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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헴 자작가로 진입 (14/37)
  • 보헴 자작가로 진입

    늦은 밤, 이미 자신들의 소식이 백작성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제보다 근접한 상태에서 혹시 모를 가능성을 위해 어제부터 병사들의 식사는 미리 준비한 빵으로 대체하고 모닥불을 피우는 것도 금지했다.

    ㅇ“자작님. 병사들이 추위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움직임을 백작가가 이미 알고 있다면 괜히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트리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안 된다. 우리가 여기까지 근접했다는 것은 아직 백작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기사의 말에 한마디로 거절하는 자작의 말이었지만 기사도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자작의 막사 안에서만 은은히 흘러나오는 모닥불에 병사들의 불만이 점차 높아졌고 자신들 역시 풀 플레이트 아머를 통해 느껴지는 한기가 너무 심한 탓이다.

    “이대로 추위에 시달린다면 자정에 레빌리온 백작가로 공격을 가기 전에 병사들이 먼저 쓰러질 수 있습니다.”

    “으흠… 알겠다. 단 50명당 4개 이상의 장작을 주지 말도록 해라. 1시간에 3개씩 추가로 공급하도록 하겠다.”

    그 말에 기사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고 자작의 명령을 전하려고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 정도 추위도 못 견뎌서야 어디 정예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역시 용병들을 데리고 왔어야 했어. 그들이라면 감히 불만을 말하지도 못했을 텐데.”

    기사들이 나누어준 장작에 힘겹게 불을 붙인 병사들은 한 곳당 50명이 불 주위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게 하나의 원을 만들던 병사들이 이 정도 불로는 성에 안 차는 듯 두세 겹을 만들고 선임 병사들이 어린 병사들은 인도하면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차례로 회전하며 작은 모닥불에 의지해 추위를 이겨 나갔다.

    “저건 뭐 하는 거냐?”

    병사들을 바라볼 수 있는 둔덕에 올라 관찰하던 아이언의 눈에 천막에서 나와 오밀조밀 뭉치는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들링이에요. 자작이 불을 작게 피우라고 시켰나 보네요. 자작 마음처럼 불 크기 한번 졸렬하네요.”

    “으흠.”

    지이이잉.

    ―동생. 누님은 준비 끝!

    “예. 저도 시작하겠습니다.”

    순간 기존의 작전을 변경하고 오밀조밀 모인 병사들을 공격할까 고민하던 아이언이었지만 이 시점에서 괜한 작전의 변경은 혼란만을 가중시킬 수 있었다.

    “지금 병사들이 무엇을 하는 건가? 자작.”

    “예, 아이언 님. 추위를 이기려고 모닥불을 피우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문제가 된다면 바로 끄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쯧쯧! 이런 자가 군사를 이끌다니. 자네는 백작령 방향 5km 밖에서 다가오는 백작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이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자작은 확인하기 위해 기사를 불렀다.

    “정찰병에게서 들어온 소식은 없는가?”

    “예. 아직까지 없습니다.”

    “백작령 방향으로 정찰을 보내도록 해라.”

    ‘아… 또 지랄인가?’

    정찰병을 보내라는 자작의 말에 아이언의 표정이 구겨지자 자작은 잠잠했던 아이언의 지랄병이 다시 도지는 것이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아니다. 당장 병사들을 준비시켜라. 자정이 가까워 왔으니 백작령의 목책을 넘어간다.”

    “쯧쯧쯧!”

    혀 차는 소리가 거슬렸지만, 괜히 말을 해 책을 잡히기 싫었던 자작은 병사들을 독려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막사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렇게 소심해서야!”

    자신이 한 일은 생각도 안 하고 어쌔신 길드의 대리인을 죽일 만큼 앞뒤 가리지 않는 자작을 소심하다 평가하는 아이언이었다.

    “저… 저기 뭔가 분홍색이 보입니다.”

    보란 듯이 무장을 풀고 자신의 갑옷을 자랑하는 세실리아의 모습이 가장 먼저 병사들에게 보였다.

    정찰병이 먼저 뭔가 분홍색의 물체가 목책에서 서성이고 있다고 할 때는 무슨 헛소리냐며 발길질을 해대던 자작이 세실리아를 직접 보고는 간단하게 평가했다.

    “뭐 저런 미친놈이… 기사 새끼가 분홍색을 입고 …….”

    거리가 멀고 긴 머리카락을 풀 플레이트 아머 안에 감춘 세실리아의 모습에 남자라고 판단하고는 욕하는 모습에 아이언의 기분이 다시 더러워졌다.

    “저런 오합지졸들을 가지고 아이언 님을 막으려 하다니 저놈들이 미쳤나 봅니다.”

    고의적으로 발견되기 위해 번쩍번쩍하는 풀 플레이트 아머에 기름칠까지 해서 온 것을 모르는 자작은 백작군을 비웃었고 병사들에게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사정거리까지 접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격 더러운 아이언이 몇 번이나 도와줄지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 이런 오합지졸은 자신의 병사로 처리하고 아이언은 백작성을 공략할 때를 위해 아껴둘 필요가 있었다.

    “너 나 여기 있는 것 백작군에 알렸냐? 쟤들이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준비해오냐?”

    대번에 다시 삐뚤어지는 아이언의 반응, 아부 한마디 잘못했다고 또다시 지랄병이 도지려 하는 아이언을 보고 자작이 황급히 변명했다.

    “아닙니다. 그저 말을 하다 보니 실수로…….”

    “이 새끼… 긴장 풀려서 본심 나온 것 아니야? 너 백작의 첩자냐? 안 그러면 걔들이 나를 어떻게 알고 준비해 오길 바라는 거냐? 아니면 마탑주가 시키디? 쪼르르 달려가서 탑주한테 너보다 강한 마법사 있다니깐 죽이라 그러냐?”

    이 한번 공격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한 자작이 첩자라니?

    비약이 심해도 이렇게 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탑주라니?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말라는 말에 물어는 보지 못하고 과거 300년 전부터 유명했던 마법사를 모두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실리카겔의 이름에 자신이 속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그 이름은 발설하지도 않았다.

    “새꺄! 온몸에 검게 칠한 네놈들이 더 이상해.”

    그리고는 자작에게 몸을 휙 돌리고 반대편으로 가는 아이언.

    “어디 가십니까?”

    “네가 마음에 안 들지만 적을 앞에 두고 푸닥거리 할 수도 없고 병사들을 기병부터 가장 앞세워서 밀도 있게 배치해둬, 궁병 꼬맹이들 장궁 내리고 창이나 검 들라고 하고.”

    “병력을 밀도 있게 배치하라뇨? 기병은 후방에 일단 대기를 시켜야…….”

    자작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궁병이 먼저 장궁으로 효력사를 통해 부대의 혼란을 유도하고 그 뒤를 기병이 쓸고 지나가는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었다.

    “내가 있는데 궁병으로 활질할 필요 없다. 마법으로 뒤흔들면 기병을 이용해서 단번에 백작 군을 궤멸시키고 백작성까지 한달음에 달려간다.”

    “그럼 저도 아이언 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가면? 네가 무슨 도움이 되는데?”

    자작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아이언도 따라오는 자작을 인질로 잡는 게 더 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지금은 냉정해질 때.

    “알았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도저히 적응 안 되는 아이언의 행동에 정말로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작이었다.

    아이언이 빠르게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본 자작이 왜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편하게 이동하지 않는 것인가 순간 궁금해 했지만, 텔레포트 마법진 특유의 빛 무리가 백작 군에게 마법사의 존재를 알리고 경계를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좋게 해석하였다.

    ‘이제 이대로 파죽지세로 백작성까지 달려가서 백작성을 점령하고 이 편지만 바꿔 놓으면…….’

    손에 잡히는 영지전을 선포하는 서신을 매만지며 자작이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 때, 아이언이 사라진 곳에서 환한 빛 무리가 자작군의 진영까지 강한 빛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 빛에 대한 반응은 백작군이 먼저 보였다.

    “마법사님의 신호다. 모두 준비!”

    노만의 우렁찬 목소리를 보고 복창되면서 100명의 궁병을 긴장하게 했다.

    그리고 시위를 떠나는 한 발의 가이드 에로우가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 선두에 정렬해 있던 자작의 기병 앞 3~4미터의 땅을 때리고는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자작군의 한가운데에도 떨어지게 쏠 수 있지만 놀란 적군이 우왕좌왕하면서 밀집 대형이 분산될 우려가 있기에 직전에 떨어지도록 조정한 것이다.

    “락온.”

    그와 동시에 수십 개의 수정구가 하늘에 떠서 만든 3개의 고리가 밝은 빛을 비추었고 고리가 완성되자 노만의 발사 명령을 받은 백작군의 궁병들은 석궁을 일사불란하게 당겨 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빛 무리로 자작군이 웅성대자 슬레인 자작이 호기롭게 외쳤다.

    “병사들은 당황하지 말고 적을 맘껏 비웃어줘라! 이 마법은 우리 군의 마법사님께서 사용한 것이다. 기사들과 기병은 렌스 차징을 준비하고 병사들은 전력 질주로 백작성을 향해 진군할 준비를 해라.”

    “예.”

    명령을 내린 자작이 백작군을 보자 석궁을 발사하더니 이어서 아이언의 마법에 장궁을 쏘는 것을 보고 비웃었다.

    ‘쯧쯧! 마도사의 마법이 고작 화살 몇 발에 취소될 정도면 마도사가 다 죽겠다. 이놈들아.’

    “아… 아니… 저게 왜 이쪽으로?”

    혼란은 선두의 기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한번 실리카겔의 강력한 마법을 견식한 적 있는 그들로서는 허공의 빛 무리가 백작군이 아닌 자신들을 향해 발사되는 것에 혼란을 느낀 것이다.

    특히 자작령의 두 마법사는 간신히 자신만을 보호하는 쉴드를 사용한 채 빛 무리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됐다. 모두 후퇴하라!”

    “후퇴하라! 모두 기수를 돌려라.”

    눈치 빠른 몇몇 기사들이 이미 렌스 차징을 위해 준비된 자세를 풀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뒷걸음치던 말은 밀집된 병사가 들고 있던 칼이나 창에 엉덩이가 베였다.

    놀란 말이 뒷발차기로 병사를 날려버리거나 성격 급한 기사가 전방을 향한 렌스를 거두지 않고 말의 몸을 트는 바람에 옆에 있는 기병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등 혼란만이 가중되고 있었다.

    히이이이잉!

    병사들을 독려해야 할 기사들도 무기를 버리고 반대편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지휘 없이 혼란만 가중된 부대를 맞이하는 것은 별똥별처럼 내리는 화살의 비였다.

    정점에서 시작한 화살의 비가 자작군이 밀집한 진형에 틀어박히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초. 본능적인 동작 외에는 무언가 사고를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후두두. 두둑.

    기사들의 풀 플레이트 아머는 뚫지 못하지만, 사람과 말에 틀어박히는 화살의 비가 보병들에게는 중상과 죽음을, 기병들에게는 낙마 후 말에 채이는 고통을 주었다.

    본능적으로 빛을 피하고자 백작군의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통제를 벗어난 기마들은 진형을 흩트리고 피해를 가속화시켰다.

    “이게 무슨 말도 되지 않는……”

    빛 무리가 자신 쪽으로 향할 때 이미 자신이 죽어 있다고 생각한 자작이었지만, 일전의 큰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화살에 어린 빛은 그저 기사들을 혼란케 하려는 라이트 마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기사들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본능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에는 충분했다.

    ‘도망. 도망가야 한다.’

    자작 역시 그 본능에 사로잡혀 가장 후미에 있었음에도 발을 놀려 백작군과의 거리를 벌리려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지만, 이미 자작의 머리 위에는 하나의 수정구가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

    *

    *

    얼마 전 아이언과의 아침식사 후 슬렌이 할퀴었을 때 닦지 않고 바닥에 흘린 피, 그 피에 섞여 있는 자작만의 희미한 마나의 흐름을 이미 후버가 채취하여 오직 그만을 추적하는 수정구를 공격 직전에 배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후버를 암살하려던 어쌔신이 그렇듯이 자작도 공중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어서 영지로 돌아가서 용병들을 고용해야 해! 아이언 이 개새끼.”

    자작이 아이언을 찾는 동안 청년의 모습을 한 후버는 양손을 들고 손가락 끝에 라이트 마법으로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며 백작군을 향해서 걸어갔고 장난스러운 세실리아의 몸수색을 당했다.

    자작의 위치를 나타내 주는 수정구를 큐리오에게 넘기고는 후방으로 이동해 마련된 막사 안 침대에서 오랜만에 단잠에 빠졌다.

    내일이면 다시 헤이스트를 걸고 뒤처진 만큼 자작성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가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의 피로가 너무 심했다.

    *

    *

    *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난 슬레인 자작이다. 어딜 일개 기사 따위가 나를 포박하려는 것이냐?!”

    모든 병사를 잃었음에도 당당하다는 듯이 행동하는 슬레인 자작이었지만 감히 눈을 아래로 깔고 몸을 움직여 반항하지는 못하고 그저 입으로만 저항할 뿐이었다.

    “무릎을 꿇어라!”

    말과 함께 무릎 뒤편을 차서 슬레인을 무릎 꿇리는 것은 제이드였다.

    그리고 시야가 낮아진 슬레인의 눈에 보이는 강렬한 핑크에 자신이 비웃었던 그 갑옷을 입은 기사의 앞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예 기사단장님. 슬레인을 잡아왔습니다.”

    살짝 한쪽 무릎을 꿇으며 보고를 하는 기사의 말에 슬레인 자작이 다시 기가 살아서는 고래고래 외쳤다.

    “고작 명예기사 따위가? 백작가의 자제이냐? 네놈의 신분을 밝혀라! 나를 이리 대한 대가를 백작에게 직접 받아내겠다.”

    도망치다 이리저리 쓸리고 벗겨진 팔을 들이밀며 항의를 하는 자작이었지만 세실리아에게는 단 한 단어만이 크게 들렸다.

    “놈?”

    지금 세실리아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자신이 평소에 상상하던 전장에서의 자신의 모습과 현실은 달랐다.

    마지막 한순간에 약해진 마음은 확실한 마무리를 주변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들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만들었다.

    “큐리오.”

    큐리오 쪽으로 검을 내밀며 혈조를 두드리는 그녀의 동작에 큐리오는 가죽 주머니에 넣어둔 포션을 그녀의 혈조에 부었다.

    자신의 혈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세실리아. 혹독하게 몸을 단련해도 무거운 검의 무게를 줄이려고 빌어먹게 깊이 파 놓은 이 혈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퍽!

    검면으로 슬레인 자작의 어깨뼈를 부실 듯이 휘두르는 세실리아의 일격.

    “큭! 네년이 감히 귀족 포로인 나를 학대하는 것이냐?”

    “안 됩니다. 세실리아 님. 아직 그는 귀족입니다. 귀족 포로에 대한 학대나 고문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치료다.”

    “네?”

    “상처로 인해 백작가에 받을 것이 있다니 최상급 포션으로 치료해주는 것뿐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대륙법에는 귀족 포로에게 자백 혹은 정보를 알려고 고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학대나 고문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

    분명한 억지이지만 그 말에 아무도 세실리아를 말리지 않았다.

    슬레인 자작이 적이란 것은 변함이 없었고 외상이 치료된 듯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그녀의 기분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포로의 증언은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세실리아는 자신의 더러운 기분을 풀려고 몇 번의 구타를 한 후 기절한 슬레인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다시 말 위에 올랐다.

    아직 한 번의 전투가 더 남아 있고 더러운 이 기분은 그곳에서 풀고 싶었다.

    자작성까지의 빠른 진군은 그렇게 시작됐다.

    “자작의 성까지 최단 시간으로 돌파한다!”

    자작을 자루에 담아 교대로 기사들이 자신의 말 위에 올려두고 진군한 지 4일째. 자작의 깃발을 세우고 평범한 풀 플레이트 메일의 색을 띠고 있기에 별다른 충돌 없이 자작 영지의 성벽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자작의 깃발을 세웠다고 해도 그 흔한 검문 한 번 없다는 것은 이상했다.

    “검문이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군.”

    굳게 닫힌 자작 영지의 성벽 위에 일단의 병사들이 늘어서고 있었다.

    자작은 생포했고 한 명의 마법사는 죽였지만 한 명은 중상을 입은 것은 확인했지만 블링크 마법을 이용해서 도망가는 바람에 처리하지 못한 것이 농성 준비로 나타난 것이다.

    ‘공성이 힘들까? 수성이 힘들까? 마법사 놈이 아주 귀찮게 하는군.’

    도망간 마법사가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상황을 알렸는지 자작성은 충분한 준비를 하고는 백작군을 맞이했다.

    징집병을 포함해서 모든 병사를 성벽 안에 모았는지 그 수가 적지 않았다.

    그나마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용병을 고용하지 못한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자작은 포로로 잡혔다. 항복하고 성문을 열어라.”

    큐리오의 목소리.

    “…….”

    성벽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작은 수많은 정부와 한 명의 부인, 그리고 딸이 한 명 있었지만 당장 자작 영지를 대표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로비스 역시 신분은 평민, 영지전에서 상대방에게 존대할 수도 그렇다고 평민인 자신이 반말할 수도 없었다.

    “아직도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로비스는 귀에 들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이미 기울어진 영지전은 신경 쓰지 않고 자작령에서 돈 될 만한 것을 모두 챙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일주일 정도는 시간이 있을 줄 알고 꼼꼼하게 챙기던 그에게 백작군은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자작이 잡혔다는 것을 못 믿는 것이냐? 자작의 얼굴을 확인시켜 주마.”

    세실리아의 보호를 받으며 손발이 결박된 자작을 질질 끌고 성벽 위의 눈이 좋은 사람이라면 얼굴을 구분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한 큐리오가 자작의 머리채를 잡고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와~!!

    자작의 처참한 몰골이 등장하는 것에 맞춰 백작가의 병사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이런 요식행위를 할 필요는 없지만, 자작령에 있는 단 한 명에게만은 자작이 생포된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

    *

    *

    한 시간 전 아이언에서부터 통신용 수정구로 자작을 생포했으니 확인하고 싶으면 성벽 위에 올라가 있으라는 지시를 받은 한스는 자작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이다.

    ‘정말이군. 자작이 정말로 사로잡히다니!’

    자작의 생포 사실을 확인한 한스는 망루에 있는 다른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 이만 들어가시지요. 날도 찬데 두 명이나 서 있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야. 괜히 걸리면 수습기사인 너는 몰라도 나는 살아남지 못한다.”

    병사생활 때부터 자신을 잘 챙겨주던 형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려는 일을 알면 서로 칼을 겨누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고 한스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제가 몇 주째 혼자 여기를 지키는 것은 지휘관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새삼스레 뭐라 하겠습니까?”

    “그래도…….”

    “그럼 눈이라도 부치고 계세요. 찬 데서 자면 안 좋다지만 그래도 조금은 쉬셔야겠습니다. 설마 저놈들이 겨우 저 정도 숫자 가지고 공격을 하겠습니까?”

    이미 아이언에 대한 소문은 그저 그런 마법사 정도로 소문이 나고 있었다.

    생존한 한 명의 마법사가 성으로 복귀하지는 않았지만, 수정구를 이용하여 아이언이 지금까지 사용한 마법의 수준이 낮았고 절벽의 것이 마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로비스에게 해준 것이다.

    영지의 병사가 자신이 자작의 재산을 모두 챙길 때까지 버텨주어야 하기에 로비스는 그런 마법사의 추측을 적극적으로 병사들에게 주입시켰다.

    “그럼 잠깐만 눈을 붙이도록 하겠으니 혹시 누가 오면 꼭 깨워주게.”

    “알았습니다. 안심하세요.”

    병사가 자신의 무기를 한편에 세워두고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한스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정면을 주시했다.

    그렇게 정면을 주시한 지 한두 시간이 흐르자 병사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찌이이익!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병사에게 겨누고 찢어 버리자 병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아이언에게 받은 슬립 마법 스크롤을 사용한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혹시라도 발각되었을 때 사용하라고 준 것이지만 백작군이 쏜 화살에 그가 다칠 수도 있기에 편하게 뉘어 주고는 백작군을 향하는 쪽 벽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괜히 서 있는 것보다는 벽에 딱 붙어 있는 것이 살아날 확률이 더 높았다.

    차이이익.

    두 장의 스크롤을 연달아 찢어 병사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한스는 파묻어 두었던 약품을 꺼내 나무 위에 부어 버렸다.

    뭔가가 타는 듯한 미약한 소리와 함께 역한 냄새가 퍼지자 한스는 공기정화 마법이 걸려 있는 스크롤을 사용해서 역한 냄새를 사라지게 했다.

    치이이익.

    한두 번 약품을 부을 때마다 미세하지만,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사용하는 렛칫을 고정하기 위해 땅에 박혀 있는 나무기둥이 타듯이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프레쉬에어 스크롤까지 사용하자 더 이상의 반응은 나타나진 않았다.

    클린마법이 적힌 스크롤을 사용하여 나무에서 나는 냄새를 최대한 줄이고는 적당히 주변에 널려 있는 흙으로 검게 변한 나무를 가려 두었다.

    ‘이 정도면 거의 다 됐군. 그럼 마지막으로.’

    몸을 숙이고는 망루에 올라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가려지는 곳에서 통신을 시도했다.

    “약품을 다 사용했습니다.”

    ―잘했다. 앞으로 30분 후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알았습니다. 약속은 지켜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라. 슬레인 자작은 우리 옆에 잘 있으니깐.

    백작군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퍼졌다.

    망루에 있는 병사들이 하나둘 이상함을 눈치를 채고는 종을 흔들어 성의 경계를 강화했다. 막사에서 하나 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서는 지정된 위치로 이동했다.

    “위험하지 않겠어?”

    큐리오가 후버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형님, 걱정하지 하지 마세요. 금방 다녀올 테니.”

    “안 될 것 같으면 돌아와. 무리할 것 없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약속한 시간에 부탁합니다.”

    후버는 최대한 소란스럽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서쪽의 성문으로 말을 타고 이동했다.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지금 소란스럽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남쪽 성문의 하늘에서 밝은 빛이 보였다.

    후버의 안위가 걱정된 세실리아가 최대한 소란스럽게 라는 말에 화살 공격을 할 듯 수정구까지 사용한 것이다.

    “이 정도면 확실히 소란스럽군.”

    남쪽 성벽에서 발생한 난리에 경계를 서던 병사들의 시선마저도 빛이 비치는 남문 쪽으로 돌아갔다. 여기서부터는 운, 감시병들의 시선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버가 블링크 마법을 통해 40m쯤을 이동하고는 남은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성벽 아래의 사각까지 갈 수 있다면 성벽을 따라 목적지인 남문까지 갈 수 있다.’

    부딪치듯이 성벽에 밀착한 후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헤이스트까지 사용한 자신의 달리기 실력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지 들키지 않고 성벽 아래에 붙을 수 있었다.

    벽에 최대한 붙어서는 남쪽 성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와~와~

    어느새 남쪽 성문 주위는 다시 어둠이 깔렸다.

    소란스런 병사들의 소음을 들으며 도착한 남문에서는 좀 더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한 실수로 기척을 낸다면 여기까지 온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위자드 록. 웹.”

    소곤소곤한 목소리로 위자드 록과 웹을 이용해 성문을 잠가 버렸다.

    생각 같아선 이 성문을 열어버리고 싶었지만, 후버는 성문을 혼자서 빠르게 열 힘도 없고 성문을 연 순간 후버는 본진에 돌아가기도 전에 칼 맞아 죽거나 화살에 몸이 꿰뚫릴 것이다.

    아직 검을 익히지도, 몸이 사라지게 할 정도의 마법을 익히지 못한 후버의 한계였다. 지금은 얼른 돌아가야 할 때이다.

    “수고했어!”

    반갑게 맞아주는 세실리아, 그리고 말은 안 하지만 어깨를 두드려 주는 큐리오의 행동이 환영 인사를 대신했다.

    “가능할 것 같아?”

    “앞으로 한 시간, 그 정도면 적당하겠지.”

    “응! 아마도. 만약에 실패한다고 해도 다른 방법은 많으니깐.”

    “그런데 아까 활을 쏘자는 건 누구의 아이디어야?”

    “그건 노만이라는 병사의 생각이야. 실제로 화살을 쏜 것은 아니고 무력시위만 한 거지. 일단 여기서 자작의 성벽 위까지는 화살의 사거리도 닿지 않고.”

    “세실리아가 실제로 화살을 발사하려는 것을 내가 말렸지.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적들의 긴장이 풀릴 테니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지만, 후버가 작업한 성문 근처에는 하나의 화살도 없었다.

    그제야 후버도 긴장이 풀리며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 마나석을 잡고 명상을 시작했다.

    *

    *

    *

    “전 병력 위치로!”

    한 시간여가 지나자 큐리오가 선창하고 제이드가 복창하면서 병력을 성문에 조금 더 가깝게 배치하였고 후버는 적당한 높이의 나무를 베어내 어설프게 공성장비를 만들었다.

    통나무에 밧줄을 묶어서 성문을 부술 수 있게 만든, 보기에만 멀쩡한 어설픈 장비이지만 이 공성장비가 성문을 열어 줄 것이다.

    힘이 센 20명의 기사에게 나눠 들게 하고는 2 서클 미러 이미지를 사용해서 그들과 똑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그래도 적의 마법사가 성벽 안에 합류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

    마나 명상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지만, 아직 후버가 할 일은 많았다.

    후버는 다시 한스를 부르는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이제부터 통신 수정구를 끄지 않고 지속적으로 안의 상황을 말로 전해주며 내 지시를 따르면 된다.”

    ―알았습니다.

    피곤한 몸이 시간 감각까지 앗아간 듯하지만, 아직도 수정구 너머의 아이언은 자신에게 시킬 것이 많은 듯했다.

    “곧 공성장비가 자작성을 향해 돌격할 것이다. 너는 병사 20명을 동원해서 그 성문이 부서지지 않도록 몸으로 막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내 지시에 맞게 스크롤을 찢고 성문을 최대한 강하게 밀면 되는 것이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신호는 소리가 아니라 수정구의 진동을 이용할 테니 진동에 주의해라.”

    후버와의 통신을 끝낸 한스는 품에 수정구를 집어넣고 병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성벽에 있던 병사 한 명이 큰 소리로 공성 무기의 출현을 알렸다.

    “적이 공성무기를 가지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적들은 강행군해서 공성 무기 같은 것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로비스가 큰 소리로 부정했지만 여기저기서 공성무기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병사들의 소리가 들렸다.

    로비스는 똥 씹은 표정을 하고는 도망가려고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정말 공성 무기가 온 것이라면 지금은 미술품을 챙기는 것보다는 마련해 두었던 비밀 장소에 숨는 것이 중요하다.

    “너희 어서 이쪽으로 와라.”

    한스의 명령에 20명 가까이 되는 병사들이 한스를 바라본다.

    “게이트 스토퍼는 건드리지 말고 스크랩을 짜서 문을 지켜라.”

    사실 후버가 준비한, 저런 엉성한 통나무는 성문의 중심과 바닥의 홈을 파서 공성 무기에 어이없이 열리지 않게 한 게이트 스토퍼만 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핫! 핫!

    스크랩을 짜고 호흡을 맞추고 있는 병사들을 보면서 한스는 후버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것뿐, 저런 장난감 같은 통나무가 실제로 문을 열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두 충돌에 대비해라.”

    “옛.”

    “관측 가능한 병사는 현재 상황 보고하라!”

    한스의 지시에 한 병사가 소리쳤다.

    “저들은 괴물입니다. 화살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화살을 쏴도 맞지 않습니다. 10미터 남았습니다!”

    경악, 공포 그 모든 게 뒤섞인 병사의 목소리에 한스는 병사가 괜한 과장을 한다고 생각했다.

    공성장비를 든 기사들도 곧 쓰러질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언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잘못되어도 자신의 일을 확실하게 해야지 자작을 넘겨 줄 것이기 때문이다.

    “충돌 대비!!”

    그 말과 함께 잔뜩 웅크리는 병사들, 그리고 그 순간 느껴지는 수정구의 진동.

    “충돌! 전력을 다해 문을 밀어라!”

    그리고는 스트랭스 스크롤을 찢었다.

    ―으악!!!!

    전신에 힘이 넘치는 기묘한 쾌감에 병사들은 모든 힘을 다해서 문을 밀었고 그런 소리는 수정구를 통해 후버에게도 전해졌다.

    병사들의 힘이 최고조에 이르고 성문을 미는 강력한 압력이 작용한 순간.

    “디스펠 웹 & 위자드 록.”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해서 가슴에 있는 수정구를 바라보려 했지만, 귓가를 울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우지끈!

    자신이 새벽에 이상한 용액을 뿌렸던 곳에 고정된 레칫 장치가 하늘을 날듯이 떠오르면서 문이 열렸다.

    ―으아아아~ 안 돼!

    병사들이 지르는 절규의 소리! 그리고 병사들을 향해 달려 들어오는 것은 통나무를 든 20명의 기사.

    “살려줘!”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환 자작의 성문 앞, 당장에라도 쓰러진 병사들을 짓이길 듯이 달려오던 기사들의 모습이 병사들을 통과해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지는 촉 부위에 작은 수정구가 달린 화살, 밝아지는 하늘.

    “성문은 뚫렸다. 단 한 명이라도 무기를 들고 있으면 몰살시켜 버리겠다.”

    누군지 모를 사람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한스는 약속했던 거짓 항복이 아닌, 허탈감에 진심으로 검을 놓아 버리고는 항복했다.

    단 두 발의 화살, 사상자 없음. 전무후무한 무혈입성 기록과 함께 백작가의 깃발이 자작의 성에 꽂혔다.

    공성무기 하나 없는 자신과 아이언이라고 밝힌 마법사 단 두 명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것이다.

    와~!!

    백작가 병사들의 함성이 하늘높이 치솟았다.

    *

    *

    *

    백작가가 자작의 성을 함락한 지 두 달, 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한결 가셔 봄을 준비하고 있었고 횡령범으로 백작가에 지명수배 되었던 총관은 백작가의 전쟁영웅으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필러는 드디어 조금 한가해진 아카이브, 크롤라이드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큐리오는 영주 대리로서 자작가에 파견을 나갔다. 세실리아는 자신을 갈고 닦는다는 이유로 오로지 수련장에서 온종일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약속했던 자작과 돈 그리고 그들의 식솔들이다.”

    백작령의 한적한 숲 속 손등과 이마에 노예의 낙인이 찍힌 상태에서 자작의 가족은 한스에게 인계되었다.

    “후버 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저희를 용서해 주시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영지의 승계와 보고를 위해서는 자작의 신분이 필요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은 자작,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한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너는 언제부터 백작가와 함께한 것이냐? 내가 너를 좋게 봐서 기사의 자리로 올려줬거늘!”

    “넌 이제 닥쳐라! 어디서 노예 새끼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소리를 지르는 거냐?”

    동시에 휘둘러지는 한스의 발에 자작 부인이 가슴을 차여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너 이놈이 끝까지.”

    부인을 살피는 자작이었지만 한스는 딸의 가슴을 발로 차버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자신이 말을 할수록 가족들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눈치챈 자작은 차마 말을 못하고 가족들을 한스와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후버 님.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아이언이라는 마법사는 누구이며 언제부터 후버 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까?”

    한스의 표정에 진심이 묻어 나왔다.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강한 욕구. 하지만 아직 그는 자신이 왜 알아야 하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나?”

    “예.”

    “왜 알아야 하는지 말해준다면 들어보고 대답을 해주겠다.”

    한스는 후버의 눈치를 보면서 숨을 한번 고르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작가는 저에겐 넘을 수 없는 벽,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자작을 죽이고 싶었지만 제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란 걸 알고는 적당히 현실에 타협해가며 그렇게 자작을 죽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속이며 살아왔습니다.”

    솔직한 한스의 고백, 슬렌과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전에는 자신이 정말 자작을 노예로 소유하거나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다스릴 수 없기에 하루하루를 자신을 속이며 살아온 것이다.

    “흠…….”

    “자작의 성을 무너트린 것은 단 한 명의 마법사였습니다. 어떤 가문도 집단도 아닌 단 한 명의 마법사가 저를 이용해서 자작가를 순식간에 무너트렸습니다. 그를 도와준 한 명의 조력자로서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마법사가 저에게 말한 대로 저들도 자신들이 어째서 이렇게 노예가 됐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들이란 자작가의 가족과 자작을 말하는 것이리라.

    “권리라… 사실 당신은 나와 이렇게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백작가의 자제, 당신은 아직 수습기사. 하지만, 내가 한 말이 있으니 책임지도록 하지.”

    “후버 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라니요?”

    “이제부터 내가 지금 한 말까지 함께 설명해 줄 것이오. 일단 끝까지 들으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버가 아이언이었을 때 후버는 한스를 설득하기 위해 자작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아야 복수가 끝난다고 이야기했다.

    자작을 넘겨주고 돈을 넘겨주는 것이 약속을 지킨 것이라면 나머지 것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복수를 도와준다는 포괄적인 내용에 자신이 정의한 이유를 알려 주는 것도 포함되었다고 봐야 했다.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후버의 장고에 초조했는지 한스가 다시 가부를 물었다.

    “정 원한다면 단,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네.”

    “알았습니다.”

    후버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식사도 잊은 채 초저녁에 시작한 이야기는 늦은 저녁에 끝을 맺었다.

    후버, 실리카겔, 아이언 모두 동일 인물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말하는 고양이 슬렌에 대한 것까지…….

    몇 번이나 표정이 변한 자작이 후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그때마다 슬렌의 발톱이 자작 집안 식구들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아… 처음부터 자작은 불가능한 도전을 한 것이었군요.”

    “가능할 뻔은 했지. 그가 처음 계획처럼 10년 가까운 세월을 투자했다면 그때는 성공했을 거야.”

    한스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거칠게 자작의 집안 식구들을 묶은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몇 번의 분노를 끝으로 삶의 희망을 잃은 자작은 그저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갈 뿐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한스가 자작과 그 식솔들을 옭매는 쇠사슬을 잡아끌고 후버와 약간 멀어진 곳으로 그들을 끌고 갔다.

    다소 먼 거리이고 어두워서 그들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달빛에 반사된 시퍼런 칼날에서 비추는 빛, 물컹하게 집히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밤눈이 밝은 슬렌에게는 모든 것이 보이는지 슬렌의 표정에도 경악이 어렸다.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굳이 내가 있는 앞에서 그럴 것은 없었을 텐데?”

    온몸에 칠해져 있는 피와 기름기가 잔뜩 끼어 그 날카로움을 모두 잊어버린 칼날, 머리카락이 엉켜 있는 부츠, 손가락에 묻어 있는 흰색 점액질, 떡진 머리, 그리고 한 손으로 질질 끌고 오는 자작과 그 가족을 묵고 있던 쇠사슬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후버 님, 저를 후버 님의 기사로 받아 주십시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내가 왜?”

    “저는 이미 저의 충성심을 후버 님의 비밀을 들은 자작을 죽임으로써 증명하였습니다. 제 개인적인 복수보다는 후버 님을 위해 자작과 그 가족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무릎까지 꿇고 피칠을 한 사내가 아직 청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어린 후버에게 하는 간청, 기사도의 가식도, 섬기는 자가 가져야 할 지식도, 기사로서의 능력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따르겠다는 진심은 어느 정도 증명해 보였다.

    “질문을 하나 하지. 왜 자작을 먼저 죽이지 않았나?”

    “그의 가족이 죽는 것을 먼저 보고 이유는 몰라도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는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한스가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노예의 인을 찍고 죽고자 하는 그가 아닌 제가 자작의 횡포에 그랬듯이 저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살고자 하는 그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후버가 잠시 고민했다.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한스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종류의 사람이다.

    전생의 사회에서 살아온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은 잔인한 모습, 결론은 쉽게 내려졌다.

    “슬렌, 앞으로 형이라고 볼러라.”

    방광이 쪼그라들 듯 주저앉아서 오줌을 지리던 슬렌이 고개를 수십 번 끄덕이는 것으로 위아래도 정해졌다.

    영지를 벗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들인 내 사람,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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