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설정
아스트라를 만나고 아크바 상단에 마련된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후버는 방 전체를 사일런스 마법으로 감싸놓고는 타이킨 총관의 수정구로 연락을 시도하였다.
기존 타이킨 총관과의 통신을 위해 사용하던 통신구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통신구를 사용해서 연결을 하자 시간이 조금 지난 후 타이킨 총관이 대답하였다.
―흠흠… 누구십니까?
“오랜만이군.”
목소리 변조 마법을 통해서 기전에 들었던 의문의 남자의 목소리가 후버의 입에서 나왔다.
―아니… 저에겐 어쩐 일이십니까?
“다행이군. 지금 자네의 곁에 누군가 있는가?”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됐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이번일이 끝나면 자네에겐 백작위를 약속했지. 크럭스에게는 무슨 자리를 약속했는지 기억하는가?”
―공자님의 직속 기사단의 단장자리와 미래 후작 자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기억력이 좋군… 그런데 말이야, 그 후작의 자리라는 것이 자네도 알다시피 한정되어 있네. 반면, 그 자리를 가지고자 하는 자들은 많지.”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후작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줄 것을 약속하는 것은 충성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수단인데… 크럭스 그자에게 후작위를 주면 다른 자들의 충성은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둔하군… 그러니 자네가 크럭스에게 이용만 당하는 거야. 일단 이걸 한번 들어보도록 하게.”
후버는 크럭스의 통신 내용을 녹음한 것을 타이킨이 들을 수 있도록 틀어주었다.
5분여간 녹음 파일이 재생되는 동안 수정구 너머의 타이킨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크럭스 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자를 테스트하…….
“그만, 후작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고 말을 했을 텐데… 그리고 모든 잘못은 관리자의 잘못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저는 그저 크럭스의 지시를 따른 죄밖에 없습니다.
“그럼 크럭스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면 좀 더 일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건가? 자네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가?”
―믿어주십쇼, 공자님.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민이 되는군… 의지는 알겠으나 타이킨 자네가 크럭스의 모든 업무를 파악하고는 있는가? 크럭스를 제거해 버렸는데 자네가 일처리 하나 똑바로 못하면…….”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내 말을 중간에 끊지 말았으면 좋겠군. 자네의 능력 어떻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는가?”
―그게… 방법을 말씀해 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방법이라…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하지만, 자네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무엇입니까?
후버는 잠시 뜸을 들이듯이 20부터 천천히 숫자를 거꾸로 세었다. 지금까지는 타이킨 총관을 정신없게 만드는 것이라면 지금은 타이킨에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줄 필요가 있었다.
“일주일 후 내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그에게 지금까지 자네가 파악한 상단의 운영방법에 대해서 상세하게 적도록 하게나. 자네가 이 일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보고 평가하도록 하지.”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자가 자네에게 금괴를 보관할 새로운 장소를 알려줄 거야. 거리는 상단에서부터 20km 안으로 정하지. 상단 안의 금괴를 제외한 모든 금괴는 그곳으로 옮겨두도록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가?”
―아시다시피 금괴의 양이 너무나 많아서 언제라고 확실히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능력의 한계인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겠군.”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십쇼.
후버가 통신을 일방적으로 끝내려고 하자 타이킨이 다급하게 후버가 통신을 끊는 것을 막고는 생각에 잠겼다.
‘크럭스가 모르게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시간보다는 얼마나 은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할 수 있는가가 문제야… 하지만 너무 늦게 된다면…….’
“연결이 끊긴 건가? 아니면 능력이 없는 건가?”
―10일. 딱 10일만 주시면 모두 끝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무언가?”
―금괴의 운반은 저 혼자만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운송 팀의 손을 빌려야 하는데… 그들을 활용하기 위해서 리버모어 공자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네가 그저 내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 그들이 자네의 말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들의 직속상관이 크럭스인데도?”
―그 부분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 이곳에 부임해서 놀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제 능력을 믿어주십쇼.
“좋아, 한번 믿어 주도록 하지. 모든 일이 끝나면 보고하도록 하게. 그리고 내 사람을 몇 명 보내도록 하지.”
할 말을 모두 마친 후버는 통신을 종료하고는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에 대해서 생각했다.
‘타이킨이 크럭스와 작당질을 하지 않는다면… 뭐 결과는 보름쯤 안에 날 테니깐…….’
후버가 타이킨의 가능성에 대해서 점치고 있을 때 타이킨은 통신구를 책상 한쪽에 올려두고 생각에 잠겼다.
“일단 질러두긴 했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군. 리버모어 공자님께서 사람을 보내주신다고 했는데 몇 명이나 보내 주실지가…….”
양피지 위에 여러 가지 숫자를 휘갈겨 쓰던 타이킨은 머리를 쥐어짜다 말고 집무실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일단… 금괴의 운송을 담당하는 자들을 구슬려야 한다. 리버모어 공자님의 사자가 올 때까지 앞으로 일주일. 그 안에 모든 것을 파악하고 구슬려 두려면… 크럭스… 당신이 나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나도 당신을 더 이상 상관으로 생각하지 않겠어!’
후버가 내린 두 가지 지시… 타이킨 총관은 그 지시를 따르기 위해 동분서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한 명, 두 명 왕국의 기사들이 시간 차이를 두고 상인으로 위장해서 아크바 상단으로 모여서 20명 정도의 왕국기사들이 아크바 상단으로 도착하자 후버는 그들을 사열해 놓고 지시사항을 내리기 시작했다.
“군기가 든 모습이 보기 좋군. 국왕전하께서는 안녕하신가?”
후버의 물음에 그들을 대표하는 한 명의 기사가 대신 대답을 하였다.
“무탈하십니다.”
“자네가 이들을 대표하는 모양이군. 이름이 무엇인가?”
“그렇습니다. 페트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로열나이트 1기사단의 기사단장을 맞고 있습니다.”
“좋아, 자네들은 이제부터 적국인 스타치 왕국의 리버모어 3왕자의 직속기사단의 기사단장이다. 이해하겠나?”
“옛!”
비록 주변을 고려해서 대답 목소리는 작았지만 20명이 모두 일치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 기사단의 높은 질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무덤까지 그 비밀을 가져가야 한다. 자네들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마쳐진다고 해도 비밀이 새어 나가는 순간 왕국의 혼란을 피할 수는 없게 된다.”
후버로서는 와일리 상단의 일이 끝나면 더 이상 이 일에 관계하지는 않겠지만 외국에도 풀린 금괴를 모두 회수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대들의 충성심을 믿지 못하지도 않고 국왕의 기사에 대해서 충성심을 물을 권리도 나에게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좌중을 한번 둘러본 후버가 페트리를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자네들 간의 서열관계는 모두 무시된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와일리 상단의 타이킨 총관의 지시를 무조건 따르도록 한다. 불만 있는가?”
“없습니다.”
“좋아, 페트리 기사단장은 리버모어 공자의 사신이 되어서 타이킨 총관과 밀접하게 관계하면서 그의 지시를 따르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용병으로 와일리 상단에 고용된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후버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기사들은 복장을 다듬고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고 페트리는 아크바 상단을 나가서는 와일리 상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공자님께서 보내서 왔소.”
타이킨의 집무실 안까지 들어온 페트리는 손님의 접대를 위해 마련된 소파에 몸을 파묻고는 한참 서류와 씨름하고 있는 타이킨 총관에게 말했고 페트리의 기별을 느끼지 못한 타이킨은 깜짝 놀라서는 페트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요?”
“공자님이 보내서 왔다고 했다.”
“아! 그렇다면.”
“나한테 줄 것이 있을 텐데.”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끝납니다.”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 가면서 정리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지 타이킨은 깃펜 끝이 휘날리도록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적어나갔고 페트리는 가만히 타이킨이 보고서를 완성하기를 기다렸다.
“공자님께서 왜 타이킨 총관님을 좀 더 신임하시는지 알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페트리의 말에 타이킨이 잠시 깃펜을 멈추고는 페트리에게 되물었다.
“보고서를 급하게 쓰면서도 글자가 정자로 쓴 것만큼 깔끔하군요. 오와 열도 맞추어져 있구요. 처음 뵙지만 매우 꼼꼼하신 성격이신 것 같습니다. 총관님과는 호흡을 잘 맞출 수 있겠다는 기대가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페트리가 미소를 지으며 타이킨을 띄워주는 말을 하자 타이킨도 마주 미소지으며 다시 깃펜을 빠르게 놀렸다.
“사실 공자님께서 마지막에 크렙스 왕국의 담당자를 바꾼다고 했을 때 불안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총관님을 뵙고 보니 짧은 순간이지만 믿음이 가는군요.”
“너무 저를 잘 봐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공자님께서 왜 이곳의 담당자를 바꾸려고 했는지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지속적인 습격을 받고 주변 상단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더군요.”
“부끄럽습니다만… 아직도 적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타이킨 총관님을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실 타이킨 총관과 저는 일종의 운명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입니다. 크럭스 그자가 내정된 위치가 어떤 자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의 상사로 와서 다음 작위까지 내정된 상태였습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타이킨이 이해했다는 듯이 감탄사를 터트리자 페트리는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크럭스 그자가 만약에 내 상사로 왔으면 최소 5년 이상은 우리 기사단이 세운 공이 모두 그자의 공이 되겠지요. 타이킨 백작님, 저와 백작님은 잘 지낼 수 있을 겁니다.”
“백작님은 무슨 아직은 그렇게 부를 만한 위치가 아닙니다.”
“모두 공자님의 뜻입니다. 다음에 제가 올 때는 임명서를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류의 작성을 다 마친 타이킨이 페트리에게 서류를 넘기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개 드십쇼, 백작님. 계급으로는 이제 곧 백작님이 저보다 높지 않습니까? 이러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마지막까지 타이킨을 띄어준 페트리는 타이킨이 건네준 서류를 받고는 자신이 가져온 서류를 타이킨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들어올 때 그랬듯이 조용히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 서류에도 들어 있겠지만 내일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넘겨준 명단에 있는 자들은 내일까지 확실히 처리하도록 하지.”
*
*
*
와일리 상단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담 너머에 모인 총 21명, 그중 후버가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주의사항에 대해 기사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모두 인상착의와 복장은 파악했겠지?”
“옛!”
“우리 쪽에서 넣어둔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치명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크럭스의 최측근 15명 중 10명 이상은 확실하게 처리하고 총 30명은 처리하도록.”
“문제없습니다.”
후버는 잔뜩 소리를 죽이고 대답하는 기사들에게 수신호로 지시를 내리고는 자신도 자리를 잡았다. 목표는 크럭스를 만날 때 보았던 기사들과 와일리 상단에 오랫동안 근무했던 병사와 기사들 그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시끄럽게 공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으아아아악!”
후버가 타이밍을 재는 동안 반대편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첫 공격의 신호이자 본격적인 침입을 알리는 신호음에 후버와 후버의 뒤를 따르는 5명의 기사가 담을 넘었다.
“좌우로 산개하여 모퉁이에서 합류한 후 크럭스의 집무실 방향으로 달린다. 비명 소리가 30번 들리면 명령 없이 퇴근한다. 죽이더라도 비명 지를 시간을 주도록.”
잔인한 명령이었지만 서로 떨어진 기사 간의 전투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기에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우로 흩어졌고 후버는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떠올라 전황을 살폈다.
눈을 감고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듣던 후버는 먼저 타이킨의 집무실로 파이어볼 한 발을 날렸다.
‘이 난리 중에도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건가?’
지금까지 후버는 습격이 있을 때마다 내부에 있어서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없었지만 공중에서 살펴보는 지금은 병력들의 움직임이 한눈에 보였다.
‘타이킨 총관에 대한 보호는 완전히 무시하는군.’
경계를 서던 기사들 중 일부가 크럭스의 집무실을 지키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지만 타이킨 총관이 있는 곳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후버가 밀실에서 크럭스와 함께 보았던 기사들 중 5명을 포함해서 10여 명 가까이 되는 기사들이 크럭스의 집무실을 에워싸듯이 보호하는형국 후버는 그런 기사들이 모여 있는 집무실 방향으로 화이어볼을 한 발 날렸다.
쾅!
좀 전보다 강한 폭발음이 와일리 상단 전체로 퍼져나갔고 후버를 따르는 기사들의 걸음이 크럭스의 집무실방향으로 바쁘게 이동했다.
―크럭스를 처단합니까?
―아니, 크럭스에게는 겁만 주도록. 목표는 어디까지나 주변 기사들의 확실한 처리다. 현재까지 20명 정도의 기사를 처리했으니 앞으로 딱 10명만 처리하도록.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페트리의 짤막한 보고를 듣고 난 후버는 이제 크럭스의 집무실에 거의 접근한 기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구지?”
지붕 위에서 꾸물거리는 한 명의 인형이 후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달밤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물의 경계선위에서 꾸물거리는 움직임… 낮이었다면 마법으로 확대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어두움으로 인해 그저 형체만 구분할 수 있을 뿐이었다.
후버가 좀 더 가까이 가서 인형의 정체를 살피려는 찰나 포복을 한 채 꾸물거리던 인형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하는 거지……?”
왠지 모를 불안한 느낌에 후버가 공중에서 몸을 멈추고 인형의 행동을 관찰하는 찰라 인형의 팔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달빛의 반사가 느껴졌다.
“큭!”
순식간에 왼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후버가 공중에서 바닥으로 떨어졌고 간신히 땅에 부딪히기 직전에 쉴드마법을 사용해서 온몸으로 낙하의 충격을 흡수하는 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다.
쿵!
주변을 울릴 정도의 소음과 함께 날아가려던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후버가 왼쪽 어깨의 상처 부분을 매만졌다.
‘씨발, 이거 완전히 뚫린 것 같은데?’
그 정도 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것은 활이나 석궁 혹은 마법 중 하나,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으니 당연히 마법은 아니기에 당연히 화살이 어깨에 박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화살 대신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다행히… 뼈가 뚫린 것은 아니군.”
상처 부위는 어깨보다 약간 아래의 팔 부분 뼈에 맞지 않는 대신에 화살이 살과 근육을 꿰뚫고 나간 듯 왼팔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일단 지금 상황을 알리고 후퇴를 해야 한다.”
오른쪽 팔로 오른쪽 후드 주머니에 넣어둔 통신구를 뒤지던 후버의 표정에 낭패감이 어렸다. 왼팔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느끼지 못했지만 품 안의 통신구 역시 땅에 떨어지면서 파손되었는지 손끝에 날카로운 느낌과 함께 가슴이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전후좌우를 살펴보는 후버의 시선에 전면의 한 명의 인형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옥상의 그놈인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상대의 정체… 아니, 정체라고 하기에는 가지고 있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지만 어쨌든 점점 다가오는 그자가 후버를 공격한 자인 것은 틀림이 없는 듯했다.
‘와일리 상단에 이 정도 실력을 가진 놈은 없을 텐데…….’
상황에 맞지 않는 호기심이 후버의 멍한 머리를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대충 마법으로 지혈을 하고 마법 가방 안에서 꺼낸 포션을 붓는 것으로 응급처치를 한 후버는 눈앞 외에 다른 쪽에도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보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밤마다 상단을 습격하는 것이 네놈들인가?”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했는지 약간 먼 감이 들었지만 상대의 목소리를 들은 후버가 적을 확인하려던 고개를 급하게 내렸다.
후버가 기억하기에 목소리의 주인공은 크럭스, 후버는 급박하게 목소리를 변환하는 마법을 자신에게 걸고는 고갯짓을 이용해서 후드를 좀 더 깊이 눌러썼다.
“부정하지는 않지, 너는 누구지? 와일리 상단에 너 같은 실력자가 있었던 적은 없었는데?”
“지금 분위기가 네놈이 질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란 거는 아무리 멍청해도 알 텐데…….”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스르릉!
후버가 여유로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크럭스가 허리에 차고 있던 롱스워드를 뽑아서는 후버를 향해 휘둘렀다.
퍽!
“이런 씨발, 경고는 하고 휘둘러야지.”
“다음에는 확실하게 팔 한쪽을 잘라주지.”
간신히 몸을 굴려서 피한 후버를 향해서 다시 롱소드를 휘두르는 크럭스, 최대한 몸을 굴려 크럭스의 칼날을 피하고 있는 후버였지만 몸 이곳저곳에 생체기가 생기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젠장,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질 텐데…….’
후버가 가지는 희망은 단 하나, 혹시라도 후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기사들이 이 지점으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최대한 빠르게 목표한 인원을 사살하고 돌아오는 길에 후버를 발견하는 것.
‘지금쯤이면 모여서 보고를 해야 될 텐데 통신에 답이 없으면 한번은 와봐야 될 거 아니야?!’
기사들이 달려온다면 벌써 왔을 듯한 시간이 흐르자 후버도 점점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얼굴을 보이면 곤란하다는 점과 왼팔의 상처가 크록스의 검을 피하는 데 지장을 줘서인지 점점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마법사 주제에 몸놀림이 대단하군.”
크럭스는 생각을 바꾸었는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성궁을 꺼내들었다. 아직 화살이 재워지지 않은 석궁을 장전하기 위해 롱소드를 검집 안에 집어넣는 크럭스.
“이것도 피한다면 자네를 그냥 보내주도록 하지.”
팽팽하게 당겨진 석궁이 후버를 향했다.
챙!
치명상을 피하기 위해 팔로 심장을 가리고 고통을 기다리던 후버에게 석궁이 발사되는 미약한 소음이 들리고 곧바로 금속성 물체가 부딪히는 소리가 후버의 귀에 들렸다.
“무슨……?”
당황한 크럭스의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는 후버, 이미 당겨진 시위와 발사된 화살 그리고 후버와 크럭스의 사이에서 화살을 처넨 슬렌의 모습에 당황하던 크럭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슬렌을 바라보았다.
괜찮냐는 듯이 후버를 바라보던 슬렌이 후버의 무사함을 확인하고는 1미터쯤 되어보이던 발톱을 더 길게 뽑아내었고 금세 자란 발톱의 길이는 어느샌가 50cm 더 자라서는 크럭스를 향했다.
“뭐… 이런 미친 경우가…….”
스르릉.
정신을 수습하고 검집에 넣어두었던 롱소드를 꺼내는 크럭스와 그런 크럭스를 기다려 주듯이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슬렌.
“혹시… 너의 정체가 더 궁금해지는군.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을 텐데?”
“알아보는 건가? 그럼 너 따위의 실력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 죽이지는 말고 상처만 만들도록.”
후버의 명령이 떨어지자 슬렌이 먼저 크럭스를 공격하기 위해 튀어나가듯이 크럭스를 향해 질주했다. 오른쪽에서 위로 향하는 빠른 공격에 시끄러운 소음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챙! 챙챙!
왼쪽 발톱마저 길게 뽑은 슬렌의 정신없는 공격에 크럭스는 방어하기만 급급할 뿐 슬렌을 향해 롱소드를 겨누지 못했다. 슬렌의 발톱이 가진 예기를 생각한다면 크럭스가 들고 있는 검 정도는 단번에 갈라냄과 동시에 크럭스의 몸을 양단할 수 있겠지만 크럭스를 죽이는 것이 아닌 크럭스의 집무실에 모여 있는 기사들을 불러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소음만을 크게 낼뿐 크럭스의 몸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
“점전 롱소드의 이가 빠지는 것 같은데 균열이 간 검으로 우리 용병단을 맞설 수 있을까?”
“개소리, 고작 고양이 뒤에서 쓰러져 있는 주제에 입만 살았군.”
호기롭게 외치는 크럭스이지만 후버가 말한 대로 크럭스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여유롭던 표정에는 점점 다급함이 번져갔고 이가 빠지기 시작한 롱소드는 차라리 만들고만 소드 브레이커처럼 곳곳이 움푹 파인 이상한 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예기를 줄인다고 줄였지만 슬렌이 가진 발톱 자체의 단단함이나 빠른 속도로 후려치는 위력을 검이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서로 양보하는 것이 어떤가?”
“무슨 개소리냐?”
후버가 말하자 슬렌은 공격을 멈췄고 잠시 동안의 소강사태동안 크럭스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느라 참았던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후버에게 대답했다.
“지금쯤 자네가 모시고 있는 와일리 상단의 주인은 처리가 끝났을 거야. 아까부터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자신이 목표라는 말에 크럭스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뢰를 수행하다보면 이런저런 상황에서 다칠 수도 있는 거지만 그런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리더십에 전혀 도움이 안 돼서 말이야.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 보다는 나는 자네를 보내주고 자네는 나를 보내주는 거지, 어떤가?”
후버의 제안에 대해 크럭스가 동의를 표현하려던 순간.
삐이이이익!!!
“방금 소리를 들었나? 상단의 주인을 처치하면 내 부하들이 신호를 보내기로 했지. 저 소리가 바로 그 신호고 시간이 얼마 없어 어떻게 하겠나?”
후버가 크럭스를 채근하자 슬렌이 발톱을 세우고서는 크럭스를 향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크럭스의 대답에 후버가 고개를 끄덕이자 슬렌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슬렌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크럭스는 건물 뒤편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아마도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자신의 거처로 복귀할 생각인가보군.”
다친 부위에 꼼꼼히 포션을 바르며 5분쯤 기다렸을까? 후버를 중심으로 20명의 기사들이 모였다.
“총원 20, 사망자 없음, 경상자 8명 이상입니다.”
페트리의 보고에 후버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경상자라곤 하지만 생각보다 부상자가 많군.”
“각자 크럭스의 거처 주변에 도착하는 시간이 달라서 수적 열세로 인해 약간의 부상자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후버가 인상을 찡그렸다면 페트리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모여 있는 다른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경상자라고해도 일개 상단을 상대하는 데 왕국 제일의 기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 기분이 나쁜 탓이었다.
‘생각 같아선 한바탕 드잡이질을 하고 싶지만…….’
페트리 역시 작은 자상이지만 적의 기사가 휘두른 검에 상처를 입은 만큼 부하기사들을 탓하기 입장이 곤란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지. 그리고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아도 되네. 다른 쪽은 몰라도 크럭스의 집무실을 지키던 자들은 일개 상단의 병력이 아니라 스타치 왕국의 리버모어 3왕자의 기사 병력이니깐 잠시간이지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경상자만 있다는 건 탓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일이네.”
후버가 건네는 위로의 말에 페이트와 기사들의 표정이 약간을 풀어졌다.
“감사합니다, 후버 님.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죠.”
“집합 시간은 4시간 후 각자 편한 방법으로 복귀하도록 영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면 유흥을 위해 약간의 술을 마시는 것 정도는 허락하도록 하지.”
“그럼 4시간 후에 뵙겠습니다.”
페트리의 대답을 끝으로 담을 넘은 기사와 후버는 영지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영업하는 곳이라고는 주점, 도박장, 사창가가 전부이지만 2시간 후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각자의 방법으로 아무도 모르게 아크바 상단으로 복귀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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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크럭스 님?”
“그보다 피해 상황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밀실의 통로와 연결된 비밀 문으로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온 크럭스를 반긴 것은 숨이 턱 막힐 정도의 피냄새였다.
“왜 이곳까지 피냄새가?”
“그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크럭스 님을 대신해서 기사 한 명이…….”
타이킨 총관의 말에 크럭스는 급하게 자신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3명의 시체가 한 명을 보호하듯이 겹쳐진 침실 안의 피비린내가 인상을 찡그리게 했고 세 구의 시체를 확인한 크럭스는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이런 개새끼들이.”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래도 네가 똑바로 대처를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신경질적인 크럭스의 발길질에 타이킨이 정강이를 붙잡고 쓰러졌다.
“빌어먹을 새끼들… 생존자는?”
“전투에 참가한 자들 중 생존자는 없습니다.”
“그동안 너는 어디서 뭘 한 거야?”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이들을 이용해서 크럭스 님의 죽음을 꾸미는 것 외에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강변하는 타이킨의 모습이었지만 타이킨의 눈에 차지는 않았다.
“그래도 뭔가 알아낸 것이 있을 거 아니야!”
“아무래도 저번에 습격한 그자들 같았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검 놀림이 분명히 이 지역에 그런 실력자가 흔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타이킨의 말에 크럭스는 순간 자신이 궁지로 몰았던 자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 생각은 금세 머릿속에 지워졌다. 떠돌이 마법사보다는 검을 쓰는 자들이 더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혹시… 혹시라도 크랩스 왕국의 기사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나?”
“그건 아닐 겁니다. 검을 쓰는 실력은 분명히 상급 이상이지만 기사와 같은 절도 있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기사라기보다는 용병단의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용병단이라… 그러고 보니 마법사도 용병단이라는 이야기를 했지… 타이킨, 너는 이 주변에 마법사가 단장인 용병단을 수배해보도록.”
“뭐 짐작가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약간은… 아니면 이 정도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상단의 핵심 무력이 거의 모두 전멸했습니다. 요청을 드릴까요?”
‘그건 곤란해… 공자님이 내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상 더 이상의 병력 요청은…….’
크럭스의 시선이 타이킨을 향했다. 얼마 전 통신에서 자신의 잘못을 타이킨에게 돌린 이상 더 이상 자신이 희생시킬 만한 인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크럭스 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용병을 확충하는 방향으로 하도록 돈을 얼마든지 들어도 상관없으니 일대 용병대기소를 싹 쓸어서라도 실력을 우선으로 고용하도록.”
“하지만… 만약 병력 요청 없이 또 공격을 당해서 상단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공자님께서 저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언젠가는 요청을 해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안 돼. 공자님이 병력을 보내봤자 지금의 병력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큰 차이는 없을 거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 게다가 습격자들의 목표는 분명히 내 목숨을 노리는 것이었어. 다음번 습격으로 상단이 털린다면 이래죽나 저래죽나 결과는 똑같아.”
“그래도 공자님께서 보내주시는 병력이 훨씬 질이 좋지 않습니까?”
“그들이 오면 추가 병력을 뽑는데 차질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상단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해. 차라리 지금보다 병력을 2배 이상 뽑아내 질이 안 되면 양으로 채우면 되는 거야!”
크럭스의 말에 다른 건의를 하려던 타이킨이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군. 차라리 공자님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버림을 받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크럭스 님, 혹시 모르니 일단은 당분간 외부 활동을 자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이럴 때일수록 활발하게 활동을 하여 적에게 건재함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
“적의 세력이 우리와 비등하다면 그럴지 모르지만, 새로운 용병들이 모두 고용될 때까지 명백하게 우리의 전력이 적에 비해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적은 신중합니다. 제가 보기엔 적은 어떤 단계를 밟아가면서 우리 상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금만 해도 상단주님이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모든 병력을 소거하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그들의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고 생각하게 하면 저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최대한 신중하게 진행할 것입니다.”
“시간을 벌자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시간을 벌면서 최대한 은밀하게 병력을 확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크럭스 님께서 이곳보다는 다른 곳에 계시면서 고용된 용병이나 다른 사용인에게 크럭스 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보고 이곳을 떠나 있으란 말인가?”
“2주 정도면 새로운 필요한 용병을 모두 고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주라…….”
크럭스가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타이킨 총관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책임을 맡은 곳을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다가 공자님께서 통신을 연결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인가?”
“가장 최근에 통신을 한 것이 언제 정도입니까?”
“얼마 되지 않았네.”
“공자님께 보고는 얼마 간격으로 하십니까?”
“정기 보고는 한 달에 한 번, 하지만 수시보고까지 생각한다면 한 달에 두 번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네.”
“그럼 2주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혹시 공자님께서 먼저 통신을 시도하시면 공자님은 마탑과의 협의를 위해 상단을 떠났다고 전하겠습니다.”
“2주면 필요한 용병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한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웃돈을 주고라도 용병을 모집한다면 길게 잡아도 2주면 충분할 것입니다.”
찜찜한 느낌에 크럭스가 머리를 굴려봤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듯하였다.
“밀실에 있으면 아무도 모를 텐데 굳이 상단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는가?”
“짧은 기간이라곤 하지만 크럭스 님께서 밀실에 계시면 식사나 배설물의 처리… 흠흠, 죄송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어떤 방식이든지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거야, 자네가 직접 처리하면… 아닐세. 자네 말대로 하도록 하지.”
크럭스는 생각 같아서는 타이킨에게 자신과 관련된 뒷일을 모두 처리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타이킨 역시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러한 요구는 타이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반발심만을 키울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굳이 타이킨의 기분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겠지.’
“결정을 하셨습니까?”
“자네의 말대로 하도록 하겠네. 나는 곧장 밀실을 통해서 상단을 빠져나갈 테니 자네는 괜한 소문이 흘러가지 않도록 뒤처리를 부탁하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럭스 님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크럭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당장 필요한 여비를 챙기고는 몇 번이나 더 타이킨에게 일처리를 잘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밀실을 이용해서는 와일리 상단을 빠져 나갔다.
크럭스가 집무실을 빠져나간 것을 본 타이킨은 크럭스가 항상 앉아 있던 깃털로 푹신한 쿠션을 덧댄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고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내가 그렇게 쉽게 네놈의 장난질에 당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잠시 동안 따뜻하고 푹신한 쿠션을 안락함을 즐기던 와일리는 품 안의 통신구를 꺼내들고는 페트리에게 지금의 상황을 보고했고 페트리는 최대한 빨리 일을 서두르라는 말을 남기고는 통신을 종료했다.
“크럭스… 네놈이 돌아오는 날, 너의 죄를 직접 물어주마.”
타이킨은 장식용으로 마련된 철퇴를 들어서는 크럭스의 역할을 한 시신의 얼굴을 뭉개버리고는 철퇴를 밀실 안으로 던져졌다.
잠시 숨을 고른 타이킨이 신경질적으로 종을 흔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크럭스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꺄~~~악!”
“조용히 해!”
침실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봤는지 시종중 한 여성이 비명을 질렀지만 타이킨이 윽박지르자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너! 너는 나가서 상단 안에 있는 모든 용병들을 이곳으로 모으고 나머지는 시체를 처리하도록.”
타이킨의 말에 소곤거리던 사용인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한편 용병들을 크럭스의 집무실 앞으로 모았다.
“모든 분들이 빠짐없이 모인 것인가?”
“예, 상단 안에 있던 용병들과 사용인들 모두가 모였습니다.”
“모두들 한밤중에 소란이 있었다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영지의 경비병들이 이곳에 오기까지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저 드잡이질이라면 영지의 다른 사람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후버의 파이어볼 마법으로 인해서 발생한 화염과 소음으로 인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진상을 확인하려는 영지의 경비병이 이곳까지 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에게 화재가 진압된 것을 보여줄 필요는 있었고 그전까지 상단의 정면에서 크럭스의 집무실까지의 전투 흔적을 모두 지울 필요가 있었다.
“영지의 침입자가 침입했고 그로인해 크럭스 님께서……,”
“혹시? 크럭스 님께서 사망하신 겁니까?”
“그렇소.”
“여기 계신 용병분들과 사용인들에게는 앞으로 한 달간 지금까지 받던 금액의 2배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부탁드릴 것은 두 가지입니다.”
“무엇입니까?”
타이킨이 2배의 고용 금액을 지불한다는 말에 침울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심지어 용병들 중에는 옅은 웃음을 띠는 자들도 있었다. 사용인들 역시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무거운 분위기가 사라진 것을 타이킨은 느낄 수 있었다.
“경비병이 오기 전에 전투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우는 것 그리고 크럭스 님께서 사망하신 사실을 앞으로 한 달간 알리지 않는 것이오. 또 용병분들은 이 시간부로 한 달간 외부로 나가지 못하오.”
“외부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대신 필요하신 물품은 하인들을 통해서 뭐든지 구해주겠소. 술, 음식 혹시라도 도박을 원하신다면 도박장에서 딜러를 초대하도록 하겠소.”
타이킨의 제안에 용병을 대표해서 타이킨의 말에 대답을 하던 자가 불만이 없냐는 듯이 용병들을 둘러보았고 용병들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딱 한 달입니다. 도박은 필요 없으니 여자는 좀 넣어줄 수 있습니까?”
“많은 수는 불가능하오.”
“어차피 많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체력이 좋은 여자가 필요한 거지요.”
그 말에 용병들이 가벼운 실소를 지었다.
“자세한 부분은 일단 상단 내부를 정돈하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소. 이곳에서 전투 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았소. 그저 보관하던 아티펙트가 취급 부주의로 인해 약간의 사고가 발생한 것뿐이오. 이해하셨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
“그리고 크럭스 님께서는 잠시 동안 외부로 상행을 간 것으로 입을 맞추어 주었으면 하오.”
“여기 있는 자 중에서 용병경력이 짧은 자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약속만 잘 지켜주시면 됩니다.”
“알겠소. 그럼 용병분들은 외부의 흔적을 지워주고 너희들은 크럭스 님의 침실을 정리하도록 해라. 먼저 정문을 걸어 잠그는 것도 잊지 말고.”
타이킨의 지시에 용병들과 하인, 하녀들이 재빠르게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병들로서는 외부로 상행을 가는 귀찮음 없이 와일리 상단에 머무는 것만으로 고용액의 2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빠르게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고 하인과 하녀들은 월급을 2배 준다는 말에 마찬가지로 서두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좀 더 벌려면 어쩔 수 없겠군.”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던 타이킨은 크럭스의 집무실과 가까운 빈 창고에 사용하지 않는 종이들을 모아놓고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갑작스럽게 타오르는 화염에 당황한 사용인과 용병들이 각자 물을 담을 수 있는 도구를 구해서 불을 진화하려고 하자 타이킨은 불타는 창고가 아닌 주변 창고에 손수 그들이 담아온 물을 뿌리며 어서 돌아가서 흔적을 지우라고 종용했다.
타이킨이 화마가 번지지 않도록 주변 창고에 물을 한창 끼얹고 있을 때 정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쾅!
“와일리 상단은 문을 열도록 해라!”
정문을 부술 듯이 강하게 문을 두드린 영지의 경비병들이 와일리 상단의 문을 열라고 하자 타이킨은 이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간 용병들과 사용인들을 재촉한 타이킨이 시간을 벌기 위해 정문 앞으로 달려갔다.
“누구인가?”
“경비대장 에딧이다…….”
“아! 에딧 경비대장님이십니까? 저 타이킨 총관입니다. 야심한 시간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지금 사용인들 모두가 불을 끄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 문을 열게나. 우리 애들이 도와주도록 하지.”
“죄송합니다, 에딧 경비대장님. 이 문의 잠금쇠가 저 혼자 열기에는 힘이 부칩니다. 바로 사용인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열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네. 서둘러주게 화재가 번지면 모든 책임은 와일리 상단이 져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말을 마친 타이킨은 빠르게 발을 놀려서는 흔적을 지우고 있는 용병들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1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 일을 마치는 즉시 불타는 창고 근처에서 아무거나 집어서 불을 끄는 시늉을 하게.”
“알겠습니다!”
타이킨은 용병들이 지운 흔적을 대충 눈으로 훑으며 하인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저흰 이미 끝났습니다.”
“그럼 자네들도 물통을 지고 불을 끄는 시늉을 하도록 하게. 그리고 자네 중 한 명은 나를 따라오도록.”
“알겠습니다.”
하인 한 명을 지명한 타이킨은 천천히 에딧 경비대장이 기다리는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만… 경비대장님, 잠시만 숨을 고르고 문을 바로 열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숨을 고른다면서 1분간 시간을 끈 타이킨은 하인과 함께 정면문의 잠금장치를 들어 올려서 잠금장치를 해제하였다.
“일단 현장으로 가도록하지.”
서두르는 에딧 경비대장을 타이킨이 뒤따르며 혹시 남아 있는 흔적은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아직도 화재가 진압되지 못했군.”
“예, 창고가 불타는 것을 막기보다는 주변에 물을 뿌려서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자세야. 그래도 일단 이 문서에 사인해주도록 하게나.”
건물의 대부분이 영주성 등을 제외하면 목조건물이기에 한곳의 화재가 다른 곳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건물이 전소될 정도의 화재가 발생하면 영지의 경비대는 불똥이 바람을 타고 다른 건물에 옮겨 붙을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아… 예… 당연하지요.”
타이킨이 넘겨준 종이에 사인을 하자 품속에 종이를 챙긴 에딧 경비대장이 그제야 화제의 원인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화제의 원인이 뭔가?”
“별것 아닙니다. 제가 마탑에서 인수한 아티펙트를 정리하다가 호기심에 그만…….”
“흠… 혹시라도 큰일이 아닌가 해서 와봤는데 실수로 인한 화제로군.”
“그렇습니다. 심려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겸연쩍은 표정을 한 타이킨이 작은 가죽 주머니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없게 경비대장에게 건네려고 하자 경비대장은 자신의 부관에게 건네라며 가죽 주머니를 무시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일단 각서는 받았으니 위에는 보고하지 않도록 하겠네. 한밤중에도 수고하는군.”
“수고는요, 무슨… 경비대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수고하시는 경비대분들과 함께 피로를 푸실 때 사용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다른 병사들이 보지 못하게 부관에게 건넨 돈 주머니와는 다르게 다른 병사들 모두가 볼 수 있게 건넨 다른 돈 주머니에 경비대장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자네처럼 우리의 고생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성의를 거절하는 것도 그러니 이 돈은 경비대원들과 균등하게 나누든가 회식을 할 때 사용하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혹시 먼 길을 떠나실 일이 있으시거든 저에게 말씀을 해주시면 가시는 길 저희 상단이 자주 이용하는 상단의 최고급 숙소를 미리 예약해두겠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생각보다 화제의 규모도 작고 자네가 모두 수습할 수 있겠군.”
“그럼 문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분주하게 불을 끄기 위해 움직이는 병사와 사용인들을 뒤로 하고 타이킨은 에딧 경비대장과 그 일행을 정문 앞까지 배웅하였다.
“그럼 저는 화제의 뒷수습을 위해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신경 써주길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살펴 가시길 바랍니다.”
에딧 경비대장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타이킨이 정문을 닫고는 뒤따라온 하인과 함께 문의 잠금장치를 다시 설치하였다.
“나는 이제 집무실로 들어가서 쉴 테니 용병들의 요구사항을 정리해서 내일 점심쯤에 보고하도록, 피곤하군. 내일 점심까지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예, 타이킨 총관님.”
하인의 인사를 뒤로하고 타이킨은 자신의 집무실에 연결된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크럭스를 상단 밖으로 내보냈으니 이제 금괴들을 약속한 장소로 옮길 필요가 있었다.
“정말 몸이 피곤하군. 얼른 운송 팀에게 지시를 내리고 좀 쉬어야겠어.”
피곤을 느끼는지 눈가를 매만진 타이킨이 밀실 안에서 주로 거주하는 운송 팀이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
*
*
크럭스가 상단을 떠난 지 10여 일이 지나고 타이킨의 연락을 기다리던 후버에게 모든 운송이 끝났다는 연락이 타이킨으로부터 도착했다.
“모두 와일리 상단으로 고용되었습니다.”
“국왕전하께서는 병력을 보내주셨나?”
“현재 금괴가 이동된 곳으로 50명의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버 님께서 파악한 비밀통로 부근에 10명씩, 총 100명이 와일리 상단을 확실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좋군, 크럭스의 신변은 확보가 되었나?”
“크럭스에게는 5명의 감시인을 붙여놓았습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지체 없이 확보할 수 있습니다.”
페트리의 보고가 끝나자 후버가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며 현재의 상황을 정리했다.
‘크럭스를 잡고 마탑의 도움을 받아서 저번에 보았던 밀실의 문을 열고 모든 금괴를 회수하면 모든 일이 끝나는군.’
“다른 것은 문제가 아니야, 실질적으로 상단은 우리가 심어둔 인원이 타이킨 총관의 도움을 받아서 모두 장악한 상태고 중요한 것은 영지의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몰라야 하는데 전체 작전이 완료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변이 없다면 크럭스의 신변을 확보하고 금괴를 지키고 있는 와일리 상단의 운송 팀을 처리하는 데 길게 잡아도 2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2시간이라… 금괴의 운송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가?”
“그 부분은 마탑에서 도와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미 운송지에 마법진을 그려 놓았기 때문에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럼 일단 금괴의 운송까지만 부탁하지. 타이킨은 마지막까지 위와 같은 사실을 알면 안 되니깐 말이야.”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즉시 작전을 시작하고 사만다 상단주를 불러오도록.”
페트리가 후버의 방을 나가고 10여 분의 시간이 지나자 사만다가 후버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보다 화려한 차림의 사만다의 복장은 상인이라기보다는 마치 사교계에서나 볼 수 있는 귀족 부인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오늘따라 빛이 나는 것 같군. 지금까지 수고했네, 사만다 상단주. 이제 영주님께 가서 어음을 전달해드리면 더 이상 아크바 상단주의 역할을 할 필요는 없을 거야.”
“그래도 정이 들었는데 이렇게 끝난다고 하니 조금은 아쉽군요. 그래도 재고품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원섭섭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만다를 이해한다는 듯이 후버가 사만다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려 주었다.
“이거… 일이 끝났다고 한 다음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 판매 대기가 되고 있는 물품과 재고품 중 식량, 건설, 공방에서 사용할 물건이나 원재료가 있는가?”
“예, 식량의 경우 대량 거래처를 통해 한 번에 처리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매입한 물량의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재나 철괘 같은 경우에는 주변국의 전운이 감돌면서 값이 오르고 있어 타이밍을 봐두고 있었습니다.”
“그럼 식량, 목재, 철괘의 경우에는 판매를 하지 않고 장기간 저장이 가능하도록 처리해주게. 내가 개인적으로 쓸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많은 양을 말입니까?”
“이유는 묻지 말고 따로 빼줬으면 좋겠군.”
“그러시다면…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엘더 영주에게 바이스를 보내도록 하게. 아마 지금쯤 목이 빠져라 바이스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야.”
페트리가 그랬듯이 사만다 역시 후버에게 인사를 하고는 후버의 집무실을 나와서는 바이스를 호출해 마차를 타고 영주의 성으로 향했고 후버는 수정구 시계를 조작해서 3시간 뒤로 알람을 마치고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
*
*
“영주님 손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어서 들어오시게 해라.”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오라는 영주의 명령에 집사는 공손히 응접실의 문을 열어서는 손님을 안내했다.
“가지고 왔는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엘더는 기대에 찬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바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한 엘더 영주에 부응하듯이 어음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 모습에 엘더 영주가 어음에 손을 대려는 찰나 바이스가 엘더 영주의 손목을 잡았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구만, 여기 있네.”
엘더가 책상 위에 한 장의 서류를 올려놓자 바이스는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국왕의 그림자로써 받은 교육 중 위조 귀족 임명장을 구분하는 방법 역시 충분한 교육을 받아서인지 바이스가 위조 임명장과 진짜 임명장을 구분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육안 검사로는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바이스가 시약을 꺼내서 귀족 임명장 위에 떨어트리자 파란색의 시약이 임명장과 닿으면서 물처럼 투명한 색으로 변해서는 서류 위에 흡수되었다.
톡톡.
시약이 흡수되는 부분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엘더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약간의 상처를 내서는 시약이 떨어진 부분에 피를 떨어트렸다.
“이제 확실하겠지?”
의심을 당했다는 생각에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인 엘더를 무시하고 바이스는 그저 서류만을 바라보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엘더가 종이 위에 떨어트린 핏방울이 모여서는 엘더의 서명을 완성하였다.
서명이 완성된 것을 보고 바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더 역시 바이스가 내민 어음 뭉치를 한 장, 한 장 확인하며 총액을 계산하였다.
“이제 임명장에 작위를 받고자 하는 자가 서명만 하면 그자는 공식적으로 귀족이 되는 걸세.”
엘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이스가 서류를 품속에 넣자 엘더 역시 어음 뭉치를 자신의 품 안에 집어넣었다.
“이걸로 와일리 상단이 나의 상단이 되는 것이 확실하겠지?”
[물론, 하지만 앞으로 2시간 후에 사용했으면 좋겠군.]
책상 위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바이스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자네는 이것의 진위를 확실히 최대한 빨리 보고하도록.”
엘더가 어음 뭉치를 뒤에 있는 기사단장에게 넘겼다. 육안으로 확인을 하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실제로 어음 거래소에서 교환이 되기 전에는 진위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사단장이 나가고 엘더의 웃음소리가 응접실에 퍼졌다. 전 방위적 로비로 인해 돈이 좀 들기는 했지만 어음의 가액에 비하면 절반정도 수준.
게다가 와일리 상단은 마탑과의 거래를 독점한 상단이기에 앞으로 거둬들일 이익은 끝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평민들의 귀족이 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군.”
한껏 웃음으로써 와일리 상단에 대한 탐욕을 풀어헤친 엘더는 누군지 모를 작위 임명서를 받아간 자에 대한 열등감과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다.
“감히 평민 주제에 그 정도의 재물을 가지고 있다니… 작위 임명서를 행사하는 순간 남은 재산도 모두 끌어와 주지.”
엘더로서는 탐욕의 대상을 단순히 와일리 상단에만 한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 년에 몇 명 생길까 말까한 신생 귀족의 명단을 확인한다면 자신에게 임명서를 사간 인물을 파악해서 자신의 휘하에 거느리려는 욕심이 마음속에 동하기 시작했다.
“나의 예복을 가져 오거라. 와일리 상단으로 갈 마차와 기사단, 경비대 인원을 모두 대기시키도록.”
엘더의 명령을 들은 집사가 영주의 명령을 영주성 내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40명의 기사병력, 10명의 견습기사, 100명의 병사, 그리고 그 뒤를 수행하는 하인과 하녀들, 빈 마차의 행령 마치 영지전이라도 준비하는 듯한 행렬의 가장 앞에 번쩍이는 예복으로 치장한 엘더가 당당하게 행렬을 이끌며 와일리 상단의 정문 앞으로 다가갔다.
대규모 행렬 그것도 그 행렬을 이끄는 자가 영지의 주인이라는 말에 주변 상단의 상단주를 비롯하여 수없이 많은 구경꾼들이 그들을 호위하듯이 따르며 와일리 상단의 정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북적되는 인파를 만들었다.
“와일리 상단의 크록스! 상계를 어지럽힌 너에게 죄를 묻고자 한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의 함성처럼 와일리 상단을 울렸다. 타이킨의 명령에 굳게 걸어 잠근 상단의 문을 바라보며 일갈을 한 엘더가 손짓을 하자 병사들의 행렬에서 어른 한 명의 두께를 가진 통나무로 만든 공성추가 전면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다섯을 세겠다. 그 안에 문을 열지 않으면 부득이하게 정문을 파손할 수밖에 없으니 어서 문을 열도록 해라.”
“잠시만, 총관을 부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영주님.”
“5!”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숫자를 세는 엘더의 모습에 주변 상인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4!”
천천히 거꾸로 세어지는 숫자가 줄어들수록 군중들은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분위기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같은 상인이 당하는 것이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비상하는 와일리 상단에 대한 질투심은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어라!”
다섯까지 센 엘더 영주가 공성추를 들고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하자 공성추에 연결된 밧줄을 강하게 고처 잡은 병사가 몸의 반동을 이용해서 공성추를 상하게 앞으로 밀었다.
쾅!
쾅!
쾅!
공성추가 3번 내리 문을 찍어내자 덜거덕거리던 문에서 우지끈하는 파열음이 들렸다. 잠금장치가 파손된 듯 어른 손 하나만큼 문이 열린 것을 본 엘더가 손을 들어서 공성추를 휘두르는 병사들에게 잠시 멈출 것을 명령했고 열린 틈새로 보이는 와일리 상단의 고용인과 용병들은 하나같이 질린 표정을 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와일리 상단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공성전과 다른 게 있다면 스크러브를 짜서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
“자네들 중에 책임자는 없는 것인가!”
엘더의 호통에 용병과 고용인들은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엘더가 다시 오른손을 들자 공성추를 든 병사들이 반동을 이용해서 공성추를 크게 흔들었다.
콰직!
더 이상의 충격에는 견딜 수가 없었는지 와일리 상단의 정문을 받히고 있던 잠금쇠는 힘없이 부러졌고 게이트 키퍼가 설치되지는 않았는지 충격을 이기지 못한 정문이 활짝 열렸다.
“이런 소동이 있는데 상단주는 뭐 하는 것이냐?”
엘더 영주가 상단주가 나오지 않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행렬을 이끌어 와일리 상단 안에 들어가자 구경꾼들은 약속이나 했는지 와일리 상단의 정문을 뺑 둘러서는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영주의 행동을 구경하였다.
엘더 영주가 왜 책임자가 없냐며 일갈을 날리려던 찰나 멀리서 타이킨이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왔고 타이킨을 알아본 엘더 영주는 타이킨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주듯이 달려오는 타이킨을 빤히 쳐다보았다.
“헉… 엘더 영주님을 뵙습니다. 늦게 나와서 죄송합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피곤에 쩔은 듯 산발한 머리와 진한 다크서클을 한 타이킨의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긴 엘더 영주가 이유를 물으려다가 생각을 바꿔서는 일갈을 내질렀다.
“크럭스 상단주는 어디 있는 것인가? 왜 책임자가 아니라 자네가 나오는 거지?”
“그것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타이킨의 머리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얽혔다.
‘뭐지? 사실대로 자리를 잠시 피했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죽었다고 해야 하는 건가?’
“크럭스 상단주가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나?”
생각할 시간을 안 주려는 듯 강하게 질러대는 엘더 영주의 모습에 타이킨 총관이 죽었다는 거짓말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게… 잠시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오는 것이지?”
“예, 그게 영주님께서 명령하신다면 이틀 안에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잘되었군.”
엘더 영주가 말의 옆구리에 달려 있는 가방에서 어음 뭉치를 꺼내서는 타이킨의 발 앞에 던졌다.
“이게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저희 상단에서 발행한 어음이 아닙니까?”
“그렇다. 너희 상단이 발행한 어음이지 듣자하니 와일리 상단이 어음의 교환을 방해해서 상단의 질서를 흩트리고 사리사욕을 챙긴다는 소문이 영지에 파다하게 퍼져 사실을 확인해 보니 와일리 상단이 교환해주지 않은 어음의 액수가 상상을 초월하더군.”
타이킨을 바라보며 말을 하던 엘더가 몸을 돌려서는 와일리 상단을 구경하고 있던 구경꾼들에게 몸을 돌렸다.
“이 중에서 와일리 상단에게 어음을 청구했다가 돌려받지 못한 상단주들이 있는가? 그들의 진술이 필요하니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게. 진술을 하는 자들에게는 영주의 권한으로 상단을 보호해 주겠다.”
엘더 영주의 말에 소란스럽던 구경꾼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군중 중에 한 명이 목소리를 높혔다.
“영주님, 제가 증인이 되겠습니다. 와일리 상단은 마탑의 아티펙트를 받기 위해 경쟁 입찰을 할 때 어음의 청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레비트 상단의 상단주입니다. 제가 어음을 청구하자 와일리 상단의 상단주인 크럭스가 다른 상단을 이용해서 저를 압박하였습니다.”
모두 그때의 기억이 있는지 구경꾼 중에 일부가 레비트 상단주의 말이 진실이라며 엘더 영주에게 소리쳤다.
“자네는 이 소리가 들리는가? 어째서 공정하게 경쟁을 해야 할 상단들을 겁박하여 사리를 채우는 것인가? 와일리 상단의 패악질이 내 귀에 닿았다.”
“엘더 영주님,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조용히 하라. 타이킨은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타이킨의 변명을 한마디로 일축한 엘더가 군중들을 보며 말했다.
“우선, 우리 영지에 속한 영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소. 알다시피 영지의 일이 상단만을 돌볼 수가 없어 뒤늦게 힘들어하는 상단들의 원성을 듣고 나의 자비를 털어서 어음을 매입했지만 조치가 늦어져서 상단들에게 모든 혜택이 돌아가지 않은 것이 사실이오. 이렇게 뒤늦게라도 상계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니 상단주들은 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소.”
엘더 영주가 구경꾼들을 향해 엄숙하게 이야기하자 구경꾼 중에 엘더 영주를 환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구경꾼들의 환호를 잠시 감상한 엘더 영주는 손을 들어 구경꾼들을 진정시키고는 몸을 돌려 타이킨을 향했다.
“그대는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상단들이 어음 청구를 못하도록 방해한 적이 있는가?”
“그것이 설명을…….”
“예, 아니요, 둘 중 하나로만 답하도록. 여기 있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위증을 한다면 와일리 상단의 신용은 바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엘더의 말에 주변을 둘러본 타이킨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와일리 상단으로서는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한 행위이지만 군중들의 분위기는 그 사정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란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영주님,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공정해야 하는 것이 영지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집행자로서의 사명. 자네와 내가 밀실에서 내리는 결정 따위 이곳에 모인 상단주들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영주의 말에 여기저기서 영주의 말이 옳다는 듯한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네도 이 목소리가 들리겠지? 다시 한 번 묻지 와일리 상단은 어떤 방식이라고 해도 상단의 어음 청구를 방해한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타이킨 총관의 시인에 일순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런 소란스러운 장내를 진정시킨 엘더 영주는 와일리 상단의 행위로 인해 피해를 받은 상단은 이 자리에서 상단명과 책임자를 쓰도록 지시했고 구경꾼 중 상당수가 자신의 상단 이름과 그 책임자 혹은 본인의 서명을 하면서 타이킨 총관을 압박했다.
서명의 행렬이 늘어갈수록 구경꾼들도 늘어나 대부분 상단의 상단주가 직접 자신의 상단의 이름과 상단주 서명을 하였다.
“타이킨, 자네는 이 행렬이 보이는가? 와일리 상단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상단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들에 대한 피해 보상은 어떤 식으로 할 참인가?”
엘더 영주의 말이 끝나도 타이킨은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고 땅만을 쳐다보았다. 구경꾼 중 일부에서 책임을 지라는 목소리가 간혈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서둘러 뭐라도 대답을 하려던 타이킨을 엘더가 가로 막았다.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하는군.”
엘더가 잠깐 동안 시간을 끈 반향은 책임을 지라는 성토가 되어 타이킨을 압박했다.
“크럭스 상단주님이 오시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방식인지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여기 모인 상단주님이라면 총관에 불과한 제가 아무런 약속을 할 권한도 없다는 것쯤은 아시지 않습니까?”
더 이상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 타이킨은 인정에 호소하듯이 주변을 바라보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고 성토의 소리를 내던 상단의 인물들 역시 타이킨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닌지라 잠잠해졌다.
“좋다. 권한이 없는 자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겠지. 일단 지금 내가 던져준 어음에 해당하는 금괴를 가지고 오도록.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크럭스 상단주가 온다면 그 죄를 묻겠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영주님.”
타이킨의 어깨가 힘없이 떨어졌다. 타이킨 역시 할 말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영주가 분위기를 잡은 상황에서 섣부른 해명은 오히려 변명으로 취급될 여지가 있기에 타이킨은 영주가 돌아가면 거대 상단부터 일대일로 만나서 그들을 설득할 생각을 하며 어음에 쓰여진 액수를 모두 더했다.
‘생각보다 너무 많군.’
뭉치를 이룬 어음의 양이 작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타이킨이 생각한 것보다 어음의 양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타이킨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하인들을 불러서 엘더 영주의 앞으로 다시 다가갔다.
“바로 지금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주님들 그리고 여기 계신 많은 분들께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되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니… 금괴를 실을 수례는 내가 준비해 왔으니 저곳으로 옮기도록 해라.”
하인들이 엘더 영주의 수례를 건네받고 창고 쪽으로 향하자 엘더 영주가 그 뒤를 이었고 구경꾼들이 그런 엘더 영주를 따랐다.
“아… 저 영주님 저들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은 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자네와 나만이 남는 밀실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네.”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외치자 구경꾼들의 분위기도 동조하듯이 타이킨 총관을 바라보았고 타이킨 총관은 하는 수 없이 금괴가 보관된 창고로 그들은 안내했다.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가짜 인장이 찍힌 금괴가 거의 대부분 페트리가 지시한 장소로 옮겨졌기에 이곳에 남은 것은 유통에 문제가 없는 진짜 인장이 찍힌 금괴만이 있다는 것은 안심할 일이지만 문제는 그 양이 일반 상단에 비하면 엄청난 양이지만 와일리 상단이 발행한 어음에 비하면 너무 적다는 것에 있었다.
‘겨우… 여기 있는 어음만 지급할 수 있겠군.’
당장이라도 구경꾼들을 비롯한 영주를 다른 곳으로 쫓아내고 싶지만 그 말에 동조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타이킨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타이킨이 창고의 문을 열자 구경꾼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일개 상단이 보관한다고 하기에는 엄청난 양의 금괴의 양에 구경꾼들의 대부분이 저 정도 금괴면 금화로 어느 정도의 가치일까에 대해서 설왕설래를 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의 감탄을 배경 삼아 차곡차곡 금괴가 영주의 수례로 옮겨지자 감탄의 방향이 타이킨에게서 영주로 옮겨졌다.
“벌써 절반이나 옮겨진 거야?”
구경꾼들은 남은 어음 뭉치의 양과 금괴의 양 그리고 옮겨진 금괴의 양을 어림짐작으로 가늠하면서 어느 정도의 금괴만이 남을지 혹은 부족하지는 않을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흥미진진하게 금괴가 옮겨지는 과정을 보고 있었다.
“저런…….”
누군가의 아쉬워하는 감탄사에 동조하듯이 구경꾼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나하나 줄어들기 시작한 금괴가 어느샌가 처음 창고에 보관된 양의 10분의 1 정도가 남았을 무렵 타이킨 총관이 들고 있던 어음이 모두 소진된 탓이다.
“영주님, 모두 수례로 옮겼습니다.”
“수고했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와 힘 빠진 목소리.
“아!”
유난히 크게 들리는 구경꾼 중 누군가가 낸 감탄사에 타이킨의 얼굴이 똥 씹어먹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엄청난 양의 금괴에 압도당했던 군중들이 금괴의 운반에 흥미를 느끼면서 간과했던 한 가지 문제를 깨달은 듯 감탄사를 내뱉은 한 명은 천천히 구경꾼들의 행렬을 빠져나와서 와일리 상단의 정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타 틀렸군…….’
생각 같아서는 정문을 빠져나가는 남자를 잡아다가 와일리 상단에 가두어 놓고 싶지만 한 명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란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기에 타이킨 총관은 고개를 숙이고 땅만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크럭스가 같은 상황에서 이 자리에 있었다면 과거 어음의 청구를 방해하였듯이 당당한 자세로 구경꾼들을 안심시켰겠지만 타이킨은 크럭스만큼의 능력은 없었다.
“그럼 나머지는 나중에 받으러 오도록 하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엘더 영주는 자신의 품을 매만지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엘더가 말했듯이 이번 자신이 가져온 양은 사전에 바이스와 약속했던 딱 그 정도의 양이었다.
‘확실히 효과는 있겠군.’
군중을 헤치며 영주성으로 돌아가는 엘더의 표정은 보기에 따라 음흉하기도 정의를 실현했다고 생각하는 묘한 흥분감으로도 보이는 애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엘더가 와일리 상단을 떠나자 타이킨은 허망한 표정으로 남아 있는 금괴를 헤아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빈약해진 창고의 적재량을 보던 타이킨은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집무실에 돌아와서는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앞으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한편 매일 오는 크럭스의 정기 연락까지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
이미 밖은 해가 떨어져서 어두운 방 안 촛불 하나만을 켜놓았지만 타이킨은 어두움 보다는 밖에서 퍼지고 있을 와일리 상단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에 신경이 더 쓰였다.
1초, 1초가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에 한숨을 내쉬던 타이킨의 집무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금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운이 좋군.”
하인 중 한 명이 들어왔다고 생각한 타이킨은 괜한 신경질을 하인에게 퍼부어 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페트리의 모습에 소리를 지르려고 했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정말 운이 좋아, 이게 뭔지 아나?”
서류 뭉치를 흔드는 페트리의 모습에 타이킨은 페트리의 손에 따라 흔들리는 서류 뭉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스타치 왕국의 공문서가 아닙니까?”
글자의 크기는 너무 작아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전면에 크게 인쇄된 자신이 속한 스타치 왕국의 인장만은 알아볼 수 있었기에 타이킨은 혹시라도 페트리가 들고 있는 서류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렇지, 정확하게 말하면 자네의 승작을 임명하는 서류지 말했지 않나? 자네와 나는 공동운명체라고 말이야, 자네를 위해서 힘 좀 써봤네. 그 결과가 바로 이거지.”
페트리가 서류 뭉치를 타이킨의 눈앞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자 타이킨은 페트리가 올려둔 서류를 정신없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총 100페이지가 넘는 서류를 모두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두세 페이지를 읽어본 결과 자신이 세운 공에 대한 내용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적당하게 최근 20년간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들 중 특정인이라고 밝히지 못한 자에 대한 내용은 전부다 넣고 공자님의 재가를 받았네. 자네가 세운 공이 마음에 드는가?”
페트리의 말에 타이킨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실 이곳이 이제 곧 망할 것입니다. 이 사실이 공자님에게 전해지기라도 하면 이 서류의 내용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체념한 듯 말끝을 흐리는 타이킨의 말에 페트리가 크게 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나와 협력의 상대가 될 자격이 충분해. 나는 자네처럼 주제를 아는 사람을 좋아하지, 훌륭하네.”
다소 비꼬는 투로 말하는 페트리에게 발끈한 타이킨이 뭔가 말을 하려고 하자 페트리가 그런 타이킨의 말을 막았다.
“기분이 나쁘다고 후회할 말은 뱉지 않는 게 좋아. 공자님께서 이곳의 일이 잘못되었다면 자네의 책임을 물을 것 같은가? 크럭스의 책임을 물을 것 같은가? 게다가 이렇게 전공을 인정하기까지 했네. 자네는 공식적으로 이곳에는 없는 사람이지. 그런 자네의 죄를 공자님이 물으실까? 아니면 다시 한 번 쓸모 있는 일에 사용하실까?”
페트리의 말에 타이킨은 희망의 빛을 본 사람처럼 표정이 멍해졌다. 페트리의 말대로 만약 이 문서에 의하면 자신은 스타치 왕국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공을 세운 인제 시기상 와일리 상단에 자신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사인하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단, 나중에 나를 잊지는 말아주게.”
“알겠습니다.”
타이킨이 깃펜에 잉크를 묻히자 페트리는 서류 뭉치를잡고는 마지막 페이지의 끝이 보이도록 절반을 접어 올렸다.
“이곳에 사인을 하면 자네는 정식적으로 스바라 왕국의 백작이 되는 것이네. 서둘렀으면 좋겠군. 크럭스의 뒤처리를 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니깐 말이야. 지금쯤 엘더 영주도 크럭스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할 테니… 그자에게 크럭스를 빼앗기면 안 되지 않나?”
“알겠습니다.”
서류를 읽으려던 타이킨이 페트리의 말에 공란에 사인을 하였고 사인이 된 것을 확인한 페트리는 서류 뭉치를 타이킨에게서 빼앗았다.
“아로마로 백작가에 초대 가주가 된 것을 축하하네. 미안하지만 이 서류는 내가 보관하도록 하지 크럭스를 못 찾으면 엘더가 와일리 상단을 수색할 텐데 그때 이 서류가 발각되면 공자님에게도 해가 될 수 있으니깐 말이야.”
“예, 그건 페트리 님께서 편하신 대로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든지 시켜만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은 자세야. 앞으로 기대 하기로 하지. 그리고 크럭스와 연결되는 통신구는 나에게 주도록.”
타이킨은 바로 자신의 책상에 올려두었던 통신구를 페트리에게 건네주었고 통신구를 받은 페트리는 타이킨을 뒤로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