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수련의 시작은 깨달음
루시 공주는 귀를 찢는 듯한 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억지로 눈을 떴다.
그리고 순간 벌떡 일어났다.
“라이안!”
하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자신이 방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여긴…….”
루시 공주가 뭔가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방을 노크하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에나였다.
에나는 침대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 공주를 보며 말했다.
“일어났군요. 괜찮아요?”
“네, 전 괜찮아요. 그런데 라이안은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에나는 그런 루시 공주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루시, 아직 저도 상황이 어찌 되어 가는지는 잘 몰라요. 우리는 도망쳤고 라이안과 싸우던 그들은 다시 우리를 쫓아왔어요. 그리고…….”
에나가 말하던 것을 끊으며 루시가 말했다.
“그들이 쫓아왔었다고요! 그럼 라이안은요!”
“진정해요… 진정해요, 루시… 잘은 모르겠지만 라이안 오빠는 무사히 탈출한 것으로 보여 져요. 그래서 그들이 다시 우리를 쫓은 것이었고요. 그리고 우리는 도망치던 중 라이안 오빠의 할아버지들을 만났어요. 그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 분들이시죠.”
“아…….”
라이안이 무사하다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 루시 공주였다. 그런 루시를 보며 에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선은 이곳 영지의 남작인 이즈리스 남작이 같이 저녁식사 하기를 원해요. 물론 다른 오라버니들과 라이안 오빠의 할아버지들도 함께 할 것이고요. 그러니 다른 궁금증은 그곳에서 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알겠죠? 저녁시간이 다 되어가니 서둘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예쁜 옷으로 갈아입어요. 훗”
에나가 아직도 멍해 있는 루시 공주와 옷을 갈아입고 있을 시간, 라드이라는 벌써 정신을 차리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힘을 길러야 한다. 주신이신 라피네 신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 못지않은 나다. 신성력을 더 높이려면 내 모든 것을 라피네 신님께 바쳐야만 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라드이라는 신성력을 라이안이 가르쳐 준 심법으로 움직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라드이라였다.
신성력은 몸을 돌수록 몸을 더욱 시원하게 해주었으며 모든 나쁜 불순물을 밖으로 내뿜어주었다.
마나는 심맥의 굵기에 따라 너무 심하게 운기하면 심맥이 회손 될 수도 있었으나 신성력은 심맥을 통해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흐름은 같았으나 육체에 무리가 가지 않는 힘이 바로 신성력이었다.
신관은 어둠의 힘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큰 치유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라드이라는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신성력이라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따라 인간에게도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갓블레이드를 만들 수 있음을…….
그러나 아직 자신에게는 무리였다.
‘항마칠검을 완벽히 깨우친다면 할 수 있다. 반드시 항마칠검을 깨우치리라.’
이제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단순한 파티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형제이며 가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과 함께하며 동료애와 깊은 우정을 같이 느껴온 라드이라였다. 죽으면 신의 품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꿋꿋이 믿고 있는 라드이라였으나 은연중 죽음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신도 팔튼을 위해 친구들과 전쟁에 참여했었고 라이안에게는 벌써 두 번의 목숨을 빚졌다.
자신도 칼을 들고 나가 싸우고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힘이 없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도 그들의 힘이 되리라.’
진정 라드이라 스스로가 강해지고자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똑똑똑.
신성력이 방 안 가득 메우고 있을 때 라드이라의 방을 노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봐, 아직 안 일어난 거야?”
헤인드의 음성이었다.
라드이라의 눈이 떠지고 그가 말했다.
“일어났어.”
방 안에서 들려오는 라드이라의 음성에 의아함을 나타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헤인드였다.
딸깍.
방문이 열리고 헤인드와 디로안이 들어섰다.
그들은 방 안에 들어오자 뭔가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라드이라의 몸에서 사그라지지 않은 신성력을 볼 수 있었다.
“뭐야? 수련하고 있었던 거야?”
헤인드가 말하자 디로안도 방 안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흡…하아… 이거 수련할 때 라드이라 옆에서 하면 수련의 성과가 더 오르겠는 걸?”
그런 헤인드와 디로안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라드이라가 말했다.
“옷차림이 바뀌었네?”
“으음?”
“말투가…바뀌었네?”
디로안의 말을 듣고는 헤인드가 이상함을 느끼며 말했다.
“정말? 그 말투… 왠지 라드이라가 말을 낮추니까 상당히 어색한데?”
라드이라가 그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거야. 앞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니까.”
“뭐야, 그럼 신관을 그만두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만두기는 무슨? 난 지금도 신관이지만 앞으로도 라피네 신님을 모시며 평생을 살아갈 사람이야.”
“이거 갑자기 변하니까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잖아.”
헤인드가 뒷머리를 긁으며 말할 때 디로안은 다른 생각을 했다.
‘라드이라 역시도 심경의 변화가 많았던 모양이군. 뭐… 앞일을 생각하면 이것도 좋은 것일지도…….’
자신들은 서로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별 큰 힘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큰 힘을 가지고 뭔가 큰일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 라이안을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다.
잠시 이러한 생각을 하던 디로안이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라드이라에게 말했다.
“이봐, 너도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무슨 일인데?”
라드이라가 묻자 디로안이 설명해 주었다.
“저녁에 이곳의 영주인 이즈리스 남작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더군. 우리 모두 오라고 했으니 자네도 준비를 해야지.”
“그러고 보니 너희들 옷차림이 꼭 귀족들 같은걸?”
라드이라의 말에 헤인드가 기분이 좋은지 해맑게 웃었다.
“어때, 어때! 어디 고귀한 집안의 귀족 같지 않아?”
하지만 라드이라의 말에서는 헤인드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딱 농부의 자식이군.”
“풋!”
디로안이 라드이라의 말을 듣고는 웃었고 헤인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쳇! 됐다. 됐어! 나 정말 농부의 자식 맞거든! 어서 옷이나 갈아입어. 밥 먹으러 가게!”
헤인드가 토라진 듯 몸을 돌리자 라드이라는 웃으며 자신의 배낭에서 여유분의 신관복을 꺼내 옷을 갈아입었다.
그것을 본 헤인드가 다시 라드이라를 보며 물었다.
“어? 너도 우리와 같이 귀족들의 예복을 입는 것이 아니었어?”
“난 신관이야. 난 어떤 일이 있어도 평생 이 옷을 입을 생각으로 신관이 된 거야.”
라드이라의 대답은 확고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근데… 가면 갈수록 왜 이 녀석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지? 에휴.”
너무도 변해버린 라드이라의 말투가 적응이 안 되는 헤인드였다.
저택의 하인들이 각자의 방으로 와서 식사의 시작을 알리고는 그들을 안내했다.
각자 복도를 걷던 그들은 한쪽 복도를 지날 때마다 마주쳤다.
“루, 루시.”
디로안은 루시를 보며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때려 기절시켰었기 때문이었다.
라드이라는 원래 그런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타입이었으나 헤인드와 에나는 조금 눈치를 봤다.
루시 공주도 디로안의 표정을 읽고서는 말했다.
“후우… 디로안을 보니 다시 목이 뻐근해지는 것 같네요. 앞으로 제가 목이 뻐근할 때마다 부탁하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에요?”
장난스러운 루시 공주의 말에 그때서야 모두의 얼굴이 펴질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때는 미안했습니다.”
디로안이 정식으로 사과를 했고 루시 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과를 받았다.
“배고프네요. 우리 얼른 식사하러 가요.”
복도를 조금 걸어가자 하인들이 앞쪽 문을 열어주었고 그곳에는 상당히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는 식탁과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어서 들어오시게나.”
헤인드는 상당히 배고팠는지 벌써부터 음식을 보며 침을 삼켰고 다른 일행들은 이즈리스 남작과 그의 양 옆에 있는 갈천혁과 혁마소의 눈치를 보았다.
“어서 앉지 않고 무엇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냐?”
혁마소는 챠둠으로 인해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헤인드와 그 외 일행들이 서둘러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헤인드는 주위의 분위기보다 자신의 배를 더 걱정했다.
‘으… 지금 바로 집어먹으며 실례이려나? 젠장… 뭘 알아야 먹든지 말든지 하지.’
모두가 자리에 앉자 이즈리스 남작이 편안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들 들도록 하시게나.”
헤인드는 그 말과 동시에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모두가 어정쩡하게 있을 때 루시 공주가 말했다.
“만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라네. 나야말로 스승님의 손자와도 같은 자네들과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어 영광이라네.”
루시 공주의 행동에서 이즈리스 남작은 그녀가 귀족임을 알아봤다.
그리고 루시 공주의 식사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갈천혁이 포크와 칼을 들더니 식사를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도 식사를 하려고 식기를 들었다. 그런데 혁마소가 칼을 들고는 마음에 안 드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별로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자신이 들고 있는 칼을 살며시 허공에서 놓았다.
위이이이잉
칼은 허공에서 부르르 떨며 공중에 떠 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한 듯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식사를 멈추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혁마소의 손가락이 칼의 중앙을 스쳐지나갔고 혁마소가 칼을 붙잡았다.
쩍!
소리와 함께 칼이 두 동강이 나버렸다.
칼로 젓가락을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역시 이것이 편하군.”
그것을 본 갈천혁이 혀를 찼다.
“쯧쯧쯧, 아주 허공섭물로 음식을 먹지 그러는가?”
이즈리스 남작이 신기해하며 혁마소에게 물었다.
“혹, 조금 전 오러로 칼을 자르신 것인지요?”
“그렇다.”
“하지만 전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 것이지요?”
“너희는 오러라는 것을 너무 한 가지로 규정해 놓았다. 왜 칼로만 그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규정짓는 것이냐? 칼이 날카로워서? 하지만 개미에게는 그 날카로움도 무딘 것과 같이 보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보다 더욱 작은 미생물에게는 바늘 끝도 둥글게 보일 것이다. 물체의 날카로움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련만 한다면 오러라는 것은 몸 그 어떤 곳으로도 나타내며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과 함께 자신이 만든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으며 식사를 하는 혁마소였다.
하지만 이즈리스 남작의 궁금증은 아직 풀린 것이 아니었고 갈천혁은 그런 이즈리스 남작을 보며 말했다.
“이즈리스, 이것을 보거라.”
갈천혁이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는 그것을 이즈리스에게 보여주었다.
“뭐가 보이느냐?”
뭐가 보이냐는 말에 이즈리스 남작은 갈천혁의 손가락 끝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그렇게 자세히 살폈을 때 그는 볼 수 있었다.
아주 미세하고 얇은 오러를.
“이것은!”
“그렇다. 검에 흐르는 커다란 오러만이 날카로움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란다. 그보다 더 얇고 예리하다면 그 어떤 것도 가를 수 있지 않겠느냐?”
갈천혁의 말은 이즈리스 남작으로 하여금 하나의 깨달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이즈리스 남작뿐이 아니었다.
헤인드와 디로안도.
그리고 라드이라 역시 그러한 말과 함께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제각기 마나의 절제와 마나의 형태를 생각했다.
그리고 마나의 구형화를 생각했다.
물론 라드이라 역시 신성력을 보다 집중해 그것을 어떠한 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를 생각했다.
지금껏 그들은 검을 토대로 검 위에 마나를 발현한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지금 새로운 세상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혁마소는 그런 그들을 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들이 식사하다 말고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쯧쯧쯧.”
낮에 챠둠의 말에 아직도 화가 안 풀려 모든 것에 거친 혁마소였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지 않아 눈을 떴으며 뭔가를 실험해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직 자리가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이즈리스 남작은 갈천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리는 다른 세 사람에게서도 같이 들려왔다.
“좋은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이즈리스 남작은 그들의 행동에 그들의 기도를 느껴보려고 애썼다.
‘그러고 보니 이자들. 전부 내 아래가 아닌 듯하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갑자기 용병이라고 생각했던 헤인드와 그의 친구들이 크게 느껴지는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이즈리스 남작은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보다 직접적이며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러한 성격 탓에 정계 진출이 힘든 사람이기도 했다.
이즈리스 남작은 솔직히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내, 자네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솔직히 대답해 줄 수 있는가? 자네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인가?”
이즈리스 남작이 헤인드와 디로안 그 외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묻자 갈천혁과 혁마소 역시도 그들을 바라보았다.
갈천혁과 혁마소도 식사를 마친 뒤에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라이안이 그동안 어떻게 지내 왔는 지와 함께.
헤인드와 디로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루시 공주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은 그냥 용병일 뿐이었다.
하지만 루시 공주에게는 여행을 하는 목적이 있었으며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루시 공주도 다른 일행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이즈리스 남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저희에 대해서 아신다면 남작님께서는 지금보다 저희에게 힘들게 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니, 저에게 라고 말해야겠죠.”
이즈리스 남작은 짐작한 대로라고 생각했다.
“역시 귀족이겠군요. 아가씨는… 그것도 상당히 높은…….”
미리 말을 높이는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들을 각오가 되었습니다. 말씀해 주시지요.”
루시 공주는 조금 망설였다.
이전 자신의 부주위로 일행들을 위험에 빠트린 적도 있었기에 이것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시 공주의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갈천혁의 말 때문이었다.
“이즈리스는 믿을 만한 사람이란다.”
루시 공주는 갈천혁의 말을 듣고는 갈천혁을 바라보았다.
‘라이안의 할아버지들…….’
“알겠습니다. 저희는 히매인 왕국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히매인 왕국의 공주 루시 폰 세쿠론입니다.”
이즈리스 남작은 루시 공주의 위치가 높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한 나라의 공주의 신분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당신이 정말 루시 공주님이란 말입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이럴 수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거늘.”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이즈리스 남작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혹 히매인 왕국의 기사들입니까?”
만약 헤인드와 디로안 그리고 에나가 루시 공주를 호위하는 마법사와 기사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실력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역시나 이즈리스 남작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디로안이 바로 그 물음에 답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냥 일반 용병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라이안과는 친구관계입니다.”
용병치고는 너무도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라이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단지 갈천혁과 혁마소의 손자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라이안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루시 공주를 바라보며 묻는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었던 것이었으나 그는 곧 충격적인 사실을 들어야 했다.
“라이안 님은 에드코르 제국으로부터 저희 히매인 왕국을 지켜주신 검은 사신이십니다.”
“헉! 그, 그것이 사실이오? 단신으로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과 싸웠다는 그랜드마스터. 검은 사신이 바로 라이안 그 사람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단호한 루시 공주의 말에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그런 이즈리스 남작을 보며 혁마소가 당연한 듯 말했다.
“무엇을 놀래는 것이냐? 우리 손자가 당연 약할 리 없지 않느냐? 지금은 다쳐서 제 힘을 못 쓴다고 한다만 그 아이가 제 힘만 되찾는다면 아마도 우리보다 강할 것이다.”
갈천혁과 혁마소도 만약 라이안과 일 대 일로 목숨을 걸고 대련한다면 천 중 일의 확률로 자신들이 조금 밀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혁마소의 말을 들은 갈천혁이 조용히 먹던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허허허, 한 달 정도면 본래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뒤에 파황혈천무를 연마한다고 했다네.”
“흠… 그렇다면 얼마 안 있으면 우리 둘이 덤벼도 그 녀석 하나를 이기지 못하겠군.”
이즈리스 남작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자신의 양옆에 앉아 있는 갈천혁과 혁마소도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이해가 가는 면도 있었다.
‘이분들의 손자라면 당연한 것일지도.’
헤인드와 디로안의 라이안에 대한 설명의 시작은 자신들과 처음 만나게 된 산에서부터였다.
그리고 라이안이 자신들의 난처한 상황을 도와주며 같이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팔튼을 구하기 위해 얼마 전 쫓기던 자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다는 부분에서는 혁마소가 그만 흥분을 하는 바람에 이야기가 중간에 끊어지게 되었지만 갈천혁이 간신히 그를 말렸다.
그리고 팔튼이 죽기 직전 나타나 팔튼을 구하고 기상천외한 병법과 함정으로 에드코르 제국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에서는 혁마소가 광천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역시 내 손자 녀석이로구나!”
이즈리스 남작도 라이안의 엄청난 활약에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눈이 초롱초롱 빛나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갈천혁과 혁마소는 라이안이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힘썼는지 알 수 있었으며 라이안이 없는 동안 자신들이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다짐했다.
헤인드와 디로안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 이곳에서 포스안까지라면 얼마나 걸리느냐?”
갈천혁의 물음에 이즈리스 남작이 답했다.
“걸어서만 간다면 분명 한 달은 걸리겠지요.”
“흠… 그렇다면 서둘러 출발을 해야겠구나.”
“그리 서둘지는 않으셔도 될 듯싶습니다. 마차를 이용하게 된다면 절반 이상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마차는 제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우리 때문에 수고가 많구나.”
“아닙니다. 수고랄 것이 있겠습니까? 다 제가 편한 여행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하하.”
이즈리스 남작의 말에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갈천혁이 물었다.
“이즈리스, 너도 함께 가겠다는 말이냐?”
“제가 같이 간다면 편할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선은 공동 국가 중 한 나라의 귀족이니까요. 루시 공주님, 괜찮겠습니까?”
루시 공주가 생각하기에도 이즈리스 남작이 도와준다면 여행이 더 원활해질 것이라 느꼈다.
“저희야 뭐… 이즈리스 남작님이 도와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디로안이 잠시 생각하고는 이즈리스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님, 혹 칸보리치 동맹 공동통행증을 구하실 수 있으신지요?”
디로안의 말에 살며시 미소를 지은 이즈리스 남작이 한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쪽 대리석의 돌을 꺼내자 무엇인가 문서를 보관할 만한 곳이 나왔고, 그것에서 하나의 문서를 꺼내들고 다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오는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이것이 바로 칸보리치 동맹 공동통행증이라네.”
“혹시나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물어본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계신지요?”
어디선가 칸보리치 동맹 안에서는 공동통행증만 가지고 있으면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얻기가 쉽지 않기에 혹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었다.
칸보리치 동맹 공동통행증은 아무나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각 나라의 왕족은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이 그러한 통행증을 가지려면 그 어떤 귀족일지라도 뭔가 국왕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즈리스 남작이 디로안의 의문점을 설명해 주었다.
“내 아버지께서는 30년 전 에드코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셨었다네. 그리고 그 공로로 칸보리치 동맹 안에서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이 공동통행증을 받으셨지. 안타깝게도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단 한 곳도 여행하시지 못하셨지만…….”
루시 공주가 그의 말을 들으며 말했다.
“안타깝군요.”
이즈리스 남작은 루시 공주의 말에 얼굴을 밝게 하며 말했다.
“난 여행하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아서 썩혀두고 있었는데 또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혁마소가 옆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다가 물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가?”
“하하하, 물론 스승님과 어르신께서는 하늘을 날아가시면 되겠지요. 하지만 중간에 쉬기는 해야 할 것이며 중간에 다른 나라에서 검문을 당할 때 국경 통행증이나 이것이 없으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거야 모조리…….”
혁마소의 말을 갈천혁이 잘랐다.
“모조리 죽여 버린다는 말은 설마 안 하겠지? 그리된다면 이즈리스나 다른 아이들이 상당히 곤란해질 것도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야.”
갈천혁의 말에 딴 곳을 보며 헛기침하는 혁마소였다.
“어흠, 내가 설마 그리 말하겠는가?”
이즈리스 남작이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만약 스승님의 말씀처럼 된다면 전 칸보리치 동맹 전체에 지명수배가 될 것이며 사형으로서 그 죗값을 치러야겠지요.”
갈천혁이 잠시 생각하고는 혁마소에게 말했다.
“우리만이라면 하루 반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기는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힘이 들 수도 있다네. 그러니 천천히 여행하며 가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보네. 어떤가? 어차피 라이안은 한 달 뒤에 그곳에서 보는 것이니 그것이 좋을 듯하네.”
혁마소도 갈천혁의 말을 듣고는 자신도 괜찮은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리 하세나.”
그날 아침 그들은 서둘러 짐을 쌌다.
이즈리스 남작의 부인과 딸은 갑작스런 이즈리스 남작의 여행이 이해가 안 갔지만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확고한 말에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마차는 최대한 좋은 것으로 3대를 준비했고 상당히 호화스럽게 꾸몄다.
칸보리치 동맹 공동통행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최대한 간편한 절차를 위해서였다.
최상급의 마차인지라 마차는 상당히 컸다.
굵은 돌을 밟아도 그 충격이 덜했으며 안에서는 잠을 잘 수도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 이즈리스 남작의 부인과 딸이 나와 이즈리스 남작을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버지, 꼭 두 달 안에 오셔야 해요?”
이즈리스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시오. 부인. 로렌나도 걱정하지 말거라. 두 달 안에는 꼭 돌아오마.”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선두에 있는 마차에 타는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갈천혁이 그런 이즈리스 남작을 보며 말했다.
“굳이 가족을 떠나면서까지 여행을 같이 갈 필요는 없단다.”
“아닙니다. 제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 스승님께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그런 이즈리스 남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갈천혁이었다.
이즈리스 남작도 가족들이 눈에 밟히는지 창을 통해 멀어지는 자신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며 갈천혁은 생각했다.
‘가족과 멀어지는 것을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네가 그런 희생까지 치르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내 꼭 얻도록 해주마.’
그렇게 3대의 마차는 다음 나라인 보르다 왕국으로 이동했다.
한편 라이안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 빠르게 완치시키려고 상당한 힘을 들이고 있었다.
하루 일과가 타미르안과의 전투와 운기조식이었다.
어느 정도 몸이 좋아지기 시작하자 라이안은 수면까지 최소로 줄였다.
라이안의 몸이 유령같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났으며 그의 창이 수십 가닥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블링크! 블링크! 홀드!”
타미르안의 몸 또한 단거리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하며 마법을 펼쳤다.
“크윽! 청룡무희!”
유운유령신법을 펼치며 타미르안을 공격해 가던 라이안은 홀드 마법으로 인해 자신의 몸이 멈추려던 것을 겨우 피하며, 청룡무희로 수많은 잔상을 만들어 타미르안을 감쌌고 동시에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타미르안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이어 스톰!”
타미르안의 양손에서 불길이 피어올랐고 양손의 불길이 합쳐진 순간 그것들은 폭발하듯 타미르안을 감싼 라이안의 잔상들을 태워갔다.
“젠장! 초광속!”
라이안의 본체는 서둘러 빛에 감싸지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타미르안은 그런 라이안을 먼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아직도 열이 가시지 않았는지 미세한 연기가 흘러 나왔다.
“잘 안 되는군. 제길.”
타미르안이 다시 공격하려 하자 라이안이 살며시 손을 들었다.
잠시 멈추자는 뜻이었다.
그것을 알고는 타미르안이 빠르게 블링크해 오는 것을 멈추고 서서히 날아왔다.
“자네의 초광속이라는 것은 정말 빠르군. 하지만 지금 내가 계속 사용하는 것처럼 블링크를 사용한다면 아무런 피해 없이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네. 아무래도 자네는 잠시 마법에만 전념을 해야 할 것 같네.”
라이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미르안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안은 이상하게도 무공을 펼치는 중간에 마법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싸우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으로 피하는 것이었다.
물론 순간 회피 능력으로 블링크가 정말 탁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제길,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초광속으로 회피를 하니…….”
그런 라이안을 보며 타미르안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자네의 초광속과 블링크를 합친다면 자네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네. 우선 마법의 활용을 최대한 연습하는 것이 좋은 것 같네.”
“하지만 빨리 예전의 몸 상태를 되찾아서 파황혈천무를 익혀 강해지는 쪽이 더 빠를 것 같은데.”
타미르안도 라이안의 무공은 인정하고 있었다.
“자네의 무공이 이곳 세계의 검술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네. 그리고 자네가 익히고자 하는 파황혈천무라는 무공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조차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가장 적합한 것의 조화를 이루라는 말이라네.”
라이안도 자연의 진리를 깨닫고서 알게 된 것들 중 그러한 말이 생각났다.
‘강함은 부드러움을 이길 수 없으며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말을 깨닫는다면 강함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지면 그 무엇도 이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라이안은 이것과는 다르지만 마법과 무공을 합쳐서 조화를 이루어 사용해야 했다.
“휴우… 타미르안, 너의 말이 옳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런데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몸이 쉽게 안 따라오네.”
타미르안도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우선은 오늘은 그만하고 쉬는 것이 좋겠네.”
“그래.”
라이안은 챠둠이 만든 샤워 시설로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물을 맞으면서도 라이안은 머리가 복잡해져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샤워를 마친 후 레어의 가장 위로 올라간 라이안은 하늘을 보며 누웠다.
샤워를 마친 후라 그런지 무척이나 개운했고 시원했다.
“하아.”
라이안은 다시 머리를 비우고 조화를 머리에 떠올렸다.
“왜 가장 빠른 공격을 하려면 창룡일섬이 나오고 회피를 하려면 초광속이 시전될까.”
순간 자신이 바보가 아닌가 생각하는 라이안이었다.
물론 창룡일섬은 공간조차 가를 정도로 빠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타미르안은 애초에 자신의 움직임을 홀드마법으로 느리게 만든 후 블링크로 빠져 나간다.
자신이 타미르안을 빠르게 베려고 할 때에는 이미 그곳에서 사라진 후였다.
접근 자체가 힘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블링크로 접근해 공격하면 타미르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법력을 느끼고는 다른 곳에서 블링크로 생겨날 라이안에게 헬 파이어를 날렸고, 라이안은 나타나자마자 헬 파이어를 맞아야 했다.
“타미르안이 강하기는 하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자 라이안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야! 왜 계속 이런 나약한 소리만 하는 것이지?”
순간 포기부터 생각한 자신이 너무도 쓸모없게 느껴지는 라이안이었다.
* * *
그녀는 누구지?
라이안은 레어에서 내려와 산길을 걸었다.
주위에 몬스터들이 많았지만 몬스터들은 절대로 라이안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안 띄려고 피해 다니기 바빴다.
심지어 투윈헤드 오우거가 미노타우르스의 서식처를 공격하고 있을 때도 라이안이 지나가면 도망가기 바빴고 오히려 미노타우르스들은 라이안에게 고맙다고 몸을 부비며 재롱을 피웠다.
라이안은 가끔 미노타우르스가 강아지 같았고 귀여웠다.
처음 이쪽 세상에 왔을 때와 비교한다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이미 라이안과 타미르안의 대련으로 인해 한쪽 숲이 초토화 되어버렸고 주위 몬스터들은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드래곤과 비등하게 싸우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게다가 드래곤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싸우는 인간이었다. 이미 주위의 몬스터들에게는 라이안은 드래곤과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라이안은 가끔 이렇게 시간이 날 때면 오는 곳이 있었다.
냇물이 조용히 흐르며 큰 나무가 있는 이곳은 그 자리가 좋은지 가끔 오우거들이나 오크들이 오가지만 라이안을 보면 왔을 때보다 더 조용히 피해가고는 했다.
하지만 오히려 고블린이나 작은 몬스터들은 물을 마시거나 쉬었다 갔다.
이유는 큰 몬스터들이 자신들을 본다 하여도 라이안이 있을 때면 공격하지 않고 더 조용히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은 몬스터들도 라이안이 잠을 자다가 잠시 움직일 때면 움찔거리며 도망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라이안의 얼굴 앞에 와서 장난치는 간 큰 존재가 있었다.
라이안은 잠을 자면서도 주위의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기척은 무척이나 작았고 자신에게 위험 요소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냥 잠을 청했다.
패왕철기신공으로 인해 아무리 오우거가 공격을 한다 하여도 자신에게는 전혀 피해를 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부스럭.
부스럭.
‘뭐지?’
라이안은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 존재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몬스터인가?’
하지만 자신의 얼굴로 느껴지는 촉감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혀로 핥고 있나?’
궁금증을 참지 못한 라이안은 곧 눈을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라이안이 눈을 뜬 순간 라이안은 눈앞의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어? 눈 떴네요?”
“누구.”
“전, 류미엘인데요?”
“류미엘?”
그녀는 바로 엘프였다.
인간으로 따진다면 약 19세 정도 되는 엘프였다.
“근데 제 얼굴은 왜 만지고 있어요?”
라이안이 말을 하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귀라든가 코를 만지는 류미엘이었다.
“신기해서요.”
“제가 보기에는 당신하고 나하고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데요?”
라이안의 말을 듣자 류미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달라요. 우선 머리색도 그렇고 귀도 달라요.”
“당연하지요. 전 인간이고 당신은 엘프니까요.”
“웅… 그러네요. 그런데 당신… 우리말을 아주 잘하네요.”
라이안은 류미엘에게서 청순함을 느꼈다.
“엘프 마을이 이곳에서 가까운가요?”
“아니요?”
류미엘의 말을 들은 라이안이 약간의 허탈감을 느끼고는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류미엘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건가요?”
“길을 잃었어요. 한 며칠 된 것 같아요.”
순간 라이안은 이 아름다운 여성이 바보는 아닌가 생각했다.
“여기는 드래곤이 있는 곳이라 몬스터들도 많고 위험한 곳이에요. 도대체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거죠?”
라이안의 말에 류미엘이 조용히 자신의 허리 옆에서 하나의 단검을 꺼냈다.
“이걸로요.”
“혹시… 몬스터들을 그것으로 죽이고 왔다는 것인가요?”
“맞아요. 몬스터들이 침을 흘리며 저에게 입을 들이대면 전 그냥 이것을 휘두를 뿐이에요.”
“흠.”
라이안은 그녀가 절대 평범한 엘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저기… 혹시 제가 류미엘의 손목을 잡으면 그거 휘두를 것인가요?”
“웅… 글쎄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것을 저에게 다시 되물으면 안 되죠.”
라이안은 뭔가 대화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데 류미엘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안 휘두를게요.”
라이안은 뭔가 불안함을 느끼면서 살며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괜… 찮죠?”
“네. 헤헤”
그녀가 배시시 웃자 라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류미엘이 라이안을 보며 말했다.
“와! 당신, 얼굴이 붉어지니까 너무 귀여워요.”
라이안이 류미엘의 손목으로부터 많은 양의 마나를 느낌과 동시에 류미엘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었음을 깨달았다.
라이안은 뭔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함을 느꼈고 그녀를 밀어낼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류미엘이 라이안에게 떨어지며 말했다.
“당신 아무래도 평생 제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네?”
라이안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아잉, 어떻게… 너무 귀여워.”
그녀가 라이안의 얼굴을 보더니 또다시 덮쳐오는 것이 아닌가.
“자, 잠시만요!”
라이안은 급히 그녀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왜 그래요? 제가 싫어요?”
“그게 아니라요.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키스를 한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제가 좋으면 그냥 하는 거예요.”
라이안은 심하게 더위를 느끼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에 바람을 일으켰다.
“후유, 아무한테나 그러는 건가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전 아무한테나 안 그래요. 당신이 처음이에요. 전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 당신은 지금부터 저와 함께 있어야 해요.”
라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몬스터보다 더 무서운 엘프를 만났으니…….”
라이안의 중얼거림을 들은 류미엘이 이상한 듯 말했다.
“제가 무서워요?”
“어쩌면요… 우선 당신의 집이 어딘지 알아야겠네요. 데려다 줄게요.”
“전 길을 잃었어요. 집이 어딘지 몰라요.”
“제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잠시만요.”
류미엘의 선정적인 옷차림을 보니 왠지 다시 얼굴이 붉어지는 라이안이었다.
그런 라이안을 보며 류미엘이 배시시 웃자 라이안은 왠지 오싹함을 느끼며 뒤돌았다.
반지의 한곳을 눌러 챠둠을 불렀다.
“야, 챠둠.”
“말씀하십시오.”
“바쁘지 않으면 나 좀 도와줘야겠다.”
“지금 바쁜 거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컥! 야, 지금 비상사태거든?”
“지금 주인님의 위치를 탐색한 결과 주인님에게 위해를 가할 존재는 보이지 않습니다.”
“너 인공위성으로 다 보고 있었냐?”
“엘프와 인간은 충분히 짝짓기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좋은 시간 갖으십시오. 그럼 이만.”
“으윽!”
라이안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럼 당장 엘프들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아라. 일분 주마.”
하지만 말이 없는 챠둠이었다.
“아쭈! 이게… 너 계속 그러면 지금 당장 달려가서 몸체 만들어놓은 거 다 부순다!”
“크윽! 찾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진즉에 그럴 것이지.”
그런데 그때 라이안에게 좋은 협박거리가 생각났다.
“아하! 그렇군. 차라리 타미르안에게 부탁해서 순간이동으로 혁 할아버지를 모셔오는 것이 좋겠구나!”
“찾, 찾았습니다! 지금 주인님이 바라보시는 방향에서 두시 방향 직진으로 50km 정도 가시면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혁마소를 데려온다고 하자 마음이 급해진 챠둠이었다.
지금으로서는 혁마소를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혁마소를 지금 만나게 된다면 자신은 평생 작은 우주선으로 20년 동안 깡통취급을 받으며 지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한 시나리오였다.
“어험, 너 앞으로 조심해. 안 그러면 혁 할아버지 만났을 때 지금 너의 몸체가 아만다리움 금속이 아니라는 거 다 말해버린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후훗.”
라이안은 류미엘에게 다가가 말했다.
“류미엘의 집이 어딘지 알았어요. 따라와요.”
“당신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한 거예요?”
“친구하고요. 그런 게 있어요. 자요. 어서 가요.”
그들이 그렇게 걸어가고 있을 때 챠둠은 괜히 개갰다가 피만 봤다고 생각했다.
라이안이 앞서서 걷고 있자 류미엘은 계속 라이안의 팔을 잡아당겼다.
“왜요?”
“나 배고파요.”
“아, 그렇군요. 흠… 엘프는 과일이나 채소만 먹는다고 들었어요. 근처에 적당한 과일이 있는지 찾아볼게요. 우선 여기서 기다려요. 알았죠?”
말함과 동시에 자리를 뜨려고 했던 라이안이었으나 곧 류미엘에게서 어이없는 말이 들려왔다.
“나 고기 먹고 싶어요.”
휘청.
라이안이 어이가 없는 눈으로 류미엘을 바라보았다.
“엘프는 고기 같은 거 안 먹지 않아요?”
“내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자주 말리곤 했어요. 그래도 저는 고기가 좋은 걸 어떻게 해요.”
“류미엘은 식성이 특이하군요.”
라이안의 말에 류미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다른 엘프들이 저는 보통 엘프가 아니래요. 헤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죠. 남들과 다르면 항상 그렇기 마련이랍니다.”
라이안은 하는 수 없이 동물을 잡고자 했다.
하지만 이곳은 깊은 숲이라 동물보다는 몬스터들이 많았다.
몬스터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사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흠. 이곳은 동물을 잡기 힘들 텐데.”
“저 미노타우르스 같은 것도 좋아해요.”
“컥! 그건 몬스터잖아요!”
“후웅… 맛있던데요?”
“미노타우르스는 안 돼요. 이 근처 미노타우르스는 내가 귀여워하는 놈들이 많단 말이에요.”
그때 류미엘의 눈에 하늘을 나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와! 저, 그럼 저거 먹을래요. 저거 잡아줘요.”
“으음? 아… 와이번.”
라이안은 하늘을 보며 황당해 했다.
와이번이라면 지상몬스터 중 가장 강한 몬스터였다.
인간이 와이번을 잡으려면 익스퍼트 상급의 검사 20여 명은 있어야 가능했다.
물론 그것은 와이번이 한 마리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와이번이 3마리 이상이라면 잡는다는 것이 거의 어렵다고 봐야 했다.
멍한 라이안에게 류미엘이 한 마디 더 했다.
“지난번에 저거 잡으려고 하다가 실패했었어요. 거의 잡을 수 있었는데… 당신은 저거 잡을 수 있어요?”
“휴… 라이안이라고 불러요. 제 이름이에요.”
“라이안. 좋네요. 헤헤. 라이안은 저거 잡을 수 있어요?”
“와이번이 그렇게 먹고 싶어요?”
뭔가 즐거운 상상을 하는지 허공 한곳을 쳐다본 그녀가 라이안을 보며 말했다.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한 번 먹어보고 싶어요.”
“네… 네… 잡아 대령하겠습니다.”
‘인간을 먹어보자고 안 하는 것이 다행이로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에휴.’
잡아준다고 하니 류미엘이 너무 좋아하며 팔짝팔짝 뛰었다.
“와아! 라이안 최고에요! 빨리요. 빨리!”
류미엘이 소란스럽게 소리쳐서 그런지 와이번도 라이안과 류미엘을 본 듯했다.
라이안도 그것을 느끼고는 살며시 웃었다.
“저쪽에서 와준다면 더 좋지.”
라이안은 창을 들었다.
류미엘은 라이안을 보며 말했다.
“저거 무척 단단해요. 그것으로는 잡기 힘들 거예요.”
“훗, 걱정 말아요. 잡을 수 있어요. 대신 한쪽으로 피해 있어요. 피가 많이 튈 것 같으니까요.”
“네.”
류미엘은 왠지 라이안이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 잡아보려고 했을 때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와이번은 조금 낮게 날며 라이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류미엘이 나무 한쪽으로 숨으려 하자 그때서야 라이안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이 그 와이번에게 있어서 가장 운이 안 좋은 날임을 와이번은 모르고 있었다.
와이번이 발톱을 세우고 라이안을 찢을 듯 덮쳐들었다.
류미엘은 라이안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몸을 날려 라이안을 구하려고 했으나 곧 라이안의 손바닥이 그녀를 향해 펴졌다.
“가만있어요!”
라이안은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이다!’
“청룡승천!”
한 순간 땅으로부터 하나의 용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멀리서 잠시 밖으로 나온 타미르안도 하늘로 승천하는 금빛의 용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것은 라이안의 기술 중 하나인데… 저기서 뭐하는 것이지?”
라이안을 공격하던 와이번은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자신을 덮친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세상과 하직했다.
쿠궁!
와이번의 커다란 몸집이 땅에 떨어졌다.
라이안이 정확히 머리만 노려서 그런지 목부터 머리가 없었고 몸체만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라이안이 와이번의 배로 착지했다.
류미엘은 라이안의 청룡승천에 푹 빠졌는지 라이안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털썩.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한 거예요? 굉장히 큰 몬스터가 하늘로 날아갔어요! 라이안이 그렇게 한 것인가요?”
심하게 안겨오는 그녀를 떼기가 힘든 라이안이었다.
“저기, 잠시만요. 이거 먹고 싶지 않아요?”
라이안의 말이 통했는지 그때서야 떨어지는 류미엘이었다.
“먹고 싶어요. 라이안, 요리도 할 줄 알아요?”
“우선 구워봅시다.”
라이안은 여기저기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고서는 한곳에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고기를 올려놓을 수 있을 만한 나무를 구하고는 창으로 와이번의 다리 한쪽을 잘라 허공섭물로 허공에 들었다.
류미엘은 신기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허공섭물로 허공에 띄운 와이번의 다리를 씻기 위해 라이안은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
차라랑.
류미엘이 그것을 보고는 놀라워했다.
“라이안, 정령술도 할 줄 알아요?”
“우선은 사대 정령과는 모두 친하다고 봐야겠지요.”
물방울과 함께 나타난 운디네는 곧바로 라이안의 앞으로 다가갔다.
“운디네, 저기 떠 있는 것의 피를 다 빼주고 주위에 묻은 먼지 좀 깨끗이 닦아줘. 부탁해.”
라이안의 말이 끝나자 운디네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와이번의 다리를 물로 감쌌다.
그리고 얼마 안 있자 한쪽은 와이번의 피와 먼지로 가득했고 한쪽은 와이번의 다리만 남아 있었다.
다 걸러졌는지 피와 먼지들은 다른 곳에 버려졌고 깨끗해진 와이번의 다리만 남았다.
“운디네, 고마워. 이제 돌아가도 좋아.”
또다시 운디네가 고개를 숙이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류미엘은 라이안이 정말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정령은 자연과 친숙함이 없으면 부릴 수 없었다.
‘사대 정령과 친숙해서 나도 모르게 다가가게 된 것인가?’
그리고는 라이안을 보며 웃었다.
‘내 짝으로 적합해. 후훗’
자기 마음대로 속으로 라이안을 자신의 짝으로 정하는 류미엘이었다.
라이안은 와이번을 먹는다는 것이 조금 찝찝했다.
몬스터를 먹는다는 것이 왠지 아주 더러운 것을 먹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엘프는 와이번의 고기를 무척이나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이안은 와이번의 다리를 조금 잘라서 너무도 맛있게 먹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예쁘기는 하네.’
그러한 생각에 몽롱해질 찰나 라이안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나에게는 이미 루시가 있잖아. 정신 차리자.’
생각과 동시에 왠지 불순한 생각을 한 것과도 같이 루시 공주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라이안이었다.
‘어서 빨리 건강을 되찾아서 그녀를 만나야지.’
라이안이 루시 공주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을 때 류미엘이 라이안을 보며 물었다.
“안 먹을 건가요? 쫄깃쫄깃한 것이 아주 맛있어요. 먹어봐요.”
“글쎄요. 와이번을 잡았을 때 와이번의 가죽을 갑옷으로 쓴다는 것은 들어봤어도 고기를 먹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봐서.”
실제로 와이번의 가죽은 좋은 갑옷으로 쓰이기도 하면서 좋은 방패로도 쓰인다.
와이번의 가죽은 방어구에 덧씌우는 것으로서 상당한 고가에 판매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류미엘은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닌가.
‘한번 먹어볼까?’
고민을 하던 라이안은 잘 익은 와이번의 살집을 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류미엘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좋아.’
“압”
와이번의 고기를 입에 넣고는 씹어보기 시작한 라이안.
“욱! 퉤퉤! 아으.”
역시 예상한 대로 먹을 수 있는 맛이 아니었다.
“으…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먹는 것이죠? 마치 썩은 고기를 먹는 것 같잖아요.”
“헤헤, 그건 라이안이 고기의 참맛을 느끼지 못해서 그런 것이에요.”
“그런 맛을 고기의 참맛이라니…….”
라이안은 왜 사람들이 와이번을 잡았을 때 고기를 먹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하긴… 와이번 고기가 맛있었다면 시중에서도 비싸게 팔렸겠지.”
하지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즉,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단 얘기였다.
라이안은 다시 운디네를 불러 맑은 물을 달라고 해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나 류미엘은 와이번의 고기를 너무도 잘 먹고 있었다.
한참을 먹은 류미엘이 일어나며 자신의 배를 통통 쳤다.
“아… 배부르다.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라이안.”
“뭐, 잘 먹었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이제 그만 가죠. 언제 해가 질지도 모르는데.”
해가 산허리에 걸려 곧 어두워질 듯했다.
“그래요.”
류미엘과 같이 산을 걷고 있을 때 이미 태양은 반대편으로 숨었는지 어두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한 라이안은 류미엘에게 다른 제안을 했다.
“류미엘, 이렇게 가다가는 얼마나 가야할지 모르겠네요. 빠르게 가려고 하는데 제가 류미엘을 안아들어도 될까요?”
류미엘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다행이네요. 그럼 안을게요.”
라이안이 류미엘을 안자 류미엘은 라이안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라이안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속도로 걷는다면 정말로 내일 아침 해를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이안은 초광속을 시전했다.
라이안의 몸이 금빛 섬광에 둘러싸여지며 곧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일정 높이까지 올라가자 하나의 빛줄기가 되어 쏘아져 나갔다.
사실 류미엘은 엘프여서 숲을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장난삼아 라이안에게 안겨본 것이었다.
자신만큼 빠르겠지. 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을 넘어 류미엘은 지금 지나가는 나무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빠르다니.’
자신의 실력을 훨씬 웃도는 속도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는 류미엘이었다.
라이안은 한참을 가자 아래로부터 수많은 마나가 감지됨을 느꼈다.
그리고 눈에 마나를 집중해 그곳이 엘프들이 사는 곳인지 확인했다.
“저곳이 맞군. 류미엘 다 왔어요.”
류미엘에게 도착했음을 알리고는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는 라이안이었다.
엘프 마을은 순간 비상이 걸렸다.
밝은 금빛을 두른 채 하늘에서 누군가가 내려오자 경계하기 바빴다.
라이안도 여기저기에서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라이안이 착지하자 어떤 엘프는 마법을 날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저는 적이 아닙니다!”
“누구냐! 인간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하얀 옷을 입은 남성 엘프가 라이안에게 소리쳤고 라이안은 조용히 류미엘을 내려주었다.
“류미엘? 정신 차려 봐요. 다 왔어요.”
그때서야 남성 엘프가 류미엘을 보더니 급히 다가왔다.
“류미엘 님!”
“류미엘 님이시다! 모두 무기를 거두어라!”
주위의 반응을 본 라이안은 류미엘을 보며 생각했다.
‘류미엘이 이곳에서 상당한 지위가 있는가 보군.’
“어지러워요, 라이안.”
“집에 다 왔어요.”
남성 엘프가 류미엘을 안아들며 말했다.
“류미엘 님,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라이안이 절 이곳까지 데려다 줬어요.”
그러자 남성 엘프가 라이안을 보며 인사했다.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는 류미엘 님이 사라지셔서 한참을 찾아 헤맸습니다. 저는 이곳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지가이라고 합니다.”
“아, 네. 전 라이안이라고 합니다.”
그때 라이안의 눈에 멀리서 급히 걸어오고 있는 몇몇의 노인들이 보였다.
류미엘이 돌아왔음을 알고 오는 것 같았다.
라이안은 왠지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것이 없다고 느꼈다.
“지가이 님,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렇게 가시면 어찌 합니까? 우선 저희 장로님을 만나 뵙고 가심이…….”
라이안은 이미 초광속을 시전할 준비를 마쳤고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급히 가봐야 할 일이 있어서…….”
그리고는 하늘로 계속해서 떠오르다가 하나의 빛이 되어 사라져갔다.
류미엘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라이안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라이안! 이봐요. 라이안! 어디 가는 거예요! 돌아와요, 라이안!”
지가이는 그런 류미엘을 잡으며 말했다.
“류미엘 님, 그는 이미 갔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지가이가 라이안을 보낸 건가요? 지가이 나빠요! 흐흐흑.”
류미엘을 혼내려고 했던 장로들은 오자마자 류미엘이 눈물을 흘리며 뛰어가는 것을 보고는 지가이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지가이.”
“그것이… 저도 잘…….”
그제야 지가이는 라이안이 류미엘을 데려다 주었으며 하늘로 날아갔다는 설명을 했다.
장로들은 우선 다음날 류미엘을 불러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들이 류미엘을 높여 부르고 아끼는 이유는 류미엘이 바로 이곳 엘프마을의 하이엘프였기 때문이었다.
엘프들의 지도자가 될 800년 만에 태어난 하이엘프가 바로 류미엘이었다.
하이엘프는 보통의 엘프와는 다르게 보다 강한 힘을 가지며 보다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엘프마을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으며 처음 나가서 만난 사람이 바로 라이안이었다.
그리고 라이안이 바로 그녀의 첫사랑이 되었다.
라이안은 타미르안의 레어로 돌아와서도 잠을 청하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은 나름대로 재미있었군. 류미엘도 만나고.”
라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만졌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흔들며 루시 공주를 생각하는 라이안이었다.
“안 돼, 그러면 루시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까.”
그때 라이안의 눈에 몽고르가 눈에 띄었다.
몽고르는 작은 원숭이과의 몬스터였다.
거의 최하 레벨의 몬스터였지만 잡식 몬스터라 그 수가 많이 모이면 사람도 잡아먹었다. 그래서 몬스터로 취급되었다.
“몽고르가 왜 이곳까지 있지? 거의 외곽에 있어야 정상인데…….”
라이안은 모르고 있었다.
이곳 타미르안의 레어 근처가 요즘 얼마나 안전한 곳이 되었는지.
바로 라이안과 타미르안의 대련 때문이었지만 라이안이 알 길이 없었다.
라이안은 몽고르가 귀엽다고 생각하며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 이동하다가 그만 나무줄기 끝부분이 부러지며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더 웃긴 것은 몽고르가 땅에 떨어져 고통스러운지 몸을 꿈틀꿈틀 거린다는 것이었다.
“큭큭큭, 무지 아프겠는 걸? 그래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니깐. 하하하.”
그때!
라이안은 순간 웃던 것을 멈추었다.
뭔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라이안은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몽고르가 있던 자리에 섰다.
몽고르는 순간 뭔가가 갑자기 나타나자 놀라서 멀리 도망을 갔지만 라이안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몽고르가 밟아 부러진 나무를 주워들었다.
“몽고르가 분명 이 가운데를 밟았다면 부러지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무의 끝부분을 밟아서 나무가 부러진 거야. 그것도 줄기 첫 부분이.”
당연한 얘기라는 것은 라이안도 알고 있었다.
한곳에만 붙어서 지탱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부터 차차 먼 곳에 하중을 가한다면 그 거리가 멀어질수록 지탱하고 있는 부분은 더욱 많은 무게를 느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모멘트의 원리였다.
라이안이 깨달은 부분과는 조금 다른 원리였지만 라이안은 무게에 대한 균형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힘의 균형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었으니…….
“그래, 내가 전투에 있어서 급함을 느낄 때 무공을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마법이 무공에 비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야. 무공을 쓰는 것이 더 강하고 자신 있으니 가장 급할 때 찾는 것도 바로 그것인 거지. 그렇다면 마법을 더욱 강화시킨다면.”
라이안은 하늘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몽고르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후훗”
계속해서 막혀왔던 한 부분이 뚫린 듯하자 속이 후련해지는 라이안이었다.
“팔십 먹은 노인도 세 살 먹은 아이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했던가… 몽고르에게서 깨달음을 얻을 줄이야.”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라 생각하는 라이안이었다.
다음날부터 라이안은 타미르안과 싸우면서 일체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창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타미르안은 라이안의 그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오늘은 대련을 안 할 생각인가?”
“아니, 이대로 하려고. 창은 필요 없어. 그런데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
“무엇을 말인가?”
“지금부터 마법으로 싸울 것이니 조금 봐줘가면서 해 달라고. 후훗”
타미르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하겠다면 그리 하겠네.”
“좋아, 시작하자!”
타미르안은 라이안의 얼굴이 상당히 밝아졌다고 느꼈고 바로 공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