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막장 레빌리온 백작가 (11/37)
  • 막장 레빌리온 백작가

    백작 영지에도 여름의 끝이 찾아왔다.

    을씨년스러운 바람과 함께 찾아온 2명의 드워프의 방문에 총관은 당황하였지만 백작과 큐리오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버가 설명해주어야 하지만 마릴린을 컨텍트 상단에 보내고는 침울한 기분에 아카이브와 크롤라이드와의 마법 연구에만 몰두할 뿐, 다른 가족이나 가신들을 돌보지 않았다.

    간간히 세이건과의 통신을 통해 마릴린의 소식을 전해 듣거나 부탁한 백작가의 재정 상태가 안 좋다는 정보가 어떤 경로로 흘러가는지만 체크할 뿐, 그 외의 다른 부분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의 갑작스러운 드워프의 방문.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저는 셀리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의 조수인 로시나라고 합니다. 이번 저희 드워프 공단에 주문하신 블링블링 핫 핑크 스페셜의 제작을 위해 세실리아 아가씨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하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가신들의 시선이 세실리아에게 몰렸고 세실리아의 표정은 자신이 지금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으음… 결국 이런 일이.”

    또다시 두통이 엄습해오는 백작, 그리고 큐리오는 뭔가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작가의 자산이 축나는 것은 반대지만 무리를 한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고 큐리오의 경우 일단 자신은 한동안 행복한 세실리아의 기분만 맞추어주면 체면 구길 일도 검에 대한 이상한 깨달음을 얻을 일도 없었다.

    ‘아. 혈조는 의미 없는 게 아니었구나.’

    한 달 전 상단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하는 세실리아에게 마법 재료만 덩그러니 놓고 갔다는 소식을 전한 죄로 움푹 파인 혈조에 포션을 부은 후 검면으로 맞으면, 맞는 순간 새살이 솔솔 돋아 오래 맞을 수 있다는 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큐리오는 특히 반색하였다.

    “세실리아 영애님, 이게 무슨…….”

    “저도 몰라요.”

    백작의 하소연을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이 총관인 만큼 풀 플레이트 아머의 가격이 3만 골드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총관의 질문에 세실리아는 데인 듯 놀라며 대답했다.

    자신이 아무리 가지고 싶다고 해도 백작가의 자금을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쓸 자신이 아니었다.

    후버는 더 복잡해지기 전에 사태를 바로 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아… 그건 일전에 크롤라이드 님께서 세실리아 누님의 갑옷을 실험 재료로 사용하시다 갑옷이 상해서 크롤라이드 님께서 일부 부담하시고 제가 부담해서 구입하는 겁니다. 영지의 자금은 한 푼도 사용하지 않으니 총관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아… 제가 너무 놀라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항상 영지를 걱정해주시는 총관님의 염려 덕에 백작가가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후버의 대답에 총관이 안심한 듯이 얼굴색이 돌아왔다.

    3만 골드를 지불하고자 하면 지불하지 못하는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자금을 지불하는 것은 앞으로 백작성의 재정이 팍팍해짐을 뜻한다.

    “후버야, 내 사랑스러운 동생.”

    후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실리아가 사랑스럽다는 단어를 본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님의 갑옷에 슬은 녹을 보고 가슴이 아프더군요. 다행히 이번에 마탑으로부터 받은 배당금이 있어서 할부로 구입했습니다.”

    “고마워. 잘 입을게. 근데 인사는 이따가 하고 셀리아 님과 로시나 님이라고 하셨죠? 확실해졌으니 얼른 제 신체 사이즈를 재러 가시지요.”

    “아, 예. 그러지요.”

    드워프들이나 이 종족에 대해서는 왕을 제외하고 존대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기에 세실리아는 그들에게 존칭을 써주며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안내했다. 즐거운 시간인 것이다.

    “이거, 참! 오랜만에 가신 분들도 다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아무래도 오늘은 파하고 내일 뵙도록 하지요. 급한 안건이 있으시면 지금 발언하셔도 좋습니다.”

    “아닙니다! 백작님 내일 다시 모여 회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작이 자리를 파하겠다는 말에 모두들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필러 경의 군사부 보고를 들으며 지루함을 느꼈고 다음 안건은 가을 세금이 걷히기 전의 각 부분별 예산의 분배를 논해야 하기에 머리를 맑게 하고 자신이 담당한 곳에 많은 예산을 가져올 논리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총관님 잠시 이쪽으로.”

    후버가 자리를 나가려고 하는 총관을 불러 세웠다.

    후버에게도 예산을 점검하기 전에 총관과 필러와 함께 말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모든 가신이 돌아간 후 잠시 필러 경을 불러서 백작님의 방으로 와주세요. 저와 백작님 그리고 큐리오 형님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드디어 저도… 감사합니다.”

    아까의 후버가 자신을 높여주는 말로 기분이 좋았던 총관은 후버의 말에 자신도 영지의 방향을 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고 필러까지 낀 모임이라면 군사 부분까지 아우르는 전체적인 방향을 논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대를 이어 충성하는 총관의 집안에서도 가문의 주인과 그 후계자의 회의에 끼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대를 이어 충성하는 총관의 노고를 모르는 백작가의 가족은 없습니다. 좀 더 자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영지의 운영에 참여하셔서 백작가를 도와주세요.”

    후버는 총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적으로 감이 잡혔지만 굳이 그런 오해를 바로잡아 주지는 않았다.

    총관은 확실히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필러 경 오셨습니다.”

    백작의 집무실에 마지막으로 필러 경이 자리에 앉는 것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안건은 보헴 가문의 슬레인 자작, 그의 처리 방법에 대한 설명과 협조를 구하기 위한 회의였다.

    “일단 큐리오가 현재까지의 일을 간추려서 설명을 해 줄 것입니다.”

    큐리오의 발표가 계속됨에 따라 백작을 제외한 가신들의 후버와 큐리오를 바라보는 시선에 놀람이 서리기 시작했다.

    크롤라이드와 아카이브의 경우는 모든 공을 자연스럽게 큐리오에게 돌리는 후버의 욕심 없는 평온함 표정에 놀랐다.

    “그럼 위협의 수준은 어느 정도라도 보십니까?”

    “현실적인 수준입니다. 병력의 손실로 인해서 오히려 좀 더 앞당겨졌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미리 세 명의 회의를 통해 예상되는 질문과 답변을 맞춰 본 것을 모르는 가신들은 큐리오의 임기응변에 놀랐다.

    백작은 그런 후버와 큐리오의 모습을 뿌듯해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죄송합니다. 백작님 영지의 기사인 제가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니.”

    부복하고 죄를 청하는 필러에게 백작이 말했다.

    “아닙니다. 필러 경, 필러 경은 후버가 어쌔신에게 공격받은 이후로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병사와 기사의 기강을 바로 잡지 않았소? 그대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못한 나의 잘못이 크오. 나 역시 사후 보고로만 들었으니 나나 필러 경이나 이제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된 것 같소. 하하하.”

    유쾌한 백작의 목소리에 분위기가 밝아졌다.

    형제끼리의 협력으로 아무도 모르게 백작가의 위협을 제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도 백작님의 여유나 자제들의 침착함은 대단하군.’

    이들 역시 후버가 자신의 공을 양보한 것을 모를지는 몰라도 공을 탐하지 않고 큐리오의 말을 경청하는 후버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았다.

    “그런가봅니다. 요즘 제이드가 제 뒤를 바짝 쫓는데 한번 대련하고 나면 뼈마디가 쑤셔서 죽겠습니다.”

    “요즘 나도 괜히 두통이 심한데 이거 빨리 영지를 물려주고 어디 좋은 곳으로 필러 경과 함께 유랑이라도 해야겠구려.”

    “젊었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때는 걸어 다녔는데 이제는 퇴직금이라도 털어서 좋은 마차라도 하나 구해 둬야겠습니다.”

    “좋지요. 그 정도는 따로 올려드리겠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같이 한잔하면서 여행 구상이나 해봅시다! 필러 경.”

    젊을 때 필러와 함께 기사 수행을 한 백작과 필러 경은 아직도 죽이 잘 맞는 친구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자연스럽게 회의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경과는 잘 들었고 앞으로의 대책은 큐리오가 말해주면 되겠군.”

    “예, 그럼 이어서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백작의 지시에 큐리오가 자리에 일어나서 인사를 한 후 미래의 계획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입장에서 가장 껄끄러운 것은 슬레인 자작이 용병들을 끌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가능성을 가능하면 차단하려고 합니다.”

    “후버 님의 지적은 옳습니다만 슬레인 자작이 쉽게 자신의 강점을 포기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슬레인 자작 역시 최근 어쌔신 길드와의 분쟁으로 훈련된 기사를 수습기사로 채워 넣는 실정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어쌔신 길드의 붕괴로 인해 더 이상의 교전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은 긍정적이군요. 그런데 기사들의 병력이 적어졌으면 그만큼 용병을 더 고용하지 않겠습니까?”

    지당한 필러의 지적에 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에는 그가 이번 어쌔신 길드를 붕괴시키기 위해 투입한 자금이 적지 않습니다. 후반에는 기사의 병력을 아끼기 위해 다른 어쌔신을 고용해서 본단을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금전을 지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대외적으로 백작가의 무력이 더 약하다고 알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어차피 올 공격이라면 가능하면 자작가의 힘이 줄어든 지금이 여러모로 좋았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필러 경과 총관님에게 두 가지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한데 이 두 가지가 두 분의 명예에 심하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서 이렇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고 이해를 구하려고 합니다.”

    “하명하시지요.”

    입을 맞춘 듯 대답하는 필러 경과 총관의 대답에 백작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일인지 모를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에 대해서 두 가신 모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긍정의 대답을 한 것이다.

    이것이 신흥 가문에서는 볼 수 없는 유서 깊은 레빌리온 백작가의 자산이었다.

    “먼저 필러 경께서는… 와병 중이시라는 소문과 함께 이번 영지전에 참여하셔서는 안 됩니다.”

    “흐음…….”

    필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명예 보다는 만약 그런 상황에서 제이드가 자신의 역할을 잘 해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었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다면 그렇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제이드를 좀 더 잘 다독이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와병 중이라고 해도 영지전이 벌어지는 상황에 불참하는 것은 굉장한 불명예로 여겨지지만 필러는 그런 후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총관께서는…….”

    “편하게 하문하시옵소서. 저는 백작가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필러 경에게는 거침없이 말씀하시고 저에게는 고민하시면 저의 충성을 의심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살짝 농담기가 들어 있는 총관의 말에 후버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말에 뜸을 들이는 만큼 필러 경의 경우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일이 분명한데도 총관은 백작가를 생각해서 후버와 백작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것이리라.

    “총관께서는 대외적으로 백작가의 자산을 분식 회계하여 영지의 적립금을 모두 횡령한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허허, 영지의 모든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저로서는 쉬운 일이지요. 원하시면 정말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내일 가신회의 때부터 할당되는 예산을 흉년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대폭 삭감하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지전이 끝나면 모든 가신들과 오해를 풀 것입니다.”

    백작이 뿌듯함을 느낀 것과는 다르게 담백한 회의와 불명예를 받아들이는 가신들의 모습에 크롤라이드는 입을 벌리고 백작의 집무실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후에 복권을 해준다고는 하나 만약 자작과의 영지전에서 패한다면 영원한 불명예를 안는 일이다. 이렇게 가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시원스러운 두 분의 대답에 아버지와 큐리오 형님 그리고 제가 고민한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는군요.”

    “그만큼 가신을 아껴주는 것이니 저는 오히려 세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총관에 이어서 필러도 같은 취지의 대답을 하여 회의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후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벅찬 감동을 느꼈다.

    전생의 TV에서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무사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였으니, 백작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두 가신은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들이 있는 한 큐리오가 다스릴 레빌리온 백작가의 미래는 밝았다.

    조금은 자신이 떠난 후에도 백작가에 대해 안심하는 후버였다.

    *

    *

    *

    “이거 참 인상적인 것을 봐버렸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마치 위기에 처한 왕국의 회의라도 보는 듯했습니다.”

    “후버가 큐리오를 위해 자신의 명성을 희생하듯이 이것도 백작가의 가풍과도 같은 것인가?”

    “후버를 보며 천재에 대한 저의 생각이 바뀐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귀족가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군요.”

    “정말 재미있는 곳이야. 아카이브, 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백작가에 몸을 의탁한 것이겠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주사위를, 흠흠.”

    젊은 시절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에 얼굴이 붉어지는 아카이브였지만 백작가로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우리도 후버를 도와주기 위해서 빨리 연구를 끝마쳐야지. 가을의 끝 무렵까지는 완성을 시켜야 하니.”

    “그러고 보니 어느 샌가 스승님께서도 백작가를 도와주고 계시군요.”

    “그도 그렇군. 뭔가 백작가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처음엔 새로운 마법에 대한 시각이 궁금하였는데 이제는 백작가 자체에 호기심이 드니…….”

    “후버뿐만이 아니라 큐리오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자연스럽게 가신의 궁금증을 풀어주며 회의를 진행하는 능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지에 관심이 없던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지. 게다가 세실리아 영애의 엉뚱함은 또 어떤가?”

    “하하하! 저도 세실리아 영애의 엉뚱함에는 매번 놀라고 있습니다. 백작의 집무실에 도청기라니요.”

    “처음에 나는 슬레인 자작이 설치해둔 도청기인 줄 알고 깜짝 놀라 마나의 흐름을 따라가 보니 세실리아 그 아이의 방으로 이어지더군.”

    “게다가 보란 듯이 거울로 위장한 수신기 하며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스승님.”

    얼마 전 백작의 방에 회의를 하러 들어간 둘은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는 도청기를 감지하고 백작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마나의 흐름을 따라가자 놀랍게도 마나가 이어진 곳은 세실리아의 방이었다.

    이를 수상히 여겨 세실리아에게 안부를 전한다는 핑계를 대고 방문한 방에는 화장품은 하나도 없는 화장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울에 연결된 수신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유쾌하지 않습니까?”

    “어쩐지 세실리아가 후버를 찾는 경우가 최근에 많았지요.”

    “아마 지금 백작가의 실세가 후버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우리와 세실리아밖에 없을 거야.”

    “그럴 것입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두 노 마법사에게 백작가는 정말 재미있고 유익한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은 모르시겠지만 세실리아 아가씨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꽤 있습니다. 후버가 왜 변태라고 소문이 났는지도, 세실리아의 탓이 컸지요.”

    “오오! 이거 오랜만에 마법은 잊어버리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그렇게 두 스승과 제자의 세실리아를 주제로 한 대화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

    *

    *

    흐앗.

    “아직 느리다. 좀 더 빠르게 속사 10발 발사.”

    “대장님, 잠시만 쉬었다 합시다. 팔 떨어지겠습니다.”

    대장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10명의 부대원을 지휘하는 10인 대장의 지위에 있는 병사가 큰소리로 명령하자 부하 중 한 명이 반발하였다.

    석궁으로 3발을 발사하고 장궁으로 7발을 발사하는 속사 연습은 한번 할 때마다 팔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특히 발사 후 다시 석궁을 발사하기 위해 쉬는 시간 동안 석궁 3개를 장전할 때면 2인 1조를 이루어서 당겨도 힘든 것이 줄어들지 않았다.

    “맞습니다. 대장님, 대장님은 장궁만 쏘시니 모르겠지만 석궁을 장전할 때마다 죽겠습니다.”

    “시끄러워 이것들아! 예비 딱지는 떼야 할 것 아니야.”

    10인 대장이 이들을 닦달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비 병사에서 영지 병사로 진급을 하는 데에 필요한 자격 조건, 3발의 석궁을 5초 이내에 발사하는 부분은 쉬웠지만 장궁 7발을 25초 이내에 발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전체 조원의 화살 중 70%가 멀리 세워둔 높은 장대 위에 동그란 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통과를 더욱더 쉽지 않게 했다.

    “알았다. 15분간 휴식! 하지만 휴식 후에도 술 처먹다 못 먹는 놈들처럼 손 떠는 것들은 오늘 특별 훈련이다.”

    “대장님, 너무합니다. 한 발, 한 발 얼마나 열심히 쏘면 손이 떨리겠습니까?”

    “평균이나 깎아 먹는 주제에 꼬박꼬박 말대꾸는 너 4발만 원 안에 들어가는 것 다 봤어.”

    “눈도 좋으십니다.”

    비꼬듯이 말하는 부하의 말에 10인 대장이 화를 내려던 찰나 똥그랗게 뜬눈으로 자신의 부하들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과녁을 보고 쏴봐라 이것들이.”

    한마디 쏘아주고는 뒤를 돌아본 10인 대장은 부하들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후… 후버 님을 뵙습니다.”

    병사들과 10인 대장이 바라본 곳에는 후버, 아카이브, 크롤라이드 이렇게 3명이 자신들이 훈련 후 쉬는 장면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열심히 부하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보기 좋군.

    “감사합니다.”

    다행히 자신의 노고를 치하해 주는 말에 10인 대장의 안색이 폈다.

    “그런데 자네들이 유일하게 아직 예비 딱지를 못 뗀 신병이라는 것이 사실인가?”

    “죄송합니다. 면목없습니다.”

    “아니야. 자네들의 잘못이 아니네. 그저 동기가 조금 부족할 뿐이지.”

    “죄송합니다.”

    “너무 그렇게 주눅이 들면 내가 오히려 미안하지 않나? 오늘 자네들을 이렇게 보러 온 것은 자네들이 왜 저런 동그라미 안에 화살을 넣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라네.”

    “아닙니다. 저희는 그런 것을 몰라도 백작님께서 시키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긴장한 10인 대장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후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닐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자네들이 먼저 합격한 병사들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네. 아니, 생각이 아니라 확신하네. 왜냐면 자네들은 왜 저런 원 안에 화살을 넣어야 하는지를 이제 알게 될 거거든.”

    “감사합니다. 도련님.”

    “모두 영지 뒤의 공터로 향한다. 너희들이 가진 힘을 보여 줄 것이다.”

    “모두 일렬로 정렬.”

    “우향우.”

    후버가 있어서 그런지 예비치고는 꽤나 빠르게 정렬을 하며 동작을 잘 맞췄다. 병사의 기본은 사열, 그런 면에서 합격점을 줄만 했다.

    “10인 대장, 아주 잘 가르쳤어. 잘했어.”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괜히 병사들을 생각해 준다고 말단을 칭찬해줄 필요는 없었다.

    소규모인 만큼 모두 잘 들을 수 있도록 전체를 칭찬하고 상급자를 칭찬하면 내리사랑으로 내려가는 법이다. 물론 내리 갈굼보다는 정도가 약하겠지만.

    “속보로 이동한다.”

    “전방 속보 이동.”

    한참 동안 속보로 이동한 결과 영지 훈련장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의 한적한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먼저 한편에 허수아비를 설치한 후버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7발의 화살을 발사한다. 석궁은 사용하지 않는다. 표적은 전방의 허수아비, 속사.”

    “7발, 장궁, 전방 허수아비.”

    복명복창에 위장 군기가 바짝 들어 있다.

    “좋다, 발사!”

    정확히 30초 후 마지막 병사까지 화살을 발사하는 것으로 사격을 마칠 수 있었지만 평소 허공의 원을 겨냥하던 것에 익숙해져 있어 허수아비에 정확하게 타격된 것 보다는 허수아비를 넘어가거나 못 미치는 게 더 많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방향이 정확한 정도였다.

    “허수아비 근처냐 아니냐는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한 발에 한 명의 적을 사살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좁은 면적에 일사불란하게 효력사를 쏘느냐 그게 가장 중요하다. 10인 대장 자네를 제외하고 병사 중에 가장 장궁을 잘 다루는 사람은 누구인가?”

    “노만이 가장 잘 쏩니다.”

    “좋다. 노만 앞으로 나와서 이 장궁과 화살을 받아라. 앞으로 10인 대장이 부재시 노만이 병사들을 이끈다.”

    장궁은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화살촉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조그만 수정구가 달려 있는 화살을 받고 노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화살촉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라. 너의 역할은 살상이 아니라 지휘다. 화살의 무게는 평소에 다루던 화살과 비슷한가?”

    “넵, 시위에 걸린 장력도 비슷합니다. 바로 쏴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멀리 쏜다는 기분으로 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해했는가?”

    “이해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후버는 8개의 소형 하급 수정구를 바닥에 먼저 두었다.

    “노만, 제 위치로 돌아가서 허수아비를 향해 발사한다. 실제 전쟁 상황에서는 너의 손에 효력사와 화살의 낭비가 결정된다. 이해했는가?”

    “예. 알겠습니다.”

    “발사!”

    후버의 명령과 함께 호선을 그리며 허수아비를 향해 날아간 화살이 정확하게 허수아비의 가슴에 명중하였다. 끝이 뭉툭한 만큼 박히지 않고 튕겨 나왔지만 화살촉이 있었다면 가슴에 깊숙하게 박혔을 것이다.

    “노만은 앞으로 나와서 외친다. 록온.”

    “록온!”

    쭈뼛하던 노만이 ‘록온’이라 외치자 바닥의 수정구가 허공을 향해 비행하여 빛으로 이루어진 2개의 직사각형을 만들어 냈다.

    각 꼭짓점마다 하나씩 수정구를 이은 빛의 사각형의 크기는 그들이 연습하던 원 모양의 타깃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앞뒤로 40m 정도 떨어진 직사각형이 허공에 떠오르자 병사들은 놀라서 후버를 바라보았다.

    “모두 비슷한 과녁을 쏘아봐서 알고 있을 것이다. 준비된 사수부터 7발, 속사 타깃은 가까운 사각형의 한가운데.”

    “발사.”

    그와 함께 11명이 화살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각형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화살의 속도가 너무나 느려졌다.

    “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라.”

    느려지는 화살을 병사들이 바라보느라 3번째 발사가 지연되었지만, 후버의 외침에 다시금 발사를 시작하여 30초에 겨우 맞춰서 발사를 끝낼 수 있었다.

    파바바박, 푹. 푹.

    “성공입니다. 크롤라이드 님.”

    “허허허. 이게 정말 성공할 줄이야.”

    이론상으로는 자신 있었다.

    수정구를 이용하여 슬로우 마법진을 허공에 만들고 그 안에 화살을 발사하면, 수정구는 외부에서 마나를 끌어올 수 없기에 미리 충전된 만큼의 마나만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한 범위 사격 능력을 보일 것입니다.”

    “저 원 안에 들어온 적은 기사라고 해도 살아나가기가 힘들겠지.”

    충전된 마나의 총 양에 따른 전위차에 의해 처음에 발사된 화살에는 강력한 슬로우 마법이, 마지막 화살에는 미약한 슬로우 마법이 걸려 앞에 있는 헤이스트 마법진에 이를 때까지 오밀조밀하게 화살의 막을 만들어낸 후.

    헤이스트 마법진에 의해 증폭된 속도로 적 병사에게 하나의 막이 되어 틀어박힌다.

    7번의 화살이 발사, 하지만 화살이 박히는 소리는 조금 길게 들리기는 하였지만 일정한 군집을 이루고 땅에 박혔다.

    기존의 화살을 이용한 공격이 한 명의 병사가 7발을 쏘는 것이라면 지금의 공격은 7명의 병사가 동시에 한 점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저 화살을 철로 만들어 쏜다면 웬만한 마법사들의 실드 따위는 찢어 버리고 몸에 박히겠군.”

    “그저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효… 효력사!!!!!”

    뒤늦게 정신을 차린 10인 대장이 훈련 때 외치던 대로 효력사를 쏘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진지하던 아카이브와 크롤라이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다수의 궁병이 있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위력, 하지만 그 차이는 소규모 궁병 부대의 효과적인 운용의 한 획을 그을 만한 차이였다.

    “후버야. 이건 학계에 보고하면 안 되겠지?”

    “죄송합니다. 아직은 저희 영지의 비밀 무기로 남겨 두고 싶습니다. 슬레인 자작과의 영지전 이후 제한적 대상자에만 발표하고 싶습니다.”

    “아쉽구나.”

    “대충 60발 이상이 우리가 예상한 범위 안에 밀집한 것으로 보이는군.”

    예상한 대답이기에 수정구가 찍은 영상을 확인하던 아카이브가 말을 돌렸다.

    그 역시도 생각보다 높은 밀도를 가지고 쏘아지는 화살의 막에 침착함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 곳에 있다면? 마법사의 강력한 상상력은 이럴 때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

    후버는 궁병을 100명 양성하고 있고 그들이 연습하는 타깃이 원인 것은 1,000발의 화살에 모두 마법을 걸어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수정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카이브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저는 저들을 단속하겠습니다.”

    “그러지, 그리고 돌아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숨을 한번 고른 후버가 얼이 빠져 있는 병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너희가 이제 무엇 때문에 허공에 있는 원에 화살을 쏘는지 이해했느냐?”

    “…….”

    “이해했느냔 말이다.”

    “넵. 이해했습니다.”

    후버의 재촉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대답하였다.

    “실제로 보니 어떤가?”

    “저 화살비가 내리는 곳에 제가 있다면 전 살아남지 못합니다.”

    가이드 에로우를 쏜 노만이 그들을 대표해서 대답을 하자 다른 병사도 이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희가 본 것은 영지의 기밀 사항이다. 즉,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너희들밖에 없다. 전체 500명의 병사 중에 너희 11명만이 백작가의 신병기를 사용해보는 혜택을 받은 것이다.”

    “옙.”

    “다음 테스트가 3일 후라고 들었다. 오늘 본 것을 생각해서 반드시 합격하길 바란다. 단, 이것은 기밀이니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크롤라이드 님과 아카이브 경 그리고 나와 너희들 11명 총 14명만 아는 사실이다. 누군가 발설한다면 너희 11명은 모두 영지에서 추방된다. 이해했는가?”

    “이해했습니다.”

    “해산, 10인 대장이 인솔하고 영지의 훈련소로 돌아가도록, 잡담은 금지한다.”

    “충성!”

    그 말에 병사들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마법 무기를 보고 기밀을 지키라며 협박하더니 이제 잡담을 하지 않고 산을 내려가라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오늘 본 무기가 자신들을 향하면 꼼짝없이 죽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당장은 어리둥절함과 두려움이 앞서겠지만 그 감정은 조만간 자긍심으로 바뀔 것이다.

    *

    *

    *

    “후버, 내가 종군 마법사로 5년간을 전쟁터에 있었다. 스승님도 마찬가지이지만 내가 좀 더 최근에 있었지. 그것도 과거의 일이지만.”

    착 가라앉은 아카이브의 목소리.

    “네, 스승님.”

    “사실 위력 자체는 그리 강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양산이 가능한 수정구를 보급하기만 하면 저런 식의 공격을 수십 번 하는 게 가능하다는 거겠지.”

    “스승님께서는 저런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그렇구나. 국가 간의 전쟁이든지 영지전이든지 가장 앞장서서 화살받이가 되는 것은 일반 평민 출신의 병사나 징집된 영지민이지, 기사는 아니지 않느냐?”

    그 말에 후버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하지 않은 문제는 아니지만 총의 개념을 알고 있는 후버로서는 최대한 이곳의 무기를 사용하여 마법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기에 이 정도는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경험으로 인한 관점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아카이브, 그렇게 진지할 필요 없다. 문명의 발전은 자연스러운 것, 불만스러운 현실이지만 전쟁도 세상살이의 일부분이니 발전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스승님, 그렇다고 해도 후버가 만든 것은 너무나 급진적입니다. 백작령만 해도 병사가 500~600명 수준, 단 두 번의 타깃 지정만으로도 100명의 궁병이 항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적을 몰살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후버의 생각보다는 우리들의 의견에 맞춰서 살상력을 줄이지 않았더냐? 이미 그 이야기는 끝난 것, 다시 반복한다면 소모적인 논쟁만 될 뿐이지.”

    처음 개발부터 후버와 아카이브의 의견 충돌은 계속 해서 발생하였다.

    후버는 지금의 수준보다 더 강력한 수준의 공격을 원했다.

    무기의 개발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닌 사고방식, 혹은 신념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다행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너무나 강력합니다.”

    “후버가 처음 했던 구상을 기억하느냐?”

    “저 두 마법 사이에 포이즌 포그가 있었지요.”

    “그래, 그나마 너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포이즌 포그 마법까지는 적용하지 않았다. 제자로서 스승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인 것이니 후버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려 하지 말거라.”

    처음 후버의 구상에는 슬로우-포이즌포그-헤이스트의 3개의 마법진을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냉각된 금속의 화살촉이 포이즌 포그 영역을 천천히 비행하면서 화살촉에 포이즌 포그의 물방울을 응결시켜 스치면 해당 부위를 도려내지 않는 한 썩어들어가고 몸 어딘가에 박히게 되면 사망에 이른다.

    그곳이 허벅지이든지 팔이든지.

    “그러고 보니 러스트 마법을 배치해서 상처를 썩게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지.”

    혹시라도 외부의 침입으로 백작성에서의 농성이 필수 불가결한 장기전의 경우 공포심을 주고 적이 화살을 회수하여 다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대기병전에서는 그리스 마법을 이용해서 검으로 쳐내지 못하고 유선형의 갑옷 라인을 따라 말에 꽂히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유일하게 실패한 사례, 굳이 그리스 마법을 이용하지 않아도 화살이 비처럼 내리는데 말이 피할 수는 없었다.

    비용-편익에서 실패한 것이다.

    “흠흠. 크롤라이드 님 실패한 사례는 그만 말씀하셔도.”

    “허허허. 나는 자네 편을 들어주는 것이네. 아카이브, 후버가 가장 단순한 형태를 채택했다는 점을 기억해 주게, 만약 후버가 계속 연구하였다면 지금보다 더 위험하고 효율적인 것을 만들어냈을 거야.”

    인상을 살짝 찌푸린 아카이브지만 이 시점에서는 자신의 말보다는 크롤라이드나 후버의 말이 더 옳은 쪽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감성적으로 거부감이 들 뿐.

    “알겠습니다. 미안하구나, 후버야. 그러고 보니 나도 종군 마법사로서 꽤나 많은 병사를 학살하였으면서 괜한 소리를 한 것 같구나. 전쟁이란 게 결국 자신의 편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편을 헤쳐야 하는 것인데.”

    다소 회한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자신 역시 종군 마법사로 있을 때는 적의 병사들이 불쌍하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법사는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때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었지.’

    한 사람, 한 사람 죽이는 병사들은 처음 전쟁에 참여할 때 칼을 휘두르지 못하고 구토를 하거나 현기증에 쓰러지듯이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지만 마법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후버, 가능하면 네가 다른 영지를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슬레인 자작 같은 경우야 그가 먼저 백작가를 도발한 것이지만.”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적은 만들기에 따라 늘고 줄고 하는 것, 힘을 가진 자로서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예, 크롤라이드 님.”

    셋의 대화는 그렇게 대략적인 합의점을 찾고 끝이 났다.

    각자가 해야 할 일과 입장의 차이를 크롤라이드가 잘 조율하여 주었기에 큰 갈등은 생기지 않았지만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영지를 수호해야 한다는 후버의 생각은 변치 않았다.

    *

    *

    *

    “자작님. 어쌔신 길드를 밀어 버리느라 피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찌푸린 슬레인 자작의 눈치를 보며 로비스가 준비한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으흠… 내가 너무 경솔했어. 고작 소규모의 어쌔신 길드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

    “영주님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기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경쟁 어쌔신 길드의 참전과 그들의 적극적인 옹호로 다른 길드까지 충돌이 확대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슬레인 자작에게는 천만다행으로 경쟁 어쌔신 길드가 자신들의 의뢰를 받아주고 어쌔신 길드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위약금을 물리기 위해 7서클 마도사의 존재를 알면서도 알리지 않은 것이 밝혀졌고 주변 어쌔신 길드까지 참여해서 확전이 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명분과 돈의 힘이었다.

    “또 돈이 문제로군 빌어먹을.”

    “영주님, 지나간 일은 잊으시고 레빌리온 백작가를 생각하시지요. 그곳을 먹으면 모든 일이 해결 될 것입니다.”

    로비스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이번 어쌔신과의 격돌로 인해 총 소요된 자금은 3만 골드, 하지만 돈보다 큰 손실은 백작령을 공격하기 위해 키우던 기사들 중 30명이 이번 공격에 사망하거나 전투불능이 된 것이다.

    “골 아프게 됐어.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카드뮴 그 자식 때문에.”

    “카드뮴에 대해서는 영지 밖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조치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죽여 버려야지. 그가 알고 있는 정보가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깐.”

    “안 그래도 은밀히 사람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두겠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보헴 자작가를 모셔오던 카드뮴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보좌하던 카드뮴을 함부로 죽여서 영지 가신들의 동요를 일으킬 수는 없지만 추방을 하고 뒤에서 입을 막으면 그만이다.

    게다가 영지의 가신에게 어쌔신을 고용해서 백작가를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카드뮴의 실책이 있다는 말을 다른 가신들에게 당당하게 할 수도 없었다.

    사형은 몰라도 추방의 이유는 다른 이유를 만들면 그만이다.

    “그분만 도와주신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다. 그런 것이 있다. 너는 알 필요 없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 다른 특이 상황은 없느냐?”

    자작은 실리카겔을 생각하고 있었다.

    최소 7서클 혹은 그 이상의 마도사가 자신을 도와주고 크롤라이드가 마탑으로 돌아간다면 백작령을 삼키는 것쯤이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자작님, 백작성에서 요즘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자료입니다만 조만간 크롤라이드 경이 백작령을 떠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크롤라이드가 떠나다니?”

    반색을 한 자작이 로비스에게 되물었다.

    크롤라이드가 사라져도 아카이브는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크롤라이드만 사라진다면 용병을 고용해 백작령을 밀어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애초의 계획도 아카이브를 포함시켰을 때의 계획이었다.

    어쌔신 길드와의 마찰로 기사를 다시 키우는 데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원래 계획보다 2~3년 연장될 뿐이다.

    “그게… 영주님.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이지만 백작령의 총관이 공금을 횡령하여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총관이 도망을 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카드뮴이 올린 보고서에서는 총관은 너무 충성심이 뛰어나 회유가 불가능한 사람으로 분류되지 않았나?”

    “그게… 충성심이 뛰어나기 보다는 백작령의 비상금을 횡령하고 영지의 공금을 횡령하느라 동분서주한 것이 영지의 업무를 너무 열심히 하였다는 소문으로 와전되었다고 합니다.”

    “혼자서 그랬을 리는 없고 그래서 지금 총관은 어디 있는 건가?”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정보 길드에 이미 의뢰를 해 두었습니다. 총관이 백작령에서 목격된다면 헛소문에 불과하겠죠.”

    “확실하게 알아보도록 하게. 그런데 총관이 공금을 횡령한 것이 크롤라이드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총관이 공금을 행력했다는 데 분개하여 크롤라이드가 총관을 찾기 위해 백작령을 빠져 나갈 리는 없었다.

    “그것이 총관이 너무 완벽하게 털어 먹고 이번 년도 농사는 평년작도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아무리 크롤라이드가 백작성에 아카이브와의 친분으로 머문다고 하지만 백작이 얼마간의 보조는 해줘야 할 텐데, 그마저도 못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평년작보다 못한 게 무슨 상관인가? 풍작이라 선포하고 그만큼의 세금을 거두면 되는 것을.”

    간신히 구겨지는 인상을 로비스가 바로 잡았다.

    ‘이런 개새끼! 양심이 없어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보헴 자작가에 속한 영지는 30년 연속 풍작인지 네놈의 사고방식을 보면 알겠구나.’

    평민 출신인 로비스로서는 속으로 슬레인을 욕했지만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자작을 대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카드뮴이 내쳐진 이유는 인상을 쓸 때는 고개를 숙이고 아닐 때는 들고 있었기에 자작이 본능적으로 자신을 욕하는 것을 눈치채서 쌓인 감정이 한 번에 폭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오랫동안 방구석에 앉아서 넙죽넙죽 총관이 던져주는 것만 받아먹었을 백작이 세심한 것까지 알 수가 없겠지요. 자작님 정도가 되는 영민한 두뇌와 꼼꼼한 성격의 선지자만이 영지의 위기 상황이 왔을 때 넘기실 수 있는 것 아니시겠습니까?”

    로비스의 뻔한 아부에 자작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부는 타이밍, 백작에게 피해의식을 느끼는 슬레인에게 백작을 깎아내리면서 자작을 높여주는 아부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소재였다.

    “하긴 그러니 공금 횡령이나 당하는 것이지. 그런데 말이야. 다 좋은데 소문이 너무 구체적이군. 마치 영지의 내부 사람이 퍼트린 듯해.”

    “영지의 내부 사람은 아니지만 그만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출처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컨텍트 상단을 아십니까?”

    “마법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주로 납품하는 곳이 아닌가?”

    갑작스레 상단의 이름이 나오자 슬레인이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정보의 출처가 그곳입니다. 100년 이상 거래를 하다가 이번에 백작이 마법 재료를 많이 주문해서 상단주와 부상단주가 방문을 하였는데 백작령의 빚보증에 가져갔던 마법 실험 재료까지 백작성에 외상으로 넘기고 왔다고 합니다.”

    “쯧쯧쯧! 괜히 좀 더 팔아보겠다고 갔다가 상단 전체가 뜯길 뻔했구먼.”

    “그 일로 더 이상 컨텍트 상단에서는 백작성에 납품을 하지 않고 컨텍트 상단에서만 물품을 구입하던 백작으로서는 다른 곳에서 외상으로 재료를 살 수도 없어 크롤라이드가 그런 백작의 사정을 이해하고 다시 마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흠… 아무튼 총관의 행방에 대해서 수소문하도록 하고 컨텍트 상단의 상단주를 한번 불러오도록 하게.”

    “상단주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들도 백작의 폭정에 신음하는 가련한 백성이 아닌가? 내가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좀 전해야 될 것 같으니 한번 우리 자작성에 방문을 하라고 해주게. 세상에 백작 같은 귀족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자작이 남이 곤란해졌다고 위로의 말을 할 만큼 성격이 좋은 것은 아니다.

    단지 자작은 그들을 불러서 은근히 소문의 정체를 확인하고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차피 실리카겔에게 줄 물품을 구입해야 했고 이왕이면 피해를 당한 당사자에게 호기와 배포를 보여주고 싶었다.

    *

    *

    *

    “큐리오 님, 공방에서 물품의 준비가 다 됐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가? 수고했군. 수고한 공방의 장인들에게 2골드의 특별 상여금을 내리고 그를 도운 자들에게는 1골드의 상여금을 내리도록.”

    영지 공사에 큐리오벨트를 사용하여 큰 재미를 본 백작의 지시에 따라 큐리오벨트를 추가로 생산하고 수정구의 충전을 도울 마법사를 대거 고용하여 수정구를 만드는 것을 관리하는 것이 요즘 큐리오의 일과 중 하나였고, 지배인은 책임자인 큐리오에게 영지에 큐리오벨트를 공급할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번에 고용한 2서클 마법사들이 처우에 불만을 가지지는 않는가?”

    “그들은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수고했어. 용병 길드를 고용해서 운송을 맡기도록.”

    “병사들이 하지는 않습니까? 배송에 많은 비용이 들 것입니다.”

    “그 부분은 다 생각이 있는 것이니 그렇게 조치해주게.”

    “알겠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지만 지배인은 큐리오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지배인은 몰랐지만 이것은 혹시라도 슬레인과의 영지전이 벌어질 때 고용할 용병을 영지 내에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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