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돈의 라이안-31화 (30/57)

제31장 할아버지들의 놀이

한편 혁마소와 갈천혁은 기쁜 마음으로 라이안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극상의 경공을 펼치며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정운이의 기운이 사라졌다. 서두르자!”

혁마소의 말과 함께 속도를 높이려던 갈천혁은 순간 어느 한쪽의 숲이 시끄럽다는 것을 알고는 눈에 마나를 집중했다.

오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에서 몬스터들이 서로 싸우고 잡아먹는 것은 많이 보아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저기 사람들이 괴물들과 싸우고 있다. 혹 정운과 관련된 자들일지도 모르니 가보는 것이 어떤가?”

“으음?”

갈천혁의 말을 들은 혁마소는 그제야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그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크오오오!

쿵쿵쿵쿵! 꽈광!

오우거와 혈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라이안의 친구들이었다.

라이안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나던 그들은 도망치는 도중에 몇 마리의 오우거들과 마주쳤다. 이 오우거들은 보통 오우거보다 훨씬 강했기에 상당히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항마칠검을 신성력의 기운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라드이라가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크나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라드이라의 실력을 마나를 다루는 검사로 따진다면 익스퍼트 초급의 경지를 조금 넘어선다고 볼 수 있었다.

신성력은 항상 다뤄보았던 것이라 원리를 알자 그것을 다루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거기에 항마칠검의 초식이 더해지자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밖에 없는 라드이라였다.

라드이라는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자신이 검을 들고 싸우고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희열을 느끼며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뒤에서 마법실행 주문이 완성되었는지 에나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모두 비켜요! 파이어 필드!”

에나의 목소리와 함께 전투에 임하고 있던 세 사람이 급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그 뒤로 이미 성이 날대로 난 오우거들이 미친 듯이 그 세 사람을 쫓아오려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에나의 파이어 필드 마법이 오우거들을 덮쳤다. 그러자 오우거들이 있던 땅이 한순간에 화염의 대지로 바뀌었다.

크오오오오!

캬오오오오!

화염의 대지 한가운데 있던 두 마리는 순식간에 발부터 녹아들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주위에 있던 오우거들은 발에 화상을 입는 것을 감수하고 옆으로 빠르게 피할 수 있었다.

발이 녹아든 두 마리의 오우거는 발이 녹자마자 넘어져버렸고, 이내 몸까지 전부 녹아들고 있었다.

두 마리의 오우거는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그렇게 사라져갔다.

헤인드와 디로안, 그리고 라드이라는 얼굴로 엄습해오는 뜨거운 열기를 팔로 가리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하군.”

“이게 도대체 몇 서클 마법이야?”

“이건… 최소 5서클 마법입니다.”

헤인드와 디로안이 놀라며 라드이라를 쳐다보았다.

“으에?”

“뭐? 정말이야?”

그러면서 다시 경이로운 표정으로 에나를 바라보는 그들이었다.

‘에나가 이렇게 강해지다니!’

‘5서클이면 최소 50의 나이는 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경지이거늘…….’

둘은 동시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했는가?’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각자 약간의 피해를 입은 다른 오우거들이 겁을 먹고 돌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일은 종종 그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오우거들은 화염의 대지가 다시 본래의 땅으로 돌아오자 더욱 화가 난 표정으로 크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제길! 질긴 것들!”

에나는 이미 너무 많은 마나를 소비했는지 가쁜 숨을 내쉬며 힘들어했다. 이제는 검을 든 세 사람이 남은 오우거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앞으로 남은 오우거들은 네 마리.

세 사람이 상대하기에는 조금 버거운 상대였다. 더구나 몬스터의 초원에 사는 오우거들이었기에 더욱 힘든 상대들이었다. 일반 오우거 여덟 마리와 싸우는 것과 비등했다.

크오오오오!

캬우우우우!

오우거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그들도 동시에 오우거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몇 개의 빛줄기가 오우거들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콰과과광!

크오오오오!

빛줄기로 인해 오우거들이 있던 곳은 무엇인가가 폭발하듯 터져나갔고 주위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오우거들의 괴성은 처음에만 크게 들렸을 뿐 그 소리가 약해지며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누가 들어도 서서히 죽어가다가 숨이 끊어지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누, 누가……!”

전부 멍한 표정으로 흙먼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디로안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디로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옷을 입은 노인과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을 볼 수 있었다. 라이안과 같이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갈천혁과 혁마소였다.

터덕.

“어디 괴물 따위가 사람을 공격하는가?”

“그렇지. 짐승도 뭣도 아닌 것들이 말이야.”

땅에 내려서며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디로안은 생각했다.

‘평범한 자들이 아니다. 아까 날아온 빛줄기는 분명 오러탄! 저들이 우리를 해하고자 한다면 피할 수 없다.’

디로안은 그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자신들을 도왔는지가 가장 의심스러웠다. 저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혹시나 라이안과 싸우고 있는 자들과 같은 편이라면 자신들은 이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먼지가 걷히며 오우거들의 시체가 보였다.

갈천혁이 그것을 한 번 보더니 라이안의 친구들을 보며 물었다.

“혹시 근처에 또 다른 사람이 있느냐?”

부드러운 갈천혁의 음성에 약간 멍해 있던 그들은 정신을 차리며 갈천혁을 바라보았다.

“네? 아…….”

헤인드는 가만히 갈천혁을 바라볼 뿐이었지만 디로안은 갈천혁을 자세히 살폈다.

“검은 눈동자…누런 피부…….”

디로안은 그들이 묻는 것이 라이안과 비슷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혁마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놈들아! 이곳에서 다른 사람을 보지 않았냐고 묻지 않느냐!”

헤인드 등 다른 친구들은 순간 두 손으로 두 귀를 막았다.

약간의 마나를 실은 음성이라 그 소리가 고막이 터질 듯 컸기 때문이다.

갈천혁이 혁마소에게 말했다.

“어허, 이보게. 그렇게 물으면 아이들이 놀라지 않는가? 어차피 정운의 기는 이미 사라졌으니 이들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들이 모른다고 하면 이 근처 숲을 전부 뒤지는 수밖에…….”

“어험, 내가 언제 소리를 질렀다고…….”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살며시 돌아서는 혁마소였다.

에나와 라드이라 역시 갈천혁과 혁마소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님은 느끼고 있었다. 그중 에나가 순간 궁금함을 못 참고 살며시 마법을 펼쳤다.

“마나 디텍트.”

상대가 가지고 있는 마나량을 측정하는 마법이었다.

“으음?”

“뭐냐?”

갈천혁과 혁마소는 순간 무엇인가가 자신들의 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곧 본능적으로 호신강기를 몸에 둘렀다.

갈천혁은 자신들의 몸에 다가왔던 이상한 기운이 에나에게서 흘러나왔다는 것을 알고는 말했다.

“마법이라는 것인가 보군.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린 너희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단지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한 가지만 가르쳐 주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에나는 갈천혁의 말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이, 이럴, 이럴 수가… 엄청난 마나… 드래곤 이상의…….”

갈천혁과 혁마소가 호신강기를 일으킬 때 퍼져 나오는 마나로 그들의 마나량을 측정할 수 있었던 에나가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까지 더듬었다.

이에 디로안은 위협을 느껴 에나를 몸으로 가리며 갈천혁의 물음에 답했다.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그런 대단한 이들에게 마법을 시전한 에나가 위험할 것 같아 취한 행동이었다.

“이곳에 혹 정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약 19세 정도의 소년을 보지 못했느냐?”

“저문이라…….”

발음을 하기 힘들어 약간 어눌한 말로 이름을 말하는 디로안이었다.

디로안은 갑자기 생각나는 무엇인가가 있는지 갈천혁에게 되물었다.

“혹, 다른 세상에서 이곳으로 넘어 오시지는 않았는지요?”

디로안의 갑작스러운 말에 갈천혁보다 혁마소가 더 놀라며 디로안에게 빠르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물었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크윽, 아픕니다. 이것 좀…….”

“어서 말하거라! 그것을 어찌 알았냐니까!”

아마도 빨리 말해야 손을 놓아줄 것 같아 빠르게 말하는 디로안이었다.

“우리 친구 중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의 말로는 자신이 다른 세상에서 차원이동 되어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니 이것 좀 놔주시죠! 크윽.”

그제야 혁마소는 손을 놓고는 갈천혁을 바라보았다. 이에 갈천혁도 그가 말하는 것이 정운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혁마소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혁마소의 손에서 풀려난 디로안은 쓰러지듯 무릎을 꿇으며 어깨를 만지며 고통스러워했다.

그것을 본 갈천혁이 디로안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대고는 마나를 흘려보내 주었다.

그러자 디로안은 아팠던 어깨가 순식간에 다 낫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곧 전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알고는 갈천혁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라이안이 잘 쓰는 방법인데…….”

“그 라이안이라는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느냐?”

“그와 어떤 관계이신지요?”

“우린 그 아이의 할아비 되는 사람들이란다. 이 근처에 있다가 그 아이의 기가 느껴져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란다.”

그제야 이들의 정체를 알게 된 그들은 어둠 속에서 태양을 찾은 듯 희열을 느끼며 기뻐했다.

“정말이십니까?”

“라이안의 할아버지들이시라고요?”

“어서 빨리 라이안 오빠를 구해주세요! 라이안 오빠가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에나가 울부짖듯 소리치자 갈천혁과 혁마소는 라이안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는 급격하게 표정이 굳었다.

“그것이 사실이냐?”

“어디냐! 정운이가 어디에 있냔 말이다!”

그런 갈천혁과 혁마소의 반응에 디로안이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직진하시다 보면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과 싸우고 있는 라이안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부디 서둘러주십시오!”

“알겠다. 어서 가보세!”

갈천혁의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출발하려던 혁마소가 곧 다시 몸을 멈추고는 앞을 노려보았다.

“어두운 기운이로군. 마공이라도 익힌 듯한 자들이 앞에서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정운이 혹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정운은 우리와 비등한 힘을 가졌지 않느냐!”

라이안이 심한 내상으로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혁마소였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곧 숲을 헤치며 빠르게 나타나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블랙섀도우 기사들이었다.

“크흐흐, 드디어 찾았군.”

“네놈들은 우리와 같이 가주어야겠다.”

그들을 바라보던 혁마소가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쯧, 행동거지로 보아 실력은 미흡한데 어느 누가 장난을 쳐서 마기만 높여 놓았군. 하긴, 이곳의 미련한 놈들은 그러한 차이도 크겠지만 말이야.”

“그렇군. 하지만 저런 상태라면 몸이 못 버틸 것인데…….”

갈천혁이 긍정의 말을 할 때 블랙섀도우 기사들이 갈천혁과 혁마소를 확인하며 물었다.

“뭐하는 노인네들이냐? 죽고 싶지 않다면 꺼져라!”

하지만 혁마소는 그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정운. 아니, 라이안이라는 아이는 어디 있느냐?”

“흠… 스피어마스터와 관련이 있는 노인네였군. 그렇다면 너희도 같이 가주어야겠다. 그래야 그를 죽일 수 있으니…….”

혁마소와 갈천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듣고서 라이안이 어떠한 수단을 이용하여 그들에게서 도망을 쳤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허허… 드디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혁마소는 이러한 현실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곧 혁마소의 분노는 블랙섀도우 기사들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놈들이 내 손자 녀석을 귀찮게 했다고? 우리 손에서 자란 아이라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우나, 그 아이에게도 그러한 사정이 있겠지…….”

혁마소의 말에 디로안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곳에 올 당시 몸을 크게 다쳤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다 나아간다고 말은 했지만 아직도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갈천혁이 디로안의 말을 들으며 라이안의 걱정을 했다.

“허허… 그런 일이… 혹시 심한 내상이라도 입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아이가 이런 하찮은 녀석들 때문에 힘겨워 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군.”

블랙섀도우 기사들은 혁마소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미친 노인네들이 팔다리가 잘려나가 봐야 정신을 차리겠군.”

그렇게 뇌까리며 한 기사가 검을 뽑자 다른 기사들도 따라서 검을 뽑았다.

언제 달려들지 모를 그들이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그들의 뒤에서 그들을 저지하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캐드 단장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들을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미 마기에 정신을 제압당한 그들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캐드 단장의 명령은 절대복종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캐드 단장은 의문을 느끼며 질문한 기사에게 대답을 해주지 않고 그들의 앞에 서며 갈천혁과 혁마소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왜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오?”

“허허허, 웃기는군. 뭐라? 당신? 새파랗게 젊은 것이 말하는 싸가지는 지옥에 보냈나 보군. 좋다. 어차피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들이니 설명이나 해주지. 우리는 너희가 잡고자 하는 그 라이안의 할아비 되는 사람들이다. 이제 뭔가 이해가 되느냐?”

“흠…….”

캐드 단장은 알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에드코르 제국군에 삼분지 일의 타격을 주었던 그랜드마스터급의 실력자들이라는 것을…….

하지만 캐드 단장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도 그랜드마스터를 넘어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뒤에 있는 부하들 또한 이제는 마기를 다루는 것이 원활해졌기에 소드마스터 상급의 검사와 맞붙어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두 명 다 그랜드마스터라 하더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란 말인가… 이 불안함은…….’

캐드 단장은 전력상 전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갈천혁과 혁마소에게서 극도의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본능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절대 이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그러나 그가 어찌 알겠는가? 그들은 이미 그랜드마스터를 넘어 그 위의 단계보다 한 단계 높은 반선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을.

“우린 당신들의 손자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소. 그대들은 보내줄 것이니 뒤에 있는 저자들을 넘기시오.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으니 말이오.”

캐드 단장의 말에 살며시 뒤를 돌아보는 혁마소였다.

“너희가 진정 우리 정운… 아니, 라이안의 친구들이냐?”

“그,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디로안과 헤인드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에 혁마소의 무섭게 굳어 있던 표정이 그들에게만은 인자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거라. 우리 손자의 친구라면 우리의 손자나 마찬가지니.”

혁마소의 말에 갈천혁과 헤인드 일행의 얼굴이 밝아졌고 캐드 단장의 얼굴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고개를 다시 캐드 단장에게로 돌린 혁마소가 웃는 얼굴을 다시 굳히며 말했다.

“들었으니 알 것이다. 이제 이 아이들은 우리의 손자나 다름없으니 싸움은 불가피할 것 같구나. 어디, 너희의 재롱을 좀 보자꾸나. 허허허!”

“어리석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죽이는 수밖에.”

캐드 단장은 서서히 검을 뽑아들었고 최대한 마기를 분출시켰다.

“크윽!”

“아악!”

“컥!”

마기에 노출된 헤인드와 디로안, 그리고 에나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실력은 아직 그런 엄청난 마기를 버티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갈천혁이 그것을 알고는 서둘러 막아주기 위해 기운을 일으키려 했으나 곧 그럴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라드이라가 신성력을 일으켜 그들 전체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마기에 가장 큰 효능을 보이는 것이 바로 신성력이었다.

“호오? 특이한 능력을 사용하는 아이로군.”

상당히 큰 신성력이 주위로 퍼지자 캐드 단장을 포함한 블랙섀도우 기사단은 움직임에 불편함을 느꼈다.

캐드 단장은 서둘러 라드이라부터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중급 신관 이상인가? 크흠… 나는 상관없지만 다른 녀석들은 상당한 힘의 절제를 느낄 것이다. 저자부터 없애야 이들을 상대하기 더 쉬워진다.’

생각과 함께 캐드 단장의 신형이 잔상만을 남기며 사라졌다.

라드이라는 자신의 동료들을 보호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엄청난 이질적인 마기를 느꼈고 검은 하늘이 자신을 덮치는 듯했다.

“헉!”

파방!

“크헉!”

라드이라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자신에게는 전혀 고통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라드이라가 눈을 살며시 떴을 때 그는 볼 수 있었다. 한쪽 나무에 처박혀 겨우 얼굴의 피를 닦고 있는 캐드 단장을…….

그리고 자신의 앞에 혁마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라드이라였다.

“어린 녀석이 버르장머리 없이 어디 어른이 움직이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가?”

캐드 단장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고쳐 잡았다.

‘빌어먹을… 분명 한 대 맞더라도 저자를 충분히 벨 수 있다고 마음을 먹었거늘… 이 정도로 빠르다니…….’

캐드 단장은 혁마소를 지나쳐 라드이라에게 검을 내려칠 때 이미 혁마소가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라드이라를 거의 베기 직전 자신의 얼굴로 혁마소의 손바닥이 날아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 거리와 속도에 있어서 자신이 먼저 라드이라를 베고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확신과 달랐다.

자신이 먼저 혁마소의 손바닥에 얼굴을 얻어맞고 날아간 것이다.

캐드 단장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이자는 내가 맡겠다. 너희는 불편하더라도 저자를 맡아라.”

“충!”

“충!”

어쩔 수 없이 전투를 시작해야 했다.

신성력에 오래 노출되면 될수록 마기를 사용하는데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캐드 단장과 혁마소가 맞붙게 되었고 나머지 블랙섀도우 기사들과 갈천혁이 맞붙게 되었다.

결과야 안 봐도 뻔했지만, 캐드 단장과 블랙섀도우 기사들은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암담한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혁마소는 기가 찼다.

“너 혼자 나를 상대한다? 허! 크하하하! 웃기는구나. 정말 웃겨!”

“무엇이 그리 웃긴단 말이냐?”

캐드 단장이 서서히 다가와 혁마소의 앞에 대치하고 섰다.

“너는 네가 나를 상대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느냐?”

“후훗, 네가 그랜드마스터라는 것은 애초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실력은 그것을 뛰어넘으려 한다. 충분하지 않은가?”

혁마소는 그런 캐드 단장의 말에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허허… 기껏해야 겨우 화경의 수준으로 나를 상대하고자 한다니… 쯧쯧쯧. 이미 천 년 전에도 너보다는 강했거늘…….”

“무슨 헛소리냐!”

인간이 천 년을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캐드 단장은 자신에게 있는 마기를 전부 개방시켰다. 혁마소가 쉽지 않은 상대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죽고 싶지 않다면 이것부터 막아야 할 것이다!”

챠아아악!

이세상의 모든 것을 어둠으로 잠식하려 하는 듯 캐드 단장의 검에서 엄청난 양의 마기가 쏘아져 혁마소에게 날아갔다.

만약 일반인이 그것을 맞았다면 검은 재로 흩어져 영혼조차 건지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혁마소에게는 우스울 뿐이었다.

“보아하니 화경의 수준도 많은 양의 마기로 오른 듯싶구나.”

스르르르.

혁마소는 여러 개의 잔상을 남기며 너무도 쉽게 그것을 피해내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천천히 캐드 단장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에 실린 위압감은 캐드 단장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언뜻 느끼기에는 느린 듯했지만 순식간에 캐드 단장에게 다가온 혁마소였다.

“하앗! 하앗!”

캐드 단장은 혁마소가 다가올 때마다 뒤로 물러나며 실로 위력적인 마기를 뿜어냈다. 혁마소가 다가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밀리고 있어 본능적으로 마기를 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천마의 천마군림보였다.

그나마 뒤로 빠지며 피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캐드 단장의 실력이 좋다는 증거였다.

만약 다른 블랙섀도우 기사들이었다면 엄청난 중압감에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수강에 목이 잘렸으리라.

‘제길, 이래서는 안 된다. 내가 왜 저자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분명 실력은 비슷할 것인데.’

순간 굴욕감을 느낀 캐드 단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혁마소에게 덤벼들었다.

물론 혁마소는 그렇게 덤비는 캐드 단장이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허허허, 제법이구나. 천마군림보를 이겨내고 덤비기까지 하다니. 오냐, 너의 재롱을 끝까지 구경해주마.”

캐드 단장이 검을 수평으로 혁마소의 목을 베어갔다.

하지만 아주 간발의 차이로 지나갔다.

검 위로 생긴 마기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것이었다.

보통의 검사였다면 검의 기파로 인해 목이 잘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혁마소의 몸 주위로는 호신강기가 흐르고 있어 그것이 닿을 리 없었다.

혁마소는 검이 올 때마다 물 흐르듯 최소한으로 움직였다. 캐드 단장은 서서히 조급해졌다.

“쥐새끼 같은 것은 손자 녀석이나 할아비나 똑같구나!”

평소라면 그 정도의 도발에 흥분할 혁마소는 아니었지만 정운의 이야기가 나오자 안 그래도 그의 일로 예민해져 있던 그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건방진!”

캐드 단장의 검과 성난 혁마소의 수강이 부딪쳤다.

콰광!

쑤아아아앙!

콰과과과광!

그 폭발로 인해 하나의 신형이 숲으로 날아갔으며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쓰러졌다.

무엇인가 폭발이라도 한 듯 먼지가 숲 전체를 감싸버렸다.

그리고 그 먼지가 걷힐 때쯤 혁마소의 손에 붉은 수강이 날카롭게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폭발에 휘말려 날아간 것은 캐드 단장이었다.

“어린 녀석이 잠시 데리고 놀아주려고 했더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건방진 녀석 같으니.”

그 사이 갈천혁은 너무나 여유롭게 블랙섀도우 기사들을 상대해주고 있었다.

뒷짐까지 지고 피하고 있던 갈천혁은 자신들의 단장이 무너지는 모습에 너무 놀라 움직임을 멈춘 섀도우 기사들을 하나씩 공격했다.

“어딜 보느냐!”

퍽!

“크헉!”

퍼벅!

“컥!”

아주 잠시 한눈을 팔았을 뿐인데 순식간에 3명의 기사가 쓰러졌다.

섀도우 기사들 중 한 기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야.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그들은 엄청난 힘 차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갈천혁과 혁마소는 이들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갈천혁이 남아 있는 블랙섀도우 기사들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느꼈을 터인데… 그냥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너희 정도의 아이들이라면 천 명 정도가 덤벼도 나를 상대할 수 없다. 저기 숲에 쓰러져 있는 아이라면 한 오십 명 정도면 상대가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가히 하늘과 땅의 차이라는 말이었다.

“제길…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넘겼거늘…….”

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검으로 겨우 몸을 지탱해 일어난 캐드 단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다른 손으로 잡으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럴 수가… 이 정도의 인간이 존재하다니…….”

궁지에 몰린 캐드 단장은 최후의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력의 폭주라면…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캐드 단장이 망설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마력을 폭주시킨 이후에는 이미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모든 자아를 상실하고 오로지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에 망설이는 것이었다.

그 상대가 설사 자신의 부하더라도…….

헤인드와 디로안 등 지금의 모든 것을 지켜보는 이들로서는 이것이 절대 인간 대 인간의 전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부 사람이 아니야…….”

“저들도 그렇지만 라이안의 할아버지들은 도대체가… 저 정도면 드래곤도 이길 수 있을지도…….”

내려오는 전설 중에는 그랜드마스터에 오른 한 용사가 악한 드래곤을 죽이고 나라를 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러한 전설을 만든 용사 또한 드래곤이며, 애초에 드래곤들의 장난으로 쓰인 전설이라는 것을…….

드래곤들은 유희에서 검을 배우게 되며 대부분이 그랜드마스터급의 검술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마법은 성룡이 되었을 때 10서클에 이르게 되니 드래곤은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헤인드와 그들 일행은 마치 라이안의 할아버지들이 신급에 가까운 존재라고 느꼈다. 라이안도 정말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던 이들이었다.

그러한 사정이니 그런 라이안도 못 버틴 상대를 어린 아이 가지고 노는 것보다 쉽게 상대하고 있으니 어찌 이들이 인간 같이 느껴질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캐드 단장이 날아갔던 곳에서 엄청난 양의 마기가 폭발했다.

캐드 단장이 자아를 상실할 각오를 하며 마력을 폭주시켰기 때문이었다. 블랙섀도우 기사들은 그 기운의 정체를 눈치 채고 이를 악물었다.

“크윽!”

“단장님께서 마력을 폭주시켰다… 젠장!”

캐드 단장의 상태를 알 수 있었던 그들이었다.

그들 각자가 마력을 주입받은 이후에 들었던 이야기가 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희가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력을 폭주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너희 스스로도 조금씩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금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로 자아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마력을 폭주시키면 너희는 너희들끼리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서로가 죽을 때까지 전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명심하도록…….]

그것이 마족을 이끄는 칸드의 마지막 경고였다.

그것에 더불어 그들 모두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바로 캐드 단장의 말이었다.

[약속하거라. 내가 마력을 폭주시킨다면 너희는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 마족의 말대로 마력을 폭주시킨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르기에… 내손으로 너희를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절대 나로 하여금 그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게 해주길 바란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본다만… 사람 일이란 앞을 알 수 없기에…….]

“빌어먹을… 이렇게 단장님만 두고 가야 한다니…….”

한 기사가 뒷걸음질을 멈추자 뒤에 있던 기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마음은 전부 같을 것이다. 하지만 단장님의 말을 너 또한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만에 하나 단장님의 정신이 되돌아 오셨을 때 우리의 희생을 보고 단장님이 괴로워하시게 만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갈천혁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쯧쯧쯧, 자신의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우리를 상대하려 들다니…….”

이전 세상의 중원에서 활약을 할 때에도 있었던, 자신의 모든 내공을 폭주시켜 더욱 강한 힘을 내는 무공들이 생각나 절로 씁쓸해지는 갈천혁이었다.

그러한 무공을 사용했을 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힘은 최대 자신의 본래 능력의 3배까지 가능했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제 것이 아닌 힘을 낸 결과는 참혹했다.

주화입마가 아니면 의지 상실… 그것도 아니면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는 것이었다. 그나마 살아 있어도 폐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대부분 그런 무공은 죽기 직전에야 죽음을 무릅쓰고 사용하거나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에게 쓰기 마련이지만, 결국 그리하여 상대를 이긴 후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되었을 때 그들이 대부분 선택하는 것은 자살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갈천혁은 캐드 단장이 안타까웠다.

갈천혁은 안타까운 눈으로 캐드 단장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블랙섀도우 기사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며 사라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당장에라도 전멸시킬 수 있었으나 갈천혁은 그리 하지 않았다. 저들이 저렇게 상관을 버리고 후퇴하는 이유 또한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갈천혁은 혁마소에게 다가가 말했다.

“상당한 힘이군. 상대할 수 있겠는가?”

“크그그, 당연한 것을 무얼 묻는 게냐? 저기 있는 녀석이 이제 힘이 다해가는 것 같으니 저들이나 보호해주어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갈천혁이 여느 때와 달리 그러한 걱정을 하는 이유는 캐드 단장의 마력폭주가 가져오는 힘이 예상보다 상당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혁마소는 평소처럼 자신만만했고, 갈천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헤인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 갈천혁은 서둘러 그들을 보호하고자 기의 막을 펼쳤다.

라드이라는 그제야 캐드 단장의 마력이 더 이상 자신들을 침범하지 않음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라드이라!”

디로안이 쓰러지는 라드이라를 서둘러 안았다.

지금까지도 겨우겨우 버텨왔었는데 더욱 큰 힘이 몰려오자 그것을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갈천혁은 그런 라드이라를 바라보다가 다시 캐드 단장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 세상은 확실히 뭔가 다르군. 아무리 힘의 폭주라 한들 10여 배 이상 강해지다니…….”

갈천혁은 캐드 단장의 몸이 그 힘을 버틴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캐드 단장이 있는 곳 주위로 나무들이 타들어가듯 재로 변하며 흩날렸다.

“크으으으…….”

그의 눈동자는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분노와 당황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있던 자리는 단지 검은 구슬이 들어 있는 듯 어두웠으며, 그 눈에서 뭔가가 타는 듯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의 몸 전체에서 연기와도 같은 짙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독하군. 독황지체 정도 되겠군.”

혁마소가 캐드 단장의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주위에 있는 몬스터들조차 그 강력한 마기에 겁에 질린 채 모두 도망간 지 오래였다. 어딘가에 숨어서 두려움에 떨고 있으리라.

캐드 단장이 아주 느리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혁마소를 보았는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그의 걸음은 서서히 빨라졌다. 그리고 곧 짐승같이 혁마소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캐드 단장의 검에서는 더 이상 마기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의 검 자체가 마기로 뭉친 듯 검을 뿐이었다.

그의 검이 순식간에 혁마소의 머리를 수직으로 갈랐다.

“어딜!”

콰과과광!

단 한 번의 수직베기였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갈천혁은 서둘러 헤인드 등 다른 사람들을 기로 둘러싼 채 하늘로 떠올랐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 충격파가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갈천혁은 보다 높이 떠오르며 혁마소와 캐드 단장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콰과과광! 콰과과광!

그들의 전투는 이미 사람의 눈으로 식별하기 힘들었다.

몬스터의 초원 여기저기에서 검은 기운과 붉은 기운이 계속해서 부딪쳤으며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나무들이 터져나갔다.

쾅!

쾅! 스팟!

콰과과광!

캐드 단장의 움직임은 예전과 천지차이였다.

그는 모든 마력을 소진해서라도 혁마소를 죽이려는 듯 모든 마력을 내뿜었다. 하지만 혁마소는 그를 상대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이곳에서 너와 같은 녀석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재밌구나. 아주 재미있어! 좋다. 내 너를 진정으로 상대해주마!”

혁마소는 이곳 세상에서 지금 눈앞에 있는 자가 가장 강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과 함께 그는 자신의 본래 능력을 보이고자 마음먹었다.

구궁.

공간 자체가 하나가 되어버린 양, 심장이 뛰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조차도 숨을 죽인 듯, 아니 아예 멈추어버린 듯 고요해졌다.

캐드 단장의 검은 여전히 혁마소에게 날아들고 있었으나 그 속도 또한 시간이 아주 미세하게 지나가는 듯 느렸다.

“크핫!”

파방!

혁마소의 몸으로부터 엄청난 기세가 뿜어졌다.

캐드 단장의 검이 혁마소의 목 근처까지 닿으려던 찰나 더욱 빠르게 뒤로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곧 얼마 가지 않아 멈추어졌다.

캐드 단장은 싸늘한 눈초리로 혁마소를 노려보았다.

“크르르르…….”

잠깐의 정적.

주위는 이미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에 파괴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혁마소의 하얀 머리칼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도 짙은 혈광이 비추어졌다.

“크흐흐흐! 덤벼라, 애송이.”

“크르르르…….”

혁마소의 음성은 소름끼치듯 거칠었다. 갈천혁이 그런 혁마소를 보며 중얼거렸다.

“흠… 너무 무리하는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터인데…….”

갈천혁은 혁마소가 캐드 단장을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캐드 단장이 또다시 미친 듯이 혁마소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죽기 전에 나 천마의 이름을 기억하라! 마의 지존 천마니라!”

혁마소는 달려드는 캐드 단장을 향해 검을 내밀고는 검에서 손을 떼었다. 하지만 손을 떼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그대로 떠 있었다.

혁마소의 검이 붉은색으로 변하더니 붉게 녹아들며 은색 액체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검의 형태는 그대로였다.

강기로 이루어진 검이 나타난 것이다.

그 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붉어졌으며 그 크기까지 늘여가기 시작했다. 캐드 단장은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더 이상 혁마소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는지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지금 온 힘을 다해 혁마소의 공격을 피해야만 한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단지 본능이 혁마소에게서 멀어지라고 말할 뿐이었다.

물러서야 할 때이지만 그럴 수 없는 캐드 단장은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마구 흔들더니 또 다시 혁마소에게 달려들었다.

“크으아아아아!”

“이것을 막는다면 내 너를 인정하마! 받아라! 이것이 바로 심검이다!”

하나의 빛줄기가 캐드 단장에게 날아들었다.

혁마소의 앞에는 분명 검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불고하고 검 끝으로부터 하나의 빛이 캐드 단장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캐드 단장은 그 빛을 쳐내려는 듯 수평으로 검을 내질러 공간을 갈랐다.

쑤아앙!

캐드 단장의 검이 수평으로 그어지자 붉은빛은 사라졌다.

“크흐흐흐…….”

캐드 단장은 웃었다. 하지만 순간 혁마소 또한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 순간, 캐드 단장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가슴으로부터 통증을 느끼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혁마소의 앞에 있던 붉은색 강기로 만들어진 검이 심장에 박혀 있었다.

“끄어어어억……!”

캐드 단장은 공중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쿠궁!

캐드 단장의 몸이 떨어지며 상당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쓰러진 그의 몸에서는 서서히 마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기가 사라지며 그의 정신 또한 돌아왔다.

“젠장… 분명 막았거늘… 어찌하여…….”

몸은 자신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전투를 치렀지만, 정신은 그의 육체 안에서 그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분명 빛을 막았고 빛이 사라졌다고 느꼈다. 그런데 아니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그 즈음 혁마소가 서서히 하늘에서 내려오며 그의 머리 앞에 내려섰다.

“심검은 보이는 형태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심검은 심검으로밖에 막을 수 없다. 마음의 검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에 너의 검이 심검을 자르고자 했을 때 이미 심검은 너의 심장을 뚫은 것이다.”

심장이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쉽사리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었다. 아직 이승에 너무도 많은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의 집념이 아직도 그의 영혼을 붙잡고 있었다.

혁마소 또한 반선의 경지에 머물러 있어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허허… 도대체 우리 손자 아이가 너희에게 어떠한 원한을 주었기에 이러는지…….”

잠시 후, 캐드 단장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혁마소는 그것이 죽기 직전 나타나는 회광반조(回光返照)임을 알았다. 즉사를 했어도 당연한 상처에 회광반조까지 나타나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혁마소의 귀에 캐드 단장의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진정… 당신은 인간이오?”

“허허허, 그렇다. 네가 보는 대로 난 인간이다.”

“어찌 인간이 그리 강할 수 있단 말이오? 허억…….”

캐드 단장은 점점 말을 하는 것에 힘겨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의지로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생명의 빛이 꺼져가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다. 그러는 너 또한 그러한 힘은 어떻게 얻었단 말인가? 그러한 힘 또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허억… 허억… 크흐흐… 쿨럭쿨럭… 흐억! 퉤!”

힘겹게 숨을 쉬던 캐드 단장이 한차례 웃더니 몇 번의 기침 을 한 후 피 섞인 침을 뱉고는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않소… 그를 죽이기 위해… 형제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가며 얻은 힘이거늘… 이렇게 당신들에게 막혀버릴 줄이야… 쿨럭! 쿨럭!”

“흠…….”

혁마소의 침음성과 함께 캐드 단장의 얼굴이 까맣게 변해갔다.

마지막으로 캐드 단장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과 같은 자와 검을 섞었다는 것에는 검사로서 후회 없는 영광이었소. 허나… 라이안에게는… 그에게는… 내 죽고 난 후에라도…….”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생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 마지막 한마디는 반드시 하겠다는 듯 흘러나왔다.

“복수…하겠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캐드 단장은 그렇게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혁마소는 뭔가 찜찜한 듯 허리를 편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허허…….”

그런 혁마소의 곁으로 갈천혁이 내려섰다.

헤인드와 그의 친구들 역시 갈천혁이 두른 기의 막이 걷히자 서둘러 라드이라와 루시 공주를 살폈다.

루시 공주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기절해 있었으며 라드이라는 탈진해 있었다. 에나는 그런 루시 공주를 깨우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가 일어나면 어떠한 행동을 할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더 안전한 곳에서 깨워주는 것이 좋겠지… 그래도 라이안 오빠가 몸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혁마소가 곧 시선을 헤인드와 디로안에게 옮기며 말했다.

“너희에게는 들어야 할 것이 너무도 많구나. 우선 이야기부터 들어야겠으니 우리와 함께 가자꾸나.”

헤인드와 디로안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또한 똑같이 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갈 생각인가?”

갈천혁이 혁마소에게 묻자 혁마소는 당연한 듯 말했다.

“우선 이 아이들이 쉬어야 할 것 같으니 다시 이즈리스에게 다시 돌아가야지.”

사실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흠… 그렇군. 그럼 지체할 것 없이 바로 가세나.”

“그러지.”

갈천혁은 내심 다시 이즈리스 남작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기뻐했다. 그리고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라이안이 살아 있다는 것도 알았기에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돌아간다면 이즈리스 남작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었다.

그들이 하늘로 떠올라 이즈리스 남작이 있는 자텐 영지로 떠나고 해가 질 무렵, 그곳에 두 인영이 갑자기 나타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바로 바테르와 펠랜이었다.

“늦었군.”

“뭐야? 이거 캐드 단장이잖아. 설마 그 스피어마스터에게 져버린 거야? 이상하다… 분명히 캐드 단장이 강해도 월등히 강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흠… 칸드에게 한 소리 듣겠군. 어쨌든 이것은 우리의 실수다. 끝까지 지켜봤어야 했는데…….”

펠랜이 바테르의 말을 듣자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해, 바테르… 괜히 나 때문에…….”

“이미 상황은 벌어졌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응…….”

바테르는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파여 있는 땅의 한 부분을 살펴보며 말했다.

“흠… 이것은 캐드 단장과 비등하거나 그보다 더 강한 자가 만든 것 같군.”

펠랜 또한 주위를 둘러보며 바테르의 말에 동조했다.

“정말 그러네? 어떤 곳의 땅은 마기로 검게 죽어 있는데 어떤 곳은 그냥 땅만 파여 있어.”

“누군가가 개입을 했다는 것이군.”

“혹시 드래곤이 나섰던 거 아니야? 우리가 가자마자 드래곤이 나타났을 수도 있잖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흔적으로 보아 마법이 아닌, 캐드 단장과 같은 전투타입이다. 게다가 캐드 단장은 이 정도로 강하지 않다. 이 정도의 파괴력을 내려면 분명 마력을 폭주시켰을 것이다.”

“뭐야? 그럼, 검을 사용하는 드래곤이라는 말이야?”

“흠… 알 수 없다. 어쩌면 드래곤이 아닐지도… 어쨌든 이 사실을 칸드에게 알려야겠군.”

* * *

한편 에드코르 제국과 포스안 제국의 경계지점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에드코르 제국이 포스안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포스안 제국도 상당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포스안 제국의 대신성전 안에서는 포스안 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9명의 성관들이 둘러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들의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오?”

깡마른 한 성관이 말을 하자 상당히 체격이 좋은 성관이 대답했다.

“아직도 저들의 목적은 알 수 없소. 하지만 얼마 전 히매인 왕국을 침략했던 그들이오. 그때도 어떠한 이유도 붙이지 않고 무작정 침략했었으니 지금도 그때의 상황과 별달리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조금 전 말한 성관의 바로 옆에 있는 뚱뚱한 성관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꽝!

“설마 저들이 통일전쟁이라도 벌이려고 하는 것인가?”

“흠……”

“통일전쟁이라…….”

통일전쟁이라 함은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에서 대륙을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그들이 어수선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대성관이 한 손을 들며 말했다.

“모두들 진정들 하시오.”

대성관이 말을 하자 그들은 언제 자신들이 논쟁을 했는지 모르게 동시에 대성관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저들이 왜 우리 포스안 제국을 침략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소. 단지 저들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오. 그리고 얼마 전 내려온 신탁이 있었지 않소.”

대성관의 말이 끝나자 체격이 좋은 성관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를 어떻게 찾는단 말입니까?”

한 성관이 말을 하자 다른 성관들도 한마디씩 했다.

“혼돈의 신녀를 찾으라는 말은 알겠지만…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그녀를 죽이라니요?”

“혹 신탁이 잘못되어진 것은 아닐까요? 그녀를 찾아 보호하라는 그러한 것 말입니다.”

하지만 대성관의 입에서는 확고한 말이 들려왔다.

“신탁은 확실했소.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중간계에는 우리 인간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된다고 했소. 어둠으로 세상 전체가 메워진다고 했으니 아마도 마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하오. 이것은 에드코르 제국이 침략해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을 잊지 말길 바라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돈의 신녀는 스스로 우리 포스안 제국을 찾아온다고 했소. 그러니 외지에서 들어오는 여성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할 것이며 모든 감시를 붙이라 명하시오.”

그들도 혼돈의 신녀를 죽인다는 것이 껄끄럽게 생각되었으나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 한 사람의 목숨을 대륙 전체와 바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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