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무서운 여자들과 다가가고 싶은 여자
라이안은 심하게 토라진 얼굴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쳇, 걱정 돼서 보러갔더니 남 험담이나 하고… 시이이…시이이…….”
오크처럼 멍청하다는 말이 상당히 기분 나빴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팔튼과 여행 중 정말 멍청했던 오크들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그런 오크와 비교하다니! 아직도 화가 나네.”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라이안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던 중 여기저기서 몇몇 귀족들이 깨끗하고 멋진 옷들을 입고서 돌아다니는 광경을 보게 된 라이안은 그제야 연회를 가야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차, 연회에 가야 하는구나. 헤인드 때문에 화가 나서 그만 잊고 있었네.”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이동하던 중 라이안은 잘 차려입은 팔튼을 볼 수 있었다.
“어라? 와아! 팔튼, 그렇게 입으니까 또 사람이 달라 보이는데?”
“라이안, 어디 갔다 온 겐가? 한참 찾았는데도 보이질 않아 걱정했다네.”
“그냥, 잠시 헤인드와 디로안을 조금 보고 왔어.”
“아, 그랬군. 하지만 어서 연회에 갈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네. 어서 준비하게나.”
“웅, 알았어.”
팔튼은 라이안의 방으로 같이 걸어가던 중 라이안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자네, 친구들 보고 온 사람 얼굴이 왜 그런가?”
“그게 말이야. 헤인드가 글쎄…….”
팔튼은 라이안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그래서 헤인드를 두들겨 패주고 왔다는 말인가?”
“응, 얄밉잖아.”
“그렇다고 그가 악의가 있어서 자네 험담을 했겠는가?”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그냥 꿀밤이나 한방 먹여주고 말려고 했는데 글쎄 그녀석이 나보고 오크처럼 멍청하다는 말에 욱해서… 너도 알잖아. 우리가 처음 만난 마을에서 만난 오크들 말이야.”
“아, 그 우리를 습격하려고 무거운 돌을 계속해서 들고 있다가 떨어뜨린 오크들 말하는 거군. 흠… 그러고 보니 그때 오크들 지휘하던 놈이 또 생각나는군.”
“큭큭큭, 그러고 보니 팔튼은 오크한테 바보 소리를 들었었지? 하하하.”
팔튼이 순간 정색했다.
“윽! 어디 가서 그 일은 말하지 말게나. 그 일 퍼지면 정말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다네.”
“하긴, 오크한테 바보 소리 듣고 다니는 소드마스터라고 한다면 참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되겠지.”
“이, 이보게. 라이안!”
“알았어. 알았어.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할게.”
“그건 그렇고 자네가 때렸으면 헤인드 그 친구 며칠 고생 좀 하겠군.”
“그렇지 않을걸?”
“무슨 말인가?”
“너에게 마나의 길을 가르쳐 주었듯이 사람의 몸에는 혈이라는 것이 있어.”
팔튼이 생각난 듯 손으로 턱을 만지며 말했다.
“아, 그 마나의 통로를 말하는 것이군.”
“응, 맞아. 헤인드를 점혈법으로 타격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 마나를 보다 쉽게 느낄 수 있을 거야. 현재 그의 몸은 마나가 흐를 수 있는 혈들이 너무 많이 굳어져 있거든. 뭉친 근육을 부드럽게 만져 주었을 때 풀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 거야.”
“흠…….”
팔튼은 순간 놀라운 것이 생각나 버렸다.
‘그러한 방법만 있다면 소드유저에서 소드익스퍼드를 무한대로 만들 수 있단 말이 아닌가…….’
팔튼은 역시나 라이안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라이안이 알고 있는 것이 단 하나라도 타 나라에 퍼진다면 그 나라는 바로 대륙을 휘어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점혈법이라는 것을 히매인 왕국의 소드유저들에게 사용한다면 우리나라는 엄청난 강국이 될 수 있다!’
순간 약간의 욕심이 생기는 팔튼이었다. 하지만 곧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놀라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라이안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며 날 구해준 친구를…….’
그렇게 속으로 자신을 질책하는 팔튼을 앞서 걷던 라이안이 불렀다.
“팔튼, 안 갈 거야? 늦었다며?”
“아, 미안하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한 거야? 무슨 일 있어?”
“아니라네.”
“치, 싱겁기는.”
라이안의 방으로 온 두 사람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안쪽에서 누군가 호되게 혼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가 미쳤구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모른단 말이냐! 이 사실을 그 분이 높은 분들에게 이야기라도 한다면 너희뿐만 아니라 내 목까지도 떨어질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라이안을 이 방으로 안내해 준 중년의 시비가 라이안에게 붙여 준 두 시비를 질책하고 있었다.
“모르겠는데요?”
“뭐라! 이! 응?”
순간 열이 머리끝까지 오르려던 중년의 시비는 그 목소리가 눈앞의 시비들에게서 들려온 것이 아님을 알고는 이상함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라이안과 팔튼을 발견하고 급히 고개를 숙이는 중년의 시비였다.
“아, 오셨습니까? 이 아이들이 라이안 님에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벌은 중하게 내릴 것이니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라이안이 그 말을 들으며 두 시비를 보자 눈치를 보고 있던 두 시비는 기가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별로 화난 것이 없는데 왜 이들을 혼내고 있는지 그게 더 궁금하네요.”
중년의 시비는 오히려 라이안의 말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아느냐?’ 라는 뜻으로 들려왔다.
“그것이… 이 아이들이 라이안 님을 모시지 않고 그만 라이안 님의 침상에서… 잠을…….”
너무도 무례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 중년의 시비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하고 민망해 했다. 하지만 중년의 시비가 예상하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한 것을 왜 이들이 혼나고 있느냐는 말이죠. 제 말은?”
“네?”
의문을 나타내던 중년의 시비에게 다시 라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보세요?”
라이안이 그러한 말을 하자 그와 동시에 팔튼이 라이안의 옆에서 쓰러졌다.
철퍼덕!
“헉!”
팔튼이 순식간에 쓰러지는 것을 본 중년의 시비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놀라고 있는 중년의 시비에게 라이안이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보았듯이 지금 이 사람은 잠을 자고 있어요. 마법의 슬립과 같은 것이라고 보시면 되요. 제가 일부러 다른 볼일을 보기 위해 그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것을 그들의 잘못으로 돌린다면 안 된다는 거죠. 그렇지 않나요?”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는 중년의 시비였다.
“아, 그러셨던 것이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아니에요. 모를 수도 있죠. 그건 그렇고 이제 그들의 잘못은 없는 거죠?”
“라이안 님이 용서하셨다면 그렇습니다.”
“뭐 용서할 것도 없지만 없었던 일로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팔튼 후작께서는…….”
팔튼이 걱정되는지 중년의 시비가 라이안에게 물어오자 라이안은 아래를 보며 지풍을 날렸고 곧 팔튼이 서서히 눈을 떴다.
“응?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잠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팔튼이 일어나자마자 한 말이었다.
그런 그에게 라이안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야 팔튼, 너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서 이런 곳에서 졸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아, 내가 잠시 졸았나 보군. 미안하네.”
팔튼은 뒷머리를 긁으며 일어나자 그곳에 있던 시비들은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풋!”
“풋!”
“푸훗!”
그나마 중년의 시비는 입을 가려 웃어서 그 소리가 달랐지만 팔튼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곧 속으로 이 상황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팔튼이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라이안이 중년의 시비에게 물었다.
“그럼 일은 해결되었으니 전 연회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중년의 시비는 그렇게 문을 통해 걸어 나갔고 남아 있던 두 시비는 라이안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라이안 님 감사합니다.”
“라이안 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야, 감사받을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뭘. 후훗.”
두 시비는 라이안의 고운 마음씨에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았다.
‘이분과 함께라면…….’
‘죽어도 좋아…….’
그때 갑자기 팔튼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 왜 내가 잠을 자게 되었는지 생각이 안 나!”
팔튼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팔튼 모르게 웃어버렸다.
라이안은 두 시비에게 가까이 가며 팔튼이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쉬잇, 이것은 우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알았지? 후훗.”
“넵.”
“넵.”
* * *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장 안에는 이미 많은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잔잔한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연회장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상당히 북적댔다.
귀족들이 이야기 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드래곤 나이츠인 라이안에 대한 이야기였고, 서로가 어떻게 하면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상의하기 바빴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여성들 또한 서로 눈치를 보며 부치지도 않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딸들에게 말했다.
“반드시 너의 남자로 만들어야 한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제가 한 가슴 하잖아요.”
어느 귀부인의 딸은 자신의 가슴을 살며시 손으로 올리며 자랑하듯 어머니에게 말했다.
“호호호, 그래. 넌 이 어미를 닮아 가슴 하나는 크니 걱정 없을 거란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옷을 갈아입고 연회장으로 걸어오고 있던 라이안은 연회장이 가까울수록 점점 닭살이 돋고 있음을 느꼈다.
‘이럴 수가! 패왕철기신공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변하다니. 연회장이 가까울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으로 보아 연회장에 위험한 것이 있는 게 분명해.’
이러한 반응으로 점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라이안이었다.
연회장 한쪽 구석에서는 데브릭 공작과 라핀 후작, 그리고 몇몇 귀족들이 모여서 자신들만의 걱정거리를 의논했다. 그리고 데브릭 공작은 주위를 둘러보며 라핀 후작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핀 후작, 자네를 그가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되는가?”
“데브릭 공작님,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직 그가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니고 하니 중립적 위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번에 후작의 위를 받은 팔튼 후작의 친구라고는 하나 그것은 아직 두고 봐야 알겠지요.”
“하지만 와이파른 후작은 왕당파가 아닌가? 그가 왕당파이면 당연 팔튼 후작도 왕당파가 될 것이며 그 또한 같은 파로 흘러가게 될까 그것이 걱정이군.”
“그것을 막는 것이 저희가 주력으로 해야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흠… 그렇겠지.”
그들의 대화에 주위에 있던 귀족파의 귀족들이 모두 심각한 표정이 되어갔다.
점점 왕당파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있었으니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까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그때 한쪽에서 간테츠 백작과 피에른 남작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데브릭 공작과 라핀 후작에게 인사했다.
“데브릭 공작님과 라핀 후작님을 뵙습니다. 그간 별고는 없으셨는지요?”
데브릭 공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근엄하게 웃으며 간테츠 백작을 반겼다.
“이전에는 제대로 인사도 못했군. 간테츠 백작.”
드래곤의 소동으로 인해 어전을 빠져나가기 바빴던 귀족들이었다.
“모두가 그놈 이야기로 가득하군요.”
그때 데브릭 공작은 떠오른 것이 있었는지 간테츠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간테츠 백작 자네가 최전방에서 그와 같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나?”
“어흠, 뭐 그렇지요.”
“그렇다면 자네가 그와 같이 전쟁에서 싸운 전우로서 그를 포섭함이 어떻겠는가?”
간테츠 백작은 요즘 좁아지고 있는 자신의 입지를 높이고자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의 최전방으로 갔던 것이었다.
처음 말에 약간 어깨가 으쓱하던 간테츠 백작은 라이안의 포섭을 맡으라는 말에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데브릭 공작은 그런 간테츠 백작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역시 정치계의 거물로 녹록치 않은 자였다.
“혹, 자네. 그와 다툼이라도 있었는가?”
데브릭 공작의 물음에 간테츠 백작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것이… 서로 상당히 꺼리는 상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하단 말인가?”
“그것이… 이전에…….”
자신과 라이안이 좋지 않은 관계가 된 상황을 이야기하자 데브릭 공작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가만히 두고 볼 수밖에.”
“죄송합니다.”
“아니네, 자네가 죄송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데브릭 공작의 속마음은 달랐다.
‘내 너의 시기심이 너의 발목을 잡을 줄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 쯧쯧쯧. 평범한 능력에 그토록 시기심까지 많아서야 어찌 정치계에서 크게 된단 말인가?’
데브릭 공작으로서는 간테츠 백작을 부리기는 하되 키워줄 마음은 전혀 없었으니 그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팔튼 콘 포르베 후작님과 라이안 님이 드십니다.”
라이안이라는 이름을 들은 모든 귀족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입구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오는군.”
“흠…….”
팔튼이 먼저 들어서고 그 다음 라이안이 모습을 보였다.
깔끔한 예복을 차려입은 라이안의 모습에 그곳에 있던 귀족가의 여식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갈 정도로 라이안의 모습은 빛이 나는 듯 대단했다.
심지어 딸을 앞에 둔 귀족의 부인들조차 마음 한구석에 설렘이 느껴졌다.
“대단해, 저렇게 멋있을 줄이야!”
“소문 이상이야…….”
“꼭 인형 같아…….”
이미 라이안의 모습에 푹 빠져버린 귀족가의 여식들이 서로 라이안에게 다가가려는 것을 어머니들이 겨우 붙잡았다. 데브릭 공작의 딸인 델리아나 또한 다른 귀족의 여식들과 별다르지 않았다.
“얘야, 정신 차려라. 귀족의 체면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어머니, 이러다 다른 여우같은 것에게 저분을 빼앗기면 어떻게 해요?”
델리아나의 말에 데브릭 공작의 부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보거라, 그들 또한 함부로 노골적으로 다가가기는 힘들 것이다. 노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의 곁에서 눈에 드는 것이 더 중요하니 연회의 흐름을 보거라. 적당한 때에 먼저 춤 신청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니더냐?”
“네, 알겠어요. 어머니.”
역시나 데브릭 공작의 부인인 만큼 예리한 심계를 가진 그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깊은 심계가 없었다면 어찌 데브릭 공작과도 같은 자를 부군으로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라이안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위축감이 들었다.
‘왜 이러지? 내가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상함을 느낀 라이안이 주위를 둘러보았고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며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윽, 그렇구나. 저 여인들의 눈빛이 그 원인이었군.’
주위에 있던 여인들 모두가 라이안을 가장 맛있는 먹잇감으로 생각하며 쳐다보고 있었으니 감이 민감한 라이안으로서는 별로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래서 내가 사람 많은 곳이 싫다니까. 에휴…….’
하지만 라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노리는 여성들의 마음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똑같은 모양이구나. 나 역시도 그녀를 찾고 있으니…….’
라이안이 생각하는 그녀는 바로 루시 공주였다. 정원에서 그녀와 헤어지고 난 후로 잠시도 그녀의 모습이 기억에서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 수 없는 반응으로 인해 궁금증에 그녀가 생각나고는 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서로 편한 대화를 마치고 나니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충동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라이안이었다.
라이안은 그녀를 찾고자 연회장 전체에 기원(기를 주위로 퍼트려 자신이 찾고자 하는 기를 찾는 방법)을 펼쳤다.
라이안이 퍼트리는 기의 원은 서서히 그 크기를 늘려갔고 곧 연회장 전체를 감싸게 되었다. 탐색을 마친 라이안은 곧 기원을 거두며 아직 루시 공주가 연회장에 오지 않음을 느끼고는 약간 아쉬워했다.
그때 팔튼이 라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지금 무엇인가 마나를 공명시킨 것인가?”
“어? 느꼈어?”
“으음… 정확히 느꼈다고 하기는 뭐하고 자네 몸에서 마나의 파장이 주위로 퍼져나갔다는 것만 조금 알 듯 하군. 내가 잘 못 느낀 것인가?”
“아냐, 정확히 맞혔어. 와아아, 팔튼도 상당해졌는데? 그런 것도 감지할 수 있게 되고 말이야.”
“뭐, 다 자네 덕분이 아닌가?”
“아니야, 팔튼. 그것은 모두 네 노력으로 해낸 거야. 난 설마 네가 변의 깨달음으로 그러한 기술을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아, 천환을 말하는 것이군. 자네가 죽은 줄로만 알고 복수심에 불타 미련하게 수련을 할 때가 있었다네. 그때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수련을 하다가 그만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쓰러져 버린 적이 있었지. 그 때 자네를 생각하며 태양을 보았는데 저물어가는 태양에서 나오는 빛줄기가 내 검을 비추며 여러 가닥으로 내 눈에 들어오더군. 어떻게 보면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네. 그것을 보고는 하나의 오러를 네 개로 나누어 벨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일세.”
라이안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팔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팔튼 너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냥 수직 베기가 아닌 삼재검법의 뜻을 생각하여 변의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것은 하나의 검술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이곳의 마나가 풍부해서 가능한 일인 것 같아. 그만큼 마나의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거든. 내가 있던 세상에서는 기의 분포도가 많았던 시대에서도 그러한 경지를 얻으려면 화경에는 도달해야 했었는데… 하여간 정말 대단한 성과인 것 같아. 축하해, 팔튼.”
라이안이 자신의 성과에 대하여 칭찬을 해주자 팔튼은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고맙네, 라이안.”
팔튼은 다른 곳을 바라보는 라이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네가 없었다면 내 어찌 이러한 경지를 꿈이라도 꿀 수 있었겠는가.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워…….’
팔튼은 라이안이 했던 말을 다시 기억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가끔 라이안의 한마디 한마디가 심오한 뜻을 가리킬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팔튼은 번개를 맞은 듯 떨며 눈을 크게 떴다.
‘마나의 분포도가 많고…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다라… 흐름… 대기에 흐르는 마나…….’
그때 귀족들이 와인을 따르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물은 아래로 떨어지지. 강물의 물도 하나의 흐름을 통해 흘러가고…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다는 것이지 않은가! 흐름… 길… 검을 대기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대로 움직인다면!’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했으나 점점 또렷이 맑아지는 느낌 또한 같이 밀려왔다. 생각은 수없이 많아졌지만 아파 와야 할 머리는 점점 시원해졌다.
라이안은 팔튼에게서 흔들리는 마나가 생성되어 일렁이고 있음을 알고는 살며시 웃었다.
‘이 녀석 또 성장하려고 하는 것이군. 자질 또한 대단하며 기골도 마치 무를 위해 태어난 듯하니, 작은 깨달음으로도 큰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또 한 번 축하해, 팔튼.’
라이안은 남들이 느끼지 못하도록 팔튼의 호법을 섰다. 집중하고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팔튼의 몸에 부딪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팔튼의 몸 주위에 일렁이던 마나는 서서히 안정감을 찾았고 서서히 눈빛도 돌아오고 있었다.
희열감을 느끼고 있던 팔튼은 바로 라이안을 바라보았고 무엇인가 급히 말하려고 했다.
“라이안, 난…….”
하지만 팔튼이 말을 다 하기 전에 라이안이 그 말을 잘랐다.
“알고 있어, 놓치고 싶지 않으면 빨리 가. 한시가 급하잖아?”
“알겠네!”
팔튼은 갑자기 소리 높여 말하고 입구를 향해 뛰어나갔다.
다른 귀족들 역시 팔튼의 목소리를 들었고 급히 연회장을 빠져 나가는 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내 곧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바치스 공작각하와 와이파른 후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바치스 공작과 와이파른 후작이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몇몇 귀족들이 그들에게 몰려들며 서로 인사하기 바빴다.
“허허허, 그래. 자네 이번에 딸을 얻었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후작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때로군. 허허허.”
스스럼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보아 같은 왕당파의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든 듯 보였다.
와이파른 후작은 곧 주위를 둘러보며 급히 한 사람을 찾았고 다른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바치스 공작 또한 와이파른 후작과 같은 방향을 보게 되었다.
“아, 이보게들 먼저 이야기들 하고 있게나. 난 잠시 먼저 이야기해볼 사람이 있다네.”
“알겠습니다. 공작각하.”
라이안은 와이파른 후작이 들어올 때부터 그를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와이파른 후작이었기 때문이다.
곧 와이파른 후작이 라이안에게 다가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여기 있었구나. 라이안.”
“아버님은 점점 멋있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
“허허허, 네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느냐? 하긴, 나도 이렇게 옷만 잘 갖추어 입으면 아직도 여러 여자 만날 수 있지. 암.”
“엇! 그 말씀을 앞으로 뵙게 될 어머님께 해드리면 제가 큰 이득을 취할 수 있겠는데요?”
“헛! 허험. 라이안아 좀 전의 말은 평생 기억에서 지워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러한 말이 자신의 부인에게 들어갔을 경우를 상상하는지, 와이파른 후작이 잠시 팔을 부르르 떨며 라이안을 달랬다.
“당연하지요. 설마 남자들끼리의 대화를 다른 곳에 가서 하겠어요? 헤헤.”
“허허허, 그렇지. 남자들의 대화는 남자들만 알고 있어야 쾌적한 법이지.”
라이안과 와이파른 후작이 정다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바치스 공작이 그 사이에 들어섰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나게 하는가? 나도 껴주면 안 되겠는가?”
바치스 공작은 라이안과는 조금 껄끄러운 점이 있는지 와이파른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안 되겠습니까? 어서 오시지요.”
바치스 공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생각을 마쳤는지 라이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에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국왕전하의 위엄을 지켜드리고자 했던 행동이었으니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라이안은 갑자기 존대로 말하는 바치스 공작의 행동이 어색했으나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드래곤 나이츠에 대한 대우는 일국의 왕과도 같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크호른 왕 또한 라이안에게 존대를 하고 있지 않은가.
“별로 담아두고 있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기에도 공작께서는 자신의 맡은 바 의무를 행하신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을 낮추어 주심이…….”
“아, 그것은 국왕전하와도 합의를 본 것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이유가 있거든요. 국왕전하와도 서로가 같이 존대를 하기로 합의를 했으니 공작님과도 이와 같은 합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심이 좋겠지요.”
그때 와이파른 후작이 이러한 대화를 듣고는 무척이나 어색해 했다.
“그렇다면 나는… 아니, 저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어험.”
국왕과 공작이 존대하는 존재에게 갑자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 와이파른 후작이었다.
“하하하, 이거 왜 이러세요.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저의 의부님이나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서는 저에게 존대를 하실 필요가 없지요. 지금까지 했던 대로 대해 주시는 게 제게는 가장 편하답니다.”
“허허허, 역시 그렇겠지? 잠시 혼란스러웠단다. 어험.”
와이파른 후작은 라이안에게 말을 놓으면서도 살짝 바치스 공작의 눈치를 봤다. 바치스 공작 또한 그것을 알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눈치는 왜 보는 겐가? 설마 날 그런 것 가지고 자네에게 억하심정을 가질 사람으로 보이는 겐가?”
“아, 아니지요. 설마 그러시겠습니까? 어험.”
“아니, 이 사람이 그래도?”
바치스 공작의 말에도 근근이 곁눈질을 하는 와이파른 후작이었고, 이내 곧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허허허.”
“허허허.”
그렇게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는 세 사람은 연회장 안에 있는 귀족들의 시선을 잡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멈추었다.
와이파른 후작이 라이안을 보며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들어올 때 팔튼이 어딘가 급히 뛰어 나가더구나. 그녀석이 애비도 못 알아보고 뛰어갈 아이가 아닌데 그러한 행동을 보이다니 영문을 알 수 없구나. 라이안, 네가 팔튼과 함께 연회장에 있지 않았느냐?”
바치스 공작 또한 그것이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렇군요, 팔튼 후작은 절대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 뭔가 아는 것이 있으신지요?”
두 사람의 물음에 라이안은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되는데요?”
라이안의 말에 두 사람은 상당히 놀랐다.
“당연한 거라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
“당연한 것이라니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라이안이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치스 공작님?”
“네, 말씀하시지요.”
“혹, 공작님이시라면 벽을 한 단계 넘을 수 있는 밧줄이 눈에 보였을 경우 어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서둘러 그 밧줄을 잡고 벽을… 헛! 그렇다면!”
와이파른 후작 또한 그 말을 이해하고 크게 놀라워했다.
“라이안아, 그 말이 정녕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가 다음에 우리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마스터 중급 이상의 경지를 이룬 이후일 것입니다.”
와이파른 후작은 크나 큰 황홀감에 잔잔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자식의 성취에 기뻐하며 신에게 감사했다.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바치스 공작 또한 히매인 왕국의 복이라 생각하며 진정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와이파른 후작, 축하하오. 진정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공작각하…….”
와이파른 후작의 목소리는 조금 가늘어지는 듯했다. 아마도 체면 때문에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이리라.
라이안은 그런 와이파른 후작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꼭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구나.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행복함을 느끼며…….’
모두가 서로 죽이 맞는 사람들과 모여 있을 때 크호른 왕과 왕비, 그리고 루시 공주가 마지막으로 연회장에 입장했다.
“국왕전하께서 드십니다. 모두 정숙하여 주십시오.”
“왕비전하께서 드십니다.”
“루시 공주님께서 드십니다.”
크호른 왕이 앞서서 붉은 카펫 위를 걸었고, 그 뒤를 왕비와 루시 공주가 따랐다. 루시 공주가 입장하자 귀족가의 젊은 청년들이 루시 공주만을 쳐다보며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푸른 하늘과 같은 색깔의 날개와 같은 루시 공주의 드레스가 모든 귀족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와도 같았으니 그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넋을 잃지 않겠는가.
라이안 또한 루시 공주의 모습에 빠져 다른 귀족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밝은 금빛 가루가 루시 공주에게만 떨어져 내리는 듯 그녀만 눈에 들어왔으니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순간 냉정함을 잃은 라이안은 심호흡을 하며 혈기공을 운기했고 연회장은 시원한 마나의 바람이 불었다.
루시 공주는 왕좌에 다다를 때 한 번 느꼈던 그 바람을 기억하며 바람이 흐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라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라이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 공주에게 살며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먼저 왕좌에 앉은 크호른 왕은 자신의 딸인 루시 공주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고 그곳에서 라이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루시 공주까지 자리에 앉자 크호른 왕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처럼 뜻 깊은 날이 우리 히매인에게 다시 올 줄은 정녕 몰랐었소. 모두가 히매인을 위하며 지키고자 했기에 이러한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소. 그리고 우리 히매인 왕국을 도와준 라이안 님께 진정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크호른 왕이 라이안의 이름을 말하자 라이안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잠시 물러나 라이안에게 공간을 내어주었다.
약간의 쑥스러움을 느낀 라이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전하의 복이옵니다. 그리고 모든 병사들과 국민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싸워 이룬 승리가 어찌 저 하나의 도움이겠습니까? 모두가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 승리이지요. 히매인 왕국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국왕전하.”
“허허허, 라이안 님의 겸손함이 저를 더욱 더 기쁘게 하는군요. 이 연회는 전쟁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고자 함도 있지만 라이안 님을 위한 연회이기도 합니다. 부디 즐겁게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크호른 왕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라이안 님께서 우리 히매인 왕국을 지켜주시리라 생각을 하니 천군만마가 몰려온들 두렵지가 않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의 위험과 불안이 없어질 것이니 국민들 또한 라이안 님께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라이안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다.
‘이…이거 불안한데?’
그리고 곧 크호른 왕의 고개가 숙여지며 허리까지 숙여졌다.
“헉!”
순간, 라이안은 경악하며 놀랐고 귀족들 또한 놀라워했다. 하지만 라이안과 달리 귀족들은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국왕이 고개를 숙였으니 자신들 역시 라이안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젠장!’
‘빌어먹을!’
몇 사람은 속으로 욕지기가 치밀었으나 모든 귀족들의 행동은 크호른 왕과 같았다.
한 순간에 한 나라의 높은 모든 귀족들에게 인사를 받게 된 라이안은 벙찔 수밖에 없었다.
‘당했다!’
얼굴을 굳히며 크호른 왕에게 뭔가 말하려던 라이안!
‘지금 말하지 않으면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다!’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오는 한 마디!
“저도 라이안 님께서 저희 히매인 왕국을 지켜주시리라 믿어요.”
루시 공주가 천상의 미소를 이끌고 연회장 전체에 그 미소를 퍼트렸다. 그 미소에 매료된 라이안.
“저만 믿으십시오.”
‘켁! 내가 지금 무슨 말으으으~을!’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었다.
‘안 돼! 이 바보 멍청이! 왜 내 맘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단 말이냐!’
“헤헤.”
‘크윽! 거기다가 멍청한 웃음까지!’
한순간 몸과 영혼이 갈라졌음을 느낀 라이안이었다.
혼란스러움은 금세 걷히고 국왕의 선포로 며칠간 이어질 연회가 시작되었다.
라이안은 잠시 현기증을 느끼며 테라스로 나갔고 난간에 몸을 기대어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내가 왜 그랬지? 원래 나서는 타입이 아닌데, 난. 윽! 왠지 토할 것 같아!’
라이안은 높은 곳에서 아래만 보고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차가운 물이라도 한 잔 마시자는 생각에 뒤를 돌았다.
“헉!”
하지만 다시 뒤를 돌았을 때 그는 멀리 걸쳐 있는 3개의 달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앙! 밖에 여자들이 너무 많아서 나갈 수가 없잖아!”
그랬다. 라이안을 노리는 귀족가의 여식들이 보지 않는 척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라이안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안은 결심했다.
“역시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차라리 병사들 숙소로 가서 헤인드, 디로안과 함께 술이나 먹자!”
잠시 흘러가는 구름이 3개의 달을 살짝 가린 그 순간!
휘익!
라이안의 신형은 이미 테라스에서 사라진 이후였다.
춤이 흘러나오고 루시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귀족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것은 춤을 추기 위함이 아니었다. 라이안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이안 님이 어디 계시지?’
루시 공주는 춤을 신청해 오는 젊은 귀족들의 신청을 정중히 거절하며 라이안을 찾기 바빴다.
‘이상하다. 분명히 이쯤 있었는데… 아! 아까 와이파른 후작님과 같이 있었지?’
곧 와이파른 후작을 찾기 시작한 루시 공주는 멀리서 그를 볼 수 있었고 사람들 사이사이를 지나며 와이파른 후작에게 다가갔다.
물론 또다시 춤을 신청해 오는 젊은 귀족들의 신청을 거절하며…….
한참 바치스 공작과 그 외 왕당파 귀족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와이파른 후작은 가까이 다가서는 루시 공주를 보게 되었다.
“오오, 루시 공주님을 뵙습니다. 어찌하여 저희 노인들만 있는 이곳에 오셨는지요?”
“호호호, 노인이시라니요? 바치스 공작님을 포함해서 이토록 건강한 노인들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허허허.”
“허허허.”
몇몇을 문계귀족을 빼고는 대부분 익스퍼드 중급 이상이었으니 그녀의 말대로, 그들의 능력은 나이가 들었다고 우습게 볼일이 아니었다.
“이거 오늘 저희들의 귀가 횡재를 하나 봅니다. 공주님께 그런 찬사를 다 들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용건이 있으니 오셨겠지요?”
“그것이…….”
루시 공주는 와이파른 후작에게 살며시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라이안 님이 어디 계신지…….”
“아… 그것 때문이었군요. 허허허. 라이안은 좀 전에 테라스로 나갔습니다. 두 번째 테라스로 가보십시오. 그곳에 있을 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루시 공주가 예쁘게 인사를 하고는 뒤를 돌아 라이안이 나갔다는 테라스로 몸을 옮기려는 순간 테라스 근처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없어졌다!”
“안 돼!”
“갑자기 어디로…….”
“찾아야 돼, 찾아야 돼!”
테라스 근처에 있던 몇몇 여성들이 이성을 잃고 여기 저기 둘러보며 연회장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젊은 귀족 청년들은 오늘따라 그녀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몇몇 청년들이 모여 이들의 행동에 대한 의문을 이야기 했다.
디센이라는 귀족 청년이 턱을 만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오늘은 춤을 신청해도 받아주질 않더니 저런 행동이라니…….”
그런 디센의 중얼거림을 들은 그의 친구 패리클이 대답해 주었다.
“자네, 참 눈치가 없군, 그래. 테라스로 나간 사람을 못 보았는가? 테라스로 나간 사람이 바로 드래곤 나이츠가 아닌가? 모두가 그를 잡으려고 저렇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지.”
“흠… 어쩐지…….”
이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귀족들 또한 그 말에 긍정하는 듯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나이츠와 결혼한다면 부귀영화는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저럴 수밖에…….”
하지만 듣고 있던 디센은 그 말에 긍정하지 않았다.
“어흠, 드래곤 나이츠가 대단하기는 하다만 우리 또한 권력이 높아지면 그딴 부귀영화 정도는 충분히 누리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에게 말을 하던 패리클이 허탈한 듯 웃으며 귀족의 여식들이 나간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렇기는 하다만. 생각해보게나. 우리는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권력을 잃을 뻔했지 않는가? 오늘에서야 느낀 거지만 어쩌면 권력이라는 것은 그저 거품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싶네…….”
이를 듣던 디센은 뭔가 그 말에서 의미를 느낀 듯 침음을 흘리며 앞에 있는 패리클을 따라 입구를 보게 되었다.
“흠…….”
루시 공주는 급히 몰려 나가는 귀족의 여성들을 보고는 무슨 일인가 싶어 테라스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루시 공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저 비어 있는 테라스뿐이었다.
그제야 밖으로 나간 그녀들의 반응을 이해한 루시 공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테라스로 나가 밖에 떠 있는 3개의 달을 보았다.
“훗. 인기가 많으시네요, 라이안 님…….”
밤바람을 느끼며 몇 개의 성벽을 넘던 라이안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느낌을 느끼며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하네. 누군가 부른 것 같았는데…….”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다른 성벽으로 몸을 날리는 라이안이었다.
* * *
밤거리를 허무하게 하늘만 쳐다보며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혁마소와 갈천혁이었다.
“허허. 어찌 내가 이토록 어리석어졌단 말인가…….”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가 이해가 가지 않아 한탄하는 갈천혁의 탄성이었다. 그러한 소리를 들은 혁마소가 갈천혁의 옆에서 한마디 했다.
“네놈이나 나나 눈이 뒤집혀 있었던 게지. 좀 더 냉철히 생각해야 했어…….”
“허허. 정운의 시체조차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어딘지도 모를 이곳에서 우리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난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정운은 우리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하지 않단 말이다. 그런 정운이… 그토록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챠둠은…….”
챠둠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았냐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갈천혁이었다.
정운이 죽었다고 하지 않았냐는 말은 차마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울화통이 터지는 혁마소가 땅에 발을 찍으며 소리쳤다.
콰광!
“도대체 그 기계덩어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주인을 잃었다고 해서 자신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니기라도 한단 말인가!”
혁마소의 발은 땅에 움푹 박혀 있었고 그 주위로 혁마소의 발보다 커다란 발자국이 생겼다. 마치 눈길에 발을 강하게 내려찍으면 자신의 발자국보다 크게 발자국이 남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이대로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방도를 찾아 보세나.”
“그래야지…….”
어둠이 깔린 밤인지라 돌아다니는 사람들조차 없어 어디가 어딘지 물을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갈천혁과 혁마소는 적당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낮이라도 되어야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기에…….
겨울날씨인지라 상당히 추웠으나 이미 수화불침에 금강불괴의 경지를 넘어선 그들인지라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어제 잠든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 채 눈을 감고 있던 갈천혁과 혁마소.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서 잠을 청하고 있던 그들의 모습은 아침 이슬에 젖어 초라해 보였다. 그런 그들 곁을 자나 세차게 달리던 마차가 있었으니…….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이히히이잉.
마차를 타고 딸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던 이즈리스 남작은 우연히 길 한쪽 귀퉁이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으음? 우리 영지에 저런 행색의 사람들이 있었던가?”
“왜 그러세요, 아버지?”
그의 딸 로렌나가 아버지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물었고 이즈리스 남작은 곧 마부에게 소리쳤다.
“마차를 멈추어라!”
“넵!”
“아버지, 무슨 일인가요?”
“하하하. 우리 사랑스러운 로렌나는 신경 쓸 것 없단다. 단지 처음 보는 노인들이 있어 조금 마음에 걸리는구나.”
“처음 보는 노인들이요?”
이즈리스 남작은 마차에서 내려 갈천혁과 혁마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로렌나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버지를 따랐다.
마차가 상당한 먼지를 휘날리며 달려서 그런지, 그 먼지들은 갈천혁과 혁마소에게 묻어 상당히 지저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안 그래도 이슬 맺혀 있던 그들의 얼굴과 옷이 먼지까지 뒤집어썼으니 그 모습이 거지와 같았다.
이즈리스 남작은 무척이나 착한 마음씨를 가진 자로서, 영지민에게도 성자로 추앙받을 정도로 영지민 전체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자였다.
일반 영지에서는 영지민에게 걷어 들이는 세금이 상당히 컸다. 영지민이 벌어들이는 세금의 60%까지 영주에게 바쳐야 했으니 그 생활의 빡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어느 영지는 80%까지도 걷는 곳이 있었으니 그 영지의 발전은 눈에 띄게 빠른 발전 속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 뒤편으로는 굶어죽는 영지민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즈리스 남작이 이끌고 있는 자텐 영지는 영지민들이 내는 세금을 30%로 규정했으며 그 세금 모두를 몬스터의 초원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를 막는 일에 사용했다.
게다가 근근이 집 없는 영지민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곳에 썼으니 어찌 영지민들이 이즈리스 남작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이즈리스 남작은 갈천혁과 혁마소의 모습을 보고는 측은함이 들었다.
“나이도 많이 드신 분들이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잠을 청하고 있단 말인가… 혹,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닌지…….”
그 생김새는 달랐으나 잠시 아버지의 얼굴이 혁마소의 얼굴과 겹쳐졌다. 이미 신의 품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생각에 그리움 또한 밀려왔으니…….
이즈리스 남작은 생각할수록 점점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의 딸인 로렌나 또한 아버지의 그런 착한 심성을 이어받았는지 한쪽 가슴에 손을 대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즈리스 남작은 이 추운 날씨에 더 이상 그들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깨웠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일어나 보시오.”
이즈리스 남작은 혁마소를 흔들어 깨우려고 혁마소의 어깨에 손을 대려고 하는 찰나!
스팟!
“헉!”
혁마소의 눈이 번개같이 떠지며 이즈리스 남작의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혁마소에게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구냐?”
이즈리스 남작은 혁마소의 눈빛을 대하자 움츠러들었다.
‘이…이런 위압감이라니!’
이즈리스 남작은 떨리는 가슴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오? 이 날씨에 이런 곳에서 잠을 자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오.”
갈천혁도 누군가 자신들 앞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언제 잠을 잤냐는 듯 맑은 눈으로 이즈리스 남작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걱정하지 말게나. 이런 추위에 쉽게 화를 당할 사람은 아니라네. 그래도 이런 보잘 것 없는 노인들을 신경써주니 그 마음은 고맙군, 그래.”
영지 안에서는 영주가 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이즈리스 남작이 영지민에게 잘 한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이즈리스 남작을 우숩게 보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즈리스 남작은 이상하게도 갈천혁의 하대가 당연하다고 느꼈고 왠지 상당히 높은 사람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것이오? 생김새나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이곳 영지민이 아닌 듯한데…….”
이즈리스 남작의 물음에 역시나 갈천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왔네. 흠… 우선 제루이판이라는 곳에 있는 아크포민의 집에서 히매인 왕국을 지나 저 숲이 우거진 곳을 통해 이곳에 왔다네.”
갈천혁의 말은 무척이나 간결했으나 그것을 들은 이즈리스 남작은 순간 눈이 번뜩이는 듯했다.
“제루이판! 제루이판 왕국 말이오? 그리고 혹시 아크포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제루이판 왕국의 아크포민 공작을 말하는 것이오?”
“맞네. 그 녀석이 상당히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
“허…….”
이즈리스 남작은 어이가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믿을 수 없는 것들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히매인 왕국과 에드코르 제국의 전시상태가 아닌가.
게다가 그들이 가리키는 숲의 방향은 바로 몬스터의 초원이었으니…….
그들이 혹시 노망 난 늙은이들은 아닌가 생각하던 이즈리스 남작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기로 했다. 그들에게서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혹, 아크포민 공작과는 어찌되는 관계이신지요?”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존대를 해버린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그의 말에 혁마소가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내 제자다.”
“헉! 지금 아크포민 공작의 스승을 자처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마…말도 안 되는……!”
“무엇이 말이 안 된단 말이냐?”
이즈리스 남작은 역시나 이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자들이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인가? 흠… 모를 일이다. 아니면 내가 지레 겁먹고 잘못 느낀 것인가?’
하지만 자신이 느낀 위압감은 절대 헛것이 아니었다. 이즈리스 남작은 범상치 않은 이들에게서 반드시 진실을 알아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외람되오나 오러 블레이드를 보여주실 수 있는지요? 아크포민 공작의 스승이라면 당연 오러 블레이드는 만들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만약 당신이 정말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 수 있다면 지금 이곳 영지에 있는 동안 제가 직접 당신들을 극진히 모실 것입니다. 하실 수 있는지요?”
이즈리스 남작의 말을 들은 혁마소가 자신의 옷차림을 보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하. 지금 내 행색이 이러해서 네가 나를 시험코자 하는 것이냐? 오냐,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그 극진한 대접 한 번 받아보자꾸나.”
혁마소의 웃음이 왠지 불안한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검을 풀어 혁마소에게 주는 이즈리스 남작이었다. 그리고는 아직 검증이 되지 않았기에 평대를 쓰기로 했다.
“당신께 검이 없으니 우선 내 것을 쓰시오.”
“그딴 것은 필요 없다.”
“아니, 검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필요가 없다니!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오? 만약 지금까지 당신들이 말한 것이 모두 거짓이었다면 난 그대들에게 귀족을 능멸한 죗값을 물을 것이오!”
그에 혁마소가 이즈리스 남작을 비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네가 말하는 오러 블레이드라는 것이 내가 알기로는 검강을 일으키는 경지라고 알고 있다. 후후후, 잘 보거라. 강기는 꼭 검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멍청하다는 말에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와 터지려고 했으나 이즈리스 남작은 곧 그것들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혁마소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자 갑자기 붉은색 수강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헉! 저것은! 피…피스트마스터!”
“잘 보아라. 강기는 손에 만들면 수강이 되며 발에 만들면 퇴강이 된다.”
혁마소가 말을 할 때마다 붉은 색의 마나들이 손과 발 모두 생겨났다.
“말도 안 돼! 어찌 이런 일이……!”
“그리고 머리로도 만들 수 있으니 이리 하면 두강이 되겠구나. 크하하하!”
이러한 소란에 영지민들이 차차 그들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르지스 남작에게는 영지민들이 모여드는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즈리스 남작은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절대 사실이 아닐 거라고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혁마소가 일으키는 마나는 손에서 시작해서 발, 그리고 머리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마나들은 곧 혁마소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지, 진정 당신의 몸 주위에 있는 것이 오러란 말이오?!”
“쯧쯧쯧, 실력도 없는 것이 의심만 많아서는…….”
휘이익!
탁!
“억! 검이!”
혁마소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손을 뻗자 이즈리스 남작이 들고 있던 검이 혁마소의 손으로 날아왔고 이즈리스 남작은 어찌하여 검이 저절로 날아서 갔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혁마소가 이즈리스 남작의 검을 빼앗은 수법은 바로 허공섭물의 묘였다.
“지금 네 의심을 풀어줄 것이니 잘 보아라.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물건이 너에게 소중한 물건이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허허허.”
휘이익!
혁마소는 곧바로 검을 허공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볼 수 있게 아주 느리게 수강을 일으킨 손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스걱!
챙그랑!
챙그랑!
“거, 검이! 이럴 수가… 진정 오러란 말인가!”
검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이즈리스 남작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잘려진 검에게 걸어가 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곧 아주 날카롭게 잘려진 검을 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드워프가 만든 검이 이토록 쉽게 잘려지다니! 어찌, 이런 일이…….”
혁마소가 잘라버린 검은 바로 자텐 가문의 가보였으니 이즈리스 남작의 상실감 또한 무척 클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모여든 영지민들 또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도대체 어찌 된 것인지 몰라 서로가 수군거리며 묻고 있었다.
“우리 영주님이 왜 저 노인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인가?”
“낸들 아나? 근대, 지금 저 노인의 몸에서 붉은 빛이 나는 것은 나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나도 그렇게 보이니 자네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니구먼.”
“흠… 마법사인가?”
그러한 소란스러움과는 별개인 듯 혁마소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갈천혁이었다. 갈천혁은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자신들에게 좋게 풀릴 것만 같아 흐뭇한 웃음만을 지을 뿐이었다.
미칼투 대륙에는 며칠 사이에 엄청난 세 가지 소문들이 퍼져 나갔다.
가장 먼저 퍼진 소문은 바로 피스트마스터에 대한 소문이며, 피스트마스터가 히매인 왕국을 도와 에드코르 제국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에드코르 제국이 히매인 왕국을 칠 당시 에드코르 제국에 절반의 피해를 준 것은 돌연 갑자기 나타난 두 노인이었다는 것과 그들의 실력이 그랜드마스터의 그것과 같았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소문이 바로 그 두 노인이 몬스터의 초원을 지나 바로이탄 왕국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소문은 무척이나 과장되었던 것이었지만 그러한 소식을 들은 아크포민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크하하하! 역시 나의 사부님이시다! 그 대단한 에드코르 제국의 군대를 단 두 분이서 절반이나 격파하시다니! 크하하하!”
아크포민 공작은 진정 위대한 존재를 사부로 삼았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하여 웃고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정 라이안과 그의 할아버지들로 인해 미칼투 대륙에 크나큰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그 바람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