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 순례
“이곳인가?”
5일간 말을 갈아타며 도착한 지브롤터 바위 정상에서 영지를 바라보자 영지의 조망이 한눈에 잡혔다.
너무 먼 곳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영지의 지리적 특성을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플라이 오브젝트!”
후버의 영창과 함께 수정구는 하늘을 날아 점이 되어 사라졌다.
영주성에 미리 표시한 지점에서 마나 감응을 통해 수정구의 위치가 정확하게 위치를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디텍트 마나 & 드로잉
디텍트 마나는 영지의 마나 분포도를 확인함으로써 현재 영지의 인구나 자연환경 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고 드로잉을 통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세세한 점까지 그려낼 것이다.
처음 어느 정도의 기록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영주성을 기본으로 반경 20km까지 확보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 후 후버는 하루에 한 번씩 지브롤터 바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루 간격으로 설치된 감응 마법진을 통해 영지의 모습을 수정구로 기록하는 한편 전날 기록된 수정구를 회수하여 살펴보았다.
다행히 기록의 정도는 후버의 기대보다 넓은 km 거리까지 명확하게 40km까지는 흐릿하게 기록하여 후버를 기쁘게 만들었다.
“가서 화공을 불러오도록 해줘. 대충 스무 명 정도면 될 거야.”
후버의 지시에 따라 켈럽이 20명 정도의 화공을 데리고 왔으며 후버는 그들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당부하고는 자신이 만든 수정구를 복사하여 총 20명에게 복사한 수정구를 주는 한편, 원본은 자신이 보관하며 지속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하급 수정구인데도 지출이 적지 않군. 포맷을 해서 중고로라도 다시 팔아야겠어.’
후버는 자신이 따로 사용하기 위해 빼놓은 20골드를 제외하고 200골드 중 75골드를 순수하게 수정구의 매입을 위해 사용하였다.
일반 백성의 생활에 대해서는 백작보다 자세히 아는 것이 후버였기에 예산에 대한 걱정은 그다지 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목표가 수정구를 이용하여 영지의 지도를 만들어 그것을 근거로 토목 공사를 하는 것이 목표인 만큼, 화공을 통해 자세히 기록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들 여기 집중합니다.”
“먼저 나누어 주신 수정구를 봐주시면 하루 8시간 정도 영상을 허공에 띄울 수 있습니다. 모두 따라합니다. 비주얼!”
“비주얼~”
“비, 비주얼!”
그와 함께 수십의 수정구에서 빛을 뿜어내며 영지의 전경이 허공에 비추어졌다.
“아, 아니!”
“이럴 수가. 역시 마법인가?”
일제히 생성된 영상에 화공이 눈을 떼지 못하자 후버는 화공들을 집중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집중합시다. 모두 수정구를 발아래에 내려놓고 그 앞에 앉아주세요.”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눈앞의 그림을 바라보며 화공들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 넓은 자리가 아니기에 꽉 찬 느낌이 들었지만 모두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마을의 모습에 집중하느라 좁아진 자리의 불편함마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작으면 그림을 보아도 잘…….”
“이제 그것을 위해 한 가지 동작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손가락을 맞닿게 최대한 오므리세요.”
“네.”
처음 질문을 한 화공이 대표해서 대답하며 후버를 따라 손가락을 최대한 오므렸다.
“그리고 그림의 한편에 대고 손가락을 쫙 펴줍니다.”
뭔가에 홀린 듯 화공들이 손가락을 오므리고 펴 멀리 떨어진 부분이 손가락을 중심으로 확대되어갔다.
“아니… 이런!”
확대되는 화면에 놀란 화공들이 계속해서 확대를 해대자 화면 전체가 하나의 건물, 나아가서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을 확대하여 보여 주는 수준까지 영지의 전경이 확대되었다.
이것은 후버가 스마트 폰의 사용 방법을 참고하여 수정구의 새로운 사용법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축소하고 싶으면 그 반대로 하면 됩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숫자는 1킬로의 반경을 보여 줄 때는 1000, 1미터를 보여줄 때는 1이라고 표기됩니다.”
화공들은 후버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여러분은 1킬로를 기준으로 그림을 그려 주면 되기에 가능하면 숫자를 1000으로 맞추고 그림을 그려주시면 됩니다. 자세한 상황은…….”
그 이후부터 후버는 어떤 방식으로 그려야 하는지부터 자세한 사용 방법을 알려 주고는 두 달 정도면 필요한 그림을 다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았다.
“그런데 이 수정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조금 전 질문을 했던 화공이 다시금 질문했다.
“그건 영지의 마법사이신 아카이브 경과 큐리오 형님께서 공동으로 만드신 물건이기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말에 눈치 빠른 화공 하나가 무릎을 꿇고 후버에게 말했다.
“후… 후버 님을 뵙습니다.”
애초에 후버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영지의 차기 영주인 큐리오를 형님이라 칭하는 것으로 눈치 빠른 화공은 자신의 앞에 있는 후버가 백작가의 차남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신경 쓰지 말라. 나는 그저 형님의 말을 전하러 온 사자이니.”
슬쩍 후버가 말을 놓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평민과 귀족의 차이 그런 신분 사회에서 사는 그들에게 후버가 말을 놓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다.
“근데 자네는 눈치가 빠르군. 이름이 무엇인가?”
“소인의 이름은 로베트라고 하옵니다.”
“그래? 그럼 자네가 이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어주게. 모두 들으라! 내가 화공들의 서열 관계를 알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이 일에는 로베트가 너희를 책임질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로베트에게 이야기하라. 대금은 선금으로 일인당 2골드, 모든 작품이 완성되면 총 6골드를 지급하고 필요한 물품에 식사와 소모품에 한해서 지원해 줄 것이다. 이 대우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는가?”
후버의 물음에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 화공은 그림 한 장에 받는 금액이 10실버 정도란 것을 고려하면 그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고, 식사와 각종 물감까지 지원해 준다면 오히려 고정 수입이 생기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후버 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하라.”
“감사합니다. 저는 대금보다는 이 수정구를 받을 수는 없을는지요?”
“이유는?”
“사실 저희가 그림을 그릴 때 모델들은 계속 한 자세를 취해야 하지만, 사람인 이상 그러기는 곤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과정을 못 이겨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많습니다.”
“해가 뜰 때와 질 때 빛의 변화가 영향을 주어 일관된 모델의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도구가 있다면 저희가 그림을 그리기가 더 편할 것이옵니다.”
“흠… 알다시피 수정구 하나의 가격이 약 4골드, 그리고 그 수정구에 마법을 새기면 아무리 하찮은 마법이라고 해도 그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느냐?”
후버의 질문에 로베트는 그런 사항은 몰랐다는 듯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후버로서는 기존의 이미지를 지우고 새로운 이미지를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는 마법적 기능을 추가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간단한 아티팩트라고 해도 20골드를 호가하는 것을 생각해볼 때 후버가 이들에게 그런 수고를 베풀 이유는 없었지만, 큐리오의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후버의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자신의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 수입마저 포기하는 너의 자세가 매우 보기 좋구나. 그러니 내가 영지 성에 돌아갈 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큐리오 형님께 특별히 말해보도록 하겠다.”
화공들의 표정에 다시 기대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후버가 말을 했다.
“물론 너희가 큐리오 형님을 만족시킬 만큼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형님께서도 흔쾌히 허락해주시겠지. 그리고 레빌리온 백작가는 국가가 정한 의무를 제외하고는 영지의 백성을 함부로 동원하지 않으니 약속한 월급은 틀림없이 지급될 것이다.”
“도련님과 백작가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수정구의 가치를 모르기에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던 로베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수정구가 필요한 화공은 대답하라. 형님께 명단을 제출하여 주겠다.”
이 말에 화공들이 여기저기서 자신도 명단에 끼어달라고 이야기했고 후버는 그들을 진정시켰다.
“모두 원하는 듯하니 그냥 화공 전부가 원한다고 전해 주겠다. 다른 요구 사항은?”
그 말에 모두 각자 후버와 레빌리온 백작가에 감사함을 표시하고는 눈앞의 화면에 빠져들어 갔다.
그런 화공들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고 후버는 로베트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지브롤터 바위의 책임 기사에게 요청하라고 한 후 기사에게 전하는 서찰을 한 장 써 주었다.
현재 후버는 돈이 없으니 임시로 기사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훗날 그만큼의 금전을 내려 보내주겠다는 약조 문서였다.
“모두 레빌리온 백작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랄 것까지는 없다. 그저 맡은바 묵묵히 일을 해결한다면 언제든지 평민에게도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 큐리오 형님의 생각이시니까.”
슬쩍 큐리오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후버 자신은 뒤로 빠지는 것으로 영지에 큐리오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후버로서는 큐리오의 이름을 좀 더 효과적으로 알리려고 화공들에게 선처를 베푼 것이지만, 이 일로 인해 레빌리온 백작가의 지브롤터 바위가 있는 영지는 사실주의 화풍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로베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수정구를 물려받은 피카소라는 제자가 부주의로 고장 난 수정구에서 나오는 화면으로 스승을 추억하며 그린 그림은 귀족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으며 유서 깊은 가문은 그런 피카소의 그림을 한 장씩을 가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영지를 물려받은 큐리오 백작의 수식어에는 ‘낭만의 백작 큐리오’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지만 이는 먼 미래의 일이었다.
*
*
*
마릴린은 밤중에 자신을 불러내는 시녀장의 부름에 의아해하며 시녀장의 방으로 향했다.
후버가 마릴린을 놀리고 영지를 떠난 지 3달째 되는 시기이기에 할 일이 없던 마릴린은 집 밖으로 나가려는 슬렌을 억지로 잡고는 후버의 방에서 슬렌을 종일 쓰다듬으면서 지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릴린의 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마릴린이 잘 때까지도 슬렌을 껴안고 자며 먹을 것을 주며 회유했다.
하지만 사실 후버는 슬렌에게 어느 날 조용히 따라오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그런데 마릴린의 회유로 인해 슬렌에게 후버가 따라오라는 말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릴린, 요즘 지내기 편하다면서?”
악의 없는 놀림에 마릴린의 입가에도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 자신이 이곳에 온 다음부터 자신을 챙겨주는 시녀장과 함께 자는 날이 많았기에 오히려 오랜만에 온 시녀장의 방이 정겹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세요. 시녀장님?”
얼른 시녀장의 옆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며 마릴린이 시녀장에게 말했다.
“마릴린, 너는 후버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하니?”
“저야 후버 도련님을 좋아하죠. 저한테 너무 잘해주시는걸요. 시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살살 웃으면서 대답하는 마릴린의 대답에 시녀장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시녀장은 마치 마릴린을 볼 때마다 자신의 딸을 보는 듯한 애틋함을 느꼈다.
“그래… 우리 착한 마릴린, 너한테 이런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너도 후버 도련님이 좋다니 편하게 이야기할게.”
“네 말씀하세요. 시녀장님.”
“사실 전속 시녀를 한 명씩 두는 데는…….”
그로부터 시작된 시녀장의 설명에 마릴린의 얼굴은 더는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개졌다.
귀족가의 자제가 세상에 태어나면 보통 5~6살 정도 많은 시녀를 붙여 주는데, 그것은 자제들의 놀이 상대로서의 역할도 있었지만, 성인이 되는 15살 전후에 시녀들은 자신이 담당한 귀족 자제들에 성에 대한 부분 역시 가르쳐야 했다.
그 교육에는 실습 역시 포함되어 있기에 시녀장은 마릴린에게 조심스럽게 후버가 돌아오고 마릴린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알려 줬다.
“불쌍한 마릴린, 혹시 후버 도련님이 때리거나 저번처럼.”
“아니에요. 후버 님은 그럴 분이 아니에요. 오해에요. 저번 일도 그렇고…….”
“혹시 벌써 씻어 드릴 때 이상한 짓을 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정말 후버 도련님은 그렇지 않아요. 씻으시는 것도 혼자 하시고 그런 일은 없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할게요!”
시녀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릴린이 이야기했지만, 마릴린은 시녀장보다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마릴린은 후버를 몰래 동생처럼 생각하긴 했지만, 남자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귀여운 동생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시녀장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와 닿지는 않았지만, 이미 걱정에 빠진 시녀장에게 더 짐을 지우기는 싫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괜히 긴장되네.”
시녀장에게 비밀 임무(?)를 들은 지 일주일 후 후버가 영지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후버 도련님께서 오십니다.”
후버가 탄 마차가 눈에 들어오자 마릴린은 좀 더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도련님 오셨어요?”
“응! 마릴린, 아직 안 나갔어?”
순간 웃으면서 말하는 후버가 얄미웠지만, 괜히 신경이 쓰이기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갔다 왔어요. 도련님.”
“슬렌은? 요 개새끼 또 말 안 듣고 어디 갔을까?”
“슬렌은…….”
자신의 치마폭 아래에 숨어 있는 슬렌을 보여주기 위해 치마폭을 조금 위로 올리려고 하자 안에서 슬렌이 치마폭을 입으로 붙잡고는 올리지 말라는 듯이 발등을 톡톡톡 쳤다.
“슬렌은 글쎄요. 도련님이 나가신 다음부터 안 보이던데요.”
그 말에 슬렌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마릴린의 치마폭을 놓아 주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탄력적인 치마의 움직임으로 후버는 슬렌의 위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치마 안에 있으니깐 보일 리가 있나! 마릴린 치마 조금만 들어볼래? 슬렌이 거기 있는 것 같아!”
야옹~
“고양이라고 말하고 싶구나. 우리 슬렌은 고양이가 아니라 개니까 이럴 수가. 치마 안에 있는 건 분명히 슬렌이 아니겠군. 마릴린, 실례 좀 할 게.”
확!
“개새끼, 오늘 오랜만에 한 따까리 하자. 백작님에게 보고할 때까지 알아서 잘하고 있어라.”
갑작스럽게 마릴린의 치마가 들리면서 눈이 마주친 슬렌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5초!”
휙!
마릴린의 치맛자락이 날릴 정도의 속도로 후버의 방을 향해 튀어가기 시작했다.
“봤어? 마릴린의 치마를 그냥 막 들췄어.”
“소문이 사실인가 봐? 마릴린 불쌍해서 어떡해?”
속닥속닥 하는 시녀의 목소리라고 하지만 이제 4 서클에 이른 후버의 귀에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마나가 자신에게 시녀들의 목소리를 전해주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
“마릴린 날이 춥네? 먼저 들어가 있어.”
마릴린을 일별한 후버는 백작에게 보고하기 위해 백작의 직무실로 찾아갔다.
*
*
*
“후버 도련님이십니다.”
지배인의 노크와 함께 후버임을 알리자 백작의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 왔다.
“그래, 돌아온다는 서신에는 좋은 생각이 있다 했는데 또 무슨 좋은 소식이 있는 것이냐?”
다정한 백작의 목소리, 사실 후버가 떠나가고 백작은 3일마다 후버의 동향이 담긴 정기서신이 도착하기 전날은 괜한 불안감에 집중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표시하지는 못했지만 내심 후버가 잘 지내는지 아닌지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앞으로 온 후버의 지도는 백작의 그동안 후버에 대한 평가를 모두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예, 우선 제 앞에 온 지도를 보셨을 겁니다.”
“음… 매우 상세한 지도였지. 어떻게 그런 지도를 그릴 생각을 했느냐?”
“일단 지리적인 정보가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형님의 이름을 알리려는 것이니만큼 작은 규모가 아닌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지도는 그 토목공사의 위치와 목적, 그리고 규모를 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후버의 말에 백작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지. 적당한 규모여야 하지. 백작령이 감당하지 못할 공사는 힘드니깐.”
“저는 일단 지브롤터 바위 근처의 호수인 젤러스의 물을 끌어 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그림이 그 이후 변화한 영지의 모습입니다.”
말과 함께 후버는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지브롤터 바위에서 일자로 연결된 수로가 인근의 6개의 대규모 농지가 있는 마을 주변의 한적한 임야에 연결되어 있었고, 임야는 넓은 푸른색으로 칠해 저수지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저수지와 연결되는 다른 저수지를 연결하여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기보다는 분산된 중간 규모의 저수지를 이용하여 영지 전반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렇게 되면 홍수 등의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것에 대해서는 호수의 크기보다 좀 더 크게, 수면보다 높게 만든 둔덕을 이용해서 수해 때의 피해를 줄이고자 합니다. 분명히 홍수가 난다고 해도 영지 차원에서 수문을 이용해 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후버가 백작에게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사는 지역이 아닌 지역 중 유난히 파란색의 마나가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이는 지하에 흐르는 물을 머금고 있는 마나였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작성된 지도와 대조하여 지브롤터에서 나오는 물뿐만이 아니라 영지에 흐르는 지하수와 연결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지의 수맥 형태는 잔금이 있는 방사형이 아닌 직선형이었기에 지반이 무너지는 것 또한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얇은 지하수로서 후버가 생각하기에는 매우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전체 공사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을 하지?”
“그건 대략적인 금액을 알 수는 있지만 정확한 비용을 산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략적인 비용은?”
“저수지 한 곳당 필요한 노동력은 저를 제외하고는 120가구 정도를 동원할 수 있는 정도면 됩니다. 다행히 겨울에도 공사할 수 있기 때문에 적당한 임금을 준다면 공사는 빠르게 진행할 수 있으리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비용은?”
“대략적인 공사 기간은 두 곳을 합하여 3개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공사는 낮, 밤 모두 진행되고 2교대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밤에 공사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카이브 님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라이트 마법이 걸린 수정구를 이용한다면 낮과 밤 모두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후버는 그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아카이브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줌으로써 아카이브를 그저 전면에 내세우기만 할 생각이었다.
“식사는 개인 부담을 조건으로 영지민 한 가족 당 1.8골드를 매달 지급하여 인건비로 약 540골드 정도를 지급할 것입니다. 추가로 10% 정도를 더 확보하여 영지민 부상 등의 치료비 등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그럼 너무 대우가 좋은 것 같은데?”
백작은 혹시라도 영지를 둘러본 후버가 어리기에 영지민에 대한 막연한 동정심을 가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예. 큐리오 형님의 이름으로 공표할 것이기에 좀 많은 임금을 지급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군.”
“그 외의 비용으로는 삽 360개를 사기 위한 비용인 72골드, 이 역시 여분 구매를 위한 8골드를 합쳐서 80골드가 필요하고, 손수레는 50개 정도가 필요해서 약 19골드, 10% 정도의 여유 금을 두어 22골드 정도를 사용하려 합니다.”
뜻밖에 철저하게 준비한 듯한 후버의 정리에 내심 백작이 감탄하였다.
그저 막연히 1,000골드 혹은 2,000골드 등을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적당한 금액을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만족감이 들었다.
“그 외의 비용으로는 수량을 조정하고 홍수를 막기 위한 보의 건설과 관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카이브 님과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드는지 상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대략적인 총 비용은 어느 정도가 되지?”
“이번 겨울에 총 비용은 제가 생각한 부분만으로는 약 1,300골드 정도이고 보의 건설을 생각한다면 500골드 정도가 추가로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를 건설하는 데 드는 비용이 별로 많지는 않은데 관문의 설치를 겸함에도 그 비용이 적은 이유는?”
역시 백작은 단순히 비용이 적은 것에 대해 좋아하기보단 그 이유를 후버에게 질문했다.
“인건비를 이미 1,300골드에 포함 시켰고 남은 호수를 팔 때 나오는 흙에 약간의 약품적 처리를 하여 보를 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파낼 흙을 두는 곳을 원형으로 저수지를 둘러쌀 것이기 때문에 추가되는 비용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군. 지금 나에게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후버 너의 예상일뿐이다. 공사를 하다가 자금이 부족하다면 부실공사를 하거나 규모를 줄일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첨부해서 나에게 알려준다면 허락하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갑작스레 일어난 백작이 후버를 와락 껴안았다. 벌써 자라서 영지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자신에게도 가능성이 있는 높은 위치를 포기하는 후버의 배포가 대견했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인제 그만 방으로 가서 쉬도록 해라.”
“예, 아버지.”
후버 역시 백작과 소영주의 관계를 벗어나 아버지와 아들로 그런 백작의 마음을 느꼈다.
자기 자랑 같지만, 백작이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마음과 인정하는 것을 느낀 것이리라.
두 부자는 오랫동안 서로 껴안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
백작은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편이었기에 이런 기회가 많지 않았고 후버로서도 너무도 오랜만이라 서로 어색했던 것이다.
*
*
*
백작의 방을 나온 후버는 오랜만에 보는 마릴린에게 자신이 영지 밖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해줄 요량으로 서둘러 가려고 했지만, 코너를 돌자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이브를 볼 수 있었다.
“도련님, 잠시 저와 이야기를.”
“글쎄요. 아카이브 경, 오늘은 너무 피곤하군요.”
후버에게 받은 종이 뭉치를 밤새서 검토했던 아카이브는 경악과 충격을 겪는 것과 동시에 뭔가 자신의 경지를 높일 실마리를 잡아가는 듯한 느낌에 후버가 돌아오기를 누구보다 초조하게 기다렸다.
후버와 이야기를 한다면 자신의 경지를 높일 수 있겠다는 뒤늦은 학구열이 불타올랐지만, 곁에 없는 후버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답답함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말이라도 타고 가고 싶었지만, 세실리아와 큐리오에 대한 교육은 그의 의무였다.
그렇다고 서신을 보내면 자신이 느꼈던 경지를 올릴 수 있을 듯 말 듯한 간질간질한 느낌만 계속될 뿐, 서클이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서신을 보내기보다는 5서클 마도사의 모든 인내심을 동원하여 그러한 충동을 억지로 눌러 앉히려고 노력했다.
다시금 찾아온 높은 서클에 대한 열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오직 그 생각만을 하게 하였다.
후버가 돌아온다는 서신을 받은 이후 1주일간 그는 큐리오와 세실리아에게 날이 차가워질 때는 적응을 잘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가정교육 시간까지 포기하고는 필러 경에게 두 자제의 교육까지 몰아버렸다.
후버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막연한 궁금증을 정리하느라 그 시간을 모두 사용한 것이다.
덕분에 고생하는 것은 오전에는 제이드, 오후에는 필러 경으로 이어지는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하게 된 큐리오였다.
반면 세실리아는 오히려 그런 변화를 반기며 검술 훈련에 더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제가 좀 피곤하군요.”
“후버 님. 그러지 마시고 저에게 약간의 시간을.”
“아카이브 경, 저는 오늘 막 돌아왔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쉬고 싶군요.”
그런 아카이브의 열정을 후버도 느낄 수 있었지만,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고 오히려 튕기는 대범함을 보여 주며 아카이브의 다급한 표정을 즐겼다.
“내일 평상시에 아카이브 경의 수업을 받는 시간에 가도록 하죠.”
“아니요, 아닙니다. 그보다 빨리 아침에는 어떻습니까? 요즘 두 자제분의 건강 때문에 수업을 하지 않아 아침부터 가능합니다. 도련님.”
5서클 마도사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달한 듯하다.
하지만, 후버는 아카이브의 눈에는 다급함을, 표정에는 여유가 있다는 듯이 미소 짓는 부조화가 특히 인상 깊어서 좀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뿐이었다.
“저 역시 오랜 여행으로 건강이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큐리오 형님과 세실리아 누님이 수업받기 시작할 때까지 저도 좀 쉬고 싶습니다.”
“아… 아 그것은 건강 때문이라기 보단, 아… 도련님은 여행을 해서 체력과 날씨에 대한 저항을 기르셨으니 괜찮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오히려 이제 규칙적인 생활이 더 중요하신 단계입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러니깐 아침에 뵙는 것으로 알고 저는 이만 바쁜 일이 있어서.”
후버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과 동시에 캐스팅을 마친 그는 후버에게 홀드 마법을 걸더니 자신의 몸에는 헤이스트와 블링크 마법을 걸고는 훅하고 사라져 버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홀드 마법이 풀렸고 후버는 실소가 나왔다.
결국, 마지막은 체면 유지를 하기보단 실리를 취하는 그의 뒤늦은 학구열의 변화가 새로운 탓이다.
“급하긴 급했나 보네.”
후버는 마릴린과 슬렌이 기다리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슬렌을 생각한다면 더 천천히 가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마릴린이 누구보다 반가웠기에 필러 경과 검술을 연습하는 세실리아, 제이드에게 투정을 부리는 큐리오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릴린, 나왔어~”
장난스러운 후버의 목소리에 마릴린의 ‘어머!’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양철 물통이 떨어지는 땡그랑 소리가 후버의 귀를 자극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슬렌은 간절한 표정으로 후버를 올려보았다.
자세는 과거 후버가 슬렌에게 기합을 줄 때 자주 사용하는 그릇 안으로 머리를 파묻듯이 박고 있었다.
슬렌이 흘린 땀이 머리를 박고 있는 그릇을 가득 채울 때까지 계속될 거라고 후버가 엄포를 놓곤 하지만, 실상은 이렇게 마릴린이 물을 부어주는 것을 후버 역시 모르지는 않았다.
단지 모른 척을 할 뿐. 하지만 지금은 딱 걸린 이상 그냥 넘어가주는 것도 곤란했다.
나는 싫다고 했는데…….
후다닥 일어난 슬렌이 글자를 배열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자, 마릴린이 휙 하고 뒤에 배열될 ‘마릴린’이라는 글자의 블록을 차버렸다.
무슨 말을 할지는 뻔했지만, 어차피 마릴린이 괜히 물을 억지로 부을 이유도 없었기에 슬렌의 노력은 무시해 버렸다.
“누가 그랬다고?”
아예 마릴린은 자신의 글자가 적힌 명패를 집고는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마릴린이 한 거예요. 슬렌은 잘못 없어요!!”
순간 모두가 굳어 버렸다.
말을 해버린 슬렌도, 명패를 숨긴 마릴린도, 여행에 지쳤던 후버도 모두 굳었다.
“내가 말을 했어요. 주인님 내가 말을 했어요.”
“박아! 말할 수 있으면 명패를 모을 필요는 없겠네.”
“멍! 멍!”
“박아! 땀으로 그릇의 반절만 채우면 봐줄 테니깐! 남은 만큼 채워놔!”
“주인님, 그건 아니죠. 명백히 그릇이 밑으로 갈수록 오목한데 지금 마릴린이 부어준 건 4분의 1밖에 안 된단 말이에요.”
일반적으로 슬렌의 강변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마릴린, 슬렌이 말할 수 있는 것 알았어?”
“아니요. 저도 처음 알았어요. 근데…….”
슬쩍 머리를 박는 슬렌을 바라보는 마릴린.
“말을 하니깐 별로 귀여워 보이지는 않네요.”
“그러게… 너 말하지 마라!”
“엑? 주인님, 저한테 그렇게 말을 가르쳐 놓고서는 어떻게 그럴 수가?”
“아니다. 이미 덜 귀여우니깐 세실리아 누님 앞에서는 특히 말하지 마라. 1년간 참는다면 따까리 이번은 봐줄게.”
“네.”
대답과 함께 슬렌이 물그릇을 치워버리고는 마릴린의 품에 안기려 했지만, 슬쩍 슬렌을 밀어낸 마릴린 때문에 슬렌은 한편에 마련된 자신의 방석에 처량하게 축 처져서 앉아 버렸다.
“배신자의 최후는 항상 외로운 법이지, 잘했어. 마릴린.”
“네, 도련님.”
“미안해. 마릴린, 알잖아! 주인님이 마릴린을 한 따까리시키지는 않으니깐 무서웠단 말이야.”
슬쩍 흘겨보던 마릴린이 배시시 슬렌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직 어린 슬렌이 거짓말을 하는 나쁜 버릇은 가지고 있지만, 딱히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근데 슬렌, 언제부터 말하기 시작한 거야?”
“조금 전에 저도 모르게 무서웠어요.”
오들오들 떨면서 다시 은근슬쩍 마릴린의 품에 안기려고 하자 마릴린도 자신의 무릎을 내주었다.
“이걸 해부해볼 수도 없고.”
“없죠. 없고말고요. 슬렌은 주인님의 충실한 종이 될 거예요. 앞으로도 사랑해주세요. 해부 같은 건 사악한 흑마법사만 하는 거예요.”
“뭐 그렇다면야 한 따가리 하기 싫을 때는 언제든지 말해. 내가 다른 걸로 바꿔 줄 테니깐.”
찔끔한 슬렌이 마릴린의 품에 더 파고든다. 후버는 문득 그런 슬렌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담하던 7살의 마릴린의 이미지에서 다소 성숙한 지금의 마릴린을 다시 보니 풍만한 몸매의 마릴린의 가슴이 지붕이라도 된 듯이 슬렌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언젠간 내가 6서클에 올라 패밀러어 마법을… 아니야, 내가 동생 같은 마릴린에게 무슨 생각을, 내일부터 슬렌에게 엘레나와 친하게 지내라고 해야겠어.’
“영지에 별일은 없었고?”
“네, 후버 님이 떠나시고 별일은 없었어요. 그냥 전 후버 님이 사라지시니깐 너무 심심했어요. 영지 밖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
마릴린이 후버의 팔짱을 끼고는 귀엽게 투정을 부렸다. 사실 마릴린은 시녀장과의 별일이 있었지만, 그 생각을 하니 후버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후버의 옆에 팔짱을 끼는 것으로 후버의 시선을 피했다.
“그거요. 마릴린이 사실 시녀장한테…….”
콩!
“응? 무슨 일인데?”
“아니에요. 재미있는 얘기해주세요. 제가 시녀장님한테 혼난 것 가지고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마릴린은 괜한 말을 하려 한 슬렌의 머리를 꾹 눌러 버렸다.
고민 상대가 없어 슬렌에게 이야기한 것인데 그걸 또 눈치 없이 말하는 슬렌에게 말한 것을 잘못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너 슬렌, 앞으로 누나라고 불러! 어딜 나이도 어린 것이 반말이야 반말이.”
“그래! 슬렌, 누나라고 불러라. 억울하면 네가 먼저 태어나든지.”
“억… 갑자기 왜? 마…릴…린.”
슬렌이 살짝 뒷말을 흐리자 마릴린이 다시 꿀밤을 때리고는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라고 주의를 줬다.
단순하게 명패를 만드느라 존칭을 생략해서 그럴 필요를 못 느꼈지만, 변화에는 적응이 필요한 법, 후버는 슬렌과 마릴린의 선후 관계를 다시금 정리해주고 마릴린에게 자신이 영지를 돌아다니며 겪은 사소한 일을 대단한 일로 과장하여 설명을 해주며 밤을 지새웠다.
오랜만에 자신의 방에서 깊은 잠을 잔 후버는 다시금 아침을 맞이하여 아카이브에게 자신이 전해주었던 종이의 꼼꼼한 부분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만드신 물건이 모두 예사롭지 않습니다. 어찌 벌써 이런 생각을 하시는지, 제가 마탑에 들어간 나이가 5살, 수십 년 동안 마법을 갈고 닦았습니다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벌써 마법을 응용하실 생각을 하시다니.”
“다 스승님이 좋은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저 마법 수식만을 가르쳐 드렸는데 도련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것을 응용하셨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탄식을 겸한 아카이브의 감탄에 마법과 전생의 기억을 응용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놓였다.
“혹시 특별히 마음에 드시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저는 특히 이 물건이 마음에 듭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상식을 그저 폐쇄 마법진 만으로 뒤집어 버리다니. 아마 저의 스승님께서도 이런 사실을 아신다면 정말 놀라실 겁니다.”
그가 가리킨 것은 전생의 사이폰 효과를 응용하여 만들어 후버가 가칭으로 ‘영구빨대’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기존의 마법을 이용하면 당연히 물을 아래에서 위로 흐르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발현된 모든 마법은 계속해서 마나를 불어 넣어주지 않는 한 언젠가는 그 효용이 다하는 것이 당연한 법칙이었다.
하지만, 폐쇄 마법진은 초보 마법사에게 마나의 성질을 느끼게 해주려고 만들어져 단순히 스승이 주입한 마나가 마법진 밖으로 잘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고 사용하는 마법진으로 충분한 양을 공급해 준다면 물리력을 사용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마법진이었다.
그런 효과 때문인지 서클을 이루지 못한 시절이나 제자를 받을 정도로 고 서클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마법사만이 사용하여 사실상 더 이상의 연구가 이루어 지지 않는 마법진이었다.
후버는 마나의 흐름은 높은 밀도에서 낮은 밀도의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이용하여 전생의 화장실 배관과 같이 생긴 관을 만들고 연장하여 물의 속성을 띤 마법진을 영구히 흐르게 하였다.
초기에는 소량의 물만이 마법진을 타고 흐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많은 양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해 결과적으로 수도관을 꽉 채운 굵은 물줄기를 배관에 흐르게 한 것이다.
마법진의 전위차를 둠으로서 그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후버가 저수지를 만들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든 장치였다. 마법진을 수도관의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한다면 유체역학을 무시하고 원활한 물의 흐름을 기대할 수 있어 철이 귀한 이곳에서 요긴하게 쓰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 그 현상에 스승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것은 후버 님께서 생각한 것인데 어떻게 제가…….”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싶지만, 도의상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지 말끝을 흐리는 아카이브의 말에 후버가 재차 아카이브의 이름을 사용할 것을 권하였다.
“제가 배운 모든 것은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것, 항상 아카이브 경께서 저에게 마나를 모을 때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단지 그것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아니…….”
순간적으로 놀란 아카이브가 황급하게 눈을 감고 마나명상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중대한 일이 일어난 것을 느낀 후버가 방문을 살짝 열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방해하지 말라는 글을 가지고 있던 주머니칼을 이용해 급하게 휘갈겨 쓰고는 아카이브의 곁을 지켰다.
아카이브는 자신이 5서클에 이르렀을 때를 회상하고 있었다.
4서클과 5서클의 차이, 그가 느꼈던 첫 번째 차이는 공간의 지배였다.
빠르게 회전하는 서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소량의 마나가 지배하는 공간.
그 공간 안에서 그는 절대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법 실험의 실패로 말미암아서 시약이 폭발할 때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은 노쇠한 자신의 눈이 아니라 마나였고, 5서클이 된 이후 자신에게 무언가 부탁하기 위해 찾아오는 귀찮은 귀족들에게 압박감을 준 것도 바로 이 공간의 지배였다.
그런 효용을 가지고 있기에 안전한 마탑을 떠난 뒤로는 좀 더 많은 양의 마나를 풀어내 자신의 주변을 항상 살폈다.
‘아… 그래 마나는 높은 밀도에서 낮은 밀도로 흐르는 것이지, 4서클에 이르고 마나에 감응하여 주변을 인식하는 것이 신기하여 언제부턴가 나는 마나를 주변에 풀어둔 생활이 익숙해져서 그런 버릇이 5서클이 되어서도 유지됐어. 나 스스로 마나의 장벽을 치고 자연의 마나를 거부했으니 6서클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러한 깨달음과 함께 아카이브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의 마나를 받아들여 자신의 마나를 더해 아래쪽으로 발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공중 부양이 높이에 따라, 그리고 얼마나 마나 홀을 비우느냐에 따라 같은 6서클이라도 미미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보이곤 하였다.
하루 그리고 이틀, 놀랍게도 아카이브는 공중에 1미터 이상 뜬 채로 2일간 자신의 자세를 유지했다. 무의식의 발현, 마나의 배출을 통해 잡히는 균형, 모든 것이 아카이브의 높은 이해도와 성취를 보여주는 듯했다.
후버는 문 앞에 앉아 그런 아카이브를 보았다. 이러한 경험은 후버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아카이브에게 방해가 될까 수정구를 이용하여 녹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아카이브의 섬세한 마나 조정을 경이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천천히 땅을 향해 안착하고 여운을 즐기던 아카이브의 눈이 떠지며 그전과는 다른 생기가 눈에서 느껴졌다.
이러한 아카이브의 변화를 가장 반기는 것은 백작과 근근이 아카이브의 말상대가 되어 주었던 필러 경,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후버가 잠근 문을 열어 주었다.
“아카이브 님! 축하합니다.”
“아카이브 경! 축하합니다.”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인 필러와 영지의 주인인 백작의 축하인사에 아카이브는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경지는 어찌 된 것입니까?”
“대략 6서클, 그중에서도 중반은 된 것 같습니다.”
뿌듯함이 느껴지는 아카이브의 목소리 사실 아카이브의 나이가 이제 60세 정도를 바라본다고 생각했을 때, 그 나이에 6서클이라고 한다면 다른 마법사보다는 더 빠르게 6서클로 올라간 것이기에 백작뿐만 아니라 다른 영지의 가신들 역시 그런 아카이브의 성취를 진정으로 축하해 주었다.
“나, 레빌리온가 백작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앞으로 일주일후 영지의 잔치를 하루 동안 선포한다. 가신들은 이 사항을 명심하고 잔치의 진행에 빈틈없이 하도록 하여라.”
“감사합니다. 백작님!”
우렁찬 백작의 목소리로 영지의 기념일까지 제정하여 축하하자 그런 백작의 성의에 아카이브가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스승의 경지가 7서클이니 스승의 경지에 한 발짝 다가간 한편, 젊어진 몸에서 느껴지는 힘이 자신도 7서클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생겨났다.
“스승님! 축하합니다.”
“아니야! 오히려 후버 네가 문을 지켜준 덕분에 아무런 방해 없이 경지를 밟을 수 있었다. 오히려 내가 고맙지.”
“스승님! 축하합니다.”
“그래, 세실리아, 그리고 큐리오까지, 마탑에서 경지에 올랐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축하해 주려고 다가오기보단 질문부터 쏟아졌을 텐데. 너희 둘을 보니 이 영지에 몸을 의탁하길 정말 잘했구나.”
연이은 축하에 감동받은 아카이브는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후버를 제외하고 모두를 되돌려 보냈다.
후버의 도움으로 경지에 올랐으니 감사한 마음과 아직 궁금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필러에게는 다음에 찾아가겠다는 의미로 눈을 한번 찡긋했다.
자신이 이번에 깨닫게 된 것이 필러에게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버, 먼저 고맙구나. 자리를 지켜준 것이나 나에게 깨달음을 준 것 모두.”
“다 스승님께서 걸어오신 인생이 반영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것참, 고맙구나. 그런데 사실 내가 새로운 경지에 올라가다 보니 스승님 생각이 간절하더구나. 그래서 그런데 염치없지만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무슨 일이든지 말씀하세요.”
“정말 너에게 염치없지만 내가 마음에 든다는 그 현상을 내 스승님의 이름을 붙여줘도 되겠느냐? 네가 날 돕듯이 스승님께서는 내가 고아였을 때 날 거둬주셨고 단순히 마법뿐만이 아니라 생명의 구함을 받은 나로서는 나를 깨달음으로 이끈 저 현상을 스승님의 이름으로 학회에 보고하고 싶구나.”
“으음…….”
“아무리 스승님께서 7서클의 마도사라고 해도 사실 스승님께서 아직 학회에 자신의 이름으로 마나에 대한 새로운 현상에 대한 보고서를 내신적은 없어 평소 그 부분을 가장 아쉬워하시니…….”
슬쩍 뒷말을 줄인 아카이브의 말이 끝나고 후버는 장고에 들어갔다.
초조한 표정으로 후버의 결정을 기다리는 아카이브는 스승과의 연구성과 공유에 대한 사항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카이브의 생각과는 다르게 후버의 고민은 자신의 스승님에게는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는 부분이었다.
“스승님.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는 스승님에게는 보답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많이 받았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스승님께서 스승님께 무엇을 드리고 싶듯이, 저 역시도 스승님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알려 주시지요.”
기특한 후버의 태도에 아카이브의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승과 제자의 따듯한 정, 자신과 마나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가진 이런 제자를 위해서는 무엇을 못해주랴?
아카이브의 그런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후버에게 가신과 영지의 도련님이라는 위치를 떠나 편하게 말을 하게 했고, 아카이브가 지금까지 의무적으로 느껴졌던 가신과 영주의 관계가 아닌 진정한 가신과 영주의 관계로서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마 스승님께선 나와의 공동연구로 발표하실 테니 오히려 너의 이름이 들어가지 못하는 게 미안할 뿐이지.”
“알았습니다. 혹시 스승님의 스승님께서 다르게 생각하신다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그래 그러도록 하지. 나는 스승님과 통신을 해야 하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예, 스승님. 그럼 이만 전 물러나겠습니다.”
굳이 싫다는데 더는 권할 필요는 없었다. 아카이브의 방을 나온 후버가 갑자기 풀리는 긴장감에 몸이 한쪽으로 기울자 대기하고 있던 마릴린이 그의 몸을 부축해 방까지 안내했다.
3일간 긴장 속에 밤을 지새운 후버에게도 너무나 긴 하루였다.
*
*
*
“어! 아카이브의 냄새가 가까워 온다.”
“슬렌! 아카이브 경에게도 존대를 써라. 아니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는 모두 존대를 써라. 그래야지 어디 가서 잡아먹히지 않는다.”
“맞아, 슬렌. 아직 익숙하진 않겠지만 가능하면 말을 안 하고, 할 때는 항상 공손하게 해야 돼.”
“알았습니다. 주인님 그리고 누나.”
축제가 끝나고 나른한 오후를 즐기고 있을 때 느닷없이 슬렌이 아카이브가 후버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들어오세요. 스승님.”
“흠흠~ 미안하구나. 축제가 끝나서 피곤할 텐데.”
“아니에요. 저보다는 스승님이 더 피곤하시죠. 축제의 주인공이시잖아요.”
“뭐, 나는 괜찮다.”
“그런데 스승님. 필러 경과는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그게 요즘 필러 경이 이런 저런 일로 바쁘더구나. 영지가 축제에 들어간 만큼 치안부터 신경쓸 게 많아서인지 그와는 아직 대화를 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스승님께선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다른 게 아니라 백작님께서 네가 영지의 사업을 하는데 도움이 좀 필요할 것이라고 하더구나.”
“아… 안 그래도 오늘 저녁 시간에 스승님을 찾아뵙고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었어요. 우선 이걸 봐주시겠어요?”
말과 함께 후버는 자신의 책상에서 검토하고 있던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일전에 백작에게 말한 저수지의 개념도가 그려진 것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좀 더 빡빡한 숫자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저수지 계획이군. 이런 일이라면 나보다 총관이 더 적합할 듯한데…….”
“사실 이 일에 스승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무슨 뜻인가? 대략적인 필요 물자를 나타내는 것은 알겠는데.”
“우선 제가 파야 하는 저수지의 직경 가로 200m 세로 63m 정도이고 깊이는 50m 정도입니다.”
“그렇군. 마저 설명을 해주게나.”
“삽질 한번에 10입방 센티미터를 팔 수 있다고 가정 했습니다. 이런 가정이 나온 데에는 이번 여행길에 일반 백성에게 삽을 쥐어주고 파보게 한 결과 아무리 힘이 없는 일반인이라도 최소 그 정도의 흙을 한 번에 나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힘이 좋은 장병들 역시 한 번에 그보다 많은 양을 팔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쳐가면서 점점 더 적은 양의 흙을 파거나 작업 시간이 길어지니 이 정도가 합당합니다.”
“그렇지. 사람이 계속해서 같은 노동을 반복할 수는 없으니.”
“그렇습니다. 10입방 센티미터로 총면적을 나눈 결과 6만 번의 삽질이 필요하고, 총동원 인원이 낮밤을 합쳐서 360명씩, 두 무리이기에 720명 한 명당 8,800번의 삽질을 해야 만이 땅을 팔 수 있습니다. 이것을 초로 변환하면 공사기간 내에 노동자 한 명당 250초에 한 번의 삽질과 그에 부수되는 운반 작업, 그리고 보를 만들기 위한 배치 작업을 실시한다면 기간 내에 완공이 가능합니다.”
“250초라, 한 번의 삽질이 아니라 한 번의 삽질과 그 연계되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듯싶구나. 삽질을 하고 보까지 움직이고 흙을 덮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 시간이라면 너무 빠듯해 보이는 구나.”
“그렇습니다. 특히 문제는 깊이 파고들수록 한 번의 삽질과 그로 인한 운반 작업을 250초 이내에 맞추는 것이 힘들게 됩니다. 중심점부터 제방까지 가는 데만 그 시간을 초과하니까요.”
“그렇겠지… 그래서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아카이브는 처음부터 수레의 사용을 예상했기에 수레를 이용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수레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후버는 다시금 한 장의 문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카이브에게도 익숙한 모양세로 후버가 아카이브에게 여행을 가기 전 건네주었던 서류 중 한 장이었다.
다른 모든 새로운 발명품이 그저 숫자만 써 있는 것과는 다르게 그 물건에만 이름이 붙어 있었기에 아카이브도 그 부분만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바라보았었다.
“이것은 큐리오벨트가 아닌가?”
“네. 형님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번 공사에서는 흙을 이 벨트 위로 쌓으면 자동으로 움직이는 벨트가 흙을 들어서는 보를 만드는 지점까지로 움직이게 됩니다. 삽질을 하는 사람들은 삽질만 하면 되고 보를 만들 사람들은 보만 만들면 됩니다. 벨트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는 수레에 모아 한 번에 이동을 시키면 되고요.”
“아하! 이렇게 사용하려고 만든 것이었군. 정말 대단해. 그런데 공사는 앞으로 한 달 정도 뒤인데 그때까지 이것을 충분히 만들 수 있을까?”
“이미 그것을 만들 기본 장치는 모두 완성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고민을 하시긴 하셨지만 1달 전에 서신을 통해 미리 영지의 공방에 주문을 해두었고 돌아오자마자 그것은 체크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생각한 대로 돌아가던가?”
경험 많은 아카이브가 바로 그 부분을 지적했다. 수없는 마법 실험을 해본 아카이브는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피널 마법과 그리스 마법을 적절하게 혼합해서 사용한 결과 마나석이 없을 시의 출력은 3시간 정도, 수정구에 마나를 일시적으로 담아두는 마나 저장석을 이용하면 48시간 이상 무리 없이 동작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가장 위험한 부분이 이 부분이었습니다.”
“놀랍군. 놀라워. 사실 네가 말한 마나 저장석의 특징은 과거부터 알려진 현상이지만 그 쓰임새가 많이 않았지. 전방위적으로 마나를 뿜어내는 저장석의 용도는 그저 스승이 제자에게 마나를 느끼게 할 때 다소 밀도 높은 마나의 방을 만들 때뿐, 더 이상의 효용을 찾을 수 없는 게 학계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는데…….”
“예. 하지만 아무런 제약 없이 마나를 방출하기에 저장석은 48시간마다 한 번씩은 마나를 충전시켜줘야 합니다. 그 부분이 가장 힘든 부분이지요. 그리고 스승님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렇구나.”
그때 후버가 조심스럽게 아카이브에게 말을 했다.
“그리고 저에게 마나 스캔을 사용해 주시겠습니까?”
후버는 지금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때라는 것을 알았다.
백작령에서는 아카이브를 영지의 마법사라 부르지만 사실 영지의 마법사라기보다는 손님에 가까울 정도의 업무를 하던 아카이브가 협조하지 않으면 자신의 공사는 기간 내에 끝내기가 요원해 진다.
“무언가 여행 중에 변화라도 있던 것인가?”
“예.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번 봐주시지요.”
아직 4서클인 그로서는 모든 수정구를 충전해주는 것은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마나석을 사용하면 공사의 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져 버린다.
아카이브의 참여를 가신으로서가 아닌 동등한 연구자로서의 연구로 격상시키지 않는다면 아카이브의 온전한 협력을 얻어 내기는 힘들다는 게 후버의 생각이었다.
어제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아카이브의 마음이었지만 아직 후버는 그러한 사실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4서클… 그것도 5서클의 고리가 희미하게 보이는군.”
“예, 저는 4서클 후반의 마법사입니다. 지금까지 아카이브 님을 속여서 죄송합니다만 사정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뭐, 이젠 놀랍지도 않군. 놀랍지도 않아. 4서클! 그 나이에 4서클이라 허허허!”
아카이브는 이제껏 천재라는 것을 부정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마법사는 수식의 천재는 있어도 3서클 이후 깨달음의 학문으로 그 성격이 변할 때는 천재란 것은 무용하다.
아니, 2서클만 되도 3서클에 오를 때의 그 미묘한 변화를 잡아내지 못해 평생 2서클의 굴레를 벗어 던지지 못하는 마법사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벌써 4서클 이라는 후버의 경지를 보며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후버야. 네가 가지고온 설계도를 보면서 나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에 참여해보고 싶구나.”
‘됐어. 이제 아카이브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는다면.’
“하지만 나 역시 한 가지 부탁이 있구나.”
“말씀하세요.”
“사실 어제 저녁 나의 스승님에게 내가 한 서클이 높아진 것과 너의 발명품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그 말을 듣고 스승님께서도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여하고 싶다고 하시더구나.”
“음… 스승님이 모시고 계신 스승님의 성함도 모르는데…….”
“크롤라이드, 내 스승님의 이름이지. 스승님께서는 그러한 이론을 공짜로 받을 수는 없다고 하셨다. 단 1년이지만 백작가에 머물면서 후버 너를 도와준 후, 이론을 나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시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갚으려고 한다.”
“하지만 저희 영지는 그럴 만한 예산이…….”
“그 점에 대해서는 스승님께서 영지에 가능한 한 피해가 안 가도록 마법 실험에 필요한 모든 재료는 직접 공수하기로 하셨다.”
7서클 마도사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4서클인 후버와 아카이브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6서클과 7서클의 차이였다.
그 차이는 단순한 마나량에서부터 7서클이 6서클을 압도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각 영지에서는 7서클의 마법사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데, 가장 대표적인 조건이 공작가 등에서 제공하는 무한정의 마법 실험 도구의 지원이었다.
일반 백작가의 1년 예산을 가뿐히 넘고 공작가의 년 예산 중 20%가 마법사 한 명의 유지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7서클 마법사쯤 되면 단순히 마법사가 아니라 전쟁 억지력마저도 생기는 전략 무기라는 사실이 대륙의 통설이었다.
한 국가의 7서클 마도사는 대략 5~10명 정도였다.
후버는 크롤라이드의 그러한 파격적인 발언이 너무나 놀라웠다.
“정말 그저 손님으로서 영지에 몸을 의탁하시는 것입니까?”
“영지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대에 외부적으로 활동하는 마법사는 2~3명 정도. 국가 간의 전쟁이 발발하면 상대국의 7서클 마도사를 견제하기 위해 왕국에 한명의 마도사를 배치하기에 만약 적국에서 왕성을 포기하고 3명의 마도사를 일시에 자신의 국가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왕성 전체가 쓸려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크롤라이드가 영지에 아무런 조건도 없이 온다는 것은 백작가에 너무나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영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를 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도움까지야. 크롤라이드 스승님께서도 후버 네가 정립한 새로운 이론을 보고는 많이 놀라셨다. 아직 거친 수준이지만 1년간 너와의 대화를 통해 좀 더 짜임새 있게 가다듬는 것이 목표라고 하셨으니.”
“어떠한 일이든지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저수지 건립계획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고 아카이브와 후버는 내일 그가 만든 큐리오벨트의 시험 동작을 크롤라이드가 온 이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내 의도와 다르게 형님은 다르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
후버는 아카이브와의 대화와 이러한 사실을 큐리오에게 알려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이 들었다.
전생의 나이까지 친다면 후버의 나이는 이제 40대 초반, 그가 보기엔 큐리오나 세실리아나 만만한 동생과 성격 있는 동생으로 나뉠 뿐이기에 쉽게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큐리오의 나이는 전생에서의 막 사춘기의 나이였다.
‘하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후버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옆에서는 마릴린이 잠꼬대와 함께 갑작스레 후버가 없어져서인지 후버를 찾아 열심히 다리를 허우적대고 있었다.
허우적대는 마릴린을 잠시 바라보던 후버는 마법주머니 안의 술을 한 병 꺼냈다.
“크으~ 이 맛에 산다니깐.”
영지 밖으로 나간 또 다른 이유는 본의 아니게 10년 이상 절주를 해왔던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화공들에게 수정구를 더 나누어 준다는 명목하에 백작에게 약간의 운용자금을 더 받은 후버는 그 돈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향후 몇 년간 마실 술을 사는 데 사용하는 공금횡령을 저질렀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명목으로 합리화를 하고는 아카이브가 6살 때 생일선물로 준 공간주머니에 가득가득 술을 채워오는 것으로 영지순례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포도주와는 다른 알싸하게 식도를 타고 넘는 독주의 느낌은 전생에 자주 마셨던 소주를 생각나게 해서 묘한 향수병을 자극하고 달래며 후버의 아침 일과 중 빠지지 않은 중요한 소일거리가 되었다.
“도련님, 뭐 하세요?”
후버의 감탄사를 들어서일까? 잠이 덜 깬 듯한 마릴린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태양을 보면서 베리 주스 좀 마시고 있었어. 마릴린은 좀 더 자.”
“네, 도련님. 조금만 더 잘게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톡톡.
마릴린이 침대로 좀 더 파고드는 것을 본 슬렌이 슬쩍 후버에게 몸을 기대고 은근한 눈빛을 하고는 후버가 감춘 술병을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후각이 발달한 슬렌은 후버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후버에게 자신에게도 알코올의 축복을 내려달라고 요청했고, 그날 이후로 후버가 술을 마실 때면 이렇게 그릇에 적당한 안주를 담아 물고 와서는 한 잔씩 받아먹으며 말을 할 수 있지만 남들 앞에서는 말 못하는 설움을 달래고 있었다.
“너도 한잔 받고.”
“요즘 행복하다. 주인.”
“그래그래. 너도 오죽 심심하겠니.”
아침마다 벌어지는 한 마리의 축생과 어린 인간의 대작이 이루어지려는 순간 강력한 마나의 변화가 관찰되었다.
“아카이브의 방 쪽인데 무슨 일이지?”
“어제 아카이브의 스승이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그거군. 뭐 그럼 신경 쓰지 않고 한잔 더?”
“콜~”
어차피 만나게 될 것 아침 일찍부터 머리를 쓰기 싫었던 후버는 그냥 그런 마나의 유동을 무시해버리곤 한 잔의 술을 더 마신 후 조심스레 마릴린이 자고 있는 침대로 들어가 늘어져 버렸다. 축생과 인간의 우정이 깊어가는 아침이었다.
“마릴린! 마릴린!”
대충 정돈 되었지만 아직도 나른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마릴린이 단장을 하기 위해 늦잠을 자는 후버의 방을 나와서 시녀들 전용의 샤워실로 발길을 옮길 때 평소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한 시녀가 마릴린을 불러 세웠다.
“응 왜? 아함 ~졸려.”
“흐흐흐. 그 졸음의 뜻은 어제 잠 못 잔 거야?”
“뭐야? 또 장난하고 있어. 후버 도련님은 안 그러신 다니깐.”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마릴린 너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다른 시녀가 귀여움을 받으면 후회할라 그래? 유혹은 좀 해봤고?”
“네가 시키는 대로 해봤는데 그것도 안 돼. 주인님은 내가 별로이신가 봐.”
괜한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마릴린은 적당히 말을 받아 넘겼다. 하기야 유혹을 하긴 했지만 쑥스러움에 어중간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너 조심해야 돼. 그러다가 다른 시녀가 맘에 들면 너도 나처럼 아침부터 찬물에 손 담그면서 빨래만 해야 될걸.”
안 그래도 어젯밤 다른 시녀들이 일러주는 대로 나름 유혹의 몸짓을 보냈지만 후버는 뒤척이는 마릴린을 보고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기만 했을 뿐, 그에 대해 별 반응을 하지는 않았다.
한편으론 아쉬운 감정이, 한편으로는 주변 시녀들의 마릴린 위기론을 들을 때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야. 후버 님은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닐 뿐이야.”
“그래? 내가 보기엔 마릴린 네 복장이 문제야. 아무리 네가 안기려고 해도 그렇게 꽁꽁 싸맨 복장으로는 아직 어린 후버 도련님을 자극할 수가 없어. 확실하게 코피가 빵! 하고 나올 정도로 야시시하게 차려입어야 도련님도 본능에 따라서, 흐흐흐.”
“그만해. 내가 그런 옷이 어디 있다고?”
“옷이 있으면 입을 수는 있고?”
“그건…….”
“마릴린, 받아. 이 정도면 후버 도련님도 확 넘어올 거야.”
그리고는 붉은 옷을 마릴린에게 던져 주고는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친구가 준 옷을 펼쳐본 마릴린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얼른 그 옷을 자신의 잠옷 안으로 숨기고는 남이 볼 것을 우려해 샤워실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가서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