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차 무력 충돌 (20/37)
  • 2차 무력 충돌

    “이봐, 상단의 마법사는 어느 정도 수준이지?”

    “3서클 러너 수준입니다.”

    “러너라…….”

    “마법사만 따로 유인할 수 있겠나?”

    “마법사만 따로는 곤란합니다. 억지로 저와 마법사만 따로 행동한다면 기사들이 의심할 수가 있습니다.”

    마법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뻔히 분쟁이 있는 지역에서 자신을 호위해 줄 수 있는 기사를 떼어내고 마법사만 움직인다고 한다면 분명히 의심을 받을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 어떤 편재로 움직이지?”

    “최소한이라고 해도 마법사 한 명에 기사 두 명 그리고 일반 병사 다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서 움직입니다.”

    그러고 보니 후미의 마차 에서도 비슷한 편재였던 것을 기억한 후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기사 네 명과 일반 병사 열 명은 마법사의 주위에 배치되겠군. 그럼 병사 열 명과 기사 한 명 정도가 우리가 처치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이란 게 되는데…….”

    후버가 가장 최선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슬렌으로부터 통신구를 통해 연락이 왔다.

    ―주인님! 가짜 금괴가 보관된 곳에 진짜 금괴를 두고 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좋아! 바이스는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너는 그곳에 남아서 추가적인 동태를 파악하도록.”

    ―예, 주인님.

    짧은 통신을 끝으로 후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일반 병사 십여 명과 기사 한 명이 함께 움직인다고 해도 이쪽에 네 명의 기사와 한스 그리고 후버 자신이 있는 한 마법사를 제외한 그들의 처리는 쉬웠다.

    하지만 그 정도를 처리했다고 해서 앞으로 와일리 상단과 무력 충돌을 가정했을 때 의미 있는 타격이 되지는 않았다.

    마법사만이 문제가 아니라 병사와 기사가 너무 많이 살아 돌아가게 되는 것은 물론 후버의 정체가 적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후버의 고심이 깊어질 무렵 후버의 눈에 한쪽에 기절해 있는 와일리 상단의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가짜로 숙영지를 꾸미도록 하지 이제 너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겠다.”

    그 말에 마법사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후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쪽에 기절해 있는 병사는 우리가 데리고 가도록 하지. 운명 공동체의 몸에 위해가 가해지면 너에게도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후버의 말에 마법사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아졌다. 운명 공동체가 된 이상 만약 저 병사가 어떤 위해를 받는다면 자신 역시 같은 영향을 받게 된다. 만약 병사가 칼에 베인다면 마법사의 몸에도 똑같은 칼자국이 새겨지는 식이었다. 마법사의 장수를 위해서는 저 병사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상자를 받도록 원래의 무리와 헤어져 야영지 근처를 포위하였을 때 이 상자를 연다면 그것을 근거로 네가 속하지 않은 기사와 병사를 공격하도록 할 것이니 어느 정도 무리의 사이가 벌어졌을 때 이 상자를 열면 된다.”

    “이 상자는… 무엇입니까?”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마법사가 후버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상자를 여는 것이 꺼림칙한 탓이다.

    “안에는 통신용 수정구가 들어 있다. 마나 차폐진이 걸려 있는 상자이니 상자를 열기 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마법사가 있는 상태에서 통신용 수정구를 이용해서 연락을 하긴 힘들 테니 살짝 열었다가 닫으면 이쪽에서는 멀어졌다고 생각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어차피 거절할 상황이 아니기도 했지만 후버의 설명이 이치에 틀린 것은 없었기에 마법사는 상자를 자신의 품안에 집어넣었다.

    처음 슬렌이 자신을 만났다는 증표로 슈웨거에게 준 상자가 이번엔 마법사에게 넘어갔다.

    슬렌은 슈웨거에게 이 상자를 열지 말라고 했지만 후버는 오히려 이 상자를 열 것을 마법사에게 부탁하였다.

    이 두 가지 다른 요구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에 대해서는 오직 시간만이 알려 줄 것이다.

    “그럼 이제 가봐라. 앞으로 20~30분 후면 와일리 상단의 일행이 올 테니.”

    후버는 마법사에게 대충 손짓을 몇 번 해주고는 몸을 돌려 마법 가방에서 커다란 천을 꺼내 기사들에게 나눠주고는 위장용 막사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시간이 없다. 대충위장만 하면 되니 견고히 지을 필요는 없다.”

    “예, 후버 님.”

    후버가 임시로 천막을 짓는 동안 와일리 상단의 일행은 마법사와 만나서 길 안내를 받고 있었다.

    “미안하게 되었군. 젠슨 워낙 방심한 사이에 일어난 일인지라.”

    “아닙니다. 일단 로컬 선배님께서는 잠시 숨을 고르시지요. 적의 마법사 수준은 어느 정도가 됩니까?”

    젠슨의 말에 로컬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마법사가 체력이 낮은 것은 모두가 알기에 기사들 역시 두 마법사의 상황에 맞지 않는 한가한 모습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마법사의 정확한 수준은 알 수 없지만 나와 동수 정도의 실력을 가진 듯하네. 아니면 약간 높은 수준이던가.”

    그 말에 젠슨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정면을 응시했다.

    “결국 선배님과 제가 함께 다녀야겠군요. 먼저 선배님과 제가 마법을 이용해 기습공격을 하고 나머지는 병사와 기사가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인명 손실이 적을 듯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기습을 함에 있어서 적들을 더 당황하게 하기 위해 병력을 둘로 나누는 것이 좋겠군.”

    “병력을 둘로 나눈다뇨?”

    “서로 반대 방향에서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적과 우리의 병력차가 그다지 크지 않으니 상대가 느끼기에 우리의 병력이 더 많아 보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잘못되면 어느 한 쪽이 쉽게 각계격파가 될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적은 탈영병 출신이야. 전쟁에서 적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뭔지는 자네도 알지 않나?”

    그 말에 젠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병사나 군을 지위하는 장군이나 기습과 배후에서 공격당하는 것을 가장 까다로워한다. 한쪽만 신경을 쓸 수가 없기에 신경이 분산되고 퇴로가 막힌 만큼 자유로운 병력의 운용이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병사들에게 배후에서의 습격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확실히 적이 탈영병이라면 기습에 이어지는 배후에서의 습격은 적을 당황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우선 자네와 내가 전면에서 강력한 마법을 적진 한가운데를 향해 발사하고 적군이 근접할 즈음 반대편에서 병사와 기사들이 배후에서 습격한다면 적은 전투를 하기도 전에 사분오열될 걸세.”

    “좋은 작전입니다.”

    “그럼 편제를 좀 부탁하겠네 나는 잠시 더 휴식을 취해야겠어.”

    로컬의 말에 젠슨이 기사들의 인솔을 책임지는 자에게 접근해 작전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기사 역시 단순하지만 확실히 적을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여 병사들의 편재를 다시하였다.

    2명의 기사 2명의 마법사 10명의 병사가 선봉진을 이루었고 제외한 나머지가 2진을 만들었다. 마법사가 선봉진에 배치된 만큼 부족한 화력을 메우기 위해 기사의 수를 배후 기습조에 좀 더 할당한 것이다.

    “젝슨 님, 저희는 먼저 반대편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럼 부탁하네.”

    로컬은 기사들이 병사들을 인솔해서 반대편으로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후버가 말한 ‘어느 정도 떨어지면’이라는 애매모호한 기준을 그리고 한편으로는 상자를 열어야 할 것인지에도 고민이 되었다.

    앞으로 희생될 기사나 병사들에 대한 인정이나 의리가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이 상자 안에 정말로 통신구가 들어 있을까?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이 상자를 여는 것을 망설이게 했을 뿐이다.

    욱신!

    오른쪽 겨드랑이 안쪽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후버가 자신이 먼저 연락할 수는 없으니 연락이 오지 않을 경우 일정 기간마다 특별한 방법으로 연락을 한다고 했던 말이 로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런 개자식.’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로컬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시간을 끌어 보자고 후버와 통신을 시도하려고 할 경우 옆에 있는 젝슨이 수상하게 여길 것이며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이번엔 로컬의 가슴 쪽이 욱씬거리며 쑤셔왔다. 상처에 소금을 붙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단순히 칼로 찌른 것이 아니라 후버가 모종의 조치를 함께한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로컬의 코에 약간의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나는 피비린내…….

    ‘잔인한 새끼.’

    어딘가에서 병사의 몸을 난도질 하고 있을 후버의 모습을 상상하자 로컬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상처를 방치해 둔다면 과다출혈로도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로컬의 손이 품안에 숨겨둔 마나 차폐상자로 천천히 옮겨졌다. 다시금 후끈한 느낌과 함께 목덜미가 쓰려왔고 계속된 고통에 이내 로컬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신중함이 사라졌다.

    그저 제발 통신구라는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기대만이 가득했다.

    “이런…….”

    “됐군.”

    로컬이 상자를 여는 순간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후버와 로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차폐상자에 들어 있는 것은 통신용 수정구가 아닌 후버가 영지의 저수지를 공사할 때 사용하던 수정구…….

    로컬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랐을지 몰라도 과충전된 마나가 주는 불안정한 느낌에 통신용 수정구가 아니란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위험을 느낀 로컬이 다시 상자를 닫으려던 그 순간

    “지금이다.”

    안타깝게도 로컬 행동보다는 후버의 지시를 따르는 기사의 동작이 더 빨랐다. 후버의 지시에 따라 제프의 석궁이 인질로 잡은 병사의 심장에 틀어박힌 순간 로컬은 상자를 닫기 위해 힘을 주던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주 미약한 틈새를 통해서 수정구에 과충전된 마나가 흘러 나왔고 로컬의 몸에서 서클을 이루던 마나가 로컬의 사망과 동시에 로컬의 의지력에서 해방되었다. 불안정한 수정구의 마나와 로컬의 마나가 만나는 순간.

    쾅!

    기사들과 로컬 그리고 젠슨이 모여 있는 곳에서 강력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한겨울 땅가죽을 뒤집기 위해 사용하는 수정구의 위력은 가장 가까이 있던 로컬은 물론이고 젠슨 그리고 기사들의 풀 플레이트 메일을 우그러트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병사는 폭발을 느낄 새도 없이 화염에 의해 불탔지만 기사들은 풀 플레이트 아머의 작은 틈새로 들어온 열기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다가 이내 숨이 끊겼다.

    “성공이군.”

    후버 역시 성공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한 상태 하지만 폭발음은 후버의 걱정을 젝슨, 로컬, 그리고 일단의 병사들과 함께 시원하게 날려 버렸다.

    “이제 적들에게 마법사는 없다. 최소한의 교전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 기사들은 오직 원거리 석궁 공격만으로 적을 상대하도록.”

    “옛.”

    이후는 일방적인 살육전이었다. 후버는 정찰용으로 수정구를 하늘로 띄우고는 5개의 통신구를 이용해 기사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과 공격 목표의 위치에 대해 실시간으로 안내를 해주었고 한발 늦게 합류한 바이스 역시 독자적인 행동으로 병사들을 처치하는 등 후버의 지시를 토대로 와일리 상단의 병력은 순차적으로 땅에 눕기 시작했다.

    어두운 숲 속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화살의 공포는 병사들의 심신을 지치게 했고 기사들 역시 그러한 피로도에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에 마지막 기사가 가슴과 허벅지로 화살을 받아내고는 쓰러지는 것으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명의 기사를 두고 후버와 기사들이 집결하였다.

    이미 기사에게는 석궁의 화살이 몸에 박혀 있었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흥… 네놈들이 그냥 탈영병 나부랭이일 리 없다. 무슨 놈의 탈영병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전투를 한다는 거냐?”

    “뭐… 그런 탈영병도 가끔은 있는 거지.”

    바닥에 쓰러져 겨우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고 얼굴만 들어 말하는 기사를 바라보던 후버가 수정구 하나를 기사에게 던졌다…….

    “그럼 이제 네가 알게 된 사실을 상단주에게도 알려야 겠지.”

    후버가 던진 수정구 위에는 와일리 상단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이미 후버가 와일리 상단으로의 통신 연결을 해 놓은 통신구를 본 기사는 행여나 후버가 생각이 바뀌어 수정구를 빼앗을까 품 안으로 감싸고는 고개를 떨구고 통신구가 연결되는 것을 확인했다.

    ―더 이상 통신을 하지 않겠다더니 무슨 일인가?

    기사가 안고 있는 통신구 안에서 기사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기사는 이때를 놓칠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상황을 피거품과 함께 토해내기 시작했다.

    “연락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상단주님! 이들은 단순한 탈영병이 아닙니다. 마법사는 모두 전멸했고 기사와 병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정면충돌을 피하셔야 합니다. 무리의 수…….”

    기사가 나머지 사항을 말하려고 할 때 후버의 스태프가 기사의 목덜미에 내리 꽂혔다. 도움이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마법사들이 혹여나 근접전에 휩싸일 경우를 대비해서 날카롭게 깎인 스태프는 무리 없이 기사의 목덜미 속을 파고들어 목뼈의 저항에 걸릴 때까지 깊숙이 박혔다.

    “크…윽.”

    후버의 스태프에 찔린 기사는 잠시 몸을 떨더니 완전히 의식의 끈을 놓아 버리고 축 늘어졌다.

    “수고했다. 한스! 이만 나오도록.”

    후버의 외침에 한스가 숲 한쪽에서 통신용 수정구를 한손에 들고 후버의 옆으로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후버 님.”

    한스가 내민 통신구에 선명하게 떠오른 와일리 상단이라는 글자… 후버가 기사에게 건네준 수정구에 연결된 것은 진짜 와일리 상단과 연결되는 것이 아닌 그저 통신구의 저장 기능에서 한스로 저장된 이름을 와일리 상단으로 바꾼 것뿐.

    “너의 판단은 어떤가?”

    쓰러진 기사를 밀쳐내 기사가 소중히 감싸고 있던 품안의 통신구를 집어들고는 대충 묻은 피를 휙휙 털고 있던 한스가 입을 열었다.

    “역시… 따로 와일리 상단과 통신을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기사를 고문하여 와일리 상단에 어떤 내용의 통신을 했는지도 알 수 있지만 기사가 정확한 정보만을 이야기 한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와일리 상단과 연결된 척 통신구를 넘겨준 것은 그를 안심시켜 사실을 말하게 하려는 후버와 한스가 한 하나의 쇼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 병사들은 통신구를 가지고 있지 않던 것이 확실했겠지?”

    “그렇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모두 통신구를 사용하기 전에 죽었고 그들의 통신 내용에서 와일리 상단이 없다는 것은 확인하였습니다.”

    그 말이 후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와일리 상단주도 알게 될 일이겠지만 하루라도 늦게 알면 그만큼의 시간 동안 무장을 점거 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후버의 품 안에 로컬이 가지고 있던 수정구가 있는 이상 그 시간은 좀 더 지연될 것이다.

    로컬의 목소리로 위장하여 시간을 벌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2~3일이지만 어차피 후버의 목적은 크럭스를 귀찮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 이 정도면 충분 했다.

    “후버 님 꼭 이렇게 더러운 방법으로 승리해야 하는 겁니까?”

    기사 중 한 명이 볼멘소리로 후버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했다. 이곳에 남기로 한 그들이지만 후버의 방식은 자신이 생각한 기사도와는 거리가 먼 방법이었다. 정정당당한 1:1의 결투 방식이 아닌 암습과 계략만이 존재하는 방식은 기사들의 방식이 아니었다.

    “또 지랄이네 또 지랄이야.”

    한심하다는 듯이 기사들을 바라보는 후버의 시선

    “말씀이 심하십니다. 국왕께서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아신다면 후버 님께서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국왕께서 나에게 전권을 위임하셨다. 모두 저택으로 돌아간다. 더 이상의 분란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왕께서 나의 방식에 대해 별다른 말씀이 없다는 것은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그 말에 기사들이 무슨 말을 하지 모르겠다는 듯이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고 그런 기사들의 표정을 살피던 후버가 이번에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느냐는 당당한 표정 누구를 향한 시선인지는 오직 후버를 살피던 상대방만이 알 뿐이었다.

    와일리 상단과의 밤샘 드잡이질이 끝난 지 일주일 후 풍채가 좋은 남자는 대충대충 눈앞에 쌓인 서류에 도장을 찍기도 하고 한쪽으로 치워 두기도 하는 등 느긋한 손길로 서류를 처리하던 남자가 하늘에서 떨어진 편지봉투를 보고는 반색을 하였다.

    “흠… 요즘은 이걸 보는 재미로 산단 말이야.”

    남자가 주은 봉투의 겉면에는 후버라는 글자가 써 있을 뿐 그 외의 아무런 표식도 찾을 수 없었다.

    편지를 줍는 주인공의 이름은 현재 크랩스 왕국의 국왕인 아스트라. 후버가 짐작 했듯이 왕국에서 보낸 기사들 중 일정 기간마다 후버의 동태를 살피는 자가 있었고 아스트라는 바쁜 집무 중에도 자신에게 배달되는 후버에 관한한 사항은 천천히 읽어보곤 했다.

    이번에는 어떤 내용이 실려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편지를 뜯으려던 아스트라는 잠시 편지를 뜯으려던 동작을 멈추고는 왕자를 호출하는 벨을 울렸다.

    “흠… 아르모도 같이 보는 게 좋겠군.”

    5분여가 지났을까? 아르모의 방문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에 아스트라는 직접 문을 열어 주는 것으로 아르모를 환대했다.

    “아버지, 무슨 일이십니까?”

    “예의는 나중에 차리도록 하고 지금은 같이 이 편지를 읽도록 하자꾸나.”

    아스트라는 봉투가 뜯다 만 편지를 아르모에게 보여주었다.

    “벌써 다음 서신이 당도한 것입니까?”

    아르모 역시 후버에 대해 쓰여진 편지를 보며 반색을 하였다. 아스트라가 건네준 편지의 나머지 봉인을 뜯으며 한 장을 읽을 때마다 왕에게 자신이 읽은 편지를 넘겨주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벌써 적의 꼬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대단하군요.”

    “나 역시도 그 시작점을 찾지 못하여 고민을 한 것을 후버 이자는 너무나 쉽게 찾아냈더구나. 게다가 그것이 단순히 꼬리라기보다는 몸통에 가까운 것 같으니 더 대단한 것이지.”

    “몸통이란 말입니까? 아버지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처음 편지에서 후버가 의심 가는 곳의 목록을 정리 할 때 나 역시 그 의심 가는 곳을 조사해보았지 그들이 인장이 위조된 금괴를 유통한다고 확신을 하기는 힘들었지만 주로 상단의 업무를 하기보다는 수표를 끊어주고 그 수수료를 받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어 조직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상단치고는 그 상단을 거쳐서 매우 많은 양의 금괴가 유통된다는 것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단다. 게다가 순식간에 왕국 제3위의 상단이 되었다는 것 역시 수상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

    “그렇다면 상단보다는 은행에 가까운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처음 위조 인장에 대해 조사를 할 때 그 대상을 은행에만 집중했기에 잡아내지 못한 흔적을 후버가 정확히 잡아낸 것이지.”

    그 말을 끝으로 아스트라와 아르모는 다시금 서신의 내용에 빠져 들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좋게 말하면 심계가 있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너무나 치졸하게 볼 수도 있겠지. 그런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 그래서 그런지 지속적으로 기사들과의 마찰이 있다고 나와 있구나.”

    “그렇다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인물인 것입니까?”

    그 말에 아스트라가 아모르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하니 밝은 곳과 더불어 어두운 곳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다. 그렇기에 가까이 둬야 하는 인물이지 그가 충성스럽기만 하다면… 그자의 쓰임새가 있지만 정의로운 자만으로 왕국을 움직일 수는 없단다. 왕이 공명정대 할 수 있는 것은 후버와 같이 치졸해 보이는 자들의 힘이다. 그러한 자들이 왕의 치부를 덮어주기 때문이란다.”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자가 자신의 행적을 보고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모른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겠지. 이자로서는 모른 척 왕에게 더 열성적으로 충성을 하는 척하는 것이 더 유리하겠지 하지만 후버는 그러지 않고 우리에게 자신이 감시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알렸다. 이게 무슨 뜻으로 생각하느냐?”

    아스트라의 말에 아모르가 다시 처음부터 편지에 적힌 사항을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모르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아스트라에게 알렸다.

    “대담한 자로군요.”

    “게다가 실리적이고 신중하지.”

    “제가 읽은 것이 맞다면… 기사와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당근을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맞추었다. 그리고 아모르 너는 모르겠지만 3일 전에 이러한 내용의 요청이 마탑으로부터 들어왔단다.”

    아스트라가 아모르에게 건네준 종이에는 마탑에서 대량의 마법 물품을 경쟁 입찰하도록 허가해 달라는 요청서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마탑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번 경우는 시중에 판매하는 마법 물품의 양이 워낙 많기에 평소와는 다른 방식인 경쟁 입찰 방식을 택하고 거래의 보증을 위해 계약금으로 사용될 금괴를 왕궁에서 보관해 주었으면 한다는 요청서였다.

    거래 금액이 큰 만큼 마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거래 금액의 20%를 세금으로 납부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어떻게 보면 왕국으로서는 세금을 내지 않는 마탑에 대해서 최초로 세금을 걷게 되는 일이었고 동시에 거래량도 많아 국가의 재정에 많은 도움이 될 만한 일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스트라의 물음에 아르모가 전후 사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앞서 왔던 여러 번의 서신과 이번 일의 관계 아스트라 역시 처음에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결정을 보류했고 지금 후버에 대한 감시 보고서가 도착하자 크롤라이드와 인연이 있는 후버가 생각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굳이 마탑이 왕국에 이러한 요청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안전한 거래의 보장을 구실로 내새웠지만 아마도 이번일과 연관된 것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한단다.”

    “짐작이 가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글쎄… 그건 아모르 네가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아스트라 국왕은 책상 위의 결재 도장을 가지고 와서 한 번 꾹 찍는 것으로 아모르에게 힌트를 주었다.

    이번 일과 관련된 그리고 가짜 금괴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힌트를 기본으로 아모르의 생각이 깊어졌다. 아모르가 정답을 찾아내든지 말든지 시간이 변함없이 남은 3개월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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