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그냥 이대로 있고 싶어
포스안 제국의 어느 외진 마을.
어느 젊은 여인이 정신을 잃은 한 남자를 데리고 온 지 보름이 넘은 어느 날이었다.
정신을 잃었던 그 남자는 눈을 찡그리며 서서히 정신을 차려갔다.
“으…….”
눈을 뜬 남자는 누운 채로 자신이 누워 있는 방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그의 눈에 들어오는 방의 내부는 무척이나 단조로웠다.
일반 서민이 사는 듯한 평범한 방.
그의 눈에 창가에 놓여 있는 꽃병이 보였고 햇빛에 비추어지는 하얀 색의 아름다운 꽃도 보였다.
“내가 왜 여기에…….”
그때 무엇인가를 생각하려던 남자는 갑작스럽게 고통을 느끼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크윽!”
무엇인가 순간순간 끊겨오는 기억들이 떠올랐다.
거대한 악마가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형상이었다.
“크악!”
마치 머릿속에서 번개와도 같이 번뜩이는 기억에 그는 두통을 느꼈다.
거대한 악마가 검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검을 자신에게 휘두름과 동시에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으며 호흡 또한 가빠졌다.
그의 비명을 들은 걸까.
급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한 여인이 남자에게로 다가왔다.
“일어났군요. 괜찮아요?”
남자가 여인의 얼굴을 보았고 남자는 순간 그녀를 보며 다른 여자의 얼굴이 겹쳐짐을 느꼈다.
“루시.”
“네?”
여인은 남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다.
“숲 속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바로 이곳에 데려왔어요. 당신, 열흘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어요. 아직 뭔가 혼란스러운 것 같은데 더 쉬도록 해요.”
여인이 남자를 다시 침대에 눕혀주었다.
“당신은 누구죠?”
남자의 물음에 여인은 밝게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전 클로리아라고 해요.”
“클로리아.”
클로리아의 이름을 말하던 남자는 그렇게 스르르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클로리아는 남자의 몸을 이불로 덮어주고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온 클로리아는 남자가 말했던 이름을 기억하며 생각했다.
“루시라.”
잠시 그 이름을 생각하던 클로리아는 곧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에이, 설마 그 루시 공주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클로리아는 그렇게 자리를 떴고 방 안에 있던 남자는 다시 조용히 눈을 떴다.
검은 머리에 여성과도 같이 아름다운 이 남자.
그랬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발크르스 마왕과 싸우다 죽었다고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
라이안이었다.
중간계는 두 개의 대륙으로 갈라졌다.
포스안 제국의 대성관과 성관들 그리고 수많은 대신관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이곳 포스안 제국의 국경에 결계를 쳤다. 수천의 신성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신성력과 생명력을 담아 만든 결계는 마족과 마물들이 침범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그로 인해 포스안 제국 외의 나라들은 마족들에 의해 멸망하고 포스안 제국만이 건재할 수 있었다.
수천의 가장 강한 신성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모든 신성력을 바쳤고 또한 생명력까지 모두 소진하며 만든 이 결계는 발크르스 마왕조차 쉽게 깰 수 없었다. 아니, 깨지 않았다.
발크르스 마왕은 라이안과의 전투로 많은 힘을 소진하기는 했지만 굳이 결계를 깨고자 하지 않았다.
마족들의 습성이 그랬다.
오직 힘으로만 서열이 정해지는 것.
발크르스 마왕이 아주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여도 나머지 마왕들이 도전해 올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결계를 깨려면 거의 자신의 모든 힘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언제 어떤 마왕이 치고 나올지 몰랐기에 발크르스 마왕은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신성력의 결계가 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신성력의 결계는 점차 약해질 것이며 인간들 역시 그것을 느끼며 절망과 공포에 떨게 될 것을 말이다.
어느 알 수 없는 집에서 깨어난 라이안은 이 사실을 비롯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라이안이 또다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려 하자 두통이 밀려왔다.
“끄윽.”
이번에는 끝까지 그 고통을 견뎌내던 라이안은 곧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가며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난… 분명 발크르스 마왕과 싸우고 있었는데.”
드디어 자신의 기억 마지막 부분을 생각해낸 라이안은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이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때 발크르스 마왕이 공격할 때, 분명… 루시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들은 것인가.”
갑자기 루시를 기억하자 슬픔이 밀려오는 라이안이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의 볼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루시, 미안해요… 흐흐흑.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라이안은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고는 한참을 흐느끼듯 울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울음을 멈춘 라이안은 소매로 자신의 눈물을 닦고는 몸을 일으켰다.
“우선 이곳이 어딘지는 알아야겠지.”
라이안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고는 방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방을 나서자 곧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가 보였고 그 남자 또한 라이안을 보며 밝게 웃었다.
“정신이 들었다고 하더니 이제 움직일 만한가 보군.”
“제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아시는 것이 있는지요?”
“흠. 기억을 못하는가 보군. 자네를 발견한 것은 내 딸인 클로리아였다네. 그리고 클로리아의 말을 들은 내가 자네를 이곳에 옮겨다 놓은 것이지. 처음에는 자네가 죽을 줄 알았지 뭔가? 자네 옷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거든.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어깨부분에 있는 흉터 빼고는 멀쩡하더군. 숨이 조금 미약했지만 말이야.”
중년인이 라이안의 어깨에 흉터자국이 있다고 하자 라이안은 자신의 옷을 걷어 흉터를 확인했다. 그리고 라이안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깊은 상처 후에 다 나은 듯한 흉터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발크르스 마왕의 공격을 어깨에 맞았던 것 같군. 그런데 모를 일이야. 분명 공격을 받기 전에 옆에서 또 무엇인가가 나를 밀쳐낸 것 같았는데…….’
라이안은 우선 감사의 인사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성함을 가르쳐 주시면 언제든 꼭 보답하겠습니다.”
“하하하, 보답은 무슨. 내 이름은 가이어라고 한다네. 자네 이름은 무엇인가?”
“저는…….”
라이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라이라고 합니다.”
“라이라… 어쨌든 반갑네. 우선 이쪽으로 앉게나.”
가이어는 라이안을 자신의 앞으로 앉기를 권했고 곧 라이안이 고개를 숙이고는 가이어의 앞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라이안이 자리에 앉자 가이어가 곧 질문을 시작했다.
“자네는 어찌하다가 그런 외진 숲 속에 기절해 있었던 것인가?”
“저도 어찌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전 기억으로는 분명 에드코르 제국에 있었는데…….”
에드코르 제국이라는 말이 나오자 잠시 표정이 굳어지는 가이어였다.
“자네 에드코르 제국 사람인가?”
“아닙니다. 전 본래 히매인 왕국 사람입니다.”
라이안이 히매인 왕국 사람이라고 하자 그제야 표정이 풀리는 가이어였다.
“그거 다행이군. 사실 에드코르 사람이면 당장 쫓아내려고 했는데 자네 말을 잘한 것이네.”
“에드코르 제국을 싫어하시나 보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이미 멸망해서 마왕의 손아귀에 넘어갔지만 지금 대륙을 이 지경으로 만든 나라가 바로 에드코르가 아닌가? 오리닌 황제가 발크르스 마왕에게 씹어 먹히지 않았으면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지. 암.”
가이어의 말을 들은 라이안은 오리닌 황제를 떠올리며 그 역시 불쌍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결국은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군. 전 대륙의 왕이 되고자 마왕을 소환하더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업자득인 것이다.
라이안은 가이어에게 대륙의 현 상황을 물었다.
“제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대륙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물론 이곳이 어디인지부터요.”
가이어는 라이안의 물음에 좀 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누이더니 입을 열었다.
“휴,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우선 이곳은 포스안 제국 남쪽 끝에 있는 마을이라네. 그리고 대륙은 이곳 포스안 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마왕의 손에 들어갔지. 아, 물론 인두루인 제국만 빼고 말이네.”
라이안은 포스안 제국과 인두루인 제국이 가장 강국이라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역시 강국은 다르군요. 그럼 두 제국만 살아남은 것입니까?”
라이안의 말에 가이어는 고개를 흔들었다.
“강국이라 살아남은 것은 아니라네. 인두루인 제국은 드래곤들의 영지로 바뀌었으니까.”
“드래곤이요?”
“그렇다네. 드래곤들이 신을 배신하고 마왕과 손을 잡은 것이지. 중간계의 조율자라는 것들이 마왕과 손을 잡고 인두루인 제국에 모여 자신들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지. 처음 발크르스 마왕이 소환될 때부터 전혀 나서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나도 인두루인 제국에서 온 피난민한테 들은 이야기라네. 인두루인 제국은 드래곤들의 땅이며 마물들도 그곳은 침범하지 않는다는군.”
“흠… 드래곤들이 마왕과 손을 잡을 줄이야.”
“확실한 것은 모른다네. 단지 퍼진 소문이 그렇다는 것이지.”
라이안은 타미르안과 가족들 그리고 자신의 친구들이 걱정되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타미르안의 레어에 있으려나.’
잠시 생각을 하던 라이안이 다시 가이어에게 질문을 했다.
“인두루인 제국은 드래곤과 마왕이 협약을 맺었다고 치더라도 이곳 포스안 제국은 어찌해서 안전할 수 있는 것이죠?”
라이안의 물음에 가이어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것은 위대한 사천 명의 영웅들 덕분이지.”
“사천 명의 영웅이요?”
“그렇다네. 대륙의 제 일 영웅으로는 검은 사신인 라이안으로 뽑지만은 이곳 포스안 제국을 구한 것은 사천 명의 신성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셨지. 그분들이 자신들의 모든 신성력과 생명력을 담아 결계를 쳤기에 마물들이 이곳은 침범할 수 없는 것이라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이 검은 사신과 비슷하구먼. 하하하.”
“하하. 단지 이름만 비슷한 걸요, 뭘. 그럼 대성관은 어떻게 되셨지요?”
“그분이 결계를 치는데 가장 선두에 서셨고 하얀 연기와 같이 곧 결계에 흡수되었다네.”
“흠.”
라이안은 이 모든 일들이 꼭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만 같았다.
‘내가 루시를 지켰어야 했거늘. 결국 세상의 멸망은 내가 초래한 것이구나.’
갑자기 대성관의 얼굴이 생각나는 라이안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 중 루시 공주를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귀에 머물렀다.
라이안이 잠시 상념에 젖어 있을 때 가이어가 라이안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이보게, 자네 혹시 히매인 왕국에 가족이 있는가?”
“아니요. 왜 그러시죠?”
“흠. 없다고 하니 차라리 잘된 것이군. 그나마 대륙의 모든 사람이 피난을 올 수 있는 곳이 이곳 포스안 제국뿐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곳 포스안 제국에서 가장 먼 곳이 히매인 왕국이고. 들려오는 말로는 가장 먼저 마물들의 먹이가 된 것이 바로 히매인 왕국 사람들이라고 하더군. 아마도 그곳은 인간의 씨가 다 말랐을 것이라고 전해진다네.”
“그럼 포스안 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도 않다네. 모든 영토가 마물들과 마족들로 가득차기는 했지만 저 결계 밖에 하나의 군대를 형성해 마물들과 전투를 벌이는 무리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네. 들리는 말로는 그들을 이끄는 사람들이 대부분 소드마스터라고 하니 진정 대륙이 어려울 때 영웅들이 나타난 것이지.”
“영웅들이라…….”
라이안이 가이어가 말한 영웅들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가이어가 라이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물었다.
“자네 마땅히 갈 곳은 있는가? 이곳 포스안 제국에 아는 사람이라던가.”
“아니요.”
“흠. 그럴 줄 알았네. 우선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게나. 빨리 내쫓지는 않을 것이니.”
“고맙습니다. 그럼 잠시 동안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라이안의 말을 들은 가이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공짜 식사는 못 먹여주네. 자네 먹을 것은 자네가 구해야 할 거야? 하하하.”
라이안은 그 말과 함께 집을 나선 가이어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래. 잠시… 아주 잠시만 모든 것을 잊고 이렇게 지내는 거야. 아주 잠시만…….’
라이안 역시 잠시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서자 라이안의 눈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고 라이안은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빛을 가렸다.
“어머, 금방 다시 일어났네요?”
클로리아가 나무 지지대에 걸려 있는 줄에 빨래를 널면서 라이안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 네. 클로리아… 라고 했었죠?”
“네, 맞아요. 이제 불편한 곳은 없는 건가요?”
“네, 이제 괜찮습니다.”
“그럼 가만히 서서 뭐해요?”
“네?”
갑작스런 물음에 라이안이 멍하니 서 있었고 곧 다시 클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녀가 힘들게 일을 하고 있으면 좀 거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껏 보살펴 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아, 네! 도와드릴게요.”
라이안이 곧 클로리아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고 바구니에 들어 있는 빨래를 들어 클로리아와 같이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같이 빨래를 널던 클로리아가 가끔 라이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에 홍조가 띠곤 했지만 라이안은 그것을 잘 보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빨래를 다 널은 그들이었고 클로리아가 이마에 난 땀을 소매로 닦았다.
“휴우, 이제야 끝났네요. 어때요? 배고프지는 않아요?”
“별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하긴 제가 그쪽분이 누워 있을 때 항상 매 끼니마다 죽을 입에 넣어주기는 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죠?”
클로리아가 라이안의 이름을 물어왔고 라이안은 그런 클로리아를 보며 미소 지었다.
“빨리도 물어보는군요. 하하, 전 라이라고 합니다. 가이어 씨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도 된다고 해서 한동안은 이곳에 머무르게 될 것 같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군요. 그럼 라이, 지금 장을 보러 가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뭐, 어렵지 않죠.”
숲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클로리아의 집에서 마을 중심 거리로 나오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라이안과 클로리아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라이안은 클로리아의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인 가이어와 둘이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클로리아는 라이안이 히매인 왕국에서 살았었으며 에드코르 제국에서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이상하게 여겼다.
“거리가 엄청난데도 이곳까지 어떻게 온 것인지 모른다는 것인가요?”
“뭐, 말하자면 그렇죠.”
“거기는 각국의 공격을 받고 있어서 전쟁 중이었는데 그곳에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대단하네요. 무슨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클로리아가 말하는 특별한 능력은 검사나 아니면 마법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라이안도 그녀가 말하는 의도를 알았는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전 검을 조금 쓸 줄 압니다. 제 한 목숨은 지킬 수 있을 정도로요.”
“어머, 정말이에요?”
“네, 왜요? 제가 검사라는 것이 안 믿어지나요?”
“아니요, 뭐 그렇게 안 믿어지는 것은 아닌데 사실 그렇잖아요. 만약 라이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분명 마법사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체격도 그렇고 왠지 약한 남자 같아서요. 후훗.”
클로리아의 말에 라이안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말했다.
“으윽, 그렇게 약해보이지는 않는데.”
“호호호, 글쎄요? 제가 사는 물건들을 잘 들어주실 수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그녀의 말을 들은 라이안이 자신의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래보여도 힘은 좋으니까요.”
“호호호, 좋아요. 한번 믿어볼게요.”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미 마을 중앙의 큰 거리로 나오게 되었고 라이안은 자신이 있는 곳이 생각보다 큰 마을임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수나 영지로 영지 중심에 영지 성 마을이 있었으며 그 성 밖으로 지금 라이안이 있는 외곽 마을이 있었다.
영지 성 마을은 조금 부유하고 능력 있는 자들이 사는 반면 이곳 성 밖의 마을은 서민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부유한 영지 성 마을의 사람들은 성벽이 지켜주겠지만 그 성 밖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멀리서 보이는 성을 본 라이안이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흠. 저것이 바로 결계로군요.”
“네, 맞아요. 숭고한 사천 명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인간 세상의 마지막 보호막이죠.”
라이안의 눈에 펼쳐진 결계는 대단해 보였다.
마치 하얀 연기들이 물결치듯 하늘 높이까지 크게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넓이는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리 사천 명이 희생했다고는 하나 이 정도의 결계를 칠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네요.”
“그렇죠. 사천 명의 영웅들이 아무리 많은 신성력을 가졌다고 해도 이 정도의 결계는 치기 힘들죠. 하지만 이 결계를 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신성력이 깃든 물건들도 들어갔어요. 대표적으로 대신성전에 있는 라피네 신님의 신상이죠.”
“라피네 신의 신상이요?”
“네, 수천 년 전 단 한 번 라피네 신님이 이곳 중간계에 현신 했었고, 라피네 신님이 사라지자 그곳에 라피네 신님의 모습을 한 신상이 만들어져 있었대요. 신상에는 인간이 가질 수 없을 정도의 신성력이 흘렀으며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신관들이 그 신상을 향해 기도를 했었죠. 그렇게 모인 신성력은 엄청났기 때문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결계를 칠 수 있었던 것이죠. 물론 각 성전의 수많은 성물들 역시도 결계에 쓰였고요.”
“수천 년 동안 신성력이 깃든 물건이라…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네요. 신상 역시도 라피네 신이 만들었다면 대단한 신성력을 가졌을 것이니.”
그들이 그렇게 한 곳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몇몇의 남자들이 그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여! 이게 누구신가? 마을에서 가장 도도하기로 소문난 클로리아잖아? 그런 클로리아가 웬일로 이런 약해빠진 놈과 같이 있는 것이지?”
“큭큭큭, 클로리아는 볼 때마다 예뻐지는 걸?”
덩치가 상당한 그들은 힘 꽤나 쓸 듯했다.
어느 마을이나 꼭 이런 종류의 건달들이 있는 법이었다.
가장 처음 말을 한 남자는 호시탐탐 클로리아를 노리고 있던 제스였다.
제스는 이곳 도둑길드의 행동대장 자리에 있었으며 검 또한 상당히 잘 써서 병사 몇 정도는 혼자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제스가 라이안에게 다가와 그의 턱을 살짝 들고는 말했다.
“뭐야? 이 계집애 같은 얼굴은? 이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로 우리 클로리아를 꼬드긴 건가?”
빠직.
라이안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계집애 같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이것들이!’
자신의 턱을 잡고 있는 제스의 팔을 부러뜨려 버리려고 생각한 라이안이었다. 그러나 클로리아가 먼저 제스의 팔을 손으로 쳐내며 라이안을 막아섰다.
탁!
“이거 왜 이래? 너희 갈 길이나 가!”
“하하하, 역시 클로리아의 성격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이봐, 너.”
제스가 클로리아에게 말을 하다가 라이안을 쳐다봤다.
“혼자서 밤에 돌아다니지 마라,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알았어?”
하지만 라이안은 제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제스는 약간 화가 났는지 라이안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뭐야?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야?”
라이안이 제스를 날카롭게 노려보자 그는 한쪽 눈을 꿈틀거리더니 주먹을 들어 라이안을 치려고 했다.
“계속 이러면 저기 있는 경비병을 부를 거야!”
클로리아의 큰 소리에 제스가 자신의 뒤를 바라보았고 그곳에 경비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비병 또한 클로리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쳇,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하지만 다음에 내 눈에 띄면 지하밀실에서 벌레들의 식사로 만들어 주마.”
말과 함께 제스와 그의 패거리들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몇 명의 경비병들이 라이안과 클로리아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저놈들이 너희들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경비병들도 제스와 그의 패거리들을 보았었는지 그들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클로리아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야?”
“네.”
클로리아의 말을 들은 경비병들이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돌아갔고 라이안은 클로리아를 보며 물었다.
“저들은 누구죠?”
라이안의 물음에 클로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하죠? 저 때문에 라이가 위험해질지도 몰라요. 가장 덩치가 좋은 사람은 제스라고 이곳 도둑길드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죠. 성격도 포악하지만 그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한 번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한다는 것이에요.”
클로리아의 말에 라이안이 생각난 것은 바로 벌레들의 식사였다.
“뭐, 별 문제 없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괜히 라이를 데리고 나온 것 같아요. 미안해요.”
“괜찮다니까요. 우리 이러지 말고 어서 장이나 보고 들어가요.”
“네.”
클로리아가 앞장서서 걸었고 라이안은 잠시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더니 곧 앞에 가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런 그들을 골목길에서 몰래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제스와 그의 패거리들이었다.
라이안이 잠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제스가 자신들의 패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자식 언제 기회가 있을 때 나한테 끌고 와. 감히 나의 클로리아 곁에 머물다니 가만 두지 않겠어.”
제스의 말에 그 뒤에 있던 남자들이 사악하게 웃으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안은 클로리아와 나란히 걸으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오라고, 지루하지 않게.”
“네? 뭐라고 했어요?”
라이안의 중얼거림을 옆에 있던 클로리아가 얼핏 들었는지 물었고, 라이안은 그런 그녀에게 살며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클로리아가 의외로 상당히 인기가 있는 것 같다고요. 후훗.”
“에이, 설마요.”
라이안의 말에 클로리아가 수줍은 듯 얼굴에 홍조를 띠었고 라이안은 그녀를 보면서 또 다시 루시 공주의 얼굴이 생각났다.
갑자기 라이안의 표정이 바뀐 것을 확인한 클로리아가 이상함을 느끼며 물었다.
“왜 그래요?”
“네? 뭐가요?”
“저기 라이가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짓는 것 같았어요.”
“그랬어요? 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 어서 가요.”
“네.”
다시 얼굴에 웃음을 짓는 라이안이었지만 클로리아는 그의 웃음 속에서도 슬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날 장을 봐서 그런지 상당한 진수성찬을 차릴 수 있었고 일을 마치고 온 가이어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야! 이거 엄청난 걸? 오늘 우리 클로리아가 단단히 실력발휘를 했나보구나?”
“아니에요. 라이가 한 음식도 있어요. 한 번 드셔보세요. 정말 특이한 맛이 나요.”
“그래? 라이가 음식을 했다고?”
가이어가 라이안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고 곧 포크를 들고는 그가 만든 스파게티를 먹으려고 했다.
그런 가이어를 라이안이 서둘러 말렸다.
“가이어, 그 음식은 소스와 잘 섞어서 드셔야 해요.”
“아, 그런가? 이렇게 하면 되나?”
“맞아요.”
면을 요리저리 섞던 가이어가 라이안이 만든 스파게티를 입에 넣었다.
“으음!”
가이어의 표정이 굳어지자 라이안이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맛이 이상해요?”
라이안의 물음에 가이어가 라이안을 빠르게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맛있네! 자네, 혹 요리사였나? 이런 맛이라니.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야!”
그렇게 말하며 정신없이 접시에 담긴 스파게티를 모두 비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조금 더 있나?”
아직도 양이 차지 않았는지 입맛을 다시는 가이어였다.
“하하하, 입맛에 맞으시나 보군요. 그런데 어쩌죠? 맛이 없을 줄 알고 조금밖에 안했는데.”
“그런가? 이거 아쉽군.”
그런 가이어에게 클로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라이가 만든 음식 맛을 보고 얼마나 놀랬다고요. 숲에 가서 이상한 과일과 풀을 뜯어오더니 그것으로 요리를 해 이렇게 기막힌 맛을 내더라고요.”
가이어는 오리고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로리아와 라이안이 먹고 있는 스파게티에 자꾸 눈이 갔다.
라이안이 그런 가이어를 보며 살며시 말했다.
“저기, 이거라도 드실래요?”
“아, 아니라네. 그것은 자네 먹을 것이 아닌가?”
“아니에요. 전 이것보다 오리고기가 더 맛있는 걸요?”
“정말인가? 그럼 사양하지 않겠네.”
가이어가 말과 함께 빠르게 라이안의 접시를 빼앗아갔고 클로리아가 그런 가이어를 보며 한소리 했다.
“아버지!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하지만 가이어는 스파게티를 먹느라고 바빴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괜찮아요, 클로리아. 어서 마저 식사하죠. 후훗”
“아버지가 식탐이 좀 강해요.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클로리아의 말에 라이안은 살며시 미소만 지었지만 곧 가이어를 보며 헤인드가 떠올랐다.
‘식탐이라면 헤인드가 정말 강했었지. 먹는 것에는 칼부림을 해서라도 덤벼들곤 했으니.’
라이안은 다음날 한 번 타미르안의 레어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저 식사를 했다.
가이어는 하루가 피곤했는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잠에 빠져들었고 라이안은 클로리아와 먹은 음식을 같이 정리했다.
“라이는 참 자상하네요.”
“아니에요. 신세 지는 것도 미안한데 이런 것이라도 도와야지요.”
그렇게 말하며 식탁을 정리하던 라이안은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으며 창밖을 보았다.
“으음?”
라이안의 눈에 숲 어딘가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아주 친근한 느낌이.”
“왜 그래요, 라이?”
“아니요, 저기… 어?”
클로리아를 한 번 보고 다시 창밖을 보자 숲 속에서 흘러나왔던 빛은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이상하네요. 분명 숲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왔는데.”
“하얀 빛이요?”
“네.”
클로리아가 라이안의 말에 이전의 기억을 되살려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사실은요, 라이. 라이에게 한 가지 말 안 해준 것이 있어요.”
“말 안 해준 것이라니요?”
“제가 라이를 찾았을 때 저도 숲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빛을 따라갔었어요. 보통 횃불 같았으면 붉은색이잖아요? 그런데 그 하얀 빛은 굉장히 신비롭게 보여 전 계속해서 그 빛을 따라갔고 곧 빛은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때 발아래를 보니 라이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고요.”
클로리아의 말을 들은 라이안이 다시 창밖의 숲을 바라보았다.
“그랬었군요. 마치 하얀 빛이 제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준 것 같군요.”
“네.”
클로리아는 라이안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전 마치 신으로부터 라이를 선물 받은 느낌이었답니다.’
사실 라이안의 얼굴에 안 넘어올 만한 여자가 없었기에 클로리아 또한 그를 보자마자 한 눈에 반했었다.
그런 클로리아는 라이안이 잠을 자는 순간에도 그를 보살피며 얼마나 행복해 했었는지 라이안은 모르고 있었다.
라이안은 그런 클로리아의 마음도 모른 채 숲 속에서 흘러나왔던 빛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곧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