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버? 실리카겔? 아이언? (12/37)

후버? 실리카겔? 아이언?

“나는 오늘 이곳에서…….”

뭔가 임팩트가 부족해 보이는 연설문을 다듬으며 큐리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운송을 시작하면 만들어진 물품을 영지 곳곳에 운송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사용비를 받는 것과 수량이 부족해서 모든 영지민이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반응을 봐서 좋으면 좀 더 많은 수량을 만들어 원하는 영지민들에게 공급하면 자신을 칭송하는 영지민들이 더 많아질 것을 생각하며 뿌듯해졌다.

“이번에는 영지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는군.”

큐리오는 자신이 할 연설에 부족한 임팩트를 살리기 위해 노력을 하는 동안 후버의 방에서는 슬렌과 후버의 진지한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큐리오벨트는 영지 곳곳에 보급되었고 수정구를 자신이 만들 필요가 없자, 다소 한가해진 후버이지만 가을이 가까워옴에 따라 슬레인 자작을 끝장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슬렌, 좋은 생각은 없는 거니? 시간이 지연될 때마다 총관과 필러 경에게 너무 미안하구나.”

괜히 시간을 끄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희생한 총관에 대한 실례였고, 크롤라이드와 아카이브 그리고 자신이 참여하여 실리카겔을 만드는데 가장 어려운 부분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근데 그냥 마도사라도 해도 슬레인 자작이 의심하지 않을까요?”

“의심을 하겠지. 의심을 하는 것을 잘 속이는 게 중요하거든.”

“쉽지 않은 일이에요. 자작이 바보도 아니고 뭔가 시험을 해볼 것 같아요. 그리고 자작가에도 3서클 마법사가 2명 있었어요.”

“3서클 마법사라… 나보다 서클은 낮지만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저번엔 자작이 제가 라이트 마법을 쓴 줄 알고 기겁했으니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그렇지. 마도사라는 사람이 1서클 라이트만 쓸 수도 없는 것이고 뭔가 한 방이 필요해.”

“근데 요즘 주인은 사람 속이고 죽이는 것만 고민하는 것 같아요. 마릴린이 떠나서 그런가…….”

“마릴린 핑계는 무슨, 그냥 때가 그렇게 된 거지.”

“그냥 주인이 큐리오 님처럼 좋은 것 하고 큐리오 님이 주인처럼 굳은 일 하면 안 되나요?”

오랜만에 충정이 느껴지는 슬렌의 말.

“짜식, 사람은 다 각각의 역할이 있는 거야. 너도 같이 가야 하니깐 준비해 두고.”

“그런데 영지전을 앞당기는 것보다 그냥 병력을 키워서 공격을 못하게 하는 게 더 좋지 않아요?”

“아니야… 백작가의 힘을 보여줄 필요도 있어. 앞으로 괜히 꼬이는 녀석들이 많을 거야. 그들을 견제하는 것이 중요해.”

“전 모르겠어요. 그냥 주인이 잘 짜주면 되죠. 어차피 이번엔 나 말 못하는 고양이잖아요.”

“뭐 그러던지, 그럼 이만 나가봐. 혼자 생각 좀 해봐야겠어.”

그 말에 슬렌이 창가로 훌쩍 뛰어 나갔다.

마릴린이 컨텍트 상단으로 일을 배우기 위해 영지를 떠난 이후 마릴린의 방은 슬렌이 사용하고 있었다.

고양이 주제에 자기 방이 있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슬렌은 실세인 큐리오, 세실리아, 백작 그리고 후버의 사랑을 받는 애완동물이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슬렌이 떠난 방에서 후버의 고심이 깊어졌다.

*

*

*

“그럼 스승님, 부탁드립니다.”

“후버야, 준비는 됐느냐?”

아카이브의 요청에 크롤라이드가 후버에게 준비가 됐느냐고 물었다.

슬레인 자작을 속이기 위한 첫 번째 준비이자 7서클 마도사인 크롤라이드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자작의 영지로 떠나기 전에 익숙해질 겸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헐렁한 로브를 걸치고 그 위에 망토까지 두른 후버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 복장과 스태프로 마법사의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몸의 사이즈가 변화가 있는데 평상복을 입으면 찢어지거나 변화 과정에서 벨트가 조여 고통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폴리모프.”

크롤라이드의 영창과 함께 후버의 모습이 변화했다.

25~27살 정도 나이로 보이는 준수한 청년, 폴리모프 마법에는 원판 불변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기에 후버와는 완전히 인상이 다른 한 명의 청년의 모습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마법의 유지 기간은 약 두 달, 그 기간이 지나면 디스펠이 되고 만다.

“한번 걸어보거라.”

“처음 하고는 다르게 이제 걷는 것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처음 후버가 폴리모프 마법으로 모습이 변하였을 때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은 시야의 높이와 보폭이었다.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몸과 청년 정도로 변한 후버의 몸은 큰 차이가 있었고 단순히 걷는 것이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한 점이 있었다.

‘이 부분은 여전히 어색하군.’

특히 후버는 물건을 잡을 때 팔의 길이가 적응되지 않아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꾸준한 연습을 통해 이제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위장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이 부분이 힘든 부분이지. 아주 골치를 썩었어.”

“그래도 덕분에 마법진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높아진 것 같습니다. 스승님.”

크롤라이드의 말대로 아카이브의 마법진 이해 능력은 비약적으로 상승되어 있었다.

수없이 많은 마나 집약진을 분석하고 만드는 작업을 통해 많은 마법진을 접하였기 때문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폴리모프.”

이번에는 후버가 노인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일단 여기까지는 성공이다. 우리가 연구한 것은 여기까지, 후버 마법진의 연결이 느껴지느냐?”

“잠시 집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감고 후버가 자신의 주변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을 관찰하였다.

먼저 마나를 모으는 집약진, 그리고 자신을 청년으로 만들어준 1차 폴리모프 마법과 노인으로 만들어준 2차 폴리모프 마법, 그리고 2차 폴리모프 마법과 마법진을 이어주는 얇은 실과 같은 마나커넥션 마법.

“집약진에서 폴리모프 마법으로 흐르는 흐름이 느껴집니다.”

“됐다. 이제 마법진에서 폴리모프 마법으로 가는 마나커넥션의 흐름을 끊어 보거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후버를 바라보며 얼른 둘은 실드 마법을 5겹씩 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스승님 이거 섭섭합니다. 제가 부탁한 것은 맞지만 이론적으로 완벽하다고 하시더니 실드를 몸에 두르시다니요.”

“흠흠. 너야 앞으로 살날이 많아서 잘 모르겠지만 원래 늙을수록 죽음에 초연해지지만 건강에는 그렇지 못한 거야.”

슬쩍 시선을 회피하는 크롤라이드를 대신해서 아카이브 역시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안전을 위해서는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겠지만 자신들이 지금 보는 것은 대륙 최초로 7서클 마도사가 걸어둔 마법을 4서클의 마법사가 해제하는 것을 보는 것이기에 탐구심이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이 방법이 실용화된다면 더 이상 국가 간 전쟁에서 왕성 전체를 덮는 보호마법진의 운용을 위해 7서클 마도사가 교대해가며 상주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냥 마나커넥션 마법을 잘 아는 1서클 마법사 한 명이면 충분해지는 것이다.

“스승님, 변명도 궁핍하십니다. 여기서 마나 폭발 나면 실드 안 두르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히려 실드를 두르면 건강하지 못한 나머지 삶을 살 여지가 더 높을 텐데요!”

“흠흠. 너무 깊이 따지지는 마라. 요즘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의가 아주 말라버린 거 같아. 내가 스승님을 모실 때는…….”

슬쩍 말하다 말고 크롤라이드의 눈치를 살피는 아카이브.

“내가 스승님을 모실 때는 벽에 똥칠을 하셔도 웃으면서 같이 똥칠에 동참했다. 요것아.”

양심에 찔렸는지 아카이브가 크롤라이드를 바라보자 크롤라이드가 아카이브가 하고픈 말을 대신해줬다.

순식간에 왕실의 수석 마법사이자 크롤라이드의 스승이 말년에 벽에 똥칠한 치매 마법사가 되었지만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돌아가신 분을 그렇게까지. 아무튼 디스펠을 사용하겠습니다. 폴리모프 디스펠.”

후버의 영창과 함께 후버가 노인의 모습에서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발끝에서 시작된 변화가 점차 상체로 올라오더니 너무도 부드럽게 얼굴을 지나 백발의 머리도 검게 물들어 완벽한 청년으로 변화하였다.

분명한 성공에 아카이브와 크롤라이드가 실드 마법을 풀고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스승님, 성공입니다.”

“역시 이론은 배반하지 않아!”

“서서히 사라지는 게 운치 있지 않습니까? 노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건 젊은 미청년, 모르긴 몰라도 연회에서 사용하면 다들 껌뻑 죽을 겁니다.”

“푸하하하! 당연하지.”

“근데 솔직히 한 번에 성공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허! 후버가 들어, 조용히.”

“흠흠. 이미 다 들었습니다. 저야 당사자이니 못 느꼈지만 두 분이 보시기에 이론처럼 움직인 것이 맞습니까?”

후버의 말에 크롤라이드가 흥분한 기색을 지우고 대답했다.

“정확히 우리가 예상한 대로였다네. 후버가 말했듯이 일반 폴리모프 마법보다 많은 마나를 소모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지. 여기에 대해서는 변신 후 신체 부분에 대해서 디테일을 살리는 것으로 해결했지. 마나의 소모는 10% 증가했지만 그만큼 디테일은 살아났지.”

아카이브가 녹화된 수정구를 재생하자 크롤라이드가 그것을 보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 접근을 4서클인 후버도 디스펠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마나만 가지고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정반대로 마나 집약진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과부족 상태를 만든 후 원활히 공급되는 마나의 양을 줄인다면 어떨까?”

그런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 스스로 대견스러웠는지 크롤라이드는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하는 방향으로 사고의 전환이 1서클의 마나커넥션을 이용해서 부족한 마나를 공급하면 4서클인 후버도 커넥션 마법만을 디스펠하는 것만으로 내가 건 마법을 디스펠할 수 있게 된 것이고.”

크롤라이드는 신나서 자신의 성과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아이디어를 준 것은 후버지만 마법진을 분석한 것은 아카이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것은 자신이었고 이 과정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어 8서클에 좀 더 근접할 수 있었기에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노인의 몸에 익숙해 좀 더 자연스럽게 연기를 할 수 있으면 되는 거군요. 말은 폴리모프 디스펠인데 실제로는 마나커넥션 디스펠을 하는 것은 잘 익숙지 않아서요.”

“아니야. 내가 봤을 때는 정말 자연스러웠어. 전쟁 중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전투 마법사들이 하는 것만큼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서둘러서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천천히 자작이 놀라 자빠지게 보여주면 되는 거지.”

“3서클 마법사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게. 아마 3서클 마법사는 네가 기존의 폴리모프 마법을 해제하는 동시에 새로운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한 줄 알고 놀라 자빠질 거야.”

“그래도 처음부터 폴리모프 마법을 2개나 걸고 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크롤라이드는 웃음을 지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되네. 생각해보게. 평생 강만을 바라보던 사람이 어느 날 바다를 보게 되면 그게 세상 끝까지 연결이 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지 알 수 있겠나? 3서클 마법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7서클 마법에서 마나의 향기만을 느낄 뿐, 어느 정도의 마나가 사용됐는지는 짐작도 못해.”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호기롭게 말하는 크롤라이드, 그의 말대로 3서클 마법사가 7서클 마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럼 모든 준비가 다 갖추어진 듯하군요. d-day는 4주 후로 정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님, 크롤라이드 님.”

“부탁이랄 것까지야. 후버는 나에게 신세계를 보여줬어. 허허허.”

오늘 있었던 일을 분석하고 싶다는 크롤라이드의 말에 후버는 아카이브의 방을 빠져 나와서는 슬레인 자작령으로 보내는 편지를 영지의 병사를 시켜 컨텍트 상단에 의뢰하였다.

편지를 받은 상단은 통신 수정구를 통해 레빌리온 백작가와 멀리 떨어진 영지로 편지의 전문을 불러 주어 발신지를 조작해서 슬레인 자작에게 전달해 주었다.

“편지 문제는 해결이 되었고.”

편지를 보낸 후버는 전에 보았던 가장 늦게 예비 딱지를 뗀 11명의 병사를 찾아갔다.

이번 일에 그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후버가 방문한 영지의 훈련장에는 큐리오와 병사들이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다들 훈련이 열심이네요.”

“정말 다들 열심히로군. 슬렌, 저들의 차이점을 알 수 있겠어?”

손으로 자신을 통해 위력 시범을 직접 한 병사 11명을 가리키자 슬렌이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어요. 주인님.”

“비교해보면 알 수 있지. 일단 그들의 활을 연습하는 모습을 잘 봐봐.”

그 말에 다시 한 번 물끄러미 응시하는 슬렌, 하지만 눈에 띠는 차이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다 봤는데요.”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글쎄요. 그냥 다들 활을 잘 쏘네요.”

“일단 노만을 봐봐. 활 쏘는 자세가 굉장히 자연스럽지? 모르긴 몰라도 노만은 자신이 쏠 수 있는 사거리보다 훨씬 적게 쏘고 있는 걸 거야.”

후버의 말대로 다른 이들이 부들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노만의 팔은 안정감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을 봐. 노만이 쏘고 나서 그 궤적을 보고 최대한 궤적에 일치하게 쏘려고 하지.”

“음… 그건 그렇네요.”

“그리고 분대의 대형도 100인대가 다소 넓게 퍼져 있는 형태야. 다른 분대들과 가로 세로가 다르게 배치해 뒀지. 이게 무슨 뜻 같아?”

후버의 말대로 노만의 부대와 다른 부대의 차이점은 화살을 발사하는 진형이 화살을 발사하는 방향을 기준으로 종대인가 횡대인가의 차이가 있었다.

“글쎄요.”

“저들 스스로 100인 궁병대가 전장에 투입되면 그들을 통솔하는 10인 대장이 되고 싶다는 거지. 10인 대장은 각각 부대의 가장 앞에 서니깐 다른 부대와는 종-횡이 다르게 연습하는 거지.”

“그럼 가장 먼저 쏘는 노만은 100인 대장이구요?”

“그렇지. 목적이 생겼으니 훈련을 하는 대형이 달라지는 거야. 다들 10인 대장을 하고 싶어 하지만 10인 대장은 저 중 한 명밖에 못해, 한 명이라면 생각을 바꿔서 100인대의 정식 창설을 노리는 거지.”

“그럼 기존 10인 대장이 섭섭해 하겠네요…….”

“그걸 다독이는 건 큐리오 형님이 하셔야 할 일 이니깐 나랑은 상관없지. 어쨌든 나는 창설과 함께 실력을 테스트할 때의 대형을 저쪽에 맞추라고 해야 되겠어. 저들이 충분히 훈련을 했다면 기회를 줘야지.”

으쓱 어깨를 들면서 자신은 무관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한편에서 훈련하는 것을 바라보는 큐리오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가 스스로 깨닫는다면 좋겠지만 큐리오도 실제로 어떤 식으로 부대가 운용되는지는 문서로만 보았기 때문에 그 차이를 단번에 알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지이이잉.

“주인님, 품에서 수정구가 울린다.”

“나도 알아. 진동 기능을 넣으니깐 확실히 편하네.”

진동 기능과 발신자 표시 기능, 크롤라이드에게 재미로 한 말이었지만 크롤라이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는 이 두 기능을 후버의 수정구에 추가해줬다.

간만에 크롤라이드는 이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였는데 모든 이름을 크롤라이드와 아카이브의 이름으로 하는 대신 마탑에서 해당 마법진을 변형하는 모든 종류의 수정구의 유통을 막아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게 무슨 필요냐는 표정을 짓던 크롤라이드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특허권을 독점하였다.

‘마릴린이? 오랜만이네.’

발신자는 마릴린, 마릴린에게는 슬렌에게 그렇듯이 마나석을 이용해 마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는 고급 버전을 주었는데, 후버가 지원해 주는 마나석이 소모되는 것이 아까운 마릴린은 자주 통신을 하지 않았다.

마릴린과 통화한 것이 오랜만이라 후버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후버 도련님. 후버 도련님.

“응, 마릴린, 듣고 있어. 왜?”

―지금 혼자 계세요?

“아니, 영지 병사들이 훈련하는 걸 보는 중이야. 무슨 일이야?”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요. 혼자 계실 수 있는 곳으로 가주시겠어요.

“알았어. 5분 후에 다시 연결해줘.”

―네. 통신 끊습니다.

뭔가 다급해 보이는 마릴린의 말에 후버가 얼른 통신을 끊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 왔다.

주로 밤에만 짧게 통신하는 마릴린이 낮에 통신을 건다는 건 뭔지는 몰라도 큰 일이 난 것일 것이다.

지이잉~~~

“마릴린, 나야.”

―네, 도련님. 지금 이상한 주문이 있어서 통신하게 됐어요.

“이상한 주문?”

―네. 슬레인 자작에서 엄청나게 많은 마법 물품을 주문했어요. 대략 금액은 15만 골드 정도. 그것도 지급으로 주문을 했는데 혹시 벌써 영지전이 터진 거예요?

다급한 마릴린의 목소리에 후버는 마릴린을 진정시킬 필요를 느꼈다.

“아니야. 영지전은 빨라도 3~4주 후에 일어나게 될 거야. 그전까지는 영지전 같은 건 일어나지 않으니깐 안심해. 그리고 최소한 마릴린의 가족들은 백작성 안으로 피신시킬 거니깐 그 부분도 걱정하지 말고.”

―후~우, 다행이에요. 전 영지전이 일어난 줄 알았어요.

안심했는지 마릴린의 목소리가 다소 침착해졌다.

“이제 자세히 얘기해봐. 지금 구입을 위한 협상을 하고 있는 거야?”

―예. 칼 님과 세이건 님을 비롯해서 상단의 주요 인물이 참석했어요. 발주량이 컨텍트 상단이 가진 전체 물량보다 25% 많고, 일주일 내에 준비해야 된다고 해서 지금 상단이 이 계약을 받을까 말까를 두고 회의에 들어갔어요.

“25% 정도라면 교류를 나누고 있는 다른 상단에 부탁을 하면 되는 것 아니야?”

―부탁하는 거는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그 정도 물품은 검수하는 대만 한 달이 걸릴 정도로 대량이에요. 마법 재료는 밀 같은 재료랑 다르게 물품의 포장부터 신경 써야 하거든요.

“검수하는 데 한 달이 걸린다고? 만약 최대한으로 당기면?”

―그럼 2주 정도는 걸릴 거라고 상단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마릴린의 능력이나 후버가 후견인이라는 것을 높게 샀는지 마릴린의 위치는 회의에 참석할 정도는 못 미쳐도 회의의 발제 내용 정도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위치로 보였다.

“그래? 그럼 지금 세이건 님이나 칼 님과 통신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곤란하고 2시간마다 10분씩 쉬는 시간이 있어요.

“그래? 그럼 다음 쉬는 시간은 언제지?”

―25분 뒤에요. 상단주님에게 말할까요?

“응. 부탁해. 마릴린도 알겠지만 이번 일은 우리 영지랑 직접 관련된 일이니깐 통신 끊고 진정해. 미래에 상단주가 될 건데 그렇게 쉽게 흥분하면 곤란하지.”

―예. 죄송해요, 상단주님이 연결하실 거예요.

마릴린의 통신이 끊기고 후버는 고민에 잠겼다. 뭔지는 모르지만 기회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자작가가 가진 경제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그 많은 물품을 주문할 수 있는 것일까?

사용처야 실리카겔의 방문을 대비한 선물용이겠지만 자작가의 경제력은 끝이 없는 듯했다.

절대 단순히 영지민을 착취해서 나올 수 있는 금액은 아닌 것이다.

“슬렌, 어떻게 생각해?”

자작가 농간의 주역이었던 슬렌은 어느 센가. 후버의 고민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로 급상승했다.

“글쎄요? 컨텍트 상단은 마법 재료만 판다고 했는데 그럼 모두 주인님의 것 아닌가요?”

“그렇게 될 공산이 크겠지. 자작으로서는 난 반드시 잡아야 될 대상이니깐.”

“어차피 주인님의 것인데… 물품보다는 왜 컨텍트 상단에 맡겼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후버의 고민이 더 깊어졌다. 실제가 아닌 소문의 레빌리온 백작가는 현재 상태에서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굳이 있다면 영지전을 통해 슬레인 자작이 승리할시 백작으로 작위가 올라갈 정도?

“그러고 보니 슬레인이 너무 무리하는데.”

총관이 적자에 허덕이다 도망간 백작가의 빚을 작위와 함께 뒤집어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한 것보다 진한 돈 냄새… 혹시라도 영지전이 장기화 되어 시간을 준다면 이 많은 돈을 슬레인 자작은 어딘가에 감춰둘지도 모르는 것이다.

일단 지금 빼먹어야 한다. 무리수를 둬서라도.

지이이이잉.

후버의 생각이 정리된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통신구가 빛을 발했다.

전면에 떠오르는 마밀린을 보고 통신구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안녕하십니까? 후버 도련님, 저 세이건입니다.

“오래간만입니다. 슬레인 자작이 대량의 발주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마릴린에게 상단주를 뵙겠다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백작가 자제의 명예를 걸고 이것 외에 상단 내부의 일을 전해들은 적은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후버 도련님에게 의중을 물어 보기 위해서 마릴린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슬레인 자작의 이름을 듣고 마릴린이 불안해하더군요.

날카롭게 판단하여 마릴린에게 일부로 정보를 흘린 것이라면 후버로서도 굳이 본심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세이건 님이 저를 믿어주시는 만큼 저도 세이건 님을 믿겠습니다. 사실 자작가와 백작가는 현재 영지전의 초읽기 상태에 들어가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발주하는 양이 많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문한 재료는 대부분 실험에 쓰이는 것이지, 당장 공격을 위해서 사용할 물품은 아닙니다. 납기일도 매우 촉박하구요.

“흐음… 거기에는 자작가와 백작가의 묘한 대치 상황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 명의 마법사의 영입을 두고 저희와 자작가의 영입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서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전쟁의 향방을 바꿀 마법사라… 아니, 마도사겠군요. 저희는 그들에게 물건을 팔지 않겠습니다. 무리하지 않으면 판매할 수 없는 물품을 팔아가면서 백작가를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원스레 팔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세이건의 말에 오히려 후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대의 표정까지 볼 수는 없지만 세이건의 말은 단호했고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세이건의 말 덕분에 애초에 생각한 선물의 크기가 더 커졌다.

“아닙니다. 그들에게 물건을 파는 방향으로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일시적이지만 당장에 그만한 물품을 다시 구할 수는 없습니다.

마도사의 영입에 실패하면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할 때 이것은 단순히 물품의 판매가 아니라 백작가를 파느냐 아니냐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자작가에 물품을 파십쇼. 대신 모든 대금을 수표가 아닌 골드 혹은 귀금속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이런 큰 거래에서 모든 거래를 현금이나 귀금속으로 처리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최대 10%의 가격 할인과 1주일 이내 배송을 보장하시면서 은근히 빚이나 지고 다니는 레빌리온 백작가와는 비교가 안 된다고 구슬리시면 됩니다.”

―으흠… 자작의 자만심을 이용하라는 것이군요. 판매는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1주일 배송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물품을 실제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 검품만 해도 상단 전체가 달려들어 2주 이상 걸리는 일, 자작가의 마법사는 단 두 명이기에 검품에만 한 달 이상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밀입니다만 그 마도사 이미 제 쪽으로 포섭이 끝난 상태입니다.”

―포섭이 끝났다고 하시면?

“그 물품을 검수하는 것은 제가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떠한 피해라도 상단에 발생하게 된다면 제 특허권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변제가 될 때까지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아… 그럼 자작은 혼자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번에 놀라는 세이건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이 담겨 있었다.

만약 자신이 처음부터 죄송하지만 이 물품은 팔 수밖에 없다고 했다면 둘의 관계는 깨지는 것이다.

이미 신형 수정구로 얻는 이익이 상단의 총이익에 70%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0분이 다 되어가는군요. 정상 제품과 비정상 제품을 혼용하여 25% 가격에 재매입. 단, 현금은 주실 필요 없이 이전 세실리아 누님의 풀 플레이트 아머에 대한 비용을 제하고 나머지 부분은 상단에 적립해 두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마릴린의 교육비로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사용하셔도 됩니다.”

수정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옆에서 듣기만 하던 칼이 빠르게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거래 금액 13만 골드를 선금으로 받고 25%를 외부 매입해야 한다는 것은 마릴린도 알고 있는 정보이니 속일 생각도 없지만 그것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놀란 칼의 물음에 후버가 긍정의 대답을 하자 칼은 나머지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창고에 있는 물건을 전부 보내면 대략 10만 골드 남짓, 그것을 2만 5천 골드에 되사온다면… 세실리아의 갑옷 대금을 한 번에 변제하고도 남는다.

자작에게 상단이 받는 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이건보다 먼저 대답하는 칼.

“그럼 부탁드립니다. 통신 이만 종료하겠습니다.”

2~3만 골드. 한 번에 많은 금화를 벌 수 있다는 것도 만족스러웠지만 자신이 얻게 되는 것은 단순한 금화가 아니었다.

자작가에 대한 의혹, 그 부분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컨택트 상단이라니. 자작 설마 사실 확인을 하려는 건가? 생각보다 용의주도하군.’

컨텍트 상관과 교섭이 결렬되어도 상관은 없었다.

다른 상단을 통해 구입한다면 자작가에 대한 의혹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얻지 못하겠지만 15만 골드 어치의 물건은 자신이 손에 쥘 수 있다.

자작가를 정신없이 만들려면 생각보다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하게 된 순간, 후버의 생각은 깜짝 파티에서 대형 이벤트로 자작가를 위한 장난의 정도를 더 높이기로 했다.

*

*

*

“흠흠. 아무런 기별도 없느냐?”

슬레인 자작이 영지의 성벽까지 와서는 초조한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영주성과 가장 가까운 남쪽 성벽을 약속 장소로 잡은 것은 자작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4주 전 한 장의 편지가 온 후부터 계속해서 일반 영지민은 물론 상단의 행렬까지 동쪽과 서쪽으로 돌리며 한 명의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그분이 오실까? 설마 이렇게 빨리 답장을 해줄 것이라고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자작성으로 온 편지 겉봉에 적힌 두 글자의 이름이 자작의 시선에 격동의 파문을 일으켰다.

그 마법사의 이름은 아니지만 겉봉에는 ‘슬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분이 오신다면. 편지의 내용에만 맞춰서 오신다면 더 이상 레빌리온 백작가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편지에는 슬렌을 통해 보낸 물품은 잘 받았고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 신세를 갚기 위해 한 달 안에 영지를 찾아갈 것이라는 내용과 번잡한 것은 싫으니 남문을 비워 줄 것을 요청하는 용건만 쓰여 있는 짧은 편지였지만, 그날 이후 자작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정보 길드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때마침 온 편지와 2주 후 정보 길드의 보고서에서 영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총관의 소식과 크롤라이드의 마탑 복귀 소식을 듣고 모든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최신 소식은 레빌리온 백작가의 기사단장인 필러까지 병에 걸려서 오늘내일 한다는 것이다.

슬레인 자작은 기대감에 뛰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을 정도였다.

“허허. 내가 남문을 가야 할 일이 있다니깐 그러네.”

“말단 병사에게 영주님의 명을 어기라고 하십니까? 다른 쪽 성문을 이용해 주십쇼. 어르신.”

“거참, 아까 전부터 너무 하는구먼. 왜 성벽을 놔두고 성벽 밖에서부터 검문을 하면서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그러나? 자네 때문에 성벽을 한 바퀴 삥 돌아온 것 같아.”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려. 영주님의 명령이라는데 왜 고집을 부리십니까? 근무자 교대 시간도 다 되간다니깐…….”

“그럼 가보시오. 난 남문으로 가야겠소.”

자작의 귀에 쓸데없는 병사와 촌로의 실랑이가 들려서 신경을 거슬리게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오늘이 약속한 한 달, 자정까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타난다면 오늘일 것이다.

“카악!!!!”

‘웬 고양이 소리가… 고양이 소리?’

잠시 천막 안에서 몸을 녹이던 자작이 후다닥 뛰어나와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한 마리의 고양이를 볼 수 있었다.

노인의 구부러진 등허리 위에 올라서 병사에게 캭캭대는 것은 분명 슬렌이 맞았다.

“잠깐, 저 병사를 멈추어라.”

“옛! 자작님.”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눈치 빠르게 병사를 제지하기 위해 달려갔다.

“멈춰라! 영주님께서 멈추라 하신다.”

“예?”

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멈추라 하신다. 너는 이만 돌아가 보아라.”

“예, 알겠습니다.”

기사의 지시에 따라 병사가 돌아가자 자리에는 슬렌, 노인이 된 후버, 그리고 기사만이 남았고 기사가 달려온 곳에서 자작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후버를 향해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실…….”

“흠흠. 말을 아끼시게.”

“아. 예, 죄송합니다.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이거 한 달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저 오고가지 말라고 말만하면 되는 것을 병사들까지 동원해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것 없잖은가?”

가볍게 타박하는 소리에 자작의 고개가 깊이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불편을 드린 병사는 제가 당장에…….”

“허허. 병사가 무슨 잘못인가? 다짜고짜 막으라고 하니 다 막는 것 아닌가?”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실 줄 알고.”

“내가 텔레포트라도 써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자작의 생각은 텔레포트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하늘을 날아서 오거나 화려한 마차는 타고 올 줄 알았다.

“흠흠, 아닙니다. 제가 어찌 마도사님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자작의 말에 약간의 의심이 묻어났다.

도망가는 어쌔신의 위치를 알아낸 것과 말하는 패밀리어가 있는 것은 대단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모를 의심 혹은 직감이라는 것이 자작을 괴롭혔다.

‘실력을 확인하자고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하군.’

후버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렇게 의심을 하는 것이 후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괜히 의심도 안 하는데 성질만 고약하게 군다면 나중에 더 큰 위기가 찾아올 수 있었다.

슬렌이 말을 하고 마법을 썼듯이 후버 역시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뭔가 의심이 묻어난 말투군. 저곳이 네가 있던 곳이냐?”

대번에 말이 짧아졌다.

“예. 언제오시나 기다리느라 저곳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자작은 바뀐 분위기에 움찔했지만 자신의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이거 괜히 미안해지는군. 한번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실험이 많다보니 일단 저쪽으로 가서 몸을 좀 녹였으면 좋겠는데.”

고서클 마법사가 몸을 녹인다? 외출을 하면서 온도 조절이 가능한 아티팩트 하나 없이 외출하는 노마법사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던 자작은 다시금 의심이 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예. 알겠습니다.”

자작이 앞장서고 그 뒤를 후버와 슬렌이 뒤따라가 남문의 자작이 사용하던 천막 안에 들어왔다.

“저놈이 영지의 마법사냐?”

“예. 그렇습니다.”

“쟤가 수준이 제일 높고?”

명백한 무시가 담긴 말이지만 자작은 화가 나기보다는 괜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마법사는 분노했다. 자신보다 강한 것은 맞지만 그래봐야 5서클 정도로 보이는 후버의 모습에 발전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자신은 저 나이가 되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5서클 정도로 보이는 노마법사가 할 말은 아니지요.”

영지 마법사의 비꼬는 말에 자작은 깜짝 놀라서 영지의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실리카겔을 본 순간 자신보다 경지가 높기에 고개를 숙일 줄 알았던 영지의 마법사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실리카겔을 쳐다보았다.

정말 실리카겔이 5서클인지, 아니면 영지의 마법사가 미쳐버린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자작은 차라리 이 기회에 속 시원히 자신의 경지를 밝혀줄 마법을 보여주고 영지의 마법사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5서클이라…….”

“당장은 나보다 경지가 높을지 몰라도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오? 나를 무시한다면 나도 선배에 대한 예의 따위는 지키지 않겠소.”

자신이 그리던 상황에 후버가 반색을 했다. 저 마법사가 나를 갈궈야 내가 실력을 보일 명분이 서는 것이다.

“폴리모프 디스펠. 폴리모프.”

“허풍은 5서클 마법사가 폴리모프를 어떻게 사용…….”

영지의 마법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후버의 발 부분부터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에 퍼지는 마나의 향기, 영지의 마법사는 잠시 동안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10~20초의 짧은 시간 동안 펼쳐진 농밀한 마나의 흐름은 이미 3서클 마법사의 체내에 있는 마나서클의 밀도 보다 높은 밀도로 주변을 향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미청년 버전의 후버.

“야!”

누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바보는 아무도 없었다.

자작을 비롯한 주변의 기사들의 시선이 모두 영지의 마법사를 꿰뚫을 듯이 바라보았다.

특히 자작의 시선은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살기까지 띠고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넵!”

본 것이 있으니 이제 무시할 수 없다.

폴리모프를 해제하는 순간에 다시 폴리모프를 사용했다.

책에서도 읽어보지 못한 사례. 그리고 천천히 영주성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을 가리키는 후버의 손.

“죄송합니다.”

“닥치고 봐라.”

“…….”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후버의 손으로 모아졌다. 그리고 너무나 밝게 빛나는 후버의 손가락, 눈이 부실 듯한 빛이 하늘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후버의 손에서 쏘아져 나가는 빛은 사실 별거 아닌 1 서클의 라이트 마법.

다른 것이 있다면 후버가 가지고 있는 4서클의 마나를 모두 한 번의 라이트에 쏟아 부어 엄청난 빛을 뿜는 것뿐, 하지만 그것조차 동시에 폴리모프의 해제와 사용을 하는 후버가 하니 모두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라이트 마법이 아닙니까?”

“닥치고 봐라.”

“…….”

잠시 후 후버가 가리킨 절벽 앞에 3개의 동그란 원이 떠올랐다.

사람의 손가락 크기 정도로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사람보다 몇 배는 큰 원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사의 질문에 후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자, 두 번째 고리에서 강한 빛살이 튀어 나왔고 세 번째 고리를 지나며 속도가 빨라진 빛살이 절벽 위쪽에 틀어 박혔다.

하지만 화려한 효과에 비해 절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 그때, 샛노란 화염이 절벽에서 터져 나왔다.

“뭐 저런…….”

순식간에 몸집을 불리는 화염은 모든 것을 불태울 듯 활활 타오르며 몸집을 키우더니 도저히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없으니 저딴 일이 일어나지.”

흘려들을 수도 있는 혼잣말이지만 자작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없기 때문에 저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자신이 저 근처에 있다면 더 엄청난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로 해석되었다.

“야!”

“넵.”

화들짝 놀란 영지의 마법사.

“잘해라.”

“넵.”

“허리 굽기 전에…….”

“넵.”

“저런 거 못하면 두고 보자.”

일반적으로 두고 보자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다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파이어 볼을 던져도 닿지도 않을 거리다.

그런데 저 마법사… 아니, 마도사는 영창도 없이 저런 기적 같은 마법을 성공시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심지어 수인을 맺는 것 또한 보지 못했다.

닥치고 보라는 것이 저 마법의 이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화염의 크기로 볼 때 헬 파이어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불꽃이 절벽 위에서 피어났다.

“자작, 영주성으로 들어가자.”

이제 아예 후버가 자작에게 명령을 했지만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토를 달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작성쯤은 공격을 받는지 알기도 전에 쓸려 버릴 수가 있다는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작의 경우는 기대 이상의 후버의 퍼포먼스에 두려움과 함께 후버가 자신과 함께한다면 어쩌면 왕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웃으면서 두려운 기괴한 표정을 하고는 후버를 안내했다.

‘성공이군.’

이제 자작은 감히 자신에게 어떠한 의심을 품지도, 그렇다고 힘을 써 달라고도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백작성에 있으면서 착한 동생 역할과 좋은 아들 역할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후버였다.

그렇게 후버의 자작성에서의 태도는 결정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