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만들다
“영지를 둘러보고 싶다고?”
오랜만에 백작과 후버가 마주 앉아 독대를 하였다.
거듭된 오해와 축생의 거짓증언으로 변태의 오명을 쓴지 2년이 지나 후버의 몸이 조금은 커졌지만 여전히 아담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요즘 들어 후버는 평화로운 일상도 좋지만 영지민의 사정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다소 한심하게 느껴졌다.
팔찌로 보는 평민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노력한다면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도, 동시에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큐리오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큐리오 형님이야, 영지를 물려받으니 영주성에 기거하면 되지만 저는 때가 되면 영주성 밖으로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제가 살 만한 곳을 둘러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음… 그렇지만 아직 10년 뒤의 일인데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가신으로서 계속 살아간다면 굳이 영주성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을 텐데.”
귀족가에서 장남을 제외한 모두는 영지에서 가장 먼 곳으로 좌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형제간의 상잔을 막기 위한 조치였고 후버가 태어날 때 백작이 걱정했던 것이 바로 단순한 좌천이 아닌 형제 간의 상잔이었다.
내부의 힘을 갉아 먹는 형제 간의 후계자 다툼은 그 무엇보다 간단하게 가문을 무너트리는 문제로 비화되곤 했다.
“가신보다는 넓은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백작이 예상한 대답이 후버에게서 나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버는 영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큐리오의 경우에는 영지를 물려받아야 하는 의무감만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두 형제 모두 백작가의 후계자에 대한 욕심은 없어 보였다.
이제는 형제 간의 상잔보다는 이러다가 세실리아를 통해서 데릴사위를 들여와야 하는지 걱정이 앞서게 되었다.
“여행 중에 몸이 상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구나.”
상잔의 걱정보다는 데릴사위의 걱정이 커지자 백작은 두 아들이 모두 영지에 남아 있는 편이 마음이 놓였다.
처음 후버가 태어났을 때와는 매우 다른 상황의 걱정이 백작의 두통을 좀 더 심하게 만들었다.
“요즘 들어 제가 생각해 온 것이 있습니다.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큐리오 형님은 영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욕심보다는 의무감이 앞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16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가신들 사이에선 저와 형님을 저울질 하는 쪽이 있다고 하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그게 가장 걱정이야. 너 역시 영지를 이어 받을 생각은 없는 것 같고.”
후버가 자신의 걱정을 정확하게 집어내자 백작은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그런 것을 티내지는 않았다.
아마 아카이브를 통해서 영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게 된 사실일 것이고, 큐리오가 영지에 의무감 이상의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큐리오와 자주 어울려 노는 후버이다 보니 직접 들었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단지 아직 어린 후버가 그러한 자신의 고민과 일치시켜 자신의 주장을 한다는 것이 신기했을 뿐이다.
“그래서 형님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해보려 합니다. 실질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형님의 이름을 철저히 숨기고 성공할 시에만 형님이 그 중심에서 그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영지에 없던 애정이 생길까?”
“확답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영지민의 환호를 받는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실패한다면 모든 것을 제 이름으로 발표해서 가신들의 기대감을 떨어뜨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백작의 생각이 깊어졌다.
잘만 되면 좋고 안 돼도 나쁠 것은 없었다. 후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후버가 자청한 일이다.
벌써부터 영지를 걱정하는 어린 후버의 마음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다는 것도 백작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전 형님이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 구도를 완성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아카이브 경께서는 항상 현재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후계자 구도로 가신들이 심력을 낭비한다면 그만큼 우리 영지는 뒤처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어볼수록 후버의 의견이 타당하기에 백작은 딱히 반대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걱정이 되는 것이라면 안전의 문제인데 사실 영지 내에서 후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그나마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성안에 모여 살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괜한 분쟁은 영지의 힘을 깎아 먹는 일이지. 하지만 후버야. 아직 어린 네가 무슨 일을 해서 큐리오의 이름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단순한 도둑 정도, 아니면 산적, 하지만 그들은 호위 기사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에 특별히 걱정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약간의 자금을 지원해 주신다면 형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자금은 얼마 정도 필요할까?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 준다면 대략적인 자금을 지원해주고 필요하면 추가로 지원해 줄 테니 말해보렴.”
백작에서 아들을 대하는 자세로 백작의 자세가 바뀌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영지를 아끼면서 자신의 주관을 분명히 표시하는 데 귀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200골드 정도만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200골드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5인 가족 기준으로 레빌리온 백작가의 생활비는 한 달에 약 1골드, 영지민들의 연 수입 합의 평균이 20골드. 그중 40%인 8골드가 매년 세수로서 레빌리온 백작가에 들어오는 수입이었다.
이외의 영지 소속 상인들의 원행 상행으로 벌어들이는 돈 등이 있지만, 일 년 예산의 기준은 세금이기에 영지민의 기준에서 보면 약 17년 정도의 수입이지만 영지의 입장에서는 뭔가를 할 만큼 큰 금액은 아니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한번 영지를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어린 후버가 뭔가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식의 교육을 위한 비용이라 생각하면 못 내줄 이유는 없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알겠다. 그 정도는 내주도록 하겠다.”
“켈럽과 함께 갔으면 좋겠습니다.”
제이드가 가장 마음이 편하고, 실력도 믿을 만했다.
하지만 제이드는 아무래도 필러 경이 차기 수석기사로 내정한 것 같았다.
그러니 그 다음으로 실력 있는 켈럽이 적당할 듯하다는 판단으로 후버가 켈럽을 추천했다.
후계자 문제가 민감한 만큼 필러 경에게 직접 사사 받고 있는 제이드와 동행하는 것은 영지의 가신들에게 자칫 후계자의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자연스레 영지 실력자 중 3번째 실력자인 켈럽을 선택한 후버였다.
“그런데 호위가 너무 적은 게 걱정이구나.”
“어디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 만큼 조용히 갔다 오는 것으로 하려 합니다. 오히려 너무 많으면 이목이 집중되기에 켈럽같이 실력 있는 기사 한 명이면 충분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
“그럼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돈은 총관을 통해 받아 가면 될 것이고 경험 삼아 다녀오면 되겠군. 그런데 아무런 계획도 없는 것이냐?”
무언가 기대를 담은 백작의 물음에 후버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실제로 대답하여야 할지 아닐지에 대해 망설였다.
“첫 목표는 영지의 지도를 만들려고 합니다.”
“지도라면 지금도 있지 않느냐?”
백작이 가리킨 것은 대략적인 위치만 나타낸 지도, 현대의 지도 개념을 가진 후버에게는 지도라기보다는 약도에 가까워 보였다.
“저의 목표는 저것보다 수십 배는 더 정밀한 지도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수십 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대략적인 구상은 이미 정해두었습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한 너의 시도는 좋다.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후버 너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스스로 말했던 대로 실패시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 큐리오의 위치를 높이도록 하겠다.”
“그때는 엄중하게 저의 잘못을 물으셔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당당한 후버의 자세에 백작의 고개가 끄덕였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백작과 대화를 마친 후버는 총관을 찾아가서 약속한 돈을 지급 받기로 하고는 아카이브를 찾아 갔다.
“아카이브 경, 경께서 절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수업 시간 중에 하시면 될 일을 굳이 지금…….”
한 발 빼는 아카이브를 보면서 후버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제까지는 네가 나를 가르치는 역할이었지만 내일부터는 애 좀 탈거다.’
“저는 앞으로 영지를 좀 돌아볼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이 설계도와 시방서를 같이 점검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카이브에게 양피지 뭉치를 넘긴 후버는 도망치듯이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안전한 곳에서 팔찌의 정보를 보고 싶은 마음과 괜히 붙잡혀서 하나하나 아카이브에게 설명하는 난감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기에 용건만 말하고 서둘러 나온 것이다.
침대에 누워 팔찌로 마나를 보낸 후버는 마치 전생의 TV를 보듯이 그 사람 인생의 중요한 부분만 따로 뽑아서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나일러스의 마법 강의를 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만 이제는 타인의 삶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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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이들의 삶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지만 내가 편해지려면 어쩔 수 없지.”
이미 아카이브에게 자신이 설계한 갖가지 물품의 설계도를 전해 줌으로서 주사위는 던져졌지만 밤새 지속된 고민은 그 결과를 내지 못했다.
옳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에 대해 먼저 판단하자면 자신이 속한 가문의 경쟁력이 강해지는 만큼 긍정적이라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륙 전체로 보았을 때도 그런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떤 합리화를 취한다고 해도 결국은 단 한 가지 이유, 자신이 편해지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고민은 언제 까지 나를 쫓아다닐까?’
그가 가진 전생의 기억만으로도 이 세계에 도움을 주는 방법은 많았고 나아가서 그것을 이용해 백작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도 많았다.
그렇기에 후버는 남은 인생을 이 세계 사람들, 특히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과 일신의 평안을 주요 목적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번 여행은 그러한 후버의 목표를 위한 첫 번째 여행으로 애초 좀 더 일찍 떠나려 했지만, 이 세계를 개량할 만한 물건을 생각하다 보니 전생에서의 치통이 큰 걱정으로 다가와서 4 서클의 절대 청결 마법인 ‘클린업 클린 미세스’를 익힌 후를 여행의 시기를 잡았고, 마침 그 마법을 익히자마자 백작에게 여행을 가겠다고 한 것이다.
고민과 팔찌의 기억을 보며 지낸 불면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켈럽, 이만 출발 하자고.”
“예, 도련님. 그런데 어디부터 가시려고 하십니까?”
“일단 영지를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가지. 노숙은 상관없으니 이 지도를 참고하여 영지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게.”
“도련님. 그럼 지브롤터 바위로 안내하겠습니다.”
지브롤터 바위는 영지의 전경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로 영지의 전망을 보기에 매우 중요한 자리이자, 군사적 요충지로서 평시에는 출입이 금지되는 특별관리 구역이지만 후버의 신분상 문제 될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