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장 어리석은 로드퍼드 자작
식사를 위해 내려온 일행은 라이안이 갈천혁, 혁마소와 같이 식탁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라이안! 돌아왔군!”
“형님!”
그들은 며칠 만에 보는 라이안을 크게 반가워했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된 건가?”
“순간이동으로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녀석이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라이안이 무엇을 알아왔는지 궁금해 물었지만, 쓴 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잠시만… 그 이야기는 에나와 루시가 나오면 하도록 할게.”
그때 마침 에나와 루시 공주도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헤인드가 그녀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며 말했다.
“저기들 오는군.”
헤인드는 라이안이 들려줄 내용이 상당히 궁금했던 모양인지 에나와 루시 공주에게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들이 걸어와 자리에 앉자 라이안은 루시 공주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데브릭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국왕파 귀족들은 모두 왕성에 붙잡혀 있는 상태고요.”
라이안의 말을 들은 루시 공주는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아버지는요? 국왕전하께서는 무사하신 건가요?”
“미안해요, 루시. 경비가 삼엄하여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어요. 국왕파 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데다 국왕전하의 상태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쳐들어갈 수는 없겠더군요.”
“그렇군요… 잘하셨어요, 라이안.”
국왕파의 신하들은 모두 크호른 왕의 충직한 신하이기에 앞서 루시 공주에게도 절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괜히 건드려 인질들이 죽거나 상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루시 공주는 이제 믿을 사람이라고는 라이안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루시 공주의 물음에 라이안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우선은 이곳 또한 데브릭 공작의 영지이니만큼 서둘러 떠나야겠지요. 와이파른 후작님과 팔튼은 왕성에서 탈출하였다고 하더군요. 아마 얼마 안 있어 그들이 국왕파의 군사를 이끌고 데브릭 공작과 대치하게 되겠지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루시 공주는 한 가닥의 희망이 있음을 알고 안심했다.
“그럼 모두 짐을 챙기도록 해요. 이곳은 안전하지 않으니까요.”
라이안의 말에 헤인드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 그래도 식사는 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헤인드의 말에 모두가 어이 없어했다.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음식이 넘어가?”
디로안이 헤인드에게 핀잔을 주자 헤인드가 힘없이 일어났다.
라이안이 헤인드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미리 여관 주인에게 많은 음식을 싸달라고 말했으니 배고파도 조금만 참아, 헤인드.”
“정말?! 역시 라이안이라니깐! 하하하!”
그런 헤인드를 보며 디로안이 고개를 흔들었다.
“좋단다… 아이고, 저 먹보 같으니…….”
하지만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헤인드는 마냥 즐거워했다.
그들이 그렇게 바쁘게 짐을 싸고 있을 때 한 남성이 그들을 살피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여관을 나선 그 남자는 서둘러 어떤 곳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그곳에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있었다.
“이제 곧 떠난다고 하는군. 어서 이 사실을 알리게.”
현재 라이안 일행이 머물고 있는 마을은 삼면이 산으로 되어 있어 들어오고 나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길을 떠나고자 한다면 마을에서 한참을 나온 뒤 갈림길에서 길을 골라야 했다.
데브릭 공작의 휘하에 있던 로드퍼드 자작은 얼마 전 루시 공주로 보이는 여인과 그의 일행이 자신이 관리하는 영지 외곽의 마을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라고 일렀다.
로드퍼드 자작은 욕심이 많은 자로 루시 공주를 잡아 데브릭 공작에게 받쳐 자신의 지위를 한 단계 올릴 심산이었다. 욕심이 많은 로드퍼드 자작이 그런 절호의 기회를 다른 누구에게 알렸을 리 만무했다.
숲 속에서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배치해 기다리고 있던 로드퍼드 자작은 곧 한쪽에서 말을 타고 오는 자를 보았다. 그자는 서둘러 말을 숨기며 산을 올라 로드퍼드 자작이 있는 곳으로 왔다.
“자작님, 지금 그들이 떠나려고 합니다. 아마 조금 뒤면 이곳을 지날 것입니다.”
“크흐흐, 내 평생의 가장 큰 기회가 이제야 오는군.”
라이안 일행은 서둘러 길을 떠나고자 짐을 챙기고 마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라이안은 루시 공주의 안색이 좋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걸어 나오는 그녀가 너무도 안타까웠던 것이다.
라이안은 루시 공주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아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 나라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제가 반드시 바로 잡아줄게요.”
라이안의 말을 들은 루시 공주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부탁해요…….”
그녀에게 힘을 주고 싶었던 라이안은 밝게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행이 마차에 오르기 시작할 때 라이안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신화경의 경지에 오르면 아주 작은 일 하나에도 약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라이안도 산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런 그의 감각에 계속 무엇인가가 걸려왔다.
주위를 둘러본 라이안은 기척을 감지하고자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는 기원을 펼치지 않고서도 근처에 있는 마나들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안의 감각에 일행과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마나가 잡혔다. 갈천혁과 혁마소의 마나를 접할 때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들의 마나가 바위라고 한다면 헤인드나 디로안의 마나는 모래와도 같구나.’
그만큼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약간의 상념에 빠져 있을 그때였다.
라이안의 감각에 이상한 것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으음? 일반인보다 조금 강한 마나로군. 둘 정도는 익스퍼트급. 이런 자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수상하지.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인가?’
라이안은 순간 그들 중 하나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자는 순간 자신이 들킨 것 같은 느낌에 급히 숨었다.
‘설마 날 본 건가?’
고개를 숙여 모습을 감춘 사내는 뒤로 조심조심 걸어가며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라이안은 그렇게 하나의 마나가 멀어짐을 느끼며 생각했다.
‘역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로군. 오른쪽 반대편 지붕에 하나, 정면 왼쪽 구석에 둘, 그리고… 후훗, 내 뒤에도 하나 있군. 그건 그렇고, 왜 감시만 하고 있는 거지? 단순한 정보길드인가? 아니면… 우리가 떠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인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의도가 좋지 않음은 분명했다.
‘아무래도 나가는 입구가 문제인데… 데브릭 공작이 알고 있다면 귀찮아질지도…….’
데브릭 공작이 알았다면 분명 많은 군사를 보내왔을 것이다.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이안은 그 나름대로 어려운 점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아무리 많은 군사들을 보낸다 하여도 전혀 힘겨움 없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는 대로 모두 잡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될 경우 이 나라의 국력은 터무니없이 약해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라이안은 이미 루시 공주 때문에 히매인 왕국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에 해를 끼칠 수는 없었으며 히매인 왕국 내에서까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데브릭 공작과 라핀 후작만 처리하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자신들을 감시하는 자들이 데브릭 공작과 연관이 있는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기에 두고 보기로 했다.
라이안이 마차에 오르자 일행 모두가 탔음을 확인한 마부들이 말을 몰았다.
“으그자! 가자!”
마차는 아주 느리게 움직여 입구까지 다다랐다.
마을의 입구에서 갈림길까지는 조금 긴 거리였다.
마차가 마을 입구를 나와 갈림길과의 중간 정도 다다랐을까?
나무가 무성한 언덕에 있던 로드퍼드 자작은 세 대의 마차가 오는 것을 보고 야비하게 웃으며 옆에 있던 기사에게 명했다.
“궁수들에게 준비하라 일러라. 루시 공주의 시체만 가져가도 되니 인정사정 볼 것 없다고 알리고. 화살 공격이 끝나면 나머지 풀숲에 있던 기사들이 마차를 덮친다.”
“알겠습니다.”
지금 로드퍼드 자작에게 명을 받는 기사의 얼굴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명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을 이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공주를 죽인다는 것은 곧 반역이 아닌가? 정녕 이것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기사가 되기 전 검술을 익히며 나라에 큰일을 하고자 꿈을 키웠던 그였다. 그런 자신이 지금 반역의 무리에 속해 있으니 어찌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는가?
그는 궁수들에게 로드퍼드 자작의 명을 알리고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화살 공격이 끝나고 나면 마차를 치라고 하는군.”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전달한 기사가 무리에 섞이자 옆에 있던 기사가 물었다.
“자네, 얼굴색이 별로 안 좋군.”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반역이란 말일세. 난 아직도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네.”
주위에 있던 기사들 역시 그 말을 들으며 기분이 언짢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명을 받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자신들이 주군으로 삼은 데브릭 공작이 반역을 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숲의 한 곳에서 검은 깃발이 올라왔다.
마차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숲에 숨어 있는 궁수들에게는 아주 잘 보이는 위치였다.
아마도 그 깃발이 내려가면 일제히 공격이 퍼부어지리라.
라이안은 수많은 마나들이 숲에 숨어 있음을 알고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나…….”
라이안의 혼잣말을 들은 헤인드와 디로안은 뜬금없는 말이 이상해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역시’라니?”
그들의 물음에 라이안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아까 우리가 여관을 떠나기 직전 우리를 감시하는 자들이 있더군. 혹시나 마을 입구에서 칠 목적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길 양쪽에 쫙 깔려 있군.”
라이안의 말에 헤인드와 디로안이 창가의 천을 걷어 밖을 살폈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자 다시 헤인드가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지금이야 그렇지. 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바로 공격해올 것 같군.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살기가 그리 짙지 않다는 거야.”
살기란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의 기운이다.
궁수들이야 쏘라고 해서 쏘는 것이고 기사들 역시 자신들이 루시 공주를 죽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살기가 짙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헤인드는 라이안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진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마차를 돌려야 하잖아?”
“어차피 이 뒤는 마을이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야. 도망갈 길은 없어.”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이대로 공격당하자고?”
헤인드가 당황하며 묻자 라이안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후훗, 그럴 수야 없지. 루시가 놀랄 수도 있으니 지금 마차를 멈춰야겠지?”
라이안이 말과 함께 마차의 문을 열고 단번에 마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앞에 있는 마차 위로 다시 뛰어올라 마부에게 말했다.
“잠시 말을 멈춰주세요.”
마부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라이안 때문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고 줄을 잡아당겨 천천히 말을 세웠다.
마차가 멈추어 서자 안에 있던 이즈리스 남작이 마부에게 물었다.
“이보게, 무슨 일인가?”
마부가 아닌 라이안이 답했다.
“내가 멈추라고 했어.”
라이안의 음성이 들리자 급히 문을 열고 나온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형님이요?”
이즈리스 남작은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와 풀밖에 없었다.
“혹, 이곳에서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생리적인 현상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이안의 입에서는 그가 바라는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이 나왔다.
“볼일은 내가 아니라 저들이 있는 것이지.”
라이안의 말을 들은 이즈리스 남작은 순간 얼굴을 굳히며 주위 숲을 둘러보았다.
“누가 숨어 있는 것입니까?”
“응, 그것도 아주 많이.”
“어찌 할까요? 마차를 돌릴까요?”
“아냐, 이미 포위되었어. 안에 들어가 있어. 밖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하지만…….”
“어허,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안 들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라이안이 귀여운 위엄을 보이자 이즈리스 남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안은 서서히 마차 앞으로 걸어가더니 곧 주위에 있던 나뭇가지를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차 주위에 꼽았다.
이를 본 로드퍼드 자작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저것들이 오다말고 뭐하는 거지?”
조금만 더 왔다면 공격신호를 보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위치는 조금 엉성했기에 차마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로드퍼드 자작이었다.
로드퍼드 자작의 옆에서 검은 깃발을 들고 있던 병사도 고개를 내밀어 멀리 보이는 마차를 보며 말했다.
“한 사람이 마차 근처에 뭘 꼽는 것 같은데요?”
로드퍼드 자작이 그런 병사를 보며 물었다.
“자네, 눈이 아주 좋군. 난 눈이 침침해서 저곳까지는 안 보인다네. 그래, 마차 주위에 뭘 꼽는 것으로 보이는가?”
“나뭇가지로 보입니다.”
“나뭇가지? 나뭇가지를 왜?”
“그건 저도 잘…….”
로드퍼드 자작은 입속이 말라갔다. 눈앞에 자신의 승진이 보이니 긴장되는 것은 당연했다.
마차 안으로 들어온 이즈리스 남작은 창을 통해 라이안이 마차 주위에 나뭇가지를 꼽는 것을 보며 의아해했다.
“스승님, 형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이죠?”
이즈리스 남작의 말에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 갈천혁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진법을 설치하고 있구나. 아마도 마차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겠지.”
“진법이요?”
“그렇단다. 진법이란 많은 효력을 가지고 있단다. 어떻게 설치하느냐에 따라 무릉도원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지. 그리고 지금처럼 마차를 보호할 수도 있으며 순식간에 적의 눈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단다.”
“마치 결계마법과도 같은 것이군요.”
라이안이 진법을 거의 다 설치했을 무렵 로드퍼드 자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제길,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그렇게 로드퍼드 자작이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그때!
라이안은 자신이 설치하고자 했던 진법의 준비를 마쳤는지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진법 안쪽에 대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사락.
로드퍼드 자작과 궁수들, 그리고 기사들 역시 지금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마차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마차는, 마차는 어디 갔느냐!”
로드퍼드 자작은 자신의 승진이 날아가 버리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어버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라이안은 웃으며 로드퍼드 자작 무리에게 소리쳤다.
“너희가 숨어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다! 이제 그만 나오지 그래?”
로드퍼드 자작은 라이안이 뭔가 환상마법을 걸었다고 생각하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마차는 모습만 감췄을 뿐! 분명 저곳에 있을 것이다! 쏴라! 가차 없이 쏴라!”
슈슈슈슈슉.
슈슈슈슈슉.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라이안은 피할 생각조차 없었다.
툭, 투둑.
투두둑.
화살은 라이안의 몸과 얼굴에 부딪쳤지만 라이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패왕철기신공의 효능 덕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라이안 뒤쪽으로 날아간 화살들이 되돌아서 병사들에게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크악!”
“으악!”
“뭐, 뭐야!”
로드퍼드 자작이 서둘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크윽! 잘 모르겠습니다. 마차가 있던 자리에서 갑자기 화살이 날아옵니다!”
“어찌 아무것도 없는 저곳에서 화살이 날아올 수 있단 말이냐! 그것도 수십 개 씩이나!”
자신들과 비슷한 수만큼 되돌아온 화살로 인해 궁수들은 하나씩 목숨을 잃어갔다. 그들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느라 공격을 중단했다.
그들이 공격을 중단하자 날아오는 화살 또한 사라졌다.
진법 안에서 그러한 상황을 모두 보고 있던 갈천혁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반환대환진이라구나. 라이안이 설마 이것을 사용할 줄이야.”
“그것이 무엇인지요?”
역시나 이즈리스 남작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반환대환진이란 상대의 공격을 같은 힘으로 되돌려주는 진법이란다. 화살을 퍼붓는다면 그 위치가 뒤바뀌어 돌아가고 주먹을 뻗는다면 자신의 주먹에 자신이 맞게 되는 것이 바로 반환대환진의 효능이지.”
“대단하군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나뭇가지 몇 개로 가능한 것이지요?”
“이곳에서는 마법진이라는 것을 그리는 것 같더구나. 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아무렇게나 꼽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라이안이 했던 것은 무척이나 정교한 작업이며 전체적인 자연의 흐름을 보아가면서 위치를 선정해야 한단다. 그리고 모든 물리적인 공격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마나를 진법에 쏟아야 하지. 우리가 나가도 되는 일인 것을… 우리가 번거로울까 봐 직접 한 모양이구나.”
그랬다.
갈천혁과 혁마소가 날아오는 화살에 손짓 한 번만 해도 화살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들이 막는다면 그 어떤 것도 그들의 뒤로 지나갈 수 없었다.
라이안 역시 알고 있었으나 매번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기에 스스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로드퍼드 자작은 화살공격이 먹혀들지 않자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기사들은 무얼 하는 것이냐! 어서 저자를 치지 않고!”
라이안 역시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얼굴을 보았다.
“저자가 이들을 이끄는 수장인가보군. 인원이 적은 것을 보니 데브릭 공작이 보내서 온 것은 아닐 테고…….”
데브릭 공작이 왔다면 라이안의 능력을 잘 아는 이상 자신의 모든 병력을 집중했을 것이었다.
“데브릭 공작의 아래에 있는 피라미일 뿐인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많은 생명을 빼앗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로드퍼드 자작의 명령으로 빠르게 풀숲에서 달려 나온 기사들이 곧 라이안을 포위했다.
“마차는 어디 있느냐! 마차만 내 놓는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한 기사가 라이안에게 소리치고 있을 때 몇몇 기사들이 라이안을 알아보며 얼굴을 굳혔다.
“라, 라이안 님이시다…….”
“진정 라이안 님이시구나.”
“루시 공주님을 호위하신다는 소문이 있더니만… 젠장.”
히매인 왕국의 모든 기사들이 영웅으로 숭배하는 사람이 바로 라이안이었다.
단신으로 에드코르 제국에 맞선 무적의 전사, 검은 사신!
라이안을 포위하고 있던 자들 중 몇몇은 케로틴 성에서 라이안을 본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라이안이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나를 아는가?”
“그렇습니다. 이전 케로틴 성의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 그때는 같은 편이었는데 이제는 적이 되었군.”
라이안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루시 공주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명을 받은 이상 이행해야 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무례라… 예의를 아는 자가 그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기사라면… 진정 한 나라에 속한 기사라면 목숨을 다해 그 나라의 왕족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저희는… 주군의 명을 이행할 뿐입니다.”
“허! 주군? 데브릭 공작말인가? 그렇다면 묻겠네. 자네들은 반역자인가, 히매인 왕국의 기사인가?”
“저희는……!”
지금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라이안의 말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로드퍼드 자작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무엇하는 것이냐! 어서 그자를 잡지 않고!”
멀리 있어서 아직 라이안을 알아보지 못한 그였다. 아니, 그는 라이안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라이안에 대한 소문 역시 너무 황당해서 과장된 것이라며 믿지 않았던 로드퍼드 자작이었다. 항상 영지에만 붙어 있는 그가 무엇을 알겠는가?
천생 겁쟁이인 자가 이렇게 병사들과 기사들을 대동하고 온 것 만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라이안은 로드퍼드 자작에게 지풍을 날렸다.
핑!
퍽!
“크헉!”
순식간에 로드퍼드 자작에게 날아간 빛줄기에 기사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쓰러지는 로드퍼드 자작을 보며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역시 무서운 분이시다.’
‘몇 기의 타이탄과도 맞붙은 분이시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지금 무엇을 했단 말인가? 보지도 못한 사이에… 진정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라이안을 아는 자도 있었지만 모르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아는 것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라이안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라이안은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솔직히 너희를 죽이는 것은 땅 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들을 밟아 죽이는 것보다 쉽다.”
라이안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순간 울컥했다.
라이안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 너희의 전력을 보아라! 겨우 타이탄 한기와 싸울 수 있을까 말까 한 전력이군. 나를 아는 자, 말해보아라. 내가 몇 기의 타이탄과 싸웠는지.”
라이안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던 기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무려… 6기였습니다. 정말 대단한 전투였습니다.”
기사의 떨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지금도 그때의 상황이 생생하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저기 쓰러져 있는 멍청한 작자의 명령을 듣고 나와 싸우겠다는 것이냐! 도대체 크호른 왕께서는 무엇을 하고 있기에 본인의 딸이 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음에도 가만히 계신단 말이냐!”
기사들은 라이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싸울 분위기가 아니었다.
기사들 또한 이미 명을 내리는 사람이 쓰러졌으며 싸워봐야 전혀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기사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이틀 전 데브릭 공작각하께 서신을 전해드리러 왕성의 내성에 들어갔었습니다. 거기서 듣기로 국왕전하께서는…….”
라이안이 말을 하다 멈춘 기사에게 조금 더 다가가 물었다.
“국왕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마차 안까지 라이안과 기사들의 말이 들렸는지 루시 공주가 마차에서 내려 라이안과 기사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 위험해요.”
에나가 서둘러 나오며 진법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지만 루시 공주는 자신의 아버지 소식을 듣고 싶었다.
기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국왕전하께서는 이미 승하하셨습니다.”
“아, 아버지께서… 아…….”
기사의 말을 들은 루시 공주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끼며 쓰러져버렸다.
“루시! 루시!”
에나가 급히 루시 공주를 부축했다. 곧 마차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루시 공주에게 몰려들었다.
“갈천혁이 급히 루시 공주의 맥을 잡았고 천천이 손을 놓으며 말했다.
“잠시 기절한 것뿐이로구나.”
라이안은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자의 짓인가? 그자… 데브릭 공작의 짓인가…….”
라이안이 기사에게 물었지만 기사 또한 아는 내용이 없었다.
“들리는 말로는 바치스 공작각하께서 국왕전하를 시해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라이안은 그러한 소문 역시 데브릭 공작의 모략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이 돌고 있겠지… 국민들 역시 그렇게 알게 될 것이고…….”
라이안은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나와 싸울 것인가?”
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기사들의 선택을 라이안이 대신해주었다.
“너희는 나와 싸우면 반드시 죽는다. 그것도 모두. 그렇다고 싸우지 않으면 너희 또한 곤란하겠지. 병사들이 보고 있으니 그들의 눈을 가리고 너희를 살려주겠다.”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거부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라이안은 살며시 날아오르며 길 양쪽으로 풍신퇴를 시전하여 강기를 날렸다.
스팟!
스팟!
콰과과광!
콰과과광!
“크악!”
“크악!”
엄청난 먼지가 피어올랐으며 갑작스러운 공격에 병사들 또한 크게 다쳤다.
“너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이 방법뿐이겠지.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라이안은 말함과 동시에 환환미종보를 펼쳤다. 그러자 라이안의 모습이 수십으로 늘어났다. 그러고는 각기 지풍을 날렸다.
기사들도 움직이거나 피하려하지 않았다.
슈슈슈슈슉!
퍼버버벅!
퍽!
퍼벅!
“크윽!”
“컥!”
여러 라이안의 손으로부터 수많은 지풍들이 쏘아졌다. 그것을 맞은 기사들은 각기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하루 정도 잠을 자고 나면 모두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라이안의 환영들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자 라이안은 뒤돌아 루시에게 다가갔다.
디로안은 루시 공주를 라이안의 품에 건네주었다.
루시 공주를 안아든 라이안은 천천히 그녀를 마차 안으로 옮겨 눕혔다. 그리고 마차의 문을 닫으며 반지의 한 부분을 눌러 말했다.
“챠둠, 듣고 있어?”
“네, 듣고 있습니다.”
“지금 내 상황이 곤란하게 됐어. 잠시 타미르안 좀 불러줘.”
“알겠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무겁게 흘렀다.
얼마 안 있어 챠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타미르안을 바꿔드리겠습니다.”
“나라네. 찾았는가?”
“타미르안, 부탁할 것이 있어. 잠시 내가 있는 위치로 와주지 않겠어? 좌표는 챠둠이 가르쳐줄 거야.”
“알겠네.”
타미르안의 말이 들리고 난 뒤 곧 그들이 위치한 하늘에 밝음 섬광이 모여들더니 번쩍하고 빛이 퍼지자 금발의 타미르안이 나타났다.
타미르안 역시 라이안과 그의 일행들을 확인하며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그래, 부탁할 것이 무엇인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을 너의 레어로 데려가주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어렵지 않은 일이라네.”
“고마워.”
라이안은 자신의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모두들 잠시 타미르안의 레어로 피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와 할아버지들은 잠시 이곳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거든. 에나는 루시를 챙겨주길 바래. 많은 충격을 받았을 거야…….”
“우리는 걱정하지 말게나.”
“라이안 오빠, 조심하세요.”
그들을 말을 들은 라이안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라이안이 이즈리스 남작과 마차의 마부들을 보며 말했다.
“이즈리스, 마차는 이곳에 버리는 것이 좋겠어. 마부들에게는 여비를 주고 돌아가라고 하고… 너도 얼굴이 알려졌을 것이니 위험할 거야. 그러니 너도 타미르안을 따라가.”
“알겠습니다.”
타미르안이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모두 한곳에 모여라. 텔레포트로 이동할 것이다.”
갈천혁과 혁마소를 제외한 모두가 타미르안에게 모여들었다.
아직 타미르안에게 가지 않은 이즈리스 남작은 자신의 마부들에게 돈을 주며 말했다.
“지금까지 수고 많았네. 자네들은 미리 돌아가 있게나.”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남작님.”
“고맙네.”
마부들과 이야기 하던 이즈리스 남작이 서둘러 타미르안에게 다가갔다. 그것을 보고 있던 타미르안이 라이안에게 말했다.
“자네는 언제 올 것인가?”
“곧… 그리고… 하나 더 데려가줘. 위치는…….”
라이안은 빠르게 좌표를 말해주었다.
그 좌표는 처음 라이안이 이곳 히매인 왕국으로 텔레포트를 했던 곳이었으며 레드드래곤 미켈리우스가 의지를 상실한 채 쓰러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알겠네, 텔레포트!”
번쩍!
타미르안과 자신의 일행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본 라이안이 혁마소와 갈천혁을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들은 저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히매인 왕국을 뒤집어 놓을 상황에 드래곤들이 움직이면 저 혼자로는 힘들 것 같거든요.”
라이안 혼자로서는 수장들과 로드를 동시에 상대하기 벅찼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알겠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갈천혁의 물음에 라이안이 히매인 왕국의 왕성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왕성으로 가야할 것 같아요. 데브릭 공작과 라핀 후작을 만나봐야 할 것 같거든요.”
라이안이 말과 동시에 초광속의 경공을 시전했다.
갈천혁과 혁마소 또한 서로를 쳐다보다가 초광속 경공을 시전했다.
그렇게 3개의 금빛 광채는 히매인 왕국의 왕성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