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용서받지 못할 자
여관으로 돌아온 라이안은 여관의 입구 문이 부서져 있는 것을 보고는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지?”
급한 마음에 신법으로 달려와 여관에 들어선 라이안은 부서진 식탁과 의자를 치우고 있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어제 라이안이 도착했을 때 주문을 받았던 여자였다.
“이봐요, 여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앗! 당신은!”
그녀가 너무 심하게 당황하자, 라이안은 그녀 또한 도둑길드의 일행임을 눈치 챘다.
“당신도 도둑길드 사람이군요.”
“아, 아니에요! 전… 전…….”
여관을 정리하던 그녀는 점점 뒷걸음질을 치더니 여관의 뒷문으로 도망치려 했다.
라이안은 그녀가 도망치려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빠르게 이동해 통로를 막아버렸다.
“히익!”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겁먹지 말아요. 자세한 사정은 펠리언 지부장에게 들어보면 알 거예요.”
“당신이 어떻게 지부장님의 이름을…….”
라이안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러니까 그건 나중에 펠리언한테 들으라고요. 우선은 내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해줘요.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죠?”
라이안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마나를 흘려보내자, 그제야 마음을 안정시킨 그녀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이 쳐들어 왔어요.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서둘러 지하로 숨었지만 이곳에 묵고 있던 당신의 일행은 모두 끌려가버렸어요. 지하에서 듣기로는 당신의 일행들이 이곳 자이라 영지의 병사들을 죽였다고…….”
거기까지 들은 라이안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젠장! 어떻게 알았지? 분명 땅의 정령으로 완벽히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라이안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을 죽일 당시 라이안이 베었던 나무가 곧 그 흔적이 되었었고 마법사가 그곳에서 대지의 기억 마법으로 모든 상황을 알아버렸다는 것을…….
그것을 확인한 기사들이 병사를 이끌고 이곳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어쩔 수 없군. 내가 직접 자이라 영지성으로 쳐들어가는 수밖에.”
헤인드나 디로안, 라드이라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에나와 루시 공주는 큰 위험에 처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데르미크 남작의 측근 기사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펠리언에게 모두 들었기 때문이다. 영주성에 갔다면 분명 데르미크 남작으로 인해 심한 일을 당할 것이 뻔했다.
곧 생각을 마친 라이안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는 눈앞의 여성에게 물었다.
“이곳의 영지성은 어느 방향이오?”
그녀는 라이안의 핏발선 눈을 보고는 부르르 떨며 말했다.
“영지성의 위치는… 문을 나가셔서 오른 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중앙 분수가 보일 거예요. 거기서 다시 왼쪽으로 한참을 가면 영지성이 나와요.”
라이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솟았다. 갑자기 에나와 루시가 나쁜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라이안은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미세한 바람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여관 문을 나와 분수대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라이안이 거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그녀들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면… 이곳 영지성에 있는 모든 자들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몇 명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선두에 섰고, 약 50여 명의 병사들이 한 마차를 에워싸며 걷고 있었다. 마차의 뒤쪽이 철창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죄수 호송용 같았다. 바로 라이안의 친구들이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죠?”
루시 공주가 영문을 몰라 하며 묻자, 디로안이 대답했다.
“빌어먹을… 나도 모르겠군요.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저항한번 못하고 잡혀버렸으니…….”
에나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요?”
에나의 말에, 동시에 생각난 듯 모두 고개를 들었다.
헤인드가 되물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매몰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휴… 제가 보기에는 아마도 대지의 기억을 읽은 게 아닌가 싶어요. 정확한 장소만 안다면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래도 그 넓은 산속에서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난 장소를 알 수 있겠어?”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흠…….”
모두가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루시 공주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제 신분을 이야기하는 수밖에…….”
하지만 디로안이 손으로 가리며 말렸다.
“아직은 안 돼요.”
“아니, 왜죠?”
“그렇게 되면 이곳 히매인 왕국을 떠나기도 전에 여행의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기다려 봅시다. 라이안이 곧 우리를 찾을 겁니다. 우리가 끌려가는 곳까지 가서 정체를 밝혀도 늦지 않으니까요.”
“알겠어요. 그럼, 우선 라이안을 기다려 봐요.”
그러한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 병사들이 마차의 철창살 사이로 보이는 루시 공주와 에나에게 군침을 흘렸다.
“으흐흐, 정말 대단한 미모인데?”
“그러게… 이번에는 데르미크 남작이 상당히 오래 안고 있겠어.”
“너무 심하게 망가져서 내려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무도 적나라한 음담패설에 에나는 파이어 볼을 날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마나수갑으로 인해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으므로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분수대까지 도착한 라이안은 비행하는 제비와 같은 몸놀림으로 빠르게 왼쪽으로 돌아 눈에 마나를 집중했다.
“찾았다! 늦지는 않았구나!”
하지만 기사와 병사들은 이미 영지성에 근접해 있었다.
라이안은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렸다.
영지성의 문 앞에 선 한 기사가 성을 향해 소리쳤다.
“죄인들을 잡아들여 귀환한다! 문을 열어라!”
영지성 안에서 그들을 확인했는지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라! 죄인이 도착했다!”
“문을 열어라!”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가 연속되어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고 곧 커다란 마찰음을 내며 영지성의 문이 열렸다.
끄그그그극! 끄그그그극!
라이안이 영주성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영주성의 문이 닫혀있었기에 성문을 통해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아… 이곳 세상에 온 뒤로 담을 너무 많이 타는 건 아닌지…….”
라이안은 성벽을 타고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최대한 빠르게 속력을 올렸다. 단번에 넘기 위함이었다.
이전 케로틴 성벽을 뛰어넘을 때보다 많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자이라 영지성의 성벽을 뛰어넘는 것쯤은 간단했다.
“으쌰!”
라이안은 힘을 들이지 않고 자이라 영지의 성벽에 착지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도 경비병이 있었던 것이다.
경비병은 죄수인 라이안의 친구들을 보느라 뒤쪽에 있었고, 라이안은 이를 보지 못하고 그 경비병의 정면에 착지한 것이었다.
“윽! 이런.”
경비병 또한 뒤를 돌아봤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누군가가 있자 매우 놀랐다.
“어! 어…….”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경비병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침입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치……!”
슈슈슉!
투둑툭!
털썩!
라이안이 선수 쳐 지풍을 날렸고 수혈이 집힌 경비병은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휴… 너만 놀랜 것이 아니다, 이놈아. 나도 놀랬다…….”
고개를 젓던 라이안은 중원 최고의 은자술인 월영천자의 월영비술을 펼쳐 어둠과 동화되며 모습을 감췄다.
영지성 내부로 들어가는 마차를 따라가고 있던 라이안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일행을 구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나 일행들이 감옥에 갇히면 몰래 빼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다.
이곳저곳 달빛의 그림자에 숨어 마차에 다가서던 라이안은 마차가 곧 멈추자 따라 멈췄다. 그리고 어디선가 몇몇의 사람들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라이안은 그들의 호화스러운 옷차림 보고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중년 남자가 데르미크 남작이겠군.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젊은 놈이 그의 아들 델리크일 것이고… 이렇게 된 거 오늘 펠리언의 은원을 풀어 줄까나?’
내밀 수 있을 만큼 내민 배, 하늘 끝까지 쳐든 턱, 아래로 내리깔고 마차를 바라보는 시선… 데르미크 남작의 표정은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발아래에 있다는 양 거만으로 넘쳐흘렀다.
그를 본 라이안이 가장 처음으로 한 생각이 있었으니…….
‘저 눈알을 아주 뽑아버리고 싶군. 저렇게 재수 없는 눈초리를 하기도 참 힘들 텐데…….’
데르미크 남작이 낮은 어조로 기사들에게 명했다.
“그래, 죄수들을 잡아들였다고? 어디 그 죄수들을 볼까나… 마차에서 끌어내려라!”
“넵!”
명을 받은 기사가 다시 병사에게 명을 내렸다.
“죄수들을 끌어내려라!”
“알겠습니다!”
몇 명이 열쇠를 풀고는 한 사람씩 끌어냈다.
모든 이들이 가장 먼저 내린 헤인드나 디로안를 보고 풋내기 용병을 보듯 비웃음을 던졌다.
곧 에나와 루시가 나타나자, 데르미크 남작과 그의 아들 델리크는 눈이 튀어나올 듯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벌써부터 침을 삼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데르미크 남작의 시선 때문에 소름이 끼친 루시 공주가 디로안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라이안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더 이상 저런 시선을 견딜 수 없어요.”
“휴… 라이안 이 녀석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하아… 루시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뜻대로 하세요.”
루시 공주와 디로안이 이러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데르미크 남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는 자이라 영지의 병사들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이곳에 끌려왔다! 난 너희에게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려 한다! 이의 있느냐?!”
그때 에나가 자신의 어깨를 주물럭거리는 병사 때문에 몸을 비틀며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어딜 만져요?! 이거 놔요! 영주님, 벌을 주기 전에 증거를 대보시죠! 심증만 가지고 죄인취급 하는 건 너무 불합리한 처사 아닌가요?”
“크하하, 증거? 증거도 없이 너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생각하느냐!”
데르미크 남작이 눈짓을 하자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나와 자신의 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에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나인가……?’
수정구를 꺼낸 마법사는 곧 수정구에 마나를 흘려보냈고 수정구가 빛을 내며 하나의 커다란 영상을 만들어냈다. 수정구에서 나오는 영상은 마치 현 세계의 영사기와 같았다.
라이안이 자이라 영지의 병사들을 죽이는 장면과 이곳에 잡혀온 일행들의 모습이 자세히 나왔다.
데르미크 남작은 점점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뚜렷한 증거가 있는데도 너희가 발뺌을 할 생각이더냐! 여봐라! 저들을 옥에 가둬라! 그리고 여자들은 항상 가두는 곳에 따로 가두도록. 어흠.”
“넵!”
“이럴수가… 대지의 기억을 펼치려면 정확한 장소를 알아야 하거늘…….”
에나가 어이없어 할 때 한 기사가 이미 망신창이가 되어버린 여성을 질질 끌고 왔다.
“그것은 바로 이년이 가르쳐 주었지. 흐흐흐.”
기사에게 끌려온 여성은 바로 메르지아였다.
이미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험한 꼴을 당한 그녀의 온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저런 짓을…….”
루시 공주는 메르지아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서 죄인들을 끌어내라!”
병사들이 라이안 일행 전부를 끌고 가려는 그 순간!
루시 공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멈춰라!”
루시 공주의 갑작스런 행동에 데르미크 남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데르미크 남작! 내가 누군지도 못 알아보고 실수하는군요!”
“네년이 누구이기에 감히 귀족에게 소리친단 말이냐!”
그때 델리크가 앞으로 나와 루시 공주에게 걸어가며 소리쳤다.
“네 이년!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난 이 나라의 공……!”
하지만 델리크는 루시 공주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뺨을 때리려 손을 날렸기에 그녀는 말을 하다말고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짝 소리가 나야하는 순간 오히려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걱!
투둑!
“크악!”
갑자기 하나의 그림자가 델리크의 앞에 내려선 순간 델리크의 팔이 떨어졌다. 팔은 갓 잡은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
“크아악! 내팔!”
“델리크!”
델리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데르미크 남작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웬 놈이냐!”
“침입자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루시 공주는 갑자기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자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그토록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의 등을…….
“라…이안?”
라이안은 피를 흘리는 아들을 안고 있는 데르미크 남작에게 말했다.
“손버릇이 나쁜 놈은 팔이 잘려야 정신을 차리는 법! 목을 베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라.”
라이안의 말을 들은 데르미크 남작이 곧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미친놈을 잡아들이지 않고! 아니다, 당장 저 놈의 목을 잘라버려라!”
우르르르르 우르르르르…….
창!
차장!
차장! 창!
자이라 영지의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이 라이안 일행을 포위했다.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에도 라이안은 메르지아의 모습을 측은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바로 메르지아의 허벅지를 흐르고 있는 피였으니… 라이안은 점점 타오르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어찌하여 너희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그토록 쉽게 저지른단 말이냐! 펠리언의 고통과… 덴조와 베일의 고통을… 너희가 진정 모른단 말이냐!”
애초, 라이안은 자신의 일행만 데리고 탈출하려 했으나 이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윗물이 구정물이면 아랫물 또한 구정물이 될 수밖에 없는 법… 모두가 썩었구나.”
라이안은 한 손을 들며 소리쳤다.
“엔다이론 소환!”
라이안의 음성이 자이라 영지성 전체를 울리자 그곳에 있던 모든 기사와 병사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사, 상급정령!”
“물의 상급정령이라니!”
“이럴 수가! 상급 정령사였단 말인가!”
곧 생겨나는 거대한 존재감과 물의 여신이 있었으니…….
엔다이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렀는가, 계약자여…….”
“그래, 지금 이 순간부터 단 한 사람도 이곳 성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물의 막을 성 전체에 펼쳐주길 바란다.”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 알겠다…….”
곧 엔다이론이 사라지자 하늘은 투명한 물로 막혀버렸다. 엔다이론이 성 전체를 감싸버린 것이었다. 노크리 성이나 케로틴 성처럼 국경을 지키는 거대한 성이 아니라, 영지 안에 있는 작은 성 따위를 감싸는 일쯤은 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이곳을 나갈 수 없다. 이곳에서 죽어야 할 자들이 너무도 많기에… 먼저 너, 데르미크 남작!”
“네놈은 누구냐!”
데르미크 남작은 갑자기 나타난 자가 상급 정령사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다.
상급 정령사라면 마스터급 검사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대륙의 속설이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포진하여 압박해오던 기사들과 마법사, 그리고 모든 병사들도 긴장을 했는지 자리만 지킬 뿐 라이안 일행에게로 다가오는 자가 없었다.
헤인드와 디로안, 그 외의 친구들을 잡고 있던 병사들도 엔다이론에 놀라 다른 곳으로 가버린 지 오래였다.
결국 라이안 일행 전체가 가운데 몰린 실정이었다.
라이안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라이안에게 다가왔고, 라이안은 그들의 수갑에 지풍을 날렸다.
슈슈슈슉!
탱! 태댕! 탱!
차각! 차각!
마나수갑은 곧 작은 금속성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이럴 수가! 마스터급의 오러가 아니면 끊을 수 없는 마나수갑을!”
마법사들은 마나수갑이 너무도 쉽게 부서지는 것을 보며 더욱 놀라워하고 있었다. 마스터급이 아니면 부수지 못한다는 것으로 보아 7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제련했으리라.
그만큼 귀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데르미크 남작의 재력이 엄청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어떻게 부순 것인가! 분명 마법이나 정령력은 아니었거늘…….”
호기심이 강한 마법사들은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6서클 마스터 호라곤은 턱수염을 떨며 불안해했다.
‘설마… 소문의 그가 이곳에 있지는 않겠지. 그는 분명 수도에 있다고 들었는데. 만약 진정 그라면… 진정 그라면… 데르미크 남작은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하겠지.’
나이가 많으면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도 느는지, 그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때 손이 자유로워진 루시 공주가 데르미크 남작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난 히매인 왕국의 공주, 루시 폰 세쿠론이다!”
“헉! 루시 공주!”
“루시 공주님이 어찌하여 이곳 자이라 영지에 있단 말인가!”
데르미크 남작은 루시 공주라는 말에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려 어렸을 때의 루시 공주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결론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데미르크 남작은 지금의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들은 비록 팔이 잘렸으나 공주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으니…….
데르미크 남작이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시 공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한 나라의 왕족에게 위해를 가한 죄! 너희는 죽음으로 사죄해도 부족할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루시 공주는 주위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희가 반란을 생각한다고 밖에는 볼 수 없구나!”
“바, 반란! 아닙니다! 저희는 절대로 반란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기사 중 나라에 충성심이 있는 자가 끼어있었던 모양인지 검을 땅에 박고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나머지는 왕족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수그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그때서야 기사들과 병사들이 수군거리며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돌연 데르미크 남작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는 것이냐! 저년이 진짜 루시 공주라는 증거가 전혀 없지 않느냐! 모든 것은 이곳의 영주인 내가 판단할 것이다! 당장 저들을 죽여라!”
“그래, 맞아! 증거가 없잖아! 우리가 속은 거야!”
“그, 그러고 보니 저년 말만 들었을 뿐이잖아!”
“뭐, 뭐야! 우리가 속은 거였어! 이런 제길! 쪽 팔리게 그것도 모르고 무릎을 꿇다니. 내 저년을!”
데르미크 남작은 기사와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잘 됐다고 생각했다.
‘다 죽여 버리면 되는 것이야, 다…….’
데르미크 남작은 증거인멸(證據湮滅)을 생각했던 것이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생각에 살기를 풍겼다.
창! 차장!
“지금부터는 적의 말에 동요치 말고 내 말을 들어라! 비록 적에게 상급정령이 있다고는 하나 단 한 사람이다! 저자만 죽이면 그 외에는 잡졸이니 저자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라!”
루시 공주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왕가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반지를 보여주려고 했지만 라이안은 그런 루시 공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용없어요. 이미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거짓으로 보일 뿐이에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내가 있잖아요. 이들의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전력이 타이탄 한 기만도 못한걸요. 후훗!”
“아…….”
그랬다. 라이안은 맨몸으로도 타이탄 몇 기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우선 모두들 한곳으로 뭉쳐.”
헤인드와 디로안은 주위를 둘러보며 급히 라이안의 말대로 에나와 라드이라를 이끌었다.
그들이 한곳에 모이자 라이안은 위에서 성 전체를 감싸고 있는 물의 상급정령 엔다이론에게 소리쳤다.
“엔다이론! 이들도 물의 장막으로 보호해줘!”
라이안의 말을 들었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이 하늘에서 많은 양의 물이 떨어져 내리더니 라이안 일행을 덮어버렸다.
이를 본 적들이 빠르게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너희가 루시 공주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될 것이다.”
라이안은 등 뒤에서 천에 감겨있는 창을 뽑아들었다.
파팡!
라이안이 폭발적인 마나를 주입하자 창에 감겨 있던 천이 터지듯 찢겨나갔다.
라이안의 창을 본 데르미크 남작은 차차 불안감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그리고 멀리서 얼어있는 마법사단을 볼 수 있었다.
“마법사단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지 모른단 말이냐! 어서 공격하라! 어서!”
데르미크 남작의 말에 손을 놀리려던 마법사를 마법사단을 이끄는 호라곤이 말렸다.
“멈춰라!”
데르미크 남작은 호라곤의 말을 듣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이잇, 네 이놈 호라곤! 이게 무슨 짓이냐!”
“데르미크 남작,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쉽게 목숨을 내놓고 싶지는 않아서 하는 행동이니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말이냐!”
호라곤의 주위에 있던 마법사들도 호라곤의 행동에 의문을 품고 물었다.
“호라곤 님, 도대체 왜 저희를 말리시는 건지요?”
“왜기는… 너희를 살리려는 것이지.”
“저희를 살리다니요? 저자가 상급 정령사이기는 하지만 우리까지 가세한다면 분명 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
“잘 보아라… 상급 정령을 부리고 창을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의 소문을 너희도 잘 듣지 않았느냐.”
그때서야 소문을 생각한 마법사가 놀라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설마!”
“우리는 자리를 피하자꾸나.”
호라곤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마법사들도 기사에게 돌진하는 라이안의 모습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호라곤을 따랐다.
“네 이놈! 호라고오오온!”
데르미크 남작의 마지막 외침으로 일대 수백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라이안은 기사나 병사들 중 선량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데르미크 남작과 나쁜 짓을 하고 다닌 측근 기사들은 현재 데르미크 남작의 뒤에 있는 자들이라 짐작했다.
그 짐작은 정확했다.
“많은 피를 보지 않으려면 그만큼 큰 힘을 보여야겠군.”
어차피 이곳에서 큰 소동을 피워도 엔다이론이 영주성 전체를 감싸고 있어 그 소리가 영주성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라이안은 머리위로 창을 휘돌렸다.
휘리리리리릭!
“죽어라!”
“이야!”
기사들이 라이안에게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지만 그 소리는 곧 엄청난 폭발이 삼켜버렸다.
“청룡풍파!”
콰과과과광!
쏴아아아앙!
라이안이 자신의 몸까지 휘돌리며 뿜어낸 청룡풍파는 땅이 터져 나가듯 강한 회오리를 만들며 달려들던 기사들과 병사들을 휩쓸었다.
“뭐, 뭐야! 크악!”
“크악!”
“으악! 살려줘!”
쑤아아아아!
퍽!
터덕! 턱!
회오리의 바람을 따라 날아간 병사와 기사는 이곳저곳의 벽에 부딪히며 피를 흘렸다. 팔과 다리가 부러졌으며 하얀 뼈가 살을 뚫고나왔다. 그들은 수십에 달했다.
병사들은 그런 피해를 입었지만,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들은 아예 정신을 잃고 미동도 하지 않으니 그 충격이 더했으리라.
엄청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자 청룡풍파에 휩쓸리지 않은 자들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뒷걸음질만 쳤다. 라이안의 신위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거, 검은 사신이다!”
“진짜 검은 사신이다!”
“검은 사신이라니…….”
데르미크 남작은 갑자기 일어난 엄청난 회오리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데르미크 남작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정말인지 확인하기 위해 뒤로 손을 휘저었다.
“여봐라, 저…저게 환상이 아닌 진짜란 말이냐?”
하지만 이미 아무런 것도 잡히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하여 뒤를 돌아본 데르미크 남작은 자신이 아끼던 기사들을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이미 라이안의 신위를 보자마자 검은 사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겁먹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어차피 도망쳐봐야 성 안쪽이거늘…….
물의 상급정령 엔다이론이 있었기에 그들은 밖으로 도망칠 수 없었다.
영지성은 전투 소리가 아닌 병자의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으…….”
“끄으…….”
라이안은 이를 보고 곧바로 데르미크 남작에게 걸어갔다.
터덕터덕…….
하지만 이미 초점을 잃은 데르미크 남작의 눈은 라이안이 다가오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이를 확인한 라이안이 데르미크 남작의 뺨을 날렸다.
짝! 짜작!
세 대를 맞고 나서야 데르미크 남작의 초점이 돌아왔다.
“지, 진정… 진정 검은 사신이시오?”
멍청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데르미크 남작의 말에 라이안은 대답했다.
“남들이 그리 부르더군. 검은 사신이라고…….”
“허…허허…….”
데르미크 남작은 허탈한 듯 웃으며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지만 라이안은 조금의 동정마저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살의가 더욱 솟구쳤다.
“너 같은 하찮은 자로 인해 너무도 많은 이들이 고통당하며 울부짖었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내가 무엇을 잘못해단 말인가… 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돈! 그래, 돈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주겠소. 그러니… 그러니…….”
“닥쳐라!”
퍽!
데르미크 남작이 라이안에게 엉겨 붙으려고 하자 라이안은 화를 내며 발로 차버렸다.
“지금까지 네가 강간한 아녀자들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남편들은 죄다 병신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게다가 어쩜 그리 쏙 빼닮았는지 네 자식 놈까지 그따위 짓을 하고 다니더구나.”
“내가 내 영지민을 다스린다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이곳에서는 내가 법이오! 내가 다스리는 곳이란 말이오!”
사실 데르미크 남작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한 영지의 영주는 영지 안에서는 황제와도 같았다.
하지만 태어나고 살아온 환경이 다른 라이안의 생각은 달랐다.
“네가 다스리는 곳이라면 네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악한 짓을 일삼아도 된단 말이냐! 그리고 그 이유가 네가 영주라는 것, 그것 때문이냐?!”
데르미크 남작을 노려보던 라이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 영주라는 직위! 내가 빼앗겠다. 오늘 이후로 넌 자이라 영지의 영주가 아닐 것이며 수도로부터 앞으로의 새 영주에 대한 왕명이 내려올 것이니 그리 알라!”
“그 그럴 수가…….”
벼랑 아래로 떨어지듯 허물어지는 데르미크 남작의 얼굴이 십 년은 늙어버린 듯했다.
그때 라이안의 머리로 엔다이론의 음성이 들려왔다.
-계약자여… 성 밖에서 누군가 계약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내 이름을? 흠… 들여보내줘.”
라이안은 이곳에 오기 전 들렀던 곳이 도둑길드가 운영하는 여관이었음을 떠올리고는 찾아온 이들이 누군지 짐작했다.
영지성의 성 전체를 감싸던 물의 장막 중 한곳이 갈라지며 세 사람이 들어섰다.
“역시 저들이었군.”
“라이안 님!”
“라이안 님, 무사하신지요?”
물이 갈라진 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바로 펠리언과 덴조, 그리고 베일이었다.
곧 펠리언이 멍청히 앉아있는 데르미크 남작을 발견했다.
“데, 데르미크 남작! 이, 이 개자식!”
퍽! 퍽!
펠리언은 데미르크 남작을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발로 차며 때렸다.
“죽어! 죽어! 죽여 버리겠어!”
퍽! 퍼벅!
“크헉!”
라이안은 말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그만 두었다.
덴조와 베일 또한 그 옆에 팔이 잘려 있는 델리크를 발견하고는 펠리언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 개자식!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 아내가 죽었다!”
퍽! 퍼벅!
“죽어라!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퍽! 퍼벅!
“우헉!”
곧 분노가 극에 달한 그들이 칼을 뽑아 들어 데르미크와 델리크를 고기 다지듯 난자하기 시작했다.
스걱! 퍽!
스걱! 스걱!
데르미크 남작의 목과 팔이 잘려 나갔다.
몸통 여기저기가 베어져 창자가 흘러나왔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고 피눈물을 흘리며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데르미크 남작의 최후였다.
라이안은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뒤로 하고 라이안은 앞으로 나가 멀쩡한 기사들을 불렀다.
“기사들은 당장 내 앞으로 집합하라!”
데르미크 남작의 몸이 난자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던 기사들이 라이안의 음성을 듣고 놀라며 서둘러 모여들었다. 남은 기사들은 약 이십여 명이었다.
라이안은 그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본다. 너희 중 몇 명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한 곳에 모은다. 나머지는 데르미크 남작의 측근 기사들을 잡아오도록!”
“옙, 알겠습니다!”
“당장 움직여라!”
우르르르르 우르르르르.
라이안의 고함에 기사들이 허겁지겁 뛰어다녔다.
영지성에 있던 모든 병사, 하녀와 식솔들이 영지성의 중앙에 모였다. 마법사들 또한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고 모두 중앙에 모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지성 구석에 숨어있던 데르미크 남작의 측근 기사들은 저항하다 모두 죽어버렸다. 어차피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라이안이었으나 그들을 잡기 위해 두 명의 기사가 죽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한쪽에는 데르미크 남작의 부인이 묶여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다가 벼락을 맞은 느낌이리라.
아직 엔다이론이 영지성 전체를 감싸고 있어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이안이 친구들의 보호 장막을 풀자 그들이 라이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라이안은 모든 사람들이 모였음을 확인 하고는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말했다.
“모두 잘 들어라! 나는 너희가 말하는 검은 사신이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이분은 히매인 왕국의 공주이신 루시 공주님이 확실하다.”
“진짜 루시 공주님이었다니…….”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라이안의 말을 들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렸다.
“조용! 그렇다. 너희는 왕족을 죽이려 했다. 그게 얼마나 큰 죄인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라고 본다.”
왕족을 죽이거나 이를 시도한 자는 그 누가 됐든 삼대를 멸족시켰으니 지금 이들은 가족의 목숨까지 걱정해야 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 이럴 수는 없어… 우린 아무것도 몰랐다고.”
모두가 당황하며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라이안이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으나 루시 공주님은 그것을 모두 용서해 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그렇게 말하며 라이안은 루시 공주에게 살짝 윙크했다. 그것을 본 루시 공주가 얼굴을 붉혔다.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너희도 데르미크 남작이 죽을 만한 이유가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데르미크 남작을 죽인 저들을 봐주길 바란다.”
라이안이 손으로 지목하자 펠리언과 덴조, 그리고 베일이 땅을 바라보며 몸을 수그렸다. 그들은 차마 라이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라이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잃고 데르미크 남작을 죽였기 때문이다.
데르미크 남작의 부인은 라이안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보며 독기를 품었지만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들은 데르미크 남작으로 인해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다. 저들의 아내와 딸은 데르미크 남작에게 강간당했으며, 저들이 보는 앞에서 윤간을 당하며 혀를 깨물고 자살했다.”
“그, 그럴 수가…….”
“가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와 그러한 짓을 한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너무 잔인하구나…….”
모든 사람들이 라이안의 말을 듣고 데르미크 남작이 잔인한 파렴치한이라고 느꼈다.
라이안은 그러한 반응이 만족스러웠다.
“그런 일을 당했는데! 이들이 데르미크 남작을 죽인 것에 대해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나라도 그랬을 거야…….”
“복수하고 싶었겠지…….”
이미 그들은 라이안의 말에 빠져 있었고 라이안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렇다, 너희가 생각해도 이들이 데르미크 남작을 죽인 이유는 충분,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데르미크 남작으로 인해 고통당했던 이들에게 데르미크 남작이 누려왔던 모든 것을 주려 한다.”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라이안은 데르미크 남작의 부인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당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됐지만 어쩔 수 없음을 당신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오. 인간 이하의 남편을 두었음에도 그의 곁에 있었던 당신의 잘못이기도 하오.”
“흐흐흐흑…….”
라이안의 말에 데르미크 남작의 부인은 원통한 듯 흐느낄 뿐이었다.
“모두 들어라! 지금 이 순간부터 이곳 자이라 영지의 영주 직위를 저기 있는 펠리언이 수행하게 될 것임을 이 자리에서 선포한다!”
“라, 라이안 님… 전 이런 영지를 다스릴 역량을 가추지 못했습니다. 말을 거두어주십시오.”
펠리언이 당황하며 라이안에게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라이안은 오히려 웃으며 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한 조직의 수장이었던 그대이니 이미 자격은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부디 너희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이 영지를 잘 다스려 주길 바란다.”
“라이안 님, 라이안 님… 크흐흐흑… 이 은혜… 죽는 그 순간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흐흐흐흑…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도 감동적인 순간이었기에 마음 약한 병사들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짝!
짝짝짝짝짝짝짝…….
박수소리는 냇물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퍼지듯 주위로 번져나갔다. 곧 모두가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영주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
“펠리언 영주님 만세!”
“펠리언 영주님 만세!”
라이안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펠리언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리고 그의 팔을 들어주었다.
“보게. 이제 이들이 자네의 부하이며 자네의 영지민이라네. 막중한 임무를 맡은 만큼 더욱 힘들어질 것이니 더욱 노력해야 할 거야.”
“감사합니다. 라이안 님… 모두들 고맙소! 앞으로 밝은 빛만 비치는 영지로 만들 것임을 여러분들 앞에서 맹세하겠소!”
짝짝짝짝짝!
짝짝짝짝짝!
펠리언의 말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박수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를 지켜보던 루시 공주는 라이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라이안 님에게 저런 모습도 있을 줄이야… 너무 멋진 분이야. 꼭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루시 공주는 자신의 생각을 누가 들었을까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다 다시 라이안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라이안이 다시 손을 들자 모두가 라이안에게 집중하며 소리를 줄였다.
“너희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우리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자들도 많을 것이라 본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수도에 있어야 할 분들이…….”
라이안이 손을 들자 웅성거리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우리는 포스안 제국에 가려고 한다. 히매인 왕국은 아직 전시 상태다. 에드코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언제 침략을 받을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공주가 포스안 제국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에드코르 제국에서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우리가 이곳에 왔었다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그것을 말할 리 없습니다!”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라이안은 그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도 첩자가 있을지 모르며, 사람의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한 가지 금제를 가하고자 한다. 우리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모두 협조해 주도록. 그것은 우리에 대한 말을 누군가에게 했을 시에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에 대한 말만 안하면 절대 문제될 게 없으니, 그리 알도록.”
라이안의 설명에 모두가 찬성했다.
그래서 라이안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신적 금제를 가했다. 루시 공주에 대한 것을 말하려 하면 엄청난 두통이 오게 만든 것이다. 물론 말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지만…….
그러한 금제가 끝나고 나서야 라이안은 영지성에 펼쳐진 물의 장막을 거두었다.
루시 공주는 손수건을 꺼내 라이안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무척 힘들어 보여요, 라이안.”
“상급정령을 너무 오래 부렸나 보네요. 조금만 쉬면되니까 걱정 말아요.”
에나는 그런 루시 공주와 라이안을 보고는 입이 한주먹만큼 튀어나왔다.
‘히잉… 내가 닦아주려고 했는데…….’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라이안 일행과 펠리언, 그리고 그의 두 친구인 덴조와 베일이 영주의 집무실에 모여 앉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사들과 병사들의 치료군요.”
펠리언의 말에 라이안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힘을 줄인다고 줄였는데 다친 사람들이 상당하더군. 어흠.”
“다음부터는 더 줄이셔야겠습니다. 하하!”
“그건 그렇고 덴조는 아직 움직이면 안 될 텐데, 자네도 어서 가서 치료를 받지 그래?”
라이안의 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가슴을 관통 당했으니 쉬어야 할 상태였다.
“괜찮습니다. 상처가 거의 다 아물었더군요. 라이안 님의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무리하지는 말도록. 이제는 자네도 내 사람이니까.”
라이안은 다른 곳을 쳐다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덴조는 가슴이 찡해졌다.
‘감사합니다…….’
라이안은 곧 친구들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여기도 정리됐으니 우린 갈 길을 가야하지 않겠어?”
“으잉? 벌써 말인가?”
헤인드는 정색을 하며 곧 따지듯이 말했다.
“이봐, 이곳에 며칠 더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랬지.”
“그런데 왜 갑자기 말을 바꾸는 거야? 도둑길드나 정보길드에 무슨 짓이라도 할 것처럼 말하더니 말이야.”
“후훗, 그 일이 다 끝났으니 가자고 하는 거야. 펠리언이 정보길드는 이곳에 없다고 하던데?”
“그럼 도둑길드는?”
“그것은 이미 내 것이나 마찬가지야.”
라이안의 말에 펠리언이 웃으며 받았다.
“아니지요. 이미 라이안 님에게 소속된 단체입니다.”
헤인드는 펠리언과 라이안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쉽게 설명해주면 안 돼?”
디로안 역시 궁금했는지 물어왔다.
“혹시 펠리언 영주님과 관련이 있는 건가?”
펠리언이 이곳의 영주가 되었으니 디로안은 펠리언에게 영주라 칭했다.
“응 맞아. 바로 펠리언이 도둑길드의 지부장이었거든.”
“으에?”
“그게 정말인가?”
“그럼 여관에서 우리를 공격했던 사람들이 펠리언 영주였단 말인가요?”
에나의 말에 펠리언이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것은… 그곳을 습격한 사람들은 제 휘하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뭐 아래에 있던 자들이 마음대로 움직였을 수도 있으니…….”
잠을 자다가 너무도 놀랐기 때문인지, 에나는 아직도 그 일이 거슬렸다.
라이안이 곧 다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 이제 떠나자는 말을 이해하겠지?”
“휴… 오자마자 습격당하지를 않나… 기사들한테 끌려오지를 않나… 잠도 못자고 피곤한데 너무 강행군하는 거 아닌가?”
헤인드가 투덜대며 불만을 토하자 라이안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난 너희가 기사들에게 끌려가 혹 다쳤으면 어떡하나 하고 얼마나 걱정했다고. 이제는 내가 그런 걱정을 안 하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 여기서 기사들한테 끌려갈 때 저항이라도 한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
라이안의 말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거 봐, 없잖아. 너희도 빨리 수련해서 강해지고 싶을 거 아냐? 에나는 벌써 4서클의 문턱을 밟은 것 같던데 너희는 아직 그대로니 동생한테도 창피하지 않겠어?”
헤인드와 디로안이 라이안의 말에 무척이나 놀라며 에나를 쳐다보았다. 에나도 놀라며 라이안을 바라봤다.
“어? 라이안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후훗, 원래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법이야.”
헤인드와 디로안은 에나가 4서클에 들어섰다는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자신들도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바로 출발하지.”
“우리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빨리 수련을 시작하세.”
라이안이 불을 붙여도 제대로 붙인 듯싶었다.
라이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펠리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펠리언, 여행에 필요한 것을 자네가 좀 준비해 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어?”
“걱정 마십시오. 그 정도의 준비는 양초 반 개가 타기도 전에 가능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고마워.”
“아이고, 고맙다뇨? 저는 이제부터 라이안 님의 심복인걸요.”
“에이, 그래도 심복은 너무한 거 아냐? 그래도 이제는 어엿한 영주인 것을…….”
“하하하,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요.”
펠리언은 그렇게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라이안이 부탁한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라이안은 펠리언을 따라서 나가려는 덴조와 베일을 불러 세웠다.
“아, 자네들은 잠시 나 좀 보지.”
라이안과 그들의 대화가 상당히 길어지자 라이안 일행은 잠시 동안 영주의 집무실에서 졸았다.
정말 바쁘고 시끄러운 하룻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태양이 산을 타고 넘어오기 시작한 시간 라이안 일행은 영주성의 뒷문으로 몰래 빠져 나오고 있었다.
모두 상당히 지치고 초라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피로를 다 몰아내지 못한 듯했다.
“으… 졸려 죽을 것 같아.”
“에나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으…….”
에나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하는 수없이 디로안이 에나를 업었다.
펠리언과 그의 두 친구가 그런 라이안 일행을 배웅 나왔다.
“일을 마치고 나면 반드시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후훗, 오지 말라고 해도 영지를 얼마나 잘 다스리고 있나 점검하러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라이안과 그의 친구들이 길을 떠나려고 할 때 덴조와 베일이 소리쳤다.
“반드시 라이안 님이 만족하실 경지에 오르겠습니다!”
라이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다음에 왔을 때 내 친구들 보다 약하면 벌 받을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하하!”
“라이안 님…….”
“라이안 님, 감사합니다… 라이안 님은 제 마음의 진정한 주군이십니다.”
이들의 대화로 보아 아무래도 라이안이 이들에게 무엇인가 전해준 듯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영주성을 빠져나온 라이안 일행은 몬스터의 초원으로부터 자이라 영지를 지켜주는 벽 앞에 섰다.
“이제 시작이군.”
“휴… 죽을 각오로 들어가야겠지…….”
헤인드와 디로안은 몬스터의 초원에 들어서기 전에 각오를 다졌다. 이곳을 지나고 나면 진정한 검사로 태어날 것이라는.
그들은 지시를 받은 병사의 안내에 따라 성벽이 부서졌을 때 그곳을 보수하는 목수들이 다니는 통로로 가게 되었다. 통로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 아주 조금 걸었을 때 위로 가는 통로가 보였다.
라이안은 이 통로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통로를 벗어나고 나서야 일루전 마법이 걸려있음을 확인하고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사람도 겨우 지나다니는 길이라 덩치가 큰 오크는 들어설 수조차 없어 보였다.
디로안은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병사에게 물었다.
“만약 고블린 같은 몬스터가 이 통로를 찾아내게 되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병사는 디로안이 왜 그러한 질문을 하는지 잘 아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고블린 같은 몸집이 작은 몬스터라면 침입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평소에는 기관이 움직인 답니다. 통로 사이사이에 틈이 나있는데 그곳에서 연속해서 칼날이 삐져나오지요. 가끔 고블린이 한두 마리씩 들어오기는 하지만 전혀 문제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제야 의문이 풀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디로안이었다.
“저희의 안내는 여기까집니다. 그 이상은… 너무 위험해서요. 그럼 무사히 몬스터의 초원을 지나가시길 라피네 신께 빌겠습니다.”
병사들이 서둘러 통로로 들어가 버리자 라이안 일행은 긴장 된 표정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라이안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뭣들하고 있어? 가자고!”
라이안이 가장 처음 앞장을 섰으며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 * *
한 어두컴컴한 석실의 자리에 여러 명이 누워 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자들…….
그들은 바로 블랙섀도우 기사단이었다.
그들의 이마 위에는 각각 하나씩의 검은 구슬이 놓여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면 떨어질 법도 했지만 그들은 미동도 없었다. 그들의 이마에 붙어버린 듯 너무 자연스럽게 올려져있었다.
그러한 석실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들을 써먹기 좋을까?”
어린아이 같은 음성이었다.
“후후후, 써먹기 보다는 가지고 놀 뿐이지. 과연 마옥을 흡수한 이 녀석들이 얼마나 강해질지도 상당히 궁금하고 말이야.”
“이들 중 마스터급도 있다면서?”
“그렇다. 저기 가장 중앙에 누워있는 자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더군. 물론 인간 기준이겠지만.”
“그럼 스피어마스터라는 인간을 죽일 수도 있겠네?”
“그럴지도 모르지.”
“칸드, 그럼 우린 뭘 하지?”
“팰렌, 너와 바테르가 저들을 따라다녀라. 그리고 저들이 스피어마스터라는 자를 죽이지 못했을 시에 너희가 정리하도록.”
“후웅, 그런 거야 쉽지. 근데 꼭 바테르랑 가야해? 바테르는 너무 말이 없어서 심심하단 말이야.”
칸드가 팰렌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
“너 혼자 가면 분명 놀러나 다니겠지. 그래서 바테르랑 같이 가라는 거다. 그리고 스피어마스터라는 자는 드래곤나이츠라고 하더군.”
“와! 그럼 드래곤하고도 싸울 수 있겠네?”
“너희 둘이라면 드래곤 한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
“싫어! 싫어! 팰렌이 혼자 잡을 거야아아!”
“만약을 위해서다. 능력이 된다면 혼자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이 중간계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니까.”
“그건 그렇고 오리닌 황제가 포스안 제국하고 전쟁을 일으킬 거라면서?”
“그렇다. 오리닌 황제가 에드코르 제국에 있는 전 병력을 포스안으로 옮기기로 했다. 최대한 사천사장들을 전쟁에 참여하게 만들어야만 우리가 포스안제국의 성지로 들어설 수 있으니까.”
그랬다. 이들은 에드코르 제국과 포스안 제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 사이 포스안 제국의 성지로 들어가 혼돈의 칼자루를 훔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보다 좋은 유인책은 없었다.
“과연 사천사장 중 몇이나 참가시킬 수 있을까? 헤헤.”
칸드와 팰렌의 신형은 장난기 짙은 팰렌의 음성을 끝으로 사라졌다.
* * *
한편 갈천혁과 혁마소는 이즈리스 남작의 자텐 영지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옷 또한 깨끗해져 그들이 언제 노숙을 했냐는 듯 번쩍거렸다.
“허허허, 이즈리스가 지도와 사람을 붙여준다고 하니 며칠 뒤 출발하면 되겠군.”
혁마소가 너무도 만족스러운 듯 말하자 갈천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뭐, 에드코르라는 나라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니 언제 찾아가도 상관은 없겠지. 자네는 황제라는 놈을 어찌할 생각인가?”
혁마소가 몸을 살짝 기울여 마시고 있던 포도주를 탁자에 강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탕!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당장 죽여 버려야지.”
“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는 것이거늘…….”
“네 이놈! 정파 나부랭이들의 말은 때려 치워라! 그렇다면 네놈은 정운을 죽인 녀석들을 가만히 두고 보자는 게냐!”
“허허허, 이미 살계를 연 이상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런데 왜 그딴 걸 묻는단 말이냐?”
“자네의 생각을 듣고자 했을 뿐이라네. 화를 가라앉히게나.”
“다신 그딴 거 묻지도 마! 길만 알았다면 당장이라도 그 놈들을 죽이러 갔을 것이다.”
혁마소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강한 콧바람을 날리며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젠장, 도대체 이 술맛은 왜 이렇게 좋은 거야?!”
그때 있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들어오너라, 이즈리스.”
딱칵!
이즈리스 남작이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어섰다.
“저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린 네 발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단다. 허허허.”
“발소리 만으로요?”
“그렇단다, 이즈리스야. 사람에게는 각각 다른 기운이 존재 한단다. 그리고 그 기운에 따라 땅을 밟아나가는 힘도 달라질 뿐 아니라 그 발자국으로 그 사람이 어떠한 수행을 해왔는지도 알 수 있단다.”
“휴우… 그 정도로 잘 알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인지요?”
“허허허, 아주 많이 해야겠지. 허허허!”
이즈리스 남작은 혁마소와 갈척혁이 앉아 있는 소파에 같이 앉으며 잠시 동안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이즈리스 남작의 이상한 행동에 혁마소가 신경이 쓰이는지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왜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그러는 게야?”
“저기…….”
갈천혁은 이즈리스 남작이 무엇인가 꺼내기 어려운 말을 주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우리에게 할 말이 있느냐? 어려워 말고 말해 보거라.”
“저기… 바쁜 일이 있으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돌연 갑자기 이즈리스 남작이 갈천혁과 혁마소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간곡히 부탁했다.
“잠시 동안만!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이곳에 남아 저에게 검술지도를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런 이즈리스 남작의 행동에 갈천혁과 혁마소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흠… 검술지도라…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만 우리에게는 빨리 에드코르 제국에 가야할 이유가 있느니라.”
“단 한 달만… 단 한 달만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미안하구나.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이곳에 한 번 들르마. 그 때라면 검술지도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으니 너무 섭섭해 하지는 말거라.”
“아…알겠습니다…….”
“흠…….”
이즈리스 남작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풀이 죽어서 혁마소와 갈천혁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갈천혁은 그런 이즈리스 남작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심성은 착한 아이인 듯해서 마음에 드는데… 아쉽게 되었구나.”
“왜 그러냐? 갈가야, 네놈도 제자하나 갖고 싶어서 그러는 게냐?”
“허허허, 제자라…….”
혁마소의 물음에도 뚜렷이 이야기는 하지 않고 웃기만 하는 갈천혁이었다. 그는 무엇인가 마음을 정한 듯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즈리스 남작은 힘없이 난간에 걸터앉아 기사들이 수련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막히는 부분은 뚫리지 않고 언제까지 이대로 정체되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즈리스 남작은 현재 익스퍼트 초급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선 지는 상당히 오래 되었다. 익스퍼트 초급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으니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기사 중 가장 강한 기사가 익스퍼트 중급에 올라 있는 기사단장 마스단장이었는데, 그와의 대련에서도 실력이 늘지 않아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앞에 혁마소와 갈천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즈리스 남작은 정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소드마스터 중급이라고 소문나 있는 아크포민 공작의 스승이라고 하니 그 실력은 예측하기 힘들 정도이리라. 그 실력은 이미 본인이 검증까지 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검술지도를 받는다면 아무리 재능이 없는 자신도 더 높은 경지를 꿈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조금 전 그 꿈이 날아가버렸다.
“휴우우우…….”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던 이즈리스 남작의 뒤에서 부드러운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한숨으로 인해 땅이 꺼질 듯하구나.”
이즈리스 남작은 그 음성이 갈천혁의 것임을 알고는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나오셨습니까? 괜히 제가 심란하게 해드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허허허, 아니다. 심란은 무슨… 오히려 신세를 지고 있음에도 가르쳐주지 못하는 내가 더 미안하구나.”
“아이고, 어르신께서 미안하시다니요. 제가 부담만 드렸습니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참 고운 심성을 가졌구나…….”
나쁘게 생각할 만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을 챙기는 이즈리스 남작이 마음에 드는 갈천혁이었다. 이즈리스 남작을 가만히 쳐다보던 갈천혁이 결정을 한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어떠냐? 내가 잠시 이곳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너에게 검술을 지도해 주려고 하는데…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한 번 받아보겠느냐?”
갈천혁의 말에 이즈리스 남작이 크게 기뻐하며 대답했다.
“정말이십니까? 정말 검술지도를 해주시는 것입니까? 가르쳐만 주신다면 부족하나마 성심성의껏 배우겠습니다!”
이즈리스 남작의 큰 목소리에 기사수련장에서 수련하던 기사들까지 그들을 쳐다볼 정도였다.
“좋다. 그럼 며칠만이라도 잘 해보자꾸나.”
“넵!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