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버크래프트 2권
지은이|CP
목차
슬렌의 귀환
막장 레빌리온 백작가
후버? 실리카겔? 아이언?
알맹이 없는 무력시위의 진실
보헴 자작가로 진입
기분 더러운 진창
록시나 자작가로
슬렌의 귀환
“주인님. 돌아왔어요.”
“수고했어, 슬렌.”
그 말과 함께 슬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후버.
“마릴린 누나는 어디 간 거예요?”
“그야 당연히 마을에 내려갔지. 이번 주가 휴가를 가는 날이니깐, 마릴린도 너를 보고 싶어 했는데.”
“아무튼 난 주인이 시킨 대로 잘했죠?”
“정말 잘했어.”
슬렌은 확실히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냈다. 특히 슬렌의 등에 매어 있는 두 개의 가방은 후버도 생각하지 못한 추가 수당이었기에 후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돈 한 푼 안 가지고 간 슬렌이 마법용품과 금덩이 보석으로 가득한 가방을 되레 매고 온 것이다. 그것도 적진에 홀로 들어가서 이룬 성과다.
“하… 정말 힘들었어요. 처음 자작가의 경비는 삼엄하고 가지고 온 육포는 떨어져가서 인근 마을에서 찬바람을 쐬며 노숙을 며칠 동안이나 했다니까요.”
“그러다가 록시나 자작가의 슈웨거 경을 만난 거야?”
“아니요. 식량이 모두 떨어져서 산기슭에 있는 개구리를 잡아먹었는데 그날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거예요.”
“개구리를 잡아먹었다더니 탈진한 거야?”
“아니요. 그 개구리가 알고 보니깐 독이 든 개구리였던 거죠. 그래서 혹시 쓸모가 있을까 하고 개구리를 이리 저리 살펴보니깐 개구리를 만진 제 손이 따끔따끔 하더라고요. 그래서 독을 추출해서 가지고 다니다가 이제 개구리는 먹을 수 없으니 뱀을 잡아 먹기 시작했죠. 뱀을 잡아먹으며 전리품으로 뱀 한 마리당 뱀 이빨을 하나씩 모으면서 며칠의 시간을 정처 없이 밤에는 사냥을 낮에는 마을을 돌아다녔죠.”
“호오! 그런데 육포의 양은 충분했을 텐데.”
“금방 떨어지더라고요. 주인님이 한번 찾아보세요. 제가 찾아서 없는 걸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면서 후버가 준 가방을 내미는 슬렌, 이미 영지에 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의 리허설을 마친 슬렌은 드라마틱한 요소의 첨가를 위해 아낌없이 육포를 산에 버리고 들어왔기에 후버에게는 술병과 슬레인 자작이 넣어둔 주머니만 만져질 뿐이었다.
“흐음… 네가 생각보다 많이 먹었었나 보네. 그럼 수정구로 연락을 하지 그랬어? 다시 돌아오라고 했을 텐데.”
“제가 어떻게 주인님이 주신 임무도 성공 못하고 돌아오겠어요. 뱀을 잡아 먹으며 하루, 이틀 이번에야말로 후버 주인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했죠.”
후버가 슬렌을 다시 봤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결과로 보아 다소 과장은 있어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렇게 정처 없이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멀리서 멋진 마차 하나가 보이는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작성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고, 나중에야 이름을 알았지만 그게 슈웨거 자작이었죠. 자작이 길 한편에 마차를 세워두고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마차 문에 개구리 독을 발라 뒀죠.”
“그러다가 어린 자작 영애가 다치면 어쩔라고?”
놀란 후버가 되물었다.
“주인님도 아시잖아요. 귀족들이 그것도 자기 딸에게 문을 열도록 하겠어요? 슈웨거 자작이 문을 만지는 순간 손을 부여잡고 고통에 주저앉더라고요. 딱 그때 제가 모아 두었던 뱀 이빨을 하나 꺼내서는 자작의 손가락을 따고 손목을 압박해서 독에 중독된 피를 뽑아내줬죠.”
“그 인연으로 슬레인 자작가까지 동행을 하게 된 거고?”
“그들이 하는 말이 목적지가 그곳이라기에 목숨도 구해 줬겠다. 대접받으면서 들어가서는 슬레인 자작 앞에서 대마법사가 빙의한 패밀리어 마법에 걸린 고양이 역할을 하며 그리운 주인님 생각에 식사도 거부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슬레인 자작한테 네 이름이 나와 비슷해서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니깐.”
“호감을 더 사기 위해 이 많은 선물을 줬다는 거지?”
후버의 추임새에 슬렌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한테 따로 금으로 된 팔찌를 줄 정도면 적은 양은 아닐 거예요.”
“호오! 이게 진짜 금이란 말이야?”
“자작이 설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겠죠. 한번 주머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해보세요.”
슬렌의 말에 주머니를 거꾸로 쏟아 확인해본 후버가 슬레인 자작의 배포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애초 슬레인 자작은 대마법사에게 보내는 물품인 만큼 최소한 대마법사가 반년 정도는 사용할 마법 실험 재료와 자신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재료를 살 수 있는 돈을 보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저 잘했죠. 주인님?
대략적인 양은 공작가의 평균 예산의 20% 수준, 백작가의 한해 수입과 비등한 가치인 것이다.
마법 재료의 가치를 후버가 판단하기는 힘들었지만 귀금속과 마나석만 해도 백작성 예산의 50~60%는 되어보였다.
“슬렌, 이번에는 너의 공이 너무나 크다.”
“저야 그저 충성하는 마음뿐이죠. 주인님이 내리신 임무를 생각하며 적막과 어두움이 지배하는 밤에도 공포심 따윈 느끼지도 않았어요! 개인적인 명예도 아닌 임무를 마치고 주인님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도 양심에 거리끼지 않았어요! 그게 내 생애 단 한 명뿐인 주인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란 걸 알았으니까요. 슬레인 자작 영지에서의 매일은 개구리나 뱀을 먹고 가을의 찬비를 맞는 날의 연속이었지만, 내일은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버텼죠.”
“슬렌, 너 이 자식.”
슬렌과 후버의 감격의 포옹이 끝난 이후에도 후버는 슬렌을 한껏 칭찬해주며 그의 노고를 치하했고 슬렌 역시 그런 후버에게 찰싹 붙어 아양을 떨어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후버가 크롤라이드와 아카이브의 손에 이끌려 수도관 매설 현장으로 갈 때까지 이런 훈훈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그럼 나는 아카이브 경과 함께 수도관의 매설을 위해 출발해야겠구나.”
“다녀오세요. 주인님.”
후버가 떠나고 슬렌이 심심함을 느끼던 차에 마릴린이 휴가를 끝내고 돌아와서는 간만에 슬렌과 마릴린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지. 내가 마을로 뛰어가는 그녀를 보고 말했지.”
“뭐라고 말했는데 슬렌?”
“‘지금 입에 마신 술이 그대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처럼 내 심장은 그대를 본 순간부터 격동을 멈추지 않는군. 내가 살아온 묘생의 쓴 맛을 덜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의 붉게 상기된 달콤한 입술뿐, 나에게서 멀어지려 하지 마시오. 이제 나의 심장은 그대와 떨어지면 더 이상 뛸 수 없으니!’ 이게 고양이 말로 하면 말이야.”
그저 쓴 술맛에 놀라 도망간 고양이 한 마리가 어느 샌가 자신에게 반해 한시도 떨어지지 못하는 가련한 망부석 고양이로 변화하는 놀라운 거짓말의 향연에 마릴린은 얼굴을 붉히며 집중을 하고 있었다.
아직 마릴린은 사랑을 꿈꾸는 순수한 처녀, 환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노처녀가 아니었다.
얼마간 여행을 다녀오더니 한쪽 팔에는 금으로 만든 앙증맞은 팔찌를 차고 있는 슬렌의 말은 전에 없이 높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주인님을 영원히 떠날 수는 없으니 돌아는 와야겠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그대를 떠나고 싶지 않소! 하지만 이것이 나의 길, 신께서 내리신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몸, 진심으로, 그대와 함께 이곳에 안착하고 싶소!!’”
잠시 마릴린의 반응을 살피는 슬렌, 생각보다 깊이 빠져든 마릴린의 반응을 보고 안심한 슬렌은 나머지 생각해둔 거짓말도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께서는 나뿐만이 아니라 나를 안주하게 한 그대에게도 벌을 내리시겠지. 그러니 그대의 발톱으로 내 심장을 찌르시오. 내 신께 돌아가 그대의 무죄와 축복을 간청할 것이니!’ 그러고 그녀의 발톱을 딱 내 가슴에 댔는데.”
“그래서? 그래서?”
“발톱이 내 가슴에 닿는 순간 깜짝 놀라서 발톱을 발가락 안으로 싹 숨기는 거야. 고양이는 필요할 때마다 발톱을 세울 수도 숨길 수도 있거든.”
“어머머! 그래서 상처가 심하게 난 거야?”
걱정하는 마릴린을 향해 자신의 가슴에 살짝 나 있는 상처를 보여주는 슬렌, 슬레인 자작의 수석지배인이 발로 차서 만든 상처가 어느 샌가 사랑의 표식이라도 된 듯 자랑스럽게 가슴을 쫙 폈다.
디테일이 살아 있고 날조된 근거까지 있는 슬렌의 말에 아직 마음은 소녀인 마릴린의 감성이 반응하였다.
“‘전 당신을 해칠 수 없어요! 그냥 저를 떠나세요.’ 딱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사랑하는 그대에게 살묘의 죄를 씌우려 했던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나의 진심을 보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내 몸에서 흐르는 붉은 피처럼 타오르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소. 내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남겨진 그대의 흔적을 징표 삼아 그대를 추억하는 한, 내 심장은 결코 멈추지 않고 그대를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변함없이 뛸 것이오. 하지만 나는 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이 땅에 머무르는 몸, 언제 신께서 나를 거둬 가실지 모르기에 돌아온다고 말할 수는 없소. 사랑하오. 그러니 나를 기다리지는 말아 주시오’ 이렇게.”
“하~~~아~~~~”
마릴린은 긴장감에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서? 그 고양이가 너를 놓아준 거야?”
“그러니깐 여기 있지. 마릴린 나 다시는 마릴린을 못 볼 뻔했어. 내 불타는 심장은 진심이었거든. 하지만 도련님과의 천륜도 저버릴 수 없었지. 도련님과 나의 사이는 하늘이 이어준 신께서 연결해주신 사이니깐.”
슬쩍 눈물까지 보이며 말하는 슬렌의 모습에 마릴린은 자신도 눈물 지으며 슬렌의 슬픔을 위로해 주었다.
후버가 수도관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지금 슬렌이 들려준 연애담에 어느새 말이 짧아진 슬렌의 말에도 신경을 쓰지 못한 채 푹 빠져 버린 것이다.
“넌 정말 후버 도련님을 특별하게 생각하는구나.”
“주인님이 나를 생각하시는 만큼이야 하겠어…….”
슬쩍 말을 흘리며 겸손의 모습을 보이는 슬렌의 모습은 마치 기사가 주군을 생각하는 애절함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쓸쓸함을 표현하는 듯했다.
“도련님은 이런 슬렌을 왜 그리 구박하시는지 언제든지 힘든 일 있으면 친누나라고 생각하고 말해. 오늘은 누나가 맛있는 거 해줄게.”
“응, 고마워. 마릴린 누나.”
마릴린의 위로는 그로부터 한동안 계속되었고 비통하다는 듯한 슬렌의 연기는 점차적으로 내면으로 숙성되어 가며 슬픔을 이겨내는 듯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슬렌의 사랑이야기는 마릴린에 의해 용사의 이야기로 각색되어 시녀들의 심금을 울리며 한동안 백작성의 시녀들에게 회자되면서 구전된 이야기의 원본으로 정식 역사서에 기록될 뻔하였지만, 당시 그 지방에는 독을 가지고 있는 개구리가 없다는 이유로 슬렌의 많은 증언과 일기가 그렇듯이 야사로서의 가치만 인정되었다.
*
*
*
백작의 집무실 앞에서 후버가 지배인에게 백작과 만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백작님. 후버 도련님이십니다.”
“들어오라 해라.”
“안녕하셨습니까? 백작님.”
“어서 오거라, 아들아.”
“잘 왔다. 후버.”
백작과 큐리오는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다.
백작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는 후버가 올린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보고서의 사본일 것이다.
“거참…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폭풍 속의 고요란 말이 지금 우리 영지에 딱 어울리는 말처럼 느껴지는구나.”
“저 역시 아버지의 생각과 같습니다. 슬레인 자작이 우리에게 하려 했던 모략을 거꾸로 당해버렸군요. 그나마 우리가 슬레인과 본격적으로 영지전이 붙었다면 적이라도 한정되어 있겠지만, 자작은 어쌔신 길드와 충돌만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했고 그에 비해 우리는 왕국의 병력 제한에 대한 법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습니다. 만약 영지전이 일어났다면 패배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쪽이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후버의 말이 맞다. 그가 어쌔신 길드와의 충돌에서 20명에 가까운 기사를 잃었지만 어쌔신 길드를 향해 떠난 병력은 기사의 수가 20명, 병사의 수는 50명씩 두 번에 나누어서 100명이 넘으니.”
“게다가 그것이 전력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작가에서 이 정도의 병력을 양성하려면 금전적인 소모가 엄청 났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슬레인 자작가의 자금력은 우리 영지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탄식과 감탄이 섞인 백작과 큐리오의 목소리. 평화가 길었다고 해서 전쟁의 두려움이 완전히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자신보다 강한 전력을 가진 영지와의 영지전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슬레인의 병력이 질적으로나 숫자로 보나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슬레인 자작이 무한대의 병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앞으로는 경제적인 부분에서 그를 압도할 수 있으면 다른 부분은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경제적이라고 하면… 무슨 소리인지 설명해주겠느냐? 큐리오.”
“우리 영지의 병사는 예비 병사를 포함하고 기사 전력까지 포함해도 500명이 넘지 않습니다. 이나마 100명의 예비 병사를 훈련시켜서 맞추어진 숫자이지요.”
“그렇지. 그들의 훈련은 잘 되어가고 있느냐?”
백작의 질문에 큐리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들어 후버와 함께 궁병들의 훈련을 시키는 재미에 푹 빠져 버린 큐리오였기에 그들의 훈련 상태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가 큐리오였다.
“그럭저럭 이제 활과 석궁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100명을 오직 궁병으로 양성한다는 계획에 마뜩찮은 감정을 느낀 백작이었지만 자신이 인지하기도 전에 영지의 분란의 싹을 해결하는 후버의 능력을 볼 때 이번에도 무슨 뜻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문제는 용병들입니다. 용병들은 장기 고용이 힘들 만큼 돈 먹는 괴물들입니다만 충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고 영지전에서의 승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돈만 있으면 영지 병력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용병들의 존재이니.”
“그럼 어찌해야 한다는 것이냐? 후버, 이번에도 좋은 방법이 있겠지? 미래의 총관도 백작가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는 것이잖아. 하하하.”
다소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큐리오가 농담을 던졌고 후버는 그런 큐리오의 농담을 미소로써 받아넘겼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슬레인 자작의 성격에 따라서 방법이 조금 달라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계속해서 너에게 휘둘리는 슬레인 자작이다. 그런 그를 변수로 둘 필요까지 있을까? 난 오히려 이번 기회에 너의 암살 사실과 그 증거를 밝히고 슬레인 자작가를 선제 공격하는 방법이 옳다고 생각한다.”
“후버, 나 역시 슬레인 자작이 용병을 모을 시간도 없이 공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백작과 큐리오의 말에 후버가 잠시 고민을 했다. 이들의 이런 급진적인 반응은 후버가 생각하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공격을 하자고 하면 이들이 말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한 전략으로 흐를 것이라 생각했지, 이런 급진적인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군.’
후버의 생각대로 요즘 영지의 궁병을 훈련시키면서 큐리오의 자신감이 커졌고 백작도 그런 큐리오를 밀어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기에 지지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물론 아버지와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정공법으로 빠르게 자작가를 압박하기 위해서는 병사의 소모가 심하고 우리 영지에 없는 용병 길드가 슬레인 자작가에 있기에 최후의 순간 그들이 성벽을 이용해 농성에 들어가면 공성을 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것은 후버가 옳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다가는 공격을 못해보고 방어만 해야 한다.”
백작은 큐리오에게 좀 더 힘을 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후버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자칫 슬레인 자작이 우리가 영지전을 선포함과 동시에 용병을 모집한다면 영지 병력의 주력이 용병을 상대하다 힘이 빠진 틈을 타 슬레인 자작의 주력 병력에 몰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 참! 방어도 공격도 쉽지가 않구나. 슬레인 자작의 방심을 유도하면서 먼저 영지전을 선포할 수도 없는 것이고 슬레인 자작이 병력을 모으고 용병을 모집해 공격하기를 기다릴 수도 없지 않느냐?”
탄식하듯이 읊조린 백작의 말에 후버와 큐리오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큐리오는 슬레인 자작을 공격할 방법을, 후버는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어떻게 큐리오에게서 자연스럽게 이끌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가볍게 큐리오에게 힌트를 먼저 주기로 했다.
“슬레인 자작의 방심을 유도하여 공격하게 한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최상이겠지. 하지만 후버야, 저들도 이제 병력이 서로 비슷한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방심을 하겠느냐? 소드 마스터나 대마도사가 없는 한 슬레인 자작은 공격을 위해 영지의 용병이란 용병은 다 끌어 모아서 공격할 것이다.”
큐리오의 말에 후버가 내심 반색을 했다.
“실리카겔!”
“실리카겔이라니, 그는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냐? 그저 슬렌의 목에 걸어둔 수정구의 통신 마법을 이용하여 네가 말한 것일 뿐.”
아직 슬렌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한 후버는 슬렌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슬렌은 그저 자신이 매달아둔 통신용 수정구를 이용해 말을 한 척을 하였다고 보고해 두었다.
백작과 큐리오 역시 슬렌이 영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카이브와 크롤라이드의 도움이라고 보고하자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실리카겔을 만들면 됩니다. 마법을 이용해서요.”
“그것이 가능한 것이냐? 아니, 가능하여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
백작의 음성에 놀라움이 묻어 나왔다.
백작은 실리카겔을 만든다는 말에 키메라와 같은 흑마법 계열의 인체 연성 마법을 생각한 것이다.
후버는 그러한 백작의 오해를 바로잡아 줄 필요를 느꼈다.
“키메라와 같은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큐리오가 기초적으로 제공해준 아이디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가 생각했던 계책을 백작과 큐리오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슬레인 자작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마도사가 필요하다면 까짓것 마도사가 되어주면 된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찬성이다.”
방에 들어올 때는 후버 혼자의 생각이었지만 후버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반대를 하던 백작과 큐리오도 그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 영지에 마법 물품 상인이 온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그것은 어찌 알았느냐?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이라도 있느냐?”
“총관이 말해 주었습니다. 제가 마법을 연구하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미리 주문을 하라는 뜻으로 저에게도 알려 왔습니다.”
“흠… 혹시 구매해야 할 마법 물품이 비싸기에 나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냐? 큐리오나 후버, 너희 둘은 그런 허가는 받을 필요가 없다. 알아서 잘 조절을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문제는 세실리아지…….”
“하하하. 요즘도 누님이 아버지를 괴롭히나보군요.”
“뭐랄까,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은근히 찔러보는데 정말 미치겠더구나.”
“말도 마라. 나는 크롤라이드 경에게 갑옷을 빼앗겼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하루 종일 맞은 적도 있다. 아버지, 빨리 누나를 시집보내시지요.”
“나도 그러고 싶다만… 어쩌다 보니 너희 누나의 사교계 소문이 그리 좋지 않더구나. 충분히 입을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크흠.”
요즘 들어 백작은 세실리아를 잘못 키운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 왔다.
조금 더 오냐오냐 하면서 막 키우면 될 것을 괜한 후버와 큐리오의 후계 구도 갈등을 예상하고 너무 바르게 키워 버렸다.
옆 영지의 영애들은 상의 없이 5,000골드 10,000골드짜리 드레스를 척척 아버지 모르게 질러 버려서, 선조치 후보고로 총관들을 질리게 한다는데 세실리아는 지킬 것은 지키면서 백작의 두통을 하루하루 악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런 생각을 혼자 집무실에서 읊조리기만 해도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줄 도구가 몇 개월째 집무실에 잠복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마법 물품 상단과의 대화를 통해서요.”
“아니다. 아직은 두통을 견딜 수 있다. 최소한 슬레인 자작의 발톱을 뽑아 버릴 때까지는 자중해야 한다.”
“나 역시 누님의 구타, 흠흠! 그 정도는 아직 견딜 만하다. 잘 피해 다니면 되는 일에 3만 골드라니.”
“영지의 돈은 한 푼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마법 물품 상단과 적절한 계약을 통해 얻어내려는 것이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자신감 있는 말투에 백작이 방법을 물었지만 후버는 그저 성공하면 보고서 형태로 보고를 하겠다는 말로 백작에게 대답을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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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곳이 백작령의 성인가? 칼,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글쎄. 다른 백작성 보다는 규모가 다소 작아 보이는군.”
컨텍트 상단의 칼과 세이건은 어느새 눈에 들어온 백작성을 바라보며 백작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말로 듣기로는 백작 가문은 꽤나 검소한 가문이고 실리를 추구한다고 알려졌지만 그런 소문보다는 한번 겪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멀리까지 상단을 끌고 와야 될 이유가 있을까? 백작성의 아카이브 님이 마법 연구에 큰 뜻이 없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일이잖아.”
“잘 생각해봐. 칼, 얼마 전에 저 백작가에서 기백 개의 수정구를 주문하고 그 외의 마법 세공에 필요한 재료를 다량으로 사갔어. 여러 상단에 분할해서 눈치채지 못 한 상단도 있겠지만 단 한 번에 주문한 것치고는 너무 많은 양이었지. 그것도 최상급으로 그런데 몇 개월 전에는…….”
세이건의 말을 칼이 받아주었다.
“그래, 세이건. 백작가는 하급 수정구와 중급 수정구를 수백 개 사갔지. 그때는 우리 컨텍트 상단만을 이용했고. 그런데 우리 상단 전체 거래량으로 생각하면 그리 큰 금액도 아니고 대대로 백작가는 우리 상단만을 이용한 고객이야. 근데 굳이 이곳에 올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깐 더 와봐야지. 지난 백여 년간 백작가는 마법 물품의 구매 명단 리스트에 그다지 많이 오르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도 중요 거래 대상자가 아닌 귀족 리스트에만 적어두었지. 그런데 그 백작가가 갑자기 마법 물품의 주문을 늘리고 편리하게 구입하기 보다는 여러 상단을 통해서 분할 구매를 한단 말이지.”
그 말에 칼이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밝은 얼굴이 되었다.
“뭐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수정구라도 하나 더 팔고 돌아가자고 세이건.”
“좋지. 아주 일 년 치를 팔고 가자고, 칼.”
둘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백작가의 성문 앞에 도착했다.
미리 백작성에 기별을 넣은 덕인지 백작가의 기사는 ‘컨텍트 상회의 상단주’라는 표식과 부상단주라는 표식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흠… 이거 짐 검사를 안 하는걸 알면서도 괜히 이렇게 긴장되기는 처음이구먼.”
“나도 그래, 세이건. 기사들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던걸. 게다가 콩고물을 바라는 병사가 한 명도 없다니 이건 괴상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세이건 상단주님과 칼 부상단주님 되십니까?”
집사의 정중한 물음에 칼이 대표로 대답하였다.
“제가 부상단주 칼이고 이쪽이 상단주 세이건입니다.”
“레빌리온 백작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루 여독을 푸신 후에 후버 도련님을 만나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만나시겠습니까?”
“후버 도련님이라뇨? 총관님이 아니시고요?”
“예. 이번 마법 물품 상단은 총관이 아닌 후버 님께서 주관하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전달 받지 못하셨는지요?”
“아닙니다. 제가 전달 받았는데 깜빡했군요! 죄송합니다. 도련님만 괜찮으시다면 백작가에 객으로서 폐를 끼치기 보단 오늘 뵙고 싶습니다.”
세이건은 사실 그런 내용을 들은 기억이 없지만 세세한 것을 따질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지속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귀족 자제들과 안면을 튼다면 상단으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우리를 만나는 거라면?’
큐리오가 아닌 차남인 후버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차남이 나오면 장남보다는 일종의 뒷돈을 원하는 경우가 많기에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느 정도라면 용인해줄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후버 도련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탁상 앞에 있는 종을 흔드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예.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불안한 생각이 드니 지나치게 정중한 노 지배인의 모습도 왠지 마음에 걸렸다.
왠지 이 후버라는 도련님이 로비 정도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단 전체를 바치기를 바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병사들이 건드리지 않은 것은 백작가의 재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어린 도련님들의 치기지만 가끔 이런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고 상단을 줄 리가 없지만 껄끄러워지거나 거래가 단절되는 경우가 있기에 세이건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레빌리온 백작가의 차남 후버라고 합니다. 총관에게 전해 듣기로는 이쪽이 세이건 님이시고 이쪽이 칼 님이시겠군요.”
“예, 후버 도련님.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뭐 영광이실 것까지야. 앞으로 자주자주 뵙게 되실 건데요, 하하하.”
지나치게 쾌활한 후버의 모습에 둘은 어안이 벙벙했다.
보통 차남은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 자신들을 보고 기고만장해져서 무리한 요구를 하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후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항상 저희 컨텍트 상단을 이용해 주시는데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지금까지 저희 영지가 좀 컨텍트 상단과 거래가 소원하기는 했지요. 이제 초대 백작님의 위명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력을 할 것이니 잘 봐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같은 상인이 어찌 백작가를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백작가가 원하는 대로 되길 바랍니다.”
예의상 오가는 간단한 말이지만 첫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설마 수정구 몇 개 팔려고 오신 것은 아닐 테고 먼 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생각과 다르면 수정구나 팔고 돌아가자던 칼은 그 말에 움찔했지만 이내 페이스를 회복하였다.
세이건 역시 이렇게 직접적으로 용건을 물어 볼 줄은 몰랐기에 순간 뭐라 대답할지 막막했지만 오랜 경험을 살려서 금세 신색을 회복했다.
“저희는 그저 백작 가문께 오랜 동안 저희 상단의 이용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찾아 뵌 것입니다. 바쁘신 도련님을 귀찮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음… 이거… 저는 다른 이유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실망스럽군요.”
혹시나 이들이 갑자기 늘어난 마법 재료의 구입을 이유로 방문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한 후버는 진심으로 실망했다.
만약 그렇다면 충분히 말이 통하는 상단이기 때문에 편하게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의사 타진은 해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른 이유라 하시면?”
“저희 영지가 궁벽한 편은 아닙니다만 제가 요즘 돈이 좀 필요해서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래서 좋은 사업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후버의 말에 칼과 세이건의 인상이 흙빛으로 바뀌었다.
예의를 차리기에 괜찮은 소영주인 줄 알았더니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차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소문에 후버라는 차남의 성격이 변태라더니…….
‘여기서 빨리 나가는 게 상책이겠군.’
괜한 존대를 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둘의 머리에 동시에 스쳤다.
안심을 하고 편하게 대했다가는 귀족 모독죄를 물을지도 모르는 일, 후버가 편하게 대할수록 둘의 긴장은 높아져만 갔다.
“저희는 그런 능력 있는 거대 상단이 아니기에.”
고작 수정구 몇 개 더 팔자고 상단을 망종의 아가리에 처넣을 수는 없었다. 이런 관계는 빨리 끊을수록 이득이다.
“허허, 성급하시긴 공짜로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권위 있는 귀족께서 일개 상인에게 그냥 자금을 융통해 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백작가에서 필요로 하는 규모의 자금을 아직 다루지 못합니다.”
‘공짜는 아니겠지. 어디 쓸데없는 차용증이나 몇 장 써주고 나중에 귀족 모독죄 나불거리려는 거겠지, 젠장!’
“거참 들어도 보지 않고 거절부터 하시니.”
딸랑딸랑.
후버가 책상 위에 있던 종을 두어 번 흔들자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들어와서 후버 옆에 가만히 섰다.
“집사. 방의 커튼을 다 쳐주세요.”
그 말에 집사가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시녀들을 대동하고 응접실의 모든 창문에 커튼을 쳐서 실내를 어둡게 했다.
“수고했어요.”
“그런데 커튼은 어째서 치신 거신지요?”
후버의 감사의 인사에 대해 무언의 인사로 답한 집사가 나가자, 어두운 방에서 불안함을 느낀 둘을 대표해서 세이건이 떨리는 목소리로 후버에게 물었다.
‘기사가 덮치는데 창문으로 도망가기 힘들게 만들려는 걸까?’
“듣지 않으니 보여줘야지요.”
그와 동시에 수정구를 꺼내서는 재생의 주문을 외우고 마나를 불어넣는 후버.
응접실 한쪽 벽에 드레스 차림의 세실리아와 실험에 몰두하며 뭔가 학구적인 대화를 나누는 크롤라이드와 아카이브가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수정구가 비치는 화면 하단에 표기된 ‘컨텍트 상회’라는 다섯 글자였다.
“도… 도련님 이게 무슨.”
“5분간만 보십시오. 아무 말씀하지 마시고.”
5분간 컨텍트 상회라고 쓰여 있던 부분에 여러가지 글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신뢰의 상회, 서클별 신뢰의 후불제, 빠른 배송, 저렴한 가격, 생산물 책임 보험 가입, 최고가 매입 최저가 판매, 200년 전통의 컨텍트 상회.
S/S 신상 통짜 미스릴과 아만티움 2중 구조의 드워프제 맞춤 블링블링 안티 매직 풀 플레이트 아머 세트 핫 핑크를 마지막으로 수정구의 화면이 꺼졌다.
“도련님 저것은 무슨 의미이신지?”
“무례를 용서하십쇼. 지금부터 잠시 동안 질문은 제가 하겠습니다.”
“예. 그러시지요.”
“두 분이서 제가 하는 질문에 간단히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무언의 긍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후버는 천천히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영상에서 나온 마법사의 수는?”
“두 명.”
“세 명.”
“두 명입니다. 한 명은 제 누님이신 세실리아 누님이시죠. 마법사가 아니고 어떤 마법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두 번째 세실리아 누님이 입으신 드레스 색상은?”
“…….”
“마법사들이 다루던 물체는?”
“금속.”
“통…나무?”
“마법사들의 이름은?”
“…….”
“마법사가 외친 마법명은?”
“…….”
“그럼 마지막 질문 드리겠습니다. 배너 아니 수정구에 비친 영상에서 보인 글은?”
“신뢰의 상회, 서클별 신뢰의 후불제, 빠른 배송, 저렴한 가격, 생산물 책임보험 가입, 최고가 매입 최저가 판매, 200년 전통의 컨텍트 상회라고. 핫핑크. 미스릴 아만티움 뒤는 기억 안 납니다만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두 명이 합창하듯이 외쳤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실 겁니다. 이 수정구의 영상은 처음 보는 것이다. 하지만 위 문구는 우리 상회가 내세우는 문구, 상단의 상단주와 부상단주인 자신들이 모를 리는 없다. 그래서 평소에 외운 것을 기억한 것뿐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아카이브 경 혹은 크롤라이드 경을 모르시는 분은? 러스트 마법이 뭔지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저희도 마법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팔기에 마법에 대해서는 웬만한 마법사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롤라이드 경 같은 경우는 제 집무실에 초상화가 걸려 있는 마법사 중에 한 분, 제가 못 알아보았을 리가…….”
세이건의 말대로 마법 재료를 파는 상인이라면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하는 대마법사 중에 한 명이 바로 크롤라이드였다.
대마도사인만큼 마탑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어 원하는 모든 실험 물품을 구매할 수 있는 마법 재료 상단이 해바라기라면 마도사는 떠오르지 않고 애타게 하는 태양, 그런 정도의 존재였다.
한 명의 마도사가 사용하는 재료의 양은 그 양과 단가 또한 다른 일반 마법사 수십 명을 합친 것보다 많기에 절대 못 알아 볼 리가 없다. 최소한 세이건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영상을 다시 틀어 보겠습니다.”
중반부터 재생된 영상에는 분명히 크롤라이드가 영창하는 장면이 있었다.
“당연합니다. 정적인 마법사의 실험 장면과 다르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광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 영상을 저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크롤라이드 님과 아카이브 경은 끊임없이 이러한 실험 동영상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을 이용한 줌아웃과 줌인 기능을 보여주는 후버의 동작에 세이건과 칼은 놀라서 자리에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무례를, 용서하시길.”
“아닙니다. 직접 해보시지요.”
그 말에 세이건이 나서서 몇 번의 줌인과 줌아웃을 하며 동영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줌인과 줌아웃이 되는 촬영 수정구는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재생 수정구.
“제가 팔고 싶은 것은 수정구에 광고를 넣는 기술과 줌인과 줌아웃이 가능한 수정구를 만드는 방법의 배타적 권리입니다.”
“하지만 광고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구매로 이어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탐나는 기술이긴 하지만 구매에는 높은 가격을 처 드릴 수는 없습니다.”
“역시 상단주님답군요. 눈을 현혹시키는 것보다는 실리를 찾으시는군요. 하지만 저는 권리라고 했지, 기술을 판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무례하였다면 죄송합니다. 천성이 상인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숨과 함께 변명의 말을 내뱉는 세이건의 말에 후버는 이해한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그런 만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더 좋은 조건에 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광고 부분을 눌러 주시는 수고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예. 그럼 사양하지 않고.”
세이건이 광고 부분을 누르자 마그네슘 철 등등의 잡다한 마법 재료와 그 가격이 적혀 있는 화면으로 화면이 변환되었다.
“이것은…….”
“가격은 아직 제가 정확히 모르기에 그냥 1골드의 균일가로 적어 두었습니다. 상회에서는 얼마든지 가격과 품목을 변경할 수 있으며 이 수정구에서 실시한 마법 실험에 필요한 물품을 기본으로 지정해 두었습니다.”
매끄럽던 세이건의 혀가 홀드 마법에 걸린 듯이 굳어 버렸다.
이건 예상치 못한 부분. 실험을 보고 필요한 도구를 바로 구매한다.
뚫어지게 5분간 화면을 바라보던 세이건이 한 상품을 클릭하고는 본능에 이끌리듯이 주문 버튼을 누르고 결재 버튼까지 누르자 후버의 품 안에서 지르르 진동과 함께 반짝반짝하는 불빛이 빛났다.
“후버 님, 그것은? 무엇입니까?”
“뭐, 이미 짐작을 하셨을 것입니다만.”
세이건과 칼의 시선을 느끼고는 느릿하게 수정구를 꺼내 화면을 공중에 출력하였다.
“이거 상단주님이 저에게 마법 실험 물품을 주문하시다니 뭔가 상황이 바뀐 것 같지 않습니까? 하하하.”
“이… 이건 혁명이야.”
“하하하! 칼 님 일단 진정하시지요. 아직 저와 컨텍트 상회는 해야 될 말이 많지 않습니까?”
후버가 깜짝 놀란 칼의 양어깨를 잡아 눌러 자리에 앉혔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지만 이 한 번의 동작이 둘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간단한 물리력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지할 수 있는 사이, 평등했던 관계를 나타내던 균형의 추는 한 방향으로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조건을 말씀해주십쇼. 저희가 수용 가능한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흠… 저는 바라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일단 뭐든지 말씀해주십쇼. 최선들 다해 후버 도련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래도 서로 이 시스템에 대해서 이해가 다를 수가 있으니 먼저 제가 생각한 활용을 말씀드리지요.”
“예. 경청하겠습니다.”
양손을 무릎에 올리고는 정자세를 취하는 세이건과 칼, 호기심에 방문한 레빌리온 가에서 생각치도 못한 보물을 건졌다.
아니, 건질 수도 있었다. 앞으로 그것이 보물이 될지 아니면 경쟁 상단에 넘어가서 재앙이 될지는 자신들이 어떻게 후버를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단 구매 기능은 보셨고 지금은 제가 아는 마법 물품이 없어 방치해 두었지만 원하는 마법 도구의 검색 기능 정렬, 그리고 상회 메뉴로는 최근 다량 구매되는 물품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실험 동영상은 수정구의 통신 기능을 이용하여 업로드와 다운로드가 가능합니다.”
“예.”
“그리고 수정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은 개당 60골드, 상회에서 사용하는 수정구는 개당 500골드의 비용이 필요합니다. 이건 마법사들의 공임비를 포함한 가격입니다. 그 외에도 신호를 장거리로 연결해주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도 있지만 어지간한 마탑 주변에는 컨텍트 상회의 지점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마법사에게 제작 방법을 알려줘도 괜찮다는 것입니까?”
“마탑 차원에서 보호해 줄 것입니다. 마탑끼리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이니 크롤라이드 님께서 속한 마탑의 저작권을 다른 마탑에서 마음대로 도용하지는 않겠지만, 제작을 하는 마법사는 상회에서 믿을 수 있는 분에게 제작을 맡겨야겠죠.”
“그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 기존의 마법 실험품 주문 방식은 개별 마법사가 속한 마탑에서 재료의 주문 요청을 하면, 마탑 자체의 재고품으로 수요를 충족시킨 후 일정 기간 동안 모인 물품을 한 번에 상단으로 발주시키는 방법을 취했었습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까닭인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번엔 칼이 질문을 하였다. 컨텍트 상단에서 장기적인 방향은 세이건의 지시로 이루어지지만 실제적인 운용과 재고 관리를 맡는 것은 칼이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칼이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상단에서는 한 번에 많은 물품을 구매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상단의 현금이란 현금을 모두 쥐어 짜이게 됩니다. 물론 마탑이 구매를 취소하는 경우는 없지만 이러한 특성은 마법 재료 상단을 다른 분야까지 도약을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언제 현금이 모자랄지 알 수 없으니까요.”
‘개별 주문!’
실험을 보는 즉시 그 자리에서 충동적으로 주문을 한다! 마법사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것이다.
흥미가 있다면 주문을 할 것이고 하루에도 수개의 마법 실험이 쏟아져 나오는 마탑의 성격을 생각하면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최소한 물품의 주문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일은 과거보다 적을 것이다.
“그리고 크롤라이드 님이 속한 마탑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마법 실험의 수정구를 컨텍트 상회에 독점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독.점.공.급.”
“어… 방금 저 고양이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기분 탓이겠죠. 다시 계약에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세이건은 완전히 무장 해제되어 버렸다. 최소한 남아 있던 경계심이라던가. 이해득실을 따지는 회로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건 무조건적으로 잡아야 한다. 경쟁 상단에 들어가게 되면 그 상단이 대륙 최고의 마법 재료 상단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제 조건을 말하지요.”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후버 님.”
어느샌가 도련님이란 호칭은 빠져 버렸다. 직감적으로 현재의 관계는 레빌리온가와 상관없는 후버가 만든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게 귀족가의 저력이라는 건가?’
마법적인 부분에서는 몰락했다고 해도 좋을 레빌리온 백작가의 변화는 후버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아니, 확신이 들었다. 후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
“일단 오늘 협상의 조건과 대상 결과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가 따로 적당한 이야기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
“마탑의 3서클 이상 마법사들의 수정구를 모두 무상으로 교체해 줘야 합니다. 새로운 수정구로 5년 안에 고서클부터 저서클로 교체를 완료해 주셔야 합니다. 새로운 3서클 마법사가 마탑에 등록하면 우선적으로 공급해 줘야 합니다.”
수용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 독점을 위한 희생은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모든 비용을 제외한 이익의 45%는 마탑에 귀속되고 5%는 백작가에 귀속됩니다. 그중 1%는 저의 몫, 물품 가격의 상한선은 대륙 전체 마법 재료 상단의 10% 수준, 특허권의 사용은 마법 재료 물품 판매만으로 한정,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가장 힘든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만…….”
이 부분에서 후버는 쾌활하던 모습이 아닌 미안함과 시원섭섭함, 찹찹한 감정 그리고 여러 가지 절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표정에 나타났고 그런 그의 표정에 세이건과 칼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무리한 요구가 될 것이다.
게다가 뒤쪽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내는 모습에 긴장감은 배가 됐다. 저곳에 빼곡히 적힌 물품을 요구한다면…….
“염치없습니다만 아마 두 분도 아실 겁니다. 격월간 체인 아머 최신호입니다.”
의아한 표정이 두 사람에게 감돌았다. 갑자기 저것은 왜 꺼내는 것일까?
“S/S 신상 통짜 미스릴과 아만티움 2중 구조의 드워프제 맞춤 블링블링 안티 매직 풀 플레이트 아머 세트 핫 핑크, 진보한 디자인 50세트 한정 10년 무상할부 3만 5천 골드의 가격, 이것을 구입해주시는 것이 계약금 입니다.”
“흐음… 하지만 저희 상단에서도 이 제품을 구매하기에는 다소 부담이…….”
“저희 레빌리온 백작가도 그렇게 염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연대보증의 최종 귀책은 저희가 맡고 상단은 10년 할부의 1차 보증인으로, 그리고 이익 분배에서의 원가 상정 비용에 위 금액 역시 분할해서 포함시킬 것입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상단으로선 전혀 손해 보는 것이 없습니다만 왜 그런 조건을 거시는지?”
그 말에 후버가 칼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돈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칼이 대화를 주도한다. 확실히 역사가 깊은 만큼 역할 분담이 잘된 상단이었고 그런 만큼 믿을 수 있었다.
“그냥 받기에는 염치가 없는 것과 동시에 레빌리온 백작가가 자금이 부족하여 곤란을 격고 있다는 소문을 아주 은밀하게 흘려주시면 됩니다.”
“혹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당장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 정리하자면 저희가 원하는 것은 풀 플레이트 아머 그리고 소문의 출처로 신뢰 있는 제3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아니, 사실 너무나 저희에게 유리한 조건이군요.”
“그리고 마지막…….”
“더 많은 조건을 거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시녀 중에 마릴린이란 시녀가 있습니다. 그녀를 상단의 일원으로 취직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요직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리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상단주님과 부상단주님께서 테스트를 해보시고 거기에 맞는 자리를 주시면 됩니다.”
“어떤 자리든지 말씀이십니까?”
특별대우가 필요 없다는 후버의 말에 세이건이 반문했다.
당연히 자신의 상단의 수익에 대해 감시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진심이 느껴진 것이다.
“마릴린은 앞으로 저의 백작가에서 크게 쓸 인물입니다. 그런 만큼 분수에 맞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은 컨텍트 상회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렇다면야. 다른 조건은 없으신지요?”
“없습니다.”
“후버 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 후 후버와 세이건 칼은 세부 상황에 대해서 협상을 하여 계약서를 완성했다.
실무자가 아닌 후버가 직접 세부 협상에 참여한다는 것에 잠시 동안 당황했지만 금방 적응하여 서로가 유리한 협상을 체결하고는 만족스럽게 헤어질 수 있었다.
세이건은 자신이 가져온 마법 물품의 마차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남겨 두고는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상단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앞으로 할 것이 많은 것이다.
“결국 마릴린을 이렇게 보내게 되는구나. 왠지 아쉬운데.”
시원섭섭한 목소리로 마릴린을 떠나보내는 후버, 아쉬움 때문일까?
그들이 마릴린을 당장 데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그들을 배웅했다.
계약의 시작부터 조건을 지키지 않은 컨텍트 상단이지만 이 정도는 이해하기로 했다.
후버도 마릴린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너무나도 아쉬 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