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크롤라이드를 낚다 (5/37)
  • 크롤라이드를 낚다

    “이렇게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전부터 소란스러워진 백작가의 긴장은 저녁이 되어서 그 절정을 맞이하였다.

    7서클 마도사인 크롤라이드의 등장, 그가 아카이브의 스승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수 십 년 동안 아카이브가 레빌리온 백작가의 가신으로 있을 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가 영지에 찾아온 것이다.

    “하하하. 백작 그럼 신세를 좀 지도록 하겠소.”

    “아닙니다. 크롤라이드 마도사님. 얼마든지 편하신 만큼 머무르셔도 됩니다.”

    “아카이브가 백작님께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셔서 지내기 편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려.”

    “과찬이십니다.”

    “사실 이번에 백작도 알다시피 아카이브가 6서클에 올랐소. 내 제자 중에 처음으로 6서클에 오른 것이지,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욕심이 없다는 녀석이 가장 먼저 경지가 오르다니. 그것도 나보다 빠른 시기에 말이요.”

    “예. 항상 아카이브 경에게 지원을 못 해주는 게 아쉬웠는데 저로서는 마음의 큰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백작께서 영지 전체의 기념일로 포교한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소. 내 제자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참 기쁜 일이지. 그래서 그런데 아카이브와 마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이 녀석이 마탑에 오기를 거부하니 한 1년 정도 내가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소?”

    “아. 그것은 사실 저희 영지는…….”

    “지원에 대한 것은 걱정 안 해도 되오. 그저 식사와 잠잘 곳만 지원해 주면 충분하오. 그저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뿐, 실험을 위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니, 혹시 실험을 한다면 필요한 것은 모두 내가 조달할 터이니 영지에 부담을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후버는 이와 같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백작가의 가족들과 가신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크롤라이드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헛간을 내어주지는 않을 것이고 식사를 빵 하나로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산해진미를 제공해 주고 영주의 방을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7서클 마도사인 크롤라이드가 백작령에, 그것도 1년씩이나 머무는 것은 백작령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머무는 기간이 아닌 이후에도 타 영지로서는 쉽게 레빌리온 백작의 영지를 넘보지 못하는 일종의 억지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시다면 저의 침실을 새 단장할 터이니 잠시 손님 방에서 머무르시며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아니오. 백작의 영지에 부담을 주진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저 아카이브의 방에 침대 하나 더 넣어주고 평시처럼 대해주면 되오. 어찌 객이 주인의 방을 빼앗겠소?”

    “아! 하지만…….”

    “그저 한 명의 객으로 대해주시오. 명망 높은 레빌리온가의 초대 영주를 마법사들이라면 모두 존경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그런 레빌리온 가에서 무례를 일으키고 싶지 않구려.”

    “예! 알겠습니다. 총관, 지시대로 이행해 주게.”

    슬쩍 레빌리온가를 높여주며 거절의 말을 하는 크롤라이드의 말에 백작은 크롤라이드의 말을 따라주었다.

    이미 마법가문의 명맥은 끊겼지만 초대 영주는 마법학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친 만큼 그를 운운하면서 자신을 낮추어 주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때 더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럼 계신 동안 편안히 계시길 바랍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백작가의 자제와 크롤라이드 와의 간단한 대화를 하며 식사 시간은 즐거운 분위기에서 마무리 되었다.

    단지 아카이브가 눈짓으로 후버를 자신의 방으로 와 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식사를 마친 후 아카이브, 크롤라이드, 후버 이렇게 세 명이서는 현재 영지의 한적한 공터에서 모여서 여러 가지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론상은 문제가 없지만 과연 이게 실제로 작동을 할까?”

    “예. 사실 어느 정도 시험작동은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중을 주면서 실험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저도 걱정이 되는군요.”

    “그리스 마법을 이렇게 응용하다니 대단하군. 이 홈들이 맞물려서 마찰력이 아니라도 톱니가 돌아갈 수 있는 거겠지?”

    “예. 돌아가는 톱니가 차례로 맞물리고 중량물의 하중으로 중력을 이용해서 마찰력 대신 톱니를 통해 동력을 전달하려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 그럼 한번 이용해 보도록 할까? 자네가 만든 관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올 때 난 내 상식이 깨어지는 것을 느꼈네.”

    “감사합니다. 그럼 마나를 불어 넣도록 하겠습니다.”

    후버는 가볍게 심장 주변의 서클을 회전하여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맞물려서 회전하는 톱니바퀴가 한쪽에 있었던 쇳덩이를 반대편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이 정도면 보통 큐리오벨트 위에 흙을 채웠을 때보다 10배 이상 무거운 물체인데 이렇게 쉽게 옮겨버리다니.”

    “축하하네. 후버, 자네 말대로 길이를 연장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먼 거리를 옮겨줄 수 있겠구먼.”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 생각을 했나?”

    “약간 생각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크롤라이드 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물건을 움직일 때 수레바퀴를 이용해서 물건을 옮기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수레는 가만히 있는데 땅이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이 영상을 보시죠.”

    “그게 무슨 말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

    후버는 간단하게 자신이 수정구에 녹화된 영상을 틀어 주었다. 어두컴컴한 배경에 평행으로 배치된 조그마한 수레에 올려둔 수정구의 시점에서 움직임을 촬영한 영상이었다.

    컴컴하였지만 수정구가 내뿜는 빛이 있기에 어렴풋한 수레의 모양과 수정구는 구분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영상을 녹화하고 있던 수정구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영상은 끝이 났다.

    “크롤라이드 님께서는 이 영상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녹화하는 수정구가 앞으로 움직인 것이 아닌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크롤라이드를 바라본 후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시점에서 촬영된 녹화 영상을 틀어주었다.

    앞의 영상과는 다르게 공중에서 촬영된 영상으로 천장에서 두 수레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한쪽 수레가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보신 영상은 사실 녹화하는 수정구가 앞으로 간 것이 아닌 반대편의 수정구가 담긴 수레가 뒤로 움직인 것입니다. 움직임이란 것은 결국 상대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생에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마주 오는 지하철이 움직이는 것인지, 자신이 탄 지하철이 움직이는 것인지 일순간 헷갈렸던 기억을 이용해서 크롤라이드에게 관점의 변화를 설명하였다.

    사실 후버가 말하려고 한 것은 굳이 사람이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보다는, 일이 사람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설명하려 한 것이었지만, 평생 일을 안 해본 마법사에게는 이편이 더 이해를 시키기 쉽기에 이러한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아… 그런!”

    후버가 예상했던 대로 단순한 사실에 크롤라이드는 명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생에서도 최고의 과학적 성과로 인정받던 물체 의 이동 속도에 대한 상대이론의 단순한 형태이지만 이곳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이론으로 적립한 예가 없었다.

    하지만 명상에 빠진 크롤라이드는 잠시간 몸에서 빛이 나오더니 금방 명상하던 자세를 풀고 일어났다.

    “하아! 아쉽구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야. 7서클이 되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오지는 않지. 그저 편린과 편린이 모일 때마다 약간의 깨달음이 모여서 하나의 큰 깨달음이 오는 거야.”

    “저도 그것은 문헌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깨달음이란 것도 적지 않은 차이를 만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보통 10번 정도의 작은 깨달음이 있으면 8서클에 진입한다고 하던데, 나는 7서클에 오른 지 이번이 5번째 깨달음이니 앞으로 8서클까지의 길이 멀지 않았군. 아카이브도 알다시피 7서클에 이른 마도사가 굳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실험에만 몰두하는 것도 그런 작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몰두하는 거지.”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8서클에 오를 날이 머지않으셨군요.”

    “너무 그렇게 호들갑 떨지는 말아주게. 아쉬움이 깊어질수록 다음 깨달음은 멀어지니까 말일세. 그건 그렇고 역시 레빌리온 백작가이군. 오자마자 이렇게 깨달음을 얻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야. 후버, 자네 나랑 같이 마법 연구를 할 생각은 없나? 마탑으로 들어온다면 내가 팍팍 밀어주지.”

    “본의 아니게 크롤라이드 님의 진전에 걸림돌이 될 뻔했군요. 죄송합니다. 과분한 말씀은 말씀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그저 미련이 없어야 그만큼 순수하게 몰두할 수가 있어서 한말이니 괘념치 말게나. 허허! 언제든지 마탑에 들어오고 싶으면 말하게. 내가 백작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탑에는 마법을 연구하기 위한 모든 것이 있네.”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다면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아카이브의 제자라면 내 제자와도 같지.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보여준 설계도 중에서…….”

    그렇게 노소 마법사들의 밤은 마법이론과 응용에 대한 대화로 밤이 깊은지 모른 채 지나갔다.

    어느 샌가 마나의 유동을 느낀 필러 경이 제이드를 이끌고 한껏 경계를 하고 접근하여 1명의 기사와 예비기사까지 포함한 토론과 대화의 밤이 깊어졌다.

    *

    *

    *

    “이쪽 좀 더!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지브롤터 바위와 가장 가까운 곳부터 시작된 영지의 저수지 공사는 생각보다 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 큐리오벨트를 본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을 표했지만 그것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본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그 위로 흙을 올리자 움직여서 반대편으로 나르는 모습을 보고는 환호했다.

    무슨 공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주의 명령으로 모인 백성들은 저런 물건이 공사에 쓰인다면 도움이 될 것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나자 공사는 후버가 예상한 것보다 10일이나 빠르게 보 건설을 제외한 모든 작업을 마치고 지금은 큐리오벨트의 철거만을 남겨 두었다.

    “내가 많은 곳을 여행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호사스러운 공사는 처음 보는군.”

    “정말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사실 처음에 후버 군이 겨울에 땅을 판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쉽지 않은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네. 후버 군이 여행을 했던 여름과는 다르게 겨울에는 땅이 제법 딱딱하게 굳어 버리거든.”

    “저 역시 그 이야기를 했을 때 후버가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두 분께서 마나 차폐상자와 수정구 충전을 도와주신 덕에 빠르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후버는 모든 공을 두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얼어붙은 땅을 파기는 힘들 것이라는 둘의 걱정에 후버는 크롤라이드의 도움을 받아 메스 텔레포트로 이동 저수지의 한가운데를 디그 마법을 이용해 땅을 파고는 준비해 두었던 수정구에 마나의 과충전하여 땅에 묻고 흙을 다시 덮어 수정구를 자극하여 터트리는 방법을 사용해서 땅을 뒤엎어 버리는 과격한 방법을 보여 주었다.

    한 번의 폭발로 반경 10미터 정도의 땅거죽이 뒤집어져 버렸고 그런 모습에 아카이브와 크롤라이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단 한 번에 땅파기는 봄철이나 마찬가지로 편해지겠군.”

    “소음과 위험만 없다면 어디서든지 사용하기 좋은 방법 같습니다.”

    훗날 레빌리온 공법이라 부르며 거의 모든 영지의 공사에서 사용되는 방법이었지만 아직은 이 방식에 대해 아는 사람은 단 세 사람에 불과했다.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본 크롤라이드는 자신이 사용하던 아공간에서 마나차폐 상자를 후버에게 선물하여 주었는데, 이 상자를 이용해서 미리 마나석을 적당량 충전해 두고 저장해 둠으로서 필요할 때 조금 더 충전하여 방금 전처럼 마력폭발을 일으키거나 큐리오벨트의 동력으로 사용하였다.

    “그럼 다음 공사 현장으론 언제 떠날 텐가?”

    “대충 이곳이 마무리 되고 먼저 출발시킨 큐리오벨트가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리면 그때 출발하려 합니다. 보를 건설하는 부분을 감독하는 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뭐 도와줄 것은 없겠느냐?”

    “예전에 말씀 드린 대로 웰업 마법을 통해 수원지를 확보 하는 데에 힘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 다시 한 번 수속성 마법이 물을 끌어 올리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확인할 수 있겠구만.”

    “기대한 만큼의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

    *

    아직 한겨울이지만 마지막 수로의 연결만을 남겨둔 공사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마지막 하나 남은 큐리오벨트가 해체되는 순간.

    위잉~

    작업 종료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백작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착석해 앉는 것으로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단위에 마련된 연설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영지의 백성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은 첫째 아들인 큐리오였다.

    처음 영지에서 저수지를 판다고 할 때 큐리오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후버가 바쁜 만큼 큐리오도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연설하는 방법과 표정 발음 확성기의 자연스러운 활용법 등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백작으로부터 듣게 된 자신이 이 공사의 책임자이자 발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얼떨떨했다.

    이상함을 느끼고는 후버를 찾아가서 묻자 후버는 그저 웃으면서.

    ‘형님께서 영주님으로 올라서는 첫 번째 행사입니다.’ 라는 이해 못할 소리를 하면서 모든 행사가 끝난 후에 설명을 해준다는 말에 반 강제로 연설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 도착한 현장에는 모든 백성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길 다란 기계를 나르는 등 평소 영지 내에서는 보지 못하던 물건들이 즐비하였다.

    그리고 당일 날 전해 받은 연설의 원고, 무려 크롤라이드가 전문을 적고 아카이브가 감수를 했으며 총관이 마지막 손질을 한 문서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알지도 못했던 공사의 어려움, 그리고 한 단어 단어마다 감정과 강세가 표시된 복잡한 연설문을 검토할 시간도 없이 자신은 연단위에 불려나가 처음으로 영지민들을 향해 연설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만들어서… 사고를 당한 영지민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그 가족들에게는 연간 매년 80실버의 지불과 함께 세금감면 혜택을…….”

    “와~ 큐리오 소영주님 만세!”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읽기에 바쁜 큐리오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지민이 환호했고 더러는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큐리오 역시 그런 영지민의 모습에 무언가 뭉클한 기분을 느끼고 연설문을 읽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오늘 영지민들의 이러한 애환에 귀 기울여 이곳을 시작으로 영지 전체에 저수지를 개발하고자 합니다.”

    “와~! 만세!”

    “더 이상 영지민들은 가뭄을 걱정하지도, 홍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임을 나 레빌리온 백작가의 소영주 큐리오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선언하는 바이다.”

    그 말과 함께 저수지의 한복판에서 커다란 물줄기가 터져 나오자 영지민들의 함성은 더욱더 높아졌고 큐리오는 그런 영지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한 감동을 느꼈다.

    큐리오의 나이 이제 16세, 소영주로서의 첫 신고식을 성공적으로 치룬 것이다.

    *

    *

    *

    영지로 복귀한 후버 등이 식사용으로 마련된 큰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후버야,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그래, 한번 말해봐. 나도 얼떨결에 드레스를 입고 훈련 중에 끌려갔다고.”

    다소 상기된 큐리오의 목소리와 가볍게 나무라는 듯한 세실리아의 목소리, 세실리아의 무릎 위에는 그르릉 대는 슬렌이 엎어져서 드레스를 입은 세실리아의 프릴을 건드리며 사뭇 귀여운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석에 앉은 백작과 백작부인은 그런 그들을 인자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그리고 누님도 아시다시피 저와 형님의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너와 나의 나이 차이는 겨우 4살밖에 나지 않으니깐.”

    “그래서 그런지 형님도 아시겠지만 저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지의 가신들은 형님과 저를 저울질 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그것이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

    “이제 형님은 2년 후 영지를 떠나서 아카데미로 가게 됩니다. 5년간 아카데미에 계시는 동안 저는 이곳에 머무르고 있고요. 그리고 형님이 돌아오신 후 저는 아카데미로 가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형님이 없는 동안은 영지의 후계자 구도에 공백이 생기게 되고 가신들은 괜한 드잡이 질을 해서 백작가의 내부부터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설마… 너와 나의 사이가 이렇게 가깝거늘 누가 있어 감히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자뭇 분노한 음성으로 누군지 모를 불충한 세력을 향해 큐리오가 분노를 터트렸다.

    그가 비록 세실리아에게 치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동생과 누나의 관계일 뿐, 후계자 구도에 대해서는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지고 가야하는 의무감을 느꼈기에 착한 후버와 자신을 이간질하는 것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큐리오, 아직 그런 가신들이 표면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후버나 큐리오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다. 나 역시 영지의 모든 가신들을 믿고 싶기는 하나 영주로서 내부 단속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저희 둘의 사이가 좋다는 것을 모르는 가신은 없을 것입니다.”

    “둘 사이가 좋다 하더라도 주변 가신들끼리의 반목을 기회로 삼아 후버를 벌한다는 명분으로 이웃영지에서 공격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가능성, 하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곳에는 다른 가신들을 부르지 않은 것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말에 큐리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하지만 후버야. 그 일과 이일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 영지민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는 게 목적이라고 했을 텐데?”

    “예. 대외적 이미지를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님의 이미지는 감히 차남인 제가 노릴 수도 없는 그런 높은 위치로 영지민들에게, 그리고 가신들에게 각인되어야 후에 발생할 분란을 막을 수 있습니다.”

    “좋다. 나 역시 제국의 역사를 보면서 형제가 반목하여 가문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지. 어렴풋이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면 난 오히려 너에게 영주 자리를 내어주려고 했는데 나보다 어린 네가 선수를 쳤구나.”

    “저는 자유롭게 대륙을 여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주의 자리보다는 백작가의 영광이 저에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백작가의 영광이라… 왠지 나한테는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은 게 더 큰 이유같이 들리는구나.”

    피식 웃음을 지으며 놀리듯이 후버에게 큐리오가 물었다.

    “이번 공사가 진행된 것을 살펴보니 후버의 처리 능력이 대단하던데 그럼 네가 차기 총관을 할 것이냐?”

    “아… 형님. 그것은 좀…….”

    후버의 버벅거리는 모습에 큐리오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우애 좋은 형제 사이였기에 괜한 후버의 연막작전을 한 번에 꿰뚫어 본 것이다.

    “능력 좋은 총관께서 장수하셔야 지요. 헤헤!”

    “됐다. 너도 총관 정도의 나이가 돼서 삭신이 쑤시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당장 떠날 것도 아니니 이쯤에서 그만하고 그 큐리오벨트는 또 뭐냐? 처음에 난 평민들이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줄 알고 멱살을 잡을 뻔 했다.”

    “맞아. 나도 깜짝 놀랐다니깐. 뭐, 나야 슬렌이 설명을 해줘서 금방 알았지만.”

    귀엽다는 듯이, 골골거리는 슬렌의 턱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세실리아의 손길에 슬렌은 아예 발라당 배를 보이고는 세실리아에게 교태를 부렸다.

    명패 없이 말을 못한다는 게 답답했는지 요즘 슬렌은 세실리아와 자주 필담을 나누며 돈독한 정을 쌓고 있었다.

    “조만간 마법학회와 장인협회에서 그와 관련된 문서가 올 것입니다. 기본적인 원리와 설계 아이디어는 형님께서 만드시고 아카이브 경께서 마법적 처리를 해주었다고 특허를 등록해 두었습니다. 앞으로 대륙전역에 형님의 이름을 딴 발명품이 퍼질 것입니다.”

    “거참 얼떨떨하네. 자고 일어났더니 내 이름으로 특허와 발명품, 게다가 저수지 공사까지 동생이 주는 것이니 받기야 하겠지만 다음부터는 말을 하고 진행을 해줬으면 좋겠구나. 후버.”

    “네, 형님.”

    그때 크롤라이드가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면서 말을 했다.

    “그리고 큐리오 백작 자제는 두달 후 마법학회에서 ‘마법과 도구의 조화’ 라는 강연을 해주어야 하네. 뭐 이름은 거창하시만 사실 큐리오벨트에 대한 설명에 대한 것이고, 발표할 사항은 내가 직접 정리해 주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아니? 크롤라이드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정식으로 서류가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마법학회의 명예회원 자격과 함께 요청문이 도착할 것일세. 이 좋은 발명품을 홍보하기에는 마법학회 만한 곳은 없지.”

    “그래도… 마법협회의 명예회원이라 함은…….”

    백작이 이렇게 당황하는 데는 마법 학회의 명예회원이 주는 상징적 의미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대륙에서는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마법 학회의 명예회원에게도 요청에 따라서 전방위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는데, 협회의 명예회원이라는 자리가 웬만한 고서클의 마법사들 보다 마탑에 공로가 큰 사람들에게 탑주가 직접 천거해주는 자격이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절차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크롤라이드의 말에 첨언하는 아카이브였지만 명예회원이 된다면 다른 백작가의 자제들 보다는 시작부터 훨씬 높은 위치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러한 발언권이 성인이 되어서 백작가문을 물려받은 큐리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다소 빠르게 진행되는 감이 있지만 형식적으로 큐리오경의 동의를 받아 큐리오벨트의 마법적 권리에 대한 특허 권한을 마탑에 %의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기부해 버렸거든. 고위 마법사들에게는 그 수식과 운용 방법이 공개되는 거지.”

    “그렇다고 해도 흙을 나르는 기능밖에 없는 것이 어떻게?”

    “하하하! 이거 큐리오 경, 나중에 오늘을 기억하고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미 그것을 이용해서 수없이 많은 마법 물품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거든.”

    “제가 어찌. 크롤라이드 님의 배려에 감사할 뿐입니다.”

    전생의 경험을 가진 후버에 비해 다소 떨어져 보일 뿐이지, 큐리오 역시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만약 마탑과 일면식이 없는 자신이나 후버가 해당 물품에 대한 특허권을 요구한다면 마탑은 명예회원 자격을 주기는커녕 더 낮은 로열티를 지불하거나, 아니면 보호요청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장남의 머리도 나쁘지는 않군. 욕심도 없으니 크게 레빌리온가가 잘못될 일은 없겠어.’

    큐리오가 눈치 챈 대로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크롤라이드와 아카이브가 그런 자신들을 대신해 힘을 써준 것을 알아챈 것이다.

    돈은 쓸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고 좋은 것은 지킬 힘이 있어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허허. 난 후버가 영주직에 관심이 적다하여 레빌리온가를 걱정했는데 차기 영주를 보니 레빌리온가의 미래가 아주 밝구려. 좋으시겠소. 백작.”

    “흠흠… 별말씀을 다. 그저 두 분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두 마법사를 향해 백작이 깊게 예를 올리고 몇 번의 덕담이 서로 오간 후 쉬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움직였다.

    웰업 마법을 쓴 두 마법사는 피곤했고 처음으로 영지의 행사에 참가한 큐리오 역시 피곤하였기에 그러한 분위기를 느낀 백작이 서둘러 자리를 파한 것이다.

    *

    *

    *

    “마릴린, 오늘 참 재밌었지?”

    “예. 영지민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특히 사고를 당한 영지민들한테까지 보상을 해주신다고 할 때는 저도 환호성을 질렀을 정도였으니까요.”

    “글쎄. 나는 오히려 그 정도밖에 못해줘서 미안하던데. 그들의 희생이 컸어. 다음번에는 좀 더 안전하게 공사를 해야지. 울타리라도 하나 만들어서 작업 중에는 큐리오벨트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으면 낙석에 다치는 사람은 없었을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때 슬렌이 문 밖에서 뭔가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했다.

    “큐리오 님이에요.”

    똑똑.

    “형님, 들어오세요.”

    “후버야. 네가 정말 고생이 많았다. 앞으로도 저수지를 몇 개 더 파야 한다면서?”

    “이번 년하고 다음 년, 또 다음 년에는 좀 더 공사가 빨라질 거예요. 그때는 4개를 끝내면 영지민들이 우물이 말라서 고생하는 것은 줄어들 거예요. 봄과 여름에는 지브롤터 바위에서부터 관을 연결하는 공사를 할 거지만, 그건 지시만 내리면 되니 제가 힘들 것은 없구요.”

    “정말 고맙다. 사실 나는 영지를 물려받는 것에 대해서 별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어. 네가 원한다면 너한테 주면 되고 세실리아 누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영지민이 형님에게 환호하니깐 어떠셨어요?”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지고 해봐야겠다는 결심 등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왜 내가 지금까지 그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더구나.”

    “형님은 좋은 영주가 되실 거예요. 지금처럼!”

    “하하하! 그게 뭐 내 생각처럼 쉽겠니? 근데 너는 수개월간 준비한 일이나, 네가 생각한 발명에 내 이름을 붙여줘도 되겠니?”

    “전 그냥 레빌리온 백작가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형님의 위치가 확고해야 하구요.”

    “거참! 욕심이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덕분에 영주의 자리에 욕심이 났으니 나중에라도 달라고 하지는 마라.”

    장난스럽게 후버를 바라보며 한번 긴 포옹을 하고는 큐리오가 방 밖으로 나갔다.

    괜한 쑥스러운 기분과 후버가 피곤해 할 것을 배려해준 것이다.

    “큐리오 도련님은 너무 멋지신 것 같아요.”

    어릴 때의 앳된 큐리오의 모습이 아직은 많이 남아있었지만 점차적으로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큐리오에 대한 평가는 시시각각으로 바뀌어 갔고, 특히 이번 연설로 인해 큐리오의 영지 내 입지는 물론 시녀들의 평가 역시 상당 부분 변화하였다.

    “형님이 좀 그런 면이 있지.”

    “얼른 씻고 자야겠다. 오늘도 참 피곤한 하루였어. 마릴린도 고생 많았어. 하루 종일 내 옆에 있느라고.”

    “아니에요 도련님. 목욕물 준비할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마릴린이 콧노래를 부르고 나가자 방 안에는 슬렌과 후버만이 남아 있었다.

    후버가 슬쩍 공간 주머니에서 술 한 병을 꺼내자 슬렌이 잽싸게 옆으로 붙었다.

    마릴린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약 20분, 하루를 마감하는 한 잔의 술은 후버와 슬렌 사이의 비밀스러운 약속 같은 것이었다.

    후버는 술을 마시다 보니 크롤라이드가 며칠 전 낮에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신이 차고 있는 팔찌의 제작자이자 초대 백작가주였던 나일러스… 당대 마법사 중 비교가 불가능한 압도적인 마법적 능력으로 전장의 사신으로 군림한, 그래서 상대국은 그런 그가 전장에만 나타나면 자신의 병사들이 영원히 깨지 못하는 잠에 빠진다고 하여 잠의 요정 나일러스라고 불렀다.

    ‘고위 마법사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군.’

    후버의 마법적 기본 지식도 나일러스의 마법에 대한 기록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저서클부터 고서클까지 차근히 정리되어 있는 마나의 배열 방법은 후버가 마법을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지금까지 후버는 나일러스에 대한 기억은 그저 마법에만 한정되었기에 그의 인생에서의 일은 잘 몰랐으며 그런 것을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의 마법적인 지식은 열심히 훔쳐 배웠지만 인간적인 모습은 뵌 적이 없구나.’

    크롤라이드는 그의 인생에 대해서 찾아본다면 좀 더 백작가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후버는 기록을 찾을 필요도 없이 슬렌에게 남은 술병을 넘겨주고는 팔찌 안에 봉인된 나일러스의 기록을 재생했다.

    *

    *

    *

    “훗! 그래봤자 마법사들 따위 전장을 벗 삼아 뛰어드는 우리 기사들에 비하면 우스울 뿐이지요. 실제 전장에서 싸우는 건 우리 같은 기사들뿐. 그런 우리의 보호를 받은 마법사 노친네들은 전쟁에 패배해도 벽에 똥칠하면서 살 테니 절박함이 우리에 비교가 되겠습니까?”

    “뭐? 이 새꺄! 이 호랑말코 같은 새끼가 어디서 눈알을 부라리고, 확 그냥! 너 같은 핏덩어리가 살려달라고 징징 거릴 때마다 몸속에 처넣어준 리커버리 마법의 마나 양을 합치면 내가 10서클은 됐겠다. 잡것아!”

    무대는 왕성의 어느 한 화단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 노마법사 한 명과 젊은 기사 한 명은 괜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술에 취한 둘의 대화는 차차 열기를 높여 가면서 급기야 서로 간 막말을 주고받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허허. 제페토, 그만하시게나. 즐거운 연회를 망치면 쓰겠나? 이리 와서 나와 한잔하는 것이 어떤가?”

    이때 점잖게 노마법사를 말리는 나일러스. 겉모습을 보면 나이 어린 나일러스의 말이 싸가지가 없어 보였지만, 나일러스는 잠의 요정이자 마탑의 탑주이기도 했기에 그런 나일러스의 어투가 거북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은 없었다.

    “카일, 너도 그만두거라. 괜히 말하다 침이라도 튀면 약골 마법사는 뼈 부러진다.”

    끼어드는 게이츠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는 것이 시비를 거는 것이 분명했다.

    게이츠 역시 전장에서 나일러스와 함께 적국에게 공포와 경악을 선물해 준 만만치 않은 기사였고 동시에 왕국의 소드 마스터 중에 한명이었다.

    “게이츠, 자네 뭐라고 했나?”

    “뭐 제가 틀린 말했습니까? 마법사 허약한 약골이란 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아닙니까?”

    싸늘한 나일러스의 말에 게이츠가 이죽거리면서 대답했다.

    전통적으로 마법사와 기사는 앙숙의 관계, 그러나 정상급에 이른 마법사와 기사는 서로 부딪힐 일이 없기에 누가 강한지 약한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기 힘들었다.

    전시에도 7서클 이상의 마도사와 소드 마스터가 한 자리에서 서로 싸우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거 자네 말이 좀 심하구만. 나이도 어린 비루먹은 개새끼가 칼 쪼가리에서 빛 좀 뽑아낸다고 겁나는 게 없나보지? 그딴 것 나는 1서클에 했는데 말이야.”

    하하하하하!

    잠의 요정 나일러스는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전장의 사신, 대번에 말이 험해졌다.

    이죽거리는 나일러스의 말에 연회에 참여한 마법사가 다 같이 웃어댔다.

    재미있든 아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일러스는 탑주고 그가 지금 농담을 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딴 빛 쪼가리랑 오러 블레이드도 구분을 못하다니. 역시 전쟁에서 생환한 마법사는 벽에 똥칠부터 하나봅디다?”

    하하하하하하.

    이 역시 다른 것은 중요치 않았다. 게이츠는 전쟁영웅이자 소드 마스터이고 자신들의 상관이기에 이번엔 기사 측에서 크게 웃어 보였다.

    “그게 오러블레이드였나? 차라리 추수하는 농부들의 낫이 더 날카로운 것 같군.”

    “뭐요? 흥! 그럼 나일러스 님은 이 추수하는 낫을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마법사에게 검을 들고 근접전을 하라는 것인가? 졸렬하기 짝이 없군. 하긴 무능한 기사단이 적국의 기사들이 침입해도 막지 못하니 이렇게 스태프 끝을 날카롭게 깎고 다니는 것이지. 쯧쯧쯧!”

    휙! 쉭!

    스태프를 휘두르며 나일러스가 다시금 이죽거렸다.

    “이익! 그건…….”

    “뭐, 좋다. 근육덩어리인 네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이니 한 달 후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한번 싸워보자.”

    “뭐요? 붙으려면 당장 붙지, 왜 한 달을 기다리라고 하는 거요? 한 달 동안 대륙 반대편으로 도망가려는 것 아니오? 하긴 전장에서도 가장 먼저 텔레포트 마법으로 빠져나가는 게 마법사들이니 이제 아주 시비만 걸리면 본능적으로 그러겠습니다. 흐흐!”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게이트가 공격했지만 말에 있어서는 마법사인 나일러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딱 한 달, 한 달간 네놈들이 자랑하는 검술 좀 연습해보려고 그런다. 그딴 근육 덩어리 한 달이면 무의미 하다는 걸 보여주마!”

    “좋소. 후회하지 마쇼! 나일러스 님이 진짜 검을 들고 오신다면 내 한 수를 양보해주겠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장갑을 벗어 던지는 게이츠의 동작에 나일러스가 쉴드를 사용해 장갑을 막아버렸다.

    “수십 년간 칼질하던 놈이 고작 한번 양보하는 것으로 생색을 내는 척하더니 장갑을 먼저 던져 공격하는군. 네가 한 달 후에도 살아 있다면 나도 한 수를 양보해줄 테니 마법으로 덤벼볼 테냐?”

    “이익!! 됐소. 마법사들은 입만 살아가지고 한 달 후에 뵙겠소.”

    그렇게 연회자리는 파해졌고 나일러스는 그 이후 칩거에 들어가서는 하나의 검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러한 소문은 금방 왕국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전쟁영웅 소드 마스터 게이츠와 잠의 요정 나일러스의 목숨을 건 한판 대결! 그리고 그 한판의 대결을 위해 나일러스는 오러블레이드도 자르지 못하는 마법검을 만든다는 소문, 그러한 소문에 은근히 게이츠는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오러블레이드를 농부의 낫질만도 못하다고 폄하한 만큼 나일러스는 자신이 만든 검을 이용해 자신의 오러블레이드를 막으려 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남은 시간 그는 최대한 날카롭게 자신의 오러블레이드를 다듬으며 하루하루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둘은 왕실 연무장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 양반. 도망가지는 않았구려! 그래 목숨을 걸 준비는 되었소?”

    “아주 이제 막가는구나, 게이츠. 쯧쯧쯧! 어차피 부끄러워서 그 터진 주둥아리 이제 쪽팔려서 놀리지도 못할 것이니 관대하게 이해해주마.”

    ‘내가 쪽팔려서 말을 못한다고? 내 짐작이 맞았어. 음흉한 마법사 놈. 어차피 대결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오러블레이드를 저 검을 이용해서 막아내는 게 목적이겠지. 망할 자식! 그럼 나도 생각이 있지.’

    “흥! 한 수는 양보해주겠소. 하지만 그 이상은 목숨을 보장할 수 없소.”

    “별걱정을 다하는구나. 너 같은 팔푼이가 내 일검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 말과 함께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는 나일러스의 손을 따라 시커먼 검신을 가진 검이 연무장에 나타났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검은 색의 검신 위를 수놓은 백색의 선들은 마법진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 마법진을 본 게이츠의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저건 그래피티 마법, 게다가 저 검은색은 아만티움 같고 만약 아만티움을 그래피티 마법을 통해서 압축시킨 것이라면…….’

    전장에서 수십 년 구른 게이츠의 경험은 저 정도의 마법진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식견을 자랑 했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그의 안력은 비록 마법진을 그리거나 발동시키지는 못하지만 어지간한 마법사보다는 마법진을 면밀히 살펴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와라! 마법사. 기사를 모욕한 대가를 목숨으로 받으마.”

    “정말 막나가는군. 어디 그럼 풀도 못 베는 네놈의 칼이 내 검을 벨 수 있는지 한번 부딪혀주마! 위에서 아래로 내리칠 것이다. 자신이 없으면 피하거라.”

    게이츠는 자세를 잡고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려서 최대한 날카로운 오러블레이드를 검에 생성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2번, 3번은 없을 것이고 있어봤자 검술로는 자신이 밀릴 수가 없었다.

    걱정되는 것은 단 하나, 만약 저 검을 단 한 번에 잘라 버리지 못한다면 나일러스는 항복을 할 것이고, 마법사 놈들은 자신을 두고 소드 마스터의 오러블레이드는 마법사가 든 검 하나 자르지 못한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닐 것이다.

    애초에 이겨도 본전, 지면 개망신인 결투를 왜 하자고 했는지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흐압!!”

    어설픈 자세로 검을 머리 위에 올리고 달려오는 나일러스의 모습, 전장에서 다른 병사가 저런 식으로 달려온다면 가슴을 베어오면 그만이지만, 한 수를 양보하기로 했기에 게이츠는 검을 땅으로 늘어뜨리고는 나일러스를 기다렸다.

    “헙!”

    나일러스는 검을 내리치는 순간 스트렝스와 그래피티 마법을 활성화시켰다.

    가벼웠던 검이 순식간에 무거워 지고 그 무게는 중력의 영향을 받아 가속도로 전환되었다.

    ‘헙! 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중급 기사 정도의 속도로 내리치는 검의 끝부분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애초에 계획된 소규모의 마나 폭발은 검의 뒤편에서 발생하여 검이 휘두르는 속도를 더욱 높여 주었다.

    ‘이게 무슨… 미친 늙탱이.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이제 거의 상급 기사 정도의 스피드로 휘둘러지는 검, 그리고 그런 검의 속도 변화에 놀란 게이츠는 순간 적으로 자신의 몸의 무게 중심을 이동하여 뒤로 옮기고는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늘어트린 검을 위로 쏘아 올리며 확신했다.

    나일러스의 밑천은 마나 폭발로 끝이라고. 마나 폭발을 통해 검의 속도를 높이는 시도는 새로웠지만 그래봐야 상급 기사 정도의 속도, 이정도면 충분히 검을 들어 올려서 막을 수 있었다.

    “크악!!”

    게이츠의 기합성에 따라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오러블레이드, 웬만한 강철 정도는 종잇장 베듯이 지나갈 예기가 검에서 느껴졌다.

    스윽.

    너무도 미미한 소리. 대결의 당사자인 게이츠와 나일러스만이 들을 수 있는 너무도 미약한 소리가 나일러스의 검에서 났다. 그리고 게이츠의 환희.

    “벳다…….”

    푸억!

    “병신 새끼!”

    게이츠는 분명히 나일러스의 검을 베었다.

    그런데 나일러스의 검은 게이츠의 정수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일러스는 여전히 검병을 쥐고 있었지만 그 검은 반이 잘린 채로 나일러스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나머지 반은 게이츠의 머리를 검집 삼아 푹 틀어 박혀 있었다.

    “이게 바로 관성이야. 이 새끼야!”

    애초에 나일러스는 그의 오러블레이드를 막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나일러스는 자신의 검을 마나가 통할 때는 무르고 마나가 통하지 않으면 딱딱해지는 마법으로 정련된 금속으로 만들고 검게 칠하여 아만티움처럼 보이게 하고 일부러 소문에는 그의 오러블레이드 따위는 막을 수 있다는 둥의 소리를 하며 게이츠가 최대한 날카로운 오러블레이드를 만들어 오기를 유도했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 생각대로 게이츠의 오러블레이드에 잘려진 나일러스의 검은 이내 나일러스의 마나가 끊김과 동시에 날카롭고 딱딱한 흉기가 되어 정수리에 박혀 버렸다.

    “한 달 전에 마법사 비꼰 새끼, 나와!”

    순식간에 끝나버린 대결에 얼어버린 좌중, 누구도 나일러스의 부름에 반응하지 못했다.

    이 대결의 결과를 받아들이는데 걸리는 시간이 대결의 시간보다 길게 걸릴 듯했다.

    “나다~ 싶으면 나온다!”

    눈까지 마주치는 나일러스의 말에 한 달 전 연회에서 제페토를 놀리던 기사가 튀어나와 나일러스의 앞에 섰다.

    “너냐?”

    “넵!”

    “봤냐?”

    “넵!”

    “잘 좀 하자!”

    “넵!”

    “들어가.”

    “감사합니다!”

    꾸벅.

    나일러스에게 인사하고 들어가는 기사에게 시선을 뗀 청중들은 이 사건의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고 눈 한번 깜짝일 동안의 싸움에 빗대어 마법사들은 기사들을 볼 때마다.

    눈을 감아요. 여러분 곁에 나일러스가 왔어요.

    …라는 노래를 부르며 기사들을 비웃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레빌리온 백작가의 백작이자 마탑주 잠의 요정 나일러스는 마법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추앙을 받게 됐고, 왕국의 전쟁에서 마법사는 항상 같은 급의 기사들보다 높은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나일러스와 게이츠의 결투에 대한 내용은 후대 기사들의 간청으로 마탑의 몇몇 수뇌부만 알고 있지만 마법사와 기사의 동등한 지위를 깬 마법사의 대외적 지위 향상을 이룬 최고의 마법사로 그 이름과 가문만은 구전되게 되었다.

    *

    *

    *

    팔찌의 영상이 끝남과 함께 후버는 감겨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절제를 못했는지 눈이 풀린 슬렌이 눈앞에 있었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마릴린이 오기 전에 방 밖으로 내다 버리면 그만이었기에 슬렌의 사소한 추태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마법사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던 레빌리온 백작가의 초대 가주의 모습은 다소 경박하였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목욕물이 준비…….”

    평소 후버는 슬렌의 후각을 믿었기에 마릴린이 방 안에 딸린 욕탕에서 목욕물을 준비하는 동안은 굳이 마릴린이 언제 들어올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슬렌도 그런 후버의 의도를 알기에 목욕탕에서 마릴린이 나올 때에는 어김없이 후버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했다.

    사실 후버가 술을 마신다고 마릴린이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후버로서는 어릴 때부터 자신과 함께 자란 마릴린에게 왠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전생에서의 기억에서나 지금의 기억에서나 아직 어린 후버가 술을 마시는 것은 좋은 모습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엑! 엑엑!

    갑작스레 슬렌의 토악질이 시작됐다.

    “주인님, 저는 술 못 먹어요. 살려주세요.”

    “너… 이 개새끼.”

    “도련님 어떻게 그런 심한 말씀을?”

    억지로 토악질을 하는 슬렌을 안아 들고는 마릴린이 슬렌을 도끼눈을 띠고는 바라보았다.

    “슬렌,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괜찮아?”

    “웩! 모르겠어요. 누나 물을 마시고 싶어요.”

    “도련님. 도련님은 괜찮지만 슬렌은 아직 어린 동물이라구요. 어린 슬렌이 얼마나 마셨으면… 그런 건 도련님이 못 마시게 해야죠! 슬렌 참아봐. 누나가 찬물 좀 줄게. 마시면 괜찮아질 거야.”

    벙찐 후버를 뒤로하고 슬렌을 껴안은 마릴린은 얼른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허허! 저 개새끼 넙죽넙죽 잘 받아 처먹던 놈이 또 날 배신해.”

    분명히 마릴린은 술을 마신 자신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슬렌에게 술을 먹인 것에 대해서 화를 냈다.

    그냥 슬렌이 오버하지만 않았으면 마릴린이 안 좋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저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억울함에서 올라오는 빡침의 기운이 후두부를 강타하였다.

    “도련님. 슬렌은 오늘 제 방에서 잘 거예요. 그리고 아직 술은 몸에 좋지 않아요. 도련님께서 술은 드시지 않으셨으면 해요.”

    방문을 빼꼼히 열고는 그 말을 남기고 마릴린은 떠나갔다.

    “하아… 오늘은 혼자 자야겠군. 뭔가 허전한데.”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 덩그러니 혼자 누운 후버는 마릴린이 없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가족은 있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마릴린밖에 없었기에 오랜만에 돌아온 영주성에서 마릴린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 주는 아쉬움은 컸다.

    아쉬움을 느끼며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눕자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도련님, 저에요.”

    “응! 마릴린! 들어와.”

    “헤헤. 슬렌은 제 방에 재우고 왔어요.”

    “그래? 나는 오늘 슬렌하고 같이 잔다는 줄 알았지.”

    “제가 어떻게 제 임무를 소홀히 하겠어요? 그냥 슬렌이 술을 많이 마신 것 같기에 찬물 좀 줘서 잠을 깨운 것뿐이에요.”

    “그래? 잘했어. 왠지 마릴린이 없으니깐 허전해서 어떻게 자야 하나 고민했거든. 날도 추운데…….”

    “저도 겨울에는 후버 도련님이랑 같이 안 자면 너무 추워요. 사실 시녀들도 겨울에는 친한 사람들끼리 뭉쳐서 같이 자거든요. 근데요. 후버 님…….”

    “왜?”

    “혹시 도련님은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신가요?”

    “마음에 둔 사람이라면? 글쎄. 내가 영지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하루 종일 저수지 공사장에서 일하느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거든. 그나마 대부분 일의 안전 때문에 내가 일할 때는 다들 경계선 너머로 나가 있어야 하고.”

    “그럼 혹시 시녀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시녀는 없으신가요?”

    “마릴린 외에는 알고 있는 시녀도 많지 않은데, 그건 왜?”

    “사실은… 소영주님 혹시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무심결에 동생처럼 생각한다는 말을 하려 했던 후버는 왠지 모르게 붉게 상기된 마릴린의 볼과 아래로 내리 깔은 채 수줍어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방의 불을 모두 껐기에 어둡지만 밝은 달빛에 의해 눈앞에 마주 누운 마릴린의 표정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한 달 전 영주성으로 귀환했을 때 슬렌의 말이 떠오르면서 귀족가에서 일반적으로 자제에게 전담 시녀를 붙여줄 때의 교육중 성에 관련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후버의 나이가 딱 그 정도이니 아마도 마릴린을 관리하는 시녀에게 그런 교육이나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음……!”

    “도련님. 잠깐만 눈을 감아주실래요?”

    마릴린의 말대로 눈을 감자 귀에 들려오는 부시럭거리는 소리, 마릴린은 오랫동안 고민을 했지만 주인의 밤 상대가 되는 것 또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후버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시녀인 자신은 후버가 결혼을 하면 잊히거나 심할 경우 후버의 본처의 질투로 인해 먼 곳으로 팔려가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귀족 영애 역시 그런 전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실제로 후버와 사랑을 나누거나 안 나누었거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백작가와는 다르게 시녀나 시종을 사람 취급하지도 않는 귀족 가문이 더 많은 것이 이 세계의 신분제인 것이다.

    “이제 눈을 뜨셔도 돼요.”

    “마릴린, 난 눈을 뜨지 않을 거야. 그 전에 내 얘기 좀 들어보겠어?”

    “도련님…….”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슬렌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한테도. 나도 다시 이야기하지 않을 거고, 마릴린도 나에게 다시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말씀이시기에?”

    디멘션 사일런스.

    “긴장하지 마. 그냥 밖에서 안에서 나는 소리를 못 듣게 한 것뿐이니까.”

    부끄러움에 목소리가 가냘파진 마릴린이 후버에게 되묻는 목소리와 후버의 영창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자신의 어린 주인이 무엇을 위해 눈을 감으라고 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후버가 눈을 뜨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저 처음부터 마법을 사용했다면 오히려 마릴린은 후버가 밖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고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건지 불안했겠지만, 다행히 후버는 무슨 짓이 아닌 말을 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릴린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아직 마릴린은 그 시대의 소녀가 그렇듯이, 아니 백작성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마릴린은 또래의 다른 여자들보다 더 순수했고 그렇기에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살던 곳, 그리고 내가 죽었던 곳.”

    “네?”

    그 후로 후버는 자신의 전생에 대해서 한참의 시간을 들여 설명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마릴린도 후버가 자신과 후버의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 마릴린은 6살 그리고 후버는 아직 1살도 되지 못했을 때의 일을 줄줄이 이야기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릴린, 너는 네가 태어나자마자를 기억할 수 있니?”

    “아니요.”

    “난 아까 말했듯이 그때부터 있었던 모든 일을 기억 한단다.”

    “하지만…….”

    “내 실제 나이는 전생과 현생을 합쳐서 대충 서른 살이 넘었지. 이번 영지 공사에서 사용된 물건도 그 기억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고.”

    “전 그냥 도련님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줄 알았어요. 귀족이시니깐.”

    “마릴린, 처음 차를 따르는 법을 배우고 예절을 배울 때가 기억나니?”

    “네.”

    “마릴린도 그 복잡한 걸 한 번에 하지 못했을 거야. 지금 마릴린이 차를 끓이고 쿠키를 만드는 게 쉽지만 그때는 아니었겠지… 그러고 보니 마릴린이 만든 쿠키는 유난히 탄내가 많이 났지.”

    “도련님은 별걸 다… 그래도 가장 잘 된 걸 가지고 온 거란 말이에요.”

    “나처럼 전생의 기억을 가진 의젓한 아이니깐 참았지. 다른 아이들이었으면 다른 쿠키를 달라고 때를 쓰면서 울었을걸.”

    놀리듯이 말하는 후버 덕분에 부끄러운 기분도 들었지만 마릴린은 긴장이 다소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춥지 않아? 일단 다시 잠옷을 입어줄래?”

    “어멋! 뒤돌아 계세요. 사실 아까부터 추웠는데 걔는 왜 이런 망사옷을 줘서는~ 힝~!”

    앙탈을 부리는 듯한 마릴린의 말에 후버 역시 평상시로 돌아온 듯해서 안도감이 들었다.

    “다 입었으면 눈 뜬다.”

    “진짜 아직까지 눈을 감고 계셨던 거세요?”

    “물론이지. 난 한 번 말하면 지킨다고.”

    “그럼 눈 뜨셔도 돼요.”

    “혼자서 많이 고민했겠네. 슬렌이 괜한 소리를 하려다가 못한 것만 해도 한 달 전이니깐.”

    “사실 많이 고민했어요. 도련님과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또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도련님이 가끔은…….”

    “가끔은 뭐?”

    “제 남동생 같은 걸요. 아카이브 경과 이야기할 때는 다른 사람 같은데 슬렌이랑 놀 때나 그런 때 보면 꼭 동생 같아요. 헤헤!”

    “풋! 동생이라니. 나도 가끔 마릴린이 동생 같은데 그럼 서로 샘샘이네. 근데 마릴린은 내가 마릴린을 가족처럼 생각한다고 했던 말을 혹시 기억해?”

    “네! 기억해요. 정말 기뻤어요. 그만큼 미안하기도 했지만요.”

    “뭐 지난 일은 됐고, 나라도 누님이 그렇게 째려보면 어쩔 수 없을 테니깐. 그래도 마릴린이 간호해준 덕분에 금방 회복했으니깐 사실 슬렌이 문제지.”

    후버가 마릴린을 향해 피식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뭐, 그게 중요 한 것은 아니니깐. 뭐 이왕 들킨 것 이 이후부터는 한잔하면서 이야기해볼까?”

    “도련님 술은…….”

    “나 서른 살 넘었어. 마릴린도 한잔해. 추울 때 한잔 정도는 괜찮으니깐.”

    “난 마릴린을 가족으로 생각해. 이곳에서 날 처음부터 돌봐준 것은 마릴린이니깐. 그래서 마릴린과 그런 식으로 밤을 지낼 수는 없어. 나도 귀족의 관습을 잘 알고 그게 마릴린을 죽이게 되거나 나에게서 멀리 떠나게 만들겠지.”

    “그건…….”

    “난 앞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 거야. 이 영지를 위해서나 나 자신을 위해서, 아니면 여행을 하겠지. 어쨌든 무언가 새로운 문물을 들여올 것이란 건 확실해. 나는 마릴린이 나를 위해서 그것들을 관리해 줬으면 좋겠어.”

    “저보고 도련님의 발명품을 관리하라고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만드는 것들 모두 적지 않은 돈이 될 거야. 내가 마릴린에게 글을 가르치고 셈하는 법을 가르치고 특히 경영에 대한 것은 마릴린이 알고 있는 것이 이 대륙의 다른 상인들이 가진 상식을 파괴할 만큼 진보된 거야. 난 마릴린이 이 지식을 이용해서 상계를, 그리고 정보를 한손에 쥐고 흔들 수 있었으면 해.”

    “제가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루 혹은 이틀 안에 하라는 게 아니야. 마릴린이 못하면 대를 이어서, 그리고 다음 대를 이어서 목표를 정하고 나아가라는 거지. 난 마릴린에게 백작의 작위를 줄 거야. 만약 나보다 빠르게 마릴린이 성장한다면 마릴린 손으로 백작위를 얻을 수 있겠지.”

    “제가 어떻게… 그런 높은 신분이.”

    “믿어. 나는 형님을 완벽하게 레빌리온가의 차기 백작으로 만들고 후작이 되어 너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릴 테니깐. 내일 당장부터 영지 소속 상회에 연락을 해둘 테니 내가 없을 때는 시녀의 일보다는 그쪽을 공부하도록 해.”

    마릴린이 놀란 눈으로 후버를 바라보았지만 후버는 이미 많은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온 후에는 아카이브 경과 크롤라이드 경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배우도록 하고. 미래에 마릴린에게 큰 힘이 되어 줄 사람이니깐. 나는 내가 이번에 확보한 특허권에서 나오는 수익의 대부분을 마릴린을 위해서 준비해둘게.”

    구체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해주는 후버의 말에 마릴린은 더욱더 믿음이 갔다.

    어차피 마릴린에게 주어진 선택은 다양하지 않았다.

    후버의 말대로 지금 백작가에 계속 머무른다면 후버의 부인이 될 사람은 마릴린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고 잘못되면 자신의 가족들도 무사하긴 힘들 것이다.

    “해볼게요. 도련님, 도련님에게 최선을 다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마릴린은 후버에게 안겨서 울기 시작했다.

    후버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 그리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

    그런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들어가 마릴린은 소리 내어 후버의 가슴에 안겨서 울었다.

    후버 보다 키가 큰 마릴린이 안겼기에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지만 울고 있는 마릴린이나 그런 마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후버나 그런 사실은 신경 쓰지 않았다.

    ‘흠흠! 후버가 제법인데. 얼마나 죽여줬으면 저렇게 감동받아서 우는 거지? 근데 최선을 다 하는 건 또 뭐고? 이상한 짓하는 거라면 언제 한번 또 정신 교육을 해줘야겠어.’

    후버의 방문에 귀를 대고 있는 것은 세실리아였다.

    마릴린이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는 세실리아가 답답한 마릴린을 보다 못해서 다른 시녀를 통해 전달한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착용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된 제품이었다.

    아이템이 전해주는 갑작스러운 신호에 호기심이 생겨 한 시간이 넘게 후버의 방문에 귀를 대고 있다가 마침 사일런스 마법이 풀리면서 마릴린이 우는 소리만 듣고 오해한 것이다.

    후에 이 오해가 세실리아의 잠꼬대를 타고 전속 시녀인 로이나에게 전해져 ‘후버는 절륜한 정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변태적인 취향이다.’라는 소문이 고용인들 사이에서 돌며 ‘후버 변태설!’을 입증할 강력한 증언이 되지만 이는 나중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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