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장 수상한 노인
가이어는 오늘도 일을 나가기 위해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식탁 앞에 클로리아가 아닌 라이안이 앉아 있었다.
“으음? 자네, 오늘은 일찍 일어났군.”
처음은 라이안만 보았지만 곧 가까이 다가서면서 식탁 위에 놓인 화려한 검을 볼 수 있었다.
“검? 이게 웬 검인가?”
가이어의 말에 라이안이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검이 아닙니다. 저로 인해 이렇게 되어버린 한 여인이지요.”
가이어는 라이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라이안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제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그런가.’
가이어는 어제부터 이상해진 라이안이 마치 자신이 한 말 때문에 그런 것만 같아 마음이 쓰였다.
“자네, 오늘은 쉬는 게 좋겠군. 당분간 집에 편히 있게나.”
“아닙니다. 오늘도 일을 나가겠습니다. 대신 아침에 대장간에 좀 들렀으면 합니다.”
“뭐, 그리 하게나.”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검에서 손을 떼지 않는 라이안이 이상해 보이는 클로리아였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가이어와 함께 마을 중앙 거리까지 나온 라이안은 마을의 대장간을 찾아 헤맸다.
가이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상하네. 분명 얼마 전 이 근처에 대장간이 생겼던 것 같았는데.”
보통 대장간은 성 마을 안쪽에 들어가야 볼 수 있었지만 가이어는 얼마 전 이곳을 지나다가 외곽마을에 생긴 대장간을 보며 무척이나 신기해했던 적이 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이어가 멀리서 보이는 한 곳을 발견하고는 라이안에게 말했다.
“아, 저기라네. 장사를 하려면 성 마을이 더 좋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곳 외곽마을에 대장간을 차렸더군. 그런 것으로 보아 실력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자네 그 검을 맡길텐가?”
라이안이 가이어의 말에 메르지아를 보며 말했다.
“아니요. 이 검에 어울릴 만한 검집을 만들려고 합니다.”
“도대체 하루아침에 그런 검을 어디서 구한 것인가?”
가이어가 궁금해 물었지만 라이안은 이미 대장간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장간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듯 아직도 간판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그저 앞에 몇 개의 검이 전시되어 있기에 대장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이안은 안으로 들어서며 짙은 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주인장, 계십니까?”
라이안은 벽 곳곳에 걸려 있는 검들을 구경하며 주인을 불렀고 곧 안쪽 어둠 속에서 체격이 작은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라이안은 그 노인을 보며 크게 놀랐다.
“아니, 당신은……!”
“또 뵙게 되는군요. 창은 잘 쓰셨습니까?”
노인은 바로 이전 히매인 왕국에서 라이안에게 창을 팔았던 노인이었다.
“노인장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저 역시 마물들을 피해 피난을 온 것이지요.”
라이안은 노인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분명 히매인 왕국은 마물들로 인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고 들었는데.’
노인에게 창을 받으며 헤어질 때 노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분명 하늘과도 같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고 했었어. 설마… 내가 이렇게 될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라이안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노인은 라이안을 보며 물었다.
“필요하신 것이 무엇인지요?”
“아, 이 검의 검집을 만들었으면 해서 왔습니다.”
노인은 라이안의 손에 들려진 검을 보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잠시 안에 들어갔다 나오겠습니다.”
가이어는 밖에서 하늘을 보며 상단에 너무 늦게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라이안 또한 노인이 너무 뜸을 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때 노인이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걸어 나왔다.
“언젠가 우연히 만들었던 검집이랍니다. 혹시 이 검집이 그 검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라이안은 노인이 들고 있는 검집을 보며 크게 놀랐다.
이유는 자신이 들고 있는 메르지아와 같은 색상에 비슷한 모습을 한 검집이 노인의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장,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이안은 이제 노인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제가 누구라니요? 저는 마물로부터 피난 온 대장장이일 뿐입니다. 어서 이것을 받으시지요.”
라이안은 엉겁결에 노인이 전해준 검집을 받아 들었고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으며 검에 검집을 끼웠다.
척.
역시나 거짓말 같이 메르지아에 딱 맞는 검집이었다.
라이안이 그것을 보며 노인을 쳐다보았고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나 잘 맞는군요. 다행입니다.”
“노인장은 내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라이안의 말에 노인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단지 우연일 뿐이지요.”
“이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 들어맞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가끔은 그런 우연도 있는 법이 아닙니까? 이전에 저에게 창을 사갔던 것처럼 저와 인연이 있는 것이겠지요.”
라이안은 점점 노인이 수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계속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뒤에서 가이어가 다가와 라이안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보게, 라이. 이러다가 상단에 너무 늦게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조금 빨리 해줄 수 없는가?”
가이어가 다가오며 말하자 라이안은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노인에게 말했다.
“이 검집 얼마입니까?”
“값은 치르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가지고 가시지요.”
“이번에도입니까?”
그들 곁에 다가와 있던 가이어가 노인이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물어왔다.
“라이, 이분을 아는가?”
가이어의 말에 라이안은 딱히 말하기가 뭐했다.
“알기보다…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요.”
“아니, 한 번 만났었다고 검집을 공짜로 준단 말인가?”
가이어가 라이안의 검에 끼워져 있는 검집을 보더니 조금 놀라워했다.
“으음? 검과 딱 맞는 것 같군. 이거 원래 만들어져 있던 것인가?”
“그것은 저도 노인장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지만 노인장이 좀처럼 말을 해주지 않는군요. 노인장, 값을 치르겠습니다. 값을 말해주시지요.”
노인은 라이안의 말에 크게 난처한 듯 과장된 표정과 행동을 보였다.
“아니, 꼭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뭐, 정 그러시다면… 5골드를 주십시오.”
노인의 말에 라이안보다 가이어가 크게 놀랐다.
“헉! 5골드!”
평민 한 가정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을 20실버로 친다면 5골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일반 평민 가정이 약 2년 동안 먹고 놀 수 있는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안 또한 상당히 난처했다.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흠.”
노인이 라이안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듯 또 다시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값을 치를 돈이 없으십니까? 그것 보십시오. 그러니 그냥 가져가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라이안은 생각 끝에 노인에게 말했다.
“지금은 돈이 없어 지불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일 반드시 검집의 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좀 더 많은 대화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라이안이 메르지아에서 검집을 빼려고 할 때 노인이 그것을 말렸다.
“검집은 들고 가셔도 됩니다. 처음 만난 분도 아닌데 믿어야지요. 바쁘신 것 같은데 어서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이안은 그 말에 검집을 빼려던 것을 멈추고 노인을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대장간에서 나왔다.
라이안과 가이어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노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군요. 결국 메르지아까지 손에 넣으신 것을 보면 말입니다.”
노인의 몸은 말과 함께 그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라이안을 자세히 아는 듯한 노인의 정체는 알 길이 없었다.
라이안은 노인에 대한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가이어와 상단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라이안의 기감에 거슬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이제는 굳이 느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신에게 적대시 하는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라이안이었다.
‘도둑길드인가. 오른쪽에 셋, 왼쪽에 둘 그리고 앞쪽에 다섯, 분명 나를 감시하는 것 같은데… 아니면 가이어를 노리는 것인가?’
이전에도 제스가 가이어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했던 적이 있었기에 라이안은 더 이상 이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 멈춰 서서 가이어에게 말했다.
“가이어 씨, 정말 죄송합니다.”
“으음? 무엇이 말인가?”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을 나가기 힘들 것 같네요.”
가이어는 라이안을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알겠네. 그런데 혹,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
“후후후, 아닙니다. 저녁에 집에서 뵙겠습니다.”
“알겠네.”
진작 말해주었으면 기다릴 일도 없을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며 화를 낼 법도 했지만, 가이어는 라이안에게 무슨 사정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고는 혼자 상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이안은 숨어 있는 자들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역시 노리는 것은 나인가? 그렇다면 저 중에 제스라는 녀석이 있겠군.”
라이안은 일부러 한쪽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라이안이 골목으로 들어서자 숨어 있던 자들이 빠르게 모이더니 곧 라이안이 들어간 골목길로 따라 들어갔다.
라이안의 짐작대로 그들은 도둑길드의 일원들이었고 그중에는 제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크흐흐, 제 발로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다니 제대로 걸려들었군.”
제스는 오늘 라이안을 반병신으로 만들고자 마음먹었고 주위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만든다. 뭐, 죽으면 할 수 없는 것이고.”
외진 골목이라 딱히 사람들이 드나들지도 않는 곳이었다. 시체를 찾으려고 해도 며칠은 걸리리라 생각한 제스였다.
그들은 제각기 손에 단검과 긴 쇠막대를 들고 있었으며 제스는 허리 옆에 검을 차고 있었다.
제스의 표정은 기분에 따라 살인도 저지를 것만 같았다.
그들이 골목길로 들어서고 곧 한쪽으로 꺾어 들어서자 그곳에는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라이안이 있었다.
제스가 라이안을 발견하고 같이 온 자들보다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이봐,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놈? 소피라도 보려고 왔나? 근데 길을 잘못 들었어. 크크큭.”
“큭큭큭.”
“크흐흐.”
제스의 말에 같이 온 도둑길드의 일원들이 제각기 사악한 웃음을 지었고 곧 라이안이 서서히 몸을 돌려 제스를 바라보았다.
“너무 굼뜨군. 한참을 기다렸는데 이제야 오는 거냐?”
라이안의 말에 제스가 눈을 치켜뜨며 라이안을 노려보았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
“너희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얘기지.”
“흥! 웃기는군. 네가 아무리 당당해 보이려고 해도 이곳을 빠져나가기는 힘들 거다. 이거 안 되겠군. 처음부터 싹싹 빌었다면 그냥 병신으로만 만들고 살려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넌 이곳에서 죽을 팔자인가 보구나. 크크큭.”
제스는 라이안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스가 양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도둑길드의 일원들에게 신호를 주자 그들은 제각기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라이안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운이 없는 놈이군. 제스에게 잘못 보이다니 말이야.”
“우리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 재수가 좀 없다고 생각해라.”
라이안은 자신의 허리 옆에 차여진 메르지아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곧 그만두기로 했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메르지아에게 피를 묻힐 수는 없지.”
메르지아가 라이안의 말을 들었는지 아주 조금 진동을 하듯 떨었다.
라이안 역시 그것을 느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도둑길드의 일원 중 쇠사슬을 들고 있던 자가 라이안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빙빙 돌리고 있던 쇠사슬을 휘둘렀다.
쉬이이익.
라이안은 그리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조금 옆으로 움직였을 뿐인데 쇠사슬은 아슬아슬하게 라이안을 스쳐 지나갔다.
“어쭈, 이게!”
쇠막대를 가지고 있던 자가 빠르게 라이안의 머리를 내리쳤다.
휘익.
하지만 역시나 라이안은 아주 조금의 움직임만으로 그것을 피하며 말했다.
“너희들 너무 방향감각이 없는 거 아냐? 그것도 못 맞추게?”
라이안의 말에 제스를 제외한 도둑길드의 일원들이 모두 동시에 덤볐다.
라이안은 마치 바람이라도 된 듯 그들 사이사이를 누볐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을 교묘히 피하던 라이안은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자신을 찔러 들어오는 칼의 방향을 바꾸어 다른 쪽으로 찌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푸욱.
“컥! 왜… 날.”
“이, 이봐! 내가 그런 게 아냐!”
털썩.
하지만 이미 칼에 찔린 자는 바닥에 쓰러졌고 피 묻은 칼을 들고 있는 자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라이안을 보며 소리쳤다.
“너! 네가 그런 거잖아! 이잇!”
그자는 다시 라이안을 향해 칼을 찔러왔고 라이안은 재빠르게 그의 팔을 잡아 칼이 찔러지는 방향으로 당겨주며 자신은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했다.
“어, 어……!”
푸욱.
“컥! 이, 미친놈이.”
그제야 도둑길드의 일원들은 라이안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다.
처음은 단검을 들고 있는 자의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곧 라이안이 뭔가 술수를 부렸음을 알아채고 서로 경계를 하며 라이안을 노려봤다.
“모두 조심해! 이놈 보통내기가 아냐!”
두 명이 땅에 쓰러지고 이제 7명이 라이안을 둘러싸고 있었다.
제스가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뒤에서 소리쳤다.
“모두 뭐하는 거야? 그딴 놈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제스가 다가오자 라이안은 생각을 달리 먹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조금 더 놀려주려고 했지만 갚아야 할 빚이 있어 어딜 좀 다녀와야 하거든.”
라이안의 말을 들은 도둑길드의 일원들이 모두 식은땀을 흘렸고 곧 쇠막대를 들고 있는 자가 소리치며 제일 먼저 달려들었다.
“모두 뭣들 해! 없애버려!”
“죽어라!”
“으아아아!”
휘익.
턱.
쉬익.
턱.
그들이 각자의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하나의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고, 라이안은 도둑길드의 일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가 서서히 그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
라이안이 그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왔지만 라이안을 저지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라이안이 그들의 혈도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제스는 유유히 걸어 나오는 라이안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고 곧 검을 빼들며 소리쳤다.
창.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이라… 글쎄,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면서 내가 무슨 짓 좀 하면 어때서 그러냐?”
제스는 라이안의 뒤를 계속해서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 뭐하는 거야! 이 자식을 아작 내지 않고!”
“소리쳐봐야 그들은 움직이지 못해. 아혈까지 막아놔서 말조차 못하지. 계속 저렇게 있게 된다면 끝내 혈도는 막혀버릴 것이고 식물인간이나 다름없게 될 거다. 물론 난 그 혈도를 풀어주지 않을 생각이고.”
“젠장, 아혈이나 혈도가 도대체 뭐야!”
제스는 라이안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의 부하들은 모두 당해버렸고 평생 불구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걸.
“빌어먹을. 역시 그때 가이어를 도와주었던 것은 요행이 아니었구나!”
“그래, 맞아. 난 처음부터 다른 곳에서 날아온 돌을 보았고 그로 인해 말이 놀랐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물론 그것이 네가 한 짓이라는 것도.”
제스는 자신이 뭔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대를 건드렸다고 생각하며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네놈 정체가 뭐냐!”
강하게 소리치고는 있었지만 그의 심장은 마치 터질 듯 뛰고 있었다.
“말해도 네가 믿기나 할지 모르겠군.”
“이잇!”
휘이익.
라이안이 다가오자 제스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라이안은 제스가 휘두른 검의 방향에 있지 않았다.
라이안은 어느 사이에 제스의 뒤에 나타났고 얼어붙은 듯 멈춰있는 제스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너도 내 이름이 라이라는 것은 알아봐서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내 진짜 이름이 아니야. 내 이름은 네가 알고 있는 이름에서 끝에 ‘안’ 자를 더 붙여야 하거든. 뭐, 어차피 너는 이제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니 말해줘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겠지만. 대륙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때 나를 이렇게 불렀었지, 검은 사신이라고.”
라이안은 곧 자신이 들어왔던 골목길 입구로 혼자 걸어갔고 제스는 눈을 부릅뜬 채 그곳에 얼음과도 같이 굳어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발견해주지 않는다면 이들은 끝내 이곳에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팔자였다.
제스는 그렇게 쓰러진 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야야!’
하지만 그의 마음속 외침을 누가 들을 수 있겠는가.
라이안은 골목길의 입구를 나오다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마도 돈이 조금 필요하겠군.”
라이안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평생을 써도 없어지지 않을 돈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타미르안의 레어에서 한 주먹 주워와야겠어. 텔레포트!”
그랬다.
마족과 마물들이 금은보화에 손댈 리는 없었기에 그대로 있을 것이라 생각한 라이안이었고 그 금은보화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타미르안의 레어였다.
타미르안의 레어에서 라이안이 올 때를 대비해 레어를 예쁘게 꾸미고 있던 샤린은 레어 고위층에서 대기의 파동을 느끼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샤린이 서둘러 위로 올라갔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역시나 라이안이었다.
“오셨어요? 상당히 오래 계시다가 올 줄 알았는데 빨리 오셨네요?”
“응? 어.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네?”
레어 안에 꽃 같은 것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본 라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곧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마물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뭐, 뭐냐. 저 마물들이 입고 있는 하얀 옷들은.”
“후훗, 저들이 너무 무섭게 보일 것 같아서 제가 입혀 놓았어요. 라이안이 그랬었잖아요. 인간들이 오면 보살펴주라고요. 그런 그들이 너무 겁을 먹지 않도록 제가 조치를 취해놓은 것이랍니다.”
“뭐, 노력은 가상하다만.”
“왜요? 이상해요?”
“아니, 뭐. 이상하다기보다 역시 마물은 마물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뭔지”
“바꿀… 까요?”
“아니야, 어차피 샤린이 부리는 마물들이니 샤린이 알아서 해. 샤린 말대로 저 우스워 보이는 모습들이 인간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도 있겠지, 별로 가망성은 없지만.”
인간들이 마물을 만났을 때에는 무조건 도망치고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라이안은 곧 블링크로 타미르안이 금은보화를 모아놓는 방 앞으로 이동했고 문을 보며 고민했다.
“잠금 마법이 되어 있는데 이걸 어쩐다.”
라이안이 고민하고 있을 때 뒤를 따라온 샤린이 그의 옆에 며 말했다.
“왜 고민해요? 그냥 힘으로 부셔버리면 되잖아요. 제가 해드릴까요?”
말과 함께 날카롭게 손톱을 세우는 샤린이었고 라이안이 그 모습에 어색하게 말했다.
“야, 야. 너 무섭게 왜 그러니? 얼른 그 손톱 좀 집어넣어라. 하여간 마족 아니랄까봐, 거칠기는.”
라이안은 최대한 타미르안의 레어를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아주 빠르게 잠금 마법만 깨뜨리는 것이었다.
‘분명 샤린이 부순다면 문이 아니라 벽체까지 허물겠지.’
라이안은 반드시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손에 수강을 맺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곧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손을 찔렀다가 빼었다.
푸석!
“어머! 아주 간편하게 마법을 깨뜨렸네요?”
하지만 곧 라이안의 주먹이 지나간 자리가 가루와 같이 허물어졌다.
“훗, 흔적이 아주 안 남지는 않았는걸요?”
라이안도 그것을 보며 인상을 썼다.
“스피드에 대한 파동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군. 제길.”
보통 쾌검을 사용하는 자들이 검을 휘둘렀을 때 상대가 그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음에도 살이 베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것처럼 라이안의 권풍이 마법을 부숨과 동시에 문을 때렸고 그 엄청난 속도에 가루와 같이 으스러지며 흘러내렸다.
“뭐, 어쨌든 문은 열었네요.”
“어쩔 수 없지. 나중에 타미르안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수밖에.”
“문 정도는 제가 다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렇겠지. 문 정도야 쉽게 만들 수 있겠지만 그 재질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거든. 이 나무는 중간계에서도 희귀한 것이라도 들었어. 나무 자체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고 했던가?”
“아! 그렇군요.”
라이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나 작은 동산과도 같이 싸여 있는 금은보화가 눈에 띄었다.
“역시, 언제 봐도 많군.”
“드래곤들이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고들 하더니 상당히 많네요. 그런데 라이안도 이런 것을 좋아해요?”
라이안이 좋아한다는 말 딱 한마디만 한다면 대륙의 모든 금은보화를 모으고자 생각한 샤린이었다. 하지만 역시 샤린이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아니야, 단지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러한 것들이 조금씩 필요할 때가 있거든.”
라이안은 몇 걸음 걸어가 금화를 한 주먹 쥐었고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겨우 그거밖에 안 가져가요?”
“응, 이 정도만 있으면 돼.”
“흐음. 저도 한번 이런 것들을 모아볼까 생각했는데 라이안이 별로 욕심내지 않는 것을 보니 흥미가 떨어지네요.”
“후훗, 마족이 금은 어디다 쓰려고. 난 이제 다시 돌아가 봐야겠으니 이곳을 잘 지켜줘. 알았지?”
“네, 자주 오시길 바라요.”
“될 수 있으면 그럴게. 그럼 텔레포트!”
라이안은 곧바로 좀 전에 있던 골목길에서 나타났고 뒤를 돌아보며 아직도 제스 일당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발견 못했나보군. 우선 그 대장장이 노인에게 잔금을 치르고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지.”
라이안은 골목길에서 나와 자신이 검집을 가져왔던 대장간으로 갔다.
라이안은 대장간 앞에 나와 있는 한 젊은 남자를 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곳에 있는 노인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어서 오십시오.”
남자는 검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곧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뭐라고 하셨죠?”
“이곳에 있는 노인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라이안이 말했음에도 남자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듯했다.
“저기,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며칠 전부터 제가 연 대장간이거든요. 그리고 제 노부모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랍니다. 혹, 잘못 찾아오신 것은 아닌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제가 이곳에서 검집을 사갔단 말입니다.”
그때 검을 사고자 하는 손님이 왔고 이곳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검을 살펴보는 손님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검을 찾으십니까?”
라이안은 자신을 지나쳐 손님에게 장사를 하는 대장간의 주인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정말 이곳에 노인이 없다는 말입니까?”
라이안의 계속된 질문이 짜증났는지 주인이 조금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 보세요? 손님이 왔으니 저도 장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 주세요!”
라이안은 주인의 말에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고, 혹시나 싶어 한쪽으로 나오며 대장간 안의 기척을 살폈다. 하지만 대장간 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대장간 안에는 정말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리고 그 노인은 누구란 말인가.”
궁금한 점은 많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는 노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데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