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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한? 쓸모가 있을까? (24/37)
  • 로한? 쓸모가 있을까?

    탁.

    혹시 모를 감시인의 존재에 청각을 곤두세운 후버에게 지분 위에서의 발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별 신경을 쓰지 않을 작은 소리였지만 지금과 같은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서 못 들을 정도로 작은 소리는 아니었다. 소리를 들은 후버는 곧장 한스에게 가려던 발길을 돌려 식당을 겸하는 여관의 1층에 가서 간단한 안주거리와 함께 술 한 병을 사서는 한스의 방을 노크했다.

    똑똑… 똑.

    평소와 같은 연속음이 아닌 노크 소리에 방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스, 나왔어.”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연 방 안에서 검병에 손을 대고 있는 한스가 후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묻는 듯이 시선 한가득 의문을 품은 한스의 모습에 후버는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아침부터이긴 하지만 술 한잔 하자고 오늘 근무는 정말 피곤했으니깐 한잔 마시고 자면 딱 좋을 것 같거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한스에게 대충 휘갈겨 쓴 종이를 술병에 말아서 건네는 한편 손으로 천장을 살짝 가리키자 한스 역시 방금 전의 소음을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잡을까?

    매직마우스를 이용한 후버의 말에 한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창문 밖으로 나가서 쉴드를 이용할 테니 너는 그대로 천장을 뚫고 올라가.

    “술? 좋지. 잠깐 내가 테이블을 창가 쪽으로 옮길 테니 안주거리는 잠깐 들고 있어봐.”

    말과 함께 한스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소형 테이블과 의자를 후버가 밝고 올라가기 좋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서두르라고 안주는 식으면 맛이 없으니깐.”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는 후버가 밝고 올라가기 편하게 테이블 배치가 끝나자마자 후버는 들고 있던 안주 접시를 방 한구석으로 던졌고 한스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자신의 검을 세워둔 침대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날아가는 접시만큼 여유로운 발걸음 그리고 후버는 천장 위로 솟구칠 준비를 끝냈다.

    쨍그랑.

    “어? 아깝게스리.”

    스릉!

    의뭉을 떠는 후버의 목소리와 접시 깨지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리는 순간 한스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스!”

    동시에 후버 역시 천장을 향해 그리스 마법을 사용하였다.

    “헛!”

    천장 위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누군지 모를 사람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순간 한스의 칼질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일자로 찔러 들어갔다.

    “큭……!”

    신음 소리와 함께 한스의 검에 새겨진 혈조에서 약간의 피가 흘러 내려 왔다. 신음 소리를 내던 적은 허우적거리는 팔을 움직여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지붕 위에 무언가 잡을 것이 없기에 그저 헛손질이 될 뿐이었다. 지금 그를 지탱해 주는 것은 복부에 꽂힌 한스의 투박한 검뿐이었다.

    “쉴드.”

    혹시라도 한스의 검이 빚나가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후버가 자세를 바로 하고 창문의 커튼을 치고는 상대에게 쉴드 마법을 걸어 주었다.

    “한스, 대충 천장을 썰어줘.”

    마법사가 보통 사용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쉴드 마법이 아닌 조금 떨어진 곳을 보호하기 위한 쉴드 마법을 사용해서 천장에 있는 적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후버가 한스에게 천장을 썰어 버리라고 말하자 한스가 몇 번의 칼질로 적이 있는 부근의 천장을 베어내 버렸고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천장이 한스의 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요란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한스의 방을 울렸고 복부 한가운데 자상을 입은 적의 모습이 드러났다.

    “무엇을 엿듣고 있던 것이지?”

    갑작스럽게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에게 후버가 물었지만 아직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는지 남자는 간헐적으로 몸을 떨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절했나본대?”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여물지 못한 놈이네.”

    “천장 위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바퀴벌레 소리보다 크게 들리니 수준이야 알 만하지.”

    어깨를 으쓱하며 한스가 남자에 대한 평가를 할 즈음 후버는 남자에게 힐 마법을 걸어 주었다. 우선 출혈을 일으키는 복부부터 시작해서 머리에도 한 번의 힐 마법을 걸어준 후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마법 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일단 깨워야겠지.”

    후버가 가방에 손을 넣어 뒤져서는 암모니아가 담긴 시약병을 꺼내는 순간 때마침 여관의 여급 하나가 올라와서는 한스의 방을 두드렸다.

    “손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큰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요.”

    천장이라고 해봐야 높지도 않은 허름한 여관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1층에 있는 여급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별일 아니니 주인에게 부서진 천장의 수리비는 지급하겠다고 전하도록.”

    후버가 문을 살짝 열고는 은화 하나를 튕겨서 여급에게 주자 여급은 고개를 한 번 꾸벅 하고는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주인이 다시 올라오면 귀찮을 테니 후버는 대충 한스에게 눈짓으로 여급을 따라가라는 지시를 하고는 약병의 뚜껑을 열어서는 남자의 코에 들이대 주었다.

    “흡! 컥! 이게 무슨…….”

    남자가 몇 번 기침을 하더니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질문은 내가 대답은 네가. 분업을 확실히 하면 효율이 더 좋아질 거야, 이해하겠지?”

    날카롭게 깎인 스태프를 남자의 눈앞에 가져다 대자 꾸물거리던 남자가 대답하였다.

    “네? 아… 네네.”

    “이름하고 직업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이름은 로한입니다. 직업은… 그게…….”

    “직업과 천장 위에 있던 이유는? 분업은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거야, 효율을 높힐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깐 일단 잠깐 눈을 감아볼래.”

    후버는 손에 들고 있는 암모니아 병을 살짝 기울여서 로한의 얼굴에 약간을 부었다.

    “크아아아악!”

    “사일런스 디멘션. 효과적인 분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하세요!!”

    “이미 그만했어. 힐링.”

    “감사합니다. 저는 로한이라고 하고 직업은 도둑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후버는 후각에 통증을 주기 위해 눈을 감으라고 했지만 이미 눈에도 암모니아가 약간 들어갔는지 로한의 눈동자는 빨갛게 충혈이 되었다.

    “좀 더 효과적인 분업을 할 필요가 있겠군. 참고로 나는 하루에 다섯 번의 힐링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지금 게 3번째였고 잘 생각해 보라고.”

    후버가 다시 한 번 암모니아 병을 기울이자 이번에는 로한이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어 움직여서 암모니아수를 피했다.

    “어쭈? 피해? 바인딩. 이제 1번밖에 못 쓰겠군. 힐링 마법을 안 써주면 시력을 잃을 수도 있으니깐 마음 단단히 먹고 눈 안 보이는 도둑도 좀 유니크한 캐릭터니깐 나름 삶의 의미는 있을 거야.”

    “잠시만 다 이야기하겠습니다. 잠시만.”

    후버가 다시 암모니아 병을 기울이려 하자 로한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서는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노력으로 대답을 해봐. 목적이 뭐지?”

    “의뢰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구체적으로.”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저 이곳에 가서 두 분을 감시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내용의?”

    “어떤 내용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대화하는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어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전부 다 토씨도 틀리지 않고? 간단하지만 불가능한 명령으로 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너 잘났네.”

    후버가 대략적인 상황에 대해 로한에게 듣고 있을 무렵 여관 주인과의 협상을 마쳤는지 한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인은 뭐라고 했어?”

    “천장만 고쳐준다면 경비대에 연락하지는 않겠다더군. 그런데 이건 도대체 무슨 냄새야?”

    “그 정도면 평이하군. 이 녀석 이름은 로한. 직업은 도둑. 목적은 너와 나의 대화를 전부 적는 거라던데? 냄새는 신경 쓰지 마. 금방 정화해 줄 테니깐.”

    “그런데 어쌔신이 아니라 도둑인 건가?”

    한스가 로한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자 후버 역시 그 점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러고 보니 왜 도둑이 염탐을 하지?”

    “그게… 방금 전에 말씀 드렸다시피 제가 한 번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할 수 있습니다.”

    “보고서는 네가 쓰는 건가?”

    “예, 보고서도 쓸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한스가 로한의 품을 뒤져서 몇 장의 양피지와 잉크 그리고 깃펜을 찾아냈다. 글을 모른다면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는 물품들 후버는 로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다지 특징 없는 허름한 옷, 덩치로 봐서는 대략적인 나이는 17살~18살.

    “잠깐 바인딩 마법을 풀어주지 허튼짓을 하면 뭐 아까의 반복이 될 거고.”

    암모니아 병을 흔들면서 말하는 후버의 모습에 한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로한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우선 소매치기가 맞나 그것부터 보도록 할까? 내 품에서 아무거나 하나 훔쳐가 봐. 시간은 지금부터 10초를 주지.”

    후버가 양팔을 벌리며 이야기하자 주춤하던 로한은 후버의 품에 소심하게 다가가 후버의 오른쪽 품에서 작은 돈주머니를 꺼냈다. 눈을 감고 로한의 동작에 집중하고 있던 후버는 대략적으로 로한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문적인 도둑이라기에는 좀 의미 없는 실력이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알고 보니 어쌔신이라던가?”

    “그랬으면 내 물건을 훔치기 보다는 벌써 찔렸겠지. 그냥 실력이 없을 뿐이네.”

    자신을 두고 혹평을 하는 후버의 모습을 보고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로한이 후버의 주머니를 슬쩍 자신의 품 안에 넣으려는 순간.

    “근성은 좋네.”

    로한을 향해 손바닥을 내미는 후버의 모습에 로한이 자신의 품 안에 넣고 있던 돈주머니를 후버에게 다시 건넸다.

    “근성은 확실히 좋아.”

    돈주머니를 받고는 내용물을 헤아려본 후버가 다시 손을 내밀자 로한이 언제 빼돌렸는지 모를 금화 두 닢을 후버에게 건넸다.

    “한스, 어떻게 생각해? 이 녀석 살려둘 필요가 있을까?”

    “글쎄? 아직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요란하게 잡아들였는데 시체로 내보내지 않는다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고.”

    후버의 말에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있던 로한의 표정이 한스의 말로 인해 좌절감에 빠졌다.

    “나는 살려둬도 될 것 같은데, 한스는 아닌 것 같고 그럼 답은 하나네. 한스를 설득해봐. 네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을 모두 정직하게 말한다면 살려주는 것은 쉬우니깐.”

    후버의 말에 무언가 말하려던 로한이 우물쭈물하며 뒷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혹시라도 도둑길드와의 문제를 생각하는 거라면 여기서 아무 말도 안 한다면 너는 100% 죽게 되지 하지만…….”

    후버가 품을 뒤져서는 붉은 사파이어 하나를 꺼냈고 영롱한 붉은색의 사파이어가 로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네가 도둑길드에 이 정도 이상의 가치가 없다면 내가 너를 도둑길드에서 사도록 하지.”

    “노예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아직 시세를 모르나 본데 사파이어 하나면 너 정도 나이의 노예를 10명은 살 수 있어. 그런 돈 낭비를 내가 할 리가 있을까?”

    “그럼? 저를 산다는 말씀은?”

    “너와 너에 대한 정보를 조작하는 가격이지. 도둑길드도 자존심은 있으니 허무맹랑한 가격을 이야기하다가 괜히 반발을 사면 곤란해지거든.”

    “모두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말 저를 살려주실 건가요?”

    “네가 하기에 따라서.”

    어깨를 한번 으쓱한 후버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로한은 바닥을 쳐다보며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더 이상은 기다려 주기가 곤란해 쓸모를 증명하던지 아니면…….”

    “알겠어요. 말씀드릴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들었던 내용을 대부분 정확하게 기억할 수가 있어요.”

    “예를 들자면?”

    후버가 흥미를 느낀 부분이 이 부분이기에 후버가 로한에게 재차 질문했다.

    “그러니깐 제가 여기 처음 떨어진 시점부터 말씀을 드릴게요.”

    “그건 너무 짧은데… 일단은 해봐.”

    후버의 지시에 로한이 이곳에 떨어졌을 때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후버가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후버가 기대한 수준보다는 정확하게 기억하는 듯했다.

    “그만. 잠깐, 이 책을 읽어봐라. 읽은 내용도 기억할 수 있겠나?”

    “직접 격은 일보다는 못 하지만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시작해봐.”

    로한은 후버가 전해준 책을 천천히 읽고는 후버에게 건네주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약간의 오류는 있었으나 일반인이라면 불가능할 정도의 기억력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군. 한스, 네 생각은 어때?”

    “어떤 방식으로도 쓸모가 있을 것 같군.”

    “사파이어 하나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사용하기 나름이겠지. 당장은 그 정도의 가치는 없겠지만 혹시 도둑길드도 너의 이런 능력을 알고 있나?”

    “아마 모를 거예요. 그냥 그들은 제가 다른 사람보다 글로 쓰는 것이 빨라서 정확하게 보고할 수 있다고 알고 있어요.”

    “아까는 한 번 들은 것은 대부분 기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능력을 숨기고 있는 건가?”

    “그건 너무 갑작스럽게 물어보니깐 저도 모르게… 평소에는 튀고 싶지 않아서 그런 말은 안 하고 있어요.”

    결국은 도둑길드에서 느끼는 로한의 가치는 도둑질 실력은 다소 떨어지고 글은 달리 쓰니 어딘가 염탐을 보내기에는 좋은 정도 하지만 도둑길드에 염탐 등의 일을 맡기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테니 별가치가 없는 수준이라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도둑?”

    “네?”

    “값을 지불하고 사려면 판매자를 만나야겠지. 도둑길드의 위치를 말하던가 아니면 그들에게 연락은 어떻게 하지?”

    “연락을 하는 건 간단해요 의뢰인이 연락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마을 주점 뒷문에 파란 천을 떨어트리면 그들이 찾아올 테니까요.”

    “파란 천이라… 한스, 혹시 파란 천 가지고 있는 것 있나?”

    파란 천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색상이기에 한스 역시 파란 천이 있을 리는 없었다.

    “제가 가지고 있어요.”

    “좋군, 그런데 이곳을 감시하는 것이 너 하나만은 아닐 것 같은데.”

    “저도 잘 모르지만 아마 멀리서 감시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도 더 있을 거예요.”

    “그자는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겠군.”

    “아마 그럴 거예요.”

    “좋아, 그럼 일단은 파란 천을 나에게 주고 너는 내가 나간 후 10여 분 있다가 나오도록 나와 한스는 시체를 꾸미도록 할 테니.”

    후버는 마법가방 안에서 넓적한 가죽 가방을 꺼내고는 그곳에 로한의 크기 정도가 될 정도로 베게와 이불을 우겨넣었다. 몇 번을 손으로 두들기며 모양을 대충 만든 후버는 가방의 가운데에 금덩이 몇 개를 넣는 것으로 대략적인 무개를 조정했다. 너무 가벼워 보이면 티가 나고 허리춤을 잡고 가는데 다리나 머리 부분이 땅에 처지지 않는다면 그 역시 시체가 아니라는 의심을 살 수가 있으니 최소한의 중량으로 최대한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도록 금괴의 위치를 세심하게 조절했다.

    “대충 이 정도면 되었군.”

    한스는 금괴를 꺼내서 아무렇게나 다루는 후버를 보고 도대체 마법사의 재력이 얼마나 되기에 저렇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였지만 괜한 질문으로 후버의 신경을 거스르기 싫은지 입을 꾹 다물고는 한스와 후버가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럼 먼저 나가지. 아무 술집이나 상관없다고 했지?”

    “네, 하지만 여관과 술집을 모두 하는 곳은 아니에요. 술집만을 하는 곳을 골라야 해요.”

    “그럼 잠시 후에 보도록 하지. 볼 위치는 여기서 서쪽으로 5km쯤 가면 나오는 숲의 초입으로 하지. 괜히 그전에 도둑길드에 잡히지 않으려면.”

    가방을 뒤적이던 후버가 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후드를 로한에게 건네주었다.

    “얼굴은 확실히 가리고 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무언가 자신이 이해하기 전에 발생하는 현상에 로한은 얼떨떨했지만 이내 후버의 말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버가 나간 지 10여 분 후에 후버가 지시한 대로 서쪽으로 달렸다.

    평소에는 한가한 서쪽 숲의 초입. 딱히 장소를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후버가 파란 손수건을 떨어트리고 숲의 초입에 도착하자 5분여가 안 되서 마을로부터 3명의 건장한 남자가 후버와 한스에게 접근했다.

    “그쪽이 이 손수건을 남겨두었소?”

    후버에 앞에 파란색의 천을 흔드는 남자의 모습에 후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면 후버가 남긴 천은 아니었지만

    ―길드에 마법사가 있을 수도 있으니 한스, 너는 저들과 협상이 결렬된다면 원거리 마법 공격에 대비하도록.

    톡.

    한스가 살짝 바닥을 발뒤축으로 치며 후버의 말을 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불렀는데 자네가 결정권자인가?”

    “어느 물건이지? 물품가액에 따라 다르다.”

    “대충 이 정도.”

    후버는 로한에게 보여주었던 사파이어를 모여 있는 남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일순 탐욕이 깃든 눈길을 사파이어에 보내던 남자들이 잠시 서로 무언가를 상의하기 시작했다.

    “내 선에서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진 것을 거래하는 것은 힘들다. 여기서 기다린다면 길드장님을 불러 오도록 하겠다.”

    “그러도록 하지.”

    한 명의 남자가 무리를 이탈해서 2:2의 대립 상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쪽에서 두건을 눌러쓴 로한이 쪼르르 달려와 후버의 옆에 섰다.

    “누구인가?”

    “거래할 대상 로한 이제 두건은 벗어도 좋다.”

    후버의 말에 로한이 두건을 벗자 남자들이 로한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너희도 아는 인물이야. 전직 도둑길드의 일원이었으니깐.”

    “어쩐지 낯이 익다 했다. 저자를 사기 위함인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런 것치고는 대가가 너무 큰 것 같군.”

    “자세한 사항은 길드장이 오면 이야기하도록 하지.”

    후버가 대화를 끊어 버리자 남자들 역시 조용히 자리를 지킬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략 30여 분 정도가 지나가 길드장이 멀리서 무리가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꽤나 비싼 물건을 살 사람이 자네인가?”

    대략 50세 이상은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후버에게 말을 걸었다. 펑퍼짐한 의복으로 인해 신체의 상태를 정확하게 측정하기는 힘들었지만 두꺼운 손가락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현직 도둑의 모습은 아니었다.

    “도둑으로 보이지는 않는 모습이군.”

    솔직한 후버의 평가에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던 길드장이 피식 하고 실소를 지었다.

    “그쪽도 돈이 그다지 많아 보이지는 않는군.”

    “돈은 없고 보석은 조금 있지.”

    품 안의 사파이어를 튕겨서 길드장에게 던지자 길드장이 날렵하게 손을 움직여 사파이어를 낚아챘다.

    “너무 서로 간을 보지는 않도록 하지.”

    “나야 척하고 보면 마법사지만 그쪽은 도둑처럼은 보이지 않으니 이 정도는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후버로서는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기 위해 제법 빠른 속도로 가장 잡기 어려운 몸의 한가운데로 보석을 던졌지만 길드장은 고개도 숙이지 않고 쉽게 보석을 받아내었다. 이 정도 정보로 많은 것을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도둑질이든지 무력이든지 일정 수준 이상에 이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런 귀한 것을 주고 고작 얻고자 하는 게 저 여물지 않은 도둑 한 명인가?”

    “어딜 날로 먹으려 들고 그러나?”

    “역시 본심은 따로 있었나 보군.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어디 조건이나 말해보도록 하게나.”

    이미 사파이어를 품 안에 넣은 사람이 하는 말로는 설득력이 다소 떨어졌지만 후버는 의외로 말이 통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로한을 나에게 넘기는 것. 두 번째로는 로한을 의심을 사지 않게 와일리 상단으로 취업시키는 것. 세 번째로는 와일리 상단에 나에 대한 정보를 대충 갈 곳 없는 용병으로 조작해 주는 것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아… 마지막으로 혹시 살로스라는 자를 아는가?”

    “살로스라면 어린 시절부터 이 지역에서 자란 아이 중 한 명이지. 나름 이 지역 안에서는 성공한 축에 들어서 이름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 그런데 그건 왜 묻지?”

    “그에 대한 정보 일체.”

    “그건 정보길드가 하기에 적합한 일이지 도둑길드가 할 만한 일은 아닌데.”

    “적합한지 아닌지는 사파이어한테 물어보도록 해줬으면 좋겠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뭐… 금액 적으로는 충분하지. 양심적인 거래를 약속했으니 그 부분은 부정하지 않겠네. 정보가 필요한 것은 언제지?”

    “당장이었으면 좋겠군.”

    후버의 말에 길드장이 한 번 손짓을 하자 길드장을 에워싼 남자 중 한 명이 다시금 마을을 향해 뛰어갔다.

    “다음부터는 마을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군. 내 부하들만 고생을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다시금 30여 분의 시간이 지나자 헉헉대며 돌아온 도둑길드의 남자가 두루마리 하나를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의뢰인과의 의리를 저버려도 되는 건가?”

    “도둑이 의리를 찾는다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지. 그쪽도 의리가 필요한 일이라면 도둑길드 보다는 어쌔신 길드를 찾는 게 좋을 거야. 특히 정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솔직하군. 혹시라도 와일리 상단에서 또 다른 의뢰가 들어오면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겠지?”

    “얼마든지 그쪽보다는 이쪽이 인심이 후하다는 거는 증명된 것 같으니깐.”

    품 안에 널어둔 사파이어를 다시금 꺼내서 이리저리 살피던 도둑길드장이 마을로 걸어가자 뒤를 따르던 길드원 역시 몸을 돌려서 마을로 걸어갔다.

    “로한의 문제나 와일리 상단의 문제는 이 정도면 해결이 된 듯하고 문제는…….”

    “살로스로군.”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너 하기에 달렸지. 도둑길드에서 계기는 마련해 주겠지만 그걸 이용할 수 있는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너의 능력이니깐 말이야.”

    후버의 말에 로한이 고개를 숙이고 땅만 쳐다봤다. 모르긴 몰라도 후버가 건넨 사파이어의 가격 중 절반은 자신의 목숨 값이었을 것이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좋은 질문의 전환이군. 무슨 일이든지 상관없어. 그저 네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면 되는 거야.”

    “만약에 그러지 못 한다면요.”

    “글쎄? 나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는 않으니 네가 편한 데로 살 수 있겠지.”

    편한 대로 살 수 있다는 말에 로한은 안심이 되는 것보다는 뭔가 실망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경황이 없어 생각하지 못하였지만 후버가 매긴 자신의 가치는 처음의 붉은 사파이어부터 시작해서 협상이 지남에 따라 정보료를 포함하는 계산으로 점점 내려가더니 결국에는 자신의 행동에 따라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스스로에게 실망이 든 까닭이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네가 하던 일을 와일리 상단의 상단주 크럭스에게 훌륭하게 성공시킨다면 너의 가치가 그만큼 높아지겠지.”

    “그럼 후버 님께서 도움을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도둑길드를 통해서 로한을 왕일리 상단에 잠입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후버는 로한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도움이라…….’

    생각해 보니 도둑길드로 로한을 잠입시킨다고 해도 짧은 시간 동안 로한이 얻어올 수 있는 정보는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정보보다는 적을 듯했다. 기껏해야 용병의 모집공고를 통해서 용병으로 잠입을 시키거나 간단한 심부름꾼 정도일 텐데 이 정도로 양질의 정보를 얻기는 불가능할 듯이 보였다.

    “좋아, 약간의 도움을 주도록 하지. 이쪽으로 오도록.”

    생각을 마친 후버는 로한을 데리고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로한을 이용하기에 적정한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로한과 후버가 숲속으로 들어갈 때 크럭스는 총관이 가지고 온 후버와 한스의 용병 기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너무 경력이 짧군.”

    “네, 전쟁터를 떠돌았다고는 하지만 그런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번 우리 상단의 경비를 맡은 것이 두 번째 의뢰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겨우 두 번째인 것도 그렇지만 이 첫 번째 의뢰를 받은 곳이 록시나 자작가라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걸리는군.”

    크럭스의 말에 총관 역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거래와 약간의 뒷돈으로 용병대기소에서 얻은 한스와 후버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도 단출하였다. 의심의 시선으로 보자면 끝없이 의심이 가능한 것이다.

    “역시 이자를 내쳐야 할까요?”

    2주마다 갱신되게 계약을 했으니 후버나 한스를 외부로 보낸다고 하여도 계약상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다른 마법사를 수소문하는 것이 귀찮기는 했지만 크럭스가 가진 재력으로 그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자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라면? 아니지, 이자가 정말 그들과 한패라면 쫓아내지 않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크럭스을 총관이 이해하지 못했다. 적과 한 패라면 쫓아 버리는 것이 더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크럭스는 한패라고 해도 쫓아내는 것이 좋은 작전이 아니라고 하니 이해가 되지가 않은 것이다.

    “그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여러 모로 도움이 되겠지. 우리에게 마법사가 없으니 그 부분을 보충해 줄 것이고 근무 태도도 그 누구보다 우수하니 말이야.”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패라도 쫓아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만약 그자가 고용되지 않는다면 적으로서는 첩자를 침입시키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결국 적이 무엇을 준비하던 간에 육탄전으로 돌격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현재 전력에서 마법사와 유능한 기사까지 추가된 적을 현재의 병력으로 방어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가?”

    “그것은…….”

    총관이 머리를 굴려 봐도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았다. 크럭스가 지적한 대로 만약 적이 급습을 한다면 피해를 보는 것은 와일리 상단일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는 와일리 상단이 전멸하는 상황 역시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조용히 그자를 테스트할 필요성이 있어. 아주 조용히 말이야.”

    총관과 크럭스 두 사람이 모두 침묵하였다. 단순히 총관의 평가를 들었을 때는 살로스를 불러 들여 그들의 용모를 확인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듯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단순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이것은 어떻습니까?”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총관이 크럭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한번 말해보게.”

    “지금 우리 상단의 문제는 크게 3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로는 마탑과의 거래. 두 번째로는 사만다가 운영하는 상단으로 인한 단기적인 금괴의 부족. 세 번째로는 적의 잦은 습격. 이렇게 3가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부과적으로 국경 밖으로 금괴를 아무도 모르게 빼돌리기 위한 인력이 부족한 문제 역시 존재하고 있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후버나 한스와 같은 자가 당장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금괴 본국으로 운송하면 나머지 문제들이야 크게 신경을 쓰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상단주님과 저는 원행을 간다는 핑계로 이곳과 잠시 떨어져 있으면 적이 노리는 것이 상단인지 아니면 상단주님인지도 확실히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 부분도 정확하게 아는 것도 필요하고 골치가 아프군.”

    “그럼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간단한 방법이라는 말에 크럭스가 흥미가 생겼는지 턱짓으로 총관에게 더 말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록시나 자작가의 자작인 슈웨거를 암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지?”

    “아무래도 이웃 영지의 귀족이 사망했다고 하면 이곳 역시 경비가 삼엄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럼 자연히 불손한 무리들의 움직임이 위축될 것이고 영지 내부의 경계가 강화되는 동안 영지 외부까지 연결된 지하 통로로 금괴를 운반하시면 될 것입니다.”

    귀족인 슈웨거 자작을 죽인다는 말에 크럭스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확실히 그 정도의 일이라면 이곳 영지의 영주 역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치안력을 올릴 것이고 불손한 무리들이 한밤중에 자신의 상단을 공격하는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슈웨거 자작을 암살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였다. 크럭스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총관이 자신이 한 말을 보충해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크럭스 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국에서는 슈웨거 자작을 사살하고 금괴를 회수하라는 명령이 이미 1년 전에 내려온 상태입니다. 단지 우선순위가 낮아서 지금까지 실행하지 않은 일인 만큼 이번에 해결하심이 어떨까 합니다.”

    크럭스의 기억에도 최우선 순위는 아니었지만 슈웨거 자작의 모든 자금줄을 말리라는 명령과 함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슈웨거 자작과 그 딸을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 기억이 났다.

    “아마 슬레인 자작과의 연결고리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그렇습니다. 원래는 본국에서는 슬레인 자작을 지원하여 본국과 국지전을 일으키고 그것을 전쟁의 명분으로 삼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만 그 멍청한 자가 레빌리온 백작가를 먼저 건드리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쓸모없는 말조차도 사치스러운 놈이었지. 하지만 슈웨거 자작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저 상단만을 공격하는 것을 주로 하고 사살에 대한 명령의 우선도는 매우 낮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괜찮을 것 같은가?”

    “사살에 대한 명령 자체가 취소된 것은 아니기에 별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격을 할 때에 후버와 한스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후버와 한스를 이용하는 것은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들로서는 우리의 이런 명령 자체가 일종의 억지로 보일 수도 있을 텐데 그 부분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

    “그것은 그들에게 어쌔신 길드를 찾아가 조력을 받으라는 말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준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금전적 보상이라면 많은 돈이 들어가겠군. 거기다가 어쌔신까지 고용한다면 말이야.”

    귀족의 목숨이 일반 평민들의 목숨처럼 저렴한 것은 아니기에 총관의 말대로 어쌔신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키는 선택은 아니었다.

    “슈웨거 자작이 일반 귀족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요즘 들어서는 직접 상행을 지휘하기 위해 영지를 떠나는 경우도 간혹 있으니 슈웨거 자작을 암살하는 것 자체의 난이도는 높지 않은 편입니다.”

    총관의 말대로 지속적인 습격을 받던 슈웨거 자작은 자신의 상단을 습격하는 무리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자주 변장을 하고 상행에 동참하곤 했다. 슈웨거 자작으로서는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지속적으로 슈웨거 자작을 주시하던 와일리 상단은 그러한 변화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 살로스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은 부르신 명령을 취소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살로스를 보고 자신들의 정체가 들어나기 전에 총공격을 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후버와 한스가 습격자들과 연관이 있다는 가정 하에 말입니다.”

    “혹시라도 그자가 슈웨거 자작의 암살을 계획했다고 신고를 하게 된다면 그 역시 큰 문제가 아닌가?”

    큰 줄기의 일이 수정되자 사소한 부분 역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총관과 크럭스는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한스와 후버에 대한 판단과 슈웨거 자작의 암살을 위한 방법을 논의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지이잉. 지이잉.

    야간 근무 교대를 하기 위해 여관을 나서던 후버의 품에서 통신구의 진동이 느껴졌다. 이미 슬렌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알고 있던 후버이지만 모르는 척 타이킨의 이름이 떠 있는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 넣어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총관님.”

    ―혹시 지금 상단으로 오고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오늘은 한스 님과 후버 님 둘 모두 상단에 올 필요가 없습니다. 잠시 아무도 이 통신을 엿들을 수 없는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통신이 끊기고 후버는 아직 여관방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한스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타이킨 총관이 연락을 했네. 아무래도 어제 슬렌이 말한 그일 때문인 것 같아.”

    “슈웨거 자작의 암살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살로스라는 자가 이곳으로 오지 않아서 한시름 놓았는데. 슈웨거 자작을 암살하라니… 차라리 살로스 그자를 해치우는 것이 더 편할 뻔했어.”

    도둑길드와의 거래를 생각한 후버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최소한 살로스 그자라면 외부의 인물이 아닌 영지 내의 인물인 만큼 설득을 하기도 협박을 하기도 좋을 것 같아 해법을 찾았다고 생각했건만 불과 하루 만에 계획을 바꾸는 크럭스와 총관으로 인해 사파이어 하나를 땅에 버린 것과 다름이 없어진 것이다.

    “총관은 슈웨거 자작을 암살한다는 말을 아직은 하지 않은 것이지요?”

    타인이 기대하는 것보다 많은 정보량을 가지고 있으면 간혹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타인에게 발설하여 의심의 씨앗을 심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어디까지 대화가 진행되었는지 한스가 물었고 후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였다.

    “그럼 총관에게 연결하도록 하지.”

    지이잉.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것인지 통신구가 연결되자마자 총관이 후버의 통신을 받았다.

    ―조용한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계약 외의 일이지만 처리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이렇게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잠시 고민을 하듯이 후버가 머뭇거렸다.

    “어떤 일입니까?”

    ―일단 들으시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강하게 나오는 타이킨 총관의 말을 들은 후버는 다시 고민하듯이 잠시간의 시간을 끌었다.

    ―대신 수고비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의뢰비는 300골드 실제적인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고 후버 님은 그저 감시만 해주시면 됩니다.

    “성공하게 되면 어느 정도의 금액을 주시겠습니까?”

    300골드의 의뢰비에 구미가 당긴다는 듯이 후버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서 타이킨 총관에게 물었다.

    ―한 분당 500골드를 추가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총 의뢰금은 한 분당 800골드. 대신 이일이 끝나면 영지 밖으로 나가주셔야 합니다.

    800골드라면 분명히 적은 금액의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슈웨거 자작을 암살할 것을 알고 있던 후버는 오히려 그 금액이 적게 느껴졌다.

    “뭐랄까… 영지 밖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도망을 가라는 말씀 같은데 이곳 일대를 꽉 잡고 있는 와일리 상단에서 하는 일이 그 정도 위험이라면 저는 이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래서 마법사는 다루기가 까다로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말씀드렸듯이 일 자체는 후버 님께서 하실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결행일은 일주일 이후의 일입니다. 단 1~2주 만에 거금을 얻을 수 있는 일입니다.

    반드시 설득시키겠다는 의지가 통신구를 넘어서 후버에게 전해졌다.

    “그럼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만약 상황이 안 좋아져서 제가 손을 쓸 일이 생긴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았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타이킨이 고민에 들어갔다.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발휘한다면 이 정도는 가능할 듯도 했다.

    ―좋습니다. 그 정도는 제가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정식적으로 두 분과의 고용 관계를 끊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그저 대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예, 머무시는 여관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늦어도 2주 안에 보낼 테니 잠시만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타이킨과의 통신이 끝나고 후버는 다시 한 번 사일런스 디멘션을 이용해 소음을 줄이고는 한스와 상의에 들어갔다. 앞으로 2주 안에 슈웨거 자작을 암살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판이니 사태의 수습을 위해 빨리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후버, 한스, 그리고 슬렌까지 참여한 대화로 슈웨거 자작에 대해 어떻게 할지 고민했지만 아쉽게도 서로 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후버의 경우는 깔끔한 일처리를 위해서 슈웨거 자작의 죽음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었지만 한스와 슬렌은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자와 비슷한 다른 자를 이용해서 사망을 꾸밀 수는 없는 것입니까?”

    “아마 힘들겠지. 알다시피 암살자의 경우 귀족의 시체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충분히 감별할 수 있으니. 그리고 슈웨거 자작이 그렇게 보호할 가치가 높지는 않아.”

    “보호할 가치가 높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았나요?”

    “여러 가지로 협조를 했지. 게다가 이런 보고가 왕국에도 올라갔을 테니 왕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후버 역시 그러한 부분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 일은 와일리 상단이 자신들을 의심하여 생긴 일인 만큼 한 치의 의심이 없이 처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한스, 암살자들은 어떻게 귀족의 정체를 확인하는 거지?”

    “방법은 간단합니다. 먼저 대상자를 암살하기 전에 대상의 혈액 샘플을 채취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암살한 이후에 그 샘플과 혈액을 대조해 보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럼 시체는 회수하지 않는 건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시체를 회수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암살을 행한 사람이 그러한 증거품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되는 경우도 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일이 좀 더 간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혈액 샘플을 바꿔치기 하면 되는 것이다. 마침 이 일의 전문가도 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슈웨거 자작이 죽고 나면 샘플을 채취할 텐데 이 부분이 문제야. 누군가는 죽어야 하거든 누군가는…….”

    “그 문제는 슈웨거 자작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모두 자신의 복이겠지요. 귀족이 자신을 위해 죽어줄 사람 하나 없다면 인생을 잘못 산 것 아니겠습니까?”

    가문이 걸린 일에 괜한 온정에 이끌리기 싫었던 후버는 한스의 말에 약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처리해 주는 것보다 슈웨거 자작의 인복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그럼 그 일은 한스가 이야기한 대로 처리해 주도록 하면 좋겠군. 나는 이곳을 지킬 테니 슬렌과 한스 둘이서 슈웨거 자작을 만나서 잘 협상해 보도록 만약 슈에거 자작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에게 말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최후의 상황 슈웨거 자작이 예상 밖의 행동을 하면 대리영주의 권한을 내새워서라도 그의 죽음을 강요하는 수밖에 없기에 후버는 한스에게 만약의 경우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한스의 설득에 고민을 하던 슈웨거 자작은 결국에는 후버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한스의 설명에 동의하였다. 후버로서는 비밀카드인 대리영주의 자격을 사용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고 슈웨거 자작은 자신을 대신하여 암살당할 평민을 어렵게 섭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여의 시간이 지나고 한스가 록시나 영지에서 복귀한 지 3일째 되는 날, 타이킨 총관에게 연락이 들어왔다.

    ―내일 밤이 영지와 록시나 영지를 잊는 관도의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마차 위에 붉은 깃발을 올리고 관도를 달리신다면 상대가 후버 님에게 연락을 해 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타이킨 총관 그럼 이것이 총관님과 통신을 하는 마지막이 되겠군요.”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버 님과 같이 유능한 사람을 찾기 힘들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고용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습니다. 모은 일이 끝나면 그쪽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줄 것입니다. 후버 님은 그 상자를 저에게 전해 주시면 됩니다.

    “저야 상관이 없습니다만.”

    ―꼭 부탁드립니다.

    처음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와일리 상단에 복귀할 수 없다는 말에 작전의 차질을 느낀 후버였지만 다행히도 와일리 상단으로의 복귀가 가능할 것 같아 안심을 하였다.

    ―그럼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뵙겠습니다.

    타이킨 총관과의 통신을 끊은 후버는 얼른 짐을 꾸려 총관이 말한 지점으로의 이동을 시작했다. 미리 슈웨거 자작에게 들은 이동경로에 비추어 보았을 때 시간상 슈웨거 자작이 자신의 영지를 벗어나는 시점에서 습격을 하는 듯했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는 것이 이상하군요.”

    너무도 일찍 온 것일까?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약속 장소 즈음을 여러 번 왕복했지만 약속한 연락이 아직 오지 않았다.

    “아마도 좀 더 기다려야겠군.”

    어차피 후버로서는 마차 안에만 있으면 되는 일이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고 한스 역시 마부석에 앉아서 천천히 말을 모는 일이라 그다지 피로가 느껴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 다시 한 바퀴 더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스가 다시 한 번 약속 장소 부근을 돌기 위해 마차의 방향을 바꾸려는 찰나.

    퍽.

    갑작스레 날아온 화살에 한스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서는 방어 자세를 잡았고 마차 안에 있던 후버는 한스의 경호를 받으며 마차에 뽑힌 화살을 뽑았다.

    ‘무언가 화살에 써 있군.’

    다행히도 화살의 목적은 인명의 살상이 아니라 연락을 위한 것인지 화살에는 통신구를 연결할 때 쓰이는 번호가 적혀 있을 뿐이었고 후버는 품 안에 있는 통신구를 적혀있는 번호를 입력해서 통신을 시도하였다.

    ―당신이 후버인가?

    통신의 감도가 좋지 않은 듯 웅웅거려 울리는 목소리지만 대화를 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을 듯했다.

    “그렇다.”

    ―서쪽으로 2km를 더 오면 파란색 깃발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은 불허한다. 너희 둘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참관뿐이다.

    “좋다. 그곳에서 보도록 하지.”

    한스와 후버는 마차를 숲의 안쪽에 안전하게 엄폐물로 감추어 놓고는 서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구에서 들은 파란색 깃발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뭐지?”

    “다시 한 번 통신구를 연결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후버가 통신을 연결하자 이번에도 웅웅거리며 통신이 연결되었다. 통신구 안에 사내는 이번에는 3km쯤을 이동하라고 했다. 그렇게 통신구의 지시에 따라 이동하기를 수차례 하자 후버는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우리를 뺑뺑이 돌리려는 것 같지는 않아. 아무래도. 뭔가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 같은데?

    후버의 매직마우스를 통한 말에 한스 역시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와 후버가 계속되는 위치 변동에 짜증을 느낄 무렵 처음으로 후버의 통신구에서 암살자로 부터의 연락이 왔다.

    ―너희들을 신뢰할 수 없다. 일처리는 내가 할 테니 너희들은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후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연결이 끊어지는 통신구에 후버와 한스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일단 한스와의 대화를 위해 후버는 일대를 사일런스 마법으로 감싼 후 한스에게 말을 걸었다.

    “왜 우리를 신뢰할 수 없다는 거지?”

    “딱히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대기할까요?”

    “지금은 그러는 수밖에.”

    후버가 사일런스 디멘션을 해제하고는 자리에 앉아서 마나명상에 들어갔고 한스는 그런 후버를 지켜 섰다. 한적한 숲속 후버는 생각을 정리하며 암살자가 자신들을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여전히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혹시 주변에서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우리는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군.

    후버의 매직마우스를 통한 말에 한스가 발뒤축을 살짝 부딪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충 3시간 정도?”

    “오래 걸리는군. 한 시간만 더 기다리다 타이킨 총관에게 일이 실패했다고 알려야겠어.”

    “그런데 타이킨 총관에게 그들이 우리를 제외하고 일을 처리했다고 하면 실망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럼 네 말대로 딱 한 시간만 더 기다려 보고 통신을 시도해 보고 일을 마치도록 하지.”

    그 후 후버와 한스는 간단한 신변잡기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단순히 용병들의 농담 따먹기와 같은 대화였지만 그 대화를 나누는 둘의 감각은 어느 때보다도 예민해져 있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지 30여 분 정도가 흐르고 한스의 감각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톡톡.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몸이 굳었다는 듯이 일어나서 발끝부터 몸을 푸는 한스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후버는 한스를 따라 굳어진 몸을 풀었다.

    “감이 좋군.”

    어딘지 모를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후버와 한스가 좌우를 둘러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방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인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지?”

    “그것까지는 알 것 없지. 너희들은 이 물건만을 건네주면 되니까 안에 있는 샘플이 깨지지 않게 조심히 다뤄 주었으면 좋겠군.”

    검은 인형은 품 안에 손을 집어넣고는 직사각형의 길쭉한 상자 하나를 후버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그것도 알 것 없다. 의뢰인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군, 따로 전할 말은 없는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아티펙트는 반드시 반납하도록 해달라고도 말해줬으면 좋겠군. 괜한 욕심을 부린다면 곤란해질 테니깐 말이야.”

    그 말을 남긴 암살자는 처음에 나타났듯이 사라졌고 후버는 마차로 가는 시늉을 하며 상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냥 봐서는 검은 금속제 상자 안에 목표의 혈액을 채취한 듯한 모습이 전부였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다이얼을 돌려서 암호를 맞추어 연다는 것 정도.

    ―마차로 돌아가면 최대한 조심히 마차를 몰아줘. 나는 이 상자를 천천히 살펴봐야 할 것 같으니깐

    후버의 지시에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 한쪽에 위장해둔 마차 안에 들어간 후버는 다시 한 번 상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최하급 마나석… 이 정도 크기라면 별로 대단한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겠고.’

    혹시나 도청 마법이라도 사용되었을 수 있기에 후버는 말을 자제하고 펜을 꺼내 표면부터 살펴보며 천천히 자신이 한 생각을 정리하였다. 더 이상 표면에는 특이한 사항이 없기에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다이얼을 하나씩 돌려보기 시작했다. 0~9까지 숫자가 적힌 다이얼이 6개 하나의 번호를 맞추어 보는데 1초가 걸린다고 했을 때 암호를 푸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적으로 999,999초 시간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후버는 한 개의 다이얼을 천천히 돌리며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굉장히 잘 만들었군. 단순히 돌리는 것만으로는 어떤 차이도 알 수 없어. 그럼 마나석을 사용한 만큼 마법적 차이를 한번 살펴볼까?’

    후버는 디텍트 마나를 사용하며 신중하게 다이얼을 하나씩 돌려보았다.

    ‘뭐지?’

    다이얼을 3개쯤 돌렸을까? 후버의 감각에 마나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일단 감지된 마나의 흐름을 무시하고 조금 더 다이얼을 돌려 보았다. 마나의 유동이 느껴진 것은 3과 8.

    ‘두 번의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다이얼은 아니군. 분명이 무언가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다는 것인데.’

    후버는 다이얼을 1로 맞추어 놓고 처음 자신이 하급 마나석이 있다고 생각한 지점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그저 겉만 봐서는 빈틈을 찾아낼 수는 없겠지만 자유롭게 흐르는 마나의 흐름상 마나석의 맥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5분여가 흘렀을까? 한참을 집중하던 후버에게 마나석의 맥박이 느껴졌다. 흔히 최상급의 마나석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현상이지만 마나의 흐름에 민감한 후버는 어떠한 마나석이던지 그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3초에 1번 정도인가?”

    규칙적으로 사람이 숨을 쉬듯이 마나석에서 마나가 방출되고 흡수되기를 반복했다. 신중하게 타이밍을 잰 후버는 마나석이 마나를 방출하고 다시 흡수하는 순간 자신의 마나를 마나석에 주입하였다. 후버가 주입하는 마나의 양이 많아질수록 상자 안의 마나 회로의 흐름이 눈에 보이듯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누구지? 이 정도로 정교한 마나의 흐름을 새겨놓은 사람이?’

    상자 안의 마나회로를 살펴본 후버의 감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상자 내부에 정규하게 새겨진 러스트 마법 그리고 다이얼이 맞춰지는 방식에 따라서 러스트 마법이 발현되기도 했고 내부 마법진이 파괴되기도 하는 방식의 연결.

    ‘5와 0을 기준으로 다이얼의 방향을 조정 하는 방식이군. 3이라면 다이얼을 위로 돌리고 8이라면 아래로 돌리는 식으로.’

    생각 없이 돌리거나 1부터 끝까지 돌리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는지 제법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었지만 구조를 아는 이상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쉬웠다.

    ‘첫 번째 것을 맞추지 않고 나머지 것을 모두 맞춘 후 마지막에 연결해주면 되겠군. 순서까지 확인하는 것은 아니니까.’

    마법사가 아니라 단순히 도둑이라면 마법진이 파괴되는 구조 마법이 정확하게 숫자를 맞춘다면 러스트 마법이 작용하여 내부에 보관하고 있는 피를 굳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 듯했다. 문득 후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의문.

    ‘피가 굳어도 동일인인지 아닌지 테스트가 가능한 것인가?’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한 지식은 후버에게 있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버는 이번에는 마나석의 마나를 조금씩 빼내기 시작하였다. 맥박을 할 때마나 뿜어져 나오는 마나를 가둬두는 한편 주변의 마나가 유입되지 않도록 명상을 통해 흡수하기를 5분여 하급 마나석의 얼마 되지 않는 마나가 모두 소모되고 아주 약간의 마나만이 마나석에서 느껴졌다. 이 이상의 마나를 뽑아낸다면 하급 마나석은 그저 쓸모없는 돌덩이가 될 정도의 미약한 마나 양.

    ‘지금!’

    후버는 재빨리 다이얼을 맞추었다. 하급 마나석에서 마법진으로 마나가 딸려 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미약한 마나가 만들어내는 러스트 마법은 혈액의 보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다시 마나석 안으로 돌아갔다.

    ‘이런 방식이군. 이제 이 혈액 샘플을 슈웨거 자작의 것으로 바꿔 치기 하기만 하면.’

    품 안을 뒤져 슈웨거 자작의 혈액 샘플로 바꿔치기 하려던 후버의 손이 멈칫했다.

    ‘뭔가 이상한데… 상자 안에는 러스트 마법이 걸려 있고 정상적으로 빼낸다 한들 러스트 마법에 의해서 산화된 혈액으로 알아 낼 수 있는 정보는 없을 텐데.’

    후버의 상식 안에서 러스트 마법으로 응고가 된 피를 이용해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슈웨거 자작의 혈액 샘플과 상자 안의 샘플을 눈으로 비교하던 후버는 혈액을 담을 때 사용하는 빈 앰플 병을 손에 들고는 조용히 스펠링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체인지 컨테이너.”

    주로 시약을 다루는 마법사들이 외부의 오염원과의 접촉 없이 시약을 이동시킬 때 사용하는 체인지 컨테이너 마법이 펼쳐졌고 직사각형 상자 안의 앰플 병에 들어 있던 피가 빈 앰플 병으로 이동하여 원래의 앰플 병에는 약간의 잔여물만이 남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후버가 앰플 병을 붙잡고 흔들자 원심력에 의해서 벽면에 남아 있던 약간의 피들이 앰플 병 바닥에 모였다. 한두 방울 정도의 양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혈액이 일치하는지는 검사할 수 있었기에 후버는 품속을 뒤져서 슈웨거 자작을 대신 하기로 한 평민의 피 두 방울을 앰플 안으로 넣고 몇 개의 시약을 첨가하였다.

    ‘만약 피가 일치한다면 섞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층을 만들겠지.’

    후버가 앰플 병을 흔들자 섞인 혈액 안에서 약간의 빛이 새어나오면서 시약들이 서로 섞이고 있다는 것을 후버에게 알려주었고 십여 초가 어른거리던 주황색의 빛이 자취를 감추자 뒷면에 하얀 천을 대고 앰플 안을 바라보았다.

    ‘두 개다!’

    동일한 혈액이었으면 섞어야 하지만 혈액은 무색의 시약을 중심으로 둘로 나뉘어 섞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은 슈웨거 자작을 대신한 평민의 혈액은 아니라는 것이 되기에 후버는 이번엔 슈웨거 자작의 혈액 샘플로 확인해 보았지만 그 역시도 섞이지 않았다. 슈웨거도 아니고 평민도 아니라는 결과에 후버는 마지막으로 앰플 병에 있는 혈액을 수정구에 묻혀 공중으로 띄웠다. 반경 20km 정도까지 탐지하기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이것이 후버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다행히 어디론가 날아가는 수정구를 보고 약간의 기대를 걸어보는 후버였다.

    ‘일단 혈액은 교환하지 않는 게 좋겠군. 혹시 모르는 일이니깐.’

    혈액과 최하급 마나석의 위치를 원상태로 복귀하고 반나절을 꼬박 마차를 몰고 달리자 다시금 와일리 상단 근처로 복귀할 수 있었고 상단의 입구에서부터 타이킨 총관이 오랜 시간 기다린 듯 후버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서둘러 마차를 인도하여 상단 안쪽 깊숙한 곳으로 후버와 한스를 안내하는 타이킨 총관.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쪽에서 무언가 주지 않았습니까?”

    말을 조심하기 위해서인지 직접적인 단어의 선택을 피하는 타이킨 총관에게 후버가 검은 직사각형 상자를 건네주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그자가 이것을 주기는 했지만 그자가 무엇을 하는지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타이킨 총관님, 그들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직접 확인을 하지 못했다는 후버의 말에 타이킨 총관의 눈에 후버를 향한 약간의 의심이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그럼 후버 님은 이것만 받아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자가 우리를 믿을 수 없다며 혼자서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현장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저 역시 그자를 신뢰하기가 힘들군요.”

    태연하게 타이킨 총관의 시선을 받아 넘기는 후버의 태도에 타이킨 총관도 그들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일단 잠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검은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 두고 품 안에서 앰플 하나를 꺼낸 타이킨은 검은 상자의 비밀 번호를 하나씩 맞추기 시작했다.

    “쉴드.”

    “후버 님, 무슨?”

    타이킨이 암호를 모두 입력하는 시간에 맞춰서 후버가 카이킨과 자신에게 쉴드 마법을 사용하자 놀란 타이킨이 후버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뭔가 마법적인 움직임이 느껴지기에 일단 쉴드 마법을 이용해서 보호한 것뿐입니다.”

    “그것이라면 괜찮습니다. 저 역시 알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괜히 과민반응을 한 것 같습니다.”

    후버 역시 방금 전 느꼈던 마법적인 기운이 어디까지나 상자의 러스트 마법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모른 척을 하기 위해 취한 조치이니 만큼 타이킨 총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쉴드 마법을 디스펠해버렸다.

    “대단한 순발력이시군요. 후버 님을 보면 실전 전투 마법사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후버와 대화를 하며 타이킨이 상자 안의 앰플을 꺼내자 그 안에는 약간은 진득한 느낌과 검은색의 느낌을 주는 혈액이 천천히 타이킨 총관의 손짓에 따라 병 안에서 유동했다…….

    ‘아… 완전히 굳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진득한 정도로 만들 정도로군. 그래서 마나량이 가장 적은 최하급 마나석을 사용한 것이고 만약 누군가가 저 앰플을 미리 꺼내서 확인했을 경우에는 중첩된 러스트 마법의 효과로 인해 완전히 굳어 버렸겠어.’

    “받기로 한 물품을 정확히 받은 것입니까?”

    “조금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대충 맞는 것 같습니다.”

    타이킨 총관 역시 후버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시약을 넣고는 앰플 병을 흔들었다. 약간의 빛과 함께 흔들리던 용액의 발광이 끝나자 타이킨 총관은 하얀 천을 앰플 병 뒤에 대고는 확인하였다.

    “의뢰는 성공했습니다. 조만간 다시 연락을 드릴 테니 일단 숙소에서 대기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일주일 후 마탑에서 경쟁 입찰에 대한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 전에 해주실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후버와 타이킨이 서로 인사를 한번 하고 헤어지는 순간 후버는 타이킨의 눈빛에서 후버를 완전히 신뢰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정신없이 피곤한 하루였습니다.”

    평소 묵던 여관으로 돌아와 디멘션 사일런스 마법을 펼치고 나자 한스가 후버에게 말을 했다. 한스로서는 현재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일단 설명해 줄 테니깐 한스 네 생각을 말해봐.”

    후버는 한스에게 간략하게 검은 직사각형 상자와 혈액이 담긴 앰플 등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일단 상자에는 내 피를 묻혀두었고 상자를 수정구가 공중에서 따르고 있을 거야. 그리고 주인 모를 피에 대서도 수정구가 지속적으로 위치를 찾고 있으니 조만간 뭐가 됐든지 결과가 나올 거고.”

    “타이킨 총관은 우리의 말을 모두 믿는 눈치입니까?”

    “일단은 그의 눈에서 나에 대한 신뢰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크럭스 그자가 문제지 그자와는 아직 일면식도 없으니.”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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