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정착 (31/37)

후버크래프트 5권

목차

정착

신성 마법사

귀환, 보이지 않는 위협

클루니 백작

공작가 간의 충돌

조작

신성기사 제위

정착

바쁜 하루하루가 모여 후버가 드라고니아 영지에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후버는 완성된 연필 생산 공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고용된 인원은 어느 정도인가?”

“현재 1,000명 정도 고용했습니다.”

“유입된 총인원은 얼마이지?”

“대략 2만 명 정도 유입되었습니다.”

영지 운영 평가에 대한 기준점을 잡기 위해서 조사관이 오는 시기는 앞으로 11개월 후, 1왕자와 3왕자로서는 굳이 2왕자를 견제할 필요는 없지만 그냥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에 보낸 인원이 현재까지 약 2만. 다른 영지와는 다르게 후버는 이주해오는 이주민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 식량 등에는 문제가 없나?”

후버, 고딕 정보부장, 컨스트 건설부장, 매터 상단주가 함께하는 행렬에 연필 공장에서 일하던 영지민들이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7만 명 분의 식량을 확보해 두었지만 후버 자작님께서는 계속해서 영지의 이주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시니 식량을 추가로 확보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식량 뿐 아니라 건설 자재도 추가로 확보해야 할 것 같군. 일단은 주변 영지에서부터 천천히 수배하도록.”

“그 부분이라면 제가 책임지고 처리 하겠습니다.”

“자네가?”

매터 상단주가 아닌 고딕 정보부장이 처리하겠다는 말에 후버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딕 정보부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대외적인 일의 일부분은 제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일과 앞으로 있을 화살촉의 판매를 함께 엮어보려고 합니다.”

“뭐, 자세한 것을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영주님이 모르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딕이 스스로 나선다는 말에 후버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모른 척하겠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서 허락을 하였다.

“좋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는 일은 좋은 거지. 매터 상단주, 연필생산은 어떻게 되고 있나?”

“미캐닉 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생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같은 추세대로라면 영지민 한 명당 하루에 20여 자루 이상 생산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최고급품에 100명, 중급품에 200명, 하급품에 700명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반응을 봐서 최고급품의 생산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수고해 주었으면 좋겠군.”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단순히 매출액을 기준으로만 생각해 봐도 최고급품의 경우 예상 일 매출이 2,000골드지만 나머지 두 개를 합친 매출액은 고작 270골드밖에 되지 않습니다. 모두 팔렸을 때의 가정입니다만 중급품과 하급품은 생산량에 비해 매출이 너무 적은 것이 흠입니다.”

“사실 이 연필의 생산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기술이 적용된 것이 아니란 것은 자네도 알 거야.”

“그래도 미캐닉 님 덕분에 일일 생산량이 순수한 수공예보다는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시작도 하지 않았네. 조만간 생산량이 수배이상 늘겠지만 그 물건은 모두 고딕 정보부장에게 넘기도록. 우리 영지에서 생산되었다는 표시인 낙인도 찍지 않도록 하고.”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익의 대부분은 후버 자작이 가져가겠지만 순수익의 20%만 자신이 받는다고 해도 상단을 더욱더 키워 드라고니아 영지에 보탬이 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매터는 가능하면 자신의 상단을 통해서 물품을 판매하고 싶었다. 당연히 자신이 처리할 물량이라고 생각하던 매터는 후버의 지시에 그 이유를 물었다.

“조금만 있으면 매터상단주는 주변 상단에게 견제를 받게 될 거야. 우리 영지의 상단이라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공작의 장난질이 시작될 거고, 매터상단주는 그들의 장난에 놀아나는 척 상단의 운영이 어려운 척을 해주게.”

“과연 그들이 그렇게 빨리 움직이겠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이 경쟁은 단순히 상단끼리의 경쟁이 아니야. 왕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자리이지. 보는 눈이 많은 만큼 무력 도발은 신중하게 하겠지만 보이지 않는 경제력을 압박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걸세.”

“자작님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20자루를 기준으로 한 묶음을 해서 팔도록 하게나. 가격은 전에 말한 대로 하도록 하고.”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쉬움이 담긴 매터의 목소리였지만 후버는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영지의 가신 중에서 가장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매터와 컨스트의 경우 후버의 사고방식이나 노파심이 당장은 이해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앞으로 험한 꼴 많이 볼 텐데. 괜히 미안하군…….”

*

*

*

영지의 대소사를 살피고 모두가 잠든 한밤중 후버의 방 안에서 고딕과 후버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양 공작가의 경제 부분에 대한 견제는 낮에 말한 것처럼 하면 될 것 같고 ,문제는 직접적인 무력도발인데 말이야…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한 것은 없나?”

후버의 물음에 고딕이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 후버에게 질문했다.

“영주님 혹시 신을 믿으십니까?”

“신? 하늘에 떠다니는 스파게티 같은 거 말인가?”

고딕은 후버가 말하는 하늘의 스파게티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어투로 미루어 보아서 신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주님께서 신을 믿지 않으신다면 양 공작가를 견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설마 영지에 신전을 끌어 들이자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신전 하나 있다고 그들이 군사적 도발을 하지 않겠나?”

“단순히 신전만을 유치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신전에서 이곳에 관심을 가진다면 공작이라고 해도 쉽게 이곳에 물리적 도발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전차원에서 영지에 관심을 가진다면 고딕이 말한 대로 무력도발이 어려워질 것이지만 문제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관심을 가지게 할 방법은 있나?”

고딕의 뜻은 나쁘지 않았다. 신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신전을 유치해서 적의 군사적 도발을 막을 수 있다면 잠시간의 불쾌함 정도는 참아줄 생각이 있었다.

“그건 저도 모르죠.”

“너 이 새끼…….”

무책임한 고딕의 말에 후버가 살짝 빡치는 것을 느꼈지만 고딕의 배경을 생각한 후버는 일단은 참아주기로 했다.

후버의 머리에 신전을 유치하는 방법이 떠올랐지만 그것은 단순히 기부금을 미끼로 신전을 유치는 것일 뿐, 신전의 직접적인 관심을 받기 위해서 돈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자작님, 돈 많지 않습니까? 크게 한턱 쏴주면…….”

“네 돈이냐? 네 돈이야?

“돈이야 다시 회수해 오면 될 거 아닙니까?”

“회수해 온다니?”

그래도 뭔가 방안을 생각해 온 듯한 고딕의 말에 후버의 찌푸린 인상이 조금은 펴졌다.

“제가 도둑 길드 부길드장 아닙니까? 일단 후버 자작님께서 많은 현금을 약속하시고 이곳에 세워질 신전에 기부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도로 헌금들을 운반할 때 한 번에 쓱싹해서 후버 자작님이 기부하신 금액은 돌려드리고.”

“영지민의 헌금은 도둑 길드에서 수수료를 받는다는 건가??”

“뭐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신다면야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애들 활동비도 좀 필요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치졸한 방법에 후버가 화를 내지 않을까 반응을 살피던 고딕은 후버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야 좀 건설적인 의견이 나왔군. 일단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인지도 모르겠군.”

“사실 그렇습니다. 신전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방법은 영지에서 성녀가 출현하거나 신성력이 담긴 신물이 나오거나 아니면 엄청난 돈을 기부하거나 이 세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500년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신물이나 성녀가 쉽게 나오겠습니까? 이 정도가 최선이지요.”

“신물이나 성녀? 성녀야 나와도 못 찾을 수 있다고 치지만 신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가? 신물이야 대신관이 기도를 하면 물건에 신성력이 깃드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요즘은 대신관도 기도를 안 하나 보지?”

신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고딕의 말에 후버가 의문을 표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성녀의 축복을 받은 대신관이 없으니 그렇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자작님은 그것도 모르셨습니까?”

고딕의 말투에 불쾌함을 느낀 후버였지만 다시 한 번 그의 출신성분을 생각해 참아주기로 했다.

“종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보니 그런 것을 알 턱이 있나? 그러면 신물이 모두 사라진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천 년 동안 세상에 풀린 신물의 양이 적지 않으니 귀족가라면 하나쯤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저도 하나 가지고 있구요.”

자랑하듯이 꽁꽁 싸맨 품속에서 고딕이 작은 조각상을 꺼내자 후버도 조각상에서 느껴지는 신성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제 직업이 운이 좀 필요하다 보니 10년 전에 큰 맘 먹고 100골드 정도 들여서 구매했습니다. 덕분에 제가 부길드장까지 올라와서 이 영지의 가신으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연덕스럽게 조각상을 쓰다듬는 고딕을 바라보던 후버가 고딕의 손에 들린 조각상을 낚아챘다.

“300골드 주지.”

“네? 제가 충성스러운 가신은 아니지만 그거 경매장에 가면 200골드면 살 수 있습니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장난하지 말고 돌려주십쇼.”

“400골드!”

높아진 금액에 고딕이 빼앗으려던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10년간 애지중지 했더니 이런 복을 주시네요. 주신 이스마엘 이시여 감사합니다. 앞으로 2개 들고 다니겠나이다.”

“그럼 이제 이거 내 거 맞지?”

후버가 던진 돈주머니의 무게를 느끼던 고딕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버는 여신상의 발을 잡고 휘둘러서는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키고 팔, 다리 순으로 하나하나 여신상을 몸체에서 때어내었다.

“거 자작님 취미도 독특하십니다. 아깝게스리…….”

“깨어져도 모든 조각이 신성력을 발휘하는군. 그런데 이거 이름이 뭔가?”

후버는 바닥에 떨어진 조각상의 머리를 고딕의 눈앞에 들이대고 물어보았다.

“주신 이스마엘의 조각상입니다. 거참! 저도 신을 믿지 않지만 이 짧은 시간에 몇 번이나 신성 모독을 하시는 건지, 혹시라도 신전 사람을 만나면 다시는 그런 짓은 하지 마십쇼. 화형당합니다.”

“그러도록 하지. 자네는 참 충성스러운 가신이야.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게.”

옆에서 참견하는 고딕을 귀찮다는 듯이 후버가 손을 휘둘러서는 내쫓았다.

“제가 쫌 그렇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딕이 밖으로 나가고 후버는 한참 동안 조각난 여신상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막자사발을 이용해서 곱게 갈아 버렸다.

‘갈아버려도 신성력을 유지하는군.’

그저 영지에 신전을 유치하는 것은 돈만 있으면 할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신전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고, 여신상의 가루를 신중하게 살펴보는 후버는 그 특별한 요소를 찾았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

*

*

거대한 대리석을 통으로 조각한 듯 양피지 한 장조차 틈으로 들어가지 않을 신전의 화려한 건축물은 경외심보다는 약간의 거부감이들 정도의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신전이라고 해서 기대했건만 천박하군…….’

“오직 신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생각하는 것과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달랐지만 최소한 겉모습만으로 후버의 모습은 매우 독실한 신전의 신도로 보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기도를 마친 후버는 신전의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고해성사를 위한 조그마한 방 안에 들어왔다.

일반 신도들은 신전의 바깥에 마련된 천막이나 가건물 안에서 기도나 고해성사를 드리지만, 신에게 특별한 정성을 표시한 자는 신전 안에 들어와 작은 방 안에서 자신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

‘10분에 100골드, 미친 가격이군!’

후버가 신관에게 쥐어준 아까운 100골드에 대한 아쉬움을 생각하고 있을 때 옆방으로 연결된 조그마한 창문이 열리며 신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제여!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디 편안한 마음으로 모두 용서 받고 가시기를.”

“죄를 고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들 드려도 되겠는지요?”

“세상의 일은 잘 알지 못하지만 신앙에 대한 질문이라면 제가 아는 범위에서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걸 좀 봐주시겠습니까?”

“이것은 마법주머니 아닙니까? 이것을 왜 저에게?”

후버가 창에 달린 커튼을 재치고 마법주머니를 건네자 신관은 마법주머니를 보기만 할 뿐 열어보지는 않았다.

“주머니 안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마법주머니 안에서 나온 연필을 이리저리 바라보던 신관이 갑자기 놀란 표정을 하며 후버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것에서 신성력이… 제가 알기로 이런 나무 조각에 신성력이 담겨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미미하지만 신성력이 느껴지는군요. 어떻게 이런 귀물을 얻으신 겁니까?”

“이번에 저희 영지에서 만든 연필이라고 하는 물건입니다. 뾰족하고 검은 끝으로 글씨를 쓰면 깃펜보다는 편하게 쓸 수 있습니다.”

“신성력이 담긴 물건을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후버는 연필의 사용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신관은 연필의 쓰임새보다는 연필에 담겨 있는 신성력에 더 관심을 보였다.

“혹시 느끼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마법사입니다. 신물을 만들 능력은 저에게 없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긴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예. 말씀하시지요.”

신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후버는 신관에게 자신이 가져온 연필에 대한 설명부터 끝마치고는 신관이 궁금해 하는 신성력이 담긴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형제님께서 영지의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더니 마력을 담아둔 연필에서 마력대신 신성력이 발현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비록제가 마법사이긴 하나 어릴 적 가지고 있던 신앙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신관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마법사가 신에게 기도를 드리면 신성력 때문에 심장의 고리가 진동을 하지 않습니까?”

“예. 마법사에게는 다시없을 고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마력과 신성력의 충돌 때문에 많은 마법사들이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신전은 항상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신의 힘을 직접 느끼는 영광을 체험하고도 신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저 밖의 평민 중 얼마나 많은 백성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신성력을 느껴보겠습니까?”

탄식하듯이 내뱉는 신관의 말처럼 마력과 신성력의 충돌로 인해 심장의 고통을 느껴본 마법사들은 대부분 마법을 포기하기보다는 신에 대한 믿음을 접는 것으로 자신의 진로를 정하곤 했다.

“저 역시 마법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심장에 강력한 고통을 느끼고 있어 자주 기도를 드리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영지에서는 워낙 중요한 사항이라 축복을 내려달라 신께 빌었고 이상하게 그날은 심장이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눈앞에 벌어진 기적은…….”

후버가 그 날의 감동을 다시 회상하듯이 뒷말을 잇지 못했다.

“형제님의 기도로 이 연필이라는 것이 성물이 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눈앞의 신성력을 내뿜는 연필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그렇다고 마법사를 통해 신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연필을 살펴보는 신관은 이것을 성물이라고 해야 할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제가 어찌 그런 것을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저는 이 연필을 제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하고자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과거에 대한 반성이라니요?”

연필을 바라보던 신관의 고개가 이번에는 후버가 있을 커튼 너머를 바라보듯이 돌아갔다.

“우선 신성력을 띠고 있는 연필은 신성력의 주인이신 신께 모두 바치겠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는데 잘 생각하셨습니다.”

신성력이 깃든 연필을 모두 바친다는 말에 신관은 자신이 하고 있던 고민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신물이 나타나지 않은지 벌써 5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누구라도 새로운 신물을 가지고 정통성을 주장한다면 교단의 권위가 서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면 스스로 하나의 종교를 만든다고 해도 신전으로서는 제재하기가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 주체가 마법사라면?

신관은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신을 잊고 살았던 지난 날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희 영지에 신전을 건립하고 싶습니다.”

“신전…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당장은 저희 영지의 사정이 좋지 못하여 크고 웅장한 신전을 건설할 수는 없으나 제가 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이곳에 헌금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님의 영지는 어느 곳입니까?”

“그 역시 헌금할 때에 같이 적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님의 정성 감사히 신께 봉헌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은 영지가 자리 잡지 않아 그저 정성만 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주신 이스마엘 님의 뜻이 형제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끼이익.

후버가 고해성사실을 나간 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신관은 바쁘게 발걸음을 놀려서는 대신관이 머무는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교를 제외하고 교단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를 만나보고 새로 탄생된 신물에 대해서 보고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

*

*

후버가 신전을 방문해서 신성력을 내뿜는 연필을 봉헌한날 바로 저녁, 일단의 성기사 무리들이 여관에 머물고 있던 후버를 찾아와서 대신관의 편지라며 한 장의 서신을 후버에게 전했다.

온갖 미사여구로 시작한 편지의 끝은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자신을 만나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고, 그 자리에서 대신관의 편지를 확인한 후버는 자신을 찾아온 신관에게 다음 날 신전을 다시 방문하겠다는 대답을 하고는 하룻밤 동안 팔찌를 통해서 대신관에 대한 예의 등을 학습했다.

무려 500년 만에 성물의 탄생인 만큼 대신관이 후버에게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성녀의 축복을 받지 못한 대신관은 껍데기 취급을 받았지만 수백 년 동안 성녀가 나타나지 않자 대신관의 지위는 성녀를 대신하여 외부에 신전의 이미지를 대신하며 위신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주교 다음 자리라는 것이 공식처럼 굳어져 버렸고, 대신관이 그러한 자리에 만족을 하고 있다면 후버의 출현은 반갑지 않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팔찌를 사용하고 긴장을 해서일까? 대신관을 만나기 위해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후버의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후버 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후버의 방문을 기다렸는지 성기사 중 한 명이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후버를 반겼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반인들은 물론 어지간한 귀족들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신전의 깊숙한 밀실로 후버를 안내한 성기사가 가볍게 목례를 해보이고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어서 오세요. 여행으로 지친 분에게 너무 오라가라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하군요.”

“대신관님의 뜻이 주신 이스마엘 님의 뜻인데 어찌 저의 피로를 핑계로 명령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팔찌를 통해서 본 기억대로 후버가 예의를 갖추어서 말하자 대신관이 후버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형제님을 뵙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그저 서신만으로 대화를 나누기에는 형제님께서 신전에 봉헌하신 성물이 예사롭지 않아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주신 이스마엘 님을 믿는 신도로서 대신관님을 뵙는다는 영광에 하룻밤이라는 기다림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짧게나마 형제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지금의 만남을 형제님 못지않게 기다렸습니다.”

다소 낯간지러운 서로에 대한 우회적인 인사를 하며 대신관이 축복을 내리는 성호를 그었다.

동시에 대신관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강한 신성력이 후버에게 까지 미치는 순간.

컥!

평온했던 후버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한 움큼 피를 뿜어내고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런…….”

평소와 같이 습관적으로 성호를 긋는 동작을 한 대신관이 순간 후버가 마법사라는 것을 기억하고는 어쩔 줄 몰랐다.

“저는 괜…찮습니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후버는 숨을 쉬기도 힘든 느낌을 받았지만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대신관에게 답하였다.

“이거… 이런 일이 있을까봐 주교님이 아닌 제가 직접 대화를 하려 한 것인데… 그만 형제님이 마법사라는 것을 깜빡하였습니다.”

대신관으로서는 평소 이곳을 방문하는 자들을 위해 호의로 베풀기 위해 했던 행동을 습관적으로 한 것이지만, 후버는 가슴의 격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공간 자체가 나를 거부하는 느낌이군.’

아릿했던 심장의 통증은 작아지긴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후버의 전신으로 확대되어갔다.

정말로 후버가 주신을 믿는 신도였다면 마법사로서 기도를 할 때마다 겪는 통증이었겠지만 기도는커녕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성물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후버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격통이었다.

“이… 이걸 어떻게?”

대신관 으로서도 처음 겪어 보는 현상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혹시 포션이라도…….”

당황한 대신관이 포션을 기억해 냈다.

“아니야…. 포션은 오히려 지금의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야… 오히려 원액이…….”

포션으로 만들기 전 정제된 원액이 대신관의 뇌리에 스쳤다. 각종 몬스터의 피, 특히 트롤의 피를 주성분으로 한 포션의 원액으로 신성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후버와, 그 일대를 몬스터의 마기로 더럽히면 신성력의 영향이 감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초조하게 후버의 상태를 지켜본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렸을까? 커다란 원액이 담긴 나무통을 성기사 3명이서 낑낑거리면서 들고 왔고, 후버는 통증으로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 모습 볼 수 있었다.

‘굴리란 말이야 병신들아.’

문 앞에서 한참을 낑낑거리는 성기사들에게 쌍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후버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저 신음뿐이었다.

대신관은 통의 뚜껑을 열어 후버에게 부어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대신관님. 이것은 아직 신성력으로 중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잘못하다간 마성이 이자를 집어 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대신관님이 머무시는 성역이 아닙니까?”

“다른 수가 없지 않은가? 이 방에 충만한 신성력과 후버의 몸에 침입… 아니 깃든 신성력이라면 충분히 마성을 중화시킬 수 있을 것이네.”

급박한 상황에서 신성력의 작용을 불경하게 말 할 뻔한 대신관이 자신의 말을 정정하고는 직접 통의 뚜껑을 거둬냈다.

“부탁하네.”

어쩔 수 없다는 듯 성기사들이 통을 기울였다.

촤아악!

원액을 담은 나무통에서 악취와 함께 중화되지 않은 몬스터들의 피가 후버에게 쏟아졌다. 대부분은 후버의 옆에 뿌려졌지만 일부는 후버의 입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후버의 몸에 작용했는지 후버의 발작이 더 심해졌다.

“치료사들을 부르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니 로펜 치료사를 반드시 데리고 오도록.”

“하지만 그는… 신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신관님께서 걱정하는 자라면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 자가 교의 중요한 일에…….”

“모두가 한 번씩은 겪는 일이 아닌가?”

로펜을 불러오라는 말에 성기사 중 한 명이 반발했지만 대신관은 성기사의 말을 잘랐다.

“그렇지만.”

‘이 새끼들이…….’

아까부터 시간을 지체하기만 하는 성기사들이 후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현재 후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논쟁할 시간이 없네.”

“알겠습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했지만 대신관의 강압적인 말에 성기사는 로펜을 불러오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조금만 더 힘을 내게.”

괴로워하는 후버에게 들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신관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후버를 바라보았다.

‘미치겠군… 이렇게 황당하게 목숨을 잃는 것인가?’

포션의 원액이 부어지기 전까지 후버는 괴롭기는 했지만 자신이 죽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포션의 원액이 부어지자 어쩌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변화한 기운에 적응하기 위해 후버가 분투하는 동안 성기사가 로펜을 비롯한 5명의 치료사를 이끌고 대신관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로펜 자네가 와서 상태를 좀 봐주게나.”

“제가… 이런 중한 일에 나서도 되는 것인지…….”

“자네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서 이자의 상태를 봐주게나.”

대신관의 재촉에 로펜이 후버의 상태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차근히 상태를 살펴본 로펜이 생각에 잠기자 대신관이 로펜을 채근했다.

“뭐라 말하기가 어려운 상태로군요. 이자는 마법사인 것입니까?”

“그렇네…….”

“마나의 고리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아니까 자네를 부른 것이 아닌가?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이자의 목숨을 살려주게.”

잠시 방 안을 서성이며 후버를 답답하게 하던 로펜이 생각의 결론을 내고는 대신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우선 이자를 포션 원액 통에 담가야 합니다.”

황당한 로펜의 처방에 대신관을 비롯한 모두가 경악의 표정을 지었지만 로펜은 뭐라고 제지하기 전에 설명을 이어갔다.

“이자는 지금 마력, 신성력, 마성의 세 가지 힘이 몸의 내부에서 주도권을 다투기 위해 싸우고 있는 상태입니다. 문제는 몬스터의 마성입니다. 저 통 안에 든 몬스터의 피가 대략 몬스터 300마리의 피를 농축한 것이란 사실은 대신관님께서도 아실 겁니다.”

“그게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만큼 몸을 회복시키는 작용을 하지 않나?”

“그렇습니다. 몸의 회복에는 가장 좋겠지요. 마성에 잡아먹히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우선 이자를 원액에 완전히 담가야 합니다.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마성이 이자를 압도하도록 하게 해야 합니다.”

“마력과 신성력이 서로 반발을 하는 게 문제이니 우선 마성으로 이자를 확실하게 제압을 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약간의 마성이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몸에 가둔 마나보다는 이쪽이 더 자연스럽지요. 그 후에는 신성력으로 마성을 몰아내야 합니다.”

“마성과 신성력이 몸 안에서 싸운다면 그 역시도 이 자에게 무리가 가는 것이 아닌가?”

“충분히 강력한 신성력이라면 마성은 그 앞에서 사그라들 뿐입니다. 마성은 감히 신성력과 충돌하지 못합니다.”

“충분히라니?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인가?”

“대략적으로 대신관님이 도와주신다면 신성력이 충만한 성기사가 20명, 그리고 저와 같은 치료사가 50여 명 정도 필요합니다.”

“그렇게나 많이? 시간은 얼마정도가 필요하겠나?”

새삼 대신관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발생한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대략적으로 하루, 그리고 투입된 인원이 회복하는 데에는 3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확실히 이자가 살아나기는 하는 건가?”

“그것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살려야 하네. 반드시!”

“어째서 이자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무조건 살리라고 하는 대신관의 말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일순 대신관에게 집중되었다.

“이자가 성물을 가지고 왔네… 그리고 대외적으로 이자의 신분은 2왕자의 후견인이야. 교단의 미래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에 우리 교단이 휘말릴 수 있네.”

대신관의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대신관과 독대를 한 만큼 보통의 신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엄청난 후버의 위치에 방 안에 모인 성기사와 치료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자가 500년 만에 성물을 가지고 왔다는 말입니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네. 하지만 분명히 성물을 정리해놓은 도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형태였네. 그러니 이자의 확인이 필요한 것이지.”

담담하게 내뱉는 대신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펜은 후버를 등에 업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이자가 목숨을 잃는다면 성물의 출처를 밝힐 수가 없지 않습니까?”

로펜의 물음에 모두가 정신을 차린 듯 로펜을 도와서 후버를 몬스터 피의 원액이 담겨 있는 곳으로 운반했다.

첨벙.

마침 포션의 제조를 위해서 커다란 통에 모아둔 원액에 후버의 몸을 던졌다.

“호흡은 어쩌려고 그러는가?”

“그건 제가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로펜이 손에 약간의 신성력을 일으켜 후버가 있음직한 부분에 신성력을 주입했다.

후버로 인해 신전이 벌집을 쑤셔놓은 듯 소란스러운 와중에 원액에 담겨진 후버는 오히려 전보다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지?’

상황에 맞지 않는 편안함이 후버를 감싸 안았다.

‘의식을 잃은 줄 알았는데.’

원액에 던져질 때의 통증으로 인해 스스로 의식을 놓아버린 후버였지만, 오히려 의식은 더욱더 또렷해진 듯했다. 그전과 다른 것이라면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몸에 적응하자 후버는 지금의 감각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팔찌를 통해 과거를 볼 때면 느껴졌던 기이한 부유감과 안정감이 후버를 감싸고 있었다.

‘나른하군.’

평소 팔찌를 통해 과거의 일을 간접적으로 겪은 것과 다르게 후버는 팔찌를 통해서 약물이 가득 찬 통을 넘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신전의 인물들을 볼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움직여주니 편안하게 누워 있기가 미안하군.’

허공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신전의 인물들을 구경하던 후버가 한 명, 한 명에게 집중을 하자 그들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후버에게 전해졌다.

‘직접 의식을 읽는 것이 이 팔찌의 기록 방식인가 보군.’

자연스럽게 읽히는 상대방의 생각을 음미하던 후버가 관심의 대상을 자신에게 돌렸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군!’

아직은 마성과 마나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지 고통밖에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상태에 관심을 끊은 후버는 새로운 인물이 추가될 때마다 그들의 의식의 흐름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후버가 방 안의 모두의 생각을 감상하는 와중에 로펜이 손을 들어 후버의 몸을 꺼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제 치료가 다 끝난 건가? 지독하군!’

후버는 검은 이미지의 마성으로 가득 찬 자신의 육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들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면 단단히 오해할 뻔했어.’

후버의 말대로 일반인들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는 포션의 원액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보기에 따라서 충분히 시체를 은닉하는 행위로 보기에 충분했다.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대신관님부터.”

통 밖으로 꺼내진 후버에게 대신관부터 차례대로 자신의 신성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신성력의 파도에 후버의 몸에 깃든 마성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로펜의 인도에 따라 머리 부분의 마성이 사라지고 이제 심장에 깃든 마성을 정화시키기 위해 신성력을 집중하는 순간, 후버의 의지가 신성력에 깃들었다.

‘이대로라면 마나의 고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세계에서 자신이 평생 동안 키워왔던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후버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버가 아까워하는 것과 별개로 마성은 신성력 앞에 맥을 못 추고 그 영역을 점차적으로 좁혀갔다.

‘빌어먹을 마나의 고리가 흔적도 없군!’

마성이 사라져 가는 자리에 후버가 기대한 마나의 고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처음 로펜이 생각한 대로 치료는 되어가고 있었지만 후버로서는 생명만큼이나 마법사로서의 능력도 중요했다.

“뭔가 치료를 방해 하고 있습니다. 좀 더 힘을…….”

후버의 제지로 인해 신성력이 심장 밑으로 내려가지를 못했다.

치료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신성력이 마기를 해소하고는 계속해서 심장 부근에 머물고 있자 로펜은 당황을 해서는 좀 더 많은 신성력을 투입해 줄 것을 주변의 치료사와 신관들에게 부탁했다.

‘1서클…….’

농축된 마나 집약진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공급되는 신성력으로 후버는 차근차근 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3시간 동안 꾸준히 공급되는 신성력을 바탕으로 고리를 복원하던 후버가 자신의 한계인 5서클에 다다른 순간 후버는 더 이상 신성력에 대한 의지를 행사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까운데…….’

견물생심이라는 말처럼 후버는 자신의 주변에 넘실거리는 신성력이 이대로 치료만 하는 것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졌고, 딱 처음 자신이 가진 마나의 양이었던 5서클까지의 고리만을 생성하려던 후버의 생각이 충만한 신성력으로 인해 바뀌었다.

‘어차피 죽을 일은 없을 테니…….’

주변에 가득찬 신성력과 교단의 최고 치료사와 성기사, 그리고 일반 사제 중 신성력을 가진 교단의 모든 인물이 투입된 만큼 설사 잘못된다고 해도 죽을 일은 없다는 생각이 후버의 욕심을 자극 했고, 마음을 먹는 순간 아랫배 쪽으로 내려가려던 신성력의 흐름이 다시금 후버의 심장 부분에 집중됐다.

다시금 3시간여의 시간이 흐르고 1~5서클이 만들어지던 시간만큼의 시간이 흘러서야 후버의 심장에 6번째 고리가 생겼고, 후버는 심장의 고리를 살짝 돌려서 무사함과 지배력을 확인했다.

6번째 고리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확인한 후버는 로펜의 의지에 따라 몸 안에 남아 있는 마성을 제압하기 위해서 신성력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처음 머리 쪽에 남아있던 마성이 사라지던 속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마성에 후버가 오히려 로펜을 인도하여 몸의 모든 마성을 발끝으로 몰아내고 후버의 의식이 없다고 생각한 로펜으로서는 뭔가 불가사의한 힘이 자신을 조종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농축된 마성을 한 번에 사라지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신성력의 힘.

로펜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치료사들에게 지시를 하자 치료사들이 일제히 후버의 발에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단번에 후버를 감싸는 강렬한 빛의 파동이 지나고 신성력이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마지막으로 남은 마기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다.

‘기분 끝내주는군!’

후버는 당장 몸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몸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아직까지도 정신을 잃은 듯이 가만히 누워 있었고, 그런 후버를 살펴본 로펜은 완전히 의식을 차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신관에게 말하였다.

“얼마나 있으면 깨어날 것 같은가?”

“장담하기는 힘듭니다만 일단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행이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끝난 것이지? 하루는 꼬박 걸릴 것처럼 이야기 하지 않았나?”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역시도 이자가 일어나면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짐작은 가지만 확신을 할 수는 없어서…….”

“알겠네. 이자를 치유실로 옮기고 안정을 취하도록 조치하도록 하겠네.”

대신관이 로펜에게 말하자 성기사들과 치료사들이 로펜이 따로 지시할 필요도 없이 후버를 치료실로 옮겼다.

“모두 나갔군!”

치료실에 들어온 후버가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일어나서 가볍게 체조로 몸을 풀었고 다행히도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듯했다.

“전화위복이 이런 건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연을 얻었다는 생각에 소리를 죽이고 한번 웃은 후버는 가볍게 라이트 마법을 시작으로 1서클 마법부터 3서클 마법까지 순서대로 펼쳐보며 마법이 가능한지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신성력을 통해서 마법이 발현되는 것을 확인한 후버는 마지막 걱정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성장이 문제군. 신성력이 마나처럼 모든 곳에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마나를 통해 마법을 발현하는 것과는 다르게 신성력을 통해서 마법을 발현하자 심장에 모이는 신성력이 빠르게 소모될 뿐, 다시 차오르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리다는 사실이 후버를 걱정하게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신체의 상대를 점검하던 후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신성력으로 마나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좋지만 소모되는 신성력이 차오르는 속도가 늦다는 것은 그만큼 전투에 있어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고 파괴된 서클을 다시 만들다가는 영지의 발전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겠지…….”

현재 영지의 발전이 오롯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탓에 후버는 마법적 능력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주어진 문제를 머릿속으로 정리한 후버는 눈을 감고 팔찌로 의식을 집중했고 팔찌를 통해서 과거 성기사나 사제들의 경험을 흡수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역사적으로 성기사나 사제가 전투에 참여한 적은 많이 있었고 전투도중 신성력이 고갈되어서 전투를 이어가지 못한 적은 있었지만, 마법사들이 그렇듯 그들도 하루, 혹은 반나절의 휴식을 취한 후 충분히 자신의 몫을 해낼 만큼 몸을 추스르고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마법사가 마나를 회복하듯이 성기사들도 신성력을 회복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란 것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눈을 감은 후버의 의식이 팔찌를 통해 과거로 회귀하기 시작했고 후버는 빠르게 그들의 경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

*

*

몸의 불편함을 핑계로 의식을 차렸다는 것을 알리고도 3일여의 시간을 치료실에서 보내며 신성력을 회복할 답을 찾던 후버에게 대신관이 찾아왔다.

“몸은 좀 어떤가?”

“대신관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일단 너무나 미안하게 되었네, 나의 실수로 자네가 마법적인 능력을 모두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야…….”

“어찌 그것이 대신관님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이스마엘 님께서 저를 사용하시기 위해 마력과 같은 사특한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분하게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말을 하는 후버의 모습에 대신관이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는 듯 고개를 땅으로 떨궜다.

“아니야… 자네의 아쉬움을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맙네.”

“고개를 드시지요. 대신관님께서 저와 같은 평신도에게 고개를 숙이시면 주신께서 마땅케 여기지 않으실 겁니다.”

후버가 재차 괜찮다는 뜻을 전하자 대신관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직접 말하도록 하게. 자네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서 돕도록 하겠네.”

아직도 미안함이 가시지 않은 듯 말하는 대신관에게 사양의 말을 한 후버가 대신관의 방문 목적을 물었다.

“아직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지 않은 자네에게 충분한 휴식 시간을 주지 못하고 질문을 하는 것이 미안하네만 주교께서도 관심을 가지시기에 어쩔 수 없었네. 이미 대략적으로 전해 들었지만 자네가 성물을 가지게 된 경위를 한 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줄 수 있겠는가?”

대신관의 말에 후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비한 이야기를 대신관에게 해주었다.

영지의 새로운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도를 올렸고 그 기도의 대답으로 연필에 신성력이 깃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불경스러운 말이 될 수도 있기에 사제님께 고해성사를 할 때에는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물려주신다면 대신관님과 독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주변을 물려달라는 후버의 말에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짓을 하자 대신관을 경호하기 위해 함께 온 인원들이 모두 문 밖으로 나갔다.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

“그전에 잠시…….”

모두가 나간 것을 확인한 후버가 나직한 영창을 끝내고는 사일런스 마법을 사용했다. 경험이 많은 대신관도 신성력으로 마법을 펼치는 생소한 모습에 놀란 듯 손가락으로 후버를 가리키고 말을 잇지 못했다.

“자네…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대신관의 놀람을 무시한 후버가 라이트 마법과 동시에 사람을 매혹시키는 참펄슨 마법을 사용했다.

누워 있는 3일 동안 6서클에 이르러서 사용할 수 있는 더블캐스팅을 통해 동시에 두 가지 마법이 발현되었지만, 대신관은 후버의 손끝에 생기는 라이트 마법에 시선을 뺏겨 참펄슨이 사용되는 것을 느끼지는 못한 듯했다.

“사실 성물이 만들어지는 그날… 주신 이스마엘 님의 목소리가 저의 귓가에 들렸습니다. 하지만 일개 평신도인 제가 그리고 마법사인 제가 이스마엘 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말을 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 부터도 믿지 못하여 이스마엘 님의 말씀은 사제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신 건가?”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로는 저에게 500년 만에 성물을 내리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네가 가져온 성물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 두 번째는 무엇인가?”

“저에게 신성을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마법사로서 저는 생명을 다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펜 치료사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혹시 치료사님 중 로펜이라는 분이 계십니까?”

후버의 말에 대신관이 뒷말을 잇지 못했다. 후버가 말을 하며 라이트 마법을 캔슬하고 손 위에 파이어 볼을 띄우자, 대신관은 후버의 마법의 근원이 마나가 아닌 신성력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후버의 입에서 로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놀라움은 경악으로 변하였다.

“그때… 자네는 의식을 잃고 있었을 텐데.”

“역시… 로펜 님이 저를 치료해주신 거군요.”

“그렇네, 그럼 자네가 마나를 잃은 것도 모두 이스마엘 님께서 예비하신 일이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스마엘 님께서는 저에게 로펜 치료사님의 방황에 답을 내려주고 저의 영지의 신전을 관리할 신관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로펜 치료사를 신관으로…….”

“그렇게 한다면 저의 영지로 성녀가 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녀님께서…….”

참펄슨 마법의 효과와 후버가 알 리가 없는 로펜의 존재와 함께 로펜의 방황을 언급하자 대신관은 후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 역시 제가 정말 이스마엘 님의 음성을 들은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해볼 때… 혼란스럽군요.”

“무엇이 혼란스럽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은가?”

자신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후버의 모습을 본 대신관은 오히려 자신이 확신에 차서는 후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500년간 나오지 않던 성물이 나온 것이나 앞으로 성녀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후버의 주장은 날로 교세가 약해지는 신전으로서는 너무나 믿고 싶은 말이었다.

후버의 염려와는 다르게 지금의 대신관은 진심으로 교단의 미래와 날로 약해져가는 교세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마법사였습니다. 어찌하여 대신관님과 주교님을 두고 저에게 직접 성언을 내려주신단 말입니까?”

“아니야. 오히려 자네이니깐 성언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네.”

확신에 찬 대신관의 말에 후버가 의문을 표하자 대신관이 설명을 이어갔다.

“자네가 증거인 거야 무려 500년이네. 성녀님도 성물도 신의 역사를 일반인에게 증명할 그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은지 500년의 세월이 흘렀네. 신도들의 믿음은 날로 약해져가고 신도들의 수도 점점 줄어가고 있다네.”

“안타까운 일입니다.”

“증거가 필요한 걸세, 극적인 증거가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증거가 필요한 거고, 자네가 바로 신이 역사하신 증거가 되는 것이네. 자네는 모르겠는가? 성언을 들은 당사자도 믿지 못한 일이 일어났네. 이것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관의 모습에 후버가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군.’

“다른 말씀은 없으신 건가?”

“제게 확신이 서면 세울 영지의 성전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에 대해 어떠한 말씀을 내리신 건가?”

“그것은 주교님께 직접 말씀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교님께 말인가?”

후버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신관은 안타깝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성녀가 나타날 곳의 새로운 성전에 대해서 자신이 먼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탄성의 절절함이 후버에게도 느껴지는 듯했다.

“아시고 싶으시다면 대신관님께서 먼저 들으시고 주교님께 전해주시겠습니까?”

“아닐세! 이스마엘 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다른 뜻이 있을 것이야. 그 이야기는 주교님께 자네가 직접 드리도록 하게나. 언제쯤이면 거동이 가능할 것 같은가?”

“일주일 정도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일주일 후로 약속을 잡아두도록 하지. 다른 필요한 것은 있는가?”

필요한 것이 없냐는 대신관의 말에 후버는 로펜을 만나고 싶다는 말과 함께 과거 사제나 치료사들의 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고, 대신관은 관련된 기록을 전해준다는 약속을 하고는 로펜을 불러서 후버와 인사를 시킨 후 자리를 떠났다.

그나마 안면이 있던 대신관과는 다르게 후버와 로펜의 첫 만남은 양쪽모두에게 어색함을 안겨 주었다.

“저의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인사말 이후 운을 뗀 것은 후버였다.

“모두 주신 이스마엘 님의 뜻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후버의 반문에 로펜이 성호를 긋던 손을 잠시 멈칫하였지만 다시 손을 움직여 성호를 긋는 동작을 마무리 하였다.

“무슨 의미입니까?”

“성직자가 거짓을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갑작스런 후버의 말에 로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스마엘 님의 뜻에 의문을 표하시면서 신도에게는 그분의 뜻이라고 하니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흔들리는 동공에서 로펜의 당황이 후버에게 느껴졌다. 신관으로서 신의 뜻을 의심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러한 사실을 처음 본 후버에게 파악되었다는 것에 로펜은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신전에 속한 사람으로서 변치 않는 믿음의 표본이 되어야 할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로펜은 다른 변명 대신에 후버가 지적한 것을 인정하였다.

“신의 뜻입니다.”

엄숙한 표정으로 선언하듯이 말하는 후버.

“이스마엘 님께서 성물을 저에게 내리실 때 로펜 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펜 님의 마음속 흔들림을 바로 잡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후버는 천천히 로펜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약통 안에서 로펜으로부터 직접 읽어 들인 기록을 토대로 로펜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담담하게 말하는 후버의 말에 로펜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바뀌어 갔다.

마치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옆에서 본 듯 자세하게 풀어내는 후버의 말을 듣던 로펜은 후버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넘어왔군!’

무심한 듯 앞을 바라보고 있지만 후버는 계속해서 로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경악의 순간이 끝나고 무언가 체념한 듯 주기적으로 고개만을 끄덕이는 로펜을 확인하고 긴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신께서는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대신관에게 말했듯이 선언하듯이 말하는 후버의 말에 로펜이 정신을 차렸는지 홀린 듯이 끄덕이던 고개를 멈추고는 후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쓰임 역시 예비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매우 소중하게 이스마엘 님의 종으로서 교단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봉사를 하게 되실 겁니다.”

“교단을 위해… 세상을 위해… 이스마엘 님의 종으로서…….”

후버가 한 말을 따라하는 로펜에게 후버는 미리 적어 두었던 이름이 적힌 양피지를 로펜에게 건네주었다. 혼수상태일 때 생각을 읽었던 자들 중 특별히 성정이 좋은 치료사, 사제, 성기사가 적힌 종이를 후버가 건네주자 로펜은 후버가 건네준 양피지를 조심히 펴고는 명단을 확인하였다.

“로펜 님도 아시겠지만 현재 교단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교세는 날로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외형적인 팽창만을 추구할 뿐 주변을 아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록은 교단의 자선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후버의 직설적인 물음에 대해서 로펜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교단의 기록에서는 귀족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각지의 신전을 통해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록은 기록일 뿐, 지금의 교단은 쓸데없는 예식으로 평민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로펜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후버는 예상한 로펜의 반응에 쓴웃음이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신전에서 길러진 로펜으로서는 보는 세상이 좁을 수밖에 없었고 신전 안에서만 자란 만큼 그러한 좁은 식견은 로펜이 강력한 믿음을 가지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편향된 기록은 결국 현실 앞에 선 로펜에게 신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만들었다.

반면 후버는 전생의 교육을 통해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어떠한 식으로 왜곡되고 변질되며 종국적으로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로펜이 읽은 신전의 기록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굳이 내가 그런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지.’

로펜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었지만 후버로서는 로펜이 착각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기만 하면 될 뿐, 진실을 알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교단역시 젊은 사제나 성기사 혹은 로펜과 같은 치료사들이 외부의 환경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인지 부조화를 겪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저 믿음을 시험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생각할 뿐, 바로잡아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후버는 그러한 오래된 관행으로 만들어진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로펜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일입니다.”

후버의 말에 로펜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버가 돌려 말했지만 책임을 질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로펜은 어리석지 않았고 로펜의 손에는 그 책임을 질 사람의 목록이 양피지에 적혀서 들려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작은 것부터 변화시키기 시작하시면 됩니다. 크랩스 왕국에서 가장 척박하고 가장 낙후된 영지에 신전을 세울 것입니다. 이곳처럼 화려하지 않게 그래서 누구든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것입니다. 로펜 님께서 그곳을 관리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어찌…….”

“하셔야 합니다. 과거 신전의 모습을 화복하라는 것이 주신 이스마엘 님의 뜻입니다. 그 성스러운 계획을 거부하실 생각이십니까?”

강압적으로 하는 후버의 말에 로펜이 사양의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신을 모시는 자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설득이나 논리는 힘을 쓰지 못하지만 후버가 말한 성스러운 계획이라는 말은, 청자가 화자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한 어떤 항명도 허락지 않는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어디 까지 따라야 하는 건가? 어째서 이스마엘 님께서는 나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는 건가?’

자책감과 함께 무력감이 로펜의 사고를 지배했다. 어린 시절부터 신전에서 길러졌고 그 누구보다 실력 있는 치료사로서 로펜은 자신의 능력이 주신이 직접 내려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선민주의적 사고방식에서부터 출발한 자긍심은 대외적으로 한없이 자비로운 치료사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로펜 역시 자신에 대한 외부의 평가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로펜은 주신의 계획이 직접 자신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닌 타인을 통해서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에 가까운 모멸감 역시 느끼고 있었다.

아마 후버가 자신을 처음본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순간과 고민을 마치 옆에서 직접 본 것처럼 말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후버가 500년 만에 나타난 성물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로펜은 후버의 말에 의심을 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로펜의 표정 변화를 세밀하게 살피고 있던 후버는 로펜의 표정을 통해 그가 느끼고 있는 박탈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충격이 큰가본데. 괜히 믿음에 회의를 느끼면 내가 곤란하지.’

가만히 침대에 앉아 벽에 기대 말하던 후버가 몸을 일으켜서는 창문 쪽으로 다가가서는 로펜을 불렀다.

“로펜 치료사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촤악!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우악스럽게 커튼을 한쪽으로 쳐내고는 후버가 창밖을 가리켰다.

후버와 로펜의 시야 한가득 들어오는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평신도들과 그러한 평신도들을 정렬시키는 신전의 말단 성기사와 사제들의 모습을 한번 쭉 손으로 훑은 후버가 입을 열었다.

“교세가 줄었다고는 하나 저 많은 신도들 중에, 그리고 성기사와 사제들 중에 로펜 님은 이스마엘 님의 성스러운 계획의 직접 참여하시게 된 것입니다.”

후버의 말에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로펜의 표정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럼… 제가!”

“이스마엘 님께서는 오직 로펜 님의 과거만을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로펜이 무언가 대답을 하려 했지만 짧게 숨을 돌린 후버가 로펜을 제지하고는 한 단어 한 단어 강조하면서 말을 이었다.

“로펜 님께서 반드시 새로운 신전에, 이스마엘 님의 일에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로펜 님은 성스러운 계획에 반드시 필요하신 분입니다!”

“주신의 뜻이 저에게… 감사합니다.”

후버의 다독거림에 로펜이 감동을 받은 듯 그 자리에서 이스마엘에게 기도를 올렸고 후버는 그런 로펜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

*

*

로펜의 설득을 끝내고 신전의 기록을 살펴보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후버에게 대신관이 주교와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전하고는 후버를 대신관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신전의 다른 곳과는 다르게 소박하게 장식된 방에서 한 중년남자가 다과와 함께 후버를 기다리고 있었다.

넉넉한 풍채만큼이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과 주변에서 자연스러운 신성력에 후버는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랜 시간 기다려 주어서 고맙소. 영지의 일이 하루하루가 아쉬울 것인데 후버 님께서 이렇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시는 주교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보다 더 하겠습니까?”

간단한 덕담으로 시작한 후버와 주교의 대화가 한동안 간단한 가십거리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주교로서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나름의 배려를 한 것이지만 후버는 급조된 이스마엘에 대한 지식으로는 따라가기에 버거움을 느끼고는 얼른 본론을 꺼냈다.

“우선 제가 말씀드릴 것은 주신 이스마엘 님에게서 내려온 신탁에 대한 내용입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가 듣고 싶었습니다.”

경청하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는 주교의 모습에 후버가 한 번의 심호흡을 하고는 주신의 뜻을 가정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우선 제가 봉헌한 연필을 혹시 보셨는지요?”

“예. 오랜만에 이스마엘 님께서 내려주신 성물은 신전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 님께서는 포교를 위해서 그 연필을 반드시 모두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연필을 사용하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스마엘 님께서는 내려주신 성물을 이용해서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성경을 필사하여 새로운 성물의 출현을 널리 알리라는 뜻을 저에게 전하였습니다.”

후버의 말에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성물의 형태는 주신의 형상에 깃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후버가 봉헌한 연필의 원래 쓰임새를 들은 주교는 주신의 모습을 본뜬 형태가 아닌 소모품에 신성력이 깃든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후버의 말로 인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매우 구체적인 신탁이군요. 또 다른 뜻은 없으셨습니까?”

“조만간 성녀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녀가 나타날 곳을 축복으로 채우라는 말씀을 저에게 남기셨습니다.”

“축복으로 채우라는 것은 무슨 말씀이셨습니까?”

“이스마엘 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신도들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지금처럼 접근하기 힘든 신전 때문이라는 답을 내려주셨습니다. 일생을 이스마엘 님을 위해서 희생하신 주교님의 노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신의 입장에서 인간은 부족한 피조물일 뿐이지요.”

“그런 부족함마저 포용해 주시는 것이 이스마엘 님의 가호가 아니겠습니까?”

‘뻔뻔하기 그지없군.’

우회적으로 주교를 비판하는 후버의 말에 주교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이해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후버는 대신관과는 다른 주교의 태도에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스마엘 님께서 저를 통해서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항상 이스마엘 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주교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후버는 답답함을 느꼈다.

‘알 수가 없어… 하는 말은 지극히 원론적이고 맞는 말인데 말이야…….’

다른 때 같았으면 잠시 시간을 두면서 무언의 압력으로 상대가 말을 하도록 유도하고 실수를 잡아내려고 하겠지만, 현재 후버의 처지는 그러한 협상의 기술을 사용하기 곤란한 상태였다.

‘괜히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하면 오히려 저자가 날 의심하겠군.’

“이스마엘 님께서는 새로운 성전을 드라고니아 포레스트 영지에 짓되, 이곳 수도와 같은 규모의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을 옮기라는 말씀이십니까?”

예상치 못한 후버의 말에 주교가 약간의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의 대화가 그저 피상적인 언어의 교환이라면 방금 전의 주교의 반응은 처음으로 후버의 말에 대한 부정적인 의문을 품고 있는듯했다.

‘목석같은 사람보다 이쪽이 더 상대하기는 쉽지.’

“이곳은 대대로 신전이 있던 곳입니다. 어찌 주교님께서 계신 성전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스마엘 님의 뜻은 이곳과 같은 규모의 성전을 짓되 주된 재료를 나무로 하고 건축 비용은 동일하게 지출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이스마엘 님께서는 드라고니아 포레스트 영지를 축복으로 가득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 부터는 이스마엘 님께서 내려주신 말씀을 근거로 제가 추측을 한 것인마엘데 들어보시겠습니까?”

“이스마엘 님께서는 이해할 수 있는 자에게 말씀을 내려주십니다. 부담을 가지지 말고 저에게 이스마엘 님의 뜻을 풀어주었으면 좋겠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이스마엘 님을 직접 모시는 신전의 품격에 맞도록 이곳을 건립하기 위해서 많은 신도들의 마음이 모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도적으로 재물 등 세속적인 단어를 제외하고 후버가 신전의 건축 비용에 대해서 말하자 주교가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시다시피 이곳 수도는 부유합니다. 그리고 귀족들의 거주지가 몰려있는 만큼 신전의 자선행위가 슬럼가를 키운다고 부정하는 인물들이 많지요.”

주교 역시 교단에서 행하는 각종 자선행위마다 반대를 하는 귀족들을 핑계로 신전의 자선행위가 줄고 있었기에 후버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도에는 타락한 곳도 많고 타락한 자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교단은 마음껏 자선 행위를 할 수도, 그리고 신전의 자선행위로 인해 수도를 축복으로 가득차기는 힘들 것입니다.”

“후버 님께서 많은 것을 생각하신 듯하군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말하는 후버의 모습에 주교가 공감과 함께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제가 있는 드라고니아 영지는 현재 유민들로 인해서 매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 누구보다 신전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영지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절대로 이스마엘 님의 신전에 위해를 끼칠 수도, 그분의 뜻에 반감을 표할 수도 없습니다.”

후버가 마법을 사용하기 전 준비를 할 때처럼 심장의 고리를 회전시키자 주교와 후버가 머문 방이 신성력으로 가득찼고 갑작스러운 신성력의 발현에 주교가 놀라서는 후버를 바라보았다.

주교 역시 기도나 성호를 긋는 것을 통해 신성력을 발현할 수 있지만, 성녀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하면서 신성력을 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주교의 놀라움은 주교가 가지고 있던 침착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만큼의 충격이었다.

“신성력이…….”

놀라서 후버를 가르리는 주교의 손가락이 떨려왔다.

“또 이러는군요. 주교님 제가 경험이 일천하여서 그런데 갑작스럽게 신성력이 흐르는게 어떤 경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담담하게 묻는 후버의 질문에 주교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성녀…….”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마음속에 떠오르는 말을 후버가 순화해서 뱉어 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스스로의 말을 부정하듯이 고개를 가로젓던 주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직 성녀님께서 신탁을 받으실 때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저는 성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스마엘 님께서 예비해두신 성녀님은 따로 계십니다. 아직 어디에 계시는지, 태어나기는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더 이상의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 후버는 심장의 고리의 회전을 멈추고 신성력에 대한 지배력을 해소하였다. 마나가 그렇듯이 고리로 다시 회수되지 않은 신성력이 신전 곳곳으로 전해졌고 몇몇 예민한 성기사와 사제는 주교와 후버가 있는 방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이내 사라지는 신성력의 기운에 다시 자신들이 하던 일에 집중했다.

신전의 모든 사람들이 그저 자신의 착각이라고 치부한 반면 눈앞에서 후버가 신성력을 주변에 흩뿌리는 것을 직접 본 주교는 그들처럼 가볍게 지금의 상황을 생각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떤 경건한 느낌이 주교의 영혼부터 깨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교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신전의 최상층에서 본 수도의 풍경은 매우 오밀조밀한 모습으로 주교에게 다가왔다.

‘전혀 변하질 않았군.’

주교가 젊은 시절 일반 사제와 같이 직접 현장에서 미시적으로 바라본 수도의 모습은 매우 역동적이었다.

하지만 주교의 자리에 오른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처음 주교의 자리에 올랐을 때와 지금 수도의 전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도의 전경처럼 나는 변함이 없었는가?’

문득 자신의 젊었을 때를 생각하던 주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조에 들어갔다. 마법사가 명상을 통해 경지를 높이듯 주교 역시 자신의 신앙심을 높이는 경우가 있었고, 주교 역시 그런 단계로 접어드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안 돼!’

주교의 모습을 보던 후보는 뇌리에 경계심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버 자신이 신을 믿지는 않지만 자신이 사용하는 신성력이 실재하듯 그 힘의 근원 역시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추론이 가능했고, 신전의 정점에 있는 주교가 신성에 대한 각성을 한다면 신의 사자를 자처하고 있던 후버로서는 자신의 정체가 탈로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기에 후버는 재빠르게 다과와 함께 준비되어있는 음료가 담긴 통을 쳐서 바닥에 떨어트렸다.

탱그랑!

정적으로 가득찬 공간이 후버가 만든 소음으로 가득 찼다. 절대적으로 고요해야할 깨달음의 순간에 실수를 가장한 후버의 동작이 만든 소음에 무아지경에 빠지려던 주교가 정신을 차린 듯 후버를 바라보았고 후버는 얼굴 가득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자리를 피해 드린다는 것이 그만…….”

뒷말을 줄이는 후버를 응시하던 주교의 표정이 아쉬움으로 가득 찼고, 일순 주교의 눈을 통해서 후버에게 보이던 현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달관의 경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에 아쉬움을 느끼는 주교의 표정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었고, 후버는 속으로 신에게 한발 더 다가가지 못한 주교의 모습에 자신의 정체가 탈로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지요.”

아쉬움을 수습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주교였지만 말끝에 담긴 여운은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침묵으로 서로를 상대한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주교였다.

“후버 님에게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실 이미 보여 드렸어야 하는데 저의 욕심이 참 부질없는 것을.”

그래도 깨달음에 약간은 다가서서인지 주교는 다시금 여유있게 후버를 대하며 서랍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서 후버에게 보여주었다.

무척 낡아서 주변이 다 헤진 양피지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수축으로 인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나무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무틀의 경우는 주기적으로 교체를 해주는지 깨끗한 상태였지만 양피지 안의 내용은 변색으로 인해 종이의 색과 잉크의 색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건…….”

처음 후버가 주변에 신성력을 뿌렸을 때의 주교의 반응과 같이 경악으로 가득 찬 후버의 표정에 주교는 이해한다는 듯이 다른 말을 하지 않고 후버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혹시 필사본은 없는 것입니까? 뒤로 갈수록 내용을 알아보기가 힘이 들어서.”

후버가 본 내용은 지금 주교와 자신의 만남이 적혀 있는 부분이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마법사가 교단에 방문하여 마나 대신 신성력을 얻고 이스마엘의 말을 전한다는 내용까지 가독이 가능한 것을 확인한 후버가 혹시 다른 필사본이 있는지 주교에게 묻자, 주교는 고개를 가로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그럼 혹시 이 뒷부분의 내용은?”

“그 역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러한 기록을 제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교단의 기록은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사제들이 공부하는 교단이 작성한 기록이 있고, 100년에서 200년이 지난 후 갑작스레 발견되는 기록이 있습니다. 누가 기록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단지 저와 같은 직책을 가졌던 주교들이 우연히 발견해서 신전에 차곡차곡 모아둔 기록이라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 기록 역시 제가 우연히 발견한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치하는 교단의 기록이 없어서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곤란하던 차에 후버 님이 방문을 하셨습니다.”

“그게 저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생각이 아니라 확신합니다. 지난 200년의 기록을 모두 확인해도 이와 같은 경우는 없었으니까요.”

주교의 말에 후버가 오히려 공황 상태에 빠질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후버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신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실체를 확인한 적은 없는 만큼 신의 존재는 그저 관념상의 존재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천벌이란 게 있다면…….’

아무렇게 자신이 유리한 대로 이리저리 끼워 맞춰서 했던 생각이 정말 신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후버는 갑작스럽게 몸의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저는 후버 님을 통해서 내려주신 이스마엘 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교의 말에 상념에 빠져 있던 후버의 정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왠지 모를 찜찜함은 후버가 주교에게 직답을 하는데 적잖은 방해요소가 되었고, 후버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벌기위해 잔에 남아있던 음료수를 천천히 마시며 목을 축였다.

“우선 교단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합니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후버는 신에 대한 물음은 뒤로 미루고 지금의 현실에 충실하기 위해서 하나하나 주교에게 자신의 필요를 전하였다.

당장 영지에 필요한 치료사부터 시작해서 당장 필요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예산을 절약할 수 있는 난민들이 소비할 식량의 확보, 건축 자재까지 하나같이 적지 않은 규모의 요구였지만 주교는 후버가 하는 말을 받아 적을 뿐 후버의 말에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격이군.’

달라진 주교의 태도에서 후버는 자신이 제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주교가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인 점은 그 깨달음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호의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후버는 만약 지금 주교가 약간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양피지를 불에 태워서라도 지금의 현실을 후대에 전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주교의 물음에 후버는 철광석을 요청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식량과는 다르게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아쉬움을 뒤로하고 더 이상의 요청은 금전적인 지원을 받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럼 이제 필요한 인원을 선발해야겠군요.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최대한 반영을 하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스마엘 님의 신탁에 따라 로펜 치료사님에게 모두 일임하였습니다.”

“로펜… 아! 로펜 치료사라면 믿을 수 있지요.”

로펜이라는 이름에 누구인지 기억을 더듬던 주교가 후버의 말에 동의의 뜻을 표했다.

전반적인 상황이 정해진 후 주교는 자신이 평소 궁금해 하던 신학적인 것들을 후버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기 시작했고, 후버는 자신이 일개 평신도에 불과하다는 대답으로 일관하였다.

일반적인 경우 상대가 모른다고 하면 질문을 멈추지만 이미 후버의 존재를 이스마엘의 사자라고 생각하는 주교는 혹시라도 후버가 받는 신탁에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여러 가지 미묘한 부분을 계속해서 후버에게 질문하였다.

그렇게 2시간여 동안 계속된 질문에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주교는 후보가 피곤해 하는 기색을 보이자 성기사를 호출해 후버를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안내해줄 것을 부탁했다.

성기사의 안내로 다시 방안으로 돌아온 후버는 주교와의 대화를 위해서 미뤄뒀던 의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아는 상황을 하나씩 떠올렸다.

‘정말 신의 뜻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후버에게 가장 큰 의문으로 남는 것은 주교가 보여주었던 양피지에 적힌 내용이었다.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오래된 양피지와 그런 양피지를 보호하고 있던 나무틀의 부조화, 그리고 끊어질 듯이 흐릿하게 적혀 있는 후버와 주교의 만남에 대한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100년 후에 발견되어야 할 것이 지금 발견되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주교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양피지가 100년 전의 일에 대한 기록인 것에 비해서 후버가 본 양피지는 오히려 미래의 일을 담고 있었다.

주교가 이야기했듯이 그것이 진정한 신전과 관계된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면 모든 기록이 그렇듯이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오직 교단이나 신전에 대한 기록이라면 당연히 기록의 목적은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것일 텐데…….’

마치 누군가 의도했다는 듯이 정확하게 후버와 주교의 만남에 대한 내용만이 남아 있을 뿐, 다른 그 이후나 이전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후버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만약 기록이 앞으로나 뒤로 한 페이지만 더 있었어도 후버가 신의 뜻을 빙자해서 신전을 이용한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기에 후버는 정확하게 주교와의 만남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누군가 의도를 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해 보였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이스마엘이겠지.”

자신이 생각한 바를 낮게 읊조린 후버가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경에 따르면 세상의 시작과 마지막이라고 하는 이스마엘의 기록이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지 않은 것은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후버에게는 일종의 경고로 느껴졌다.

“그저… 있을 뿐인가?”

후버의 머리에 성경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태초에 신이 있었다는 말로 시작하는 성경의 구절과 지금의 상황이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후버의 입에서 약간의 실소가 나왔다.

‘전생에서나 여기서나 교만한 인간을 좋아하는 신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거겠군. 이스마엘이 실존한다면 양피지의 내용은 이스마엘이 나에게 주는 경고와 비슷하게 생각하면 되겠고… 실제로 최근 몇 년간 내가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으니깐 말이야.’

후버는 본격적으로 이 새로운 세상에서 행보를 시작한 시절부터 자신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갔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인생이 편안하게 흘러왔다는 생각이 후버의 머릿속을 스쳤다.

‘슬레인 자작도 그렇고 아크바 상단도 그렇고 지금 생각하면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있었지만 운이 좋게도 나에게 불행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군. 특히 신전에서 겪은 일들은 행운의 연속이고 말이야.’

전생에서 평범한 인생을 살던 자신이 이 세상에 너무나 빠르게 적응한 것 등,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은 수없이 많았다.

후~

‘정말로 상대가 신이라면 대비할 방법은 없지 않은가?’

문득 자신이 걱정하는 대상이 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후버는 자신의 고민이 모두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다. 눈에 보이는 상대라면 직접적인 방비를 세울 수 있지만 상대가 신이라면 후버로서는 대비할 방법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은 이것보다는 가능한 일에 대해서 집중을 하는게 더 좋겠어…….”

신의 뜻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버는 신성력으로 인해서 자신의 마법적인 능력이 감소했다는 것 역시 큰 문제에 속했다.

간단한 마법이나 서클의 신성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마법은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더딘 신성력의 회복과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후버에게 당장 불편한 것은 실시간으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구를 직접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티팩트 중에 사용자의 마나를 필요로 하는 아티팩트들은 모두 작동을 하지 않았고 혹시나 해서 의지를 통해서 신성력을 강하게 불어넣자 마법진의 회로가 타버리는 것으로 가능성에 대한 후버의 기대를 무너트렸다.

“이 문제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군.”

후버역시 처음 겪어보는 형상에 답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를 활성화 시키는 시도를 하던 후버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전혀 진전이 없자 피곤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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