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마법사
신성함을 상징하는 흰색을 띈 거대한 방안에 빽빽하게 보관된 각종 서적을 대충 눈으로 훑은 후버는 그 엄청난 장서량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희망을 찾고자 주교에게 요청을 통해서 신전 한편에 마련된 도서관에 들어온 후버는 약간은 역한 양피지 냄새에서 미래를 위한 희망을 발견하기를 기대하였다.
제목을 기준으로 관련되었다고 생각한 모든 책을 빠르게 훑어보던 후버의 눈에 처음으로 흥미를 끄는 내용이 들어왔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겉면은 고급스러운 양피지로 덧대어 있었고, 안의 내용은 변질이 심해서 일부의 내용만 읽을 수 있었지만 후버는 그 책이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나와 신성력의 일치성이라… 이런 것을 연구한 자가 있다는 건가?”
희망을 찾았다는 생각에 후버는 희미하여 읽기 힘든 글자를 차근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버의 기대와는 다르게 양피지에 적혀 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기초적인 신성력에 대한 개념과 마나에 대한 개념이 주를 이루었고, 마지막 2페이지에만 신성력과 마나의 일치성을 증명할 수 있는 실험 방법이 적혀 있을 뿐 ,증명을 하였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저 서클 마법은 힘들겠지만 고 서클 마법은 신성력을 통해서 마나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거군.”
책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저 서클의 마법 같은 경우는 마법사가 자신의 심장에 있는 마나를 사용하지만, 고서클 마법의 경우는 심장의 마나는 허공에 마법진을 만들어 마나의 응집과 발현에 관여할 뿐, 실제 마법이 작용할 때 필요한 마나는 마법사가 의지력을 이용해서 주변의 마나를 끌어 들여와 사용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신성력을 이용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하긴… 사제가 고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실험은 불가능했겠군.”
마법사의 입장에서 신성력은 사기와 같은 능력이었다. 마법사는 수 없이 많은 연산을 하고 적절한 마나의 배합을 손끝을 사용하여 조정해야 했지만 신성력은 그저 정신을 집중하거나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 발현되니 마법사의 입장에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능력이었다.
‘혹시나 했더니 생각만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나보군.’
대략적으로 방법을 훑어본 후버는 실험의 결과를 적어놓지 못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가능성은 알았으니 다행이긴 한데…….”
단 한 개의 가능성에만 매달릴 수 없는 후버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책들을 뒤적거렸지만 결국 그것 외에 다른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렇소. 덕분에 많은 궁금증을 풀 수 있었으니 주교님에게는 감사의 말을 전해 주시오. 나는 내일 이곳을 떠나서 영지로 돌아가야 하니 주교님을 다시 뵐 만한 시간이 없소.”
“후버 님의 뜻은 반드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에 후버는 더 이상 신전에서 시간을 낭비하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영지는 여러 가지 것이 모자란 상태이고 처음 영지에서 이곳으로 올 때와는 다르게 신성력으로 인해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수 없는 후버의 여행 일정은 차질을 빛을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을 나와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버는 책에서 본 내용을 어떻게 정리하여 실험할지에 대한 실험 계획을 짜고 아침 일찍부터 영지로 돌아갈 마차를 타기 위해서 평소 보다 일찍 잠에 들었다.
*
*
*
“2골드다. 드라고니아 포레스트로 1주일 내에 가준다면 1골드를 더 주지.”
마차꾼들이 아침 일찍부터 일거리를 찾기 위해 모여 있는 광장의 한쪽에서 후버가 금화를 튕기면서 마차꾼들에게 말했다.
“내가 하겠소!”
그중 가장 날래 보이는 한 명이 후버가 튕기던 금화를 낚아채고는 후버를 자신의 마차로 안내했다.
“그런데 식료품은 충분하십니까?”
가벼운 복장의 후버에게 묻는 마차꾼의 질문에 후버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변질이 되지 않는 마법주머니 등에 음식을 보관하던 터라 별 불편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지금 후버는 아티펙트를 사용하기 힘든 상태, 아쉽게도 마법 가방 안의 식료품은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대략 반나절 하고 조금 더 걸립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도착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도착하는 시간이 늦으면 일을 얻지 못할까 마차꾼은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후버에게 대답했다.
“좋군, 자네만 괜찮으면 식사는 그곳에서 하고 싶군. 식료품도 그곳에서 살 수 있으면 좋고 말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바로 출발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차꾼은 점심 식사를 하지 못한 다는 것이 불만이긴 했지만 정해진 기간 안에 도착한다면 가족들이 2달은 식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얼른 대답을 하고는 후버를 태운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가 너무 불편하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마차가 아닌 마법의 힘을 빌려 이동하거나 설사 마차를 탄다고 해도 천천히 운행하는 상행용의 마차를 주로 타던 후버로서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마차에 탈 때마다 그 승차감에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간 이 마차도 개량을 해야겠어.”
두어 시간 정도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마차를 타고 가다보니 흔들림에 적응이 된 후버가 신성력을 이용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간단한 수인을 맺었다.
후버가 읽은 책에서는 고 서클 마법에 유용할 것이라고 했지만 협소한 마차의 공간과 불안정한 운행 상태를 볼 때 처음부터 고서클의 수인을 맺는 것이 부담스러운 가벼운 라이트 마법부터 영창 없이 수인만으로 발동시켰다.
‘첫술에 배부를 리 없지.’
당연하다는 듯이 첫 시도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후버의 서클안의 약간의 신성력만을 소모시키기만 했다.
“아무래도 기본부터 다시 하는 게 좋겠군.”
기본적인 원리는 수인을 통해 허공에 마법진을 만들어 마법진을 통해 응집된 마나를 이용하는 것이란 것을 아는 후버는 생각을 바꿔서 간단한 마나 집약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수인을 맺었다.
서클이 올라감에 따라 저 서클의 마법은 수인을 맺을 필요가 없이 영창으로만 마법을 발동시켜서인지 후버는 당장 마법진의 발현을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네 번이 되면서 마나 집약진을 통해 마나를 모으던 후버의 느낌에 처음으로 이질감이 느껴졌다.
몽글몽글하면서도 아무런 저항이 없는 듯한 특이한 느낌에 허공에 팔을 휘젓던 후버는 그 느낌이 매우 낮이 익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어린 시절 자신이 거부했던 마나의 느낌에 후버가 환호성을 지르려던 자신을 억눌렀다.
마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점차적으로 느끼기 힘들었던 자신을 간질이고 압박하는 듯한 느낌이 후버의 전신을 감쌌다.
‘성공인가…….’
어린 시절의 추억과 더불어 익숙했던 느낌에 후버는 자신의 주변에 모인 마나가 흩어질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성공의 기쁨을 맛보았다.
후버의 감각에 느껴지는 두 가지의 상이한 기운, 하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마법진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신성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의 인도를 받아서 끌어당겨진 마나.
후버는 성공을 음미하듯이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몸에 마나가 사라져서 일까? 후버는 과거보다 마나의 흐름이 손에 잡히듯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분에 심취해 짙어지는 마나의 기운은 생각지도 않고 자세히… 더 자세히 뚫어질 듯 마법진을 쏘아 보았다.
‘마법진이란 게 이런 원리로 작동하는 거군.’
개략적인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마법진의 실제 발현 모습을 본 후버는 그 경이로운 모습에 흠뻑 빠져들었다. 마나의 흐름에 누군가 연기라도 뿌린 듯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마법진과 마나가 부딪힐 때마다 작은 스파크와 함께 마나가 연소된 듯이 흰색의 가느다란 줄기가 후버의 관찰을 용이하게 하였다.’
‘확실히 신성력과 마나는 반발을 하는군.’
시야를 확대하기 위해 신성력을 이용해서 마법까지 사용한 후버는 자세한 관찰을 통해 겉보기와는 다르게 마나와 신성력의 사이에 약간의 빈 공간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스파크가 튈 때마다 마나의 흐름은 속도를 배가시켰다.
자연에서 인위적으로 모인 마나와 후버가 의도적으로 응축한 신성력의 자리다툼은 결국 신성력이 모두 소모된 듯이 점차적으로 얇아지더니 결국 희미한 형체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 모인 마나도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 다른 마법진을 발현한다면?’
호기심을 참지 못한 후버는 간단하게 손을 움직여 창밖을 향하는 파이어 볼 마법진을 조그마하게 그려내었다. 투입된 신성력의 양은 적지만 세밀한 작업에 과연 성공할까 의문을 가지는 후버의 눈에 손가락 마디만 한 불덩어리가 마법진의 끝에서 생기는 것이 보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지름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어 보이는 파이어 볼이 이번에는 수축을 하기 시작했다.
‘아… 마나 집약진이 없으니…….’
마나 집약진으로 농도가 높을 때는 파이어 볼의 발현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집약진이 사라지고 나자 수축되는 파이어 볼을 보면서 후버는 대략적인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마도 신성력과 마나가 반발하면서 소멸되는 마나만큼 기존 파이어 볼의 마법진이 마나를 집약하는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겠군.’
문제를 파악한 후버는 양피지를 꺼내 자신이 알고 있는 파이어 볼의 수식을 비롯해 수많은 마법 수식을 종이에 그려가면서 하나하나 분석하였다.
후버는 첫 번째 날 머물 마을에 도착해서도 숙소에서 수식을 정리할 만큼 그 작업에 푹 빠져 버렸고 그렇게 말발굽이 지면을 치는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여행이 계속되었다.
‘이 부분이 발현이고… 이 부분이 마나의 응축인가?’
마법진을 분석하자 어렵지 않게 마법진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부분을 각기 다른 마법의 발현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두고 나머지를 마나의 응집이나 응축 등, 어떠한 방식이든지 외부의 마나를 끌어 모으는 부분으로 생각하자 피상적으로 파악했던 마법진이 후버에게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한창 마법진의 분석에 열을 올리고 있는 후버가 느끼지는 못하였지만 마차가 멈추고 마차꾼은 3번째 날 머물 마을에 도착했다는 것을 후버에게 알렸고 후버는 작성하던 종이를 배낭에 구겨 넣었다.
“이제 식량이 떨어질 때가 된 것 같으니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하고 부족한 식량도 충분히 사두도록 해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빈틈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후버가 튕겨주는 은화를 받은 마차꾼이 고급스런 여관에 마차를 세웠다.
“저는 식량을 사러갈 테니 손님께서는 이곳에 머물면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며칠째 해오던 대로 후버를 먼저 여관에 보낸 마차꾼이 말들을 묶어 두었다.
“며칠간 쉴 틈도 없이 말을 몰았더니 피곤한데…….”
“오! 마이트, 이번엔 장거리 좀 뛰나 보네?”
굳어진 어깨를 손으로 풀어주던 마차꾼에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남자, 마차꾼 역시 자신을 아는 척하는 남자에게 친근하게 말을 받아 주었다.
“오랜만인데. 오쇼라 너도 잘 지냈어?”
노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다반수인 차꾼들의 특성상 외지에서 만난 친구가 반가운지 둘은 함께 파이트 담배를 나누어 피며 자신의 여정과 손님에 대해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났는데 파이프 한 대 피고 헤어지기에는 좀 섭섭하지 않은가?”
은근하게 말을 거는 오쇼라의 말에 마이트도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이번 원행은 너무 급해서 말이야. 안 그래도 시장에 가서 내일부터 먹을 식료품도 사야 하고…….”
“이거… 안 좋은 사람에게 걸렸나 보구만.”
“아니야. 값도 충분히 치렀고 시간 안에만 목적지로 가면 보너스도 준다고 하니 이보다 좋기는 힘들지.”
“그래? 그건 부럽긴 하네… 어디까지 가는데?”
“수도부터 드라고니아 포레스트의 초입까지… 그곳에 새로 영지가 들어선다더니 그쪽으로 가시는 귀족 같더라고.”
“드라고니아 포레스트라… 자네 이번 일 다음부터는 그곳은 안 가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말인가?”
“자네도 내가 운송길드에 속해 있는 것은 알지?”
매번 만날 때마다 자신이 길드에 속해 있다고 자랑을 하는 오쇼라의 모습에 배알이 꼴리는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간혹 그가 주는 정보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마이트는 맞장구를 치며 그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같이 노상에서 손님을 받는 마차꾼들한테 자네들은 선망의 대상이 아닌가?”
의도적으로 띄어주는 말에 기분이 좋은지 오쇼라는 파이프를 한 번 길게 빨고는 자신이 아는 바를 마이트에게 말했다.
“조만간 그곳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오쇼라의 손짓에 마이트가 귀를 가까이 대었다.
“최근 짐마차를 장기 계약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어. 8개월 뒤부터 1년짜리 계약인데… 그게 무엇을 뜻하겠나? 나처럼 길드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모은다는 게 무엇을 뜻하겠나?”
“에이… 뭐 그런 걸 가지고 조심하라고 할 것까지는, 게다가 8개월 후면 한참 후가 아닌가? 나는 내일 뭐 먹을지 고민하면서 사는데 8개월 후가 무슨 문제가 된다고… 그러지 말고 한 6개월 후에 다시 알려주게.”
혹시라도 장사에 도움이 될까하고 집중해서 듣던 마이트가 8개월 뒤라는 말에 손사래를 치며 오쇼라에게 농담을 섞어 타박하듯이 말했다.
“이 친구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네, 그래.”
그런 마이트의 반응이 마뜩치 않은지 오쇼라는 마이트의 귀를 낚아채서는 자신의 입 앞에 오게 하고 다시 귓속말을 했다.
“내가 자네의 처지를 모르겠는가? 나나 자네나 사는 거야 똑같지 않나? 지금 내 마차에 뭐가 실려 있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 걸세.”
“뭐가 실려 있는데?”
얼얼한 귀를 어루만지며 마이트가 오쇼라에게 묻자 오쇼라는 으스대는 표정으로 마이트를 바라보았다.
“자네 대단한 거 아니까 그냥 말해줘, 뭐가 실렸기에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거야?”
“이거…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
“그만 능글거리고 말해봐. 지금은 내가 바빠서 그냥 가지만 들어보고 도움이 되는 정보면 술 한잔 살 테니깐.”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서 말이야…….”
은근하게 약 올리는 오쇼라가 답답하다는 듯이 마이트가 자신의 귀를 오쇼라의 입에 가져다 대고는 문대었다.
“그러니깐 내가 알고 있겠다니깐 말해봐, 어디 비밀 이야기 한 번 들어나 보자.”
“이 친구가 더럽게 무슨 짓이야!? 어련히 말해주려고… 안 그래도 조만간 자네에게 편지라도 한 통 써서 보내려고 했네. 사실은 말이지. 내 마차 안에 각종 병장기가 가득히 들어 있어, 화살부터 시작해서 검, 창, 활까지. 그리 고급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양을 생각하면 적은 것은 아니지. 근데 그 물건의 도착지가 어디인지 아나?”
“어딘데?”
“드라고니아 포레스트 영지 초입에 있는 숲이라네. 숲에서 약속된 장소에 마차를 놓고 5~6시간 다른 곳에 있다 오면 마차 한가득 있던 짐이 어느 틈에 다 옮겨져 있네. 근데 신기한 거는 발자국 하나 없어. 사실 나도 갈 때마다 소름이 돋는데… 삯을 많이 주니 안할 수가 없겠더라고.”
“그럼 그 무기들이 드라고니아 숲에서 사 모으는 거라는 건가?”
“그야 나도 모르지… 내 약속 장소에서 드라고니아 포레스트의 영지까지는 꼬박 반나절이 더 걸리니 영지에서 사는 것 같지는 않고 아무튼 수상해서 말이야. 자네도 조심하게. 그 영지 주변에 흔적도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한가득인데 언제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생길 것 아닌가?”
어느새 오쇼라의 표정에는 장난스러움이 아닌 친구를 걱정하는 진지함이 가득했고, 마이트 역시 오쇼라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맙네. 이번 일이 끝나고 부터는 이쪽으로 절대로 다니지 않겠네. 그래야 자네를 안 만나서 술값을 아낄 것 아닌가?”
“어디 좋은 정보가 이번 한 번뿐인 줄 아는가? 하루라도 빨리 만나길 바라는 게 좋을 거야.”
“내 한번 생각은 해보겠네. 자네도 그 일은 너무 오래하지는 말게. 자네 말대로 느낌이 안 좋아.”
“적당히 하고 빠져야지. 뭐든 처음이랑 마지막은 좋은게 아니니 말이야.”
서로간의 걱정과 함께 소식을 교환하던 마이트와 오쇼라는 마이트가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식료품을 사러가야 한다고 하면서 대화가 끝이 났다.
오쇼라와 헤어진 마이트는 서둘러 갖가지 식료품과 향신료를 구해서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썩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마이트가 가진 후버에 대한 인상은 나쁜 편이라기보다는 좋은 편에 속했다. 일정을 너무 서두르는 탓에 하루 종일 말을 몰아야 하는 것은 불만이었지만, 그런 만큼 기한 내에 도착하면 돈을 더 주겠다고 하니 마이트로서는 거부할 이유는 없었고 귀족 같은 차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모는 마차에 대해서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방도 따로 잡아주고…….”
평소 장거리를 여행할 때면 귀족이나 손님들은 여관에서 자고, 마이트는 마차 안에서 자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것조차 까탈스러운 손님을 만나면 마이트의 냄새가 불쾌하다면서 밤에도 마차 안에서 잠을 자지 못하게 했고, 그럴 때마다 마이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돈으로 숙소를 잡거나 날씨가 괜찮으면 여관 근처에서 노숙을 하고는 했다.
“내가 위험하면 저분도 안전하지는 않을 텐데.”
평소와 같이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람이라면 마이트로서도 신경이 쓰이지 않겠지만, 이것저것 받은 것이 있는지라 마이트는 오쇼라에게 들은 이야기를 후버에게도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렇게 잠깐 고민으로 몸을 뒤척이던 마이트는 내일의 일정을 위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일정상 오늘은 야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리 말해줘서 고맙군. 그럼 오늘 저녁까지는 간단히 먹을 수 있게 이곳에서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하고 식료품으로 직접 조리하는 것은 내일부터 하기로 하지.”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전하겠습니다.”
“식사당 3인분씩 준비해달라고 말하게. 몇 번 식사를 만들어서 같이 먹다보니… 도시락 하나 가지고는 자네에게 부족할 것 같으니 말이야.”
자신의 식사량에 대해서 말하는 후버의 말에 괜한 부끄러움을 느낀 마이트는 옆에서 식사를 내려놓는 종업원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자신들이 먹을 도시락을 주문했다.
“그런데… 손님께서는 무슨 일로 수도에서 그 먼 곳까지 가시는 겁니까?”
“특별한 것은 아니네. 그저 영지가 새로 생겼다기에 혹시 내가 있을 자리가 있나 보러 가보는 것이지.”
자신이 그곳의 실질적인 영주인 것을 밝힌다면 눈앞의 마이트가 괜히 위축되어 여행에 차질을 빗을까 후버는 자신의 신분을 그저 학자라고 둘러 대었다.
“그럼 그곳에 계속 사실 작정이십니까?”
“기회가 된다면 그러지 않겠는가? 자네도 드라고니아 영지에 관심이 있는가? 앞으로 한동안은 영지민들의 이동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알고 있네.”
“저야… 직업이 마차꾼인데 수도를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좋으나 싫으나 사람이 많은 곳에 살아야죠. 그리고 드라고니아 영지는… 손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드라고니아 영지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두 곳보다는 조금…….”
마이트의 말에 후버의 입에서 실소가 나왔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생각도 마이트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후버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른 두 영지는 들어가기가 더 까다롭습니다. 어지간한 평민은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이니…….”
“그런가? 국왕전하께서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셨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위법이 아닌가?”
“그렇다고 누가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수도에서 살기 힘들어 그쪽으로 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다는 소문이 하루에도 수번씩 들려옵니다.”
“이거… 문제가 심각하군. 그럼 그곳은 어떤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농사를 특출 나게 잘 짓거나 기술이 있거나 학자이거나 그런 사람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학자님처럼 학식이 높은 사람은 가능할 것입니다.”
“아무도 써주지 않아서 드라고니아로 내려가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너무 띄어주지는 말게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둘이 식사를 끝내고 잠시 기다리자 여관의 종업원이 도시락이 준비되었다고 알려왔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시지요.”
“그러지.”
마이트가 마차를 준비하는 동안 후버는 머물던 방의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오늘 길은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그런 건 걱정 말고 최대한 빠르게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이트의 대답을 들은 후버는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마이트는 후버가 요구한 대로 머물던 마을을 지난 후 부터는 최대한 빠르게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말하는 것도 어쩐지 기품이 느껴지고… 그래! 오늘도 길이 불편하다고 불평하지 않으면 저 사람에게도 이야기 해주자.’
마이트는 오랜 경험상 괜한 말을 하면 자신의 진심과는 다르게 상대가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기에 반드시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람과 말을 섞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고, 후버 역시 자신보다는 신분이 높아 보였기에 은연중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며칠간 후버와 여행을 하면서 자신에게 부당하게 화풀이를 하거나 불평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없었기에 오늘 하루만 무사히 지내면 자신이 아는 바를 후버에게 말해 주기로 결심했다.
‘혹시 모르지 드라고니아 영지에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것이니 내가 말해준 것을 영주에게 말해서 영주가 고용한다면 설마 모른 척하겠어?’
아직은 순수한 생각을 가진 마이트는 자신이 가진 정보의 가치가 무기를 구매하는 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만약 드라고니아 영지에서 직접 무기를 구매하는 것이라면 입막음을 위해 자신을 처리할 것이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는지 단순한 동기로 후버에 대한 마이트의 인내심 실험이 시작되었다.
‘확실히 어제와는 다른데.’
덜컹거리는 느낌이 4시간 동안 연신 엉덩이를 때리자 후버도 마냥 빠르게 달려 달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특히나 섬세하게 그려야 하는 마법진을 그릴 때 마차가 위아래로 흔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치곤 했다.
‘안 되겠어… 하루가 늦어지더라도…….’
마차에 비치된 쿠션을 사이에 덧대어 봐도 며칠간 누적된 엉덩이의 통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무엇보다 마법을 연습할 수 없다는 것이 후버를 불편하게 했다.
속도를 좀 줄여 달라고 말하기 위해 후버가 마차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어!”
놀란 마이트의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낀 후버는 얼른 마차의 한쪽에 단단히 고정되어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평소라면 베리어를 통해서 몸을 보호할 수 있지만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후버는 마법을 사용할 생각을 못하고 손잡이를 잡았고 마차가 쓰러지는 충격과 함께 손잡이가 부서지면서 후버는 의식을 잃었다.
*
*
*
“손님! 손님!”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에 후버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극심한 두통과 허리의 통증이 후버에게 느껴졌다.
“손님! 정신이 드십니까?”
“아…….”
통증 덕에 정신이 돌아온 후버가 대답을 하려 했지만 쉽게 말을 내뱉지 못하고 약간의 신음만을 뱉어내었다.
“일어나려 하지 마시고 잠시 누워 계십쇼. 마차가 전복이 돼서…….”
마이트의 말에 후버가 어찌 된 상황인지 앞뒤가 이어졌다. 단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아직은 한 낮이어야 할 하늘이 어둡다는 것 정도, 의문을 표하는 후버의 눈빛을 느낀 것인지 마이트가 사정을 설명했다.
“길이 험해서인지 마차가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저도 방금 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님께서 이곳에 쓰러져 계시기에…….”
“물을…….”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후버가 마이트에게 물을 달라고 했고 마이트는 얼른 물병을 집어서 후버에게 건넸다.
“얼마 안 되지만 이거라도 드십쇼.”
“고맙네.”
“고맙기는요… 저도 몸이 불편해서 물을 구하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야, 자네는 괜찮은가?”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팔이 조금.”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본 마이트의 상태는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다. 오른팔이 부러진 듯 퉁퉁 부어오른 팔의색이 파란색을 넘어서 검은빛이 약간 감돌 정도였다.
“손님이 문제입니다. 마차의 파편이 왼팔에 박혀서 피를 너무 흘리신 것 같습니다.”
후버가 자신의 왼쪽 어깨를 바라보자 팔꿈치와 어깨 사이에 손가락 두 개만한 나뭇조각이 박힌 것을 볼 수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는 건가?”
“길이 험한 지름길로 와서인지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마차꾼들은 모두 아는 길이니 내일 정오쯤이면 급한 길을 서두르는 마차가 한 대 정도는 지나갈 것입니다.”
“이거… 괜히 내가 지름길로 오자고 해서 문제가 발생했구만.”
미안해하는 후버의 모습에 마차꾼이 괜찮다면 후버를 안심시켰다.
“말은 어떤가?”
“그게…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거 큰일이구만. 마차도 많이 상했을 텐데…….”
“그것보다는 오늘 밤이 문제입니다. 이곳은 몬스터는 없지만 산 짐승들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어두워지고 나서 나타날 수 있는 산짐승들을 걱정하는 마이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후버는 두려워하는 마이트를 안심시키고 심장에 있는 신성력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하나둘 신성력이 활성화 될 때마다 후버는 몸의 상태가 좋아지는 기분 좋은 느낌을 느끼면서 눈을 감고 신성력이 나무 조각이 박힌 왼쪽 팔까지는 회복시키지 못하도록 신성력의 작용을 세밀히 조정하였다.
그렇게 몸을 치유하기를 30분이 지나고 후버는 왼쪽 팔을 제외한 모든 곳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은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말게.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
후버를 저지하는 마이트를 안심시킨 후버가 이를 꽉 깨물고는 왼쪽 팔에 박혀 있는 나뭇조각을 오른손으로 꽉 잡고는 살 밖으로 뽑아내 버렸다.
동시에 상처에 고여 있던 검은 피가 솟구치듯이 나오고 이내 붉은 피가 팔에 흐르기 시작하자 후버는 다시금 누워서 신성력을 왼팔에 집중했다.
“손님… 팔의 상처가…….”
놀라운 속도로 피가 멈추고 새살이 돋으며 치유되는 후버를 바라본 마이트가 경악에 찬 감탄사를 내뱉었다.
왼팔에 난 상처를 모두 치료한 후버가 몸을 일으켰다.
“자네의 팔을 좀 줘보게.”
“아… 예…….”
“뼈가 부러졌군… 내가 잠시 자네를 재우는 슬립 마법을 걸 테니 몸에 힘을 빼고 땅에 눕게.”
후버의 지시에 마이트가 몸을 땅에 뉘었다.
“괜히 저항하지 말게. 잠시 쉬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눈을 감고 있게.”
“감사합니다.”
후버는 잘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신중하게 손을 움직여서 커다란 마나 집약진을 만들고는 대기에 마나가 풍부해진 것을 느끼고 슬립 마법의 마법진을 허공에 그렸다.
동시에 슬립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나의 모습에 후버는 성공을 짐작했고 퉁퉁 부은 마이트의 오른쪽 팔을 살짝 움켜쥐는 것으로 슬립 마법의 성공을 확인했다.
“문제는 없는 것 같군.”
깊게 잠든 마이트를 놓아두고 후버는 길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고는 나이프를 찾아서 부러진 마이트의 오른손을 강하게 세로로 갈라냈다.
“내가 의술이 있었으면 이럴 필요는 없었을 텐데.”
강력한 슬립 마법으로 고통을 느끼지는 않지만 검붉은 피가 흐르자 마이트는 조금씩 몸을 떨었다.
마이트의 팔에 고인 검은 피가 나오는 것을 돕는 것과 동시에 뼈가 부러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마이트의 팔 이곳저곳을 주무르던 후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지는 않았어…….”
만약 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다면 전문적인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후버로서는 괜히 회복 마법을 사용하여 뼈가 잘못 붙게 할 수가 있었기에 마이트의 오른쪽 팔 상태를 확인한 후버는 안심을 했다.
어느 정도 검은 피를 쏟아내고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확인한 후버는 슬립 마법을 사용할 때와 같이 회복 마법을 이용해 마이트를 치료하고는 슬립마법에 빠진 마이트를 웨이크 업 마법을 이용해서 깨웠다.
후버가 마법을 이용해서 깨웠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자신의 오른팔이 멀쩡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님… 제 팔이… 제 팔이…….”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완전히 치료가 되지는 않았을 수도 있으니 한동안 팔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팔이 멀쩡한 것을 확인한 마이트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하였다.
“자네나 나나 그 정도면 치료는 끝났는데 말이 문제군. 말의 상태는 어떤가?”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습니다만 심하게 다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계 수단인 말을 모두 잃었다는 안타까움에 마이트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런 마이트를 본 후버는 말이 있는 곳으로 가서 힐링 마법을 사용해 주었다. 힐링 마법으로 인해 상처가 치료될 때의 잠시간의 고통 때문인지, 상처가 치료되어서인지 힐링 마법일 받은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울음소리를 내었고, 후버와 마이트는 힘을 합쳐서 말들을 바로 세워 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말들을 잃으면…….”
“다 내가 길을 서둘러서 그리 된 것이니 신경쓸 것 없네. 그보다는 배가 고프군.”
“마차가 전복될 때 도시락은 이미 못 먹게 되었으니 제가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팔도 성치 않으니 서두를 것 없네.”
물이 없는 만큼 식사라고 해봐야 난리통에서도 온전한 빵 쪼가리와 치즈, 그리고 어떻게 무사했는지 모를 포도주 한 병이 전부였다.
마이트는 온전한 빵 덩어리 하나와 치즈를 후버에게 건네고 자신은 그중 그나마 상태가 나은 것을 집어 들어서는 우왁스럽게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사고로 경황이 없을 때는 몰랐지만 팔의 상처가 치료되고 말이 온전하게 걷는 것을 확인하니 뒤늦게 배가 고팠던 것이다.
말없는 식사가 한동한 계속되었고 후버 역시 한 덩어리로는 성이 안 차는지 두 번째 빵조각을 꺼내서는 입안에 넣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손님께서 치료해 주시지 않았다면.”
한숨을 쉬는 마이트를 후버가 위로했다.
“너무 그러지 말게. 듣기 좀 민망하니깐 말이야.”
“그래도… 제 생명을 구해 주셨으니.”
“되었네. 그보다는 자네는 어떻게 마차꾼이 된 것인가?”
대화의 주제를 돌리기 위해 후버가 마이트에게 마차꾼이 된 이유를 물었다.
“대대로 가업이었습니다. 기록은 없습니다만 저의 윗대에서 윗대부터 마차를 몰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것이 저에게까지 전해져 온 것입니다.”
“이런… 마차가 상했으니 어쩌면 좋은가?”
“그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뭐 어떻게든지 되지 않겠습니까?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렇군…….”
“그래도 저는 좀 나은 편입니다. 어느 정도 모아둔 돈이 있으니까요.”
“그건 다행이군.”
“사실 마차꾼의 인생이란 게 똑같습니다. 보통 말의 수명이 30년인데 마차를 끄는 일을 하다보면 녀석들도 힘들어서인지 수명이 5년은 팍 깎입니다.”
“그렇겠군.”
지금처럼 강행군으로 움직인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에 후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20살 때 아버지에게 마차와 말을 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받은 마차와 말을 아직까지 잘 사용하고 있구요.”
“좋은 아버지를 두었군.”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마차꾼의 인생은 대부분 똑같습니다. 처음 탄 마차랑 말로 25년을 꾸준히 일하면 대충 말 한 마리와 마차를 살 돈이 모입니다. 그럼 자식들에게 새 말과 마차를 사주고 말이 더 이상 마차를 몰지 못할 때까지 짧으면 1년 길면 3~4년 더 마차꾼 일을 하다가 말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말은 푸줏간에 가져가서 팔고 마차는 중고로 시장에 팔아서 그 돈으로 여생을 사는 거죠.”
“그럼 자네도 아이들이 있는 건가?”
“한 명 있습니다.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컸지요… 일이 년 있으면 그 아이의 나이가 20살입니다. 딱 제가 말과 마차를 받았을 때의 나이죠. 저는 그래도 운이 좋은지 벌써 아들에게 줄 말과 마차를 사 줄 돈은 벌어 두었습니다. 말은 몰라도 마차는 아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한두 해는 제가 타야 할 것 같습니다.”
멋쩍은 듯 웃는 마이트를 보면서 후버는 어쩐지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내일 한번 이동할 방도를 찾아봐야겠군.”
“일정이 늦어지게 돼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자네의 잘못도 아니고 자네도 피곤할 테니 일찍 자도록 하게.”
후버가 널브러진 짐 중에 침낭을 꺼내서는 몸을 안으로 집어넣었고 마이트도 침낭 하나를 꺼내서 몸을 누이고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지난 며칠간… 내가 나 같지가 않단 말이야.’
마법 실험에 매달려 잊고 있던 사실이 후버에게서 떠올랐다.
‘너무 착해…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후버는 무언가 자신을 한 꺼풀 덮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되돌아본 최근 자신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같은 경우만 해도 후버는 굳이 노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정도 신성력을 이용해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진 만큼 노숙을 하느니 헤이스트 마법이라도 사용해서 인근마을로 가 새로운 마차꾼을 고용해 목적지까지 빠르게 가면 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후버는 이곳에 몸을 눕히고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날 누군가가 지나가 주길 기다리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혹시…….’
문득 후버는 주교가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양피지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 미리 기록된 양피지의 존재가 후버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행동이 미리 결정되어 있기에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한다는 생각과 함께 다른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쩌면 신성력 때문인가?’
후버 자신이 경험했듯이 신성력은 그저 활성화시킨 것만으로 후버의 몸을 치유했다.
마기에 노출된 자가 마성에 날뛰는 것처럼 신성력에 노출된 후버의 사고방식이 다소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이쪽이 좀 덜 찜찜하군.’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인생을 사는 것과 그저 감기 몸살이 나면 열이 오르는 것과 같은 약간의 부작용 중 후버는 마음이 편한 쪽으로 결정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