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4 히든리거 =========================================================================
“자! 모두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본 시간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마음이 맞는 친구도 있었을 것이며, 그렇지 않은 친구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 모든 것을 가슴속에 담아두지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한다.”
세령의 말에 장병들은 잠시 동안 꿀 먹은 벙어리마냥 가만히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 말들 없어?”
세령이 다시 물었다. 분명 하고픈 말은 많을 것이었다. 하지만 선 듯 총대를 메고 먼저 입을 열만한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었다.
“일병. 이태성.”
결국 장병들 중, 가장 선임인 이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봐. 거짓은 없어야하며, 진심으로 본인이 이곳에 와서 느꼈던 것이라던가. 아니면 궁금한 점. 그리고 바라는 점. 모든 것을 다 말해.”
세령이 그를 보며 말했다.
“사실…….의외였습니다. 처음 이 축구팀에 발탁될 때, 느낌은 하늘을 날아갈 듯하다. 공차는 것을 좋아했지만, 남자로서 군대는 어쩔 수 없으니, 군대를 다녀온 다음에, 학교 추천으로 프로팀에 들어가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군대에서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니 더 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하지만…….감독님이 여장교라는 말에 내심 걱정이 앞섰습니다. 자칫…….내 꿈을 단 한순간에 모두 날려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그 걱정이 아직도 제 머릿속에는 있습니다.”
첫 총대를 멘 이태성의 말은 모두의 시선을 세령에게 집중시키게 만들었다. 모두가 하고픈 말이었고, 그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래. 그 마음은 나도 잘 안다. 물론…….사내들의 거친 세상에 여자가 무엇을 하겠냐…….는 말은 나도 수없이 들었다.”
세령은 이태성을 보며 그가 질문한 물음에 대한 답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말을 수없이 들으니, 너희들의 꿈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도 했었다. 하지만 도전 없이 결과만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필시…….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 그리고 과정이 좋다고 결과가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반대로 과정이 나쁘다고 결과도 나쁜 것이 아니다.”
세령은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장병들을 일일이 모두 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냥 너희들에게 말하고 싶다. 오늘 처음 본 우리들이지만, 언제나 다시 보고 싶은 우리들로 남기를 노력하자고 꼭 말하고 싶다.”
세령의 말에 이태성은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무표정이었던 그의 표정은 이내 서서히 미소가 생겨나고 있었다.
“제가 원하는 답변은 얻은 듯합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세령은 그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그녀 역시 미소를 지었다.
세령은 이태성이 물은 질문 중, 여장교가 감독으로 임명된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는 것에 답을 준 것이 아니었다. 세령의 답에는 단 한 번도 여장교가 어떻고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태성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음은?”
이태성이 말문을 열었기에, 줄줄이 손을 들어 자신이 하고자 하였던 말을 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의외로 이태성 다음으로 손을 드는 장병은 없었다.
“제가…….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추강이었다. 그가 손을 들고 일어서자, 연동훈이 날카로운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설태구와 용지현도 그를 보았다.
“그래. 말해봐.”
세령은 추강을 보며 여전히 미소를 담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한가지입니다. 사실 여기에 모인 장병들…….아니 이제는 한 팀이라 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추강은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말문을 열었고, 모두가 그를 보았다. 하지만 처음 추강을 보았을 때, 그의 몸을 보며 비웃듯 웃음을 보였던 이들도, 지금은 추강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였다.
“저와 여기에 있는 설태구, 용지현은 동기입니다. 그리고 저기에 계신 연동훈 중사님과 이민우 중사님은 저희 셋이 신병으로 자대배치 받아 갔을 때,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선임들이었습니다.”
추강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지금 질문과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마련된 시간에 맞지 않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자르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악마였습니다. 악마가 사람이면 저 두 사람일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역시…….악마도 사람이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람은…….사람이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악마 같았던 저 두 선임 병을 다시 천사로 만드신 분이 저기계신 이세령 소대장님이었습니다. 아…….그 때는 저희 소대장님이었습니다.”
추강의 말에 연동훈과 이민우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그를 보았다. 반면에 세령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동훈과 이민우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포기하고, 안된다고 하였던 꼴통 3소대를 이끌고, 모든 것은 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준 저희 소대장님이었습니다. 여기에 계신 모든 선임분들게 감히 부탁하나 드리겠습니다.”
추강의 말에 몇 명은 이등병 같지 않은 것의 대담함에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다.
“우리가 감독님을 버리지 않는 한, 이세령 감독님은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 점만…….꼭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추강은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푹 숙였고, 아무런 말 없었다.
모두가 추강을 보았다. 설태구는 자신의 옆에서 고개 숙이고 앉아 있는 추강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왜? 추강이 잘 못했어? 틀린 말을 했어? 그런데 왜 토닥거리며 위로하려는 눈빛들이지?”
설태구의 행동과 모두의 눈빛을 보며, 이민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연동훈과 버금갈 악마의 음성이었다.
“아닙니다. 위로가 아닙니다. 이등병으로써의 용기가 놀라워 보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추강 이병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소대장님을 먼저 버리는 인물은 없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민우의 말에 이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리고 설태구에 이어 이태성이 추강의 어깨를 토닥거린 뒤,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들게 하였다.
“이런 비만인 놈도 축구를 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라면, 충분히 이 험한 세상 이겨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지휘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내 말이 틀렸나?”
이태성은 아예 드러내놓고 세령을 치켜세우듯 추강의 말에 뒷받침을 해주고 있었다.
그의 말에 하나, 둘 다시 시선은 세령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집중된 시선들을 보면서, 당황하였지만, 이내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국방의 의무다. 싫던 좋던 정해진 보직에 최선을 다해보자!”
이어서 서지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서지후에게 향하였다. 서지후는 두 손을 들어 힘차게 외쳤지만, 이내 천천히 손을 내리며,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국방의 의무다! 신나게 하자!”
“네! 알겠습니다!”
세령이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서지후가 한 말과 같았다. 그렇지만 장병들이 그녀의 말에는 모두 큰 소리로 답했고, 세령은 고개 숙이고 있는 서지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참 좋은 말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앞으로…….이놈들을 위해 모두 힘써 줘.”
세령은 서지후의 머리를 여전히 쓰다듬고 있었고, 곧 네 명의 코치들을 고루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들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처음은 언제나 삐딱선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생활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었다.
당연히 서먹하고 의견조합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서열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군대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니, 사회에서는 더욱 더 많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문제든 길게 끌면, 더 큰 문제로 번진다. 그러기 전에 쌓인 감정은 그 즉시 푸는 것이 상책이다. 세령은 무엇이든 오래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좋은 일이라면 머릿속 깊이 간직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머릿속에 담아둘 공간은 없다.
지난 날 3소대를 이끌던, 그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느낀 것이다. 모두가 버리고, 포기한 사람들을 모두가 곁에 두고 싶어 하고, 안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변화시켰다.
그것이 그녀의 장점이다. 세령은 장병 23명과 하사관 네 명을 포함한 27명의 새로운 자식을 두게 되었다.
그녀는 이들도 지난 과거의 3소대처럼 모두가 인정하며, 곁에 두고싶어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싶어 하였다.
무척이나 긴 첫날이 지나갔다.
국군체육부대에서 맞는 두 번째 날이 밝았다. 화창한 날씨에 바람이 꽤 선선하게 느껴졌다.
“그래. 선수들 단합은 좀 되었는가?”
아침 일찍 운동장에 나와 가벼운 스트레칭과 함께, 몸을 풀고 있는 장병들을 보며, 국군체육부대장이 다가서며 물었다.
“충성.”
그를 보며 연동훈이 경례하였다.
“네! 벌써 형제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연동훈이 그의 물음에 답하였다.
“그런데 이감독은 어디에 있나?”
코치진과 선수들만이 보였고, 이세령이 보이지 않아 물었다.
“충성.”
그 때 운동장 한 쪽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뭔가 열심히 기록하고 있던 세령이 다가서며 경례하였다.
“하하…….미안하네. 내가 눈이 좀 좋지 않아서 말이야.”
부대장은 결코 먼 거리에 있지 않았던 세령을 찾지 못한 것을 두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 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세령은 그에게 찾아온 용무를 물었다.
“금일 일정이 어떻게 되나?”
“금일은 선수들의 밸런스를 확인할 예정입니다. 아직 정식 창단은 하지 않았지만, 국방부장관께서, 창단식 후, 곧바로 친선경기를 요청하셨기에, 그에 맞는 포지션을 미리 선정하려 합니다.”
세령은 부대장에게 금일 스케줄을 말해주었다.
“역시. 준비도 빠르군. 그렇다면 나도 한 가지 도움을 주고 싶군.”
부대장은 세령의 말을 들은 후,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금일. 상무2군 팀과 간단한 친선경기를 하는 것이 어떤가? 선수들의 포지션도 봐야하며, 또 한, 비록 2군 소속 상무 팀이지만, 충분히 1군에서 뛸 수 있는 기량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과 실전처럼 훈련한다면, 큰 도움이 될 듯해서 말이야.”
부대장의 말에 세령은 시선을 돌려, 옆 쪽 운동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상무 2군 팀을 향해 보았다.
“저희들이야 대 환영입니다. 11대 11로 미니경기를 해보려 하였지만, 다른 팀을 대상으로 훈련하는 것보다 더 좋은 훈련은 없지 않겠습니까?”
세령은 부대장의 의견을 바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답에는 장병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장병도 인상을 찌푸리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상무2팀을 보며 무서워 보일 정도의 미소를 날리고 있는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