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인간 이하의 존재들
라이안 일행은 하루를 더 보내고 나서야 몬스터의 초원과 가장 가까운 영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몬스터의 초원에서 가장 가까운 이 영지는 데르미크 남작이 이끌고 있는 곳으로, 몬스터의 초원과 마을 사이에는 왕성과 흡사한 높은 벽이 있었다.
몬스터의 초원에 사는 몬스터는 보통의 몬스터와는 달리 더욱 흉폭하고 강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돌벽도 가끔 금이 가거나 떨어져 나갔으므로 잦은 보수를 해주어야 했다. 특히 바깥쪽의 보수는 목수들로 하여금 목숨까지 걸게 만들었다. 보수 도중에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나 습격하는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걱정거리가 없었으므로 벽 안쪽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라이안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는 영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가 데르미크 남작의 영지라고 했던가요?”
“맞아요. 데르미크 콘 자아라… 그와 그의 병사들은 몬스터의 초원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막는다는 핑계로 전쟁조차 참가하지 않았죠.”
루시 공주가 테르미크 남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라이안은 차라리 좋은 상황이라 생각했다.
“제 얼굴을 모르니 오히려 다행이네요. 혹시 그가 공주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알아보기 힘들 거예요. 제 열 번째 생일을 제외하고는 저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요. 데르미크 남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잘 안 나오기로 유명하기도 해요.
“으음…….”
“왕성에서도 몬스터의 초원을 막고 있는 영지라는 이유로 상당한 지원을 해주죠. 그런데도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손톱만큼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자에요.”
루시 공주의 말만 듣고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었으나, 라이안은 데르미크라는 자가 상당한 기회주의자이며 아쉬울 때만 도움을 찾는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회주의자라… 히매인 왕국이 망할 위기에서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에드코르 제국이 히매인 왕국을 점령했을 때 상당한 점수를 딸 수 있었겠군.’
멀리서 보이는 자아라 영지성은 아직도 한참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라이안 일행은 그곳에서 부족한 식량과 물품을 보충하고 몬스터의 초원으로 방향을 잡고자 했다.
그런데…….
라이안 일행은 나무가 없는 평평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라이안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열다섯 살 정도의 소녀가 겁먹은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거부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자아라 영지는 이제 언덕 하나만 넘어가면 된다.
라이안은 잠시 멈춰서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잠시만.”
“왜 그래요?”
그의 옆에서 걷던 루시 공주가 라이안의 행동에 의아해 했다.
“아무래도 저쪽 숲에서 누군가가 봉변을 당하고 있는 것 같네요. 잠시 다녀올게요.”
“봉변?”
“누가 말인가?”
다른 일행들이 질문을 던졌을 때는 이미 라이안의 신형이 숲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곧 라이안을 따라갔다.
부아아악!
“끼아아악! 제, 제발… 흐흐흑…….”
금발의 어여쁜 소녀가 찢어진 윗옷을 잡아 자신의 몸을 가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녀의 앞에는 병사로 추정되는 자들이 있었다.
“으흐흐, 고년 상당히 먹음직스럽구나.”
“꿀꺽, 언제 크나했더니 이제야 거의 여물었군. 크흐흐.”
병사들의 수는 세 명이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녹색 쌍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귀족 문장은 근처에 있는 데르미크 남작의 가문 문장이었다.
“페리 아저씨… 왜 이러세요. 아저씨는 저한테 무척이나 잘해 주셨잖아요.”
소녀는 한 병사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소녀를 바라보는 사내의 표정은 이미 색정으로 물들어 있었기에 이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 병사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으흐흐, 그건 네가 크면 상당히 이뻐질 것 같아서 그랬지. 그런데 이렇게까지 미인으로 자라줄 줄이야…….”
그랬다. 그들은 몇 년 동안 그 소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소녀가 자라 자신들이 범할 수 있게 되기만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데르미크 남작 영지에서 약초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는 약초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약초를 구하러 갔고, 그곳에서 몬스터를 만나 화를 당한 것이었다.
나라 바깥쪽인 몬스터의 초원은 엄청난 몬스터들이 있지만 나라 안쪽의 산은 몬스터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날은 운이 억세게 나쁜 날이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큰 상처를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약초를 구하러 다니는 일은 소녀의 몫이 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병으로 세상을 등졌기에 생계를 위해서는 그녀가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늘 산 깊숙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으나 그녀는 대답만 하고 산 깊숙이 들어가 약초를 캐오곤 했다.
이를 알고 있었던 병사들은 소녀가 산으로 약초를 구하러 가기만을 기다렸다. 마침 소녀가 성문을 나가자 소녀를 뒤쫓아 온 것이었다.
페리는 그녀가 장을 보러 다닐 때 마다 빵이나 음식 같은 것을 챙겨주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항상 괜찮다는 말로 거절했었지만, 그는 항상 많은 양을 샀기에 남을 것이라며 소녀에게 주고는 했었다.
그랬던 그가 소녀를 가장 먼저 범하려고 다가서고 있었다.
페리가 소녀에게 점점 다가설수록 소녀는 절망감을 느끼며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저 어떻게 해요… 흐흐흑.’
세상이 끝나버릴 것 같은 절망 속에서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 아버지였다.
페리의 손이 그녀에게 닿으려던 그 순간!
피이익!
스팟!
“끄아아아악!”
“누구냐!”
갑자기 무엇인가가 날아와 페리의 손을 뚫고 바닥에 박혔다.
페리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그의 손을 뚫고 지나간 것은 바로 작은 나뭇가지였다.
페리와 함께 온 두 병사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지만 그들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나 너희 같은 파렴치한들이 있기 마련이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급히 달려온 라이안이었다.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 병사들은 위를 쳐다보았다.
라이안은 아주 편한 자세로 나뭇가지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웬 놈이냐! 우리가 자이라 영지의 병사라는 것을 모르고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죽이고 싶으면 한 번 덤벼보시던가?”
“이익, 당장 내려와라! 네놈의 목을 잘라주마!”
“내가 바보냐? 목을 자른다는데 내려가게?”
“이 자식이!”
페리는 상처 입은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나머지 병사 중 하나는 나무에 올라가 라이안을 잡으려고 했고, 아래에 남아있는 병사는 라이안이 뛰어내릴 것을 염두하고 라이안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언제든지 뛰어내리기만 하면 베어버리겠다는 심사인 듯했다.
나무로 올라온 병사의 검이 라이안을 찌르려던 찰나 라이안이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죽어라!”
아래에 있던 병사가 라이안이 떨어지는 곳을 겨냥해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당할 라이안이 아니었다.
“훗.”
라이안은 뛰어내리며 수강을 만들었고 날아오는 검을 매끈하게 잘라버렸다.
스걱!
“헉!”
검이 잘린 병사가 놀라기도 전에 라이안이 수강을 일으킨 손으로 가른 나무가 한쪽으로 넘어갔다.
뿌지직!
나무가 잘린 방향으로 기울어지며 넘어가자, 나무에 올라가 있던 병사가 당황하며 뛰어내렸다.
“으아악!”
하지만 그 병사는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으로 뛰어내렸기에 나무를 피하지 못하고 깔려버렸다.
“아, 안 돼! 으아아악!”
쿠궁!
검이 잘린 병사는 다리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마…마법사!”
수강을 처음 본 그는 라이안이 만든 수강이 마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 살려줘! 으아아아!”
그러고는 성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페리 또한 그를 따라 도망쳤다.
“같이 가!”
하지만 라이안은 그들을 쉽게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너희가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면 내가 곤란해져.”
라이안은 곧 주위에 떨어져 있는 돌을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튕겨 도망가는 자들에게 날렸다.
퍽!
그들에게 날아간 돌은 정확히 그들의 사혈에 부딪쳤다. 뛰어가던 그들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곧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즉사였다.
쓰러진 나무를 바라본 라이안은 나무에 깔린 자도 역시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흡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세 명의 병사를 죽인 라이안…….
이를 목격한 소녀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괜찮아?”
“사, 살려주세요. 집에 편찮으신 아버지가 계세요. 제가 죽으면 아버지께서는 굶어 죽으실 거예요. 제발…….”
소녀는 라이안이 다가갈수록 더욱 움츠려들었다. 이를 바라보는 라이안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했다.
라이안은 소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뒤 자신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덮어주었다.
“난 너를 헤치려는 게 아니야. 그러니 그렇게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단지 저들이 너에게 하려던 못된 짓을 막으려 했던 것뿐이야. 내말 알겠니?”
부드러운 라이안의 음성을 듣고는 단단히 겁에 질려있던 소녀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절 살려주실 건가요?”
“휴… 아무 짓도 하지 않아. 걱정하지 마. 이름이 뭐지?”
“메르지아라고 해요.”
“메르지아… 참 예쁜 이름이구나.”
그 때 멀리서 라이안의 친구들이 달려왔다.
“라이안, 무슨 일이야!”
“라이안 오빠, 괜찮아요?”
오던 중 시체를 확인한 에나가 라이안의 안부를 물었다.
사실 드래곤이 아닌 이상 라이안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는 없지만 에나는 라이안의 신변이 걱정됐다.
“응, 난 괜찮아. 에나야, 우선 이 아이 좀 챙겨줄래? 너무 겁을 먹은 것 같아.”
“네, 알았어요.”
에나는 곧 메르지아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괜찮니?”
“네, 고마워요…….”
루시 공주가 메르지아를 보며 라이안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어디에나 나쁜 사람은 존재하는 법이죠. 저기 쓰러져 있는 두 사람 보이죠?”
“네, 문장으로 봐서는 자이라 영지의 병사들이 분명해요. 라이안 님이 죽이신 건가요?”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을 돌려보내면 우리의 행로가 적에게 발각되기 때문에… 그리고 저들이 메르지아를 겁탈하려고 하더군요.”
“아…….”
루시 공주는 메르지아와 죽어있는 병사들을 번갈아 본 후 입을 열었다.
“잘하셨어요. 저런 인간들은 죽어 마땅해요.”
루시 공주는 여자를 함부로 겁탈하려고 했다는 말에 약간의 증오심이 생겼다. 라이안 또한 그녀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느꼈다.
헤인드와 디로안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시체에게 다가가 우거진 숲으로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라이안은 그것을 말리며 말했다.
“헤인드, 디로안, 시체들을 이리로 가져와 줘. 그들이 실종된 것을 안 병사들이 개를 이용해 그들을 찾을 수도 있어.”
“어쩌려고 그러는 건가?”
“내가 알아서 할게.”
라이안은 그들에게 살며시 미소를 지어주고는 외쳤다.
“노움 소한!”
부그그그그!
라이안이 외치자 순식간에 땅을 통해 난장이 돌인형 같은 것이 생겨났다.
“아, 정령!”
정령을 처음 보는 루시 공주는 엄청나게 놀라며 라이안을 쳐다봤다.
“그, 그랜드 마스터에 정령사라니…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요?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익숙해져 있는 헤인드와 디로안이 시체를 가져오며 말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그거 좋은 방법이군. 땅의 정령의 힘으로 묻어버리면 며칠은 찾기 힘들 거야.”
라이안은 일행들이 보는 앞에서 노움에게 부탁했다.
“노움, 이 시체들을 땅 속 깊숙이 묻어주길 바래. 그리고 저쪽 나무 아래에도 하나 더 있으니 그것도 같이 묻어줘.”
노움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땅속으로 사라졌다. 곧 땅이 갈라지며 시체들이 땅속으로 말려들어갔다.
속도가 무척 느리기는 했지만 시체를 없애는 데에는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시체들은 사라지고 곧 시체들이 있던 땅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말 감쪽같이 시체를 매장한 것이다.
시체를 모두 매장한 노움은 다시 라이안의 앞에 나타났다.
“고마워, 이제 돌아가도 좋아.”
라이안의 말에 노움은 알겠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땅속으로 사라졌다.
루시 공주는 아직도 멍할 뿐이었다.
라이안은 메르지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메르지아, 넌 자이라 영지에 사니?”
“네…….”
“그래… 그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네 집까지 데려다 줄게. 어차피 우리도 여행 중이고 자이라 영지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했거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일행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라이안은 시체가 묻혀 있는 자리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지…….’
“라이안, 뭐 해!”
디로안이 걸음을 멈추고 있던 라이안을 불렀다.
“어! 갈게.”
그렇게 묻혀있는 시체들을 뒤로 하고 자이라 영지로 이동하는 일행들이었다.
자이라 영지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라이안은 이해가 가지 않아 다른 친구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이곳은 어떻게 보면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인데 어째서 유동인구가 이렇게 많은 거야?”
디로안이 대답해 주었다.
“몬스터의 초원과 붙어있는 다른 쪽의 영지와는 달리 이곳은 상당히 견고한 벽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네. 데르미크 남작은 그러한 안정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보였고 상당한 크기의 상권을 구축할 수 있었지. 가장 외곽에 있는 영지이지만 자이라 영지는 히매인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권을 자랑하고 있다네.”
“흠… 점점 데르미크라는 자의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그런데 그 견고하다는 벽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큼 큰 건가?”
“아마도 비슷할 것이네.”
라이안이 보고 있는 성벽은 히매인 왕국의 왕성보다 견고해 보일 정도였다.
‘상당한 돈을 들였군. 그 벽을 만들 때 든 시간과 사람들의 희생 또한 만만치 않았을 텐데…….’
성 문 앞에는 약 십여 명의 병사가 영지성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라이안 일행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라이안은 한 상인 일행이 살며시 몸으로 가리며 병사에게 돈을 쥐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라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썩었군.”
이제 라이안 일행의 차례가 돌아왔다.
“무슨 일로 자이라 영지로 온 것인가?”
눈이 가늘고 마른 체격의 병사가 라이안 일행을 훑어보며 묻자 넉살좋은 헤인드가 그 말을 받았다.
“헤헤, 저희는 용병들입니다. 식량과 식기품을 충당하려고 영지에 들르는 것이지요.”
“얼마나 있을 작정인가?”
헤인드는 하늘을 보며 생각하는 척하며 말했다.
“한… 이삼일 정도 있을 예정입니다. 모두 여행 때문에 상당히 지쳐있어서요.”
“모두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라.”
병사의 말에 라이안과 루시 공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안은 신분증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보여줄 수 없었다.
특급 용병은 대륙 전체를 따졌을 때 단 한명…….
바로 검은 사신만이 특급 용병패를 소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현재 미칼투 대륙 전체가 라이안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루시 공주는 미처 신분증을 만들지 못했다.
헤인드와 디로안 그리고 에나와 라드이라고 용병패를 꺼내 순서대로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 검문이 상당히 삼엄하군. 이러면 곤란한데…….’
그러한 생각을 하며 할 수없이 나서는 라이안이었다.
“저기… 잠시…….”
하지만 병사는 메르지아를 먼저 알아봤다.
“넌 메르지아가 아니냐? 그런데 옷차림이…….”
병사는 메르지아의 옷차림이 이상하자 라이안 일행 전체를 하나하나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마치 라이안 일행이 메르지아에게 몹쓸 짓이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분들이 산속에서 위기에 처한 저를 구해주셨어요.”
“아… 그래?”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데… 빨리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신분도 거의 확인한 거 같은데… 아버지도 편찮으셔서 빨리 집에 가봐야 해요.”
“그래, 알았다. 어서 들어가거라.”
라이안은 병사에게 최면을 걸려고 했으나 오히려 메르지아에게 도움을 받아 다행이라 여겼다.
안으로 들어서게 된 라이안 일행은 서둘러 묵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들어서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숙소를 찾기가 만만치 않을 듯싶었다.
그런 라이안 일행의 뒷모습을 몇몇 병사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군. 분명 페리가 쫓아갔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산에서 일을 치르고 다른 상단에 팔아버린다고 했는데 버젓이 돌아오다니… 혹시… 저들에게 당한 것은 아닐까?”
“우선은 증거가 필요하니 산 속을 수색해야겠어. 자네, 저 갈색 옷 입은 여자 봤나?”
“그래, 엄청난 미모더군. 그 옆에 붉은 머리 여자도 엄청나게 귀엽더군.”
“남작님께서 좋아하실 거야. 흐흐흐.”
“저 정도면 승진은 따 논 거나 다름없지…….”
그렇게 산 속을 수색해 증거를 찾는 병사들이었다.
라이안 일행은 이러한 상황을 모른 채 편한 휴식처만을 찾고 있었다.
* * *
한편, 하늘에 떠다니고 있는 챠둠과 타미르안 사이에는 진지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난 로드께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네.”
“왜? 무슨 일인데?”
“지난번 발크르스의 소환 마법진이 상당히 마음에 걸리는군. 다른 마왕들은 나와 한둘의 드래곤만 있어도 처리가 가능하지만 발크르스는 만만치 않거든. 그가 소환되면 수많은 인간들은 물론 상당수의 드래곤도 소멸을 면치 못할 것이네.”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마신과 비등한 실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네. 마신 보다 자신이 부족하다 여겨 잠잠하게 있을 뿐이지, 자신이 마신을 넘어섰다고 생각하면 단 번에 마계를 정복할 자라네.”
상당수의 드래곤들이 같이 싸워야 어떻게 해볼 수 있다는 말에 챠둠에게도 발크르스 마왕의 존재가 사뭇 크게 다가왔다.
타미르안은 챠둠의 존재 또한 알려야 할 것 같아 챠둠에게 물었다.
“자네도 같이 가는 것이 어떤가?”
“난 주인님의 신변을 지켜야 해서 가기 힘들 것 같아.”
“이보게, 내가 보기엔 자네의 주인은 아주 강하다네. 드래곤이 아닌 이상 그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이 대륙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네.”
“하지만… 흠… 우선 주인님께 말해보도록 할게.”
챠둠 또한 타미르안과 같이 다니지 않는다면 다른 드래곤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의 편한 생활을 위해서는 드래곤들의 수장인 드래곤 로드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만 했다. 이를 알기에 라이안과 상의하려는 것이었다.
* * *
라이안 일행은 시장을 지나 한참을 돌아다닌 뒤에야 비로소 한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구름을 품은 곳이라… 구름처럼 편하다는 뜻인가?”
타미르안으로 인해 이제 글을 읽을 수 있는 라이안이 간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헤인드가 라이안의 등을 치며 말했다.
“뭘 꾸물대나? 들어가 보자고. 침대에 눕고 싶어 죽을 지경이란 말이야.”
라이안 일행이 여관으로 들어가자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예리한 눈빛으로 라이안 일행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은데?”
헤인드가 주위를 둘러보며 걱정스레 말하고 있을 때 점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저희 ‘구름을 품은 곳’에 잘 오셨습니다. 우선 저쪽 비어있는 자리로 앉으세요.”
초록색의 앞치마를 걸친 그녀의 말이 끝나자, 일행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곧 자신들끼리 대화하기 시작했다.
헤인드와 디로안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점원이 안내한 자리로 가서 앉았다.
“평소와는 뭔가 다른 것 같지 않나?”
“그렇군. 용병들도 몇 있는 거 같은데…….”
헤인드와 디로안이 그러한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라이안이 나서서 말했다.
“뭐, 별일이야 있을라고. 그리고 메르지아는 같이 식사부터 하자. 괜찮겠지?”
“네… 아버지가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잠깐 밥만 먹는 건데 뭘. 식사 다 마치고 나면 내가 직접 집까지 바래다줄게.”
“네… 고마워요.”
가까운 사람이라 느꼈던 이에게 심한 일을 당한 메르지아… 그래서인지 오늘은 집에 혼자 가는 것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아마도 한참동안은 돌아다닐 때 조심하게 될 것 같았다.
헤인드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배고픈데 얼른얼른 시키자. 자, 자. 뭐들 먹을 거야?”
“뭐, 간단히 마밀론 빵과 스프로 시작해서 오리고기와 비사켓(킹크랩 종류로 미칼투 대륙의 언어다)을 시키지?”
“비사켓 좋네요. 간만에 먹어 보는데요?”
루시 공주도 비사켓을 좋아하는지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역시 헤인드와 디로안은 비사켓이라는 말에 상당히 곤란해 했다.
“비사켓이라… 그건 가격이 너무 센데…….”
비사켓이라면 웬만큼 산다는 집의 몇 달치 생활비와 맞먹는 가격으로 금화 한 개나 됐다.
일반 가정이 스무 개의 은화로 한 달을 버틸 수 있으니 비사켓의 가격은 일반 가정의 다섯 달치 생활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헤인드와 디로안은 단지 가난한 용병일 뿐이었기에 그러한 음식을 단지 한 끼 식사로 날려 보낸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그 때 루시 공주가 나서며 말했다.
“음식이나 여행경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요. 아버지께 상당한 보석을 받았고 금화도 서른 개나 있어요. 이것 보세요.”
루시 공주가 자신의 가죽주머니를 펼쳐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가죽주머니에는 평생 볼까 말까한 보석과 금화가 가득했다.
“헉!”
“이봐요. 루시… 어서 숨겨요.”
헤인드과 디로안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며 루시의 가죽주머니를 얼른 닫았다.
“왜 그래요?”
루시 공주는 의아했다.
디로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휘유우… 루시, 지금 주위를 둘러봐요. 사람들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돼 있는지.”
루시는 디로안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루시의 가죽주머니에 고정되어 있었다.
엄청난 금액의 돈을 본 그들의 눈은 벌써부터 탐욕으로 가득했다.
루시 또한 그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으나 등골이 서늘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실수를 한 것인가요?”
“우선은 날파리들이 조금 꼬이겠네요. 후후.”
라이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헤인드는 조금 걱정됐다.
“쉽게 볼 일은 아니라네, 라이안. 혹 이러한 사실이 소문이 되어 퍼지기라도 한다면 결국은 꼬리를 잡힐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엄청난 금액을 소지하고 다니는 아름다운 여성…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귀족의 모습과 같으니 주위에서 루시의 정체를 알려고 하는 자들 또한 상당수 있을 것이라네…….”
헤인드의 말을 들은 디로안이 턱에 손을 대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군. 도둑길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빼앗으려고 할 것이고, 정보길드에서는 우리의 정체를 밝히려고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겠군.”
그들의 말을 들은 루시 공주는 순간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요. 이런 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루시 공주가 너무도 미안해하자, 디로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휴우우… 뭐 어쩔 수 없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할 것 같군요.”
헤인드와 디로안의 설명을 들은 라이안은 곰곰이 생각했다.
‘도둑길드라… 이전 세계의 조직폭력배들과 같은 건가? 이거 잘만 이용하면 상당히 편해질 수도 있을 것 같군. 좋아, 내가 먹어주지.’
“도둑길드와 정보길드라… 후후, 그거 재밌겠군.”
“무슨 소린가?”
디로안이 라이안의 말에 불안함을 느끼며 물었다.
“후후, 갑자기 아주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거든. 디로안의 말대로 최대한 이곳을 빨리 빠져 나가기보다는 오히려 계획보다 오래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겠어.”
“뭘, 어쩌려고 그러는 겐가? 도둑길드와 정보길드는 전 세계 에 퍼져있다네. 국가라고 한들 그들을 쉽게 건드리지는 못한다는 말일세.”
“어디서든 어떤 때에서든 경쟁 업체는 생기기 마련이야. 내가 그들 하나하나를 먹어서 경쟁을 하고 결국에는 그들 전체를 내 것으로 만든다면 난 어디서든 이 대륙 전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을 하는 라이안이었다.
‘대륙 전체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반면 우리의 소식을 다른 곳이 알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을 거 같거든. 헤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기는 왜 안 돼?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야.”
“휴우… 아무래도 자네로 인해 이 미칼투 대륙이 상당한 혼란에 빠지겠군.”
라이안 주위에 앉아있는 친구들은 라이안의 말은 정말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이안이 그런 일을 하겠다고 하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기도 했다.
누가 감히 그랜드마스터인데다가 사대정령까지 모두 부릴 수 있는 상급 정령사를 상대한단 말인가…….
드래곤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결국 비사켓은 주문되었고 마밀론 빵과 스프를 먹고 있는 사이 오리고기가 나왔다. 일행들은 간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앙, 너무 맛있어요!”
에나는 정말로 행복한 듯 오리고기를 씹으며 감미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헤인드와 드로안은 이상하게도 오리고기를 몇 번 먹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비사켓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비사켓은 가격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양 또한 상당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속살은 녹아내리는 듯 부드럽고 고소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헤인드와 디로안은 비사켓이 별미 중에 별미라는 말만 들었을 뿐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그들이 어디서 비사켓을 맛볼 수 있었겠는가?
한참이 지나서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붉은색 비사켓이 주방장의 손에 들려 식탁에 올려졌다.
주방장은 그 무게 때문에 무척이나 힘이 든 듯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으차아! 휘유우… 정말 비사켓을 찾는 사람이 가끔은 있단 말이야. 자네들 정말 운이 좋은 거라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우리 가게에도 어쩌다가 한 마리정도 가져다 놓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거든. 그건 그렇고, 자네들은 돈이 정말 많은가 본데? 보기에는… 용병으로 보이는데 말이야. 실력들이 좋은가봐?”
용병들 중에서도 익스퍼드의 실력자들은 상당한 돈을 벌기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헤인드가 넉살좋게 대답했다.
“아이고, 돈이 많기는요. 비사켓이 정말 일품이라는 말에 한 번이라도 먹어보려고 몇 달을 죽어라고 일했는걸요. 그게 오늘이고요.”
“하하하, 비사켓의 맛이 정말 일품이기는 하지. 어서 들어보게나. 정말 비사켓의 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먹게 될 거라네.”
“스르르럽. 그럼 한 번 먹어 볼까?”
또각!
헤인드가 침을 삼키며 먼저 비사켓을 다리를 자른 후 칼로 그 껍데기까지 잘라 살을 발라냈다. 그리고 특유의 소스에 그 살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
헤인드는 비사켓이 이토록 맛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 감미로운 맛에 빠져든 헤인드의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그런 헤인드를 보고는 모두가 비사켓을 맛보기 시작했다.
“와! 이거 정말 고소한데?”
“그러게요. 너무 맛있어요.”
디로안과 에나 또한 비사켓의 맛에 반한 듯 점점 빠르게 손을 놀렸다. 신관인 라드이라만이 신관답게 얌전히 손을 움직였다. 루시 공주도 역시나 귀족답게 식사를 했고 라이안은 그저 그런 듯 식사를 했다.
라이안이 그러한 행동을 한 이유는 최대한 주위의 시선과 행동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라이안의 기감(기를 통해 주위를 탐색할 수 있는 감)에 계속해서 거슬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하에도 사람이 있군.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까?’
천리지청술을 사용하는 라이안의 귀로 음성이 점점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글쎄요. 어느 귀족가의 자녀를 호위하는 용병들인 것 같았습니다.”
“아까 갈색 옷을 입은 금발의 여자가 상당한 금액의 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봤나?”
“예, 대충 보기에도 보석 하나하나가 금화 오십 개의 가치를 가진 듯 보였습니다. 그것들이 약 십 수개니… 칠백 금화 이상은 되리라 생각됩니다.”
“흐흐흐, 오늘 상당한 횡제를 하게 생겼군. 그래, 용병들의 실력은?”
“기껏해야 아직 마나조차 느끼지 못하는 풋내기들뿐이었습니다.”
“확실하겠지?”
“이미 마법사로 확인해 보았습니다. 붉은 머리의 한 여성에게서만 마나의 흐름이 보인다고 하니 아마도 마법사인 듯합니다. 그녀만 조심하면 별일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윗사람으로 생각되는 남자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아직 젖내 나는 어린 것이니 기껏해야 1~2서클이겠지.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여자들은 상당히 좋은 가격으로 팔릴 것이야. 흐흐흐.”
아랫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어려운 말인 듯 뜸들이며 말을 꺼냈다.
“그전에… 제가 좀 맛보아도 되겠는지요?”
“흠… 상처 없이 조심히 다뤄야 한다.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면 안 되니 말이야.”
“크흐흐, 감사합니다.”
라이안은 자신이 있는 이 여관이 바로 도둑길드의 소굴임을 알 수 있었다.
‘도둑질은 참을 수 있다만… 에나와 루시 공주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참을 수 없지…….’
식사를 마친 라이안 일행은 바로 방을 잡았다.
물론 메르지아는 라이안이 직접 데려다 주고는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루시와 에나가 같은 방을 사용했으며 라이안과 그 외의 친구들은 큰 방 하나를 함께 쓰기로 했다.
바로 오늘부터 마나심법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방 안에 모인 남자들은 라이안의 주위로 둘러앉았다. 라드이라 또한 뭔가 관심이 있는지 라이안의 옆으로 앉았다.
라이안은 그들을 바라보며 한 가지 당부를 했다.
“너희들에게 마나를 모으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에 앞서 한 가지 당부할 것이 있으니 명심해 줬으면 좋겠어. 먼저 너희에게 가르쳐주는 마나심법은 너희들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야. 만약 이것이 너희 말고 다른 이들에게 퍼져 나간다면 대륙은 피의 폭풍이 불어 닥칠 거야.”
라이안의 피의 폭풍이라는 말에 모두 침을 삼켰다.
“힘은 파괴를 낳게 되어 있어. 물론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지만, 대부분은 피를 보기 위해 검을 들지.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것은 곧 세상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 그래서 난 너희에게 하나의 금제를 가하려고 해. 물론 팔튼 또한 이를 수락하고 금제를 받았지. 팔튼이 순식간에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너희도 봐서 알겠지?”
그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익스퍼트 중급에서 지금은 소드마스터 중급이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발전이란 말인가.
항상 신중한 디로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라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금제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혹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인가?”
솔직히 디로안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 하여도 힘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 실전에는 차이가 있기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디로안의 물음에 라이안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설마 내가 너희에게 목숨까지 담보로 하는 위험한 금제를 가하겠어? 이거 나를 너무 무서운 사람으로 보는 거 아냐?”
라이안의 말에 헤인드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디로안이 먼저 물어봐 줘서 그렇지 나도 얼마나 그것을 묻고 싶었다고. 그건 그렇고 그 금제라는 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군.”
“하하하, 역시 헤인드는 은근히 겁이 많다니까.”
“이잇! 겁이 많다니! 나 헤인드는 그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용기 있게 싸우는 용병이라고!”
헤인드는 가슴까지 탕탕 치며 말했다.
“그래, 그래… 믿어줄게. 그럼 지금부터 내가 너희에게 마나심법을 가르쳐 주는 대신에 가하는 금제의 내용을 가르쳐 줄게. 처음 말했듯이 내가 가하는 금제는 마나심법이 다른 곳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야. 너희가 이 마나심법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경우 마나심법으로 익힌 힘들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지. 이것이 금제의 주된 내용이야.”
라이안의 말을 모두 들은 헤인드가 약간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이거, 이거. 우리를 너무 못 믿는 거 아니야? 서운한데? 설마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겠어?”
헤인드의 서운해 하는 목소리에 라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 헤인드의 말대로라면 내가 무척이나 잘못하는 것이 맞지. 하지만 금제는 마나심법을 단 한사람에게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전제하에 행해지는 것이니 말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단 한 사람에게는 가르쳐 줄 수 있다고?”
“그래, 난 너희를 믿지만 너희들의 자손까지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야. 물론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너희의 자손 중에 나쁜 마음을 품은 자가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 않겠어?”
그제야 라이안의 생각을 눈치 챈 디로안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집안 대대로만 가질 수 있는 힘이라는 게 금제의 내용이군.”
“바로 맞혔어.”
“흠…….”
“흠…….”
이야기가 끝이 나자 헤인드 또한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라이안은 자신들만이 아닌 자신들의 자손까지도 생각해 주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헤인드가 그런 라이안의 마음을 알고는 소리쳤다.
“난, 그런 금제라면 백 번이라도 받겠네!”
“나도 그 금제를 받겠네.”
디로안 역시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가만히 듣기만 하던 라드이라가 라이안에게 뭔가를 묻고 싶어 했다. 라이안이 그것을 눈치 채고는 라드이라에게 물었다.
“라드이라, 왜 그래? 나에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그것이…….”
“뭔데?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봐.”
“저도… 그… 검술을 배웠으면…….”
라드이라의 말에 헤인드와 디로안이 동시에 놀랐다.
“라드이라, 그게 정말이야?”
“라드이라, 하지만 신관은 마나를 같이 배울 수 없잖아?”
라이안도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라이안 자신조차도 신성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을 어떤 종류의 신성력인지도 몰랐으며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또한 몰랐다.
한참을 생각하던 라이안은 라드이라에게 물었다.
“라드이라, 혹시 성기사들은 신성력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 몰라?”
“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러나 라이안은 왠지 신성력도 마나와 같은 어떤 흐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법 또한 심장으로부터 마나를 흘려보낸 대기의 마나와 합쳐져 보다 큰 힘을 내지 않는가?
라이안은 턱에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발상의 전환은 항상 큰 발전을 가져오기 마련이지. 그래, 우선 검술은 라드이라도 배우는 것으로 하자. 물론 문제는 신성력을 어떻게 하면 끌어 쓸 수 있을까 하는 것이겠지만 그 방법은 내가 한 번 알아볼게.”
“감사합니다.”
“에이, 감사는 뭘…….”
라이안은 생각을 정리하며 헤인드와 디로안에게 말했다.
“둘은 내가 앉는 자세로 똑같이 뒤돌아서 앉아.”
“이렇게 말인가?”
“으헉! 이거 어렵군.”
라이안이 역시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처음은 아마도 힘들 거야. 그 정도는 참아야 큰 힘을 얻을 수 있지 않겠어? 자, 내가 너희들의 등을 통해서 마나의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니 너희들은 그것을 반드시 기억해야해. 알아들었지?”
라이안은 곧 그들의 등으로 자신의 마나를 흘려보냈고 그것으로 마나의 길을 일러주었다. 하지만 이전 팔튼과는 달리 그들은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마나의 길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애초에 상당한 마나를 갖추고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과 마나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마나의 흐름을 깨닫는 것은 큰 차이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십이주천을 해야 한다는 라이안의 말을 듣고는 행공을 하고자 마나를 순환시켰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밤이 깊었지만 십이주천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계속해서 행공을 해나가는 그들이었다.
라드이라는 자신도 검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부푼 기대를 품고 잠에 들었다.
라이안은 라드이라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곧 기원을 펼쳤다.
“흠… 지하의 움직임이 많아졌군. 언제 움직이려나?”
라이안은 사악하게 웃으며 그들이 쳐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안은 그들이 언제 올지 몰라 기원을 펼치며 명상에 접어들었다.
근래에 들어서 마법 수련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았기에 타미르안이 넘겨준 마법지식을 판독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물론 그러한 지식들은 모두 라이안의 머릿속에 있었다. 명상수련에 들어간 라이안은 이로 인해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들은 새벽이 되어서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라이안으로 하여금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으니, 라이안으로서는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6서클의 문턱을 이해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라이안의 몸에서는 약간의 희미한 서광이 흘렀으며 심장에는 다섯 개의 고리 주위로 아주 희미한 고리가 하나 더 생성되었다.
라이안은 곧 거친 숨을 내쉬었다.
“푸하! 헉헉헉. 하하하, 드디어 6서클을 만들었구나. 휴우… 이거 생각보다 힘든 걸?”
힘들었다고는 말했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흥겨웠다.
아마도 얼마 후면 6서클 마스터가 될 수 있으리라…….
일반인이 6서클 유저에서 마스터가 되기까지는 무척이나 힘들다. 마나를 키우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마법의 주문을 알기조차 힘들고 그것을 해석하는 데에도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탑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라면 어느 정도 마법의 배열과 주문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6서클 이후부터는 극비의 자료가 된다.
하지만 라이안의 머릿속에는 이미 10서클까지 모두 들어있으니 그 발전 속도가 가히 엄청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