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시나 자작가로
재커리와 함께 떠난 지 2일째, 그리고 목적지까지 하루가 남은 상황에서 기묘한 분위기가 야영장을 감쌌다.
그 느낌의 감지는 한스로부터 시작되어 재커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버에게도 영향을 줬다.
“누군가가 있군?”
“그렇습니다.”
“우리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무런 물품 없이 떠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한스, 대충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있겠어?”
“아직은 그냥 이상한 느낌만이 느껴집니다. 거리는 대략 20~30미터 정도 오른쪽 풀숲에 있습니다.”
“우선 숫자를 알아봐야겠군! 저들은 우리가 자는 때를 노리려는 걸 거야. 아니면 일단 석궁이나 장궁으로 먼저 공격했겠지.”
“생포가 목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최소한 지금은.”
장작을 쑤시는 척하면서 수정구를 불가에 던지고는 그 위의 타다만 장작을 대충 쓰러트려 수정구를 감추는 후버, 상대가 오기 전이라면 공중에 띄우겠지만, 지금은 어디서 보고 있는지 모를 적이 문제였다.
“일단 모두 텐트로 들어가서 자는 척을 해야겠습니다. 혹시 이전에 상단을 호위할 때 마법사가 포함된 적이 있었습니까?”
“마법사는 일행 중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적이 기다리는 것이 그것이라면? 좁은 텐트 안은 더 위험합니다.”
그나마 괜찮은 상황이었다.
마법사가 없었다면 그들 역시 자신들을 공격할 때 굳이 비싼 마법사를 고용하거나 엉덩이 무거운 마법사가 자발적으로 참여할 리가 없었다.
“일단 텐트로 갑시다.”
대충 기지개를 편 한스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텐트로 들어가는 3명. 다행히 아직 일행을 살피는 중인지 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후버는 우선 양탄자 위에 구리 가루를 뿌렸고 무엇을 하는 것인지 재커리가 눈으로 물었지만 우선 양탄자를 위로 올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스는 텐트에 걸려 있는 불을 끄고 재커리 님은 바닥에 깐 양탄자를 위로 올려주세요.”
“예.”
불이 꺼지고 한쪽에서부터 양탄자가 들려 올라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버의 영창.
“디그. 그리스.”
양탄자가 있던 바닥이 움푹 파이면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한정된 공간이라서 그런지 텐트의 밑 부분이 불룩해지기는 했지만 별다른 티가 나지는 않았다.
후버는 마치 두더지처럼 땅 속에 공간을 만들어 그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 공간은 양탄자로 다시 덮어 흔적을 없앤 것이다.
아직 적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마법사가 없을 확률이 높았다.
마법적인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면 벌써 공격을 하려고 달려왔을 것이다.
“선두에서는 제가 디그 마법을 이용해서 길을 만들 테니 두 분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발밑으로 꺼지듯이 세 사람은 텐트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양탄자가 처음처럼 다시 놓여 있을 뿐이었다.
“숨을 아끼세요. 어느 정도 공기를 정화할 수 있지만 무한정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땅 속에서 다시 마법을 사용하여 옆쪽으로 터널을 만든 후버는 일행을 그 속으로 숨기면서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후버는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을 텐트 속 양탄자를 겨누고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볼.”
작은 파이어 볼이 구리를 태우며 청록색 불꽃을 만들자 밖이 약간 소란스러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저들 중 마법사가 없다면 저들은 자신들이 텔레포트 마법을 이용해 도망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익스팅션 에어.”
화재가 번지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에 주변의 산소를 차단해서 급한 대로 파이어 볼로 인한 화재를 제압했다.
“딥인.”
간단하게 불을 끄면서 후버는 양탄자 바로 아래 공간을 흙으로 채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옆으로 뚫어놓은 터널로 몸을 옮겼다.
이제 후버 일행은 완벽하게 텐트에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도 이미 흙으로 채워져 있어서 흔적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어려웠다. 설사 마법사가 없다고 해도 적의 경험이 많다면 일반적인 텔레포트 마법에는 남지 않는 열기를 이상히 여기고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디그 마법을 사용하며 제가 앞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다른 곳은 지반이 약해지면 무게를 못 견딜 수도 있지만 모닥불 위에 발을 올리고 서있는 정신 나간 놈은 없을 것이다.
대충 디그 마법과 딥인 마법을 함께 사용하며 앞에 있는 흙을 뒤로 밀어내듯이 모닥불이 있는 곳의 밑으로 터널을 만들면서 이동했다.
“아, 씨발.”
쿵, 소리와 함께 들려온 남자의 욕지거리. 다행히 적중에는 기사 역시 없었다.
만약 기사가 갑옷을 입고 있었다면 부츠에 걸려 있는 그리스 디스펠 마법에 따라 미끄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은밀하지 않고 기사도 아니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굳이 숫자를 알 수 없는 적과 싸울 필요는 없었다.
“크리에이트 에어.”
“다행히 적은 그다지 강하지도, 마법사도 포함하지 않은 전력입니다.”
계속해서 위에서는 욕지거리가 들려온다.
위자드 아이를 이용해 위의 상황을 볼 수 있지만, 지금쯤이면 모두 후버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마나를 아끼기 위해서라도 4서클 마법보다는 2서클을 이용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디텍트이블.”
대략 8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수적으로는 확실히 열세.
“그런데 저들이 만약 떠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지는 않기를 바라야죠. 재커리 님 습격당했을 때 용병은 몇 명이었습니까?”
“용병은 20명 가까이 됐고 적은 30명이 넘었습니다.”
“저들은 8명 정도입니다. 아마도 정찰조이거나 남은 인원은 상행 인원을 감시하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걸 것입니다.”
“일단 이곳에서 있으시면 됩니다.”
후버는 그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을 찾는지 계속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는 듯도 하지만 흙이 차폐막이 되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악. 하아.
서로의 숨소리만 들리는 공간,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때 한번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어쌔신에게 통신용 수정구를 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있다면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적들도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되겠죠. 혹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여기에 며칠을 더 있어야 할지 혹은 공격을 받을지 모릅니다.”
“적이 온다면 제가 막겠습니다.”
믿음직한 한스의 말을 뒤로하고 후버는 마나석을 이용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길게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스펠 없이도 쓸 수 있는 마법이지만 지금은 다소 범위가 넓은 강력한 것이 필요했다.
“슬립.”
“무슨 기척이 들렸습니까?”
“아니요.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한스가 그렇다면 맞을 것이다.
상대의 수준이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고려하면 정말로 어딘가로 떠났을 것이다.
“디그.”
디그 마법과 답인 마법을 이용해서 모닥불에 던져둔 수정구를 회수했다.
다행히 싸늘히 식은 수정구를 보니 불꽃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자신을 찾으러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한동안은 디그 마법을 이용해서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방향 감각이 잡히지는 않지만 여기서 바로 올라가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입니다.”
“야옹.”
대충 목적기로 보이는 곳으로 가려고 하자 슬렌이 후버에게 울음소리를 내고는 한쪽을 가리켰다.
아마도 저곳이 후버 일행이 가야 할 방향, 후버는 그 방향으로 잡고는 열심히 디그 마법을 사용하면서 땅속으로 전진했다.
“이 정도 왔으면 충분할 겁니다.”
“아까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마법사셨군요.”
“예. 스승님께 약간의 마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위로 올라가죠.”
천정의 구멍을 뚫자 이제야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크리에이트 에어로 만든 공기는 숨을 쉬는 것에는 충분했지만 약간의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이 특징이었다.
마나가 고갈된 후버도 한숨 돌리면서 위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휙.
“아, 진짜 씨발!”
후버가 고개를 들자 나무 위에서 후버를 바라보는 어쌔신 때문에 깜짝 놀란 후버는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이번엔 그다지 타박하지 않았다.
그래도 받은 인원 중에는 가장 실력 있는 엘리트였다.
*
*
*
“후버 님은 잠시 쉬었다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아무것도 못 들은 듯 재커리가 대충 반반한 돌이 있는 자리에 누울 것을 권했지만, 후버는 마나석을 잡고는 마나 명상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방해하지 마세요. 빨리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혹시 모를 일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누워서 쉬시는 것보다 후버 님이 마나를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재커리가 마나 명상 자세를 취하는 후버를 제지하려 하자 한스가 그런 그를 말렸다.
마나석을 이용해서 마법을 쓰는 것은 자신의 서클을 사용하는 것보다 가중된 정신적 피로 탓에 수면을 통해 해결하여야 하지만 급한 대로 마나 명상도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출발하지요.”
“네.”
관도를 우회하는 경로로 천연 나침반 슬렌의 도움을 받아 4일간의 행군 끝에 겨우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는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몰골은 꾀죄죄했지만, 여관에 머물 시간도 없이 바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서 록시나 자작가로 한 번에 이동하였다.
“후… 상행은 실패했지만, 덕분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확실히 실패한 상행이기는 하군요. 저도 아공간 주머니를 텔레포트 하는데 그렇게 큰 비용이 드는지는 몰랐습니다.”
“그 비용이 저렴하면 누가 힘들여서 상행을 하겠습니까.”
재커리가 수정구를 이용해서 통신하자 자작가의 기사들이 호위하기 위해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빠져나온 3명과 한 마리를 호위하고는 자작가로 들어갔다.
슬렌은 아레스의 반가운 환대를 받았고 후버는 자작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이틀간 잠에 빠져들었다.
너무나 많은 마법을 사용하고 압박된 환경에서의 4일은 그만큼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었기 때문이다.
후버가 잠에서 깨어나자 후버와 아레스, 슈웨거, 한스, 재커리까지 참여한 자작가의 저녁 만찬, 소소하게 차려졌지만 후버 일행을 대하는 태도에는 자작이 평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의 사람을 대하는 그런 정중함이 베어 있었다.
“이 고양이 이름이 슬렌이었군요.”
“예. 저희 스승님께서 키우셨는데 이번에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셔서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어쩐지. 고양이가 매우 똘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간단한 공치사지만 적절한 칭찬으로 슈웨거가 대화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께서 아끼시던 고양이라서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저희 상행을 도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자작으로서는 가장 궁금한 것이 그것이었다.
왜 그들은 자신의 상단을 도운 것일까? 단순히 고양이와의 인연으로 보기에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에 자신들을 도운 것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다.
“항상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는 스승님의 말씀과 슬렌이 건네준 상자를 회수하기 위해서 입니다.”
“상자라면 예전에 슬렌이 건네준 그 주먹만 한 상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슈웨거 역시 그것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대마법사가 그 상자를 회수하러 온다면 그로서는 다시없는 행운을 잡는 것이기에 저택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상태였다.
“예, 그렇습니다. 다소 이해가 안 갈수도 있지만 슬렌이 그것을 준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지만 우연히 콜린스 상회와 함께 하면서 현재 곤란한 상황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 외부의 인물들에게 알리기는 힘든 일이지만 약간은 상단의 운영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 들어 자주 공격당하는 상단의 행렬에 누적된 피해를 상기한 자작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특히 슬레인 자작가로부터 지원을 받은 이후로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슬레인 자작에게 지원을 받은 것도 알고 계셨군요.”
당황하는 자작의 음성, 상대가 마도사의 제자라고 해도 내부 사정을 타인이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너무 놀라진 마시기 바랍니다. 저래 봬도 슬렌이 약간의 글자를 배열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스승님께는서 대단하신 분 같군요. 고양이가 의사소통까지 가능하다니.”
“예. 말년에 생긴 친구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신경 쓰셨습니다.”
잠깐 동안 둘의 화제가 끊겼다.
서로 아는 것은 슬렌밖에 없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로 만찬 시간을 채우기에는 부족한 게 많았다.
적당한 침묵이 있은 후 이번엔 후버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사실 자작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저희 스승님께서는 요즘 왕국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니요?”
“금의 가치가 점점 내려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조사하시고 계셨습니다.”
“금의 가치가 내려가다니요?”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슈웨거 자작의 주 거래 품목 중에 귀금속이 포함되지 않은 만큼 금의 가격에 대해서는 다소 둔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만 자작님께서도 요즘 물건의 가격이 다소 비싸지는 것은 알고 있으셨을 겁니다.”
“가격이야 항상 유동적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일반인들에게는 가격이 고정되어 있을지 몰라도 슈웨거 자작과 같이 상행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원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록시나 자작가에서는 오랜 기간의 상행 기록이 있을 것이니 연도별로 물가의 상승률을 점검한 표도 있을 것입니다.”
“재커리, 이분의 말씀이 사실인가?”
한쪽에서 식사를 하던 재커리가 그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자작님. 금화의 가치가 꾸준히 하락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저희도 가격을 높여 되팔기에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아 보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사실이 있기는 있군. 그런데 그런 일이 상단도 아닌 마도사가 생각할 부분입니까?”
“예. 마도사마다 관심 분야가 다르지만 스승님께서는 그쪽에 관심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 후로 이어진 후버의 설명은 간단하였다. 마도사의 소일거리로 시작한 조사, 그리고 그 조사 결과 밝혀진 것은 현재 시중에 돌고 있는 금의 양이 국가가 공급하는 양보다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수상하게 여겨 조사하다 보니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흠. 그래도 그것이 저희 상단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슈웨거 자작의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내려간다면 그것은 사재기 등으로 이익을 취할 기회가 되긴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재커리 님이 말씀하셨듯이 록시나 자작가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런 현상이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리하시던 스승님의 연구를 끝마치고 싶어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도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고요.”
도움을 주고받는 다는 말에 슈웨거 자작의 몸이 좀 더 후버에게 기울여졌다.
무심결에 자신의 관심을 몸이 표현한 것이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도움과 받을 수 있는 도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일단 받고 싶은 도움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혹시 경영이 어려운 상단이 있으면 하나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하면 절박한 곳일수록 좋겠군요. 제가 인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종의 소개를 해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맡은 상단의 운영을 슈웨거 님에게 맡기겠습니다. 거기서 발생하는 이익 중 70%를 드리죠.”
그 말에 자작의 표정이 다소 불쾌해졌다. 마법은 몰라도 이제 막 상행에 뛰어드는 애송이가 자신에게 쓸데없는 제안을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후버 님께서 마법에 있어서는 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겠지만 상행에 대해서는 저희 가문의 가업인 만큼 제가 상단의 운영을 맡아준다면 오히려 후버 님이 도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슈웨거 자작의 말이 옳았다. 이익의 70%를 준다고 해도 인수의 대상은 어디 까지나 경영이 어려운 상단인 만큼 고생은 크겠지만 한 동안 이익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건 쉽게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괜한 오해를 쌓아 둘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후버는 자작의 불쾌해하는 반응을 보고 얼른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재커리 님과 있었던 일을 담은 수정구를 준비 했습니다.”
후버가 영상을 틀자 덮어 두었던 재 때문에 영상은 흐릿했지만 말소리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텔레포트 마법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소문까지 퍼트려서 용병을 고용 못하게 했는데 설마 단 3명이서 떠날 줄은 몰랐습니다.
―일단 남아 있는 콜린스의 상행 인원들 점검하고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한다.
―의뢰인들에게 큰 소리 친 것이 걱정입니다.
―짐은 영지 창고에 있을 것이다. 그것만 록시나로 보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의뢰였다.
―예, 그럼 대기하다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통신구의 내용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영상을 보던 자작도 요즘 들어 이런저런 이유로 물품이 강탈당하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상인가문답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게 되면 자신은 이러한 정황을 전혀 몰랐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협상권이 후버에게 기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연 상인은 다르군.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으니.’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미세한 표정 변화를 주시하던 후버는 얼른 다음 말을 이었다.
표시가 나지 않을 뿐이지, 자작이 분노했다면 대화를 좀 더 부드럽게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제가 자작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흠.”
“자작님, 잠시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나.”
재커리가 허락을 구하자 슈웨거가 그런 재커리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저는 저 용병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이름은 용병 고용명부를 뒤져봐야 하겠지만 제가 기억한 것이 맞는다면 저들과 함께 잠시 동안 상행을 했었습니다. 후버 님은 기억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자세히 얼굴을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아. 3년산과 7년산? 그자들입니다.”
대략적인 형태기에 확실하지 않지만 후버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던 그자들이 맞는 듯이 보였다.
“예. 제가 기억하기에도 한 명은 3년 경력을 한 명은 7년 경력을 가진 용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이만 나가서 좀 더 정확한 그들의 이름을 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서둘러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나는 재커리의 모습에 자작이 제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그들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기에 이야기를 이어 가기에는 더 편해졌다.
“보시다시피 현재 콜린스 상단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공격을 당하는 상태입니다. 새로 인수한 상단을 이용한다면 그런 공격은 다소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더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합니다.”
“그저 이곳저곳에서 영지전과 전쟁이 있어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고의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당분간은 말씀하신 점이 도움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겠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도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흐르자 완전히 여유를 찾은 후버가 간단한 조건을 이야기했다.
“뭡니까?”
자작 역시 상세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도 그다지 저항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상식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상단을 인수하는 자금의 일부분에 대한 보증금을 설정 하겠습니다. 인수자금의 절반에 대해서 자작가가 보유 하고 있는 금괴를 보증금으로 설정하겠습니다.”
“보증금의 설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굳이 금괴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다른 물품은 제가 눈이 어두워 가치를 판단하기가 힘듭니다. 아무리 조금씩 가치가 떨어진다고 해도 금을 이용하는 것이 저에게는 좀 더 편할 듯합니다.”
그 말에 슈웨거 자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가의 현재 상황이 어려운 만큼 자작가에서 발행한 차용증을 모두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거래를 중계해주는 곳에 상품이나 토지를 저당잡고 차용증을 발급하여 주지만, 그러한 대규모 거래가 발생한다면 누군지 모를 적이 슈웨거 자작의 새로운 상단에 대해 눈치챌 여지가 컸다.
그렇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슈웨거 자작을 믿을 수는 없으니 후버로서는 슈웨거 자작의 재정 상태 등을 언급하며 요구를 하기 보다는 자신을 낮추면서 최적의 방식을 제안한 것이란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실무적인 이야기는 인수할 대상이 정해지면 그때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큰 틀에서의 합의를 끝으로 여유로운 티타임을 가진 자작과 후버는 서로 의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버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대의 움직임은 더욱 거칠었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과거 슈웨거 자작이 공격당한 일자에 대해 설명을 듣던 후버는 시일이 촉박하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
“한스 주머니에서 그것 좀 꺼내줄래?”
한스가 건넨 것은 세이건에게도 주었던 7서클이 아니면 해제할 수 없는 디멘션 사일런스 아티팩트였다.
크롤라이드와의 대화 전에는 반드시 꺼내서 주변에 소리가 나가지 않아야 하기에 일단 아티팩트를 가동시켰다.
“크롤라이드 님, 후버입니다.”
―오랜만이군. 그래 유랑 생활은 재미있는가?
반가운 크롤라이드의 목소리, 처음에는 이런 귀찮은 일에 얽히게 되어 좋지 않은 감정도 느꼈지만 지금은 그저 떠나온 영지를 떠오르게 하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느껴졌다.
“하하하! 재미는요. 무슨 조금 이상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통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 때문입니다.”
―잠깐만 기다리게. 나도 준비를 해야 되니.
잠시 후버를 기다리게 한 크롤라이드가 뭔가 웅성웅성 하는 소리를 내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 그일 때문이라니 뭔가 관련 있는 곳이라도 찾은 것인가?
“아직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만 어쩌면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매하군. 혹시 지금 있는 위치가 어디인가?
“록시나 자작가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크롤라이드가 고민을 해봤지만 록시나 자작가라는 곳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외부 활동을 하지 않기에 크롤라이드가 아는 귀족들은 대부분 왕궁이나 마탑에서 자신을 접견할 정도의 대상인이나 대귀족에 한정되어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데. 이 일에 상관도 없는 것 같고.
“크롤라이드 님은 모르시겠지만 과거 슬레인 자작이 록시나 자작에게 거액을 빌려준 적이 있습니다. 차용증은 사라져서 레빌리온 백작가에서도 모르는 일입니다만 슬렌이 당시 돈이 오가는 것을 도왔다고 합니다.”
―흠! 그럼 그쪽의 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벌써 확인한 것인가?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확인할 것입니다.”
―아직 확인도 안 되었는데 통신을 한다는 건 뭔가 필요한게 있다는 것인데, 말해보게.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도울 것이네.
“록시나 영지와 그 주변 영지의 상단 거래 흐름이 필요합니다. 저야 알 수 없지만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의 기록을 확인하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크롤라이드가 대답했다.
―가능한 빠르게 준비해 주지. 하지만 3일 정도의 시간은 걸릴 거야. 그 정도면 되겠나?
“충분합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크롤라이드와의 용건은 그 정도로 끝내곤 다시 통신구를 사용하여 세이건과 대화를 하기 위해 일단 마릴린에게 통신을 넣었다.
―안녕하세요. 후버 도련님.
“오랜만이야 마릴린, 잘 지내고 있어?”
―예. 저는 두 분이 너무 잘해주시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세이건이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야. 혹시 록시나 자작가 주변의 마법 물품을 어느 정도 구매하는 소규모 상단을 알 수 있을까? 자금 사정이 어려워서 대부분 수표를 이용해 결제를 하고 반면에 거래 기간은 오래된 그런 곳?”
―아티팩트 거래 업체는 많을 거예요. 이제 컨텍트 상단이 꽤나 커졌거든요.
“만약 그런 곳을 추린다면 얼마 정도의 시간이면 가능할 것 같아?”
―대략 한 주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그럼 준비가 되면 상단을 통해서 서류를 통해 연락을 줘.”
다행히 이 정도는 세이건의 결제가 필요한지 마릴린은 대략적으로 정보를 넘겨줄 시간을 이야기하였기에 세이건과의 통신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두 사람에게 부탁을 하고 후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이용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모르는 만큼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그리고 록시나 자작을 공격하고 있는 상단들의 리스트가 필요했지만 그건 록시나 자작이 정리를 해주기로 했기 때문에 자신이 신경쓰지는 않았다.
“다시 바빠지는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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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의 시간이 흐르고 슈웨거 자작은 인수가능한 상단의 리스트와 그들의 주거래 상단의 리스트를 넘겨주고는 이 중에 몇 개를 선택하면 그중 가장 적절한 상단을 선택하여 인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후버는 하나의 상단을 선택해서 실제로 상단을 돌아 보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리인을 내세우면 좋겠지만 아직 믿을 만한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죠.”
어두운 지하 창고로 안내된 후버는 의외로 넓은 공간에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창고가 꽤나 넓군.”
“예. 저희 상단도 잘 될 때는 이 정도 창고가 필요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가세가 기울다 보니….”
“뭐 그거야 장사를 하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는 것이지요.”
창고를 대충 둘러본 후버는 마지막으로 상단의 금고를 향해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금고를 한번 보고 싶군요.”
“예. 이쪽으로 오시지요.”
3중으로 제작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상단에서 어음을 발행할 때 이용할 각종 귀금속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생각보다 양이 좀 많군요.”
“그만큼 시중에 나도는 저희 상단의 수표도 적지는 않습니다. 대충 여기 보관된 귀금속 가치에 5배 이상은 될 겁니다.”
“흠. 상단을 접는다고 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보다 발행 수표가 적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만큼 거래가 적어지다 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상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요.”
“잠시 금괴를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예. 편하실 대로 하시지요.”
그 말에 후버는 검사 세트를 꺼내서는 몇 개의 금괴의 표면을 문질러 보고는 가루가 묻은 도구를 다시 검사 셋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럼 저도 한번 생각해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디 좋은 방향으로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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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자작가에만 머물기도, 그렇다고 매번 비밀스러운 일을 하면서 여관에 묵을 수도 없는 사정상 조그만 저택을 산 한스와 후버는 묶여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바라봤다.
이미 한스에게 맞아 피떡이 된 상태였지만 아직은 중요한 내용을 말하지 않은 상태. 일단 그들을 방에 두고 나와서 서로 대화를 나눴다.
“한스, 혹시 고문 같은 거 할 줄 아나? 사일런스.”
마법으로 둘에게 가는 말을 차단하고 나서 후버는 한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건 저도 잘……”
“슬렌, 너는 할 줄 아냐?”
“주인. 주인은 할 줄 아나?”
“나도 모르지.”
“…….”
정보 길드에 의뢰해서 3년산과 7년산을 잡아온 것은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이중에 고문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 아무도 해본 사람이 없으니 결국 후버가 총대를 메야 했다.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슬렌이 고문을 하는 것은 뭔가 모양이 맞지 않았고, 한스 역시 고문을 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실수로 둘의 목숨을 잃게 할 수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후버가 사일런스 마법을 해제하고 두 명이 잡혀 있는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내가 말이다. 집을 나온 지 좀 기간이 됐어. 몇 개월쯤 됐는데 집나오니깐 확실히 개고생이더라구. 특히 너네 둘! 나 기억나지?”
대답 없이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 역시 고문을 하기 전까지는 뭔가 사실을 알아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문 같은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결국 포인트는 괴롭게, 그러나 죽지는 않게, 이 두 가지일 것이다.
이 세계로 떨어져서 언젠가는 직접 고문 같은 것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멀뚱히 바라보는 두 쌍의 눈을 바라본 후버는 한숨을 쉬고는 방 밖으로 나왔다.
“나는 잠깐 옆방에서 자고 있을 테니깐 한스, 네가 잘 지키고 있어. 2시간 후에 돌아오겠다.”
굳은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지금가지 팔찌를 사용할 때마다 가능하면 건드리고 싶지 않던 기억들이 있었다.
‘흑마법사나 그런 종류의 기억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을 찾아서 활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굳이 싫은 일을 하면서 왕에게 충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문을 위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좀 가볍게 생각한 부분이 있었지.’
신기한 세상 그곳에 와서 자신이 아는 것과 새로운 것을 합치고 그러다 보니 점차적으로 적응해 간다고 생각했지만 이쪽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아직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계의 사람은 아닐 거야. 언제 진짜 이 세계의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이쪽 세상은 나와는 다른 세계,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진지해 지지도, 절실하지도 않았지만 직접 공격을 당해보고 그 순간에 생명의 위험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후버 역시 이 세계의 한 사람인 이상 결국 병이나 실수로 인해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에게 정보를 얻어 내지 못한다면 이는 분명히 자신이 나중에 후회할 만한 실수가 될 수 있었다.
‘이곳은 전쟁이 일어나고 약탈과 살인이 빈번한 세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적응을 위해서는 이 삶의 방식을 받아 들여야 했다.
몇 년 전 슬레인 자작가를 쓸어버리고 사람을 해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지만 이제 후버 스스로의 손으로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다른 삶을 볼 필요도 없었다.
용병의 삶, 팔찌를 통해 용병의 삶을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단순한 관람이 아닌 직접 체험을 하기 위해서.
“모두 나가 있어라. 이제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꿈속에서의 흥분도 흥분인 것일까?
마치 며칠은 못 잔 것처럼 눈알이 빡빡해졌다. 그 말에 용병을 감시하던 나머지 일행이 방 밖으로 나갔다.
“이제 너희 둘과 나 이렇게 세 명밖에 없다. 너희 둘 중에 딱 한 명만이 살아서 이 방을 나갈 수 있다. 누가 살아 나가고 싶은가?”
변화한 분위기에 아직 고문도 하지 않았지만 한명의 용병이 자청해서 입을 열었다.
“제가 모든 걸 말하겠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라. 단 하나도 빠짐없이.”
3년짜리 용병이 자신이 먼저 말하겠다고 했다. 7년짜리 용병에게는 사일런스 마법을 걸어 두고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결론은 와일리 상단에서의 의뢰라는 것인데 뭔가 정보가 부족한 듯했다.
“그게 전부인가?”
“정말 전부입니다. 와일리 그쪽에서 먼저 상단 운송에 용병으로 참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 소문을 내라고 했고 그게 전부입니다.”
현재 이 집은 전체가 크롤라이드의 아티팩트로 사일런스가 걸린 상태, 여기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후버는 한쪽 구석에 있던 날카롭게 갈린 칼을 집었다.
“나는 네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한 번의 심호흡, 당장이라도 한스를 불러 대신 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발전이 없을 것이다.
엄청난 돈이 걸린 문제가 자신의 주위에서 발생할 것이고 언젠가는 서로 죽고 죽여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빨리 겪는 게 좋은 거지.’
가능하면 이렇게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의 심리적인 충격을 경험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후버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버는 코 안으로 칼날을 밀어 넣었다.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조금씩 더 깊게. 깊게. 깊이 넣은 것 같은데 베어진 것은 고작 3cm 남짓.
“정말… 사실입니다…….”
“미안하다.”
이번엔 무릎의 안쪽 대충 옷을 찢고는 종아리를 따라 힘껏 가르려 했으니 중간에서 무언가에 걸리듯이 멈춰 버렸다.
“으악! 그만! 그만!”
포션을 한 번 부어주자 재생하며 치료되는 상처. 계속해서 비명소리와 버둥거림이 걸리적거렸지만 이번에야말로 한 번에 베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손목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생각뿐인 듯 또다시 조금 더 내려와서 걸려 버리고 말았다.
“전부 다 말했잖아! 미친놈아!”
다시 한 번 재도전. 이번엔 종아리 끝까지가 아니라 아킬레스건까지 한 번에 내린다는 생각으로 칼날에 힘을 주었다.
“크아. 악. 아아아악!”
이번엔 어찌어찌 겨우겨우 칼날을 종아리 끝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더럽지만 뿌듯한 느낌. 포션 한 병 남은 것을 다 부어줬다.
“후~ 이번엔 7년차 네 얘기를 한번 들어보자.”
“예. 그게 그러니깐.”
“사실을 말한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
“아닙니다. 제가 사실을 반드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후버는 사일런스 마법을 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이 칼은 너무 날카로운 것 같군. 이래서야 재미를 느낄 수가 있나?”
독백하듯이 조용하게 읊조리던 후버는 한쪽에 마련된 칼갈이 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칼날 부분을 마구잡이로 돌에 문질러 댔다.
예리하게 빛을 반사하던 칼날은 빛을 잃고 미세한 돌가루에 더럽혀지고 칼날은 어떤 예기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정도가 좋겠군.”
만족했다는 듯이 이번에는 7년차를 두고 하는 칼질.
그냥 고문과 칼질의 차이를 모르겠지만 상대가 고통을 느낄 때마다 너무나 쉽게 잔인한 짓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소름이 돋았다.
그들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 약간의 피를 받아서 수정구에 인식시켜 두고는 먼저 하늘 위로 날렸다. 이들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없으니 최소한의 보험이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번 기회를 주겠다. 일단 3년차 네가 의뢰를 받은 것은 어디인가?”
“와일리 상단입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이 지경에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이번에는 조금 진심임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는 전문가가 필요한 법. 방 밖으로 나와 바이스를 불러냈다.
어떤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바이스가 좀 더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바이스 일단 내려와봐.”
“너는 고문 같은 거 배운 적 있나?”
끄덕.
“일단 저들이 와일리 상단이 자신들을 고용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해라.”
끄덕.
바이스가 후버의 칼을 다시 빼앗아 쥐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고 후버 역시 바이스의 뒤를 이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바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기가 느껴질 때까지 다시 칼날을 갈았다.
30분 동안 정성스레 칼을 간 바이스는 3년차 용병의 팔을 잡고는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칼을 이용해 글을 써 내려갔다.
누가 시킨 건가?
한 글자도 쓰기 전에 용병들은 와일리 상단이라고 악을 써대듯이 주장했지만 바이스는 꿋꿋하게 자신의 질문을 완성했다.
잠시간 고민에 잠긴 바이스는 한쪽의 포션 병을 잡고는 다시 반대쪽 팔을 이용해서 사용해도 되는지에 대한 후버의 의견을 물었고 후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이후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마치 전생에서 후버가 TV에서 보았던 스피드 게임을 하듯이 두 명의 용병은 계속해서 정답을 외쳐대었고 조금이라도 대답이 늦어질시 바이스는 그들의 팔에.
왜 대답이 늦어지는가? 뭐 대답을 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기억을 하기에는 내 노력이 불충분 하다고 생각하나?
…라는 질문을 중간의 대답과 상관없이 써 내려갔고 결국 두 용병은 몇 번의 기절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항을 모두 털어놓게 되었다.
철저하게 교차 확인까지 하는 바이스의 모습 초반 몇 번의 세부 사항에 대한 거짓말이 탄로 나는 등 후버로서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수고했다. 바이스.”
*
*
*
파견기사들의 두뇌가 부족하다고 하소연을 해서였을까?
이번엔 지략가라고 하는 사람을 보내준다는 말에 약간의 기대감을 가진 채 후버는 록시나 영지의 임시 거주지에서 새로운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소한 지금쯤 토너먼트를 벌이면서 서열을 정하는 기사들 보다는 나을 것이다.
똑똑!
“들어오세요.”
일단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프로필의 나이에는 23, 못나지도 않고 잘나지도 않은 평범한 외모, 거기다가 정보부 소속이라고 하니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알고 또 조달해 올 수 있을 것이다.
후버를 대신해서 전면으로 내보낼 인물이기에 평범한 외모가 지나치게 빼어나거나 못난 외모보다는 더 적합했다.
“사만다라고 합니다. 이번에 이쪽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좋군. 대략적인 사항은 전해 들었나?”
“예. 발령 직전까지 기밀을 요한다는 말만 들었고 바로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텔레포트 게이트가 아닌 마차로 오며 제반 사항을 숙지했습니다. 발령 시간보다 약간 늦어 죄송합니다.”
낮아진 기대감이 한 번에 충족되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도움이 될 사람이 온 것이다. 더 이상 고양이를 앉혀두고 작전을 짤 필요도 없었다.
“그래? 그럼 바로 최신사항에 대해 업데이트 해주고 한번 실력을 보지.”
“예, 감사합니다.”
“일단 이게 와일리 상단에서 수표를 청구하면 제공해주는 금괴야. 이번에 인수한 아크바 상단에서 가지고 있던 것을 이용해서 청구했지. 다행히 아크바 상단의 금괴에는 문제가 없었고.”
“그럼 와일리에서는 검출되지 않았습니까?”
“전혀, 1kg 단위로 10kg을 청구했지만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어. 모두 위조된 인장이란 뜻이지.”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금괴와 같은 물건은 후입선출 방식으로 정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후버가 점점 더 사만다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도 생각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정상적인 것과 아닌 것, 두 가지를 섞어서 금괴를 20kg 정도 맡겼지. 만약 후입선출이라는 방식이면 하나라도 비정상적인 금괴가 섞여 있어야 하니깐.”
“확실히 수상하군요. 하지만 배열 방식에 따라 충분히 있을 만한 일입니다.”
“그렇지. 그래서 내가 아크바 상단을 인수한 거지. 컨텍트 상단에서 적당한 아티팩트 제조상단을 소개해 주기로 했어. 그냥 이름만 빌리는 거지만 혹시 무엇을 위한 것인지 맞춘다면 그 둘은 자네가 맡아서 운용해 주게.”
“제가 말입니까?”
파격적인 조치를 약속하는 후버의 말에 사만다가 놀란듯 되물었다.
“뭐 이미 프로필을 봐서 알겠지만 한스는 주로 무력을, 바이스는 드러나서는 안 될 일을 처리하지. 나는 드러나서도 안 되고 판단력이 필요한 일을 맡고 있고. 그럼 빈자리가 드러나면서 순간적인 판단을 필요로 하는 일은 자네가 맡아주면 좋겠는데.”
“대리영주 자리를 이용하면 록시나 자작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 나도 좋지. 하지만 록시나 자작가를 완전히 신뢰하긴 힘들고 아마도 이 일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장기전이 될 거야. 벌써부터 주어진 권리를 다 사용하다가는 나중에 쓸 카드가 없지 않나?”
“그래도 오랫동안 상단의 일을 해오던 재커리 같은 인물을 이용하신다면 더 쉽게 상대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전면적으로 나서서 달라는 건 아니야. 아크바 상단주도 우리 일에 협조하기로 했어. 무슨 일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야. 대신 어느 정도 웃돈을 얻어 주기로 했지. 협조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많으니 굳이 낭비할 필요는 없지.”
“그럼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상단을 이용해서 수표 거래를 이유로 진짜와 가짜를 섞어서 상단에 맡기고 위저드 마크를 이용해서 위치를 살펴볼 것입니다. 각자 따로 보관된다면 그때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 작전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위저드 마크?”
후버도 생각한 일이지만 그런 수상한 단체에서 1서클에 불과한 마법을 미리 감지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예, 제가 알기로는 위저드 마크 정도는 어느 정도 마법사를 고용한 상단에서는 금괴관리를 위해 사용하는 마법이기에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특히 아티팩트를 만드는 곳은 마법사가 있기에 사용해서 관리를 한다고 해도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사만다의 말대로 금괴의 분실 혹은 도난시의 용이한 회수를 위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상단은 위저드 마크를 사용하곤 했다.
물론 이런 사실을 도둑들도 알고 있기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조치였다.
“디스펠할 가능성은 없는 건가?”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1~2주면 사라지는 마법이기에 디스펠 후 다시 위저드 체크를 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소멸하면 한 번에 몰아서 마법을 다시 체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쪽에서도 주기적으로 걸어줘야 하는 만큼 하루 이틀 정도는 금고에 그냥 보관할 것입니다. 그리고 쓸모없는 위조인장으로 제작된 금괴는 한곳에 몰아둘 뿐, 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게. 혹시라도 생각한대로 구분해서 보관된다면 보고하도록 하고. 그런데 마법도 사용할 줄 아는 건가?”
“2서클까지는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티팩트 상단에 새로 재무관리 분야로 취업을 해서 업무를 배우기 위해 자금 담당 관리의 실무를 배우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니야. 전면에서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보다는 상단주의 위치가 더 편할 거야. 만약 와일리 상단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작전을 세우기 쉬울 거야.”
“옙, 저 외에도 마법사 몇 명을 추가로 요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기왕 상단의 인원들을 최대한 배제할 것이라면 마법사도 필요할 것입니다. 금괴의 성질을 알아보는데 필요한 시간은 한 달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중간보고서는 일주일 간격으로 짤막하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만다를 보고 후버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인물이 참여해서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 어지러워.”
“어서 오세요. 사만다 님. 후버 님에게 미리 말은 들었습니다.”
텔레포트 게이트 이용의 후유증 때문에 아픈 머리를 매만지며 도착한 사만다를 맞이한 것은 마릴린이었다.
기존 상단의 일로 바쁜 세이건이나 칼은 정보만 제공하여 주었을 뿐이고 아직은 활용할 곳이 없기에 실무적인 일은 배신할리 없는 마릴린에게 모두 넘겨 버렸다.
“예. 잘 부탁해요. 그런데 성함이?”
“마릴린이라고 해요.”
“그래요. 잘 부탁해요.”
“그런데 후버 님은 요즘 잘 지내시나요?”
일단 궁금한 후버의 안위를 묻는 마릴린의 모습에 사만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냥 일반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예. 어제까지는 괜찮으시더라고요. 후버 님을 잘 아시나 봐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냈거든요. 제가 그분의 전속 시녀였어요.”
“그러시구나. 그런데 일단 일 얘기를…….”
바로 착수하고자 하는 사만다에 비해 마릴린은 자신의 궁금증을 푸는 것이 먼저였다.
“슬렌은 어떻게 지내나요?”
“슬렌이… 아, 그 고양이요? 저는 못 봤네요.”
“아! 또 뭔가 하러 갔나 봐요?”
“원래 고양이는 이리저리 돌아다니잖아요. 이제 일 이야기를 할까요?”
자신의 실력을 빠르게 보여주고 싶었던 사만다와는 다르게 여유 있게 근황부터 물어오는 마릴린.
“모든 건 서류로 정리해 뒀어요. 일단 설명을 드리자면 거의 망해가는 아티팩트 상단이구요. 이름은 레리하이트 상단이라고 해요.”
“망해간다면 어느 정도죠?”
“상단이 만들던 아티팩트가 더 이상 팔리지 않고 마법사들도 하나둘 떠나고 있죠. 자세한 사항은 서류를 참고하시면 될 거예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픈 사만다는 얼른 서류더미들 사이로 자진해서 입수하였고 마릴린은 그런 사만다를 위해 좀 더 읽기 편하게 정리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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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한 산길 록시나 성과는 하루 정도 거리의 숲속에서 후버와 기사들은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이제 저녁을 준비하려고 하는지 솥과 장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기가 와일리 상단의 상행 행렬입니다.”
기사의 말을 들은 후버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당한만큼 갚아준다. 다들 석궁 준비.”
“정말 저희가 이런 일을 해야 되는 건가요?”
대충 서열을 정하고 록시나 영지로 돌아온 기사를 기다린 것은 명예롭기보다는 명예가 100% 실추되는 일.
“산적 일이 뭐 어때서 그러나?”
“그게 저희는 이래 뵈도 왕국군의 기사입니다. 위로는 주군을 수호…….”
“주군을 수호하는 일이다. 하기 싫으면 빠져도 좋다.”
10명 정도의 용병이 보호하고 20명 정도의 상인들이 함께 하기에 한스와 자신만으로는 힘든 일이었지만 첫 명령부터 거부하는 기사들을 다독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기어오를 것이다.
“빠진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일은 용병들을 고용하셔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괜한 말싸움으로 공격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후버는 기사를 대충 한번 보고는 재어두었던 활시위를 놓아 버렸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쌔앵~
손이 미끄러진 것 치고는 정확하게 처박힌 화살이 선두에서 마차를 끌던 말의 머리를 꿰뚫었다.
“너네들이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너희들 내가 전부 불명예 제대시켰어. 작전 실패하면 돌아갈 곳도 없어. 그리고 참여 안 하는 놈들은 전부 이 자리에서 해고니깐 알아서 하고 니들 봉급도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거든.”
후버가 잠깐 말하는 사이에 굳어 있던 상인과 용병이 화살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화살이다. 상인들은 마차 뒤로 숨고 용병들은 전면을 방어하라.”
날아온 화살에 경계하는 상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불만을 표하던 기사들도 전면의 두리번거리는 적들을 향해 석궁을 겨눴다.
그 와중에 한 명의 상인이 짐마차를 향해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경계를 강화해라.”
“바이스, 너는 장거리에서 석궁을 발사하도록 해라. 그리고 기사들은 선택의 시간이다. 참여하려면 한 명 이상은 처리하도록 한다. 명령에 따르도록. 그리스.”
먼저 그리스 마법을 이용해 상단의 말이 도망가는 것을 방지했다.
이제 천천히 원거리 공격을 이용해서 용병들을 처리하고 돌격해서 상인들을 쓸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셋을 셀 때까지 석궁을 일제히 발사한다. 위저드 마크로 표시된 용병부터 한 명씩 처리한다. 그리고 바이스 너는 자유사격으로 발사한다.”
“셋.”
“젠장!”
기사들의 불평을 담은 다섯 발의 석궁이 먼저 용병을 향해 날아갔다.
세 발은 빛나가고 두 발은 용병의 팔과 허벅지에 박혀 한명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그쪽이 아니다. 왼쪽으로 몸을 돌려라.
후버의 메시지 마법을 타고 용병의 귀에 들어간 목소리는 9명의 용병 중 2명의 고개를 왼쪽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간단한 방식이지만 적군의 시선을 돌리게 하고 아군에게는 공격의 대상을 특정하기에 좋은 방법이었다.
“이번에 방금 전에 고개를 돌린 두 명이다. 발사.”
미리 재어두었던 두 번째 석궁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두 명의 용병이 복부 쪽에 석궁을 맞고 쓰러졌고 선두 쪽에서 지휘를 하던 용병에게는 바이스의 석궁이 날아가 머리에 박혔다.
“바이스 잘했다. 너는 이제 용병의 반대편으로 가서 라이트 마법과 알람 마법 스크롤을 찢고 복귀한다.”
잠시 동안 찾아온 소강상태. 더 이상 석궁을 발사하면 대략적인 위치가 아닌 진짜 위치가 알려질 수가 있다.
일단 지금은 바이스가 알람 마법과 라이트 마법을 찢을 때까지 대기할 필요가 있었다.
“대장님이 돌아가셨다. 이제 지휘는 내가 책임진다. 3명은 전면의 숲을 수색하고 나머지는 이어질 석궁 공격에 대비하라.”
찌르르르르르르르르르.
바이스가 알람 마법과 라이트 마법을 찢자 용병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적들이 알람 마법을 건드렸다. 2명은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라.”
그 말에 상인들이 혼란에 빠져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용병 둘이 반대편으로 넘어 갔다.
하지만 갑자기 용병들을 지휘하던 임시대장은 뭔가 맞지 않는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 아직 알람마법을 설치하지 않았다. 제 위치로! 제 위치로!”
뒤늦게 알람 마법을 설치한 적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상단 행렬의 책임자가 소리를 쳐봤지만 이미 혼란에 빠진 용병들을 제지하기에는 부족했다.
“이제 속사다. 재워온 세 개의 석궁을 모두 발사해서 용병들을 처치한다. 먼저 전면에서 수색을 하고 있던 용병들부터 처리한다.”
“일단 따르겠습니다만.”
기사 한 명이 다시금 불평을 했지만 후버까지 가세한 화살은 전면의 수색을 하던 용병들의 몸통에 박혔고 알람마법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움직이던 용병들의 등판에 역시 화살이 박혔다.
“몇 명 남았지?”
“두 명 남았습니다.”
“석궁을 다루는 실력은 충분히 봤으니 이번엔 어디 칼질하는 실력 좀 보겠다. 전원 전면을 방어하면서 공격한다.”
적들이 아직 석궁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들이 석궁을 발사할 수도 있기에 경계를 강화하고 접근할 것을 명령했다.
“산적이 저기 있다.”
뒤늦게 상단의 일원이 후버 일행의 위치를 말해 주었지만 단 둘의 용병이 6명의 산적을 막아내기에는 무리였다.
“젠장 항복합니다!!”
아예 쥐고 있던 칼까지 놓고는 손을 올리는 용병. 그런 용병의 모습에 상인이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 보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용병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좋다. 항복하는 놈들은 살려 주마!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도망가고자 한다면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그 말에 일행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자가 후버를 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용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땅에 앉아라. 반항하지 마라.”
검술 실력을 구경하고 싶었던 후버의 기대는 충족시키지 못했지만 나머지 상행인원까지 항복을 한다면 굳이 공격을 할 필요는 없었다.
“좋다. 더 이상 공격은 하지 않는다. 너희들 스스로 묶어라.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묶을 때까지 석궁을 겨누고 있겠다.”
그 말에 몇 명의 상단 인원이 일어나서는 용병부터 시작해서 한 명씩 로프를 이용해 자신의 일행들을 묶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20여 분. 마지막으로 상단의 행렬을 책임지는 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묶인 것을 확인하고 후버까지 포함한 인원들이 전면에 나섰다.
와일리 상단의 인물들과는 처음 얼굴을 마주한 후버. 이들을 이용해서 병력을 줄이고 약간의 금괴를 회수해 그 진위를 파악하는 등 앞으로의 할 일이 청사진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