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리 상단의 새 주인?
“무언가 말했나?”
“아직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가지고 오도록.”
와일리 상단의 지하창고를 대충 정리하여 만든 밀실로 들어가는 문을 두고 후버와 국왕이 파견한 심문 전문가가 크럭스의 심문 상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고문은 했나?”
“아직은 본격적인 고문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전문가의 견해로서 고문에 대한 내성은 충분한 것 같은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신체 박탈 등 상위의 고문 방법에 대해서 허가를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체 박탈이라면?”
“손가락을 자르는 절지라던가… 뭐, 후버 님께서 알아서 좋은 일은 아닙니다.”
“모양새가 좋지 않군…….”
“그렇기는 합니다만 효과는 이게 가장 좋습니다. 자기 손가락 떨어져 나가는데 동요하지 않을 놈도 없고 적절히 지혈만 잘하면 의외로 고문 중 사망… 뭐, 그런 일은 없습니다. 크럭스 저자만 따로 훈련을 받지는 않은 듯 하지만 독종입니다. 죽기 직전에는 아무 말도 안 할 거구요. 그런 분위기를 가장 쉽게 조성할 수 있는 게 신체 박탈의 공포입니다.”
“자네의 고문 철학은 잘 알겠네. 혹시 크럭스가 우리가 어떤 정보를 알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아닙니다. 이 생활 몇 년째인데요. 정보 발설은 당하는 쪽이 하는 거지. 제가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하는 심문 전무가의 말에 후버도 잠시 동조를 해주었다.
“앞으로 한 2시간 정도 내게 맡겨줄 수는 없는 건가?”
“뭐…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평범한 매질이나 불 고문 그리고 칼로 생체기를 만드는 것까지 후버 님이 하실 만한 심문 방법은 모두 사용해보았습니다. 그 이상의 심문 방법을 사용하신다면 안전을 위해서라도 제가 참관 해야 합니다.”
“자네가 참관 하는 것은 상관없네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보여서는 안 되네. 그저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어주면 되는데 가능하겠나?”
“이거 참, 후버 님은 저를 너무 낮추어 보시는 것 같습니다. 이 분야는 제가 전문가이니 그런 기본적인 상황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럼 바로 들어가실까요?”
“그러지.”
심문 전문가가 허락의 뜻을 표하자 후버가 밀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밀실 밖에서 후버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화상과 멍 그리고 이곳저곳에 있는 열상으로 크럭스의 상태는 일견 처참해 보이기까지 했다.
“완전히 정신을 잃었군.”
“안 그래도 이제 깨우려던 참이었습니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것도 심문의 한 방법인데 계속 재우지 않는 것보다 이렇게 하루에 1시간 혹은 30분씩 잠을 재우는 게 당하는 입장에서는 더 괴로우니까요.”
“그렇군, 일단 포션을 이용해서 상처를 모두 치료해 주려고 하는데 그건 괜찮겠지?”
“그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입으로 마시게 하면 곤란합니다. 기껏 쌓아 놓은 피로도가 포션에 의해서 회복이 될 수 있으니까요.”
“주의하지.”
후버가 마법 가방에서 10병의 포션을 꺼내서 끼얹듯이 크럭스에게 뿌리자 크럭스의 상처 부위가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좀… 아깝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저 포로일 뿐인데.”
“자네의 수고를 망쳐서 미안하군. 그저 원활한 심문을 위해서라고 이해해주게.”
볼멘소리를 하는 심문 전문가를 달랜 후버가 가죽벨트로 만든 장치를 크럭스의 가슴 아랫부분에 단단히 동여매었다. 벨트에 고정된 날카로운 바늘이 향한 곳은 크럭스의 심장 부분.
“이제 크럭스를 깨워줄 수 있겠나?”
후버가 크럭스를 깨워줄 것을 지시하자 심문 전문가가 물을 뿌려 크럭스를 깨웠다.
잠시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이 후버와 심문 전문가를 번갈아 바라보는 크럭스의 시선이 점차적으로 초점을 찾을 무렵.
짝!
크럭스의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도우려는 듯 후버의 손바닥이 크럭스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나를 기억할 수 있겠나?”
“너는… 그때 타이킨이 소개한다며 데려왔던.”
“그렇게만 잘 대답하면 별 문제는 없을 거야.”
크럭스의 대답을 들은 후버가 미리 준비한 수정구를 활성화시키자 수정구로부터 뻗어나간 불빛이 벽면에 투사되어 구불구불한 선을 띄었다.
“저기 보이는 선이 의미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딴 거 내가 알 리가 없지. 너는 누구지?”
“질문은 내가 한다니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지 지금 네가 화낼 때 선이 불규칙하게 요동친 게 너한테도 보였을 텐데 말이야.”
후버의 말대로 거칠게 움직이던 선이 점차적으로 안정되어 가는 것을 크럭스도 볼 수 있었다.
“저 선의 용도는 너의 기분의 변화 등을 포착해주지 개인적으로 나는 거짓말하는 녀석들을 탐지하는 데 사용하지만 말이야.”
“그딴 장치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 괜히 허세는 무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크럭스의 비웃음이 담긴 말에 후버가 크럭스의 가슴을 묶고 있는 가죽의 윗부분을 살짝 누르자 날카로운 바늘로 인해 크럭스의 가슴에 약간의 생체기가 생겼다.
“아마 따가울 거야. 기왕 들어본 적도 없는 물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 주지. 간단하게 말하면 말이야, 이 장치는 네가 방금 전에 본 거짓말 탐지기와 연결되어 있어서 만약에 네놈이 거짓말을 한다면… 아주 약간씩 바늘이 심장을 향해 전진하도록 되어 있다네.”
“점점 더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하는군. 네가 말한 어떤 장치도 단 한 번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데… 이런 유치한 협박이 나한테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편한 대로 생각을 하도록. 와일리 상단에서 사용한 이름이 크럭스 맞지?”
“알면서 물어보는군.”
“와일리 상단의 뒤를 봐주는 건 크랩스국의 사람이 아니군.”
“헛소리를!”
크럭스가 부정의 말을 하자 투사된 파형이 크게 흐트러지며 각진 모양을 그렸다.
“사실이 아니군. 다시 한 번 묻지. 와일리 상단의 뒤를 봐주는 건 크랩스 왕국의 사람이 아니겠지?”
“개소리 좀 작작 했으면 좋겠군.”
크럭스의 대답이 끝나자 후버가 크럭스가 보이지 않는 책상 아래에서 스위치를 눌렀고 크럭스에게 장치된 바늘이 약간 전진하면서 크럭스의 가슴에 약간의 생체기를 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거짓말은 딱 두 번까지만 허용되는 것을 명심하도록 바늘이 전진하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바늘이 심장까지 닿기까지 거짓을 말할 기회는 딱 10번 정도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후버의 말이 끝나자 크럭스가 눈에 띄게 동요하는 표정을 하였다.
“나도 너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아. 뒤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면 최대한의 고통을 주면서 사실을 말하던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나중으로 미룰 수 있겠지.”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군.”
“생각이라도 해줄 때 현명하게 생각하도록. 너의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30년은 살 수 있겠지. 거짓말 한 번에 3년의 수명이 줄어드는 셈이니 잘 생각해보도록.”
“출신 지역이 크랩스 왕국이 맞는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크럭스의 대답이 지연됐다. 5분여간 크럭스의 대답을 기다리며 수정구에서 투사된 파형을 바라보던 후버가 다시금 스위치를 눌렸고 바늘이 약간 더 전진해서 생체기가 생긴 부분을 살짝 뚫고 들어갔다.
“너무 대답을 안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란 것을 명심하도록 앞으로 9번 정도 남았군. 너는 크랩스 왕국의 사람이 아니겠지?”
“출신 지역은 크랩스 왕국이 아니다.”
고요한 파형을 바라본 후버가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평민 출신인가?”
“그렇다.”
여지없이 파고드는 바늘의 고통에 크럭스가 비명을 질렀다.
“평민 출신인가? 8번 남았다.”
“아니다.”
“스바라 왕국 출신인가?”
“아니다.”
초조하게 바늘의 전진을 대비해 눈을 감고 몸을 한껏 긴장시키던 크럭스의 염려와는 다르게 후버의 질문이 들려왔다.
“스타치 왕국 출신인가?”
‘정말… 이 도구가 나의 거짓말을 구분할 수 있는 건가?’
정말 도구가 거짓말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무렵 수정구에서 투사된 파형이 불규칙하게 변했다.
“스타치 왕국 출신인가보군.”
“그건…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대답을 하건 안 하건 상관없어. 이 기계는 너의 생각의 변화 자체를 읽는 것이니깐. 저 불안한 파형은 네가 정곡을 찔렸다는 것을 나타내 주지. 그리고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은 한다고 판단하기로 한다고 경고를 해줬는데 말이야…….”
후버의 말이 끝나자 다시금 바늘이 전진해서 고통과 함께 크럭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7번 남았다. 참고로 한 가지 더 말하자면 2번 남은 시점부터는 바늘을 뽑을 때 약간의 실수만 해도 생명이 위험해진다는 걸 경고하고 싶군.”
“정말로… 나를 죽일 셈인가?”
“내가 죽이는 게 아니야. 네 대답이 너를 죽이는 거지. 선택권은 너한테 있는 거지, 나한테 있는 게 아니야.”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지 못하고 내가 죽으면 너의 상관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쥐가 고양이 생각 하는군. 스타치 왕국 출신인가?”
“그렇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와일리 상단을 세운 것인가?”
“그렇다.”
“목적은 무엇인가?”
“이곳에서 돈을 벌어 전쟁 물자를 구입해 본국에 보내는 것이다.”
다시금 파형이 흐트려 졌고 당연하다는 듯이 바늘이 크럭스의 심장을 향해 전진 했다.
“6번 남았군. 목적이 무엇인가?”
“그 질문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목적이 한 가지도 아닐 것 이고 뭐 하나라도 빠트리면 거짓말이라며 날 몰아붙일 것이 아닌가?”
“그럼 질문을 바꾸도록 하지.”
대답 자체를 회피하던 것에서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을 하라고 자세가 변한 크럭스를 본 후버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너의 뒤를 봐주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름 하나만 말하면 되는 것이니 충분히 답할 만하겠지?”
“그건…….”
“생각보다 멍청하군!”
다시금 바늘이 크럭스의 심장을 향해 전진했다.
“슬슬 지겨워지는군. 스타치 왕국이라면 뭐 공작들부터 순차적으로 부르다 보면 네가 죽든지 사실을 말하든지 둘 중 하나의 답이 나오겠지 베로니카 공작가인가?”
잠시 뜸을 들인 크럭스가 표정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아니다.”
“거긴 아니군.”
‘표정도 아니고 도저히 모르겠어. 정말 저 도구가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가?’
크럭스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지만 크럭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가슴에 느껴지는 고통은 현실에서 도피하고픈 크럭스의 정신을 좁은 고문실 안에 가둬 놓았다.
“코닥 공작가인가?”
“아니다.”
“공작보다 윗선인가?”
“아니… 그렇다.”
갈등을 하던 크럭스가 사실을 대답하자 불안했던 파형이 안정을 찾았고 크럭스 역시 그러한 파형의 변화를 보면서 후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후버는 한 시간에 거쳐서 바늘의 진행이 단 한 번 남을 때까지 크럭스에게서 와일리 상단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뽑아내었다.
그리고 후버가 더 이상 크럭스에게 뽑아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고문실 밖을 나가려는 찰나 크럭스가 후버에게 말했다.
“잠깐 둘만 있을 수는 없겠나? 저 감시인을 제외하고 둘이서만 대화를 하고 싶군.”
“잠깐 괜찮겠나?”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심문 방법에 대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던 심문 전문가가 후버의 요청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밀실 밖으로 나갔다.
“이제 자네와 나 둘만 남았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어차피 나는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하지 않겠나? 나도 내 목숨이 귀한 것은 알고 있으니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지 않겠나?”
“어렵지 않은 것이라면야.”
“사실 나도 내 목숨 값 정도는 따로 챙겨두고 있었네. 금괴 500kg과 내 목숨을 바꿔 줬으면 좋겠군.”
크럭스의 제안에 후버는 관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확인해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크럭스는 자신이 금괴를 숨겨둔 장소를 말했고 크럭스의 말을 들은 후버는 크럭스가 말해준 위치를 간단하게 메모를 하고는 진위를 밝히기 위해 밀실 밖으로 나갔다.
“후버 님… 혹시 저 도구를 제가 사용해봐도 되겠습니까?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도구라니… 수십 년간 심문 일을 했던 저지만 저런 간단한 방법은 처음 보았습니다.”
“자네도 속은 건가?”
웃음을 띠며 말하는 후버의 모습에 심문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말했지 않나? 고통은 견딜 줄 알아도 목숨이 소중한지는 아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그게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사실 거짓말 탐지기 따위는 나에게도 없네. 투사된 영상은 그저 내가 마나를 흘려주면 불규칙한 영상을 투사해줄 뿐이지 포인트는 상대가 심문하는 자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진실을 가지고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자네도 속았다면 내 연기가 평균은 하는가 보군.”
웃음을 흘리며 후버가 심문관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가자 심문관은 그 자리에서 멍한 표정을 지으며 후버가 지하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책상 아래에 스위치가 있으니 그걸 한번 눌러줬으면 좋겠군. 계속 크럭스의 배 안에 바늘을 꽃아 둘 수는 없지 않나?”
“네, 후버 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후버가 나간 밀실 안에 들어온 심문관이 책상 아래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크럭스의 고개가 힘없이 푹 아래로 떨어졌다.
당황한 심문관이 뺨을 때려서 크럭스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 했지만 입에서는 역류한 핏줄기만이 흐를 뿐 크럭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분 상승을 위해서 적국에 잠입하여 10년 이상을 훌륭하게 임무 수행한 사람의 죽음치고는 허무한 결과였다.
뒤늦게 심문관은 자신이 스위치를 누른 것이 크럭스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크럭스의 죽음에 대해 후버에게 따지지 않았다.
그저 페트리가 크럭스를 요구하자 서류에는 그저 고문으로 인한 사고사로 처리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마쳤다.
*
*
*
이른 아침부터 엘더 영주가 이끄는 부대와 함께 수없이 만은 군중들이 와일리 상단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루 전 조용히 퍼진 크럭스의 죽음에 대한 소문과 그로 인해 엘더 영주가 와일리 상단으로 직접 찾아간다는 소문이 영지 내에 퍼져서 그런지 영지 내의 중소 상단을 비롯하여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급파된 다른 지역의 대상인들이 와일리 상단을 에워싸고 있었다.
“타이킨 총관은 안에 있는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타이킨 역시 소문을 듣고 이른 아침부터 정문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엘더 영주의 목소리를 듣고 잠금 장치를 풀고는 엘더 영주를 상단의 문 안으로 들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타이킨 총관의 질문에 엘더는 병사를 시켜서는 자신이 끌고 온 수레를 바닥에 내팽개쳤고 대충 감싸였던 천이 풀리면서 목에 밧줄을 메고 있던 크럭스의 시신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자네는 이자를 아는가?”
“크럭스 상단주님이십니다.”
영주의 질문에 사체를 천천히 살피던 타이킨이 고개를 떨구고는 시체의 정체가 크럭스라는 것을 시인하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보다시피 이자가 숲에서 목을 매고 자살을 했네. 이제 와일리 상단의 주인은 자연스럽게 자네가 되니 저번에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이야기해보지.”
타이킨의 대답을 들은 엘더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 어음뭉치를 타이킨의 발치에 던져버렸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와일리 상단이 가진 자산이 세간에 소문이 난 것보다는 너무나 적더군. 우선 그 부분에 대한 해명을 해야겠어.”
“상단의 살림은 모두 크럭스 상단주님이 챙기셨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셔도… 제가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럼 지금 와일리 상단에 남은 자산은 얼마나 있는 거지?”
“저번에 보셨던 금괴… 그리고 마탑과의 독점적 거래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근히 마탑과의 독점적 거래를 이야기하며 타이킨은 소란스러운 군중들의 분위기를 제어하려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여기 영지의 상단들은 대부분 모여 있는 것 같군. 자네들 중 와일리 상단이 발행한 어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모두 금액을 적어서 나에게 제출하도록.”
처음 엘더가 이곳에 왔을 때 벌어졌던 일이 다시 재연되었다.
가지각색의 금액이 엘더가 돌린 종이 위에 적혀졌고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총액이 기재된 양피지가 엘더의 손에 들렸다.
“모두 합해서 금괴 1톤에 해당하는 양이군 만기일이 가지각색이지만 대략적으로 모두 3개월 정도 안에 모두 갚아야 하는데 와일리 상단은 이 금액을 모두 갚을 자산이 있는가?”
엘더의 물음에 타이킨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가짜 인장이 사용된 금괴를 이용하면 못 갚을 것도 없지만 어젯밤 리버모어 공자는 통신을 통해서 상단을 엘더에게 넘겨주고 왕국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했고 페트리는 그런 명령이 담긴 서류를 주고는 확인을 타이킨의 확인을 받아갔기에 타이킨으로서는 변재가 불가능하다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엘더 영주와는 이미 합의가 끝났기에 공금 횡령에 대한 모든 죄는 죽은 크럭스가 뒤집어쓰며 타이킨은 무사히 스타치 왕국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이 키워온 와일리 상단이 타인의 손에 넘어간다는 사실이 주는 씁쓸한 기분을 감추지는 못했다.
“타이킨은 내가 던진 어음의 총 가치를 산정해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하도록.”
엘더 영주가 명령하자 타이킨은 바닥에 흩어진 어음들을 모아서 총액과 만기를 환산하였다.
“모두 금괴 1.5톤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기는 최장 앞으로 6개월 안에 모두 돌아오게 되는군요.”
“모두 들었는가? 와일리 상단은 기한전에 모든 어음을 변제할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당장 이곳에 있는 모든 자산을 팔아치운다면 어느 정도 변제가 가능한가?”
“모두 처분한다고 해도 금괴 200kg 정도가 한계일 것입니다. 저번 영주님께서 남겨주신 금괴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경이 될 동안 자네는 무엇을 한 것인가?”
“저는 그저 물품의 운송만을 담당할 뿐 어음의 발행과 결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크럭스 상단주님이 처리하셨습니다.”
“자네는 모르는 일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여기 상단의 주인을 맡고 있는 자가 있는가? 아니면 와일리 상단과 주로 거래한 자는?”
엘더 영주의 말에 무리 속에서 있던 컨텍츠 상단의 칼이 영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제가 와일리 상단과 거래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컨텍츠 상단의 공동 책임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자네가 마탑의 마법 재료를 모두 독점했다는 컨텍츠 상단의 그 칼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그럼 물어보지 이자의 말대로 모든 상단의 거래를 크럭스가 독점적으로 처리하였는가?”
엘더의 물음에 타이킨이 간절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자신의 상단에 대량의 어음을 청구하러 왔을 때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지만 지금은 칼의 증언에 따라 자신의 죄가가 달라질 수가 있기에 긴장된 표정을 하고는 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영주와 협의가 끝났다고 해도 증인이 많은 상태에서 자신이 어음의 결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모든 혐의를 피하기는 힘들었다는 생각에 타이킨의 표정에 절박함이 어렸다.
“얼마 전 이자와 어음의 상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칼의 증언에 구경꾼에게서 타이킨에 대한 야유가 터져 나왔고 성질이 급한 자는 타이킨을 향해 돌을 던지며 타이킨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확정지은 듯했다.
엘더는 그런 구경꾼들의 야유를 조용히 시키며 타이킨에게 할 말이 더 있으면 해보라는 듯 턱으로 타이킨을 가리켰다.
“하지만!”
모두가 타이킨의 입을 바라보았지만 칼은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는지 구경꾼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말했다.
“저자와 어음의 상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크럭스가 타이킨은 그 자리를 피하고 크럭스가 와서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어음에 관해서는 타이킨 저자가 말했듯이 직접적인 처리를 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칼의 증언에 구경꾼들의 소란이 약간은 가라앉았지만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은 타이킨에게 어음의 결제를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자 다시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조용! 한쪽은 크럭스가 담당했다고 하고 한쪽은 타이킨 역시 관여했다고 증언을 하니 진실을 알 수가 없군. 타이킨 자네가 할 말은 없는 것인가?”
“어음을 받고 돈을 내어드리는 것은 제가 일정 부분 담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칼님과 같은 고액의 교환을 요구하는 분이나 처음 와일리 상단의 이름으로 어음을 발행하려는 상단과의 상담은 모두 크럭스 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모두 아시지 않습니까?”
호소하듯이 말하는 타이킨의 말에 구경꾼들이 동조를 표했다. 구경꾼들의 기억으로도 처음 어음의 발행을 허락 받을 때 모든 절차는 크럭스가 처리했으며 고액의 변제를 요청하면 그에 대해서는 크럭스가 담당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군.”
“그렇습니다. 저는 그저 어음의 상환 그중에서도 소액의 변제만을 담당했을 뿐 전체적인 구조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좋다. 우선 타이킨에게 어음의 발행에 대한 부분이나 횡령의 사실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 판단에 불만이 있는 자는 없는 것인가? 누구든지 타이킨을 통해 어음의 허락을 받은 자가 있다면 사실을 증언하도록 하라!”
엘더의 외침에 구경꾼들이 서로 수군거리면서 상의를 했지만 타이킨의 진술과 반대되는 상황을 겪은 이는 없는 듯했다.
“모두 타이킨의 말에 동의를 하는 듯하군. 그럼 문제는 와일리 상단이 어떻게 부채를 갚는가 하는 부분인데 타이킨 자네는 방법이 있는가?”
“그저 영주님과 피해보신 분의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
“타이킨! 그런 무책임한 태도가 어디 있나? 당장 일주일 후 내가 가진 와일리 상단의 어음의 만기가 돌아오는데 그렇게 두 손 놓고 있다가 손해를 본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진다는 건가?”
구경꾼중 한 명이 소리를 지르자 다른 이들도 타이킨에게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엘더 영주도 말릴 생각이 없다는 듯이 성난 구경꾼들의 반응을 방관 하였다.
“당장 책임을 지란 말이다!”
격렬한 반응을 보이던 구경꾼들 중 일부가 다시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중 일부가 타이킨의 머리에 맞았다.
타이킨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만! 자네들도 타이킨의 잘못이 크럭스에 비하면 크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이렇게 화만 풀어서는 어쩌라는 것인가?”
“저자가 발행한 어음을 모두 책임져 준다면 저희가 어째서 이렇게 화를 내겠습니까?”
“그럼 내가 저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을 묵인한다면 자네들은 와일리 상단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피해를 더 이상 묻지 않겠는가?”
억울하다는 듯이 엘더 영주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 자를 비롯해서 자리에 모인 모든 상인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 영지를 맡아서 다스린 지가 올해로 30년을 넘었네. 내가 부족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번 일은 나로서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
“아닙니다. 와일리 상단의 잘못이 어찌 영주님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영주님 덕분에 와일리 상단의 이러한 방만한 운영을 알게 되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을 해주니 정말 든든하군. 이 영지의 영주로서 자네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지, 병사들은 수레에 덮인 천을 모두 걷어내도록!”
엘더의 명령에 병사들이 끌고 온 수레의 천을 거둬냈고 수레 안에는 얼마 전 엘더 영주가 와일리 상단에서 회수해간 금괴가 한가득하였다.
“모두들 내가 얼마 전 와일리 상단의 금괴를 회수해 간 것은 알고 있겠지? 그 당시에는 영지의 상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무한정 사들인 어음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네. 나 역시 자금이 무한한 것은 아니니깐 말이야.”
진정된 구경꾼들의 반응을 살핀 엘더 영주가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사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하군. 여기 모인 상단을 비롯해서 모든 상단들이 만기와는 상관없이 어음을 상환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네. 일단 이 양피지에 총액을 적은 사람부터 어음을 가지고 와서 금괴로 교환해 가도록 이번 사태를 안정시키는 데 귀족으로서 내 명예를 걸도록 하겠네!”
엘더 영주가 귀족의 명예를 건다는 선언을 하자 구경꾼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절박한 분위기에서 놀람과 감탄이 섞인 분위기는 곧 엘더 영주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으로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손을 들어 흥분한 구경꾼들을 진정시킨 엘더 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모든 금액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기는 곤란하네. 총액의 80%는 금괴로 나머지 20%는 세금을 감면해 주는 것으로 하겠네. 그리고 내가 가진 어음의 청구를 와일리 상단으로 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영주님…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손해를 보실 것을 감수 하면서 영지의 상인을 이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분위기에 취했는지 영지의 상인 중 한 명이 끊임없이 감사의 말을 엘더 영주에게 전하자 엘더는 그런 상인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으로 훈훈한 분위기를 만드는 한편, 자리에 모인 상인 중 상당수가 통신구를 통해 이 사실을 상단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전하고는 당장 와일리 상단이 발행한 어음을 와일리 상단으로 가지고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모두가 엘더의 관대한 조치에 감사와 흥분을 느끼고 있을 때 후버와 아크바 상단에 속한 기사와 상인들은 영지 전체 상단에 퍼져서 동일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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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대량 구매의사를 타진해온 구매자가 샘플로 보여준 상품의 질에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자 엔트로 상단의 부 책임자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네이션은 상대의 트집에 대비해서 깎아 줄 생각으로 올려친 5%에 대해서 상단과 자신이 어떤 식으로 성과금을 나눠야 할지에 대해 행복한 계산을 하며 구매자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럼 어떻게 결제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총 가격은 11,655골드입니다. 하지만 뒤에 붙은 55골드는 빼고 11,600골드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음으로 계산해도 상관이 없는가?”
“물론입니다. 저희 상단은 어음에 대해서는 1% 정도의 수수료를 받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저희 상단을 자주 이용해 주신다는 약속만 해주신다면 제 직권으로 0.5% 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계산은 이것으로 하지.”
“이건… 와일리 상단의 어음 아닙니까?”
“그렇네. 뭐 문제라도 있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상대방의 태도에 네이션은 일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함을 느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눈앞에 있는 고객을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와일리 상단이 어음을 상환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영지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누구도 이 어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바로 어제 어음 거래소에서 액면 80%에 구매한 것일세! 판매한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고 말이야.”
“고객님… 멀쩡한 상단의 어음을 왜 80% 가격에 판매하겠습니까? 보면 만기일도 이미 지난 어음인데 그 가격에 파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네이션은 누군지는 몰라도 쓸모없는 어음을 넘긴 사람이 악독하다는 것과 눈앞에 있는 이 고객이 그냥 고객이 아닌 호구 고객… 줄여서 호객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그자가 나에게 사기를 쳤단 말인가? 내 이자를 가만 두지 않겠어!”
흥분해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는 호객을 네이션이 제지하였다. 혹시라도 어음을 제외할 구매 수단이 있다면 호객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가봐야 그자가 그 자리에 있겠습니까? 벌써 어디 다른 곳으로 튀었을 겁니다. 혹시 다른 지급 수단은 없으십니까?”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그자가 어음을 싸게 넘긴다는 말에 어음으로 모두 바꾸었지…….”
“이거 참… 곤란하게 되었군요. 혹시 모르니 다른 영지로 가는 관문으로 어서 가보심이 어떻습니까?”
눈앞의 호객이 사실상 거지라는 것을 알자 네이션은 태도를 바꾸어 얼른 호객을 내쫓기 위해 문까지 열어 주었고 어깨를 늘어트린 호객이 방을 나가는 순간 책상위에 놓아둔 네이션의 통신구가 빛을 발했고 다급한 목소리는 영주가 와일리 상단의 어음을 80%는 금괴로 지급을 하고 20%는 세금을 감면하는 방식으로 모두 지급 한다는 것을 귀족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방적인 통신 연결이 끝나고 과감한 영주의 조치에 네이션이 방문을 급하게 열고 막 상단의 밖으로 빠져나가는 남자를 불렀다.
“호객! 아니아니! 고객님! 고객님이 제시한 결제 수단으로 결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이션의 대답을 들은 호객 역시 몸을 돌려 네이션과 상담을 하던 방으로 날듯이 뛰어 들어왔다. 네이션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타지역에서 온 사람이 나쁜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도록 자신이 배려한 것이라며 어음의 표면 가치의 75%만을 인정해주겠다며 거래의 조건을 정했고 호객이 그 조건을 수락하는 것으로 거래는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호객을 불러 세워 거래를 마무리 지은 네이션은 호객에게 받은 어음과 기존 가지고 있던 와일리 상단의 어음을 모두 갈무리해서는 영주가 있다는 와일리 상단으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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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거만하게 책상위에 발을 올린 후버 그리고 그에게 보고를 하는 페트리와 사만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총 어느 정도 규모죠?”
“우리 쪽 조사에 의하면 최악의 상황 엘더 영주가 동원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지.”
“식량과목제의 경우 말씀하신대로 창고에 쌓이는 대로 처리를 해서 마법 가방 안에 넣고 있습니다. 마탑에서 가방들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부분은 이야기가 모두 끝났으니 걱정하지 말게. 앞으로 5년간은 나에게 빌려주기로 했으니깐 그것보다 걱정되는 건 페트리 자네인데…….”
“제가 걱정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괜한 보고를 올리지는 않아주었으면 좋겠군.”
“저는 오로지 국왕전하께 충성할 뿐입니다. 후버 님에 대한 복종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는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른 기사단원 역시 마찬가지인가?”
“당연합니다. 저희 기사단의 인원은 전부 국왕전하에게 목숨의 빚을 졌습니다. 후버 님께서 보고를 하지 말라고 하셔도 목숨을 걸고 보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연한 페트리의 말에 후버가 혀를 쯧쯧 하고 찼다.
“심각해지기는… 나의 명령이 아니라 국왕전하의 명령이네. 여기 명령서를 읽어보도록.”
후버가 건넨 명령서에는 후버와 함께한 작전에 대한 무조건 적인 함구에 대한 명령이 쓰여 있었다. 보고서도, 구술로도 그 어떤 경로로도 후버와 관계된 내용이 다른 곳으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본 페트리는 명령서를 접어서는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기사단 전체에게 명령서를 보여주겠습니다.”
“상의라도 한다는 건가?”
“통보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국왕전하의 명령만을 수행합니다.”
“좋군,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들만큼 든든한 것은 없지. 혹시 자네들 같은 인재를 발견하게 되면 나에게도 말해주게.”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입에서는 어떤 소문도 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만다 상단주, 상단주는 와일리 상단의 어음을 얼마나 가지고 있지?”
“제가 가지고 있는 양은 금괴 2톤 정도입니다. 그중 500kg에 대해서는 저희 상단이 발행했기 때문에 세상에 내놓기는 조금 곤란합니다.”
“그럼 그건 지금 당장 컨텍츠 상단을 통해서 분산해서 처리하도록 하고 1.5톤에 대해서는 계속 남겨두도록 하였으면 좋겠군. 아크바 상단이 와일리 상단을 먹어치울 명분이 필요하니깐 말이야.”
“그럼 국왕전하에게 빌린 500kg 금괴는 전혀 상환할 수 없습니다. 후버 님께서 곤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거? 상환 안 해도 돼. 일만 잘 처리되면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그래도… 후버 님께서 곤란해지실 겁니다.”
사만다가 알기에는 현재까지 후버의 일처리는 완벽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빌려간 500kg을 국왕에게 돌려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후버에 대한 국왕의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설마 국왕전하께서 한입으로 두말하시겠어? 그 부분은 내가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페트리! 국왕 전하께서는 소심하신가?”
“세상 전부를 품 안에 담으실 만큼 대범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는군.”
뭔가 더 말하려는 사만다를 손동작으로 제지시킨 후버가 페트리에게 타이킨의 행동을 주시하고 와일리 상단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부하를 시켜 그의 신분을 구속하라고 명령했다.
“협조를 한다고 하면 나에게 보고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네 선에서 처리하도록. 시기는 한 달 정도 후가 좋겠지. 국왕전하에게는 안부를 전해드리고 이 건과 무관한 재정관을 파견해서 와일리 상단과 엘더 영주에 대한 조사를 부탁드리도록 하고.”
“정확하게 어떤 부분을 조사하기를 바라십니까?”
“조사관에게 많은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정의감이 투철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소신 있는 조사관을 파견하도록 요청하게. 타이킨이 발견되는 순간 귀족의 임명서도 같이 발견되었으면 좋겠군.”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모두 일보도록 하게.”
후버의 손짓에 사만다와 페트리가 후버의 집무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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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어음의 청구를 받아주기 시작한 날 저녁 엘더 영주는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앞으로 보름간 어음의 청구를 무제한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을 하였고 주변 상상단과 영지민들은 약속을 지키는 엘더 영주를 칭송하였다.
보름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와일리 상단의 어음이 모두 해결된 것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영주는 자신이 가진 금괴 1톤 분의 어음과 청산해준 어음의 가치를 근거로 와일리 상단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제야 엘더 영주가 어음의 청구를 받아준 것이 단순히 호의로 인한 것이 아님을 상단들 역시 알게 되었지만 이미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어음을 모두 엘더에게 청구하였기에 엘더가 와일리 상단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것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와일리 상단이 해체되면 혹시라도 마탑이 마법 물품 판매 독점에 대한 재입찰을 하지 않을까 기대하던 많은 상단들은 속으로 엘더 영주에게 욕설을 뱉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마탑 역시 영지를 가진 영주의 신용도가 기존 상단들의 신용도가 높다는 것을 근거로 엘더 영주가 소유한 와일리 상단에게 지속적으로 독점판매를 하겠다는 뜻을 공지하였다.
한편 페트리가 국왕에게 와일리 상단의 파산에 대한 조사를 위해 재정관을 요청한 지 20여 일이 지나고 나서야 에드윈 르페르브라는 재정관이 와일리 상단의 파산에 대한 조사를 맡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조사관의 파견을 국왕이 주장할 때는 반응이 없던 귀족파와 국왕파는 마탑이 독점권을 유지한다고 하자 이권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인물을 추천했지만 서로의 반대로 인해 추천한 인물 모두 부적격 판단 받았다.
결국 몇 번의 내정 결정이 반복되면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에드윈 르페르브는 국왕파나 귀족파에 속하지 않는 인물로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에드윈 르페르브의 가장 큰 특징은 귀족파나 국왕파 모두 주목한 적이 없을 정도로 평범하다는 것 그리고 과거 행정 처리 기록에서 수혜자들에게 귀족파와 국왕파 가릴 것 없이 가장 많은 불복과 재심 요구를 받은 행정관이라는 것이었다.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에드윈 르페르브 남작 국왕전하께서는 무탈하시오?”
“왕국이 그렇듯이 무탈하십니다. 엘더 영주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선 여독을 풀 수 있게 자리를 마련했으니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소?”
“죄송합니다. 왕국의 재정관으로서 조사대상지의 호의를 모두 거절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이 조사를 담당한 덕분에 로비로 들어갈 돈이 굳기는 했지만 딱딱한 놈이군.’
엘더의 표정에 잠시 불쾌함이 스쳤지만 금세 미소를 회복하였다.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주시오. 협조를 아끼지 않도록 하겠소.”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거처를 알려주신다면 그곳에 머물면서 가능하면 빠르게 조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르페르브 남작이 머무를 거처는 시종에게 안내하도록 하겠소.”
“배려 감사드립니다.”
초면부터 깐깐하게 구는 르페르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엘더였지만 국왕의 명령에 의해 임명된 조사관을 홀대할 수는 없기에 시종에게 머물 곳을 안내하라고 지시한 후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엘더 영주가 가장 수상해… 이곳이 상업지구이기 때문에 엘더 영주가 다른 영주들보다 부유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일개 영주가 그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일까?’
르페르브가 이곳에 오기 전 요약된 보고서를 보고 가장 수상하게 여긴 것은 다름 아닌 엘더 영주였다. 물경 금괴 2톤에 달하는 어음의 청구를 혼자서 감당했다는 점과 엘더 영주 개인이 가지고 있는 와일리 상단의 어음액이 금괴로 따지면 1톤 금화로 따지면 333,000골드나 되었다.
‘조만간 숙소를 따로 잡아야겠어. 엘더 영주에 대한 부분을 파고들면 저들도 내 숙소를 매번 뒤질 테니.’
“내일… 와일리 상단으로 가보는 게 나을 것 같군. 엘더 영주가 이곳저곳 들쑤셔 놓았겠지만 현장에서 조사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니깐.”
혼잣말을 하한 르페르브는 자신의 짐 가방에서 버터와 치즈 그리고 빵을 꺼내서는 대충 배를 채우고 여독을 풀기 위해 잠을 청했다.
“상쾌한 아침이군.”
잠에서 깬 후 찌뿌둥한 허리를 풀면서 창밖에 영지의 풍경을 바라본 르페르브는 문득 잠자리가 참 상쾌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엘더 영주에게 남길 편지를 작성하였다.
환대의 고마움과 조사를 위해 따로 숙소를 잡겠다는 내용을 정중하게 적은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둔 르페르브는 메고 온 가방을 들고 영지안의 중급 정도의 여관에 거처를 잡고는 와일리 상단을 방문하였다.
“그러니깐 10일 정도 전부터 타이킨이라는 자가 사직서를 내고 총관 일을 그만뒀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갑자기 편지만을 달랑 두고 떠나서 제가 이곳을 임시적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수고하는군. 과거 5년분의 거래장부와 어음장부를 보여줄 수 있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영주님께서 모든 조사에 협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대신 감사하다고 전해주게.”
생각보다 충실하게 협조를 하는 엘더의 태도에 어쩌면 자신이 헛다리짚은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한 엘더지만 임시 책임자가 넘긴 서류를 천천히 살펴보면서 이상한 점이 있는가를 꼼꼼히 확인하였다.
“너무 깨끗하군… 장부에 따르면 엘더 영주가 증언했듯이 크럭스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크럭스가 자살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어음의 발행량이 너무 적은 것도 이상하고…….”
엘더 영주가 와일리 상단을 정리하면서 처리한 어음의 양은 총 2톤 대부분의 파산하는 상단이 금괴 보유량의 10배 이상의 부채에 시달리다가 파산하는 것에 비하면 엘더가 보고했듯이 크럭스라는 자가 목을 매달고 자살할 정도로 심각한 양은 아니었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그 후로 르페르브는 10여 일간 와일리 상단에서 장부들을 모두 확인해봤지만 기묘하기만 할 뿐 딱히 누군가와 연관될 만큼의 수상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뭔가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장부에 따르면 누군가 와일리 상단에서 지속적으로 상납을 받은 게 분명해.”
크럭스가 장부의 처리를 꼼꼼하게 해두기는 했지만 르페르브 역시 핥듯이 살펴본 장부를 통해서 지난 5년간 지속적으로 누군가에게 와일리 상단의 자산이 흘러들어간 경위를 포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누군가의 문제인데 말이야.”
어둑어둑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상납을 받은 자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도 집히는 인물은 없었다. 굳이 있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본 엘더 영주였지만 엘더와 연관을 지을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발견 할 수 없었다.
“이제 엘더 영주에 대한 조사를 할 차례인가?”
한달이라는 촉박한 시일안에 조사를 마쳐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기에 르페르브가 와일리 상단과 엘더 영주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여 일씩의 시간밖에 없었다.
“여기 항상 먹던 걸로 1인분만 주게.”
하루 종일 혹사한 머리와 육체가 원하는 대로 맛있는 식사를 위장 가득 채운 르페르브가 잠을 청하기 위해서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을 때 처음 느낀 것은 위화감이었다.
‘뭐지?’
혹시 모를 엘더 영주의 침입에 대비해 조사 보고서는 모두 품 안에 두고 있었지만 불쾌한 기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서둘러 없어진 물건을 점검하던 르페르브의 눈에 자신이 서랍에 껴둔 머리카락이 사라진 것이 눈에 띄었다.
‘확실히 누군가 들어갔다 나갔군.’
혹시나 지금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르페르브는 태연을 가장해서 창문을 치고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열었다. 잉크병과 여분의 깃펜만이 있어야 하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통신구 하나.
부르르르르.
르페르브가 통신구를 집어 들려고 하자 갑자기 통신구가 통신이 왔다는 신호로 몸을 떨어댔다. 순간 움찔한 르페르브가 다시 통신구를 집어 들고는 통신을 연결하자 낮선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실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누구시죠?
―두 번째 서랍을 열어보시면 찾으시는 게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내일 새벽 4시 광장에 로한이라는 남자에게 꽃을 들려서 보내겠습니다. 영주성을 조사하러 가실 때 그 아이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일방적으로 할 말만 하고 통신구의 연결이 끊기자 르페르브는 호기심에 두 번째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서랍 안에 들어 있는 한 장의 종이.
‘이것은… 귀족 임명서가 아닌가?’
마법으로 복사된 듯이 서류의 진본임을 확인해 주는 인장까지는 복사되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왕국에 근무하면서 각종 서식을 보았던 르페르브는 그 서류의 필체가 진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백작 임명서… 작위를 받는 자가 타이킨… 그런데 누가 이 서류를 인정한 것이지?’
아쉽게도 인장까지는 복사되지 않았기에 임명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뚫어지게 서류를 보던 르페르브는 이 서류가 자신을 진실로 이끌어줄 단서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서류를 품안에 갈무리 하고 여관의 1층에 내려가서 확인한 시간은 오후 10시 약속한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약 6시간 일방적으로 정해진 약속 시간과 장소에 가야 할지 아니면 무시해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던 르페르브는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해를 볼 것은 없을 테니.’
고민의 끝은 약속된 장소에 나가는 것, 3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나가서인지 광장에는 통신구에서 말한 꽃을 들고 있는 한 명의 남자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르페르브가 다가가야 할지 아닌지 마지막 고민을 하는 동안 상대편에서 르페르브를 알아보았는지 바닥에 꽃을 버리고는 르페르브와 길게 눈을 마주치고 광장의 한쪽으로 태연하게 걸어갔다.
‘따라오라는 건가?’
이끌리듯이 르페르브가 로한이 사라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나오는 갈림길에 르페르브가 당황할 무렵 옆에서 로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페르브 씨, 이쪽으로.”
로한의 목소리를 듣고 들어간 것은 허름한 폐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있는 거미줄을 피해서 로한이 앉아 있는 탁자 앞에 가자 로한이 르페르브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직하게 이 사건을 수사할 것인가요?”
“물론…이지요.”
“말씀은 낮추셔도 돼요. 저는 그저 평민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르페르브 님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누가 너를 보낸 거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저 이 일의 진실이 알려지길 바라는 분이 보낸 것뿐이에요.”
“진실이라… 모두가 자신의 말은 진실이라고 말한단다.”
“하지만 모두가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 않나요? 저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이걸 보세요.”
로한이 책상 위에 임명장을 올려 두었다.
“이 임명장의 후견인 그리고 임명장을 요청한 자가 누구인지 아시겠죠?”
로한의 말에 르페르브가 손에 들고 있던 임명장을 촛불에 비추어 보았다. 그리고 선명하게 나타나는 엘더 영주의 인장.
“엘더… 영주?”
“맞아요. 엘더 영주 그자가 크럭스를 죽이고 귀족으로 임명한다면서 타이킨을 꼬셨어요. 그리고 타이킨도 어딘가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타이킨이 죽었다고? 그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목숨보다 중요한 귀족의 임명장이에요. 르페르브 님이라면 임명장의 진본을 쉽게 누군가에게 줄 것 같은가요?”
“그럼 너는 이 임명장을 어디에서 얻게 된 거지?”
“저의 주인님이 저에게 가져다 드리라면서 주셨어요. 타이킨과 막역한 사이인 주인님은 타이킨 대신 그 문서를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타이킨이 약속한 시간이 문서를 찾아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의 주인님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서류를 르페르브 님께 드리는 거구요.”
“너의 주인님은 누구니?”
“그건 말씀 드릴 수 없어요.”
“그럼 크럭스가 영주에게 살해당할 거라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영주는 크럭스가 목을 매달아서 자살했다고 했을 거예요.”
“모두의 앞에서 로프가 목에 걸린 크럭스의 시신을 공개한 것은 영주였으니 당연히 그런 결론이 나왔지.”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크럭스의 시신을 찾아보면 심장에 조그만 구멍이 난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바늘과 같은 작은 조각이죠.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크럭스의 시신을 확인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거예요.”
“그 부분은 따로 조사를 해야지 믿을 수 있겠구나.”
“맞아요. 그래서 주인님은 르페르브 님을 믿는다고 했어요. 단서만 드리면 진실을 찾아 줄 거라고 하셨구요.”
“나를 믿어주는 너의 주인님이 누구인지 궁금하구나.”
“죄송해요. 그건 말해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지금 르페르브 님이 위험에 처한 것은 말씀드릴 수 있어요.”
“위험이라니?”
“르페르브 님은 너무 열심히 조사를 하고 계세요. 아마 와일리 상단의 장부에서 무언가 수상한 것을 발견하셨을 거예요.”
르페르브는 로한의 말에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문제에요. 자신과 와일리 상단의 관계가 밝혀지면 엘더 영주는 곤란해 질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장부를 르페르브 님이 자세히 조사한다면 영지를 벗어나는 순간 추살대를 보낼 거예요. 르페르브 님은 우수하고 성실하니까요.”
“어떻게 그걸 장담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르페르브 님은 엘더 영주가 와일리 상단의 어음을 변제하기 위한 돈이 사실상 출처가 없다는 것을 금방 눈치채실 거예요. 최소 금괴 2톤만큼의 돈에 대해서는 출처가 없죠.”
“나머지 1톤은?”
“와일리 상단을 방문한 첫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엘더 영주가 타이킨으로부터 금괴를 받아갔죠.”
그제야 르페르브는 모든 사실이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와일리 상단의 이름으로 발행된 어음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해 금괴를 털어간 엘더 영주의 모습.
그렇게 확보한 금괴로 나머지 어음을 결제해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어음을 근거로 와일리 상단을 통째로 먹어버렸다는 사실이 르페르브의 머리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공모자는 타이킨이에요. 엘더가 귀족의 자리를 약속하는 대가로 대량의 어음을 허위 발행 받은 거예요. 아마도 엘더는 귀족의 임명서를 폐기하려고 했을 거예요. 그래서 타이킨을 죽였을 거구요. 하지만 타이킨은 귀족 임명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죠.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에서 르페르브 님이 영주성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장부를 들쑤시면 엘더는 분명히 르페르브 님을 죽이려고 할 거예요.”
“그래서 이 임명장을 가지고 국왕전하에게 보고하라는 거니? 그렇게 해봤자 근거가 부족하단다. 귀족의 죄는 그렇게 쉽게 밝혀지는 게 아니야.”
“돌아가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여기 제가 있는 거구요. 사실 저는 한번 본 것은 뭐든지 순식간에 외울 수 있어요. 혹시 지금 와일리 상단을 조사한 보고서를 가지고 계신가요?”
“가지고 있지만…….”
보고서를 언급하는 로한의 말에 르페르브가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정말… 아직도 저와 주인님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 저는 엘더 영주의 영지에서 목숨을 걸고 르페르브 님을 만나러 왔다구요.”
르페르브 역시 로한이 자신을 만나는 것만으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르지는 않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보고서를 보여주는 것과 미안한 감정은 별개라고 생각했다.
“좋아요. 여기 이 롱스워드의 끝을 제 심장에 대고 있으세요. 힘이 부족하시다면 목에 대셔도 되구요. 제가 보고서를 가지고 도망간다고 한들 어차피 르페르브 님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니 다시 작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수상한 행동을 한다면 저를 죽이셔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목숨까지 건다는 말에 르페르브의 마음이 흔들렸다.
“좋다. 보고서를 빼앗고자 한다면 이곳으로 유인해서 나를 죽이고 빼앗는 것이 더 확실할 테니깐.”
고민이 끝났는지? 아니면 로한의 치근덕인지 르페르브가 품 안의 보고서를 로한에게 건네주었다.
르페르브에게 건네받은 보고서를 대충 보듯이 한 페이지씩 넘겨본 로한이 다시 보고서를 르페르브에게 넘겼다.
“천천히 말할 테니까 제가 기억한 것과 르페르브 님의 보고서가 다른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로한이 천천히 보고서의 내용을 구술하자 신기해하던 로한의 눈빛이 점차 경악으로 바뀌었다. 무려 5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잠시 본 것만으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우는 로한의 능력… 게다가 일부분 적혀 있는 회계적 숫자의 나열 역시 막힘없이 줄줄 외는 모습은 수제들만이 모여 있는 왕립아카데미에서도 보지 못한 능력이었다.
“…이상으로 와일리 상단에 대한 조사를 1차로 마친다. 맞지요? 저는 한 번 본 것은 무조건 외울 수 있어요.”
“그래, 대단한 능력을 가졌구나.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르페르브 님이 살기 위해선 그리고 보고서를 국왕전하에게 드리기 위해서는 엘더 영주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돼요. 따라서 엘더 영주의 자료를 와일리 상단에서 그랬듯이 샅샅이 훑어보는 것은 안 될 거예요. 단 하루, 하루 만에 모든 자료의 검토를 끝내야 돼요. 그리고 적당히 엘더 영주가 베푸는 성의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야 하구요.”
“갑자기 그렇게 태도가 변하는 것이 더 수상하지 않을까?”
“아니에요. 와일리 상단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서 열심히 하는 척을 했다고 하시면 돼요. 마찬가지로 엘더 영주의 영주성에서는 제가 모든 자료를 외울 수 있도록 하루의 시간만을 주고 하루가 끝나는 시점에 저녁식사를 부탁한다고 하면서 그런 뜻을 은근히 내비치면 될 거예요.”
“그를 방심하게 해야 한다는 거니?”
“그렇죠. 그리고 남은 4일간은 음식이나 술을 즐기면서 조사 따위는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될 거예요.”
“하지만 그건 조사관으로서…….”
“중요한 건 조사관으로서 국왕전하의 충실한 눈과 귀가 되는 것이 아닌가요? 대의를 생각하세요.”
대의라는 말에 르페르브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좋아… 하지만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너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지?”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주인님께 건의는 말씀은 할게요.”
“좋아 그럼 너와영주성에 함께 갈 때 너는 누구로 소개하지?”
“그냥 잡일을 해주기로 고용된 심부름꾼이라고 하세요. 아침 8시 영주성 앞에서 기다릴 테니 8시 반에 오세요. 이름은 한스구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내가 작성한 보고서가 너의 주인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주인에게 전해주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외운 것을 필사하여 드릴뿐 앞으로 보고서를 보여달라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예요.”
“그래 그 말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럼 이따 봬요.”
인사를 한 로한은 르페르브를 두고 허름한 집을 먼저 빠져 나갔고 르페르브 역시 주변을 확인하고는 시장에 가서 간단한 빵과 버터, 치즈를 사서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내가 더 위험한 사실인가?’
그저 간단한 뇌물에 얽힌 사건이라면 르페르브가 폭로를 해보았자 귀족들 간 쉬쉬하며 끝날 일이겠지만 작위의 판매와 관련된 일이라면 르페르브의 품에 있는 한 장의 종이가 가지는 파급력은 무시 못 할 만한 수준이 될 것이 확실했다.
‘일단 국왕전하께 이 사실을 알리는 게 중요해.’
당장 정체를 모르는 자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나 목숨을 위해서 대충 조사를 하는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르페르브에게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대의를 생각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르페르브는 자신이 작성하였던 보고서를 대신해 영주에게 보여줄 간단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와일리 상단에게서 아무런 문제점을 찾을 수 없다는 보고서를 작성하자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 로한과 약속한 시간이 될 때쯤 돼서야 르페르브는 새로운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조금 늦겠군.”
르페르브가 걸음을 서둘러 영주성에 도착하자 로한이 말한 대로 경비병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한스니?”
르페르브의 말에 로한이 고개를 끄덕였고 르페르브는 경비병 앞에서 10실버를 지급하고 경비병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럼 안내해주게.”
르페르브와 로한이 병사를 따라가자 미리 준비했는지 영주가 푸짐한 아침 식사를 차리고는 르페르브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어서 오시게. 아직 식사 전이라면 함께 드는 것이 어떤가?”
“그렇게 하지요.”
“외투는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집사가 르페르브에게 외투를 달라고 하자 르페르브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는 집사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자는 누구인가?”
“와일리 상단에서 일을 하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간단하게 서류의 정리를 도와줄 시종을 고용했습니다.”
“괜찮다면 영지에 머무는 동안 내가 시녀를 붙여줄 수도 있네. 충성심이 강해서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줄 텐데 어떻소?”
약간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엘더.
“영주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자를 고용했으니 내일부터 시녀의 도움을 받기로 하지요.”
승낙을 하는 르페르브의 모습에 엘더가 웃음을 지으며 착석을 권유했고 집사는 로한을 데리고 하인과 하녀들의 식사가 준비된 곳으로 안내했다.
“조사를 상당히 열심히 한다더군. 어떤가 와일리 상단에 수상한 점은 있소?”
“글쎄요…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의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수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의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수상해 보이는 법이지 젊은 나이에 벌써 그런 걸 체득하다니 훌륭하오.”
“제가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깨끗한 천에 먼지를 털어내라고 강요하는 꼴이지요. 먼지를 찾아내지 못하면 무능력하고 비난을 받으니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지요.”
“그거 참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별로 없나 보오?”
“아침부터 푸념을 늘어놓는 걸로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오, 솔직한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네. 나도 많은 재정관리인을 두고 있는 만큼 그들을 다룰 때 참고 하도록 하겠소.”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밀가루 포대를 만지다 보면 밀가루가 묻는 법인데 세상 사람들은 곳간을 채운 밀가루 포대에는 관심이 없고 밀가루가 얼마나 손에 묻었나만 신경을 쓰니 제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명답이군, 명답이야! 그런 조사관의 고충을 위로하기 위해서 만든 자리이니 식사를 즐겨주시오. 내일부터는 식사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의 고충도 풀 수 있도록 하녀장에게 잘 이야기해두지.”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
르페르드의 답에 크게 웃은 엘더가 식사할 것을 권하자 르페르브는 사양하지 않고 2시간의 긴 식사를 엘더와 함께 즐기고는 엘더가 마련한 방안에서 서류를 검토한다는 말을 하고는 아무도 들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엘더는 르페르브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말에 인상이 굳어졌지만 금세 알겠다며 르페르브의 등을 두드려주고는 손수 서류더미로 가득찬 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영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녁때도 즐거운 식사 기대하겠습니다.”
“한입으로 두말하겠소? 술은 좀 하시오?”
“마다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소? 그럼 이따 한잔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였으면 좋겠소.”
“기대하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르페르브가 문을 닫자 엘더는 조용히 집사장에게 르페르브의 외투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영주님 여기 있습니다.”
집사에게서 외투를 받아든 영주는 외투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별 볼일 없는 금화와 은화부터 여러 가지 잡다한 잡화들과 먼지들을 털어도 영주가 찾는 물건이 없자 영주가 외투를 집사에게 돌려주었다.
“저… 영주님.”
“외투는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잘 걸어두도록 하게.”
영주의 명령에 따라 외투를 옷걸이에 걸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이 모양새를 다잡던 집사의 손끝에 이상한 느낌이 느껴졌다.
“외투에서 뭔가 뻣뻣한 게 느껴집니다.”
영주가 다시 외투를 집사에게서 빼앗아 가슴 부분을 만져보자 확실히 뭔가 이물감이 느껴졌고 영주가 뒤집어서 외투를 살펴보자 안감에서 역시 약간의 이물감이 느껴졌다.
“마법사를 불러오게.”
영주의 명령에 따라 집사가 마법사를 불러왔고 영주가 했듯이 외투의 안감을 만져보던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자 르페르브의 외투에서 천으로 감싸인 종이 뭉치가 떨어져 나왔다.
“이게 무언가?”
“매직 포켓입니다.”
“아! 이게 바로 그 매직 포켓이로군.”
조사관들이 중요한 서류를 숨기기 위해 가지고 다닌다는 매직 포켓을 확인한 엘더는 어서 마법사에게 천에 걸린 봉인도 풀어달라고 명령했고 주저하던 마법사는 엘더 영주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말에 마지못해 봉인까지 풀어주었다. 봉인된 천 안에서 나오는 15쪽 분량의 보고서를 천천히 살펴본 엘더가 보고서를 다시 천으로 감싸고는 마법사에게 봉인과 안감에 붙여둘 것을 명령하자 마법사는 엘더가 원한대로 보고서를 봉인하여 안감에 붙여주었다.
“집사는 이만 돌외투를 잘 보관하도록 하고 저녁식사에는 만전을 기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영주님.”
집사가 방 안으로 돌아가자 마법사는 보고서의 내용이 궁금했는지 엘더에게 물었다.
“저 보고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별거 없네. 그게 핵심이지.”
대답을 들은 집사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 이상에 대한 내용은 자신이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질문을 엘더에게 하지 않았고 엘더는 저녁 만찬에 대해 주방으로 내려가 직접 참견하는 것으로 르페르브에 대한 중요성을 영주성에 속해 있는 모든 사용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엘더가 르페르브의 접대에 신경을 쓰는 동안 엘더가 마련한 집무실에서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르페르브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서류를 과거부터 순차적으로 살펴 볼 수 있게 모으면 로한은 자리에 앉아 서류를 하나하나 머리에 입력하고 있었다.
의외로 둘의 호흡이 잘 맞고 있지만 아무리 한 번 보면 모두 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로한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시간이라는 것은 필요했다.
점심까지 거르고 작업에 매달렸건만 시간이 부족할 듯이 보였다.
“가능할 것 같은가?”
“지금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긴 합니다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더 필요한가?”
르페르브의 질문에 대충 남은 서류의 양을 눈대중으로 살펴본 로한이 한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 정도는 내가 영주에게 말하도록 하지.”
“그럼 부탁드립니다.”
한 시간여가 더 필요하다는 로한의 대답을 들은 르페르브는 서류를 정리하는 속도를 더 높이기 시작했다.
로한이 필요한 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영주와 늦은 티타임을 가질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나고 르페르브는 로한이 두어 시간 동안 처리해야지 사용 가능할 양의 서류를 정리해두고는 엘더 영주를 찾아가서는 한가한 티타임을 가지며 보는 눈이 있으니 한 시간 정도 저녁을 미룰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엘더는 흔쾌히 르페르브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호의와 너그러움을 과시했다.
“대충 한 시간 정도 시간은 벌었네.”
“감사합니다. 최대한 예정보다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닐세. 이제 자네를 방해하지 않겠네.”
이후 르페르브는 묵묵히 서류를 정리하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할뿐 로한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걸지 않았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로한이 마지막 서류를 넘기자 르페르브가 그 마지막 한 장의 서류를 다른 서류더미위에 올려두었다.
“30분이나 빨랐군.”
“르페르브 님 덕분에 겨우 제시간에 끝낼 수 있었습니다.”
“아니야. 자네가 고생이 많았지… 막 일을 마친 사람에게 물어보긴 미안하지만 언제쯤 복원된 서류를 확인할 수 있겠는가?”
“수도로 떠나가기 직전에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를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찾아갈 테니까요.”
“알겠네. 자네의 주인에게 전해주게 내가 자네를 믿은 만큼 자네의 주인도 나를 믿어주었으면 좋겠다고.”
“꼭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르페르브가 시종을 부르는 줄을 흔들고는 시종에게 모든 일이 끝났다는 말을 전하자 엘더가 직접 르페르브가 있는 방으로 와서는 로한을 시종에게 맡기고는 르페르브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신경을 좀 썼으니 즐겨주기를 바라겠소.”
“넘치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엘더가 식사를 시작하자 르페르브 역시 조용히 자신의 몫의 식사를 했고 약간의 환담을 곁들인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차와 함께 간단한 쿠키가 나오자 엘더가 다소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의 영지의 재무 상태를 보니 어떻소?”
“어찌 서류 쪼가리로 영주님의 영지를 평가하겠습니까? 제가 이곳에서 보고 겪은 것이 영지의 모습이겠지요.”
“그렇소? 그럼 조사관께서 겪으신 우리 영지의 모습은 어떻소?”
“상인들이 모인 영지답게 매우 활기차 보였습니다.”
“그럼 국왕전하에게 보낼 보고서는 어떻게 할 셈이오? 그저 느낌만을 쓸 수는 없지 않소?”
“사실 국왕전하께서 직접 읽어 보시기야 하겠습니까? 사실 저로서는 국왕전하께서 굳이 이곳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이오?”
소문과 다른 르페르브의 태도에 엘더는 당황을 느낄 정도였다.
“크럭스라는 자나 와일리 상단이라는 곳이나 결국 평민들이 세운 상단이 아닙니까? 평민들이 하는 일이 원체 그렇지 않습니까? 불완전한 존재들이지요. 그런 불완전한 것들이 저지를 잘못을 영주님께서 수습해 주고 계신데 그런 영주님을 조사하라는 명령의 뜻은 아마도…….”
“아마도 무엇이오?”
“아마도 귀족파나 왕당파에게 이번 영주님의 와일리 상단의 인수가 공정한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서 상계를 어지럽히지 않으시기 위한 의도가 아닌가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
“그저 와일리 상단의 장부를 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사에 허용된 시간을 생각해볼 때 조사를 위한 조사가 아닌 면죄부를 위한 조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소?”
“그렇습니다.”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엘더 영주의 말에 르페르브가 담담하게 긍정했다.
“이거… 국왕전하께서 의심을 하시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면죄부를 위한 조사라고 생각한다니 말만이라도 고맙구려.”
“아마도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 부터는 딱히 영주님의 회계장부를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목적이 확실한 조사에 영주님의 개인적인 재정 정보를 아는 것이 저에게도 부담스럽군요.”
“그럼 오늘부로 조사를 중단하고 수도로 올라간단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조사하는 척은 해야겠지요. 앞으로 5일간 이곳에서 신세를 졌으면 합니다.”
“그것은 편한 대로 하시오. 원한다면 숙소에서 짐을 가져다주겠소.”
“아닙니다. 여관에는 미리 돈을 지불해 두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겠소. 조사에 대한 부담이 덜어졌으니 오늘은 한번 회포를 풀어보는 게 어떻겠소.”
르페르브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엘더가 시종을 부르는 벨을 흔들자 각종 안주거리와 함께 화려한 술상이 순식간에 식탁 위에 펼쳐졌다.
“앞으로 수도에 올라갈 때까지 르페르브 조사관은 내가 책임지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영주님.”
결국 르페르브는 피로와 알콜의 기운으로 완전히 곯아 떨어졌고 엘더가 공언한 대로 르페르브가 엘더의 영주성에 머무는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르페르브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는 길에 머물렀던 여관에 들러서 혹시 모를 로한이 남긴 흔적을 찾아보았고 기대한 대로 두 번째 서랍 안에 마법주머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작성된 엘더 영주의 회계장부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서류를 확인한 르페르브는 수도로 돌아가기 위한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엘더의 영지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