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없는 무력시위의 진실
슬레인 자작성 방문 D-1. 한껏 몸을 낮춘 병사 11명과 후버 그리고 슬렌은 밤을 이용해 슬레인 자작성이 한눈에 보이는 절벽으로 올라가는 산의 초입까지 다다랐다.
이곳 초입과 연결되는 영지까지는 편하게 마차를 타고 왔지만 이곳에서부터는 걸어 올라가야 한다.
“미안합니다. 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는 분들은 여러분들밖에 없어서.”
노인의 모습을 한 후버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영지 병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오늘은 길고 긴 밤이 될 것이기에 그 미안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일 것이다.
“모두에게 스트랭스 마법을 걸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포션은 무한정 사용할 수 있으니 작업 중에는 물 대신 포션을 드세요. 큐리오 소영주께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라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10인 대장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들이 영지의 비밀 무기를 본 첫 번째 사람이라는 묘한 특권 의식과 자신을 기억해 주고 있는 큐리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럼, 순서대로 이쪽으로.”
“예. 부탁드립니다.”
10인 대장부터 스트랭스와 헤이스트를 걸어 주고는 후버 일행은 빠르게 산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는 것보다 올라서 할 일이 더 많은 까닭이다.
“헉. 헉. 웃차!”
산을 반절 정도 와서는 백작 영지의 병사들이 지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법을 걸어 주었다 하더라도 근육의 피로도는 줄지 않는다.
마법은 잠재력을 꺼내서 사용하게 해주는 것이지, 사람을 괴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10분 쉽니다.”
“10분 휴식.”
낮게 재창하는 10인 대장의 지시에 따라 모든 병사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힘들지는 않지만 노마법사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포션을 한 병은 드시고 한 병은 다리 부분에 바르세요.”
“하지만 이 귀한 것을 어찌…….”
그저 처음에 말만 할 줄 알았지, 이렇게 진짜로 권할 줄은 몰랐던 10인 대장이 놀라서 되물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끝내야 하구요. 몸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시다면… 감사합니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산을 올라가는 것이 힘들까봐 포션을 내려준 소영주의 이야기는 동화에서도 잘 안 나오는 장면이었다.
정확한 가격은 모르지만 그것이 비싼 것이라고 아는 병사들은 한 병을 마시고 한 병은 품에 숨기고는 바르는 척을 했다.
비싼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후버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사용하게 될 것이란 것을 알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휴식 끝! 올라갑니다.”
“옙! 휴식 끝! 기상.”
나머지 절반을 등정할 차례, 원래 후버의 계획은 근육의 피로를 생각해서 남은 절반을 한번 쉬고 갈 생각이었지만 포션을 사용하지도 않고 쌩쌩한 병사들의 훌륭한 자세를 높이 사서 속도를 높여 한 번에 주파하기로 했다.
“빨리빨리 옵니다. 영지의 병사는 약하지 않습니다.”
“넵, 마법사님! 서둘러라.”
어느새 말투까지 변한 후버의 독려에 병사들이 열심히 산의 정상까지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떤가요. 정상에서 맛보는 공기는 맛이 참 좋죠?”
“네… 정말… 좋습니다… 마법사님.”
10인 대장, 지금 당장은 이들을 대표해서 대답해야 하는 자신의 위치가 불만스러웠다.
숨이 차지만 자신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마법사의 옆에 서서 병사들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들은 지쳤는데 노마법사는 자신들 보다 쌩쌩한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원래 마법사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니깐.
“자, 모두 포션을 마십니다.”
“옙.”
그러고는 손을 벌리는 병사들.
“아까 품에 숨겨 두었던 것을 마십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예…….”
풀이 죽은 병사들에게 각자 한 병씩의 포션을 나누어 주고 몸에 바르라고 지시하면서 모든 일이 끝나면 특별 상여금으로 50실버씩을 주겠다고 했다.
1주일 치가 넘는 봉급을 받는 그들로서는 망설이던 것을 중지하고 아낌없이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힘을 좀 써야 하니 다시 마법을 걸어 드리겠습니다.”
“예, 그런데 저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상자를 이곳에 배치하고 내일 해가 질 무렵에 내용물을 뺀 상자를 회수한 후에 신호에 맞춰서 절벽 반대편에서 화살을 쏘면 됩니다.”
“정말 그것이면 끝나는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영지에 복귀할 때는 여러분만 돌아가시면 됩니다. 물론 이 사항은 모두 비밀입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버는 그들의 대답을 듣고 일루전 마법을 절벽 일대에 펼친 후 아공간에 넣어왔던 상자를 꺼내기 시작했다.
마그네슘 12박스, 수산화나트륨 24박스, 마지막으로 혹시 몰라서 첨가하는 1박스 분량의 질산나트륨, 웬만한 이벤트로는 자신에 대한 의심을 지우기 힘들다고 판단했기에 전체적인 양을 늘리기는 했지만 오버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먼저 이곳의 풀을 모두 베어내야 합니다. 낫을 쥐고 6명이 풀을 베면 나머지 5명은 삽을 들고 땅의 경사를 계곡 쪽으로 향하게 조정하세요.”
“예. 마법사님.”
“그리고 제가 표시한 부분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예. 마법사님.”
한쪽에는 포션이 30개 담긴 박스를 풀어 두었다. 언제든지 자유롭게 마시라는 뜻이다.
일루전 마법을 건 것은 어두운 밤의 산 정상은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에 시야를 차단할 필요 때문이었다.
“포션은 힘들면 자유롭게 드시거나 바르면 됩니다.”
한참의 작업이 끝나자 그럭저럭 준비한 만족할 정도의 수준으로 잡초가 베어지고 경사가 생겼다. 이제부터 가장 위험한 부분이기에 병사들의 긴장을 조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이쪽으로 모두 와주세요. 저기 저 박스에 든 것은 폭발력이 매우 강한 물질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평시에는 상관없으니까요. 단, 여기 있는 이 가죽 주머니 안에 있는 것과 닿으면 폭발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준비해둔 마그네슘 조각과 수산화나트륨을 땅에 두고 가죽 주머니에 든 물을 살짝 부었다. 약간의 소음과 함께 불꽃이 일어나자 영지의 병사들은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간단한 원리는 물이 수산화나트륨과 반응하여 열을 만들고, 그 열이 마그네슘과 물속의 수소와의 반응을 도와 폭발을 만드는 것이 원리였다.
“지금은 작지만 저 상자 안에 든 것이 모두 폭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구도 살아 나갈 수 없습니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마법사님.”
“좋아요. 먼저 이 주머니를 확실하게 땅에 고정해 두세요. 주변에 돌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절대 내용물이 새거나 흘러서는 안 됩니다.”
후버의 지시가 있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완료했습니다.”
후버는 약한 정도의 윈드 마법으로 그 상태를 실험에 보고는 만족해했다. 바람이 불어도 주머니가 움직일 일이 없었다.
“이중에 노만이 누구인가요?”
후버는 노만을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해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예. 접니다, 마법사님.”
“활솜씨가 매우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미안하지만 노만은 날이 밝기 전에 저쪽 등선에서 이쪽으로 가이드 에로우를 발사해줘야 합니다. 할 수 있죠?”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아직 날이 어두울 때 저곳에 가서 매복하고 수정구를 통해서 제가 하는 말의 지시를 따라 주세요. 그럼 제가 화살을 쏠 곳에 빛을 내서 알려 줄 테니까요.”
그 말과 함께 통신용 수정구 하나와 포션 대여섯 병을 쥐어 주자 노만이 빠른 속도로 등선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휴식입니다.”
그 말에 나무에 기대는 병사들과 함께 후버도 나무에 자신의 몸을 기댔다.
어느 샌가 한 시간여의 시간이 흐른 후 10분 간격으로 수정구에 통신 신호를 작동시켰다.
노만이 통신구를 작동시킬 수가 없으니 등산을 할 때는 품에 숨겨두고 도착해서 매복하면 3번째 신호가 끝나기 전에 위로 들으라고 미리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늦군.”
“노만이 활은 잘 쏘는데 다른 사람보다 체력이 좀 딸립니다. 마법사님.”
“사람은 다 일장일단이 있는 거니까요.”
이번이 4번째 신호, 노만이 떠나간 지 1시간 40분이 지난 시점인 지났다는 것을 알리는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통신용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반대편에서 미약한 빛이 신호를 보냈다. 노만이 위치에 도착했다는 뜻.
“노만 님, 제 말이 들리고 이쪽에 빛이 보이면 수정구를 하늘 위로 던지세요.”
그 말과 함께 반대편의 수정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마나가 없는 노만으로서는 수신은 할 수 있지만 송신은 할 수 없는 상태, 후버는 땅에 떨어진 돌을 하나 주워서 라이트 마법을 걸고 통신용 수정구를 향해 말했다.
“30초 후 빛이 있는 방향으로 사격 후 2분 대기.”
손에 쥔 수정구의 연결을 끊고 돌을 던진 후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물주머니에 약간 못가서 가이드 에로우가 바닥에 떨어졌다.
“30초 후 발사! 사정거리 미달.”
이번엔 약간 넘어가는 화살.
“30초 후 발사!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중간 정도로.”
세 번째 화살이 후버가 말한 지점에 정확히 떨어졌다.
다행히 물주머니 옆에 떨어져 물주머니가 터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효력사, 힘들겠지만 돌아오세요. 날이 추워서 얼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들었으면 수정구를 하늘 위로 한 번 던지세요.”
후버의 말이 끝나자 위아래로 움직이는 불빛.
“수고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거리 감각이 없이 단 3발만에 가이드 에로우를 정확하게 날린 노만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전생에선 직선에 가깝게 날아가는 총도 야간에는 조준 사격이 아닌 지향 사격을 하는 것을 감안해볼 때 상하 포물선 운동과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화살을 이 정도로 정확하게 발사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영지에 돌아가면 궁병을 상대로 대회라도 열어야겠어.’
뭔가 또 할 일이 생겼지만 이번에는 큐리오가 처리할 것이다.
“우리는 상자를 배치하고 오후 7시쯤에 회수한 후 옆의 봉우리로 이동합니다. 슬렌은 그때 포장을 푸는 것을 도와주도록.”
영지 병사의 시선이 슬렌에게 모아졌다.
영지의 영애인 세실리아부터 큐리오, 후버, 백작, 백작 부인, 크롤라이드, 아카이브, 마지막으로 눈앞의 마법사까지 슬렌의 교우관계는 너무나 넓었다.
“야~~~옹.”
그런 시선을 느낀 듯 슬렌이 딴 짓을 하자 영지의 병사들은 그런 슬렌에게 신경을 껐다.
이미 적당히 표면이 산화된 마그네슘과 수산화나트륨이지만 새벽의 이슬이 오폭을 유도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병사들이 적당히 배치를 한 박스 위에 위장막을 설치하고는 숲속에 들어가서 육포를 뜯는 것으로 식사를 해결하였다.
“이제 모두 잠시 수면으로 체력을 회복하도록 합니다.”
“넵, 마법사님.”
추운 날씨에 웜업 마법으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고는 모두에게 미리 잠을 잘 것을 지시했다.
한숨을 자고나니 시간은 오후 6시 반,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라 이미 해는 넘어간 상태, 병사들과 함께 위장막을 제거하고 박스를 분해한 후 아공간 주머니에 잘 담아 두었다.
“이제 옆 봉우리로 이동합니까?”
“수고했습니다. 나는 이 길로 갈 곳이 있으니 이 수정구들을 가져다가 배치해 두고 제가 발사 방향을 기준으로 정반대 방향에서 밝은 빛으로 신호를 보내면 그때 주문을 외워서 수정구를 활성화시킨 후에 화살을 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기 전에 잠시만요.”
후버는 병사들에게 일일이 2골드를 전해주고 악수를 청하며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앞으로 노마법사의 모습을 한 자신을 볼 일은 없겠지만 이런 작은 것이 쌓여 레빌리온 백작가에 충성하는 병사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해산, 영지에서 저를 보아도 아는 척은 하지 마세요.”
당연히 다시는 볼 일이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자정 즈음 후버는 약속한 불빛으로 병사들에게 신호를 했고 슬로우-라이트-헤이스트 마법이 중첩된 고리를 통과한 화살은 아무런 위력은 없지만 강력한 시각 효과를 제공해 주었다.
찢긴 물주머니에서 나온 물로 인한 화학 반응은 거대한 화염을 토하고는 사라졌다.
잠시 넋을 잃은 영지의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혹시 모를 영지 간 이동에서의 검문을 대비하여 가지고온 장궁을 파괴해 땅속에 묻고는 빠르게 산을 내려가 레빌리온 백작가로 복귀하였다.
*
*
*
“이봐 자작.”
“예.”
접객실에 와서 자연스럽게 후버가 상석에 앉자 자작은 눈치 빠르게 그의 오른쪽에 앉아서 후버를 바라봤다.
“병사는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영지의 마법사란 놈이 저렇게 무능해서야 되겠어? 가신이 주인이 하는 말에 토를 다나? 혹시 영지에 마법사가 저놈 한 명뿐이라서 그런 건가?”
“죄송합니다. 영지에 마법사가 두 명이 있지만 둘 다 3서클이다 보니 제가 그들에게 휘둘리는 처지라서… 그런데 제가 뭐라고 호칭을 해야 할지?”
“쯧쯧쯧, 여전히 마법사를 구하기 힘든 건 같은가 보군, 호칭에 대해서는 글쎄… 그냥 아이언이라고 해라. 뒤에 쓸데없는 호칭은 붙이지 말고.”
대충 난로 옆에 세워둔 부지깽이를 보고 후버가 대답했다.
“아! 예. 아이언 님에 대해서 말씀을 아끼다 보니 죄송합니다.”
“그래? 비밀을 지키려고 그랬다고?”
“예, 그렇습니다.”
훈훈한 자작나무 난로의 열기가 접객실을 감싸 안았다고 해도 자작이 흘리는 땀의 양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뭐, 그렇다면야 오늘은 날도 저물었으니 좀 쉬고 싶군.”
“예. 그럼 바로 잠자리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말이 끝나자마자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슬렌과 장난을 치며 노는 아이언, 그리고 뭔가 말할 듯이 입술만 달싹거리는 틈에 총지배인이 잠자리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렸다.
“내일 보지. 참고로 슬렌이 입이 까다로워서 말이야. 잘 부탁하네.”
“야~~~~옹.”
“알겠습니다. 아이언 님.”
후버의 슬레인 자작가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기선 제압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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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자작 날씨가 참 좋소만.”
“예, 아이언 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이언이 자작에게 관심이 있다면 자작은 전혀 안녕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밥 먹으러 갑시다.”
“예? 지금 시간이 아침 6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난 이때 먹어.”
빈곤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예 접객실을 향해 성큼성큼 먼저 가는 아이언의 발걸음에 자작은 뒤를 따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식사가 괜찮군.”
“죄송합니다. 여독을 푸실 줄 알고 늦게 준비하라고 일렀더니… 시간을 일러 주신다면 점심때는 제대로 준비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뭐 그건 됐고, 자작이 준 선물은 잘 받았는데 얼굴 한번 안 본 나한테 그런 선물을 주는 건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피차 바쁜 몸이니 머리꼬리 떼고 말했으면 좋겠어. 없으면 난 이만 던전으로 돌아가고.”
“사실은 아이언 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흠… 뇌물이란거군, 아니지. 이제 공직에 있는 몸은 아니니깐 그냥 선물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저 마음을 나누는 선물일 뿐입니다. 슬렌이 워낙 귀엽기도 해서.”
아부성 발언과 함께 슬그머니 슬렌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는 슬레인 자작. 하지만 그런 슬레인 자작에게 슬렌은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착!
순식간에 날아오는 슬렌의 발길질에 꽤나 깊이 파인 자작의 손등에서 붉은 피가 떨어져 식탁 위를 적셨다.
“이런… 슬렌. 그러면 못 써.”
짐짓 슬렌을 혼내듯이 슬렌의 콧잔등을 살짝 때리는 아이언.
“상처가 깊은 것 같은데 부탁이란 게 힐 마법인가? 그거라면 내가 빨리 해주고 돌아가지.”
‘이 새끼가 던전에 꿀을 발라 뒀나, 지한테 준 게 얼만데 힐 마법 한 번하고 먼저 돌아간다니?’
순간적이지만 그 많은 재물을 받아 처먹고 자기 애완동물이 만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면 충분하냐고 묻는 아이언의 물음에 자작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아이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자네 지금 나한테 욕한 건가?”
“아닙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아침을 일찍 먹어서 속이 더부룩했는데 슬렌 덕분에 뻥 뚫려서 감탄한 것뿐입니다. 역시 아이언 님의 고양이는 뭔가 달라도 다르군요.”
“뭐 다를 것까지야…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나름의 위기 관리 능력을 뽐내며 자작이 아부성 발언을 연발했다.
언젠간 중앙 정치에 나가면 쓰려고 연습한 격무에 시달리다 고위 귀족이 시찰 왔을 때 사용할 레퍼토리 중 하나였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적절한 응용이었다.
“부탁이 있냐고 하문하였습니다.”
“그래서 있고?”
“예. 사실… 혹시 레빌리온 백작가를 아십니까?”
“들어는 봤는데 그들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저와 안 좋은 일이라고 해봐야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상위 귀족과 하위 귀족이 충돌한다면 그건 하위 귀족인 저의 불충이지요. 하지만, 그곳의 백성들이 걱정되어 그렇습니다.”
“내가 던전에만 있어서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는 좀 어두운 면이 있지. 설명해 주게나.”
“하아… 같은 귀족의 제 살 깎아 먹기 식의 이야기이지만 요즘 레빌리온 백작가의 폭정이 말도 못하게 심합니다. 작년부터는 저수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영지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저수지로 만든다던 땅은 장마가 조금만 길어져도 근처의 마을은 전부다 잠길 정도로 위험하게 공사를 해두었습니다. 특히 백작가와 가까운 저수지는 백작가솔들의 물놀이를 위해 일반 백성은 밭이 말라도 물 한 방울 얻어 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흐음… 그건 확실히 문제가 있어.”
아이언이 쉽게 수긍하자 신이 난 자작은 자신이 생각한 나머지 사항도 침중한 표정으로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저수지 공사로 집을 잃은 영지민들을 부랑자로 체포하여 영지병을 양성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가을의 싹이 열리기만 바라는 영지민들의 생활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큐리오벨트라는 백작의 소영주의 이름을 딴 철근 덩어리를 강매하였습니다.”
‘이거 그럴 듯한데!’
후버의 반응을 살핀 자작이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일반 백성이 소영주의 이름이 붙은 도구를 맘껏 쓸 수 있겠습니까? 혹시 흙이라도 묻으면 죄를 물을까봐 추수를 하는 와중에도 백성들은 추수는 못하고 그 철근 덩어리를 닦느라 하루 종일을 보낸다고 합니다.”
“어허! 어쩌다가 백작가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따위 짓을.”
“또한 영지의 수준에 맞지 않는 마법사를 가신으로 들이고자 그를 초대하였는데 아시다시피 마법사분들이 실험에 사용하는 금화만 해도 상당하지 않습니까? 그 금화를 충당하기 위해서 상품을 팔러온 컨텍트라는 상단주를 협박해 가지고 온 모든 물건들을 백작성에 두고 맨몸으로 백작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컨텍트의 상단주인 세이건에게 직접 들은 일이기에 나름 자작으로서는 사실에 기초한 부분이고 아이언이 사실 확인을 바란다면 해줄 수가 있었다.
“허허! 이거 백작가의 패악질이 끝을 모르는구먼. 처음엔 영지민, 그다음엔 죄 없는 상단까지, 그런 자가 백작이라니. 내가 은거한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니, 이런 짓을 하는데 영지의 가신들은 도대체 뭐 하는 것인가?”
화가 난 듯 적극적으로 물어오는 아이언의 반응에 자작은 이제 끝내기를 해야 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영지민들을 쥐어짜는 백작을 보다 못한 영지의 기사단장이 백작을 말리려 하였지만 오히려 그를 좌천시키고 위아래도 못 알아본다며 태형을 가해 현재 와병 중이고, 결국 백작의 과시욕으로 인해 백작가의 가산은 모두 말라 버렸습니다.”
‘슬슬 네가 도를 넘는구나.’
아이언의 찡그린 표정을 레빌리온 백작가에 대한 불쾌함으로 해석한 슬레인의 목소리에 이제 자신감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백작가의 가산이 전부 탕진되자 광증을 보이기 시작한 백작에게 부당한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총관은 야반도주를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특별히 레빌리온 백작가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도망친 영지민들이 말하는 모든 소문을 생각하면 그저 위로는 나라의 국왕이신 국왕에게, 아래로는 왕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죄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어?”
카악!
‘이런?’
문맥상 ‘그런’이라는 단어가 와야 하는 부분에 다른 단어가 들어와 잠깐 갸우뚱한 자작은 어쨌든 자신의 의도가 먹혀 아이언이 분노하는 것을 보고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낼 준비를 했다.
“그럼 자작 자네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이웃 영지의 영주이면서 무엇을 했는가?”
마침 찾아온 기회에 울상을 지은 자작이 아이언에게 말했다.
“아무리 패악질이 심하다고 하지만 그는 백작이고 저는 자작입니다. 직위로 찍어 누르면 제가 어떻게 그걸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제 저를 대표하는 대리인을 백작가에 보냈는데 그가 그만…….”
오열하려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자작.
“무슨 일인가? 진정하고 말해 보게?”
“백작의 칼에 맞아 시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허허…….”
아이언은 이제 기가 차서 화도 나지 않았다.
재정 상태가 어렵다거나 필러가 드러누운 것은 자신이 계획한 것이지만 그 외의 것은 자신도 생각 못한 자작의 헛소리인 것이다.
아마 일반적인 조사관이 파견을 나왔다면 영지의 저수지 공사가 있었다는 것이나 큐리오벨트가 풀린 것만 가지고 나머지 부분까지 믿어버릴 수 있는 나름대로 잘 짜인 헛소리이었던 것이다.
“마침 그런 일로 고민하던 차에 아이언 님의 편지를 보았고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부탁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고개를 내리고 눈을 한껏 내리 깔은 표정에 어린 약간의 수치심과 겸손함, 그리고 신념을 표현하듯이 약간은 당당한 태도. 아이언이 너무 그의 말을 잘 받아들인 것일까?
아이언의 적절한 추임새에 자작은 자신의 연기에 도취되어 마치 정말로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은 듯한 절정의 내면연기와 외면연기를 보여줬다.
가증스런 자작의 모습이었지만 일단 하루라도 빨리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장단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 솔직히 나는 자작이 슬렌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딸려 보냈기에 그저 나를 이용해서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고자 하는 줄 알았는데 생긴 것과 다르게 자작의 마음 씀씀이가 좋구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이언 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못 들은 것으로 하시고 푹 쉬시다 돌아가셔도 저는 아이언 님을 잡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야. 오히려 이런 상황을 바로잡을 기회를 준 슬레인 자작 당신에게 너무나 고맙군. 내일 당장 영지병을 소집하여 훈련시키고 물자가 준비되는 대로 레빌리온 백작가로 진격하게. 가장 앞에 내가 서서 군을 지휘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아이언 님.”
자작은 너무나 잘 말려 들어오는 아이언의 모습에 속으로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미리 준비한 카드뮴의 시체나 대량의 마법 재료 구매를 통해 구워 삶아 증언을 해줄 컨텍트 상단을 이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오히려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 유리했다.
“뭐하나? 자작은 한시라도 바삐 병력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아이언 님.”
내심 어떻게 자작에게 휘둘릴까 고민을 하던 아이언으로서는 당장에 자작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어서 잘되었고, 자작으로서는 레빌리온 백작가를 쓸어버릴 수가 있어서 좋았다.
동상이몽의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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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해지기 시작하는 자작령, 로비스에게 영지전의 준비를 맡기고 슬레인 자작은 과다 출혈로 그대로 쓰러져서는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영지의 마법사가 치료를 해주려고 했지만 또다시 아이언과 부딪히기 싫은 자작은 혹시라도 마법사가 사용한 힐 마법을 감지할까봐, 대충 포션을 바르고 상처를 감싸는 것으로 응급처치만을 해두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예, 영지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이언 님.”
당황할 법하지만 이미 개차반인 슬레인의 성격에 많이 휘둘린 탓인지 다짜고짜 문을 박차며 들어오는 아이언의 행동에도 로비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영지전을 준비한다고? 그럼 저쪽 한편에 쌓여 있는 물자가 모두 영지전을 치루기 위해 이번에 수송할 물건이냔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뭐 저렇게 많이 쌓아두고 있어?”
“그게… 이번 영지전에 용병을 고용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보급품에도 신경을 쓰느라 그렇습니다.”
“용병이라? 몇 명이나 사용하려는 거지?”
“한 400명 정도…….”
그 말에 대번에 아이언의 표정이 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듣기론 레빌리온 백작가의 병력이 고작 500명이라고 들었다. 내 말이 틀렸느냐?”
찔끔한 표정으로 연신 굽실거리며 아이언의 눈치를 보며 대답하는 로비스, 이건 감정의 변화가 자작보다도 빨랐다.
최소한 자작은 서서히 열 받는 게 보여서 조심할 기별이라도 주지만 아이언은 그저 한마디만으로 이렇게 노발대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쓰러진 슬레인 자작을 대신해서 할 것은 해야 했다.
이런 면에서 로비스 확실히 유능한 가신이었지만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
“예, 그렇사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흥! 백작가의 500명을 치기위해 자작가의 800명과 용병을 400명이나 불러? 이것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당장 자작을 불러라! 나는 이 영지전에 참전하지 않겠다. 어린애 팔을 비틀려고 기사를 동원할 셈이냐.”
샤우팅 마법까지 동원한 분노에 찬 아이언의 목소리에 자작성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고 간신히 몸을 추스른 자작은 일어나자마자 화난 아이언의 음성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무거운 몸을 끌듯이 움직였다.
그리고 아이언의 샤우팅 소리에 반응한 다른 한 명.
‘신호다. 자작은 어디에 있지?’
한스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작을 찾기 위해 자작성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이틀 전 절벽에 불을 지른 마법사가 밤늦게 자신의 숙소를 찾아와서 미리 이야기한 신호가 울린 것이다.
“아이언 님. 고정하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안 되겠어. 마도사도 좋지만 이번 일만 끝나면 더 이상 보지 말아야지. 매일이 살얼음판이니. 지가 정체를 숨긴다고 가명까지 쓰면서 매일 저렇게 한 번씩은 지랄하는 놈을 내 영지에 둘 필요는 없지.’
속마음과는 다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슬레인 자작.
“네가 용병을 400명이나 고용하라고 했느냐?”
“예. 제가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린아이 팔을 비틀기 위해 기사를 대동하는 꼴이군. 됐다, 나는 이 일에 빠질 것이니 자작, 너는 네가 하고픈 대로 해라.”
건네준 아공간 주머니까지 바닥에 던지며 화를 내는 아이언의 모습에 그와 함께하고 말고는 자신의 의사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언의 존재는 단순히 무력이 아니라 왕가와의 친분으로 백작 위를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게 도와줄 능력이 있는 일종의 연줄이었다.
아직도 아이언이 아슐란 전대 국왕과의 친분 관계가 있었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는 그는 미리 주변에 나누어줄 뇌물을 푼다는 생각으로 무리해서 마법 재료를 긁어모아 바친 후였다.
“저는 그저 아이언 님을 편하게 해드리려는 마음에.”
“감히 백작가의 500명 따위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 다는 것이냐?”
그리고 어느새 자작의 곁에 다가온 한스와 눈을 마주치는 아이언.
‘지금이다.’
영창도 없이 날아간 매직에로우에 무슨 일이 벌어진 지도 모르는 사이 한스가 몸을 날려서 자작에게 날아오는 매직에로우를 온몸으로 방어했다.
이미 알고 충분한 양의 가죽을 갑옷의 가슴 부위에 덧대었지만 움푹 들어가는 플레이트 아머가 압력까지 상쇄해 주지는 못했다.
“크헉!”
한스의 입에서 나온 핏줄기가 자작의 머리부터 시작하여 가슴을 적셨다.
끈적이는 피가 땅에 떨어지듯이 주저앉아 버리는 자작. 그런 자작을 남겨두고 뒤로 튕겨 나가는 한스.
“뭐야! 저 새끼는?”
다시 한 번 매직에로우가 날아가서 이번엔 한스의 발등 부위에 꽂혔다.
힘을 줄인 대신 정확도를 신경 써서 정확하게 한스의 발등을 때리는 매직에로우. 이미 날아올 것을 아는 한스는 벌써부터 느껴지는 고통에 피하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한발의 매직에로우를 받아냈다.
‘이 한 번의 고통을 넘기면 자작을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원수도 갚을 수 있다.’
멀어지는 의식의 끈을 잡을 틈도 없이 한스는 기절해 버렸다.
“자작.”
“으어어어!”
화들짝 놀란 자작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긴장된 몸과 반드시 대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기묘한 조화.
“뜻이 좋아 돕고 있는 거다. 당장 용병들의 계약을 취소해라. 더 이상의 이런 무례와 의심은 용인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놀람의 포인트가 달랐다.
어떻게 아직 기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한스가 영창도 없이 날아온 대마도사의 매직에로우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이언에게 걸어가며 대답하던 자신과 아이언의 거리는 10m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작은 그것보다는 찌그러진 풀 플레이트 아머와 영창이 없었다는 것 단 두 가지만 신경 쓰고 있었다.
“저자의 이름은 뭔가?”
“아… 저, 그게.”
“한스입니다.”
로비스의 대답.
“괜히 내 화풀이 상대가 되었군. 내 침실로 안내하게. 직접 치료해줄 것이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받은 자작과는 다르게 로비스는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했다.
“내일 당장 출발한다.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로비스를 향해 질문하는 아이언.
“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일까지 모두 끝내 두겠습니다.”
“믿겠다.”
그 말과 함께 아이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차례의 폭풍이 분 듯한 소란한 바람이 자작성에 휘몰아쳤지만, 로비스는 당장 해야 할일이 많았고 두 명의 기사는 자작을 부축해서 자작의 집무실로 안내했고 다른 둘은 한스를 들고 아이언의 방으로 옮겼다.
“수고했다.”
정신을 차리는 한스를 바라보며 아이언이 입을 열었다.
“크윽… 이곳은 어디입니까?”
“자작이 사용하던 방이지.”
“하아… 그렇게 무지막지 할지는 몰랐습니다. 이제 무엇을 하면 되는 겁니까?”
“자작을 속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내일 출발할 영지전에 한스, 너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역할은 이제 끝난 겁니까?”
“너의 자유다. 자작도 사람인데 이제 너를 가까이 할 것이고 시간이 걸릴 뿐,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근 시일에 올 거다. 하지만 정말 그 정도면 만족하겠는가?”
“만족하다니요? 전 수년간 그 빌어먹을 자작에게 칼을 꽃아 주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언젠간 죽는다. 그저 결과를 빨리 앞당기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 빌어먹을 놈을 반드시 죽여버릴 것입니다.”
“흥분하지 마라. 밖에서 누군가 들을 수가 있다.”
아이언은 괜히 자신이 마법을 펼쳤다가 3서클인 영지의 마법사에게 자신의 실력을 들킬 수가 있기에 사일런스 마법 역시 펼치지 않았다.
앞으로 하루, 일단 출발하면 오히려 위험은 줄어들 것이다. 현 상태에서 자작보다 긴장하고 있는 것은 아이언이었다.
“그럼 저에게 또 어떤 선택을 하라는 겁니까?”
날이 선 한스의 목소리 목소리는 비록 작아졌지만 그 말에서 들리는 원한의 크기는 더 크게 느껴졌다.
생각할수록 그의 가족이 당했던 일이 구체적으로 떠오른 까닭이다.
“선택권은 어디 까지나 한스, 너에게 있다.”
“아이언 님. 무슨 선택인지는 말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말이 바뀌는 것을 경계하던 한스의 말투가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 때문인지 조금은 누그러졌다.
“누구든지 때가 되면 죽는다. 값진 인생을 사는 것이 보람찬 만큼 자작에게 싸구려 인생을 살게 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겠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직접 말씀해주십쇼. 저는 그런 어려운 말씀을 하시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작의 영지를 쓸어버리고 그의 일가족을 노예의 인을 찍어서 너에게 넘겨주겠다.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너의 자유다.”
한스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더니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약속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는데 잘못될 일은 없다.”
휙휙 아무렇게나 손짓하는 아이언의 손짓을 보고 한스가 아이언의 방을 떠났다.
쩔뚝거리는 다리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곧 얻게 될 과실을 생각하면 이 정도 고통은 충분히 참을 만했다.
아이언에게 받아 품속에 감춰둔 두 병의 최상급 포선과 한 개의 통신용 수정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그때 필요한 3병의 약품을 숨긴 곳을 적어둔 종이, 마지막으로 몇 장의 마법 스크롤을 받아들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드디어!’
이제 정말 한 가지 일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만족감을 만끽했다.
아이언의 말이 맞다. 자작 놈이 나에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무엇 때문에 죽는지 모르는 것은 사치였다.
오늘 자신이 대신 매직에로우를 맞고 기절하면서 보았던 그의 표정, 그런 어리둥절한 표정이 아니다.
과거라면 놈의 목숨과 심장을 찌르는 한 번의 칼질에 만족할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에게 이유를 알려주고 여유롭게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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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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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이 한바탕 소란을 일으켜 자작가를 뒤집어 놓은 지 이제 약 십여 일이 지나고 이제 자작가의 군대는 레빌리온 백작가의 백작성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경로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제 저 목책을 넘으면 레빌리온 백작령입니다.”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아이언에 공손히 현재의 위치를 알리는 슬레인 자작.
“선전 포고는 확실히 했겠지?”
“예. 출발하기 전에 보냈습니다. 우리는 병력을 끌고 오느라 시간이 지체됐지만, 저들은 이미 편지를 보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편지를 보내기는 했다.
짤막하게 안부를 전하는 내용의 편지를, 어차피 필요한 것은 백작이 자신에게 편지를 받은 기록이 상단의 서류로 확인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작의 품에 있는 진짜 편지는 자작이 백작성을 장악하는 순간 안부 편지의 내용물과 바꿔칠 것이다.
승리하기만 하면, 그리고 그 승리의 주역이 아이언이기만 하면 누구도 자신을 건들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아이언을 내가 세상으로 끌어온 것을 안다면.’
어쩌면 아이언을 다시 세상 속으로 끌어온 공으로 왕이 상을 줄지도 몰랐다.
실리카젤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아이언이라는 이름으로 보고는 올려야 한다.
“비록 백작이 악독하다고 하나 그의 모든 기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예우하는 차원에서 싸울 기회는 줘야겠지.”
마법 한 번으로 절벽을 불태우는 사람이 싸울 기회를 주는 것보다 도망가는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상대가 좋아할 것이라고 내심 투덜거리는 슬레인 자작이었지만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역시 자비로우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려 합니다.”
“뭐, 그렇게 하지.”
슬레인은 굳이 마탑 마법사의 입회하에 수정구를 통해 영지전을 선포하면 되는 것을 내용물까지 바꿔칠 요량으로 편지로 사용한 만큼 더 빠르게 진격하고 싶었지만, 아이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지전에 앞서 일정 거리에 병사를 배치해두고 상위 귀족이 자신이 도착한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낮은 승계의 귀족이 높은 승계의 귀족을 공격할 때 정당한 영지전으로 인정받기 위한 하나의 절차였기 때문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마당에 예의라니.’
“대륙의 관습에 따라 내일 하루를 이곳에서 쉬고 그 다음 날 공격하도록 하지.”
“예. 아이언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쉴 곳을 마련하겠습니다.”
병력의 이동을 무리 없이 움직이라는 지시와 예의에 맞춰 목책까지 진군했다 후퇴하는 것이나 모두 슬레인 자작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지만 아이언의 지시를 무시할 만큼 배짱이 있지는 않았다.
“저… 이것 다시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이언 님께서 저를 이렇게 도와주시는데 제가 아무것도 해 드릴 수가 없으니 마음이 너무 불편합니다.”
“그 이야기는 저번에 끝나지 않았는가? 필요 없으니 그만 나가보게.”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아이언이 어떤 변덕을 보일지 모르기에 슬레인 자작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준비한 이 마법 물품을 아이언에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부탁합니다. 제가 지금 당장 존경심을 표현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흠…….”
아이언도 저 마법 재료를 회수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에 너무 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안 받겠다고 던져버린 것을 다시 받기에는 상황이 조금 민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쪽에 두고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이언 님께서도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할 말만 하고 휙 나가버리는 자작의 마음 씀씀이가 처음으로 흡족하게 느껴지는 아이언이었다.
콘택트 상단과의 약속도 지킬 수 있고 자작과 백작 가의 충돌이 내일 저녁에 있을 것인 만큼 회수하는 시기도 딱 좋았다.
“임무 완수!”
“수고했어.”
아무래도 움직이기만 하면 주목을 받는 자신보다는 그 주목 정도가 적은 슬렌이 안전하기에 자작성을 떠나오고부터는 슬렌이 혼자 병사들의 진군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백작성과 통신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영지전을 위해 자작 성의 마법사 2명이 모두 참전했고 좁은 분대 내에서 그들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나름대로 슬레인 자작은 머리를 써서 영지전의 전조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부대 운용 사항은 모두 정리되어 백작성으로 보고되고 있었다.
“한스는 뭐라 그래?”
“그쪽도 준비가 끝났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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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이 자작 성을 떠나온 이후로 한스는 부상으로 말미암아 부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을 분해하듯이 매일 밤 자작령의 성벽 위의 성문에 가장 가까운 망루로 올라가 레빌리온 백작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성을 지키려고 남은 선임기사들이 한스를 위로 한다거나 뭔가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러한 행위가 1주일씩이나 계속되자 의문을 풀고는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영지의 병사들도 삼엄하던 분위기에서 긴장이 풀려 상급자인 그에게 의심의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 틈을 타 성문을 닫힌 상태로 고정하는 렛칫 장치와 연결된 땅속에 박아둔 두꺼운 목판 근처에 약품이 담긴 병을 대충 묻어 두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성을 축조할 때 철판을 엇된 나무문보다 석재로 건설한 성문을 작게 만들어 공상무기가 바깥에서 안으로 공격하는 것을 막지만, 안에서 바깥으로 문을 열 때는 렛칫 장치가 성문을 고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슬렌, 정신 차리자. 내일까지만 고생하면 이 답답한 생활도 끝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이미 경험이 있어서 괜찮으니까요.”
과장된 몸짓과 함께 자신 있게 말하는 슬렌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아이언도 잠을 자기 위해 급조된 침대 위에 누웠다.
자작을 속였다고 자신하지만 아무런 대비도 없이 적진 한복판에서 자는 잠은 충분히 피로를 풀어주지는 못하였기에 하루라도 빨리 이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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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빌리온 백작 가의 끝을 알리는 목책이 보이는 거리에서 총 400명 정도의 병사와 기사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와병을 핑계로 전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필러가 아닌 그의 제자 제이드와 세실리아 그리고 큐리오, 세실리아는 너무도 눈에 띄는 자신의 갑옷에서 나오는 색을 숨기려고 카뮤플라쥬 옵션을 이용해 주변 색에 동화되는 색으로 바꾸고는 목책 밖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찰병이 내일 저녁이라고 했지?”
슬렌은 그저 아이언이 포섭한 자작가의 정찰병이라고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예. 그들의 긴장감이 가장 높아지는 오후에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왜? 기습을 하지 않고?”
“기습을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그들에게 미리 일러주겠다고 했습니다.”
“흠… 후버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니깐… 그래도 그렇게 하자고.”
“네?”
놀란 제이드가 반문하였다.
“어차피 지금 와서 후버와 행동을 다르게 하면 후버가 위험해질 수가 있으니깐. 그리고 기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공격하는 게 더 좋잖아?”
“그래도 기병들의 렌스 차징이 없이 궁병만으로 모든 걸 해결하시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원래 궁병들이 가장 앞에서 공격하는 것도 전술의 일종이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기병을 측면에 배치해서 상대편의 혼란을 유도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직선적 입니다.”
“그냥 후버가 시키는 대로 해. 큐리오 너도 한마디 정도는 해야지.”
큐리오는 적극적으로 후버를 변호해주는 세실리아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느라 지금껏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후버와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던 상황이지만 세실리아는 아직 후버가 키운 궁병의 가치를 모른다.
그럼에도, 자칫 위험한 전술을 구사하는 후버에게 동의를 하는 세실리아.
“저도 후버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흠… 그럼 큐리오 님. 기병들을 뒤로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통신구를 꺼낸 제이드는 기병을 뒤로 물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답을 하는 켈럽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감돌았지만, 따로 신호를 주면 전속력으로 달려와서 구원해 달라는 말에 다소 밝아진 음색으로 하는 대답을 듣고는 통신을 종료하였다.
‘어느새 동생들이 자라서 이 누나를 속이려고 하다니.’
큐리오는 모르고 있었지만, 백작의 집무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화는 세실리아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고 이미 모종의 특별훈련을 받은 100명의 궁병에 대해 아는 것이 있었기에 반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현대의 영지전은 정보가 좌우한다는 말은 단순히 외부의 적을 잘 아는 것뿐만 아니라, 영지전의 승리와 패배는 영지의 능력을 정확하게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원칙을 세실리아는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어디 내일은 우리 후버가 나중에 자라서 어떻게 변하는지 구경 한번 해보자고. 호호호.”
“그러고 보니 지금은 아이언이라고 했던가?”
“이름 짓는 센스하고는 뭐 괴팍한 대마법사가 지을 법한 가명이긴 하네.”
세실리아와 큐리오 둘 다 첫 전장의 긴장감을 씻어내듯 소소한 농담거리를 말하며 분위기를 풀었고, 제이드는 그런 둘과의 검술 대련을 하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는 기병이 있는 방향으로 약간 후퇴하여 병사들을 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