를 굽혔다.
“큭!”
잊지 않겠다.
오늘의 고통.
오늘의 치욕.
결코 잊지 않으리라.
* * *
산골짜기에서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가지가 휘청거릴 정도로 강풍이었다. 시커먼 구름이 태양을 잡아먹었다. 한낮이 순식간에 밤이 되었다.
물방울 하나가 콧잔등 위로 떨어졌다. 곧이어 굵은 빗줄기가 시원한 소리와 함께 쏟아졌다.
쏴아아!
바닥에 떨어진 빗줄기가 수천 물방울로 부서지며 튀어 올랐다. 그렇게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모양새가 마치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비 떼 같았다.
번쩍!
천지를 대낮처럼 밝힌 찰나의 빛이 사라지자 잠시 후 콰광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암흑으로 물든 세상을 비탄하듯 하늘이 울고 있었다.
차가운 비가 벌겋게 달아오른 몸뚱이를 식혔다.
나는 입을 벌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더 많은 빗물을 담기 위해 애를 썼다.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 했는데. 운까지 좋은 놈이군. 많이 마셔 둬라.”
그런 나를 보고 휴멜이 말했다.
나는 휴멜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며 빗물을 마시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진 것을 보아 지금의 비는 소나기가 분명했다. 그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마셔 둬야 했다.
예상했던 대로 비는 금방 그쳤다.
다시 나타난 태양과 함께 밤이 물러갔다.
한차례 소나기로 기온이 내려가 한결 살 만했다. 비로 목욕을 한 공기가 맑고 서늘했다.
나는 최대한 편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물을 마셔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니, 이제는 체력을 비축할 차례였다.
체력을 비축하는 이유는 물론 한 가지였다.
탈출을 위해.
기회가 올지, 오지 않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사실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래도, 만의 하나,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그것을 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휴멜의 말이 옳았다.
나는 운이 좋은 놈이었다.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크악!”
비몽사몽간에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련한 소리였다.
잠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단번에 깨달았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크헉!”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자 비명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슈슈슛!
슈슛!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서늘한 느낌과 동시에 재빨리 몸을 굴렸다.
푹!
눈을 떠 보니 내가 누워 있었던 자리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하마터면 잠자던 채로 어이없게 죽을 뻔했다. 눈꺼풀 위에 앉아 있던 수마가 단숨에 사라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밖의 상황을 살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상쩍은 무리가 병사들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기습을 당한 듯 휴멜의 병사들이 화살에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휴멜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의 병사가 죽었음에도, 수백 명의 적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그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절제력이 굉장한 인간이거나, 뱀처럼 차가운 심장을 가졌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 복면을 쓴 이유를 묻는 거냐?”
복면인들이 큭큭거리며 비웃었다.
“그렇군. 멍청한 질문이었다. 자기소개는 전투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 법이지.”
휴멜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검을 뽑았다.
“자아, 병사들이여! 돌격!”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이 달려 나갔다.
갑작스러운 병사들의 돌격에 복면인들이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이내 진열을 가다듬고 검을 곧추세웠다.
“쳐라!”
“모조리 죽여 버려!”
함성과 함께 병사들과 복면인들이 충돌했다.
챙!
챙!
파팟팟!
“죽어!”
“크헉!”
숫자는 복면인 쪽이 많았지만 실력은 병사 쪽이 좋았다. 그 균형이 절묘하여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못하고 부질없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복면인들은 영리했다.
그들은 운신의 폭이 좁은 산길을 최대한 이용해, 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병사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수적 열세에 무기의 이점까지 빼앗긴 병사들은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 채 죽어 갔다.
나를 내기의 대상으로 삼았던 병사들 대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죽었거나 혹은 죽어 가고 있었다.
한 번 기울기 시작하자 전세가 급격히 한쪽으로 쏠렸다.
병사들은 괴멸 직전이었고, 복면인들은 아직도 100여 명이나 남아 있었다.
살아 있는 병사들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그토록 바라던 기회가 찾아왔다.
휴멜의 검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주변 공기가 사납게 회전했다. 바람에 휘말린 나뭇잎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휴멜이 검을 떨쳤다.
검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리는가 싶더니 푸른 빛깔의 초승달이 허공을 갈랐다.
쾅!
땅에 거대한 분화구가 생겼다. 십수 명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복면인들의 기세가 단번에 꺾였다.
복면인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휴멜이 한 번 더 초승달을 날렸다.
쾅!
초승달이 짐수레 옆에 떨어졌다.
충격 여파로 짐수레가 뒤집혔다. 그 바람에 안에 있던 나 역시 땅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직감적으로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병사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기어갔다. 그러곤 병사의 가슴에 수직으로 꽂혀 있는 검에 손을 묶은 밧줄을 대었다.
등 뒤로 묶인 터라 밧줄이 잘 잘리지 않았다. 손등과 팔목을 수차례 베인 끝에 간신히 밧줄을 잘랐다.
검을 뽑아 발목의 밧줄을 자른 뒤 주변 상황을 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격전지에서 떨어진 곳이라 나의 행동을 눈치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피로 범벅이 된 진흙탕을 기어 풀숲에 몸을 숨겼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나 다시 한 번 상황을 살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헉……. 헉…….”
고문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나는 뛰다가, 바닥을 굴렀다가, 기다가를 반복하며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나를 숨겨 줄 때까지 도망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바람이 구름을 움직였고, 구름이 달을 가렸다.
하늘이 온통 새까맸다. 달빛은커녕 별 하나 떠 있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한여름 밤의 포근한 어둠이 아니라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의 삭막한 어둠이었다.
나로선 최적의 밤이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연못가에서 잠시 쉬었다.
상처 때문에 빨리 도망칠 수는 없었지만 대신에 나는 산길을 알고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된 이상 술래잡기의 승자는 내가 될 확률이 높았다. 이 산은 나의 영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일단 깊은 숲 속으로 도망가 상처를 치료한 후 마을 사람들처럼 산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휴멜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직 휴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최상의 몸 상태를 가지고 있다 해도 현재로썬 마찬가지였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초승달.
초승달은 일격에 십수 명의 인간을 먼지로 만들었다.
나는 휴멜의 모습을 떠올렸다.
훤칠한 키에 많아 봐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자세. 장난기 어린 얼굴과는 다르게 뱀처럼 차가운 눈동자. 플레이트 메일로도 가릴 수 없는 탄탄하고 날렵한 몸매.
“그 나이에 그러한 경지라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웅이라 불렸던 기사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놈은 천재였다. 그것도 천재 중의 천재가 분명했다.
도망친 뒤 나중에 복수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갑자기 의심이 되었다.
내가 복수를 꿈꾸며 강해지는 동안 휴멜 역시 강해질 것이다. 게다가 그의 괴물 같은 재능이라면 강해지는 속도 역시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지금이 가장 약할 때일지도 몰랐다.
내가 약하다는 사실이 뼈저릴 만큼 아팠다.
어쨌든 그만한 재능을 가진 놈이니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중을 기약하기 힘들다 하여 지금 당장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지금처럼.
생각을 정리한 후 물속에 들어가 살살 몸을 씻었다. 순식간에 연못이 붉게 물들었다.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대충 씻어 내자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상처가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토록 지독했던 상처가 놀랍게도 벌써 아물어 가고 있었다.
“정말 괴물 같은 회복력이야.”
문득 깨달았다. 나에게도 휴멜에 버금가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휴멜의 재능이 상식에서 벗어났다면, 나의 재능 역시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휴멜의 재능이 검이라면 나의 재능은 육체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복수의 성공 확률이 조금 높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못에서 몸을 씻고 밖으로 나오자 피 냄새를 맡고 온 늑대들이 나를 에워쌌다.
나는 알몸이었지만 맨손은 아니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밧줄을 자른 검을 가지고 왔다.
중단 자세로 검을 들자 늑대들이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검의 손잡이가 손에 착 감겨 왔다. 중단 자세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괴물 호랑이와 싸울 때도 그랬지만 검을 쥐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쩌면 과거의 나는 주 무기가 검이었는지도 몰랐다.
대여섯 마리의 늑대가 살기를 뿌리며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괴물 호랑이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 본 나에게 늑대의 살기는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휙!
휙!
허공에 검을 휘둘러 감각을 익혔다.
휴멜의 몸놀림과 검의 궤적을 떠올리며 몇 번 따라 했다. 가로로 휘두르는 척하다 순간 방향을 바꿔 위로 올려쳤다.
보기에는 쉬웠는데 막상 따라 하자 팔목이 뒤틀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컹!
나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늑대 중 한 마리가 기회를 포착하고 달려들었다.
나는 검을 쥐고 있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휘둘렀다.
서걱!
운이 좋았는지 늑대의 목이 한 번에 잘렸다.
씻은 보람도 없이 온몸이 다시 피투성이가 되었다. 나의 일격에 놀란 늑대들이 어두운 숲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늑대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목이 잘린 늑대의 배를 갈라 살코기 부분을 도려냈다.
배가 부를 때까지 늑대의 고기를 먹었다.
비릿한 냄새와 날짐승 특유의 노린내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억지로 씹어 삼켰다.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선 뭐든지 먹어야 했다.
연못 안으로 들어가 한 번 더 피를 씻어 낸 후 짧고 달콤했던 휴식을 끝냈다.
다시 도망칠 시간이었다.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밤의 숲 속.
이변을 느낀 것은 다시 도망치기 시작한 직후였다.
쏴아아!
나뭇가지가 파도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름 모를 새들의 음침한 울음소리가 원귀의 흐느낌 같았다.
쏴아아아!
파도 소리 안에 이질적인 소음이 섞여 있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걸음을 멈췄다.
최대한 몸을 낮춘 채 감각을 일깨워 주변을 살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치 앞도 보지 못해야 정상이겠지만 나에게는 조금 불편한 장애에 불과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끈적거리는 시선이었다.
몸을 움츠리고 주변을 경계하자 시선의 느낌이 사라졌다.
아까 도망쳤던 늑대들인가.
불안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나는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나뭇잎 위를 밟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최대한 은밀하고 최대한 빠르게 도망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러한 나의 행동은 불필요한 고생이었다. 휴멜이 나를 뒤쫓아 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 수 없는 집단의 습격을 받았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농노로 추정되는 소년 하나가 도망친 것쯤은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적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비하면 손톱의 때만큼도 가치가 없었다.
게다가 복면인들과의 전투에서 휴멜이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푸른 초승달을 뿌려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적 열세가 완벽하게 극복되었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했다.
불안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발이 나의 이성에 상관없이 좀 더 험한 산길로, 좀 더 은밀한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섬뜩.
사라졌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한참을 내달렸다. 시선의 느낌이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왔다. 이번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무릎을 꿇고 앉아 땅바닥에 귀를 기울였다. 일어나면서 돌멩이 서너 개를 몰래 집어 들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휴멜은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놈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도망만 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예전 성격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예전의 나 역시 지금의 나와 비슷한 선택을 내렸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좋아. 어디 한번 끝장을 봐 보자.”
나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전장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었고, 나는 그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돌멩이를 쥔 채 나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외길을 따라 산을 올라 거대한 바위 위에 누워 아래를 살폈다. 이곳은 산 아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하나, 둘, 셋, 넷…… 열일곱…… 열아홉.
눈에 보이는 병사들의 수는 모두 19명이었다. 19명의 병사들이 반원으로 진형을 짠 채 서서히 압박해 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따라왔는지, 어째서 들켰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결정을 내렸고, 이제는 실행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휴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의 감각을 속이고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오게 하는 수밖에.”
잡힐 때 잡히더라도.
“그동안의 성과를 시험해 볼 수 있겠어.”
나는 바위에서 내려와 병사들의 포위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냥꾼과 사냥감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돌멩이를 든 손을 힘껏 휘둘렀다. 돌멩이는 어둠을 뚫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쉐에엑!
퍽!
병사의 머리가 터졌다. 머리가 사라진 병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누구냐!”
갑자기 날아온 돌멩이에 동료의 머리가 폭발하자 병사들이 크게 당황했다.
한 달 동안 죽어라 돌을 던진 보람이 있었다.
머리에 박히는 것도 모자라 아예 터뜨리다니.
병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비겁하게 숨어서 공격하지 말고 모습을 밝혀라!”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나 하나 잡기 위해 개떼처럼 몰려든 것은 공정한 것이냐?
나는 그 병사의 잘못을 친절하게 지적해 주었다.
쉐에엑!
퍽!
돌멩이가 바람을 찢으며 날아가 헛소리를 지껄인 병사의 머리를 부수어 버렸다.
“이 새끼를 찢어 죽이지 못하면 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입이 험한 병사에게도 돌멩이를 던져 주었다.
쉐에엑!
퍽!
병사의 입속으로 들어간 돌멩이가 이빨을 모조리 부러뜨린 후 뒷덜미를 뚫고 나왔다.
“저쪽 풀숲이다! 가서 잡아!”
16명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찾지 못했다. 나는 돌멩이를 던질 때마다 자리를 이동하고 있었다.
“없잖아?”
“이상하다. 분명 이쪽에서 날아왔는데.”
“어디 숨어 있느냐, 개자식아!”
어느새 구름이 물러가고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밤의 숲을 밝히기엔 너무나도 미미한 달빛이었다.
달빛이 닿지 않는 어둠을 밟으며 몸을 움직였다.
쉐에엑!
퍽!
쉐에엑!
퍽!
나는 차분하게 사냥을 계속했다.
병사들은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속절없이 죽어 갔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나와! 이 쥐새끼 같은 놈아!”
공포심에 정신이 나간 병사들이 아무 풀숲에나 창을 찔러 넣었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창끝이 목을 스치며 지나갔다. 하마터면 눈먼 창에 목이 꿰일 뻔했다.
나는 황급히, 그러나 조용히 창의 공격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뒤로 물러섰다.
다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내 목을 꿰뚫을 뻔했던 병사를 향해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쉐에엑!
깡!
일곱 번 만에 저격이 실패였다.
나의 시야에 없었던 인물이 땅에서 솟은 듯 갑자기 나타나 검으로 돌멩이를 쳐 냈다.
이곳에서 나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마침내 그가 나타난 것이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저쪽이다. 멍청한 놈들아.”
휴멜이 검 끝으로 내가 숨어 있는 숲을 가리켰다.
나는 양손 가득 돌멩이를 집어 든 다음 한꺼번에 집어 던졌다.
쉐에엑! 쉐에엑!
쉐에엑! 쉐에엑!
10여 개의 돌멩이가 병사들을 덮쳤다.
퍽!
퍽퍽!
“크헉!”
“컥!”
돌멩이에 맞은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에 맞은 놈은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에 맞은 놈은 팔다리가 부러졌다.
나는 몇 명이나 맞았는지 확인도 해 보지 않은 채 자리에서 도망쳤다.
후다닥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어차피 들킨 이후였다. 이제부터는 은밀함보단 신속함이 필요했다.
“저기 있다!”
“잡아라!”
병사들이 뒤쫓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뒤를 돌아봐 휴멜의 위치를 살폈다.
휴멜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놈이 노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병사를 살리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병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놈이었다면 진즉에 나타나 나를 막았어야 했다.
타이밍 좋게 나타나 내 위치만 알려 주고 다시 사라져 버린 휴멜의 의도.
……아니다.
휴멜의 말처럼 생각은 전투가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나를 쫓는 병사들의 눈은 죽은 동료에 대한 복수심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위치를 들킨 이상 쉽게 그들을 사냥하긴 어려울 것이다.
나의 육체는 고문의 후유증에 허덕이고 있어 정상일 때의 폭발력이 나오지 않았다. 본래 힘의 4분의 1도 발휘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저들은 정식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었다. 두세 명만 모이면 야생 호랑이쯤은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단련된 놈들이었다.
쉽게 말해 이번에는 내가 사냥감이 될 차례였다.
“타앗!”
검을 내질렀다.
검은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커헉!”
성대가 잘린 병사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욱신.
왼쪽 어깨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깨뿐만이 아니었다.
아물어 가던 상처가 터졌고, 상처가 없었던 자리에 새로운 상처가 생겼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래도 나는 쉴 수가 없었다.
달렸다. 살기 위해.
숨소리가 거칠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들을 상처 입은 몸으로 상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병사들은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세 명씩 짝을 지어 협동 공격을 해 왔다.
세 명의 역할은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었다. 한 명은 공격을, 한 명은 수비를, 한 명은 견제를 전담했다.
세 명 중 한 명이 죽더라도 협동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그 즉시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그 자리를 메우는 식으로 항상 3인 체제를 유지했다.
돌팔매질로 병사의 수를 줄여 놓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휘익.
검이 수직으로 바람을 갈랐다.
앞을 가로막았던 병사가 경악한 얼굴을 한 채 반으로 양단되었다.
후두둑.
내장이 역겨운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나는 검술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본능에 의지해 검을 휘둘렀다.
살기가 느껴지면 피한다. 공간이 생기면 찌르거나 벤다. 이 두 가지 감각만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짐승과도 같은 감각 덕분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감각에 의지하는 검술은 체력 소모가 심하고 정교함이 부족했다.
나의 몸에 기하급수적으로 상처가 늘어났다.
체력이 모두 고갈되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몸이 천근만근이 된 것처럼 무거웠다. 쫓기고 있다는 초조감이 냉정함을 갉아먹고 있었다.
병사의 수가 몇인지, 또 앞으로 몇 명을 더 쓰러뜨려야 이 지겨운 사투가 끝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사실은 오직 하나.
뛰어야 한다는 것뿐.
나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덤불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그 선택을 후회했다.
용케 잘 버텨 온 나의 운이 마침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리한 살기가 나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움직임을 멈추고 살기의 주인, 휴멜을 쳐다봤다. 그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
“운이 좋은 놈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일부러 숨어 있었건만 알아서 이리로 뛰어들다니.”
침묵이 흘렀다.
사사삭.
사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쥐새끼 같은 놈!”
“근처에 있을 거야! 또 암기를 던질지 모르니까 조심해!”
“여긴 없나 봐. 저쪽으로 가 보자!”
후다닥 뛰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사라졌다.
나는 휴멜을 노려봤다.
어째서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지 않는 것일까?
이놈의 목적은 정말로 모르겠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원하는 게 뭐냐?”
“죄인들이 어디로 도망쳤지?”
“말했을 텐데. 나는 마을 사람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앵무새가 된 기분이었다.
“같은 말을 대체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할 셈이지?”
휴멜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겉보기만 화려한 미소였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아…… 그렇구나. 그런 것이었어.
내가 마을 사람들과 관련이 있고 없고는 휴멜에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순히 나라는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마을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군.”
휴멜의 미소가 짙어졌다.
휘익!
휴멜이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렇게 느낀 순간 이미 검 끝이 내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검이 일으킨 바람이 앞머리를 들었다 놨다.
나는 황급히 물러서 검을 고쳐 잡았다. 솔직히 말해 흐릿한 잔상밖에 보이지 않았다.
검을 마주하고 서자 휴멜의 강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괴물 호랑이의 살기는 살기도 아니었다.
진짜 살기가 어떤 것인지 나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름이 뭐냐?”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게 예의일 텐데.”
휴멜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호엔레른 백작가의 휴멜 드 호엔레른이다.”
“칼리온.”
“무술을 배운 적이 있냐?”
“대답은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휴멜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인상을 찌푸리자 장난기 넘쳤던 인상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잔인하고 흉포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건방이 지나쳐. 나는 입만 산 놈들을 싫어하지. 마지막이다. 무술을 배운 적이 있냐?”
“같은 질문을 대체 몇 번씩이나 하는 거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휴멜이 웃음을 터트렸다.
섬뜩한 예감.
나는 빠르게 폭사되는 살기에 숨을 들이켰다.
몸을 일으킨 휴멜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검 끝이 여전히 나의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내 머리를 꿰뚫을 기세였다.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검에 담긴 기운이 폐부를 짓눌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휘릭!
사정거리 안으로 천천히 걸어오던 휴멜이 돌연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였고, 목적지는 나의 목이었다.
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본능적으로 검과의 간격을 계산한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늦다.’
검이 하얀 호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마음이 설산雪山의 만년설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몸을 뒤로 날리며 동시에 검을 역수로 잡았다. 그러고 난 후 검으로 목을 가로막았다.
쾅!
검과 검이 부딪쳤다. 엄청난 폭음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크윽.”
둔탁한 충격이 목을 강타했다. 흡사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뒤로 날아갔다. 멀리 날아가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후에야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몸을 뒤로 날려 충격을 완화시켰건만 신경이 마비됐는지 손발의 감각이 없었다.
싸늘한 식은땀이 그제야 흘러내렸다.
두 번째 공격은 없었다.
하지만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공격은 내가 해야 했다. 휴멜이 검술을 펼칠 시간을 주어서는 아니 되었다.
실력이 부족한 나에게 있어 공격은 말 그대로 최선의 방어였다.
“으아아악!”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뛰어갔다.
마치 뜬구름 위를 뛰고 있는 것처럼 다리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타격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휴멜의 옆구리를 노리며 가로로 검을 그었다.
예상했던 대로 휴멜은 방어를 위해 검을 비스듬히 뉘었다. 그 틈을 노려 순간적으로 검을 비틀어 올려쳤다. 휴멜의 검술을 따라 한 공격이었다.
“크윽!”
손목이 비틀어지는 고통에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공격은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부웅!
검이 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그 바람에 빈틈투성이 몸이 휴멜의 검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하지만 위기에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법이었다.
휴멜은 방심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충분히 방심해도 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선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실력을 쌓아 나중에 복수하겠다는 느슨한 생각 따윈 버렸다.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
내 목숨을 걸고, 이놈을 죽인다.
나는 허공을 베던 검의 방향을 180도 반대로 틀었다.
우드득!
마침내 손목과 팔꿈치의 뼈가 뒤틀렸다.
동시에 휴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갑작스레 방향이 바뀐 내 검이 휴멜의 목을 노리며 날아갔다.
휴멜은 재빨리 발을 놀려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검을 앞으로 찔렀다.
부웅!
핏!
나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휴멜의 검은 나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휴멜의 얼굴에 새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흥미로움이었다.
“검의 궤적이 낯익은데. 설마 내 것을 따라 한 건 아니겠지?”
“…….”
“쪽팔리니까 제발 아니라고 해 줘.”
“…….”
휴멜이 한숨을 쉬는 척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따라 하고 싶다면 하는 수 없지. 대신, 하려면 제대로 따라 해. 자아, 잘 보라구. 이게 진정한 내 검이니까.”
휴멜의 기세가 돌변했다.
휘익!
휴멜은 검을 휘둘러 칼날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 냈다. 핏방울이 내 얼굴까지 튀었다.
나는 검을 고쳐 잡았다.
내 얼굴에 튄 피가 다시 휴멜의 검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몸에 힘을 뺀 채 나는 휴멜을 노려봤다.
적막이 흘렀다.
따뜻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선이 부딪쳤다.
나도, 휴멜도, 상대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눈과 눈이 부딪치고 기세와 기세가 뒤엉켰다.
그리고…….
휘오오오!
모든 공기가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곳은 바로 휴멜의 검이었다.
휘익!
푸른 초승달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나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펑!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땅이 움푹 파였다. 돌멩이와 흙 따위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일시적으로 나와 휴멜 사이에 뿌연 흙먼지의 벽이 생겨났다. 휴멜의 모습이 흙먼지 너머로 흐릿하게 비쳤다.
나는 돌멩이를 주워 휴멜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러곤 시간차를 두고 뛰어올랐다.
휴멜이 돌멩이를 처리하기 위해 검을 휘두른 순간 그의 가슴에 검을 쑤셔 넣을 계획이었다.
나는 흙먼지 장벽을 뚫고 앞으로 돌진했다.
순간 휴멜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잔인하게 웃고 있었다.
휴멜의 검이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날아왔다.
검이 움직인 자리에 공기의 물결이 생겼다. 물결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의 검을 후려쳤다.
쾅!
휴멜의 검이 나의 검을 물어뜯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운이 나를 덮쳤다.
거센 물살에 휩쓸린 연어처럼 온몸을 난도질당한 채 나는 멀리 날아갔다. 그러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쿨럭!”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다 이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온몸의 근육이 모두 끊어진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미 싸울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다.
구차해 보이더라도, 꼴사납게 보이더라도,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발버둥을 치고 싶었다.
휴멜이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쿨럭!”
다시 피를 토했다. 시커멓게 죽은 피였다.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검을 치켜든 휴멜의 등 뒤로 달빛이 쏟아졌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빛이었다.
“잘 봤지? 검은 이렇게 휘두르는 거야. 연습은 지옥에서 해 봐라.”
퍽!
‘어째서 칼등으로……?’라는 의문을 마지막으로 나는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