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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렌, 보헴 자작가로 (8/37)
  • 슬렌, 보헴 자작가로

    “슬렌, 이리와.”

    후버의 외침에 슬렌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후버에게 몸을 비벼댔다.

    요즘 들어 부쩍 스킨십을 자주하는 슬렌을 볼 때마다 이 녀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지만 후버는 분명히 달릴 게 제대로 달린 수컷이라는 것만 확인할 뿐이다.

    “슬렌.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뭔데요?”

    “네가 영지 밖으로 나가서 보헴 자작가를 관찰해 줘야겠다. 영지의 병력 상황이나 물자 등등 전쟁과 관련된 부분을 빠진 없이 체크하도록.”

    “이상하다. 나 요즘 들어 주인님과 떨어져 있기가 싫어요. 나중에 하면 안 돼요?”

    “시끄러! 무한 따까리로 내 옆에 있던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충성!”

    휙 사라지는 슬렌에게 후버가 주머니를 하나 던져줬다.

    마릴린이 손봐서 슬렌이 맬 수 있게 만든 공간 주머니다.

    “식량이다. 술도 넣어두고 나머지 필요한 것들 중 돈만 빼두고 넣어 뒀으니 잘 쓰고 꼭 반납해라.”

    “헤헤. 주인님 복리후생이 아주 확실하십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확실하게 하고 와. 일반 정보는 내가 확인할 수 있으니깐 가능하면 고급 정보로 하고.”

    “주인 성격이 좀 바뀌는 것 같아. 마릴린 누나 앞에서는 폼 잡으시면서.”

    “이게 원래 내 모습이야.”

    “응. 그럼 다녀올게, 주인도 잘 있어~~~요.”

    그 말과 함께 진짜로 슬렌이 떠나갔다.

    마릴린은 공부 때문에 바쁘고 슬렌까지 떠났기에 조금은 외롭게 될 것이지만 앞으로 조련할 영지 병사들을 생각하면 심심하지는 않을 듯했다.

    *

    *

    *

    자작나무 벽난로에서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훈훈하게 불길이 타오르는 슬레인 자작의 집무실이었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5만 골드라니 이 개자식들을 그냥!”

    “고정하십시오, 자작님. 설마 크롤라이드가 그곳에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 것 아닙니까?”

    “그걸 조사하는 게 카드뮴 네가 하는 일이 아니야, 이 새끼야!”

    자작의 노성에 몸을 떠는 척했지만 사실 카드뮴은 속으로 자작에게 쌍욕을 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그 정도 대마법사의 이동은 비밀에 붙여져 있습니다.”

    “그딴 비밀이 고작 500골드에 팔리는 게 말이나 돼? 돈 주고 살 수 있는 정보도 요즘엔 비밀이라고 하나보지?”

    자작의 비꼼에 고개 숙인 카드뮴의 인상이 더 썩어 들어갔지만 뒤통수만 보이는 자작에게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할 거야?”

    “그건 5만 골드를 주시는…….”

    카드뮴의 대답에 분노한 자작이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을 카드뮴의 머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크윽! 고정하십쇼. 자작님.”

    “자작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밖에서 자작의 가신 중 한 명인 로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작은 지금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구석에서 손수건으로 피를 닦고 있는 카드뮴과 대화하는 것 보다는 나을 듯했다.

    “들어와.”

    “감사합니다. 자작님 이번 일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 말해봐.”

    “아시다시피 제가 정보 길드 쪽에는 조금 연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뜸을 들여? 그냥 짧게 말해.”

    심기가 좋지 않은 자작을 한번 바라본 로비스는 여전히 피를 닦고 있는 카드뮴을 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영지 가신 중 두 번째의 서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그 서열이 바뀔 차례가 된 것이다.

    “흠흠, 죄송합니다. 자작님, 정보 길드를 통해 어제 하나의 정보가 들어왔는데 그게 어쌔신 길드에서 죽었다고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한 어쌔신이 정보 길드에 자신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긴 것입니다.”

    “뭐? 분명히 죽었다고 그 대리인인가 뭔가 하는 놈이 길길이 날뛰면서 7만 골드를 달라고 지랄하던 걸 깎고 깎아서 5만 골드로 했는데 그놈이 살아 있다고?”

    자작은 이를 빠드득 갈아 붙였다.

    죽어버린 어쌔신이 상급 어쌔신이라며 그들이 잘못된 정보로 죽었으니 그들이 살아 있으면 수행할 수 있는 의뢰금을 달라고 계약서를 들이밀며 강짜를 부리던 게 어쌔신 길드였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다니.

    “예. 살아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현재 어쌔신 길드에서 그를 죽이기 위해 다른 어쌔신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를!”

    “일단 이 서류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로비스가 내민 서류는 3장 가량의 짧은 보고서로 살아 도망간 어쌔신이 팔아넘긴 자료였다.

    애초에 자신이 어쌔신 길드에서 버린 패라는 내용의 보고서는 구체적인 사실과 함께 자작 자신의 의뢰 내용이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의뢰인의 이름만 없을 뿐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어쌔신이 살아서 도망간 것인가 아닌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청부한 사실이 길드 내부에서 외부로 센 것이기에 이것만으로도 어쌔신 길드에 항의할 명분은 충분했다.

    “그럼 이 새끼들이 처음부터 돈을 노리고 수작질을 부린 거란 말이지.”

    “예, 자작님. 애초부터 성공할 생각도 없었고 크롤라이드가 백작성에 있다는 정보 역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그런데 이런 정보를 그냥 주지는 않았을 텐데?”

    “예. 사실 1,000골드 정도를 지불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뭐? 1000골드? 이딴 종이 쪼가리에?”

    자작의 반응에 로비스는 자작의 한심한 수준을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었다.

    이걸 기반으로 다시 협상을 한다면 못해도 만 골드… 아니, 아예 위약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가치를 못 알아보는 것이다.

    “백작가로 가는 소문도 차단해야 하기에 이 정도 금액이었습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으시다면 100골드만 지불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딴 개소리를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디서 기어오르고 있어?”

    이번엔 바닥에 약간의 와인이 담겨져 있는 와인 병이 날아갔다.

    다혈질인 자작에게는 흔한 일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 더러운 일이었다.

    “자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집사의 목소리.

    “케인즈 님입니다.”

    순간 자작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근 1주일간 자작의 스트레스 꺼리인 어쌔신 길드의 대리인이 온 것이다.

    “들어오라 그래.”

    “다시 뵙습니다. 자작님.”

    “흥 빌어먹을 놈! 읽어봐라.”

    자작은 자신이 읽던 종이를 케인즈에게 던지듯이 넘겨주었다.

    날아오던 종이가 힘을 잃고 땅에 떨어져 카드뮴의 머리에 부딪혀 깨진 와인이 종이에 흡수되었지만, 대충 겉면만 털은 케인즈는 종이를 주워서 천천히 읽어 보았다.

    “어제 분명히 오늘 5만 골드를 주시기로 하셨는데 고작 주시는 게 근거 하나 없는 종이쪼가리입니까?”

    차가운 케인즈의 말에 자작은 또다시 분노가 솟구치려는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대리인 따위야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사 둘이면 처치할 수 있지만 일단 어떤 소리를 하는지 들어 보기로 했다.

    “꽤나 자세히 적혀 있군요. 하지만 자작님은 당연히 아시는 사항일 뿐, 저희 길드 내부의 것이란 증거는 하나도 없군요. 괜히 보상금을 좀 더 아껴 보시려는 것 같은데, 괜히 이런 종이를 만들었다가 유출되면 자작님만 곤란해지시는 것 아닙니까? 여전히 정보를 다룰 줄 모르시는군요.”

    명백한 비웃음을 날리는 케인즈의 모습에 자작의 인내심은 한계를 가뿐히 넘는 분노가 치솟았다.

    “뭐 이런 개자식들이! 호위병 당장 저 새끼 목을 베어 버려!”

    그 말과 함께 자작 자신도 한쪽 벽에 장식용으로 전시되어 있던 검을 빼내서는 케인즈를 향해 휘둘렀다.

    어설픈 움직임이었지만 대리인은 어쌔신처럼 전투를 담당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대리인인 만큼 좁은 공간에서 휘두르는 자작의 검은 케인즈의 복부를 베고 그런 자작을 말리기 위해서 황급히 움직였던 케인즈의 옆에 있는 카드뮴의 허벅지까지 베어 버렸다.

    “크윽! 자작. 내가 여기 들어온 것을 길드에서도 모르지 않는다.”

    “흥! 눈앞에 증거도 보지 않는 놈들이랑 할 말 따위는 없다. 나 역시 갑자기 어쌔신 놈이 나타나서 네놈을 죽여 버렸다고 하면 될 일. 어쌔신 길드 따위 쓸어버리면 그만이지.”

    “자작님. 그것보다는 이걸 이용해서 어쌔신 길드와 협상을 해야 합니다. 케인즈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깜짝 놀란 카드뮴이 황급히 자작을 말리려고 했지만 어쌔신 길드의 대리인이라고 온 놈의 태도와 어쌔신 길드에 쌓인 것이 많은 자작은 대리인 놈이라도 죽여야지 자신의 화가 풀릴 것 같았다.

    “뭐 인마? 난 자작이야! 평민 새끼 따위가 저딴 태도를 하는데 나보고 참으라고 하는 거냐? 에잇!”

    기합성과 함께 자작의 검이 케인즈의 목을 베어 가면서 케인즈의 목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검술 수련을 그저 운동 삼아, 그것도 가끔씩 하던 자작이 한 번에 사람의 목을 벨 수 있는 기술과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케인즈가 목숨을 잃기에는 충분했다.

    “이런 개자식! 당장 이 시체를 치워버리고 도망간 어쌔신을 잡아올 기사들을 파견해라. 내일까지 피 냄새가 안 나게 깨끗하게 치워라.”

    “옙! 자작님.”

    “그리고 너 로비스, 내일부터는 네가 영지 가신 중 일인자다.”

    그 말에 카드뮴의 눈이 번쩍 뜨이며 허벅지를 지혈하던 것도 잊고는 입을 벌린 채 자작을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뭘 그리 뻔히 처다 보는 거냐? 네가 영지에 끼친 손해를 생각해봐. 그나마 로비스가 정보를 물어오지 않았다면 5만 골드를 다 내줘야 됐겠지. 네놈 따위에겐 포션도 아깝다.”

    “저는 수십 년간 자작님의 곁을 보필하여…….”

    그 후로도 주저리주저리 카드뮴의 말은 계속되었지만 자작은 시체를 치우던 한 병사를 부르고는 말했다.

    “저기 있는 카드뮴도 같이 치워라. 하지만 군용으로 비축한 포션은 단 한 병도 내주지 마라.”

    자작의 매정한 명령에 그를 경쟁 상대로 생각하던 로비스마저 인상이 굳어졌다.

    자작이 평민이나 다름없는 몰락 귀족인 자신들을 어찌 생각하는지 짐작은 했지만, 최소한 영지 가신 중 1~2위를 다투는 자신들은 일반 몰락 귀족 출신의 영지 행정가들과는 다른 대우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고위 가신이었던 카드뮴이 영지전을 대비해 포션을 비축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욱신거리는 다리에 포션 한 병 못 바르는 신세가 된 것이다.

    “예, 영주님.”

    “시체는 조용히 처리하도록 해라.”

    “카드뮴이 말했지만 어쌔신 길드와의 충돌이 지금으로서는 좋지 않습니다.”

    “닥쳐라! 너도 카드뮴 꼴이 되고 싶은 것이냐? 그러고 보니 병사의 훈련 중에 일부는 로이스 너의 몫이었지?”

    “예. 2병사단과 3기사단의 물자와 행정 업무를 제가 맡았습니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충실하게 대답하는 로이스였다.

    괜한 꼬투리가 잡히면 흥분한 상태의 자작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럼 이번에 너의 자질을 시험해보겠다. 카드뮴은 못하겠다고 한 것을 네가 성취해낸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영주님.”

    로이스는 행정관, 그저 보급과 훈련 일정에 대해서 타 부대와 겹치는 것을 조율하는 정도이지 자신들이 직접 훈련시키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 증거를 가지고 어쌔신 길드와 협상을 하라고 한다면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부당한 명령이었다. 단지 흥분한 자작만이 그 사실을 모를 뿐이었다.

    “그만 나가봐. 출정 준비는 내일까지면 충분하겠지?”

    “예, 영주님. 그런데…….”

    “오늘은 피곤하다. 또 할 말이 있는가?”

    “아닙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찔끔한 로비스가 영주에게 깊게 인사를 하고 방 밖으로 물러났다.

    한동안 불쾌한 피 냄새를 풍기고 있는 방 안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실수를 한 듯하지만 자작은 어차피 천박한 가신과 어쌔신에 대한 사항이었기에 깊게 생각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는 대리인과 한 명의 어쌔신이 항상 한 조로 다닌다는 부분이었다.

    대리인의 죽음과 그의 행동은 얼마 안 가 어쌔신 길드의 본단으로 전해질 것이다.

    *

    *

    *

    “그래, 내가 이 맛에 살지.”

    한 발에는 육포쪼가리, 다른 한 발에는 독주를 병째 들이키는 한 마리의 축생.

    외견은 고양이지만 주인에게는 개새끼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슬렌은 따듯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낮술을 즐기고 있었다.

    “자작성 근처까지는 왔는데 저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지?”

    근 5일에 걸친 강행군으로 자작성의 중심부까지 접근했지만 슬렌은 자작성까지 들어갈 엄두가 나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번엔 자작성까지는 왔으니 지금까지 후버가 지시한 사항을 가장 충실하게 따르기는 했지만, 후버는 분명 양질의 정보를 달라고 요구했다.

    일단 자작성에서 하루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서 생각에 잠긴다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 성 주변의 관도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에 술을 마시기 불편해서 뒤로 이동한 것뿐이었다.

    “아오! 몰라. 전쟁이 내일 당장 나는 것도 아니고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은 먹고 죽자.”

    아공간 주머니에 담겨 있던 술은 슬렌 혼자 먹기에는 너무나 많은 양이었고, 식량 역시 아직 조그마한 슬렌이 먹기에는 충분한 양이어서 대충 1달 정도를 때우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술병을 입안에 기울였다.

    생각을 바꾸니 술이 술술 들어가면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좋은 걸 맨날 한 잔, 두 잔 홀짝홀짝밖에 못 마시는 마음을… 아쉬운 이 마음을 후버 도련님은 아실까? 넌 아니? 이 오빠의 야망과 꿈을? 너도 한잔해. 캬악!”

    확 오르는 취기에 괜히 어제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고양이의 입에 술을 부어주자 그 맛을 보고 놀라서는 마을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어… 너… 육포 줄 때는 안 그러더니 기다려 인마~ 네가 뭘 알아, 인마.”

    따라가던 슬렌의 몸이 기우뚱하며 관도에 쓰러졌다.

    한 손에는 육포, 한 손에는 술병을 든 기이한 자세의 고양이.

    네 발을 쫙 뻗은 자세와 매고 있던 가방 덕에 불룩 솟아오른 똥배, 호연지기를 안으로 살짝 말려 국부를 가린 자세는 불량하지만 좀 배운 고양이의 지킬 건 지키는 모습이었다.

    “아빠, 고양이에요!”

    “근데 좀… 자세가 요상하구나.”

    쫙 편 발가락 옆에 떨어진 술병과 대자로 뻗은 자세, 어느 마을에서나 한 명씩은 있는 개차반의 모습이지만 다른 것이라면 사람이 아닌 고양이라는 사실에 아이의 눈을 가리면서 빠르게 벗어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건가요?”

    말과 함께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육포를 이용해서 슬렌의 입 주위를 쿡쿡 찔러 보는 16살은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가난한 일반 평민 아이였다면 땅에 떨어진 육포를 집어 먹기 바빴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자 아이의 복장은 평민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깨끗해 보였다.

    여자아이가 방금 전까지 타고 있던 마차에는 그 아이의 가문을 상징하는 낙인이 크게 찍혀 있어 평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레스. 아빠가 볼 테니깐 이리오렴.”

    “네~”

    귀엽게 대답한 아레스가 뒤로 물러나자 아빠라고 불린 사내가 천천히 나가 손에 든 스태프를 이용해 요리조리 슬렌을 뒤집으며 살펴보았다.

    “웬 고양이가 가방을 매고 있지?”

    “아빠, 저 고양이 가방을 매고 있어요. 주인이 있나 봐요.”

    “그런가보구나. 아마도 주인을 잃어버린 것 같구나. 그런데 주인을 나타내는 표식이 없으니…….”

    “아빠, 내가 데려가도 되어요?”

    “글쎄다. 지금 가는 곳은 보헴 자작가지, 우리 영지가 아니라서… 일단 마음에 들면 데리고 가보기는 하자구나.”

    “네. 아빠, 고마워요.”

    사내가 고양이를 마차에 태우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자 강한 술 냄새가 느껴졌다.

    이상하게 느낀 자작이 좀 더 슬렌을 뚫어지게 보다보니 왠지 가방이 눈에 익었다.

    대륙에서 일반적으로 하급 마법 가방을 만들 때 사용하던 디자인이기에 눈에 익은 탓이다.

    ‘거참, 고양이가 하급 마법 가방이라니.’

    “아빠, 왜 그래요?”

    “아니다. 이 고양이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술을 마시고 쓰러진 듯하구나. 이럴 때 마차에 태우고 이동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깐 가까운 마을로 가자구나.”

    “네!”

    그 말과 함께 사내는 슬렌을 마차 안에 실어두고 딸을 태운 후 가까운 마을로 마차를 몰 것을 마부에게 지시했다.

    *

    *

    *

    “일어나, 나비야.”

    허름하지만 깨끗한 여관방에서 아레스가 슬렌의 입에 술 깨는 약으로 팔리는 포션을 희석한 액체를 입안에 부어 주면서 몸을 흔들었다.

    ‘으… 누가 귀찮게?’

    “나비야, 일어나.”

    흔들흔들하며 슬렌을 깨우던 아레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여관방을 떠나자 슬렌이 슬슬 정신을 차리고는 아레스가 주다 남긴 희석된 포션을 홀짝 홀짝 마셔댔다.

    ‘그래도 좀 살 것 같네.’

    음주로 인해 아픈 속을 달래기에 한 병 정도의 음료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얼른 가방을 뒤적여 그 안에 물주머니를 꺼내 물을 마시고 육포를 하나씩 꺼내서 천천히 씹어 먹기 시작했다.

    “따끈한 스튜가 가장 좋겠지만 물마시고 고기 먹으면 속에서 스튜 되는 거지.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고 쟨 누군지… 에효! 이놈의 술 끊어야지, 애초에 시작을 안 했어야 하는 건데.”

    육포를 씹을 때마다 두통이 느껴져 슬렌은 한쪽에 뱉어 내고는 벌렁 누워버렸다.

    “아, 배부르다. 나비야~”

    아레스가 부르는 소리에 슬렌이 부스스 일어나서 아레스를 찾아보았다.

    어쨌건 길거리에서 자던 자신을 여관방에 옮겨 주었으니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다.

    한두 시간 정도 재롱을 떨어주고 갈 생각이었기에 빤히 쳐다보았다.

    똑바로 눕는 고양이도 드문데 슬쩍 베개를 벼고 눈만 올려서 쳐다보는 슬렌의 보습에 아레스는 이상한 고양이를 주워왔다고 생각했다.

    “일어났구나. 그런데 육포는 또 어디서 났니?”

    한쪽에 던져진 육포를 보고는 아레스가 슬렌에게 묻자 이왕 애교를 부리기로 한 것 주머니를 뒤져서는 커다란 육포 한 조각을 던져 주자, 아레스가 깜짝 놀라서 방 밖으로 휙~하니 나가버렸다.

    “어린 것한테는 자극이 너무 강했구먼. 흐흐!”

    방 밖으로 나갔던 아레스가 다시 방 안으로 자신의 아빠와 함께 들어왔다.

    “아빠, 아빠, 진짜 이 고양이가 가방에서 육포를 꺼냈다니까요.”

    “음… 아무래도 마법사가 키우던 고양인가 보구나. 먼저 보헴 자작가에 들려야 하니 그때까지는 여관에 맡겨두고 돌아가는 길에 마탑에 맡겨 두면 주인이 찾아가겠지.”

    “에. 그럼 제가 못 기르는 거예요?”

    “그건 좀 힘들 것 같구나. 아공간 주머니까지 가진 고양이라면 마법사가 고양이를 정말 아꼈다는 거거든. 그런 고양이는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단다.”

    “왜요?”

    “아빠는 마법사이지만 동물을 싫어해서 키우지는 않지만 동물을 좋아하는 마법사라면 패밀리어 마법을 걸어 두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해친다면 그 마법사가 알 수도 있단다.”

    “그럼 지금도 마법사가 보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구나. 아마 실험 같은 것에 몰두해 있을 때 집밖으로 나온 것이겠지.”

    보헴 자작가와 패밀리어라는 말에 슬렌의 귀가 번쩍했다.

    잘하면 자작가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적당히 재롱을 부리기보다는 꽉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아공간을 휘적휘적 뒤져 술 한 병과 커다란 육포 세 조각을 아레스의 아빠에게 내밀었다.

    “나비가 아빠에게 주는 건가 봐요.”

    “하하… 이런!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남자가 고민을 하자 슬렌이 주머니를 뒤져서 뭔가 그럴 듯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고민하며 주머니를 뒤지는 모습에 아레스가 웃음을 터트렸고 슈웨거 자작은 그런 아레스를 말리기 위해 연신 헛기침을 하였다.

    마침내 뒤적뒤적 거리던 슬렌은 적당한 것 하나를 찾아냈다.

    ‘하아! 술하고 육포 외에는 든 게 없으니 일단은 이거라도.’

    “이건… 뭐지?”

    “나비야, 이건 뭐야?”

    다시금 말을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답답함, 물론 그냥 슬렌이 준 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작은 나무 상자이다.

    궁금함에 자작이 나무 상자를 열려고 한 순간 슬렌이 앞발을 들어서 그런 자작의 움직임을 막고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기는 하지만 열어 보지는 말라는 거니?”

    그 말에 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나비가 준 거잖아요. 받으세요. 혹시 나비 주인이 높은 서클의 마법사면 아빠한테도 좋은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남자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술을 따서는 한 모금을 마시고는 육포를 뜯었다.

    고양이가 가지고 다닌다고 하기에는 매우 고급품인 부드러운 육포였기에 귀족인 남자의 입맛에도 딱 좋았다.

    하지만 술은 저급품인지 혀가 아린 것이 별로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다.

    “고맙구나. 나는 록시나 자작가의 슈웨거라고 한다. 어느 분이 너의 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집으로 데려다 줄 테니 잘 부탁한다.”

    ‘이 남자가 자작이었군. 그럼 자작에게 잘 보이면 계속 동행하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괜히 여관에 두고 가면 곤란하니 내 몸값을 조금 더 올려야겠군.’

    슬렌이 두 발로 일어나서는 자작에게 예를 차리듯이 허리를 살짝 숙여서 인사를 했다.

    “아빠, 고양이가 진짜 사람 말을 알아듣나 봐요?”

    “그래, 그냥 눈치로 대답하는 것 같지는 않구나.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주인 되시는 분이 고양이를 매우 아꼈나보구나.”

    “근데 고양이가 말을 알아듣는 게 가능해요?”

    “글쎄다. 혹시…….”

    슈웨거 자작의 뇌리에 한 생각이 스쳤다.

    만약 마법사가 기억 전이 마법을 통해서 언어에 대한 기억만을 고양이에게 주입했다면, 모르긴 몰라도 마법사의 마법 수준이 굉장히 높다는 것을 뜻했다.

    아니, 사실 전이 마법을 사용해서 사람의 기억을 옮겼는데 고양이가 죽거나 미치지만 않아도 기적이었다.

    처음부터 말을 가르쳤다 함은 이 고양이를 아꼈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 고양이는 이제 자신의 마법적 성과를 나타내는 귀한 고양이었다.

    자신이 직접 주인을 찾아서 돌려줌으로써 이 줄을 잘만 잡으면 대박이 되는 것이다.

    “아레스, 얼른 내려가서 술잔 두 개와 같이 먹을 음식을 시켜오도록 해라.”

    “네, 아빠.”

    아레스가 슈웨거의 지시를 듣고 음식을 주문하였고 슈웨거의 신분을 알고 있는 여관 주인은 얼른 음식을 준비해서 자작의 방에 직접 배달을 왔다.

    육포를 안주로 술을 마시는 한 마리의 고양이와 귀족 신분인 자작의 모습에 갸우뚱했지만 어차피 귀족이라는 자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이기에 그러려니 생각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한잔 더 하지.”

    아레스는 주스를 마시며 사람같이 행동하는 슬렌을 귀엽다는 듯이, 슈웨거 자작은 그런 슬렌을 복덩이라는 듯이, 슬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접받으면서 마시는 꿀 같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여관에서 달이 차오를 때까지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척.

    발맞춰 마차를 따라 걷던 슬레인 자작의 기사가 발을 맞추어 섰다.

    “록시나 자작가의 슈웨거 님이십니다.”

    보헴 영주의 성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던 기사가 큰소리로 록시나 자작의 방문을 알렸다.

    알리기 전에 발뒤축을 부딪치는 절도 있는 동작을 보니 최소한 예식에 대해서는 훈련을 한 듯 보였다.

    아레나의 무릎에 앉아 마차의 창가 자리에 앉은 슬렌은 이런 모습을 놓치지 않고 무심한 듯이 관찰하면서 후버가 지시한 사항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자작님, 영주님께서 먼 길을 오신 슈웨거 자작님을 생각하시어 2~3일 정도 여독을 푸시면 만나 뵙겠다고 하십니다.”

    영주성의 수석 지배인을 맡고 있는 남자가 시종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서 내리고 있던 슈웨거 자작에게 예를 차리며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당장은 만나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보통 오전에 귀족가에 손님이 오면 저녁 만찬을 함께하는 것을 생각해볼 때 슬레인 자작이 슈웨거 자작을 그리 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아레스 아가씨. 저희 자작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품에 안고 계신 고양이는……?”

    ‘고양이라니. 저놈 참 싸가지 없게 생겼네.’

    “제가 잠시 맡고 있는 것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슬레인 자작님께서는 가축을 집에 들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가축? 얼굴 딱 봤어.’

    싸가지 없는 수석 지배인에게 슬렌이 분노를 느끼듯이 슈웨거 자작 역시 일게 수석 지배인이 마차에서 내리는 아레나의 에스코트도 하지 않고 고양이에 대해 따지는 것을 보고, 초반부터 계속되는 무례에 슈웨거 자작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방문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기에 참기로 했다.

    “크흠!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이니 수석 지배인이 이해해주고 잘 말씀드려 주게.”

    “그러시다면… 안으로 말씀을 여쭙겠습니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시지요.”

    “그러도록 하지. 하지만 빨리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군.”

    “예. 총지배인에게 여쭙고 오겠습니다.”

    고작 총지배인에게 물어보기 위해 자신들을 마당 한가운데에 세워두는 수석 지배인의 행동에 분노한 슈웨거 자작이 자신의 애검을 찾기 위해 마차 안으로 고개를 돌리자,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자신의 딸과 불량한 자세로 육포를 뜯으며 수석 지배인을 꼬나보는 나비의 모습을 보고는 실소와 함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거참! 저놈의 육포는 끝도 없이 나오는군. 일단 참자, 아쉬운 것은 슬레인이 아닌 나다.’

    슈웨거 자작이 화를 다스리는 동안 수석지배인이 총지배인과 함께 나와서는 큰 인심을 쓴다는 듯이 슬렌과의 동행을 허락하는 그들의 태도에 가소로움을 느끼고 방으로 안내되어 휴식을 취하였다.

    *

    *

    *

    “후버 님 나와라! 후버 님 나와라!”

    자작성의 한쪽 귀퉁이 슬렌은 후버에게 받은 수정구를 연신 문지르며 후버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슬렌, 지금 어디야?

    “소리 낮춰요. 주인님. 지금 자작성까지 들어왔어요.”

    ―벌써? 자작성의 경비를 뚫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 말에 슬렌은 간략하게 현재 자신의 위치가 자작가라는 설명을 하며 슬쩍 자신을 대마법사의 애완동물로 여기는 부차적인 것도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니깐… 너를 대마법사의 패밀리어가 걸린 애완동물로 생각한다는 거지?

    “응. 뭐 부차적인 거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에요.”

    ―슬레인 자작령의 병력 상태는?

    “그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제가 여기 처음 온 날 저녁 10명 정도의 기사들이 자작성을 빠져 나갔어요.”

    ―그래? 이거 잘만 써먹으면 슬레인 자작을 가지고 놀 수 있겠는데?!

    “또 누굴 속이시려고요?”

    ―속인다기보다는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거지. 판단은 슬레인 자작의 몫이고.

    “그런데 속일만한 것이 없는데…….”

    ―없긴 왜 없어? 슬레인 자작이 현재 가장 원하는 것을 주면 되는 건데, 크크크!

    “주인님이 그렇게 웃으시니 심정적으론 저랑 이름도 비슷한 슬레인 자작을 돕고 싶네요.”

    ―시끄럽고!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한동안 호의호식시켜줄 테니깐.

    “뭔데요?”

    그리고 후버의 설명이 이어졌다.

    한참 동안 지속된 설명에 모든 것을 슬렌이 기억하기는 힘들었는지 대략적으로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기억했다는 슬렌의 말을 듣고도 불안한 후버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도록 했다.

    ―그럼 이제 슬레인 자작에게 가봐. 너의 양 어깨에 작전의 성패와 자작가 내에서의 너의 대우가 달려 있으니 잘하길 바란다.

    “걱정 마세요. 주인님. 마침 슬레인 영주성의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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